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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104) ─ 떠나는 이, 그리고 머무르는 이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4.25|조회수443 목록 댓글 2






 장음환(張蔭桓)


 정책을 결정하려면 총리아문에서 이야기를 나눠야 합니다. 이 당시 아문의 실력자는 장음환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청일전쟁 처리 문제로 일본에 가려다가, 일본으로부터 자격 문제로 거부를 받아 돌아왔던 인물입니다. 그 이후에 이홍장이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서 협상을 했다는 이야기는 앞서 한 바가 있습니다. 장음환은 강유위의 동향 사람이었습니다. 거기에 외국에서 지낸 경험도 있어서, 그는 강유위의 변법에 찬성 했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 1898년 무술년, 강유위는 일본변정고(日本變政考)와 아피득변정기(俄彼得變政記)라는 저작을 상서와 함께 황제에게 바쳤습니다. 전자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 대한 이야기였고, 후자는 러시아 표트르 대제의 개혁에 대한 저작이었습니다.


 당시 제국의 황제는 광서제입니다. 그러나, 실제 실권자가 서태후임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어린 시절이야 어쩔 수 없었다지만, 광서제의 나이가 성년에 이르러서도 서태후는 실제 정무를 담당했습니다. 물론, 형식상으로야 그녀는 정치 권력을 황제에게 돌려주고 이화원에 은거하면서 지내고 있엇지만, 그 힘은 여전히 강력했던 것입니다. 


 광서제는 서태후가 낳은 자식이 아닙니다. 서태후는 광서제에게 끊임없이 감시의 시선을 놓지 않았으며, 광서제도 이것을 의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불만스러울 수 밖에 상황에서 강유위의 상서는 광서제에게 자립할 의욕을 주었습니다. 메이지 덴노도 해냈고, 표트르 대제도 해냈습니다. 그들도 해낸것을 중화의 당당한 황제인 자신이 해내지 못할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광서제는 개혁을 하고, 좀 더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서태후로부터 자립을 하기 위해 일어섰습니다.


 게다가 5월 24일, 오랫동안 정치 권력의 한 축이던 공친왕이 사망했습니다. 이것 역시 광서제에게는 좋은 일입니다.


 6월 11일, 광서제는 국서를 정하는 조서를 반포하고 다음날에 강유위를 불러 변법에 대한 일을 논의했습니다. 강유위는 총리아문장경(總理衙門章京)에 임명되었는데, 강유위는 자신의 의지를 좀 더 힘있게 밀어부치기 위해 보국회(保國會)라는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일종의 개혁 연구회 성격의 단체였는데, 이러한 조직을 만드는 등의 일에서는 주로 양계초가 힘을 썻습니다.


 이제 드디어 유신이 시작되었습니다. 강유위는 헌법, 국회, 철도, 학교, 군사 등 다방면에서 과거 일본의 예 등을 따라 황제에게 건의를 올렸습니다. 쑨원이 광동의 변방에서 봉기를 이르켜, 전중국으로 휩쓸게 할 계획이었다면, 강유위는 수도 베이징의 자금성에서 변법을 시행하여, 그 물결이 전국에 영향을 주려고 하였습니다.




청일전쟁으로부터 신해혁명, 국공내전과 문화대혁명의 광풍을 모두 지켜보았던 주더는, 아그네스 스메들리와의 인터뷰에서 이 무렵인 유년의 기억에 대해 더듬더듬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어린 시절 가난했던 주더의 집안은 이후 시간이 지나자 약간의 여유가 생기게 되었고, 서당에 나서게 되었는데 그 서당의 선생은 약간 특이한 인물이었다고 회고 했습니다. 


 60세 무렵이었던 선생은 전통적인 과거 시험에 대한 공부를 학생들에게 시켰지만, 서양의 여러 나라들이 '과학' 이라는 묘한 학문 때문에 번영을 누리고 부강해진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제자들에게 열심히 공부하여 외국에 나가 학문을 배우라고 강조했습니다. 물론, 선생은 '과학' 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는 몰랐지만 어찌되었건 과학을 열심히 옹호했습니다. '과학' 이라는것을 배우지 않으면 앞으로 중국은 자멸할 수 밖에 없는 시기가 온다는 것입니다.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배한 이후, 그 소식은 비록 느릿느릿 하긴 했지만 동북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의 시골에도 알려져 왔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외국인이라고는 코빼기도 볼 수 없는 벽지에 살았던 주더도, 당시 외국인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와 혐오가 대단했다고 회고했습니다. 바꿔 말하면 이는 청나라 정부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집니다.


