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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97) ─ 각자의 사정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4.07|조회수459 목록 댓글 1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 보통 내기가 아닌 인물입니다.



 메이지 유신의 변혁을 겪은 일본은 이후 승승장구하면서 발전하였지만, 급격한 변화가 항상 그렇듯 내부적인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국내 정치의 양상에 위기가 있을 시, 일본은 주로 왹구에 대한 공격론으로 위기를 돌파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강화도 조약이나 대만으로의 공격이 그 예로서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선에서 청나라의 영향권과 일본의 영향권이 충돌한 갑신정변 역시 그러한 연장선으로 볼 수도 있을텐데, 다만 이때만큼은 일본이 한발 물러나야 했습니다. 이 당시 시점에서는 아직 일본이 청나라를 전력으로 압도한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조선에서의 영향력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이 일을 저지른것은 청불전쟁 때문이었는데, 막상 이홍장은 청불전쟁에 소극적이었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로 인해 조선을 일본으로부터 지켜 청나라의 영향권에 계속 둘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당시 일본이 청나라에 비해 가장 열세였던 부분은 해군의 전력이었습니다. 청나라의 북양 함대는 이홍장의 후원을 등에 엎고 맹렬하게 성장하였고, 정원(定遠)은 진원(鎮遠)이라는 당시 동아시아 해상에서는 초대형에 속하는 철갑선을 보유하고 있어서 일본이 당해내기 어려웠습니다. 갑신정변이 있고 난 후부터 일본은 이를 넘어서기 위해 청나라를 가상적국처럼 삼고 군비의 증강에 열성을 기울였습니다. 


 한번 물을 본 일본이 무섭게 칼을 갈고 있을때, 청나라는 서태후의 환갑 축하연을 위해 북양 함대의 증강 비용이 이화원의 정원을 꾸미는데 쓰이는등 다사다난 한 시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10년 동안 외국에 한 척의 전함도 발주하지 못했으니,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격변의 시대, 군함 같은 장비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었고, 일본은 빠른 신형의 전함들을 속속 발주했지만 북양 함대의 전력은 낡아져만 갔습니다. 


 한편, 조선을 떠나 청나라에 머물고 있던 원세개는 숙부 원보령의 조언에 따라 과거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일전에 과거에 도전하다 여러번 물을 먹은 원세개였지만, 원보령은 그래도 과거는 통과하는것이 떳떳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하지만 이홍장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이홍장이 생각하기에 딱히 조선에서 일을 처리할 사람으로 원세개만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때마침 이홍장은 임오군란 당시 데려왔던 흥선대원군을 조선으로 귀국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내심 원세개가 대원군을 데리고 가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원보령에게 원세개가 언제 올 수 있느냐고 물었고, 원보령은 조카가 과거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홍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선의 정세를 보니 대원군을 하루속히 귀국시켜야겠습니다. 나는 원세개가 임기응변에 뛰어나니 그를 함께 보내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그는 조선 대신들인 김윤식, 어윤중 등과도 친한 사이니 양쪽을 다 조정할 수 있어 적당합니다."


 천하의 북양대신이 이렇게 말하자 원보령도 어쩔 수가 없었고, 다만 원세개는 벼슬이 낮은 편이라 그냥 보내면 위력이 안 먹히니, 높은 무관을 따라 보내서 병력을 이끌고 조선으로 가면 더 좋을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이홍장은 처음에는 그 생각에 동의하다가, 다시 생각해보니 대원군을 보내면서 병력을 함께 보내면 민씨 일파가 너무 겁을 먹어 시끄러워 질까봐 생각을 바꿨습니다. 또 이홍장은 원세개의 능력을 꽤 믿고 있었기에, 굳이 대군을 보내지 않아도 어찌어찌 일처리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원보령도 다시 생각해보니, 조선의 고종이 우유부단해 보이기는 해도, 설마하니 외국에서 돌아오는 부친의 귀국까지 막고 방해할것 같지는 않았고, 민씨 일파도 워낙 놀라 당분간 큰 일을 꾸미기는 어려워 보였습니다. 


