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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100) ─ 조국을 위해 죽을 것이다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4.13|조회수601 목록 댓글 4

파일:Prince Gong.jpg


 공친왕


 공친왕 혁흔이 전면에 나서게 된것은, 무려 10여년만의 일이었습니다. 과거 공친왕은 서태후의 시대를 여는데 큰 공을 세웠지만, 이는 달리 말하면 서태후에게는 거북감이 느껴지는 몇 안되는 존재 중 한명이라는 뜻입니다. 공친왕은 10년 동안 요직에 앉지 못했고, 자신도 몸을 사리면서 풍류를 즐기면서 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청일전쟁의 종결을 위해 그는 다시 전면에 나섰습니다.


 일본이 요구할만한 조건 중 몇개는 예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전비의 배상 요구. 이는 사실상의 패전국으로서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두번째는 조선에서의 영향력 상실. 애시당초 이때문에 일어난 전쟁이므로, 패배한 이상 그것도 손을 땔 수 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여하간 요지는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게 아닙니다. 최대한 수완을 발휘해서, 저쪽의 요구를 깎을 수 있냐는 흥정의 기술이 필요했습니다.


 일본은 중재자로 미국을 선택했습니다. 영국은 이미 중국에 많은 권익을 가지고 있었기에, 민감하게 반응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홍장은 따로 자신의 심복이라 할 수 있는 독일인 데트링(S. Derting)에게 자신의 친서를 주어일본에 파견했지만, 일본은 만나주지 않았고 미국에서도 불평했기 때문에 다시 돌아오게 했습니다. 무쓰는 '이홍장이 어린아이 장난같은 짓을 한다.' 며 신랄하게 비꼬았습니다.


 일단 회담은 열리기로 되었고, 청나라는 이쪽의 대표로 각각 호부시랑과 호남 순무 직을 맡고 있는 장음환(張蔭桓)과 소우렴(邵友濂)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장음환은 미국과 페루, 스페인의 공사를 지낸 적이 있었고, 소우렴은 대만 순무로 3년 동안 근무하면서 평이 좋았습니다. 청나라는 회담 장소로 나가사키를 제시했지만, 일본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자신들은 승전국인데, 굳이 대본영인 히로시마에서 나가사키까지 갈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회담을 하고 싶다면, 히로시마로 오라는 지시였습니다.


 청나라는 일본의 조건을 받아들였습니다. 장음환과 소우렴은 1895년 1월 26일에 상하이를 떠나 히로시마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이 두명과 같이 이야기를 나눌 임무로 무쓰 무네미쓰와 이토 히로부미를 보낸 것입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수상이고, 무쓰 무네미쓰는 외무대신입니다. 이것은 누가 보더라도 격에 맞지 않은 일이었는데, 일본의 목적 역시 또 한번 고압적인 자세를 취해서 사절들을 돌려 보내버리는것에 있었습니다. 청나라를 압박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장음환 등은 우선 자신들이 전권대신으로 임명되었다는 문서를 일본에 보였습니다. 그러나 문서에 '총리아문에 빠짐없이 전보를 보내어 짐의 뜻을 물어라.' 라는 표현이 있는것을 구실로 삼아 무쓰는 이에 따졌고, '두 대표의 위임권이 불안정한 것은 청나라 조정이 화의를 간절히 바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라며 회담을 일방적으로 중지해버렸습니다. 청나라의 대표들은 맥없이 물러났습니다.


 그런데, 이토는 중간에 수행원으로 온 오정방을 불러 세웠습니다. 그리고 영어로 대략 자신들의 의도를 넌지시 전달했습니다. 어찌되었건 자신들도 화의를 하지 않으려는것은 아니라고 말입니다. 오정방은 솔직하게 물었습니다.


 "이번에 온 사절의 지위와 명망이 낮아 지금의 상황이 어렵게 된 것입니까?"