 이런 상항에서 서당의 노선생은 멀리 있는 나라 중에서는 분명 선량한 외국인들도 있을 것이며, 자신은 '개혁운동' 의 신봉자이며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외국으로 나가 과학을 습득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그 '개혁' 이 대체 무엇을 말하는지는 모르지만, 여하간 소문으로 들려오는 강유위의 '입헌군주' 제와 쑨원의 '공화제' 등을 포괄하는 이야기로 해석했습니다. 노선생은 공화제라는 뜻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을 했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는 결국 파악할 수 없었다고 주더는 이야기 했습니다.


 여하간 선생은 서양 학문이라면 무엇이든지 대단한 열의로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하루는 우연히 각도계, 계산척, 그리고 수학 교과서 등을 얻게 된 선생은 즉시 주더와 자신의 아들 등을 불러 모으고 70세의 나이로 며칠 밤을 계속해서 연구하고, 또 공부했습니다. 어느날은 어떤 여행자가 선생에게 책자를 하나 건내준 일도 있었습니다. 그 여행자는 이것이 서양 과학에 대한 것이라고 말했고, 선생은 수업을 중단하고 마치 경서를 암송하듯이 그 책자를 읽고, 또 읽어 거의 달달 외어버렸습니다. 주더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약간의 연민과 씁쓸함이 담긴 미소를 지었습니다.


 "사실 그 책자는, 현대식 기계를 설치한 어느 신축 비누공장에 관한 극히 초보적인 형태의 팜플렛에 불과했습니다. 책자 속에는 기계의 구조를 그려놓은 그림도 들어 있었지요."


 그런 분위기 속에 지내던 주더는, 자신이 지내던 그 조그만 서당에도 '무술변법(戊戌變法)' 으로 인한 개혁의 열기가 회오리치고 있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군대, 학교, 재정, 과거제도 등 '토지' 를 제외한 모든 부분에서 개혁이 단행되었고, 산업화 추진계획이 수립되었고, 주 1일 휴가제가 채택되었으며, 또 변발까지도 폐지되고 있었습니다.


 서양학문을 가르치는 학교들은 우호죽순으로 신설되었고, 전족을 금지시킨다는 소문도 떠돌았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주더의 시골 사람들은, 물론 전족을 하지 않은 여자가 일을 더 잘할 것은 분명하지만, '큰 발' 을 지닌 여자를 누가 데려가 결혼하려 하겠는가 하고 의문을 품었습니다. 여하간, 시골 사람들은 개혁에 대해 별 관심이 없거나 혹은 탐탁찮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주더는 그 이유를 토지제도에서 찾았습니다.


 "개혁의 바람이 토지제도 쪽으로는 스쳐가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1898년의 개혁 주도세력은 일본의 선례를 따르려 했지요. 즉, 농민은 지주의 예속 아래 그대로 놓아둔 채, 자본주의 바탕 위에서 나라를 근대화시키려고 계획했습니다. 이들은 농지개혁을 부르짖긴 했으나 그것은 섬유가 긴 이집트나 미국의 목화씨 따위를 도입해서 심자는 뜻이었어요. 농민들은 다른 개혁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만약 근본적인 토지개혁이 단행되었다면 이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을 겁니다."


 주더가 이 인터뷰를 한 시기는 1937년 무렵이고, 잘 알려졌다시피 중국 공산당은 토지 제도의 개혁을 가장 큰 선결과제로 홍보했습니다. 따라서 토지에 대한 견해는 그러한 정책을 추진하는 홍군의 핵심 지도부로서 주더의 생각이 담겨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강유위의 변법이 민간에선 크게 와닿는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The Ci

 서태후


 변법파는 국정개혁을 시도했고, 광서제는 이를 바탕으로 황제 친정의 결실을 거두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서태후가 가장 경계하고 있던 일입니다. 궁전이라는 정치 암투의 수라장에서, 오랜 시간 음모의 괴물로 군림하던 서태후가 팔짱을 끼고만 있을 리는 없었습니다.


 광서제는 나름대로 비장한 결의를 가지고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이 젊은 황제는 거의 힘이 없었습니다. 이를테면, 그는 황제라는 존엄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이품 이상의 관원을 임명할 권환도 없었습니다. 변법 조서가 나온지 며칠도 되지 않아, 호부상서였던 옹동화가 파면되었습니다. 옹동화는 강유위를 광서제에게 연결해준 인물이자 황제의 교육 주임이었지만, 광서제는 그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일품 관원에 대해서는 임명권은 커녕 발언권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서태후가 자신의 의지를 분명하게 보여준 사례임과 동시에, 일종의 경고나 다름없었습니다. 변법을 반대함과 동시에 권력을 넘겨주는 일도 반대하며, 이에 대항하는 자들을 부셔버릴 힘과 권위의 파편을 살짝 보여준 것이나 진배 없습니다. 소위 변법파 중에 진짜로 변법의 대의에 공감하여 합류했던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서태후의 시대가 끝나 이제는 황제에게 붙는것이 최선이라고 여긴 기회주의자들은, 서태후의 가공할 힘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변법의 명령이 내려졌다고 해도, 그것을 집행하는 것은 전국의 총독과 순무들입니다. 그러나 서태후가 이미 의사 표시를 분명하게 한 이상, 지방관들이 허튼 수작을 부리려고 할 리가 없었습니다. 조서가 나오면 특별히 반대하는 모양새는 취하지 않아도, 한체만체 하면서 적극적으로 실행하려는 의지도 없었습니다.