 원세개 본인으로 말하자면, 당초에는 열불이 터지기도 하여 조선에서 귀국하였지만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면 천하의 북양대신 이홍장이 잘 봐줄것이라 여겨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는 글 읽기도 싫고 과거에 쓰는 글을 지워본 지도 한참 전이라 과거 공부는 재미도 없었기에 술만 마시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이런 마당에 조선으로 이동하라는 말이 들리자 큰비를 무릎쓰고 떠나, 천진에서 대원군과 함께 바다를 건너 조선으로 건너갔습니다.



 고종



 하지만 고종은 아버지인 대원군이 온다는 말을 들어도 기뻐하지 않았고, 관리들이 대원군과 사사로히 왕래하거나 편지를 보내지 못하게 했고, 민비 일파 역시 대원군을 미워해 대원군이 인천에 도착하자 반란자 수색이라는 명목으로 대원군이 전에 거느리던 노비 셋을 죽이고, 병사들을 보내 대원군과 함께 돌아온 사람들을 수색하고 체포했습니다.


 이 와중에 원세개는 나름대로는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대원군에게는 "나라 일을 논하지 않는 편이 차라리 낫다." 면서 스스로 보호하라고 권해고, 고종을 만나서는 조선에서 청나라를 견제할 수 있는 러시아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러시아를 가까이하지 말라고 권고했지만 딱히 소득은 없었습니다. 며칠 뒤 원세개는 청나라로 다시 돌아와 이홍장에게 정세에 대한 보고를 올렸습니다. 이홍장은 대단히 만족스러워하면서 원세개를 다시 조선 주재 공사로 보냈습니다. 원보령은 이렇게 충고했습니다.


 "민영익은 겉만 화려하고, 큰 일을 맡을 능력이 없는 젊은이다. 그는 식견이 아주 소탈하고 투철해 보이지만 겉만 번지르르하고 실속이 없는 사람이다. 복을 타고난 상이 아니어서 앞으로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니 사귈 때 조심해야 한다."


 원보령은 사실 원세개가 조선에 가는게 별로 탐탁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고작 26세였던 원세개는 매사에 자신감이 넘쳐 보무도 당당하게 수행원 몇명만 거느리고 조선으로 떠났습니다. 


 당시 조선과 청은 전통적인 조공 책봉 관계였고, 조선은 청에 대해 음력 정월 초하루 조공을 바치고는 있었지만 열강의 식민지들과는 달리 내치나 외교 문제는 자주적인 편이었고 청은 딱히 관섬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원세개는 자신이 "상국" 에서 왔다는 점과, 이홍장이 고종에게 보낸 "내치를 결정하는데 있어 원세개와 의논하라." 는 편지를 이용해서 무소불위로 간섭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조선은 민족주의의 영향이 자라고 있어 자주 독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고, 사사건건 간섭하는 원세개를 싫어했습니다. 원세개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번에 조선에 온 목적은 이를 바로잡으려는 데 있다. 조선이 청의 조공국이라는 사실은 영원히 변할 수 없다."


 그리고 조선에서 외무의 역할을 하는 부서에 이렇게 서신을 보냈습니다. 


 "조선이 청의 종속국이 된 지 수백 년이 되었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일입니다. 그런데 조선이 단독으로 다른 나라들과 조약을 맺으며 각서와 성명을 내고 있으니 어찌 이 일을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러한 방식이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왔습니다. 민씨 세력이야 대원군과 대립하고 있던 처지라, 대원군을 귀국시킨 청나라에 대해서 별로 감정이 좋지 못했고, 고종은 고종대로 "조선은 청나라의 종속국" 임을 사사건건 강조하는 원세개에게 반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서양에서도 원세개가 자신들이 골고루 나눠먹어야 할 조선에 대해 '특별한 위치' 를 자처하자 반감을 느껴 적대시 했습니다. 곧 원세개는 조선 내에 거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았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원세개는 여러 사람들의 의심과 비방을 맞아 몹시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그는 이홍장에게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대책을 말해주라고 했지만, 이홍장도 딱히 뾰족한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이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그만큼 심해지는 원세개의 간섭에 대해 고종도 점차 질려버릴 무렵, 1886년 7월에 고종이 러시아 공사 웨베르에게 사람을 보내 보호를 요청했다는 소식이 파다하게 퍼져버렸습니다. 원세개는 즉시 원보령에게 사람을 보내 대책을 물어보았습니다. 


