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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91) ─ 불꽃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3.05|조회수953 목록 댓글 14



 1863년 7월이 될 무렵, 이제 세계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태평천국의 미래가 이제 얼마 남지는 못했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무렵 천왕이 이수성에게 다시 한번 전투에 나서라고 명령했습니다. 쑤저우 방어를 지원하라는 것입니다. 이수성은 한달 가량 정세를 차분히 살펴보고는, 천경을 떠나기 직전 현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계획을 제안했습니다.


 이는 천경 안에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식량, 무기, 탄약, 화약을 비축하여, 난징을 명실상부한 천경이자, 진정한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경을 무적의 요새로 만들게 된다면, 서부 일대에서 무적의 전설을 휘날리고 있는 증국번과, 상승군을 이끌고 있는 이홍장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필사적인 감정이 그대로 느껴지는 이 계획은, 실현조차 되어보지 못하고 실패했습니다. 이수성의 말에 따르자면, 그것은 부패한 홍수전의 친척들 때문입니다. 천왕의 친척들은 주민들의 곡물구매를 금지했고, 곡식을 사려는 사람들에게 구매허가증을 판매했으며, 그 구매허가증을 사려면 또 통행증을 사야만 하게 했습니다. 이로 인해 벌어들이는 모든 재화는 천왕의 친척들이 자신들의 주머니에 집어넣었습니다. 가까스로 이 모든 절차를 거쳐 곡식을 찾는다 할지라도, 이 곡식을 난징으로 반입할때는 또다시 세금이 부과되었던 것입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쑤저우에 머물던 이수성은, 12월 무렵에는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는 청군을 막기 위해 천경으로 귀환했습니다. 청군은 태평군이 성 밖에 비축해놓은 수백 톤의 곡물을 빼앗고, 병사 1천여명을 사로잡은 데다 말과 노새까지 잔뜩 노획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수성이 떠난 직후 쑤저우는 청군의 손에 함락되었습니다. 


 청군은 본래 항복하면 사면해주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정작 태평군이 항복하자 모든 장수들을 배신하여 학살하고 민간인까지 공격했습니다. 이 일을 꾸민 사람은 이홍장의 부장으로, 그는 이홍장과 상의를 했습니다. 쑤저우의 태평군 장수 8명이 항복할때 보증인이었던 영국 군인 찰스 고든은 격노해 이홍장을 죽이겠다고 직접 총을 들고 그를 찾아다녔는데, 이홍장은 며칠간 병영을 피해 몸을 숨겼다가, 고든이 화가 누그러들자 다시 돌아왔습니다. 

 1863년 12월. 청군의 첫번째 공세를 저지한 이수성은, 그러나 모든 가능성을 검토한 결과 파멸적인 미래 밖에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수성은 천왕 홍수전에게 간청했습니다.


 "보급로는 끊어지고 성문은 막혀 있습니다. 천경 백성들의 사기는 굳건하지 않습니다. 또 노인과 아이들은 많은데 전투부대는 없습니다. 신료와 문관을 비롯해서 음식과 물자를 축내는 사람들 뿐입니다. ……천경 방어는 불가능합니다. 깊은 해자와 강력한 요새를 가진 증국번의 부대가 성에 근접해서 포위하고 있씁니다. 이제는 곡물도 바닥나고, 가축먹이도 남아 있지 않으며, 외부에서 구원병이 오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성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침착한 광인 홍수전은, 그 나름의 숭고한 신념으로 대답했습니다.