 또한 중도적이면서, 적극적이진 않아도 '필요하다면 해야 한다.' 라고 생각하는 인물들도 서태후의 뜻을 알고는 자중하며 나서지를 않았습니다. 서태후는 이화원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고 버티고만 있었지만, 그녀의 거대한 압력이 베이징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강유위는 점점 초조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강유위에 동조하는 인물 중 하나였던 손가내(孙家鼐)는 강유위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보수파들의 반대를 한몸에 받고 있는 강유위를 지방으로 보내 안전하게 하려는 수단이었습니다. 손가내는 강유위를 상하이로 보내려고 했지만, 강유위는 베이징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지금 지방으로 내려가면 변법은 끝장이라는 것입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 라는 격언이 있는것은, 실제로 급한 일이 발생하면 대부분 돌아가려 하지 않고 정면으로 달려들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상황이 나빠지고 초조해질수록 강유위는 단숨에 일을 처리하고 싶어했습니다. 강유위는 이제 궁전 안의 요인들에게 사전공작을 펼쳐 끌어들이는 일 조차도 시간낭비라고 생각했습니다. 대신 그는 황제를 끊임없이 충돌질 했고, 폴란드의 이야기를 들며 망국론을 펼쳤습니다. 나라가 망하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변법을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강유위가 귓속에 불어놓은 공포, 황제로서 무언가 해야 한다는 책임감, 그리고 서태후에 대한 반발심. 광서제도 이전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광서제는 서태후의 조용하지만 매서운 시선을 애써 모른척하며 변법 정책을 지지하고 그것을 행에 옮기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술수는 이미 저쪽에 모두 노출되고 있었습니다. 서태후는 자금성의 지배자였고, 거대한 궁전 내부에는 서태후의 귀와 눈 노릇을 하는 위병이나 환관이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들을 이용하여 서태후는 오싹할 정도로 모든 상황을 보고 받고, 변법파와 황제의 움직임을 손바닥 들여다 보듯이 꿰뚫고 있었습니다. 서태후는 조급하게 굴지 않고 가만히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그런 서태후의 속내를 알리가 없는 강유위는 변법에 소극적인 정부 요인은 이제 모조리 파면시켜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변법파의 핵심 인물들로 채웠는데, 이 모습을 본 서태후는 이제 천천히 움직임을 시작했습니다. 변법파는 이제 남은 방법은 선수를 쳐 서태후를 별궁에 유폐하고, 광서제의 친정을 실현하는 수단 밖에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쿠데타를 한단 말인가?


 쿠데타를 하려면 가장 필요한것은, 물론 군대입니다. 그렇다면 그 군대는 누구의 손에 들어가 있는가? 최소한 변법파는 군대와는  연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식훈련을 받고 있는 신건육군(新建陸軍)이라면 변법파의 힘이 되어줄지도 모른다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조직의 책임자는 원세개였습니다.




 원세개는 예전부터 군대는 서양식으로 바꾸고 훈련해야 폐단을 없앨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점들이 고관들에게 인상을 주어, 새로운 형식의 군대를 조직하면서 그 책임자로 원세개가 추천될 수 있게 한 점입니다. 원세개는 대략 7천여명 정도의 병사를 거느리며, 독일과 일본의 군대를 본받아 보병, 기마병, 포병, 공병, 군수 등의 병솨를 두고 장총과 권총, 대포를 독일에서 사들여 부대를 꾸몄습니다. 그리고 독일에서 군관들을 초빙하여 부대를 서양식으로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아직 고관이라고 할 수 없었던 원세개였지만, 그는 본능적인 정치 감각으로 군대가 있어야 권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건육군에 대해서는 엄청난 심혈을 기울였고, 크고 작은 모든 훈련을 직접 지휘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병사들은 강하게 처벌하여 목까지 베었지만, 복종하는 병사들에게는 재물을 아끼지 않고 포상을 베풀어 완전히 자신의 병력으로 만들었습니다.