 이토는 이에 대해 그렇지는 않고, 정당한 전권 위임장을 소지한 사람이라면 상관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물론 그 사람의 작위와 명망이 높으면 높을수록 회담 사정은 좋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청 정부에 어떠한 지장이 있어 우리가 청으로 가는것도 가능합니다. 예컨대, 공친왕이나 이홍장 같은 사람이 전권대신으로 임명되면 사정이 매우 좋아질 것입니다. 그것이 어째서인가 하면, 회담의 이러저러한 결과를 그저 종잇장의 공문으로 그치게 하는것이 아니라, 실제로 실행할 수 있는 유력자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이홍장은 전권대신으로 자신이 일본으로 직접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때, 그는 노련한 정치가의 면모를 발휘해서 자신을 비판하던 정적인 옹동화(翁同和)에게 같이 일본으로 가자고 권유했고, 옹동화는 자신이 외교를 잘 모른다는 핑계를 대며 이를 거절했습니다. 이홍장은 간단한 권유 하나로 옹동화가 외교 문제에 대해 발언하는것을 차단해버렸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영토 할양의 일이었습니다. 재물이나 조선에 대한 일이라면야 사실 어떻게든 넘길 수 있는 일이지만, 땅을 때어주는건 예부터 지금까지 정말 민감한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사정이 사정이라, 서태후도 영토 할양에 대한 문제를 이홍장이 논의하는것을 허락했습니다. 이홍장은 시모노세키(馬關)로 향했는데, 아무리 승전국 일본이라고 해도 국제사회에서 명망이 높고 나이까지 많은 이홍장을 히로시마로 불러 들이는건 부담이 들었던 탓입니다. 


 첫째 날의 회담은 특별히 논의랄 것도 없이 적당한 절차 상의 행위만 이루어지고 끝났습니다. 이때 무쓰는 내심으로는 청나라와 얼른 강화를 맺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각국 공사관에서 온 보고를 종합해보니, 시간을 계속 끌면 유럽의 열강들이 청나라와 일본 사이의 문제에 끼어들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쓰는 그런 속내는 감쳐두고, 회담 장에서는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 천천히 논의하자.' 면서 자신이 절대로 강화를 서둘지 않는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습니다. 




이홍장 



 당시 특히 일본을 견제하던 열강은 독일이었습니다. 독일은 "만일 일본이 청 본토에 있는 영토의 할양을 요구한다면, 간섭을 일으킬 것이다." 라고 엄포했고, 영국을 끌어들이려는 움직임까지 보였습니다. 영국은 독일만큼의 견제는 하지 않았지만, 영국이 시원찮자 독일은 러시아를 끌어들이고 있었습니다. 또한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프랑스와 협조하여, 일본의 요구가 너무 무리할 경우 여기에 대해 간섭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먹을 음식을 남들이 뜯어가면 기분이 나쁜 법입니다.


 청나라가 국제 외교에 능했다면 이러한 사정을 이용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 정도로 기민한 정치가는 없었습니다. 어차피 아편전쟁 이전까지는 청나라는 딱히 '외교' 따위를 할 필요가 없는 나라였기 때문에, 메테르니히나 비스마르크 같은 인물은 없었고 외교전에서 취약한 면모를 보인 것입니다.


 첫째 회담은 그렇게 끝났고, 진짜 회담이 전개된것은 두번째 회담이었습니다. 이때 일본의 정전 요구 조건은 천지과 대고, 산해관까지 일본에 넘겨주라는 요구였는데, 제아무리 영토 할양 논의를 허가 받고 온 이홍장이라고 해도 기겁할 수 밖에 없는 조건이었습니다. 천진과 산해관까지 넘겨주라는것은 이홍장이 생각하기에는 무리였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제2안 따위는 없다고 맞섰고, 베이징을 공격할 태세를 보이며 협박했습니다. 이홍장은 우선 3일의 유예기간을 얻었습니다.


 이후 다시 열린 3차 회담에서 이홍장은 정전 조건은 우선 집어놓고, 강화를 맺는 조약부터 논의하자고 전달했습니다. 일본 측은 다음날 강화 조건을 제출하겠다고 답변했습니다. 이 날의 회담은 이렇게 끝났고, 이홍장은 숙소로 돌아갔으며, 다만 무쓰의 부탁을 받은 이홍장의 아들 이경방만 남았습니다. 이경방은 일본어를 잘 했기에 실무적인 협의를 위해 남아주라고 권한 것입니다.