 "짐은 하느님과 천형 예수의 성스러운 명령을 받고 세상에 내려와, 하늘 아래 모든 나라의 유일하고 진정한 군주가 되었다. 짐이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네가 주청할 필요도 없고, 책임질 필요도 없다. 너는 너 좋을 대로 할 수 있다. 천경에 남고 싶으면 남고, 떠나고 싶으면 떠나라. 네가 짐의 무적 왕국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너를 대신하고 싶은 사람은 있다. 너는 군사가 없다고 말하지만, 하늘에 있는 짐의 병사들은 마치 물처럼 한없이 많다. 왜 짐이 요괴 증국번을 무서워해야 하느냐? 너는 죽음을 두려워하니 곧 죽을 것이다. 국사는 너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천경 남쪽에는 여전히 엄청난 숫자의 태평군이 청군과 격렬한 혈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청군의 포위망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력해졌습니다. 1864년 초, 간왕 홍인간은 군량미를 모으는 동시에, 여러 흩어진 태평군을 모아 천경을 구원하기 위해 태호(太湖) 근처로 파견되었지만, 한번 천경을 빠져 나온 태평군은 홍인간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천경으로 귀환하려고 하지 않았씁니다. 그리고 청군은 끊임없이 몰려들었고, 홍인간은 귀환이 불가능해졌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천경으로부터 320km 떨어진 후저우에 자신의 근거지를 세웠습니다.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낙담하고 있을 시간이 이수성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는 태평군의 장수였고, 천경의 수비를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1월 경, 이수성은 곡창지대인 창저우를 포위한 청군을 격파하고 식량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기습작전을 벌였습니다. 이 작전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수성은 또다시 새로운 계획을 전개했습니다. 각 태평군 지휘관 휘하의 4로 군대에 명하여, 장시 성까지 남하해서 군량미를 확보하게 한 것입니다. 


 4로군은 효과적으로 싸웠지만, 증국전의 진격을 저지할만큼 강력하지는 못했습니다. 증국전은 외국의 무장 증기선의 도움을 받으며, 서서히 각 도시에서 태평군을 소탕해나갔습니다. 1864년 2월 말, 온갖 노력과 집념을 다해 천경 근처까지 도착했던 14톤의 식량은, 천경의 성벽을 눈 앞에 둔 그 지점에서 청군에게 모조리 탈취당했습니다. 남은 석달 동안 천경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여러 보급창고들은 무력하게도 청군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이수성을 비롯한 태평군 장수들은 어떻게든 반격을 가해보려고 했지만, 청군은 이제 천경 근처에 사람 높이의 군사용 벽을 쌓고, 곳곳에 120개가 넘는 보루를 설치했으며, 보루마다 무장한 병력을 배치시켰습니다. 이제는 누구도 천경을 드나들 수 없었습니다.


 성 안의 식량 부족은 이제 심각해져가고 있었습니다. 간혹 태평군 병사들은 포위하고 있는 청군 병사들의 무관심 속에, 성벽 위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와 푸성귀를 캤습니다. 혹은 성 안에서 도망친 소수의 사람들은, 청군이 마련해 놓은 난민시설로 향하였습니다. 이는 증국전이 만든 것으로, 선전용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성 안에서는 빈민이 빈민을 압제하는 혼돈의 물결이 퍼져 나가고 있었고, 성문을 감시하는 패거리들은 탈출하는 사람들의 보물만 빼았고 그들을 불확실한 운명 속으로 풀어주었습니다. 성 내에서 도망친 여자들은, 특별한 수용소에 인계되었습니다. 찰스 고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골사람들은……원하기만 한다면 이 여자들 중 누구라도 아내로 삼을 수 있다."


 포위망은 육지에서만 세워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하천에는 청군의 감시망이 펼쳐져 있었고, 간혹 그런 감시망을 무시할만큼 배짱 좋은 서양인들이 비싼 이윤을 기대하며 위험천만한 모험을 벌일떄는, 다시 이들을 노리는 다른 서양인 무법자들의 습격이 이어졌습니다. 


  위대한 역사를 자랑하고 있는 거대한 도시, 남경은 성을 포위하는 병사들의 보루와 성 내에서 이를 저지하려는 사람들로 인하여 누더기가 되어갔지만, 치열한 싸움은 거대한 성벽 아래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더 아래, 햇볓조차 들지 못하는 지하에서도 개미같이 몰려든 사람들은 서로를 죽이고, 또 죽였습니다. 청군 지휘관들은 여러 개의 땅굴을 파고 병사를 들여보냈는데, 태평군은 이에 대해 방어용 땅굴을 파거나, 오염된 물을 뿌리면서 육박전을 벌였고, 이에 청군 지휘관들은 여러 대의 풀무를 이용해서 땅굴 속으로 독한 연기를 불어넣었습니다. 30개가 넘는 거대한 땅굴이 이어지고 있었고, 찰스 고든은 그 규모의 어마어마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우리는 갱도를 따라 내려가다가 약 140m를 뚫고 나간 땅굴 하나를 발견했다. 그 폭은 1.2~1.5m 정도이고, 높이는 약 2m였다. 이 땅굴은 성벽에서 2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여러 갈래로 나누어졌으며, 통풍을 위해 간격마다 작은 환기구멍이 있었다. 목재와 관목을 사방에 둘러 땅굴의 압력을 지탱했고, 매일 4.5m 정도씩 파 들어갔다."