 원보령이 생각하기에, 물론 대원군이 돌아가면 민씨 일파가 자극 당하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대원군은 조선 사람들의 영웅 중의 영웅이니 일단 한판 대결이 벌어지면 승자는 대원군이 될 것이라 여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대원군 일파는 타격을 크게 입어 아무런 힘도 없었습니다. 만약 무언가 수를 쓴다면, 청나라에서 밀지를 주면서 군사를 지원해주는 방법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불가능한 이야기 입니다. 


 그런 상황이었지만 원보령은 그래도 대원군에게 스스로 한번 일어나 보고, 만약 행동에 나선다면 '도와줄 세력' 이 있음은 암시하라고 말했지만, 원세개가 보기에 대원군에게는 이제 기대할만한 구석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직접 행동에 나섰습니다. 1886년 8월 6일, 원세개는 이홍장에게 전보를 보냈습니다. 고종을 폐위해버리자는 건의였습니다.


 "청나라는 조공국을 다스리는 데 너무 인정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은 우리가 다른 나라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것으로 알고 점차 방자해져 이제는 우리를 신경쓰지도 않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제 생각에 러시아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지는 않을것 같습니다. 그러니 고종이 러시아 군대를 끌어들이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해군과 육군을 조선으로 보내 고종을 폐하고, 왕족 가운데 현명한 자를 새 임금으로 세우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그런 다음에 군사 수천명을 보내면 됩니다. 우리 군대가 먼저 조선에 들어가고 조선의 임금이 바뀐 것을 보면 러시아도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조선의 민심도 흩어지고 각국의 원망과 비방도 많으니, 만약 북양대신께서 대원군에게 이런 계획을 전하면 삼사일 안에 해결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러시아 군대가 조선에 먼저 들어온 뒤라면 손을 쓰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극단적인 원세개의 주장에 대해, 이홍장은 신중론으로 일관했습니다. 그 역시 조선과 러시아의 커넥션에 대해서는 상당히 놀랐지만, 그만큼 반신반의 했던 것입니다. 이홍장은 원세개의 의견을 거절했습니다.


 한편, 조선이 러시아에 보호를 요청했다는 문서의 필사본은 민영익을 통해 원세개에게 전달되었고, 원세개는 이를 조선 정부에 들이대면서 대관절 무슨 일이냐고 따졌습니다. 조선 정부는 모르쇠로 일관했고, 원세개는 만약 조정에서 이를 모른다면 날조한 사람을 잡아서 처벌해야 한다고 협박했습니다. 원세개는 조선 정부 뿐만 아니라 이홍장에 대해서도 '러시아의 군함이 머지않아 올 것이다.' 라면서 속히 높은 관리를 파견하고 군대를 보내 조사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지금 먼저 기선을 잡아야 러시아가 들어온다 해도 조선을 보존할 수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민영익


 청나라 조정에서는 이홍장에게 군대를 파견하여 러시아의 움직임을 막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이홍장은 일단 부대를 움직였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공공연히 군대를 조선으로 파견한다면 다른 나라의 의심을 받고 시비거리가 늘어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주위에서는 아예 조선에 민란이 일어나게 하고, 이를 빌미로 군사를 파견해서 대원군을 앞세워 임금을 바꿔 버리자는 말도 나올 정도였지만, 이홍장이 진윤이(陳允頤)를 보내 조사해보자 상황이 그렇게 심각하진 않았습니다. 


 상황인즉 조선에서는 당연히 그런걸 보낸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고,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조선에서 문서를 보낸 적이 없다고 발뺌하면서, 만약 그런게 보내진다면 휴지조각으로 만들것이라고 답변했습니다. 원세개에게 그 문제의 문서를 보여준 민영익은 외국으로 도망쳐 버렸습니다. 이렇게 되자 조선이 러시아에 문서를 보냈다는 사실 자체가 근거거 없는 일이 되었고, 청나라 조정에서는 별 일도 아닌데 원세개가 너무 조급하고 성급하게 일을 처리했다면서 질책해고, 이홍장도 화가 나 원세개를 호되게 야단쳤습니다. 결국 일은 원세개가 조선의 외교 부서에 '간사한 자들이 일을 꾸몄다.' '앞으로 외교 문서에 인장이 없으면 휴지 취급해야 한다.' 고 말하는 정도에서 끝나버렸습니다. 



