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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102) ─ 구사일생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4.20|조회수343 목록 댓글 1




 장대한 혁명의 전주곡이 될 것 같았던 거사를 앞두고, 조직의 두 핵심 중에 양구운이 총통으로 뽑혔습니다. 쑨원과 그의 동료들은 양구운 및 그 추종세력들이 활동하고 있던 홍콩의 중요성 때문에 그에게 책임자 자리를 양보한 것이빈다. 그러나, 10월 26일 이 광저우의 몽상가들은 혁명은 커녕 총 한발 쏘아보지 못하고 줄행랑을 놓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광저우의 공권력은 이미 훨씬 전부터 쑨원을 의심스럽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사실 쑨원의 태도는 의심스러울만한 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총독은 쑨원을 그저 개혁주의자들의 주장을 읆어대는 별난 뚜쟁이 정도로 여겼기에, 외국선교사들과 관계가 있어보이는 그를 건드리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홍콩에서 양구운이 양구운이 회원모집 활동을 하던것이 주목을 끌어버렸고, 결국 경찰은 움직였습니다. 쑨원은 간신히 몸을 피했지만, 동료였던 육호동 및 몇명은 붙잡혀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광저우의 관리들은 음모를 사전에 분쇄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꽤 만족스러워했지만, 엄중한 사후 수색을 하려고 하진 않았스빈다. 당시의 분위기를 보자면, 지독하게 반란을 뿌리채 뽑으려는 시도는, 오히려 반란을 더 촉발시킬 있는 위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관리들은 불을 들이붙는 대신에 '대중을 속이는' 무리들에게 비난을 퍼붓는 정도에서 일을 마무리 했습니다. 물론, 쑨원의 목에는 최고액의 현상금을 붙여두었지만 말입니다.


 쑨원은 10월 29일 홍콩에 도착했는데, 지인이었던 캔틀리(Cantlie) 박사라는 인물이 소개시켜 준 변호사는 쑨원과 그 동료들에게 서둘러 홍콩을 떠나라고 충고했습니다. 당시 가장 빨리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이 일본행 기선이었기에 쑨원, 진소백(陳少白), 정사량(鄭士良) 등과 함께 일본 고배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일본 언론들은 그들에게 짦은 관심을 가졌지만, 광저우에서의 봉기가 실패한 이상 딱히 더 나올 이야깃거리도 그 시점에선 없었습니다. 


 조직은 뿔뿔히 흩어졌습니다. 양구운은 요하네스버그로 건너가서 흥중회의 분회를 만들었고, 쑨원은 변발을 잘라버리고 하와이로 떠나서 6개월 정도 시간을 보냈습니다. 쑨원은 미국으로 건너가려는 생각이었지만, 마침 우연하게 캔틀리 박사를 만났습니다. 박사는 영국으로 가는 중이었고, 런던에 오면 자신을 찾아오라고 말했습니다. 쑨원은 3개월 무렵 미국에서 성과없는 시간을 보낸 뒤 영국으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일은 청나라 정부의 감시망에 걸려들었습니다. 청나라 정부는 이 일을 실제보다 더 위험하게 생각했는데, '선동가가 해외자금에 의지하여 반란의 불을 지피고 있다' 고 본 것입니다. 안그래도 동남아시아를 비롯하여 전세계의 청나라 외교관들에게 쑨원을 잡으라는 지시가 내려졌는데, 쑨원은 미국에서 쉽게 포착이 되었고 워싱턴의 청나라 공사관은 쑨원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찍은 사진까지 입수해서 그의 행로를 계속 쭉 감시했습니다. 


 그리고 쑨원이 뉴욕에서 리버풀로 향할때, 청나라의 미국 공사는 즉시 런던에 있는 동료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반역자' 가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런던 공사는 영국의 외무성에 "쑨원이 도착하는 즉시 잡아다 청나라에 송환할 수 있는가." 에 대해 여부를 물었으나, 영국 외무성에서는 곤란하다는 대답을 보내왔습니다. 


 쑨원은 자기에게 올가미가 던져진 줄도 모르고 캔틀리 박사가 사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신의 집을 하나 구해 지냈습니다. 쑨원은 영국에서 런던의 명승지를 구경하거나, 혹은 대영박물관 도서관에서 책들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영국의 청나라 공사관은 Slater 사립탐정소에 의뢰해서 쑨원의 행적을 추적하고 있었습니다. 청나라 공산관은 캔틀리 박사의 집으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쑨원은 경계심이 부족했습니다. 


 1896년 10월 11일 오전 10시 무렵, 쑨원은 길을 걷는 중 우연히 동향인이 자신에게 말을 건내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영국 한복판에서 중국인을 만나자 의심을 덜었는지, 쑨원은 그를 따라 어떤 건물로 들어갔는데, 말할 나위도 없이 이는 청나라의 공사관이었습니다. 쑨원은 곧 4층에 감금되었습니다.