 어떤 땅굴은 성 정면에서 고작 30m 거리 밖에 나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로 가까울 경우, 대포를 집결시켜 쏘아댄다면, 땅굴공사를 방해하는 태평군 수비대에게 재앙을 안겨줄 수 있습니다.


 이수성은 애타운 마음으로 홍수전에게 간청했습니다.


 "성 안 전체에 양식이 없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저에게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그러나 굶주림도 홍수전에게 두려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는 출애굽기 16장에서 하느님이 굶주린 이스라엘 어린이들을 위해 만나를 뿌려주셨던 일처럼, 천경 내부의 사람들은 모두 만나를 먹으라고 명령했습니다. 만나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성경에서는 그것이 작고 희며, 깟씨 같은 향기가 나고, 꿀 같은 맛을 지녔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홍수전은 말린 푸성귀를 따서 그것을 요리해 먹었습니다.1864년 4월, 그는 곧 몸져 누웠고, 잠시 회복했지만 5월에는 곧 재발했습니다. 병명은 정확하지 않았지만, 이수성은 당연히 "만나 복용" 과, "병중에서 치료를 받으려고 하지 않는" 태도가 문제였다고 말했습니다. 5월 30일, 홍수전은(혹은 그의 이름을 빌린 누군가는) 조서를 내려, 이제 자신이 천국을 방문할 때가 되었으며, 천부와 천형께 천경을 지켜줄 천군을 보내달라고 간청할 것임을 알렸습니다.


 1864년 6월 1일, 홍수전은 조용히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한떄 전중국의 절반을 유린했던 그였지만, 죽음을 애도하는 거창한 장례는 없었씁니다. 궁녀들은 황색 비단으로 지은 간소한 수의로 그의 시슨을 감싼 다음, 평지에 매장했습니다. 그는 곧 천국에 올라갈 사람이므로, 관도 필요 없었습니다. 홍수전이 사망하고 난 5일 뒤, 그의 아들인 홍천귀복은 아버지의 권좌에 올랐습니다. 청군이 마지막 맹공을 치밀하게 계획하는 6주 동안, 그는 재위기간을 가졌습니다. 이수성은 이 당시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주가 즉위한 이후, 병사들에게는 줄 곡식이 없었고, 군대는 그야말로 혼돈상태였다……군주는 어렸고, 판단할 능력이 없었다. 문관과 무관을 막론하고, 천경에는 해결책을 생각해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최후가 다가오기 직전, 이수성이 벌인 마지막 저항은, 아직 홍수전이 생존해 있던 5월 15일의 일이었습니다. 이수성은 결사대를 이끌고 갑작스레 성문을 열고는, 수만대군이 버티고 있는 증국전의 병영으로 돌격해 불을 지르고 크게 소리를 질렀씁니다. 관군은 지쳐 있다가 부지불식간에 이런 상황을 맞이하자 혼란에 빠졌고, 하마터면 완전히 무너질 뻔했지만 결정적인 순간 원군이 도착하여 안정을 찾았습니다. 양계초는 이 날의 전투에 대해, "하늘이 증국전을 도왔기 때문." 이라고 평론했습니다. 


 역으로 말하자면, 이수성의 하늘은 그를 버렸습니다. 


 1864년 7월 19일 한낮, 증국전은 남경 동벽 아래 뚫어놓은 땅굴에 폭파신호를 보냈습니다. 곧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대형구조물들은 무려 50미터나 공중으로 날아가버렸고, 무너진 성벽으로 청군은 쏟아지듯 진격해들어왔습니다. 태평군은 그들을 저지하려 했지만, 곧 대혼란과 후퇴, 살육이 벌어지는 지옥도가 펼쳐졌습니다.