 오언 데니


 이 무렵, 이홍장의 추천으로 조선 정부에서 내무부의 일을 협조하고 외교 통상 업무를 하는 사람 중에 데니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천진에 가서 원세개를 파면하지 않으면 일을 처리하기 어렵다고 말했고, 원세개는 여기에 대해서는 화를 내었지만 일단 데니는 조선에 돌아온 뒤에도 원세개과 냉랭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를 욕하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원세개는 입장이 몹시 난처했는데, 데니가 이홍장이 추천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대응한다면 이건 이홍장이 의지를 거스르는 일이 되고, 그렇다고 데니가 자신을 욕하는것을 참고 있으면 위신과 대세에도 영향이 있는 일이었습니다. 원세개는 참다 못해 이홍장에게 편지를 써서, 차라리 데니에게 큰 권한을 주어서 자신이 그를 따르게 하던지, 자신은 천진으로 돌아가고 다른 사람을 보내 데니와 잘 지내게 하면 그 양반도 좋고 자신도 좋겠다는 의견을 전했습니다. 


 원세개는 둘의 대립을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아 '사이좋게 지내라' 라는 원론적인 지시만을 내렸습니다. 원세개는 짜증스러웠지만 감히 이홍장을 거스를 수는 없었습니다.


 

 박정양


 1887년에도 또 다른 사건이 벌어졌는데, 고종이 전권대신 박정양을 미국에 외교 사절로 파견한 일 등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자주적인 움직임이었고, 원세개는 이를 이홍장에게 보고했습니다. 이홍장은 고종이 지금 원세개를 대단히 경계하고 미워하고 있으니, 쓸데없이 자극하는건 좋지 않기에 모른척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원세개는 되려 그럴 수는 없다면서 조선 정부에 압력을 넣어 사절들을 되돌아오게 하고, 즉시 베이징에 사람을 보내 사죄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고종은 원세개가 찢어죽이도록 미웠지만 딱히 방법도 없어 그렇게 하겠다고 말은 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박정양이 귀국하자 처벌하지 않고 외서 장관으로 임명했는데, 원세개가 하도 시끄럽게 굴어 별 수 없이 해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무렵 원세개는 데니와도 싸우고 있었습니다. 1887년 11월 10일, 민비의 생일 축하 자리에서 데니는 의도적으로 원세개의 자리를 일반석으로 정했는데, 원세개는 그 당시에는 "이 서양 사람이 동양의 법도를 몰라서 그랬다." 면서 그냥저냥 넘어갔지만 다음 에도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당시 원세개는 왕궁에서 고종을 만나가 위해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그때 나타난 데니가 원세개를 보고도 인사는 커녕 한동안 쏘아보기만 했던 것입니다. 원세개는 화가 나서 데니를 쫒아보내라고 명령했고, 데니는 데니대로 문 밖에서 사람을 시켜 원세개가 데리고 온 심부름꾼들을 모조리 내쫒아 버렸습니다. 


 이홍장이 염려했던것처럼, 원세개는 너무 조선에서 날뛴 탓에 모든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각국 공사와 총영사들은 원세개의 오만한 태도를 대단히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베이징 주재 미국 공사는 청의 외교 당국에 "대체 원세개의 직책이 무엇이냐." 라고 따져묻기도 했습니다. 다른 나라들도 조선의 이권에 대해 한발 걸치고 싶은데, 원세개가 시도떄도 없이 '상국'을 들먹이며 일반적인 통상이 아닌 '상국' 과 '조공국' 의 특별함만을 강조하자 반발이 극심해진 것입니다.



 1888년 10월에는 원세개의 임기가 끝나감에 따라 고종이 청나라 조정에 원세개를 후임자와 교체해줄 것을 요청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고종은 한번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자 또다시 이를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고종의 요구가 아니더라도 원세개 역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습니다. 


 원세개는 처음에는 자신의 능력과 '상국'의 위엄으로 조선의 임금과 신하들을 거느리는 정도는 간단할 것이라고 여겨 당당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게 생각만큼 쉬운게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종, 민비, 각국 공사들 등등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미워하고 있었고, 조선의 정세도 점점 약화되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만회할 만한 힘이 없었습니다. 당초에는 기회의 땅으로 여겨졌던 조선이 이제는 답답하고 막다른 길로 여겨지고 만 것입니다.


