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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94) ─ 좌종당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3.24|조회수638 목록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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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쿱 벡


 시간을 거슬러, 태평군의 천경이 함락되고 부질없는 꿈이 모래처럼 사라질 무렵, 난징에서부터 멀고먼 중국의 서부에서는 황야의 이리 한 마리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야쿱 벡. 코칸트 한국(Khoqand Khanate)의 인물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갑자기 등장하게 된 이야기는, 약간의 곡절이 있습니다. 


 청나라가 중국의 절반을 장악한 태평군과 치열하게 교전을 벌일 무렵, 제국의 가장 먼 서북 변방에서는 온갖 무슬림 봉기군과 지역 유지들, 각지에서 힘 좀 쓴다는 군사세력의 난립으로 대혼란의 상황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단일된 거대한 저항이라기보다는, 청의 지배력이 극도로 악화된 상황에서 자기들끼리의 대결에 가깝기 때문에, 만약이 당시에 군사 실력을 서북에 과시했다면 진압은 그리 어렵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태평군을 상대하던 청나라는 그런 '변방' 의 일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 무슬림 봉기에 대한 이야기도 꽤 분량을 차지할만 하겠지만, 일단은 넘어가겠습니다. 요지는, 그런 혼란속에 신강 이웃의 코칸트 한국이 신강 지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당대 중앙아시아에는 히바, 부하라, 코칸트라는 세 개의 한국(Khanate)이 있었습니다. 주민은 우즈베크족이 많았고, 어느 곳이나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나라였습니다. 이들에게 있어 불행한 일은, 제정 러시아의 팽창 정책이 가속화되었다는 점입니다.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하는 부하라 한국은 1868년 러시아에 합병되었고, 1873년에는 히바 한국도 제정 러시아의 보호국이 되었습니다. 보호국은 단순히 허울좋은 제국주의의 명분이고, 실제적으로는 러시아의 영토가 된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이런 혼란 속에, 당시 신강에서 키르기즈인들에게 반기를 들었던 카쉬가르의 무슬림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신강에 영향력을 떨치고 싶어했던 코칸트 한국에서 보낸 인물이 야쿱 벡이었던 것입니다. 즉, 이 당시 야쿱 벡의 임무는 키르기즈 인들을 도우면서 신강에 코칸트의 영향력을 넒히는게 자신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임무는, 상황의 변화로 인해 묘한 형태로 바뀌게 됩니다. 우선, 본국의 일이었습니다. 코칸트 한국은 결국 러시아의 압도적인 압력을 베겨내지 못하고 무너져버렸습니다. 야쿱 벡은 지원세력이 사라진 셈이었는데, 그렇다고 이제 와서 돌아간다고 쳐도 모스크바의 가공할 권위 앞에 버틸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두번째로, 당초에 야쿱 벡이 신강에 온 이유였던 카쉬가르의 무슬림들은, 정작 그가 도착하기 전에 키르기즈 인들에게 이미 항복해버렸습니다. 키르기즈를 도와 무슬림 반란군을 격파하기 위해 왔는데, 이미 상황이 끝이 나버린 셈입니다.


 그때, 무슬림 반란군들은 오히려 역으로 야쿱 벡과 협력하기를 원했고, 이렇게 된 상황에서 야쿱 벡은 동조자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찾아내고 신강에서 자신의 군사 실력을 과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신강에서 여러 세력이 난립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유목민 군대의 성격에다 정규군이었던 야쿱 벡의 코칸트 군단에 비해서는 오합지졸이나 다를 바 없었기에 그는 적은 숫자의 병력으로도 연전 연승을 거두면서 승승장구 했습니다.


 마침 1864년에는 청나라가 타르바가타이 통상의정서 때문에 러시아에게 자이산, 노르 이서 44평방 킬로미터의 땅을 빼앗긴 상태였습니다. 러시아의 압력, 코칸트의 야쿱 벡, 신강의 혼란. 이를 가장 염려스럽게 보았을 사람은, 물론 새방파의 거두인 좌종당이었습니다. 좌종당은 1866년 섬감총독(陜甘總督)이 되었습니다.


 좌종당



 그전에 좌종당은 민절총독(閩浙總督) 이었습니다만은, 새방파인 그로서는 절강이나 복건에서 근무하기보단, 이 서북의 변방에서 근무하는 편이 훨씬 보람찼을 것입니다. 그런데 서북이라곤 해도, 그 군단을 먹여 살리려면 결국 강남에서 수송되는 군량미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양강 총독 증국번과 좌종당은 이 시점에는 이미 얼굴도 서로 마주 보지 않을 사이였습니다.