 새로운 군주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자신을 붙잡는 네 명의 어린 아내들을 뿌리치고 두명의 동생과 함께 말을 탄 채 도주했습니다. 하지만 길이 막혀 그들은 번번히 방향을 빠구다가, 버려진 사원에 몸을 숨기고 밤중을 틈타 도주했습니다. 청군은 처음에는 성안에서 학살과 겁탈을 하느라, 나중에는 그 부끄러운 흔적을 없애버리기 위해 아예 불을 지르느라 이들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혼란 속에 홍천귀복의 두 동생은 뒤처지게 되었고, 이날 희생된 수만명 중에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청군은 태평군 중 건장한 이들은 자신들의 약탈품을 들게 하기 위해서 살려주었고, 대신 물건을 들 힘이 없는 이들은 모조리 학살했습니다. 길 가운데 죽은 시체의 9할은 노인이나 40세를 넘긴 여자들이거나, 2,3세도 되지 않은 아이들이 장난삼이 살해되었습니다.


 몸을 피한 사람 중에는 이수성도 있었습니다. 도주하는 와중에 이수성의 말이 지쳐 쓰러졌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에게 눈길 조차 주지 않고 전속력으로 질주했습니다. 지치고 비참한 기분 속에 이수성은 인적 없는 사원으로 몸을 피했고, 어떤 경계를 하기도 전에 눈을 감았습니다. 깨어났을때 그는 자신의 귀중품들이 마을 농민들에게 도난당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곧 다른 농민들이 들이닥쳤는데, 그들은 이수성이 단 한푼도 없다는 사실에 격분해 그를 잡아다 청군에 넘겨버렸습니다.


 


  사로잡힌 이수성은 증국전의 진영으로 넘겨졌고, 곧 후대에 기록을 남기기 위해 길고 긴 자술서를 작성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수성자술(李秀成自述) 입니다. 모든 역사를 기록한 이수성은 이제 처형이 되었는데, 죽기 전에 그가 남긴 말은 "천경에서의 학살을 중단해 주도록" 하는 부탁이었습니다. 또, 태평군이 노병들이 고향인 광시로 돌아다, "부디 장사라도 할 수 있도록" 선처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만약 당신들이 그들을 풀어준다면, 저항하고 있는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투항할 것입니다."


 이수성은 또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외국인들로부터 가장 좋은 대포와, 가장 효율적인 포를 사십시오. 둘 중 하나가 없다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다음에는 가장 우수한 중국인 공장을 찾아서 그 대포와 포를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복제하게 하고, 아울러 그 복제방법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십시오. 그리하면 한 명의 기술자가 열 명을 가르칠 수 있고, 열 명의 기술자가 백 명을 가르칠 수 있어 우리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기술을 알 수 있습니다. 외국 요괴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먼저 대포를 사서 미리 준비를 해야 합니다. 틀림없이 그들과 전쟁을 벌이게 될 것입니다."


 미래에 있어서, 태평천국의 역할에 대해서는? 이수성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천국은……막을 내렸습니다. 선대 천왕의 시간이 끝나기 때문입니다. 백성의 운명은 고달팠습니다. 그렇게 고달픈 운명이었다니!"


 그렇다면 어쨰서 그렇게 오랫동안, 또 그렇게 끈질기게 그는 천왕을 도왔던 것인가? 이수성의 자백은 대답 중간에 끊겼습니다.


 "실은 내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해 했다면……"


 이 무렵, 홍천귀복은 후저우에 있는 홍인간에게 도착했습니다. 홍인간의 부대는 규모가 작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고립된 병력이었습니다. 천경이 함락됨에 따라 많은 청군이 그곳으로 몰려들었고, 그곳에는 이홍장과 상승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배반한 태평군 장수들도 있었습니다. 이제는 거리낄 없이 아편을 피우게 된 그들은, 과거의 동지들을 향해서 공격을 가했습니다.


 후저우 내에는 아직 소수의 외국인 용병들이 태평군을 위해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삭막하고 불안정한 분위기 속에, 후저우로 들어가는 온통 손발이 찢긴 시체들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무더위가 번지면서 사람들이 쓰러졌고, 쓰러진 시체들 사이에서 콜레라가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1864년 8월 말, 홍인간과 홍천귀복은 후저우를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목적지는 알 수 없습니다. 남쪽으로 달아나던 그들은, 10월 경 청군의 기습을 당하면서 흩어졌습니다. 10월 9일, 홍인간은 먼저 생포되었습니다. 심문을 받는 와중에, 홍인간은 천왕 홍수전의 특별함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나보다 아홉 살 연상이며, 비범한 총기를 타고 났소. 무엇이든 한번 보기만 해도 결코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소."


