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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95) ─ 문제는 다른곳에 있다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3.31|조회수593 목록 댓글 2


 숭후



 좌종당은 전투에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청나라는 승자의 당당함은 커녕, 외교에서의 실패로 인해 오히려 어려운 처지에서 상대에게 형편을 구해야하는 입장에 놓였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한번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리조약이 조인되고 3년 후인 1883년, 이번에는 청불전쟁(淸-戰爭)이 일어났습니다.


 이미 중국의 영토를 떼어먹으려는 제국주의 열강의 야욕이 노골화되었던 시점입니다. 영국은 홍콩을 기점으로 해서 상해, 천진 등 주로 동남쪽 개항장에 발판을 만들었고, 러시아는 동북에서 서북으로 걸친 국경선을 타고 남하하는 모양새를 취했으며, 그리고 프랑스는 베트남을 기지로 삼아 중국의 서남 지방, 즉 운남 쪽으로 침투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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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군.

 1858년, 프랑스는 언제나 그렇듯 '가톨릭의 보호' 라는 구실로 베트남에 출병하였습니다. 이전, 원명원 대야갈에 참가했던 프랑스군 3,500여명도 청나라를 떠나 베트남 남부를 공격하는데 보내졌습니다. 프랑스군이 침범해 오자, 베트남 정부는 태평천국의 분파였던 유영복(劉永福)이라는 인물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이 유영복이 이끄는 부대를 흑기군(黑旗軍)이라고 합니다. 흑기군은 1873년 12월 무렵, 하노이를 점령하고 있던 프랑스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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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객지에서 명을 달리한 리비에르


Liu Yongfu

 유영복


 이에 당하고만 있다면, 국제사회에서의 체면이 말이 아닐 것입니다. 프랑스는 1882년 하노이의 재점령을 목표로 군사를 일으켰고, 이듬해 5월 하노이 서쪽 외곽에서 베트남 ─ 흑기군 연합군과 전투를 치루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는 여기에서도 패배했고, 당시 사령관이었던 리비에르는 전사하고 맙니다. 놀라운 성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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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를 치루는 프랑스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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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베


 이 굴욕은 프랑스의 입장에선 치욕적이었고, 12월, 의회는 군비 추가와 함께 1만 5천여명의 증원군 파병을 승인했습니다. 원정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쿠르베는 압도적인 무기와 병력의 우위를 앞세워 손타이, 바쿠닌, 타이구엔, 훈호아 등 여러 도시를 함락하고, 손코이 강 삼각주를 제압했습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베트남 쪽에서도 별 수 없이 청나라에 손을 내밀었고, 청나라는 이 제안을 받고 군대를 출병시켰습니다. 이것이 바로 청불전쟁의 개전 이유였던 것입니다. 당시 베트남과 청나라의 관계 역시, 과거 한반도의 국가와 중화제국이 맺었던 조공 책봉 관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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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후국은 종주국의 허락 아래 책봉을 받고 조공이라는 이름으로 무역을 하며, 종주국은 제후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 대신 위급한 상황이 온다면 병력을 파견하여 소위 종주국의 위엄을 세우고 속국을 구해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물론, 이런 상황은 자주 오는것은 아닙니다. 과거 조선과 명나라는 대단히 긴밀한 관계였지만, 수백여년간 이런 상황은 오직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침략했을 당시, 단 한번 뿐이었습니다.


 청나라는 이와 비슷하게 군대를 이끌고 출병했는데, 과거 청나라와 싸웠던 태평군의 후예들과 손을 잡고, 베트남을 위해, 프랑스와 싸우는 대단히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게다가 망신스럽게도 정규군은 금세 도망을 치곤 했는데, 흑기군은 이에 비하여 상당히 선전했습니다. 


 신강에서의 전쟁이 끝난 시점이기도 했고, 이홍장은 힘을 쏟을 생각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는 되도록 빨리 전쟁을 종결시키기를 원했기에 1884년 5월, 프랑스 대표 푸르니에와 함께 천진에서 만나, 이른바 간명(簡明)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베트남에 출병해 있는 청군을 국경지대까지 철군시키고,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보호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홍장은 외국인들의 수법을 잘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간명조약에 조인하고 난 뒤, 실제로는 바로 청군을 공격했던 것입니다. 국경선까지 철수한다는 약속을 어겼다는 것이 명분이었는데, 조약에서는 분명히 철수를 약속해지만 기한에는 특별히 정해진 것이 없었습니다. 즉, 이를 교묘하게 이용한 셈입니다.  만일 청군이 언제까지 철수한다고 통보했다면 그전에 공격한다고 해도 명분이 없지만, 지금의 조약에는 기한이 정해져있지 않으니 프랑스가 지금 청군을 공격한다고 쳐도, '왜 먼저 청군이 물러나지 않았느냐.' 라고 억지를 부릴 명분을 어떻게든 만들 수 있는 셈입니다.


