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중화의 황혼]중화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101) ─ 잠룡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4.16|조회수432 목록 댓글 1



 욱일승천하는 일본, 처절하게 나자빠진 중국, 부패하고 비리에 가득한 환경, 낙후된 무기, 빈곤한 주민, 압도적인 서양 열강.


 그리고, 무너진 자존심.


 여전히 대다수의 학자들은 전통과의 급격한 단절을 두려워 하였으나, 청일전쟁의 직접적인 결과로 몇몇 학자들은 전례 없는 급진적 개혁을 위한 선전과 조직에 앞장섰습니다. 서구화된 지식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청조의 능력을 믿지 않았습니다. 게중에 혹자는, 심지어 중국이 외국의 아래에서 자비로운 보호를 받는것이 낫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영국의 한 관리는 절망에 찬 오정방이 이렇게 말하는것을 들었다고 전했습니다.


 "중국이 지금처럼 치욕스럽고 무력하면서도, 전혀 개선의 희망이 없을 바에야 차라리 두번째의 인도가 되기를 바라겠다."


 격심한 외국과의 경쟁에서 점점 그에 따른 분노를 쌓아갔던 실업계(實業系)에도 이와 같은 위기감이 퍼져나갔습니다. 상인들은 조직을 만들어 상황의 개선을 요구하는 압력을 넣기 시작했으며, 전쟁 시기에 무거운 세금의 부담을 져야만 했던 자산가들은 정부가 자신들의 세금을 국방비로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의지나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반 시민들 역시 관계당국이 사회의 바닥에 번져 있는 무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을지 걱정하였습니다. 


 사기가 떨어지고 제대로 급료도 받지 못한 채 해고된 병사들은, 전쟁이 끝난 중국에 우글거렸습니다. 무리를 지은 그들은 떼도둑이 되거나 비밀결사로 변했는데, 어느 쪽이건 치안은 악화되어갔습니다.


 그리고 야심만만한 음모가들 중에는 바로 쑨원도 있었습니다. 




 목상을 때려부수던 소년은 이제 30세를 바라보는 장성한 청년이 되었고, 의료업으로 인해 무탈한 생활을 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러나, 쑨원은 곧 의료업이 지방에서 명성을 얻기에는 적절한 직업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명성이 필요한것은 나라에 도움이 되려는 이유입니다. 쑨원은 자신이 받은 교육과 지식을 좀 더 큰 일에 쓰고 싶어했습니다.


 이러한 사고는 상당히 급진적인 결론으로 다다랐고, 칼을 들고 환자를 치료하던 의사는 이제 작은 촌락에서 폭발불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또한 그는 진소백(陳少白), 육호동(陸皓東)같은 친구들과 선동적인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쑨원이 마침내 친구들조차 놀라게 할 정도로 급작스럽게 의료업을 떠난것은, 하나의 동기 때문이었습니다. 쑨원은 이홍장을 만나려고 했습니다.


 1894년, 쑨원은 천진으로 가서 이홍장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쑨원은 경제개발이 필요한 인력과 자원의 합리적인 이용을 권하고, "외국이 부강한 원천은 결코 굳건한 함선과 효율적인 총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 주장했습니다. 서양의 우월성은 근대산업시대를 특징짓는 과학과 지식의 적용에서 유래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목표는 쑨원의 계획을 파는것 아니라, '쑨원 자체' 를 파는데 있었습니다. 쑨원은 이홍장이 자신을 써주기를 원했습니다. 쑨원은 솔직하게 자신이 학위취득을 위한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음을 인정하고, 그러나 자신이 해외에서 공부했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이것이 도움이 될 수 있을것이라고 권했습니다. 이홍장은 재능있는 사람을 인정해 주는 정치가라고 들었다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당시 이홍장은 코앞에 다가온 청일전쟁 때문에 모든 신경을 그쪽으로 돌리고 있던 참입니다. 따리서 이홍장은 쑨원을 만나지도 않았고, 쑨원의 편지를 읽기라도 했는지조차 의심스럽습니다. 좀 더 참을성 있는 열망자였다면 기회를 조금 더 기다렸을지도 모르지만, 쑨원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관료 후원자를 추구하는것은 헛된 일이라고 확신하고 천진을 떠났습니다. 이홍장의 막하에서 일을 하려던 쑨원이었지만, 이제 그는 홍수전의 태도를 취했습니다.


 1894년 여름 이후, 쑨원의 발걸음은 하와이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어째서 하와이인가? 


 쑨원이 생각한 혁명의 가장 기초적인 필요 조건은 다름 아닌 '돈' 입니다. 쑨원은 그의 평생에 걸쳐 재정을 강조했습니다. 쑨원은 산속의 동굴에 혁명 정부를 건설하거나, 혹은 길게 끄는 내전을 치루려고 계획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과거의 홍수전과도, 혹은 동시대의 다른 격정적인 혁명가들과도 차별화되는 요소였습니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돈과, 인간 관계와, 힘에 의한 조조종이었습니다.


 또한, 쑨원은 전세계의 화교사회를 주목했습니다. 중국인은 지구상 어디에나 진출해 있었고, 대부분의 지역에서 자신들의 독자성을 유지하기 있습니다. 쑨원은 이 화교사회를 '정치화' 시키려고 노력했는데, 이러한 쑨원읜 시도는 설사 쑨원이 중국 내에서 처절한 실패를 당하고 모든 기반을 상실했을 때 조차도, 재기할 수 있고 다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전쟁으로 말하자면 보급로를 단단하게 다져두고 전투에 나선 셈입니다.