 11월 23일, 홍인간은 장시 성에서 처형되었습니다. 홍인간이 생포될때 도망쳐서 구덩이 속에 숨어 있던 홍천귀복은 두려움과 외로움, 그리고 배고품에 몸서리를 치다가, 갑자기 "키가 훤칠하고 온몸이 눈처럼 하얀 사람이" 주고 사라진 떡 한개를 먹고 다시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10월 25일, 결국 청군의 순찰대에게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자비를 부탁하며, 자술서를 썻습니다. 그는 홍수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노천왕께서는 저에게 이르시길, 종교서적들을 공부하라고 하셨습니다. 고대 경전들은 모두 요괴의 책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몰래 30여 권 남짓 읽을 수 있었으며, 지금도 그 목차와 내용의 일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국의 정복은 노천왕의 야망이었습니다. 저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저의 가장 큰 소망은 만약 석방된다면, 잡념을 다 버리고 유교경전을 공부해서, 가장 낮은 학위를 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이러한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1864년 11월 18일, 열다섯 생일을 일주일 앞두고 있던 홍천귀복은 처형되었습니다.


 1864년이 다 끝나기 전까지, 천왕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핵심 측근이었던 모든 왕, 즉 북왕, 동왕, 남왕, 서왕, 익왕, 간왕, 충왕, 그리고 유주 홍천귀복까지 모든 왕들은 이 세상에서 사라졌습니다. 하느님, 홍수전의 천부는 아들의 죽음을 슬퍼할만 하건만, 아무런 징후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형인 예수 역시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이 이야기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돌려 1년전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1863년 6월 중순, 이수성이 자신의 부하들이 양쯔강에서 학살되는 광경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 있었을떄, 그 장소에서 1,600km 떨어진 사천 성에서는 익왕 석달개가 청군에 투항하고 있었습니다.



 1857년 남경을 떠난 이후, 석달개는 꾸준히 소모적인 전투를 벌여왔습니다. 처음에는 영구적인 근거지를 찾기 위해, 나중에는 그저 생존을 위해서 15개의 성을 넘나들었으며, 9,600km 이상을 돌아다녔습니다. 그 사이 석달개의 충성스러운 병사들은 전사, 질병, 탈영 등으로 점점 감소했습니다. 


 6월 13일, 군대가 대도하(大渡河) 부근에서 저지되자, 석달개는 청군 지휘관이 버티고 있는 막사를 향해, 자신의 두 발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습니다. 항복하여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단지, 그 긴 세월 동안 자신과 함께하며 고생했던 2천여명의 병사들에 대해, 선처를 부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미 석달개는 항복하기 전에 어린 자식들을 대야의 물에 얼굴을 박아 죽게 했고, 아내들도 자결하도록 했습니다. 석달개는 태평군의 다섯 왕 들 중 한명이므로, 그가 항복한다고 해서 살아날 가망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는 가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석달개는 자신들의 가족들이 겪을 수치와 고통을 줄여주고자 했습니다.


 석달개를 심문한 사람은, 과거 장사에서 태평군을 방어했던 낙병장이었습니다. 석달개는 6주 동안 지독하게 심문을 당했고, 최후에는 능지처사(凌遲處死)에 처해졌습니다. 하지만, 사람으로서 겪을 수 있는 최악의 공포와 고통에도 불구하고, 석달개는 신음소리 조차 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몸이 찢어지고 살곁이 발라나간 석달개의 고통은, 의미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청군은 석달개의 부하 2천여명을 모조리 학살했습니다.