 혹시 강남에서 군량미를 보내지 않을지도 모른다. 좌종당은 이렇게 걱정했습니다. 하지만, 증국번은 그렇게 비열한 인물은 아니었고, 지원은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좌종당이 군사를 이끌고 진군하게 된것은 한참 후, 증국번도 사망한 후인 1875년이나 된 시점이었습니다. 섬서와 감숙 지방, 회민(回民)의 반란 등이 이유였습니다.


 여하간에 간신히 좌종당이 그토록 마음 먹은 서북의 안정을 취해 출병하려고 할 무렵, 뜻밖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감숙으로 지원이 오기로 했던 병력이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당시 직례 총독 이홍장이 재상의 자리에 올라와 있었는데, 일전에 말했다시피 그는 해방파입니다. 헌데 이 시점에서 작년 무렵에 류쿠의 도민이 살해된 일을 이유로 일본이 사이고 쓰쿠미치(西鄕從道)등을 파견해 원정군을 대만에 대한 군사적인 압력을 가했던 것입니다.


 해방파인 이홍장으로서는 자신이 상상하고 있던 '바다로부터의 압력' 이 현실화되자, 당연히 이쪽에 신경을 쏟기 시작했습니다. 이홍장은 소위 '심장부 보호론' 을 내세웠습니다.


 "신강은 중국의 말단이므로, 좀 떨어져 나가도 목숨에 별다른 지장은 없다. 그에 비하면 동남의 연안 지방은 중국의 심장부에 가까우므로, 중점을 두어야 한다."


 일단은 대만의 일때문에 주장하는 이야기지만, 사실 이러한 논지는 해방파의 기본적인 사고 방식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신강은 쓸데없이 문제만 일으키는 변방일 뿐이었습니다. 심지어 해방파 중에서는 '신강 포기론'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좌종당과 같은 새방파에게 있어, 이는 자신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내키지 않으면 증국번과의 친분도 끊어버릴 정도로 자존심이 강했던 좌종당에게 있어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는 강렬하게 항의했습니다.


 "신강이 중요한 이유는 몽골을 유지하기 위함이고, 몽골을 유지하는것은 수도를 유지하는 위함이다."


 즉, 서북에 대한 포기는 곧 베이징에 대한 압력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과거 명나라 시절등에는 베이징에 대한 유목민의 압력이 대단히 강력했지만, 이 시점에서는 사실 무리가 있는 주장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좌종당은 이러한 이유로 '신강 역시 중국의 말단이 아닌, 포기하면 목숨에 지장을 줄 수 있는 심장부' 라는 논지를 내세워 마침내 정예군단을 이끌고 출격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 당시 상황을 지켜보던 두개의 강력한 열강이 있었습니다. 첫번째는 러시아였고, 두번째는 영국이었습니다. 러시아는 이 지역에 별도의 세력이 있는것이, 러시아에 대한 완충지대가 될 수 있다고 여겨 야쿱 벡 정권을 지원했습니다. 러시아나 영국이나 기본적으로 청나라의 역량을 바닥으로 보고 있었기에, 청나라가 군사적으로 승승장구 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좌종당은 그런 짐작을 무색하게 연전연승을 하며 파죽지세로 진군했습니다. 당초에 야쿱 벡 정권과 청나라는 '적당한 선' 을 두고 협상을 벌였지만, 현장에서 청나라가 우위를 가져가자 청은 협상에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습니다. 하지만 야쿱 벡은 어떻게든 청나라와 협상을 벌여야 한다고 여겨 전투에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때문에 좌종당은 더욱더 승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결정적으로 1877년 야쿱 벡이 사망하자, 좌종당은 거의 승리를 확정짓게 되었습니다.


 당시 주청 영국 공사였던 토마스 웨이드라는 인물은 이에 대해 실망감을 보였습니다. 영국은 앞서 말했듯이 카슈가르, 야르칸트, 호탄 근방에 완충지대를 만들려고 했기 때문인데, 그 완충 지대를 담당할 야쿱 벡 정권이 무너져버린 것입니다. 웨이드는 좌종당이 서북에서 전투를 치룰때, 청나라 조정을 끊임없이 설득하며 전투를 그만두라고 요청했습니다. 조정에서는 좌종당에게 하문을 내렸지만, 좌종당은 분개하여 소리쳤습니다.