  그리고 하와이에는 가장 확실한 후원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쑨원의 형인 손미가 있었던 것입니다. 




 손미


 분명하게 말하지만, 손미는 혁명 사상 등에서는 전혀 조예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언가 큰 일을 하려는 동생' 에 대해서, 마땅한 돈을 내주는 일은 전혀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손미는 쑨원의 종교적인 태도에 대해서는 간섭을 심하게 하던 손미였지만, 쑨원의 정치적인 태도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손미는 기꺼이 돈을 내주었고, 호놀룰루의 주요 인사들에 대해 소개장을 직접 써주었습니다.


 쑨원은 형의 도움으로 하외이의 화교 네트워크를 넘나들며 노력했는데, 대다수 화교들은 만주 정권을 혐오하고는 있었지만, 딱히 그 전복을 위해 기꺼이 활동하고자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1894년 11월 24일 무렵 쑨원은 마침내 20여명 정도의 젊은이들을 설득하며 반왕조 조직을 만드는데 성공했습니다. 쑨원은 이에 대해 흥중회(興中會)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중국의 번영을 위한 단체라는 소리입니다. 반왕조적인 조직을 색출해려는 정부라고 해도, 흥중회라는 이름만 보면 의심을 하긴 힘들었습니다. 


 흥중회의 회원들은 5달러씩 입회금을 내었고, 보다 더 많은 돈을 기부하도록 촉구 받았습니다. 초기의 입회자 중에서는 미국은행의 부지점장, 상점주인, 하와이정부 번역관, 상인 겸 농장주, 부유한 목재거래상, 쑨원의 학교 동급생 등이 있었습니다. 


 일본군이 청조 군대를 여지없이 깨부수고 있던 1895년 1월, 쑨원은 갑자기 하와이에서의 정치 운동을 중단하고 홍콩으로 이동했습니다. 비록 홍중회 조직원들의 전체적인 기부는 실망스러운 수준이었지만, 형인 손미는 막대한 액수의 자금을 지원해주었고 사탕수수 농장주였던 등음남(邓荫南)은 전재산을 처분해서 자금을 지원했습니다.  



양구운


 홍콩에서 쑨원은 자신만큼 야심만만한 젊은이들을 끌어들였습니다. 특히, 게중에 양구운(杨衢云)은 쑨원보다 다섯 살 위에, 만만찮은 개성과 상상력의 소유자였습니다. 쑨원은 양구운이 개별적으로 조직한 단체와 손을 잡았는데, 두 집단은 흥중회의 홍콩지부를 건립하면서 우선 대립을 피하기 위해 수장의 자리는 비워두었습니다.


 홍콩의 음모자들은 주위의 환경을 둘러보면서 벌써부터 조심스레 계획을 진행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삼합회의 구성원들이 시멘트로 위장된 무기와 탄약을 가지고 광저우로 들어가고, 주위에 있는 유적들을 끌어모으고, 다른 성 내에서 연달아 일어나는 봉기를 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금 문제에 대해서는 양구운이 담당했습니다. 양구운은 여기저기서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돈을 끌어모았고, 쑨원 역시 의사 생활을 하면서 벌었던 자금을 모조리 쏟아부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쑨원의 동조자 중 한명이었던 한 미국인(혹은 영국인)은 광저우 교외에 비밀 무기공장을 치렸습니다. 동시에 쑨원은 자신을 열정적이면서 동시에 온건적인 근대화론자처럼 꾸미고 행동했습니다. 그와 그의 동료들이 물밑에서 삼합회나 유적의 거친 우두머리들과 접촉하고 있었지만, 외부에서 보는 쑨원은 과학적 영농, 보통교육 등을 주장고, 사회주의자들과 어울리는 사람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당시 쑨원이 접근한 인물 중에는 유학순(劉學詢)이라는 인물도 있었습니다. 역으로 유학순이 쑨원에 접촉했다고 할 수도 있었는데, 유학순은 사회가 혼란해지면 나라를 세워보려는 야심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학순은 가능한 자신에게 닥칠 위험을 피하면서도 쑨원의 반란 음모를 부추겼는데, 물론 쑨원은 유학순의 신하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장단은 맞춰 주었습니다. 쑨원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시치미를 땔 수 있는 인물이었고, 기본적으로 대단히 자신감이 넘쳤기에, 경우에 따라 이념적인 원칙의 양보를 하는 등의 융통성을 발휘하는것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쑨원은 기본적으로 낙관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낙관적인 인물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그처럼 큰 도박을 걸 수 없었을 것입니다. 



 흥중회 홍콩 지부의 창립회에서 맹세한 인원은 겨우 10여명도 안되었습니다. 그런데도 한달 후에 그들은 광저우의 점령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터무니없는 망상이자 객기에 불과했지만, 이 망상가들의 발걸음이 어떻게 결론이 날지는, 당시의 시점에서는 알 수 없었습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배달민족 | 작성시간 13.04.17 어떻게 보면 청나라와 조선은 저때 비슷한일이 많았던거 같네요;; 변법-갑신정변 의화단-동학농민운동 등.........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