 원충추(阮忠樞)


 이를테면 이 당시 원세개의 부하 중에 원충추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원충추는 천진에서 소옥이라는 기생과 사귀었는데, 정이 깊어져서 그녀를 첩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원충추는 이 일을 원세개에게 논의했는데 원세개는 부대의 명예를 깎는 일이라면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한 원세개는 뒤에서는 몰래 사람을 보내 기방에 큰 돈을 치르고 소옥을 빼내었고, 집과 살림을 좋게 마련해 주었습니다. 원세개는 이후 원충추를 데리고 천진으로 떠났는데, 저녁 무렵에 어느 집 마당에 들어선 원충추는 화려하게 꾸민 방에 빨간 촛불이 켜져 있고 푸짐한 잔치상이 차려져 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놀라고 있는 사이에, 어떤 하녀가 원충추를 보고는 방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서방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러자 문을 열고 신부 차림의 한 미녀가 방에서 걸어나왔습니다. 원충추는 그녀를 유심히 살펴보다, 그 신부가 바로 소옥이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후 원충추는 죽을때까지 원세개에게 충성을 바쳤습니다. 원세개가 부하들을 다스리는 솜씨는 이와 같았습니다.


 원세개는 직무에 충실하지 못한 장교들은 가차없이 봉급을 깎아버리거나 잘못을 기록해 벌을 주거나 심하면 파직시켰습니다. 그리고 봉급도 총사령관으로 신분으로 직접 사병들에게 나눠주면서, 중간에 장교들이 장난질을 치는것을 막아 호감을 샀습니다. 이렇게 되자 병사들의 머릿속에는 황제는 뒷전이 되고 원세개만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개화파와 보수파로 성향을 구분하자고 한다면, 본래 원세개는 개화파에 가까운 성향이었습니다. 물론 입헌군주제 라던지 공화제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조선 등에서 지내며 국제 정세를 살펴본 결과, 적어도 군사제도는 개혁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실제로 1895년 원세개는 광서제에게 군사제도의 개혁에 대한 상소를 올린 적이 있었습니다. 1897년 11월, 원세개는 당시 권력자였던 옹동화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습니다.


 "몇 년 전부터 서양 사람들이 중국을 나눠 가지려 한다는 말이 돌았는데, 지금 형세를 살펴보니 근거가 없지 않습니다. 역경에 '궁하면 변해야 한다.' 는 말이 있는데 지금이 바로 그 시기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겹겹히 쌓인 지금 변법을 갑자기 실시한다면 좋은 결과를 얻기 힘들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부터 하나씩 차례차례 해내가야 합니다. 인재 등용, 재정 관리, 군사 훈련 이 세 가지는 무엇보다 서둘러 개혁해야 하빈다."


 "지금 형세를 보면 청은 스스로 강해지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고, 변법 없이는 강해질 수도 없습니다. 한 나라가 변혁하면 그 나라는 보전할 수 있습니다. 변혁은 반드시 쉬운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먼저 충성스럽고 현명한 도독과 순무 두세 명에게 서양의 법을 참고하여 변혁을 시행해 보게 해야 합니다. 인재 등용, 재정 관리, 군사 훈련 세 가지 일을 먼저 개혁하게 하고 해야 할 일을 명확히 규정하고, 기한과 책임을 정한 후에 자리가 잡히면 각 성에 보급하면 됩니다. 이렇게 하면 10년도 지나지 않아 자강 할 수 있습니다."


 성향이 그러하다보니, 원세개는 강유위와 이전부터 면식이 있었고, 원세개가 강유위를 "큰 형님" 이라고 부를 정도로 친밀한 관계였습니다. 원세개는 유신 인사들과도 자주 술자리를 가졌고, 강유위도 원세개를 위해 연회를 베풀기도 했습니다.  강유위는 원세개가 조선에 오래 있었기에 국제 정세에도 밝으며, 스스로 개혁도 주장하고 있는데다 군권도 있으니 적당한 인물이라고 여겼습니다.


 다만 문제는 직례 총독 영록과 원세개의 관계가 좋다는것입니다. 영록은 서태후의 조카였는데, 원세개의 신건육군도 영록의 관할 아래 있는데다 원세개가 과거 반대파들에게 공격을 당했을때 도와준 일도 있어 원세개가 충성하고 있던 처지였습니다. 무엇보다, 원세개는 이홍장의 라인을 타고 출세했고 이홍장은 서태후의 심복입니다. 강유위는 이를 염려해 심복인 서인록(徐仁祿)을 보내 원세개의 내심을 떠보기로 했습니다.


 서인록은 원세개를 만난 자리에서 일부러 원세개와 영록의 사이를 이간질 했습니다. 고단수인 원세개는 서인록의 뻔한 수작을 태연히 넘겼는데, 서인록은 황제를 옹호하며 수구 세력을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원세개는 이러한 이야기에 대해서도 동감을 표시했는데, 워낙 빈틈이 없어 서인록도 무언가 의심할 구석이 없었습니다. 서인록이 돌아가려고 할때, 원세개는 그에게 후한 선물까지 주었습니다. 그 보고를 받은 강유위는 원세개에 대한 의심을 모조리 지워버렸습니다.