 여하간에 청군도 반격을 가해 프랑스군에 100여명의 사상자를 내었습니다. 이에 베이징 주재 프랑스 공사는 전쟁 비용 2억 5천만 프랑의 배상과 청군의 즉시 철수를 요구했습니다. 청나라 조정에서는 '1개월 이내에는 다 철수 시킬 것.' 이라고 공언했지만, 프랑스는 이미 그 사이에 푸저우(福州)의 마미군항(馬尾 軍港)을 공격했습니다. 


 당시 선정대신을 맡으며 복주에 체류중이던 하여장(何如璋)은, 자신 나름대로는 사태를 더 크게 만들지 않기 위해 발포 금지 명령을 내렸지만 덕분에 프랑스 함대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유유히 공격을 가해 복건의 수군을 전멸시켰습니다. 무엇보다 마미 조선소는 무려 은 2천만냥을 들여 만든, 양무파의 기대 그 자체였지만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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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건 수군을 전멸시키는 프랑스 함대



 결국 참다 못한 청나라 정부도 복군 함대가 전멸한지 3일 후,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선언했습니다. 이후의 전투에서, 놀랍게도 청군은 상당한 역량을 보이며 프랑스군을 밀어부치는데 성공합니다. 복주를 습격한 프랑스 함대는 이듬해인 1885년 3월 절강 연해로 침입하다가 포격을 받았고, 쿠르베는 부상을 입고 이후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열강과 해군력으로 겨루는 방법은 무리가 있는 편입니다. 


 반면에 지상에서의 싸움은 희망적이었는데, 당시 신임 양광총독이었던 장지동(張之洞])은 67세의 노장 풍자재(馮子材)를 기용했고, 풍자재는 프랑스군에 맹공을 가했습니다. 당시 풍자재는 장지동이 파견한 관리가 자신을 찾아오자, 곧 두 아들을 데리고 전쟁터로 떠났습니다. 진남관(鎭南關)을 둘러싼 싸움에서는 프랑스군의 공세가 워낙 강하여 청군이 위급한 지경에 처했지만, 풍자재는 소리를 치면서 병사들을 독려했습니다.


 "적군이 관문 안으로 한발자국이라도 들어선다면, 무슨 명목으로 광동 - 광서의 부모님을 만나보겠는가!"


 풍자재의 격려와 함께 청군은 프랑스군의 공세를 저지해내었고, 이튿날 프랑스군의 공세가 더욱 강해지자 급기야 풍자재는 직접 앞장서서 적군을 향해 달려들었습니다. 그 뒤를 두 아들이 따라 달렸고, 이내 모든 청군이 사령관의 모습을 보고 기세를 타 돌격하여 처절하게 백병전을 벌였는데, 잠시 후 지원군이 도착해 프랑스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노년의 나이로 무쌍을 펼친 풍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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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닌 전투. 1884년 음력 4월 7일, 청나라의 운귀 총독 잠육영(岑毓英)이 프랑스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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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손 전투.

 
De Negrier

 네그리에


 풍자재는 또한 랑손(Lang Son)을 점령하는데도 성공했습니다. 프랑스군의 사령관이었던 네그리에는 중상을 입었고, 서부전선에서는 흑기군이 프랑스군을 격퇴하고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이어진 중국쪽의 승전은 프랑스에게는 악영향이었고, 곧 프랑스의 페리 내각은 무너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미 시대는 전신(電信) 시대에 접어들고 있어서, 전황은 본국에 즉시 타전될 수 있었습니다. 랑손에서 풍자재가 대승을 거든 이틀 뒤인 1885년 3월 31일, 유럽에 머물고 있던 증기택은 이홍장에게 전보를 보냈습니다. 당시 증기택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세 나라의 공사를 겸하고 있었습니다.


 "랑손의 승리, 페리의 해임은 화의를 진정시킬 호기로 판단 됨."


 적절한 시점에 화의를 맺는다면, 지금보다 더 좋은 시기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문에 화의는 벌어졌는데, 이후의 화의 내용에 대해 놀란것은 오히려 프랑스 였습니다.  이렇게 화의가 체결되고 나서 보니, 이번의 화의는 이전에 맺은 '간명조약'의 유효성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간명조약을 맺을 당시의 프랑스는 중국에 대해 우위에 있던 입장인데, 정작 청나라가 프랑스를 상대로 여러차례 인상적인 승리를 거두고도 조건은 이전과 전혀 달라진게 없었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상황을 보면, 복건 수군은 괴멸된 시점이었는데, 그렇다면 이홍장이 애지중지하는 북양 함대를 전선에 내보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북양군은 이홍장의 정치적 자산이었고, 그 무력이야말로 이홍장의 발언권이었기에 이를 써먹는것은 아까운 일이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어, 청나라는 전술적 승리를 전략적인 관점에서 모조리 상실한 셈이나 다름 없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입장에서 보자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어 더 뜯어내지는 못하였지만, 여러차례 치명적인 패전을 당하고도 정작 이전과 전혀 다를게 없는 조건에서 조약을 체결했으니, 순리로 보자면 나쁠것은 없었던 셈입니다. 