 원세개는 임기가 끝나가자 돌아가고 싶다고 여러번 청원했습니다. 그런데, 딱히 원세개 대신 그 자리에 있을만큼 조선 정세에 능통한 사람도 없었고 무엇보다 고종이 요구한대로 고분고분 들어주면 청나라의 위세에도 문제가 있을까봐 염려스러웠기에, 이홍장은 고종의 요구를 못 들은체 하고 원세개를 계속 앉혀 놓았습니다. 하지만 원세개 역시 돌아가고 싶었지만 이홍장은 원세개의 요청도 모른척 했습니다.


 1889년에는 숙부 원보령이 사망하여, 원세개가 이 일을 계기로 세번이나 휴가를 요청했지만 이홍장은 이를 무시해버렸던 것입니다. 이홍장은 이미 원보령의 장례 비용과 뒷처리까지 전부 자신이 손을 써 놓았으니, 원세개는 걱정 하지 말고 조선에서의 일이나 잘 하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원세개가 뜻을 이룬것은 1891년이나 되어서였는데, 어머니가 종기로 유방이 다 헐어버렸고, 천식 때문에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안쓰러운 상태가 되자 원세개는 제발 휴가를 두달만 내어달라고 요청했고, 차마 이런 요청까지 거절할 명분이 없었던 이홍장은 어쩔 수 없이 잠시만 돌아오라고 허가했습니다. 하지만 백일장만 치룬 후 원세개는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한편, 원세개가 조선에서 한탄을 늘어놓고 있을 시간 일본은 무섭게 저력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갑신정변 후 10년 동안 일본의 기세는 가히 승천하는 용처럼 치솟고 있었고, 이제 일본의 역량이 청나라를 넘었다는 자신이 생기자 일본 내에서는 전쟁을 벌일 계기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미 이전부터 정한론(征韓論) 등은 대두되었지만, 이젠 더 나아가 청나라와 전쟁을 한번 벌이자고 여기는 사람들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전쟁을 치룰 동기입니다. 


 우선 첫번째로 분위기를 적절하게 꾸며줄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김옥균의 암살이었습니다.


 갑신정변 당시 실패한 김옥균 등은 우선 일본으로 몸을 피했고, 조선 정부에서는 당연히 김옥균의 인도를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내어주면 그야말로 일본의 꼴만 우습게 되는 일이고 하여 일본은 이에 선뜻 용하지 못했지만, 그러나 그냥 가지고만 있기에도 김옥균은 이제 다루기는 어렵고, 활용가치는 떨어진 인물이었기 때문에 훗카이도로 보내기도 하고, 오가사와라 섬으로 보내기도 하면서 '관심 밖' 의 영역에 두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박영효에게 핀잔을 들을 만큼 일본에서 방탕하게 지내고 있던 김옥균이었지만, 이렇게 허송세월하는 시간이 9년이나 되어가자 김옥균 역시 일본에 대한 실망감과 무언가 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생겨, 그는 일본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가 직접 무언가를 해보려고 시도했습니다. 바로 청나라의 이홍장과 담판을 지어서 조선의 개혁을 도모하려던 것입니다.


 물론, 당시 김옥균은 세력이랄것도 없었던 상황이었고, 개인적인 영향력으로 청나라의 북양대신 이홍장을 설득하는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며, 무엇보다 이홍장을 설득해서 조선의 정세에 적극 개입한다가 해도 그게 조선의 개혁에 이로운 역할이 될지는 전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현실 감각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어떻게 생각해보면 절박하기 짝이 없었던 당시 김옥균의 처지도 이해가 가는 면이 있습니다. 김옥균으로서는 무엇이라도 해보려고 필사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김옥균은 상하이로 떠났는데, 결국 그것이 김옥균의 최후를 낳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여행을 떠나면서 김옥균은 홍종우(洪鍾宇)를 만났는데, 홍종우는 같은 조선인이라는 점을 이용해 김옥균에게 동조하는 척 하면서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김옥균에 접근하기 전까지, 홍종우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 프랑스 헌법을 룰모델로 삼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1890년부터 1893년까지 자비를 털어 프랑스에 유학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홍종우가 프랑스어로 번역한 춘향전