 강유위는 담사동(譚嗣同)을 시켜 원세개를 베이징으로 오게 유도했습니다. 9월 11일, 광서제는 원세개를 베이징으로 오게 하는 교지르 보냈고, 원세개는 자신이 떠나기전, 먼저 친구였던 서세창(徐世昌)을 보내 상황을 살펴보게 한 뒤 베이징으로 향했습니다.


파일

 서세창


 9월 16일, 원세개는 광서제를 접견할 수 있었습니다. 광서제는 원세개에게 군사에 관한 문제를 상세히 묻다가, 갑자기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만약 너에게 군대의 통솔을 맡긴다면, 충성할 수 있겠는가?"


 원세개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신은 죽을 힘을 다하여 성은에 보답하겠습니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황제 폐하께 충성하겠습니다." 


 강유위는 원세개의 태도나 표정이 워낙 간절해서 믿을만하다고 여겼고, 원세개가 떠난 후 그를 즉시 정3품 안찰사에서 종2품을 거치지도 않고 정2품의 시랑 후보로 승진시켰습니다. 그런데 대단한 승진을 한 원세개는, 이를 좋아하기보다는 오히려 불안하게 여겼습니다. 수구파 대신들의 미움을 사게 될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원세개는 수구파에서 무엇이라고 말이 나오기도 전에 오히려 먼저 자신이 선수를 쳐 그들의 집을 방문하고, 자신이 공도 없는데 승진한것은 복이 아니라 오히려 화라고 하면서 사직하겠다고 말했스빈다.


 다음날, 원세개는 다시 한번 광서제를 만났습니다. 원세개는 은혜에 감사한다는 의사 표시를 했고, 광서제도 원세개를 칭찬했습니다. 다음날인 9월 18일, 광서제는 강유위에게 몰래 비밀조서를 전했습니다. 


 당시에 천진에서 광서제가 군대를 사열할 예정인데, 영록이 그 틈을 타 광서제를 잡아 폐위해 버릴 것이란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참이었습니다. 비밀조서를 받은 강유위는 양계초, 담사동 등의 유신파 대신들을 불러 모아 회의를 했는데, 이 자리에는 서세창도 가만히 앉아서 오고가는 이야기들을 듣고 있었습니다. 유신파 대신들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어 대성통곡만 했습니다.


 답답한 시간 끝에, 강유위는 담사동에게 원세개를 찾아가 이렇게 전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결사대 수백 명을 거느리고 황제를 자금성의 정문에 오르도록 하여, 황권을 회복하고 영록을 죽이고, 수구파들을 없애라."


 담사동은 본래 원세개를 믿지 않던 사람이었지만, 상황이 좋지 않아 방법이 없었습니다. 원세개는 천진의 법화사(法華寺)라는 절에 머물고 있었는데, 담사동은 위험을 무릎쓰고 단신으로 그를 찾아 떠났습니다.


 이 담사동이라는 인물은 소년 시절부터 협객을 사귀거나 전국을 떠돌면서, 본인의 말로는 '장장 8만여 리, 늘리면 지구 한바퀴' 의 거리를 여행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무술변법에 합류하기 1년전, 그는 인학(仁學)이라는 저서를 썻는데, 놀랍게도 이 인학에는 이런 구절이 들어있습니다.


 "애신각라(愛新覺羅)의 천하고 색다른 종…… 야만스럽고 흉악한 성질."


 물론 청나라에서 이런 표현을 쓴 저작을 출판하면 사형입니다. 목만 달아나면 차라리 다행일 것입니다. 인학은 2권 5만자 분량인데, 양계초가 그 사본을 가지고 있다가 일본에서 인쇄한 책입니다. 양계초는 저자의 이름은 숨기고 '대만인이 저술한 책' 이라고만 하였는데, 당시는 청일전쟁 이후였으므로 대만에 대해서는 청나라 조정도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인하겡서는 청일전쟁의 패배에 대해서도,


 "이기면 교만해졌을 것이므로, 패전이 반드시 불행한 것은 아니다."


 라고 표현했습니다. 실제로 변법파를 비난하던 문제(文悌)라는 대신은 담사동 등에 대해 이런 표현을 쓰면서 탄핵했습니다.


 "그들의 충군과 애국을 합쳐서 하나가 되게 하여야 한다. 공연히 중국 4억 국민을 위하노라면서 우리 대청국을 도외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실로 그 말대로였습니다. 담사동은 '애국자' 이지 '충군자' 이진 않았습니다. 중국 4억을 위할 뿐, 대청국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입니다. 그런 인물이 청나라의 심장부에 들어서 있는데, 만일 담사동이 무술변법 이후에도 강유위나 양계초처럼 활동 할 수 있었다면 어떠한 방식으로 움직였을지도 궁금한 이야기입니다. 적어도, 나중에 증명되겠지만 보황파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강유위와는 선을 그엇을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담사동



원세개와 영록. 둘의 회담에 대한 기록은 원세개의 무술일기(戊戌日記)가 유일한 문헌입니다. 원세개는 담사동의 당시 기세를 보고 약간 긴장을 했습니다.