 근본적으로 보자면 이는 청나라의(그 당시에는) 후진적인 체제 때문에 일어난 사태였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현장에서의 전투가 치열하다 해도, 조정에서 실감을 못한다면 공염불이 되며, 군대의 소속이 '나라' 인지, '개인' 인지조차 의뭉스러운 상황에서 하나의 단일된 전략적 목표를 세우고, 이를 굳게 지켜나가기도 힘든 일입니다.


 양무운동은 기본적으로는 서양의 기술을 들여오자는 취지였지만, 서양의 기술을 공부하면서 자연스레 서양의 학문을 접한 사람들도 많아질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서양의 학문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던 태평천국의 지도부들조차, (대안을 내놓는 데는 실패했지만) 현재의 체제가 문제가 있다고 여길 정도였으니, 서양의 학문을 접한 사람들은 자연스레 좀 더 과격한 방식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쑨원


홍수전을 추종하여 마을에서 목상을 때려부순 후, 당시 홍콩에서 공부를 하였던 쑨원은 이 청불전쟁이 자신의 미래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나는 을유년(광서 11년, 1885년) 중불전쟁 때부터 청조 정부를 타도하고, 민국을 건설하고자 결의했다. 그 후, 학당을 혁명을 고취하는 기지로 삼고, 의술을 빌려 사회에 이를 미치는 매개로 삼았다."


 그 말과는 달리, 이후 쑨원의 10년간의 행적은 '확신을 가진' 혁명가의 모습으로 보기는 어려운 측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청불전쟁과 홍콩에서의 반향이 쑨원에게 정치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해보는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광동인들은 중국의 남부 변방의 안전에 민감하였고, 또한 프랑스에 대한 반발심리로 일종의 파업 행위를 벌여 홍콩에 도착한 프랑스 함선이 결국 수리를 이곳에서 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떠났던 일도 있었는데, 쑨원은 그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청불전쟁의 간접적인 경험은 쑨원에게 있어서 최초의 전시경험이었고, 그로 하여금 민중의 투쟁적인 정신과, 반면에 중국의 이익을 전혀 보호하지 못하는 무능한 정부의 차이를 대비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쑨원에게 간접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 중 한명인 하계(何啓)라는 인물은, 1887년부터 홍콩의 영자신문에 논객으로 등장하여, 현 중국의 곤경은 자업자득이라고 자책했습니다. 근본원인은, 서구의 사악함이 아니라 중국의 후진성이라는 점입니다. 후진성은 어떠한 후진성인가? 이는 양무파들이 주장하는 단순한 기술, 군사적 허약함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청불전쟁은 스멀거리는듯한 반발적 영향력을 사회 깊숙이 심어 놓았습니다. 


 청나라가 중국의 서북인 신강에서 전쟁을 치루고, 중국의 남부인 베트남과 중국 변경에서 전쟁을 치루었을때, 중국의 동쪽을 지난 지역에서도 또다른 난리가 벌어졌습니다. 바로 조선에서 벌어진 임오군란(壬午軍亂)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


 고종과 대원군, 민비를 둘러싼 대립은 굳이 여기서 언급하지 않더라도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 시점에 주도권을 잡은것은 민비의 세력이었는데, 민비를 옹위하는 집단은 신식군대인 별기군에게만 특별 대우를 하여 구식 부대의 불만은 쌓여만 갔습니다.


 1882년 6월, 구식 군인들은 오랫동안 받지 못하다가 간신히 받은 급료가 양이 모자란데다가, 심지어 모래까지 섞여있자 격분하여 임오군란을 일으켰습니다. 대원군을 다시 전면에 내세우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천진에 머물고 있던 조선의 대신, 김윤식은 이 소식을 듣고, 부모의 상을 당해 잠시 자리를 비우고 고향에 있던 이홍장을 대신하여 직례 총독 겸 북양대신 대리로 있던 장수성(張樹聲)에게 도움을 구했습니다.


 장수성의 걱정은 일본이었습니다. 일본이 이를 빌미로 조선을 치려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그렇다면 이는 청나라에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는 일단 서둘러 조선의 내란을 수습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군함 3척을 보내 조선을 정찰하게 했고, 오장경에게 6개 대대의 병력을 인솔하여 바다를 건너 조선의 내란을 평정하고, 혹시 있을지 모르는 일본의 침입을 저지하게 하였습니다.


 오장경은 이에 출발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측근 한 사람에게 군수품 공급과 행군 노선 탐사의 일을 맡겼습니다.


 바로 원세개에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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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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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Τιταυιζ | 작성시간 13.03.31 아무리 제 3공화국 당시의 프랑스군이 개막장이었다고 하지만 양무운동도 효과가 없지는 않았군요.
  • 작성자유럽제패 | 작성시간 13.04.01 문제는 따로 노는 청나라의 함대들이었죠
    청프전쟁때 직격탄 받은 복건함대. 그리고 이후 청일전쟁때 궤멸당하는 북양함대...
    북양 남양 복건함대 돈들여 만들었지만 정작 서로 협력하지도 않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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