 쑨원이 어떤 방식으로 공사관에 들어왔건 이것은 불법적인 일이었고, 국제법상의 선례를 만들어나가던 영국정부의 판단에 달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선 영국의 관계기관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아야 따지는게 가능했는데, 감금된 쑨원은 외부와의 연락이 전혀 차단 되어있었습니다. 쑨원은 스스로 능지처참 될 것이라고 여기면서 두려워 했습니다.


 당시 쑨원의 납치를 주동하던 일을 주도하던 인물은 매카트니라는 인물로, 영국 공사관에서 서기관으로 근무하던 인물이었습니다. 쑨원의 납치 시점부터 사흘 뒤 매카트니는 중국으로 한 명의 '미친 사람'을 실어날 배를 구하기 위해 협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쑨원은 쑨원 나름대로 외부로 연락을 취하기 위해 전갈을 밖으로 보내려고 시도했지만, 매카트니는 번번히 이를 가로채버렸습니다.


 최후가 머지 앉아 보였을 무렵, 쑨원은 간신히 콜이라는 공사관의 고용인에게 자신이 미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그를 설득했습니다. 콜은 매카트니의 명령을 어기는 일을 주저했지만, 쑨원이 20파운드의 돈을 주면서 캔틀리 박사에게 소식을 전해주기만 한다면, 천 파운드를 더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콜은 공사관의 영국인 여자 관리인에게 이를 전해주었고, 관리인은 익명으로 쪽지를 캔틀리 박사의 우편함에 집어 넣었습니다.


 한편 캔틀리 박사 등은 쑨원이 보이지 않자 크게 걱정하며 탐문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10월 18일, 그들은 한 통의 쪽지를 볼 수 있었는데,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저는 지난 일요일 중국 공사관 안으로 납치되어 갔습니다. 이제 영국에서 중국으로 몰래 보내질 형편인데, 이렇게 되면 저는 죽습니다. 빨리 저를 구출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저를 중국으로 실어나를 배가 벌써 중국 공사관의 명의로 계약되었고, 저는 누구와도 연락이 닿지 않도록 감금되어 있습니다. ……아아, 저는 너무나 비참한 상황입니다."


 캔틀리 박사는 즉시 움직였습니다. 그는 런던경찰국, 외무부, 타임지에 사실을 알렸고, 언론과 공권력이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기 이전에 사설 탐정을 고용해서 공사관 건물을 감시하게 했습니다. 다만 공고롭게도 이 탐정 사무소는 청나라 공사관의 의뢰로 쑨원을 감시하던 그곳이었습니다. 이중 스파이 노릇을 하게 된 셈입니다.


 19일 저녁 무렵이 되자, 런던경찰국도 움직였습니다. 경찰국의 병력은 공사관을 감시하기 시작했고, 템즈강의 경찰도 중국으로 떠나는 배들을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22일, 외무부는 이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여기면서 쑨원의 석방을 강요하도록 압력을 넣었습니다. 


 매카트니는 쑨원을 내놓지 않기 위해서 여러가지 수작을 부렸으나, 23일 무렵이 되자 이 흥미로운 소식은 글로브(Globe) 지에도 전해졌습니다. 글로브 지는 쑨원의 피랍문제를 대서 특필했고, 기자들과 구경꾼들은 공사관 앞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외무부는 런던의 한복판에서 동양의 기분 나쁜 음모가 드러났다는 사실에 당황해서 즉시 이 문제를 해겨하게 만들었고, 청나라 공사관도 결국 압력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캔틀리 박사와 외무부 및 런던경찰국의 관리들은 구경꾼 사이를 헤집고 쑨원을 데려와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켰습니다.


 결과적으로, 청나라 정부는 쑨원을 잡아다 능지처참을 주는 대신에, 오히려 전세계의 주목대상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조국에서 혁명을 일으키려던 젊은이가, 멀고 먼 런던까지 와서 소설에서나 볼법한 음모의 희생양이 될 뻔하다. 누구라도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게다가, 쑨원 본인으로서도 광저우에서의 실패 이후 흔들리던 마음을 절대적인 신념으로 다시 바꿀 수 있었습니다. 


 쑨원의 주변으로 기자들이 몰려들었고, 쑨원은 그토록 바라던 일, 즉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쑨원은 자신과 인터뷰를 하는 기자들에게 아주 능동적이고 매력적인 인물이라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쑨원은 영국 정부와 언론의 도움에 대해 감사를 표하고, 자신이 "어느때보다도 절실하게 입헌정부와 문명된 인민의 의미" 를 깨달았을 뿐 아니라, "나의 사랑하는 조국, 그러나 억압받고 있는 조국에서 진보와 교육, 그리고 문명이라는 대의명분을 실현시킬 수 있는 채비" 가 되어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제 런던에서 손일선(Sun Yat-sen)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게 되었습니다. 


 비슷한 시각, 중국에서도 잔잔한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변법파들이 전면에 나서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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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무장공비 | 작성시간 13.04.26 쑨원은 간신히 몸을 피했지만, 동료였던 육호동 및 몇명은 붙잡혀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거 황비홍2 내용이군요 ㅎㅎ 어렸을때 나름 인상깊고 재미있게 봤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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