 "기세등등하고 흉포해서, 마치 미친 사람 같았다."


 이것이 담사동을 본 원세개의 묘사입니다. 격앙되어 기세 등등한 담사동은 대뜸 이렇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당신 생각에 황제 폐하는 어떤 사람입니까?"


 뚱딴지 같은 소리였지만 원세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대에 견줄 이가 없는 성군이십니다."


 "천진의 군대 사열에 관한 음모를 알고 있습니까?"


 "물론, 벌써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황제 폐하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군대밖에 없는데 당신이라면 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담사동은 자신의 목에 손을 대었습니다.


 "만약 그럴 생각이 없다면, 우선 소인부터 죽이십시오. 그렇다면 당신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갑작스런 담사동의 태도에 원세개는 정색하면서 소리쳤습니다.


 "이 원세개를 어떤 사람으로 보는 겁니까? 황제 폐하는 우리가 모셔야 할 군주이고, 우리는 모두 황제 폐하께 각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황제 폐하를 구하는 책임은 군대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귀 기울여 듣겠습니다."


 원세개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담사동도 그제야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영록의 음모는 천진 사열에 숨어 있습니다. 지금 군은 모두 영록의 지휘를 받기에 그는 군을 끼고 반란을 꾀하려는 것입니다. 지금 천하에 온전한 군대는 그대의 신건 육군 뿐입니다. 만약 반란이 일어난다면 그대의 군대로 나머지 두 군을 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황제를 보호하고 대권을 회복하여 황제 주변과 조정을 정리한다면, 역사에 길이 남을 위업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대가 만약 진심으로 황제 폐하를 구하려 한다면 저에게 좋은 방법이 있으니 같이 상의해 봅시다."


 여기까지 말한 담사동은 문서 하나를 꺼내 원세개에게 주었습니다. 원세개가 그것을 받아보니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영록이 임금을 폐하고 시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는데, 이는 대역죄이다. 지금 영록을 없애지 않으면 황제의 자리를 지킬 수 없고, 그러면 황제의 생명도 지킬 수 없다. 이를 해결할 방법은 원세개가 9월 20일 황제에게 와서 영록을 제거하라는 조서를 받은 다음 부대를 이끌고 바로 천진으로 가 영록 일당을 찾아 조서대로 처형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원세개가 책임지고 부하들에게 포고문을 써서 대역무도한 영록의 죄를 천하에 알리고, 전보국과 철도를 봉쇄하고 신속히 원세개 부대의 병사들을 베이징으로 보내 절반은 이화원을 포위하고, 절반은 황궁을 지키면 정국은 안정될 수 있다.'


 원세개는 글을 보고 놀라서 소리쳤습니다.


 "이화원을 포위해서 뭘 어쩌려는 겁니까?"


 "그 늙은이를 없애지 않으면 나라를 지킬 수 없습니다. 이 일은 제가 할 테니, 그대는 묻지 마십시오."


 "서태후께서 정무를 살피신 30여년 동안 여러 번 큰 난을 평정하여 민심을 얻었습니다. 저는 부하들에게 늘 충의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는데, 지금 이것은 반란하라는 명령이니 듣지 않을 것입니다."


 담사동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이미 호걸 수십 명을 모았고, 호남에 전보를 쳐 훌륭한 군관을 몇 명 찾아놓으라 했으니 며칠 후면 도착할 겁니다. 그 늙은이를 처단하는 일은 제가 할 테니 걱정 마십시오, 대신 두 가지 일만 처리해 주시면 됩니다. 영록을 죽이는것, 그리고 이화원을 포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도 했습니다.


 "싫다고 한다면 나는 당신 앞에서 죽겠습니다. 내 목숨은 당신 수중에 있지만, 당신 목숨도 내 수중에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원세개가 눈치를 보니, 담사동의 허리와 옷깃 근처가 불룩 솟아 있는 모양새가 흉기를 숨기고 있는것처럼 보였습니다. 원세개는 우선 이 자리에선 승낙하는 척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황제 폐하께서 저에게 간적을 죽이라고 명령하신다면, 저는 죽을 힘을 다해 따르겠습니다."


 "영록은 조조와 왕망의 재주를 갖춘 시대의 간웅이니, 처단하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듣자 원세개는 오히려 담사동을 노려보며 말했습니다.


 "만약 황제 폐하께서 저의 진영에 계신다면, 영록을 죽이는 것은 개 한 마리를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담사동도 결국 원세개의 현란한 말재주에 넘어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원세개는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신은 먼저 천진에서 군대를 배치해야 한다며 한동안은 행동에 나설 수 없다고 핑계를 대었습니다. 헤어지기 전, 담사동은 마지막으로 원세개를 떠보았습니다.