 이홍장은 가마를 타면서 숙소로 귀환했습니다. 당시 이홍장은 인접사(引接寺)라는 절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곳으로 가려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참 가마를 타고 가던 중, 갑자기 한명의 괴한이 나타나 이홍장을 저격했습니다.


 이홍장이 타고 있던 가마는 유리창이 있던 가마였습니다. 괴한이 쏜 총탄은 이홍장이 쓰고 있던 금테 안경을 맞추고 렌즈를 산산조각 낸뒤, 그대로 눈 밑에 박혀버렸습니다. 이홍장은 눈을 감고 있어서 안구는 손상되지 않았지만, 심각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괴한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



 내일 회담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던 이경방과 무쓰에게도 이 소식이 전해졌고, 이경방은 곧바로 아버지의 상태를 보기 위해 달려가씅며, 무쓰는 이토에게 서둘러 이 일을 보고 했습니다. 사실 일본에선 몇년전에도 이런 고위급 인사 테러사건이 있었습니다. 과거 러시아의 니콜라이 황태자가 일본에서 암살자를 만나, 큰 봉변을 당할 뻔한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기억이 사라지기도 전에 이런 일이 발생했으니, 이토나 무쓰로서도 황망한 일이었습니다.


 수상 이토, 외무대신 무쓰 등은 서둘러 이홍장의 문병을 갔습니다. 이홍장은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이러한 일은 다소 각오하고 왔습니다."


 테러범은 고야마 도요타로라는 인물로, 신도관(神刀館)이라는 우익 단체에 소속된 일본이었습니다. 고야마는 '지금 강화를 맺으면, 청나라는 다시 재기해서 일본과 싸울 것이다.' 라는 이유로 암살 시도를 했다고 밝혔습니다. 


 무쓰는 상황이 난감해졌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안그래도 외국의 반응을 보니, 이홍장을 불러들인게 꼭 좋지만도 않았는데, 평생동안 외국을 한번도 가본적이 없는 노인, 그것도 무려 72세의 노인이자 중국의 간판인 이홍장을 오라마라 하면서 불러들였다는 사실이 보도되면서, 이를 일본의 오만으로 치부하는 반응이 여럿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런 노인이 테러까지 당한 것입니다. 국제사회의 반응은 묘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무쓰는 "이것은 일본 정부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흉악범의 테러다." 라고 말했고, 이는 사실이었지만 어찌되었건 사건은 일본 땅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러니 법적인 문제와는 별개로 심정적인 문제는 캥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무쓰는 필사적으로 일을 수습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는데, 덴노 부부는 시종무관을 직접 보내 이홍장을 문병하게 하는가 하면, 왕비는 손수 붕대를 만들어서 보냈고, 해당 사건이 벌어진 지역의 지사와 경찰부장은 해임되었습니다. 메이지 덴노도 이례적으로 칙어를 발표해 유감을 표시했습니다.


 의사들은 이홍장을 진단했고, 다행히 탄알을 제거하면 상처는 쉽게 나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문제는 그 후인데, 총탄을 제거 한 후에는 한동안 절대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홍장은 격앙되어 소리쳤습니다.


 "지금 국가의 위태로움이 경각에 달려 있는 상황에서 평화를 성사시키는 일이 늦어져서는 안된다. 내가 어찌 시간을 지체해 국사를 그르칠 수 있겠는가. 죽을지언정 나는 탄알을 뽑지 않겠다."


 테러를 당했던 이홍장의 옷은 혈흔으로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그 옷을 보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흘린 피다." 라고 감탄하자, 이홍장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죽어서 나라에 득이 된다면, 나는 기꺼이 죽을 수 있다."


 이홍장은 총탄이 계속 박힌채로 침상에 누웠지만, 그러면서도 실질적인 현장의 일은 본인이 모두 알아서 처리했습니다. 더 이상 미룰 수도 없어 일본은 무조건 정전을 제시했습니다. 이홍장도 이홍장이지만, 러시아군 3만이 청나라 북부로 이동중이라는 정보가 들어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일본 군부는 '정전은 말도 안된다.'는 입장으로 버티고 있었지만, 러시아 군의 이동 소식과 이토의 설득 때문에 결국 정전에 찬성했습니다. 4월 1일 일본의 강화 조약안이 전달되었습니다.