 "영국이 그토록 완충용 독립 정권의 존재를 바란다면, 인도가 광대하므로 그 일부를 떼어서 만들면 될 일 아닌가? 청국의 비옥한 땅을 거기에 할애할 이유가 없다!"


 이렇게 말한 좌종당은 조정에서 뭐라고 하던지 간에 전부 무시하고 계속해서 공격을 퍼부었고, 마침내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영국은 아무것도 못하고 그 광경을 바라만 보고 있어야 했스빈다. 


 문제는 이제 러시아가 되었습니다. 러시아는 야쿱 벡이 신강으로 들어올 무렵, 신강의 불안을 이유로 이리 지방을 점령했었습니다. 명분은 전혀 없는 상황이었고, 아마도 러시아는 청나라가 야쿱 벡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러시아는 일단 혼란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점령한 일일 뿐이고, 청나라가 야쿱 벡을 격파하고 신강을 평정하면 이리는 반환하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습니다.


 설마라고 생각했을 법 하지만, 실제로 야쿱 벡은 진압되었습니다. 청나라는 당연히 이리 지방의 반환을 요구했습니다. 러시아가 미리 한 언질도 있으니, 명분은 이쪽에 유리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때 청나라가 파견한 숭후(崇厚)라는 인물이었습니다. 대관절 러시아에서 어떻게 구워 삶았는지, 숭후는 그 좋은 여건에서 이리 이서와 이남의 드넒은 영토를 모조리 러시아에게 할양하고, 러시아군의 이리 주둔 비용 500만 루블을 지불한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청나라는 일단 러시아의 군대 주둔 자체를 요구한적이 없었기에, 이건 말도 안되는 협상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리바디아(Livadia) 조약 입니다. 이로서 무려 신강의 70% 가량은 러시아 영토가 되는 처지가 되었는데,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라 사실은 숭후가 교섭을 위해 러시아로 가기 전에 점쟁이를 찾았는데, 몇 월 며칠까지 귀국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점괘가 나와서 그렇게 협상을 서둘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지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어처구니가 없어할만한 일대 해프닝이었습니다. 당연히 청나라에서는 조약의 내용을 알고 난리가 벌어졌고, 조약의 비준을 정부 차원에서 거절한 후, 이때만큼은 딱히 별다른 반발도 없이 곧바로 숭후에게 사형 선고를 했습니다. 그리고, 증국번의 아들이자 주영공사였던 증기택(曾紀澤)을 재빨리 파견시켰습니다.


 하지만 러시아라는 흑곰은 자신이 이미 먹은것을 쉽게 토해내지 않는 법입니다. 이 당시 청나라가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는것은,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에 조정을 의뢰한 일이었습니다. 청나라의 옆에 영국과 프랑스가 좌우로 서 있게 되자, 러시아도 상당한 부담을 느꼈습니다. 


 이 당시 러시아는 러시아-투르크전쟁에서의 성과를 베를린 회의(Congress of Berlin) 때문에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 없는 상황이었고, 프랑스와 손을 잡으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체면을 세워 줄 필요도 있어 러시아는 자신들에게 엄청난 조건을 제시했던 숭후의 사형을 취소시키라는 조건으로 개정안에 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리조약(伊犁條約) 입니다. 혹은 페테르부르크조약이라고도 합니다.


 이리조약으로 인해 청나라는 호르고스 강을 경계로 하여 간신히 이리의 동반부는 되찾았습니다. 하지만 서반부는 영원히 러시아의 영토로 이르렀고, 이는 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동반부를 되찾는 대가로 주둔 비용 900만 루블을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즉, 싸움에서의 승리를 어처구니 없는 외교적 실수로 찜찜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이리조약이 체결된 후의 3년 뒤, 1883년의 청불전쟁 역시 비슷한 방향으로 전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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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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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배달민족 | 작성시간 13.03.25 전쟁터에서 뺑이쳤는데 외교관 한놈때문에일을 망치는 전형적인 사례중 하나;;
  • 작성자kingrapter21 | 작성시간 13.03.25 헐... 기가 막히네여 ㄷㄷ
  • 작성자2Pac | 작성시간 13.03.25 돈 먹었나...
  • 작성자명일 | 작성시간 13.03.25 나는 처형당한지 알았는데 이제보니까 러시아가 구명해줘서 살아났네
  • 답댓글 작성자타마네 | 작성시간 13.03.26 그는 차가운 북국의 불곰
    그러나 아군에게는 따듯하겠긔
    그런게야 ㅇㄹ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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