 홍군(紅軍)의 유명한 지휘관 중에 주더(朱德)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고난했던 어린 시절을 거쳐 군벌이 되고도, 가진것을 버리고 혁명에 종사했던 인물인데, 그 과정에서 지위란 마오쩌둥에 버금가는 사람입니다.(이런면에서 볼때, 소위 '10대 원수'에 주더가 포함된건 의아한 일입니다. 기본적으로 그는 다른 아홉명과 같이 언급되기에는 너무 급이 높습니다. 혹 마오쩌둥이 그를 견제하기 위한 행동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훗날 중공이 건국된 후에 그의 동료들이 권력과 부귀 다툼을 벌이며 구정물을 쓰고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할때, 혁명 이후 일찌감치 전면에서 손을 때고 있던 그는 비교적 구정물을 많이 덮어쓰진 않았습니다.


 그 주더는 한 회고에서, 태평군에 대한 나름의 기억을 떠올려 말했습니다. 그때 주더는 '강아지' 라고 불리우는 꼬마였고, 무명을 짜는 늙은 직인에게 이야기를 듣는 일을 좋아했습니다. 객가 출신의 그 노인은 스스로 태평군에 있었다고 말했는데, '강아지' 가 앉아서, "베 짜는 할아버지, 이야기 좀 해줘요." 라고 하면,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젊었을때, 수많은 남자와 여자들이 태평군 총사령관인 충왕 이수성을 따랐는데, 그는 청조나 천박한 향신, 외국 오랑캐에게 절대로 굴복하지 않았어. 내가 속한 부대의 지휘관은 석달개였는데, 그는 학식이 풍부하고 왕으로 봉해졌음에도 사람들이 자기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식의 고두를 일체 하지 못하게 했지…… 석달개가 우리 군대를 이끌고 남쪽 지방을 휩쓸면서 서진하자, 만주 오랑캐들은 추풍낙엽으로 흩어졌단다. 사람들은 석달개를 익왕이라고 불렀는데, 그는 사람들을 모아놓고서, 실제로 땀흘려 일하는 농민들에게 땅을 분배해 줄 것이니, 더 이상 토지는 늑대같은 지주들의 소유가 아니라고 선언했지."


 "사람들은 큰 잔치를 베풀고 우리에게 머물러 달라고 간청했지. 이들은 익왕에게 은을 바쳤지만 그는 그것을 우리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했지. 우리는 만주 오랑캐들을 사천성과 중국 전역에서 물리쳐야 했기에 머물 수가 없었어. 석달개가 이런 뜻을 몇 차례나 설명했는데도 막상 우리가 출발하려고 하면 사람들이 익왕의 말 안장에 매달려 울고불고 하는 바람에 발길을 되돌려 하룻밤을 묵곤 했지. 적은 우리를 도적때나 비적이라고 불렀지만, 그러나 백성들은 달랐었다. 어느 고을에 부유한 지주가 있었는데, 그는 석달개에게 잘 보이려고 은 한 상자와 젊은 여자종을 바쳤지. 그러자 석달개가 격노해서 호통을 쳤단다.


 '그대는 내가 관리인줄 아는가? 그대에게 명령하노니, 땅은 소작농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 부리는 종은 모두 자유롭게 풀어주어라, 그리고 그대가 가진 돈은 모조리 이 종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해라!'"


 "우리 군대가 허물어진 곳은 다름아닌 대도하에서 였지. 나는 그곳에 없었어. 내가 속한 부대는 동쪽에서 성도를 포위하기 위해 사천성으로 진격했고, 석달개가 지휘하는 4만여명은 서쪽에서 진격중이었지. 석달개의 군대는 대도하에서 수천명을 잃었고 또 일부는 먹을 것도 없는데다 항복하기보다는 차라리 죽는것이 낫다 하여 자살한 경우도 많았지. 익왕 석달개의 예봉이 그만 대도하에서 꺾이고 만 셈이지."


 "익왕 석달개는 가슴을 저미는 듯한 고통을 이겨내지 못해, 홀로 바위투성이의 들판으로 나가 무릎을 꿇고, 당시 그와 많은 사람들이 믿던 하느님에게 기도했단다. 하지만 하느님은 아무런 계시도 내리지 않아 그는 흐느껴 울 뿐이었지. 석달개는 근처에서 곡괭이로 밭을 파는 가난한 농부에게 입을 열었단다.


 '이보시오, 내가 석달개요! 만주인들에 내 목에 거액의 현상금을 걸어놓았오. 자, 내 칼로 내 콕을 베어 가져가면 더 이상 가난에 시달리지 않을 게요.'