 청나라는 이 조약으로 인해 군비 배상금 2억냥을 지불해야 했고, 광대한 영역의 영토를 할향했습니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전쟁은 이렇게 종결되었습니다. 4월 17일에는 양측의 조인식이 이루어졌는데, 이홍장은 조인식이 끝나고 바로 배에 올라 귀국했습니다. 이홍장은 한스럽게 말했습니다.


 "수많은 화살의 과녁이 되고, 수많은 비방이 쏟아지리라."


 실제로 그러하였습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었지만 문정식 등 주전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있었는데, 정확히 말하면 이홍장을 매국노라고 욕하기 위해서 주전론 등을 주장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홍장이 수백만 냥의 은을 일본의 탄광회사에 맡겼다던가, 이홍장의 아들이 일본에 무역상사를 3개 가지고 있었다던가 하는 출처조차 불분명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비난했습니다.


 "패전했다는 소리를 들으면 언제나 기뻐하고, 승전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언제나 슬퍼했다."


 앞서 말했다시피, 이홍장은 청일전쟁을 극도로 꺼렸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고 군대가 무너지고 함대가 박살나면, 이는 북양군벌의 힘이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즉, 저 비난 대로라면 이홍장은 자신의 사병에 가까운 부대가 박살나는데도 즐거워 했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야비하고 치졸한 비난도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딱히 본인도 정의감 넘치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공친왕은 이홍장에게 비난을 퍼붓는 신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강화 회담이 결렬되면 주상을 서안으로 옮겨서 끝까지 항전해야만 합니다. 바로 이때, 주전론을 주장한 분들은 '반드시' 이 자금성에 남아 있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성을 지키다 죽는다면, 그대들의 장한 뜻을 관철해 후세의 귀감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에 주전론자들의 기세가 한풀 꺾였습니다. 


 '그들은 일말의 책임감도 느끼지 못한 채 다른 사람 뒤에 숨어 헐뜯기만 했지, 오늘날에 이르도록 개선할 방법을 생각한 적도 없다. 이들이 실제로 나라를 망하게 한 자들이다. 이홍장은 비난 받아 마땅하지만, 이런 자들은 이홍장을 비난할 자격조차 없다' 던 양계초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홍장이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며, 진회나 장방창과 같다고도 한다. 만약 이 말을 한 사람들을 이홍장의 자리에 가져다 놓는다면, 결말은 과연 어떠하였을까?"


 귀국한 이홍장은 강화 회담을 보고하기 위한 상주문을 작성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신이 늙고 어리석어 참으로 일을 잘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황상께서는 위에서 격려하시고, 내외 신료들은 합심 협력하여 조속한 시일 내에 변법(變法) 하여 인재를 구하고, 자강(自彊) 하여 적을 이기면, 천하가 두루 다행일 것입니다."


 한편, 귀국한 이홍장에게 데트링은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습니다. 


 "전임 주청 독일 공사로부터 전문이 있었음. 열강이 청나라의 영토 할양 문제에 대해 논의했으며, 모두 일본의 요구를 부당하다고 인정했음. 청나라는 화의를 서두를 필요가 없음."


 하지만 이홍장은 일본군의 증원군이 출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조인식은 했지만, 비준서 교환등을 압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홍장은 생각했습니다. 만약 지금 회담을 결렬시키면, 더 많은 땅과 더 많은 군대를 잃을 것이며, 무엇보다 더 많은 백성을 괴롭히는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말입니다. 


 한편, 일본에서는 러시아가 군사적으로 개입하려고 하고, 러시아와 프랑스 연합함대가 움직이려 한다는 보고를 듣고 패닉에 빠져 몇가지 조약을 청나라에 유리하게 바꾸고는 서둘러 비준서를 교환했습니다. 그러나 4월 23일,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 세 나라의 대표가 정식으로 일본의 요동 영유에 대해 항의 했습니다. 그리고 명확하게 요동 반도를 포기할 것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히로사의 대본영에서는 즉시 어전회의가 열렸습니다.