 "황은에 보답하고 황제 폐하를 불구덩이에서 구해내 나라를 구하는 것이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마찬가지로 부귀영화를 탐내 우리를 고발하면 폐하를 해치게 디는데, 그것도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그러니 알아서 결정하십시오."


 그 말에 원세개는 되려 화를 내며 소리쳤습니다.


 "저를 어떤 사람으로 보십니까? 저희 집안은 3대가 나라의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양심을 버리고 대사를 그르치겠습니까? 황제 폐하와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담사동은 원세개가 진정한 호걸이라며 칭찬하고 그를 떠났습니다.


 그렇게 떠날 사람이 떠난 후, 원세개는 서세창과 함께 침착하게 지금의 상황을 복기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유신파와 광서제의 세력은 서태후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군대만 보더라도 유신파는 원세개의 7천여 병력 밖에 믿을게 없지만, 수구파는 영록이 통제하는 5천여명의 병력에 베이징의 군대만 몇만이나 됩니다. 원세개는 광서제를 돕다가 화를 당할 바에야, 서태후 편에 서는것이 낫겠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영록



 9월 20일, 원세개는 다시 한번 광서제를 만났습니다. 이 자리에서 원세개는 대단히 충성스러운 신하인 체 했지만, 오후 3시 무렵에는 영록을 만나 유신파의 계획을 모조리 밀고해버렸습니다. 서태후는 광서제의 방에서 변법에 관한 문서를 압수했는데, 마침 이날은 이토 히로부미가 광서제를 만나기로 되어 있어 휘장 뒤에 숨어서 감시만 하고 있다가, 밤이 되자 황제를 불러들이고 독을 마시고 죽으라고 다그쳤습니다. 군기대신과 황족들이 만류한 덕에, 광서제는 유폐 처분으로 결정되었습니다.


 9월 21일, 수렴청정의 칙유가 내려졌고, 이는 변법 운동의 종말을 알린 사건이었습니다. 


 시간을 돌려 9월 20일 새벽, 상황을 가만히 지켜본 강유위는 원세개의 출동이 가망이 없는 일이라는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새벽 야음을 틈타 조용히 베이징을 떠나 저녁 무렵에 배에 올라탔습니다. 처음에 탄 배가 21일 오후에 떠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강유위는 다른 배로 옮겨탔습니다. 그 배는 오전 10시에 떠날 예정이었습니다.


 강유위가 도망친 사실을 알게 된 영록은 즉시 그를 잡으라고 명령했지만, 강유위가 탄 배는 이미 출범한 뒤였습니다. 군함이 그 뒤를 추격했지만 도중에 석탄이 부족해서 되돌아 올 수 밖에 없었고, 중간에 잠시 배에세 내린 강유위는 물건까지 사서 다시 배에 올라탔습니다. 이곳의 관리는 마침 출장을 가고 있던 참이라 수배령을 뒤늦게 내려 강유위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강유위가 탄 배는 상하이에 들렸는데, 상하이의 영국 총영사에게 강유위와 친교가 있던 사람이 요청하여, 강유위는 영국 배를 타고 홍콩으로 이동했습니다.


 양계초는 일이 패망했음을 깨닫자 곧바로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했습니다. 일본 공사관은 치외법권 지역이라 청나라 당국도 어쩔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양계초는 대고에 정박 중인 일본 군함을 통해 일본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문제는 담사동이었습니다. 담사동이라고 몸을 피할 방법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역시 처음에는 일본 공사관으로 향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망명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였습니다. 자신의 시문과 서적 등, 그동안 남겨왔던 사상과 글들을 양계초에게 건네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양계초는 망명을 권유했지만 담사동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각국의 변법에서 유혈을 보지 않은 예는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변법으로 피를 흘렸다는 말은 듣지 못하지 않았나?"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나라가 좋지 않게 된 것은 그 때문이지. 뭐, 이 몸이 시초가 되면 어떠한가. 그대는 사이고가 되어라. 나는 겟쇼가 되련다."


 사츠마번 출신으로 일본의 막부 유신기를 살다간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는 승려 겟쇼와 함께 물에 몸을 던졌지만, 겟쇼는 죽고 사이고는 살았습니다. 살아서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어서 도움이 되어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담사동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담사동은 죽기는 쉽고 살기는 어렵다면서 양계초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쉬운 길을 택해서 죽겠다. 그대는 어려운 삶을 택해서 폐하를 섬겨라."


 이 일화는 양계초의 무술정변기(戊戌政變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담사동이 건넨 문헌 중에는 바로 자신의 절명시도 있었습니다.


 "피를 토하며 이 글을 적는다. 우리 중국 신민에게 고한다. 모두 함께 의분을 떨치고 일어나, 국적(國賊)을 없애고, 성상(聖上)을 보전하라."