 불쌍한 농부가 무릎을 꿇고 앉아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애원하자, 석달개는 그를 붙잡아 일으키고는 이렇게 말했지.


 '앞으로는, 누구에게도 머리를 조아려서는 안된다오.'"


 "하느님께 버림받은 석달개에게, 그의 넷째 딸은 익왕과 용모가 비슷한 남편이 투항하는 동안, 익왕께서는 탈출해서 최후의 승리를 도모해야 한다고 호소했지. 그 말을 쫒아 석달개는 탈출하고 넷째 딸의 남편이 만주 오랑캐들에게 끌려가 참살당했는데, 성도 총독 낙병장이 그를 석달개로 착각했던 것이지. 익왕은 수도승처럼 머리카락을 완전히 밀어버리고는, 머리가죽에 상처를 낸 다음 누런 승복을 거치고 스님으로 변장했지. 그는 사천성 중부로 갔지만 우리 부대를 찾을 수는 없었단다. 그때는 우리 부대도 궤멸되었거든. 나는 베틀장이로 되돌아갔지."

 "1년 후에 태평천국의 수도인 남경이 만주족의 청조 군대와 외국 오랑캐들에게 함락되어, 총사령관인 충왕 이수성이 증국번에 사로잡혀 한밤중에 살해되었지. 충왕은 사람됨이 진실되고 고결하며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어. 그는 그야말로 천하에 둘도 없는 호걸이었지. 만주와 외국 오랑캐들은 남경을 점령한 후 3일 동안 밤낮을 기맂 않고 백성들을 학살했지만, 태평군은 단 한 사람도 항복하지 않았어."


 그렇게 말하고 입을 다물어버리면, 수없이 들어서 그 뒷이야기를 훤히 알고 있는데도, 누군가가 "그래서 석달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고 물으면, 다시 늙은 직은 입을 여는 것입니다.


 "어용학자들은 만주 오랑캐들의 청조에 붙은 증국번이 위대한 장군이자, 대학자로서 우리를 굴복시켰다고 떠벌리지만, 우리를 패배시큰 것은 외국제 총포였어. 달이 없는 캄캄한 밤이 되면, 지금도 대도하의 나루터와 투항자가 학살된 마을에서는 태평군의 혼백들이 구슬피게 우는 소리가 들리지."


 "그 이후 많은 사람들이 석달개의 모습을 목격했지. 얼마 전에는 가정의 민강 나루터에서 두 사람이 그를 보았다더군. 뱃사공이 배를 밀어 뛰우려는데, 흰 수염을 길게 기르고 한 손에 부채를 든 노인이 다가와서 돈이 없는데 배를 태워줄 수 있겠는가, 라고 물었지. 뱃사공이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이오.' 라고 대답하자 노인이 입을 열었어.


 '지금 배를 띄우면 폭풍이 몰아쳐 배가 가라앉을 것이오.'


 하늘에는 구름 한점이 없었는데 뱃사공은 깜짝 놀랐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니 산 위로 시꺼먼 구름이 뭉게뭉게 솟아오르고 있었어. 그는 배를 묶어두고 근처의 주막으로 갔는데, 자리에 앉기도 전에 폭풍우로 배들이 산산조각이 났어. 깜짝 놀란 뱃사공이 누군시고 하고 묻자, 노인이 이렇게 대답했다지.


 '무슨 의미가 있겠소? 내가 사실대로 이야기한다면 당신은 크게 놀랄 거요.'


 폭풍이 끝나 세 사람은 강을 건넜는데, 노인은 서둘러 떠나는 바람에 부채를 두고 내렸지. 부채를 집어 펴보니 익왕이란 이름이 적혀 있었어. 익왕이란 중국에 하나밖에 없지 않나."


 그렇게 이야기를 마치고 나면, '강아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그 사람은 진짜 석달개인가요, 유령인가요?"


 "유령이건, 사람이건 마찬가지 아니겠느냐?" 그렇게 대답한 노인은 석달개의 애창시 하나를 읆조리는 것입니다.  