 삼국의 권고를 거절하자, 소위 열국회의를 열어 요동문제를 거기서 해결하자, 혹은 삼국의 권고를 순순히 받아들이자. 이런 의견들에 대해 이토는 첫번째 의견은 불가능한 이야기라고 제쳐두고 세번째는 너무 무기력하므로 두번째 의견으로 하자고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병으로 요양중인 무쓰에게 찾아가 의견을 물었습니다.


 무쓰는 열국회의를 여는것은 좋은것이 아니라는 뜻을 밝혔습니다. 세 나라 이상의 나라들이 참가하면 요동반도 이외의 문제도 튀어나올 수 있고, 그렇다면 기껏 체결한 시모노세키 조약이 엉망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무쓰는 안간힘을 써봤지만 사태를 호전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러시아가 저렇게까지 나오는건 무력 행사도 할 의지가 있다는것이고, 지금의 일본에게는 러시아와 맞서 싸울 여력은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일본은 청나라에 요동 반도를 할양하겠다고 결정했습니다.


 이 당시 일본은 욱일승천하다가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 쓴 분위기였습니다. 강경파들은 이토에게 찾아가 이것은 말도 안된다고 항의했지만, 이토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금은 여러분들의 탁견을 들을때는 아니다. 군함과 대포를 상대로 숙의를 해봐야 한다."


 이에 따지던 사람들은 대꾸 한마디 하지 못하고 물러났습니다. 이러한 반응은 물론 중국에서도 일어났습니다. 무엇보다,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대만은 일본의 영역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대만에 살던 사람들은 본토로 건너와 항의했지만, 아무리 비분강개한 감정으로 눈물을 흘려도 군함과 대포를 상대할순 없었습니다. 이제 북양 함대는 단 한척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전쟁은 완전히 종결되었지만, 그것도 남의 힘을 빌려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홍장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사퇴했습니다. 청일전쟁의 패배는 그 이후 중국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일본은 몇차례의 공격으로 중국이 30년동안 쌓아올린 '자강'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렸을 뿐 아니라, 어떤 서양 열강으로의 공격보다도 더 큰 굴욕감을 중국에게 선사했습니다. 한때 자신들의 위대한 문명이 지니고 있던 아스라한 빛의 수혜자일 뿐이라고 평가절하했던 그 일본이, 이제 오히려 중국을 때려눕히게 된 것입니다.


 대다수 중국인들은 자신드르이 나라가 가진 허약함이 이렇게 철저히 밝혀지게 되자 대단한 놀라움과 창피함을 느꼈고, 곧 정부의 권위에 대해 더할 나위 없는 불신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 일본이 이길 수 있는 까닭이, 근대적인 무기를 잘 사용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혹은 군사적인 것이 아닌 여러가지 개혁 때문이었는지 자기 자신들에게 묻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이제 가장 보수적인 학자들조차 절실히 품게 된 의문이었습니다.


 1895년, 회시가 벌어지는 베이징으로 두명의 사나이가 발길을 옮겼습니다. 한명은 스승이었고, 또다른 한명은 제자였습니다. 곧 베이징에 도착한 그들은 사방이 요란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회시에 참가하러 온 전국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동쪽 바다의 작은 일본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에 분개했으며, 요동과 대만의 할양, 2억 냥의 배상금 등에 대한 문제로 자기들끼리 열변을 토하면서 흥분했던 것입니다.


 이때, 스승이었던 남자가 흥분한 지식인들 사이로 나섰습니다. 그는 격분한 사람들에게 세가지 이야기를 내용으로 하는 상서에 서명할 것을 호소했습니다. 첫째, 강화조약 거부. 둘째, 천도 항쟁. 


 그리고, 셋째. 변법의 실행.


 바로 37세의 강유위(康有爲). 그리고 강유위의 제자 양계초가, 역사의 전면으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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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O-di | 작성시간 13.04.14 지금 중국에 있는데, 중국인들의 일본인에 대한 반감은 정말 무시 못 합니다.
    이러한 분노의 시작은 뿌리 깊다는 걸 알수 있네요..
  • 작성자사탕찌개 | 작성시간 13.04.14 강경파들이란 참...
  • 작성자명나라일대충신이자명장인왕진느님 | 작성시간 13.04.14 오오 글이 완전 예쁩니다
  • 작성자2Pac | 작성시간 13.04.19 역사적으로 항상 강경파가 득세하기 마련인가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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