 청나라 황실을 비천하다며 매도하는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인물이, 성상을 보호하라고 말하는것은 기이하게 들립니다. 아마도 이는 자신은 죽어도 구관인 부친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실제로 담사동의 부침 담계순(譚繼洵)은 처형 대신 해임되어 원적지로 추방되는 정도에서 그쳤습니다. 혹은, 직접 중앙으로 올라와 일을 하는 동안, 꼭두각시 신세인 광서제의 모습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담사동은 자신의 저작에서 인간의 오륜(五倫) 중 가장 훌륭한 것은 붕우(朋友)라고 말했습니다. 군신, 부자, 형제, 부부는 서로 속박이 있고,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붕우, 즉 나의 벗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벗은 상하가 없고, 나이의 차이도 문제가 되지 않고, 성별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벗이야말로 자주성을 잃게 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는 우주의 근본 원리는 붕우의 길로 응결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벗은 조직화 될 수 있는데, 담사동은 그것이 인(仁)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이 '인' 이란, 말하자면 의협에 가까운 모습입니다.


 담사동은 자신이 말한 우주의 원리를 관철했습니다. 의협의 생애를 살다간 것입니다. 사람에게 자신이 죽을 자리를 고를 권한이 있다면, 담사동은 실로 그다운 최후를 맞이 했습니다. 


 그는 처형 직전, 감옥에 이러한 시를 적었습니다.


 문을 바라보고, 묵으려 걸음을 멈추고는
 장검(張儉)을 생각하고

 죽음을 참으며, 
 잠시 두근(杜根)을 기다린다.


 장검은 후한 시대 인물로 환간인 후람(侯覽)을 탄핵하다가 오히려 무고를 받아 도망친 인물이었는데, 그 의로움 때문에 누구나 위험을 무릎쓰고 장검을 숨겨주었습니다. 역시 후한 시대 인물인 두근은 등태후(鄧太后)가 섭정할때, 황제에게 정치를 봉환하라고 요구하다 자루에 넣어져 죽을 신세가 되었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두근 역시 그에게 호의를 품은 사람들 때문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말할 나위도 없이, 이는 강유위와 양계초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담사동은 강유위와 양계초가 무사히 도망치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담사동 자신은? 


 강유위와 양계초는 도망치는데 성공했습니다. 장검과 두근처럼 목숨을 건지는데 성공한 셈입니다. 하지만 좁고 고통스러운 감옥에 있는 담사동은 어디에도 피할 곳이 없습니다. 강유위와 양계초는 이후에도 자신들의 방법으로 투쟁을 계속할 테지만, 그는 며칠만 지나면 처형되어 버릴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들과 담사동의 마음은, 그리고 처지는, 운명은, 모두 다른 것인가?


 시의 마지막 구절은 아직 남아있습니다.


 떠나는 이도,
 머무르는 이도,
 간담(肝膽)은 모두 곤륜(崑崙) 이라네.


 다르지 않습니다. 


 서로가 선택한 길은 다르지만, 그러나 마음은 같습니다. 떠나는 자도, 머무르는 자도, 그 마음은 모두 곤륜산과 같이 지극히 높고, 지극히 맑고, 그리고 크게 솟아 있는 것입니다. 그 거대한 이상은 장소, 그리고 삶과 죽음 정도로는 절대로 꺾어 놀 수 없습니다. 맹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천하라는 넒은 곳에서 살며, 천하라는 올바른 자리에 서서, 그 대도를 실현하며, 뜻을 얻으면 백성들과 같이 실행하고, 뜻을 얻지 못하면 혼자서 그 도를 실행하여 나간다. 부귀도 그의 마음을 음란하게 하지 못하고, 비천한것도 그의 마음을 옮기지 못하며, 어떠한 무력의 위협에도 굽히지 않는다.
 
이러한 것을 일컫어 마땅히 대장부라 말 할 수 있다. 
 
걷는 길은 무엇인가 하면 의(義)다. 인(仁)에 몸을 두고 의를 따르면 대인이 해야 할 일을 다 갖추는 것이다."


 어두컴컴한 감옥, 그리고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 하지만 그런 순간 속에서도 말하는것은 높고 푸른 곤륜입니다. 


 너무나 맑고, 너무나 높은 이상. 그것이야말로 담사동 자신이 말한 '우주의 근본 원리' 인 '붕우' 의 인(仁)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지가 담긴 마음은, 시간이 지나도 절대로 굽어지지 않습니다.  



 1898년 9월 29일. 담사동을 비롯한 무술육군자(戊戍六君子)는,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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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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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무장공비 | 작성시간 13.04.26 위안스카이....고단수인데요-_-;;;
  • 작성자Reichskanzler | 작성시간 13.04.28 담사동도 대단합니다. 호걸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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