 당시 상하이에는 윤치호도 있었습니다. 김옥균은 1894년 3월 27일 오후, 윤치호를 만나 "이홍장의 양아들이 초청해서 오게 되었다. 경비는 홍종우가 대고 있다." 고 말했습니다. 윤치호는 이 이야기를 듣고 의아스러워 하더니, "아무래도 스파이 같으니 조심하라." 고 충고했습니다. 하지만 김옥균은 "그럴 리가 있나." 정도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홍종우는 김옥균을 쏘아서 죽이는데 성공했습니다. 윤치호는 김옥균의 사망 소식을 듣고 미행을 우려해 거처를 여러번 바꾸는 생활로 들어갔고, 청나라는 조선 정부의 요구를 들어주어서 김옥균의 시신을 조선에 보냈습니다. 조선 정부는 홍종우의 구명도 요청했고, 이홍장은 이 역시 받아들였습니다. 




조선으로 인도된 김옥균의 유해는 능지처참 형에 처해졌습니다. 당시 김옥균의 찢겨진 유해는 닷새 동안 효시되었는데, 이 일은 일본에 보도되었고, 일본 내에서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일본의 힘을 빌려 개혁을 해보려던 젊은 개혁가가 이를 실패하고, 망명 생활을 하다 암살되었다는것은 상당히 매력적인 이야기이자 공분을 불러 일어나게 하는데는 좋은 이야기였고, 또 조선 뿐만 아니라 김옥균의 유해를 송환하고 홍종우를 석방한 청나라의 조치에 대해서도 일본의 민간에서 상당한 반발이 일어났습니다. 


 구즈 도스케(葛生東介)가 지은 '김옥균' 에는 그의 최후를 보았던 와다 엔지로(和田延次郞)의 담화가 실려 있는데, 당초에 그는 김옥균의 시신을 일본으로 보내기로 했지만, 일본 영사관에서는 이를 보류시켰고, 그에 대한 명확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와다가 나중에 알고보니 김옥균의 시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청나라 당국에 인도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음모론같은 이야기도 있습니다. 상하이의 영사가 김옥균의 시신을 보내는 일을 거부했다면, 이는 외무성의 훈령에 따른 일이었을 테고, '일본의 힘을 빌리려던 혁명가가 청나라에 의해서 조선에 인도되어 갈갈히 찢긴채 만인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라고 한다면, 전쟁을 바라는 일본의 입장에서는 분위기를 끌어올리는데는 그보다 더 좋은 일도 없습니다. 갑신정변이 김옥균 등을 지원해서 조선 내에 친일정권을 세우려는 일본의 의도였다고 본다면, 김옥균은 죽어서도 일본에 이용당한 셈입니다. 진순신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그러나 아무래도 이런 이야기는 '그런 말도 있다.' 정도로만 생각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어찌되었건 김옥균의 사망은 민간에서 상당한 분위기를 끌어올릴 수 있었습니다. 일본은 아사쿠사의 본원사에서 김옥균의 추도회를 열었는데, 이는 일찍이 없었던 정도로 대단히 성대한 의식이었고, 김옥균이 외국인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더욱 이례적입니다. 또한 '김옥균 사건 연설회'와 '대외 강경파 대간친회' 등이 열렀고, 여기에는 훗날 총리까지 되는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나, 대륙 진출을 부르짖던 극우 정치가인 고노에 아츠마로(近衛篤麿) 등도 참가했습니다. 김옥균의 시신 인도에 대해 일본이 연관되어 있는지와는 별개로, 일본 내에서는 김옥균의 죽음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여론은 들끓었고, 청나라를 향한 적개심은 대단히 고조되었습니다. 전쟁을 일으키는데 필요한 두 가지 조건, 즉 국내의 여론과 개전의 동기에 대해 첫번째는 해결된 셈입니다. 문제는 군대를 일으킬 동기인데, 그것마저 갖추어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조선 땅에서 동학 농민 운동의 물결이 넘실거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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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Τιταυιζ | 작성시간 13.04.07 이제 동학운동이 등장하는군요.. 그나저나 무쓰가 저렇게 사진이 찍히니 정말 나쁜놈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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