 채찍을 휘두르며,
 승리의 비애 속에,
 중원을 넘었으나,
 증오도, 보은의 염도 내 마음을 흔들지 못하는구나

 하늘이 얼굴을 돌리고 가슴을 닫으면
 낸들 빈 손으로 어찌 백성을 구할 수 있겠는가?
 3군의 장병들이 말고삐를 잡고,
 기진한 말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병든 원숭이처럼,
 1만 명이나 떼지어 산을 오른다

 수백만의 백성들이 신음하고 있지만,
 내 뜻은 아직도 성취되지 못했네
 동남쪽을 향한 모든 얼굴은
 흐르는 눈물로 얼룩져 있네



 이러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비단 당시 전중국에 주더 뿐만은 아닐 것입니다. 농민들은 석달개가 죽었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비록 지금의 나는 고통받고 있지만, 지주에게 굴복받고 세금에 무너지고 외국인에 압제받고 있지만, 그러나 석달개는 아직 살아있다고,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것만이 보상이 될 것이라고 여기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석달개는 끌려갔고, 처참하게 도륙되어 죽었습니다. 석달개는 죽었고, 육신조차 찢겨져 제대로 남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차마 이런 이야기는 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믿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석달개에 대한 온갖 전설이, 실제의 그에 비해 부풀려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그게 중요한건 아니었습니다. 실제 석달개건, 혹은 농민들이 지어낸 전설로 덧붙여진 석달개건, 중요한건 희망을 주는 존재라는 부분입니다.


 중국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전대 역사의 많은 농민봉기는 온갖 의미로 꾸며지고 높여졌습니다. 태평천국 운동에 대한 중국 내 평가 역시 그러한 추세를 벗어나진 않을 것입니다. 태평천국의 봉기를 계급 혁명으로 치부하기에는, 그 발단도, 그 동기도, 그 전개도, 그 모습도 모두 갑작스러웠고, 우발적이었고, 불안정 했습니다.


 그러나, 훗날 이어지는 진정한 의미의 '혁명' 에, 이 태평천국 운동과 그 자취가 어떻게든 관여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움직임의 시작을 태평천국 운동에서부터 찾으려고 한다면, 그 점은 동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이 남았는가? 14년간 이어진 지상의 왕국은, 결국 천국 대신 더욱 끔찍한 지옥만 세상에 만들어 놓았습니다. 설사 홍수전과 그 동료들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원시적인 혁명의 자취가 있다 해도, 2,000만명의 희생자를 남기고 처참하게 실패로 끝난 이후, 그것이 남긴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태평천국 운동은 하나의 불꽃이었지만, 불꽃은 결국 언젠가는 사그라드는 법입니다. 


 하지만……


 태평군의 모든 왕들이 죽고 난 후에, 각지에서 남아 있던 태평군은 차례대로 소탕되었습니다. 1866년 광동 동부의 가응(嘉應) 에서 벌어진 전투는 그 모든 싸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일이었습니다. 1만명 이상이 죽은 이 전투에서, 한 명의 태평군 병사는 탈주에 성공했습니다. 본래 서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는게 본업이었던 그는 추형(翠亨)이라는 마을에서 선생으로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스레 그 선생은 태평천국의 의지와 영웅담으로, 서당의 어린이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어떤 아이에게는 단순히 흘러 들을만한 재밌는 이야기 일 수 있지만, 또다른 아이에겐 그 꿈결같은 이야기들은, 하나의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있을 수도 있는 법입니다. 


 그 태평군 출신 선생은, 그런 영웅담에 귀를 기울이는 쑨원(孫文)이라는 아이가, 훗날 그들조차 이루어 내지 못한 그 일을 해내게 될지, 그 시점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불꽃은 언젠가는 사그라 듭니다. 태평천국의 불꽃은 사그라들었지만, 이어지는 역사의 불꽃은 절대로 사그라 들지 않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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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무장공비 | 작성시간 13.03.07 수단에서 끔살
  • 답댓글 작성자배달민족 | 작성시간 13.03.08 그 고든 죽는 옛날 영화도 있었죠 ㅋㅋ
  • 작성자열혈청년 | 작성시간 13.03.06 사이비교의 종말이군요.
  • 작성자뉴에이지 | 작성시간 13.03.07 이야~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솜씨가 아주 ㅎㄷㄷ 합니다. 항상 재미있게 잘 읽고 있습니다.
  • 작성자Reichskanzler | 작성시간 13.03.09 비록 실물은 가더라도 꿈은 남는 법인가보군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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