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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106) ─ 그릇된 길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5.13|조회수452 목록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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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필리핀은 스페인의 통치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하고 있었고, 미국은 스페인의 영향력을 걷어내기 위해 미서전쟁(Spanish-American War)을 시작했습니다. 필리핀의 민족주의자 세력은 미국에 협력을 하였는데, 그러나 훗날 그들은 미국이 구원자가 아니라 그저 또다른 제국주의 세력임을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필리핀은 미국에 저항을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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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밀리오 아기날도(Emilio Aguinaldo)


 이때, 필리핀의 아기날도는 원조를 청하기 위해 일본에 자신의 대리인을 파견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미국인들을 불쾌하게 만들 수 있는 일에 나서기를 꺼려했는데, 다만 열정적인 대아시아주의자들은 이에 즉각 반응했습니다. 게중에는 쑨원도 있었습니다. 쑨원에게 있어 이 것은 서구의 지배에 대항하는 아시아인들의 싸움이며, 그 나름의 숭고함에 일본인과 중국인들이 같이 손을 잡고 함께 나서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필리핀이 독립하는데 도움을 준다면 중국의 혁명가들은 청나라에 대항할 좋은 공작용 기지를 가지게 되는 셈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필리핀인들은 현실적인 도움을 원했습니다. 어차피 군대의 파병 등은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고, 대신 대가를 지불할테니 무기를 공급해주기를 원했으며, 무엇보다 그것들을 자신들에게 날라다 줄 수단을 원했습니다. 그리고 쑨원은 자신이 그 일에 협력하기를 원했습니다.


 당시 아기날도가 보낸 대리인이었던 폰세(M.Ponce)는 쑨원을 처음 만나고 상당한 인상을 받아 모든 공작 임무를 쑨원에게 맡겼습니다. 쑨원은 일본 외무부의 우려와, 필리핀 문제에 개입하길 원하는 일본 군부의 도움이라는 상반된 상황에서 배와 무기를 마련하고 1899년 7월 필리핀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이 무기가 필리핀이 독립을 하는데 쓰인다면, 쑨원은 도덕적인 부분은 물론 실제적인 이득 역시 상당히 얻었을 것이 틀림 없었습니다.


 그런데 일은 좋게만 풀리지 않는 법입니다. 낡은 배는 중국 연안을 지나갈 무렵, 폭풍우를 맞아 여지없이 침몰했습니다. 무기, 탄약 및 조립, 설비 등의 뱃짐들은 모두 잃어버렸고 일본인 3명을 포함한 선원 13명도 수장되었습니다. 쑨원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무기와 배를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미국은 이 시도에 대해 상당한 불쾌감을 드러내며 일본에게 경고를 보냈고, 일본의 관계기관은 필리핀으로 가는 배에 무기를 싣는 일을 엄하게 단속했습니다. 결국 쑨원의 계획은 이번 역시 시작도 제대로 해보기 전에 한낱 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필리핀의 아기날도 등은 실제로 쑨원이 그들에게 도움을 준 것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돕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쑨원의 마음에는 고마워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도 필요한 미국과의 전쟁 자금 중 10만 엔을 쑨원에게 건내주었습니다. 이 돈은 쑨원이 최초의 선전기관지를 만들 수 있는 자금이 되었는데, 진소백이 홍콩에서 편집을 맡은 중국일보(中國日報)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쑨원은 이러한 언론 매체를 바탕으로 해외의 화교들을 설득했습니다. 



 담사동, 쑨원, 강유위, 양계초, 그리고 이홍장. 그들의 사정과 야망, 꿈이 어찌되었건 간에, 중국 인민들은 지독한 빈곤에 시달렸습니다. 그들은 제국주의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지도 못했지만, 주위의 상황이 계속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또, 선교사들이 선한 의도를 가지고 좋은 활동만을 하는 사람들이 아닌 존재라는 사실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각지에서 이러한 외국의 간섭은 심해지고 있었고, 중국 인민들의 좌절감과 분노는 결국 위험수위를 넘어 폭팔하기 시작했습니다. 


 1897년, 산동성에서는 독일인 신부 두명이 살해되었는데, 이는 독일의 출병을 초래했고 결국 독일은 교주만 지역을 보호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산동은 백련교 운동 등이 성행하였던 의협이 기풍이 강한 지방인데, 이 무렵에는 온갖 조직이 난립하고 있었습니다. 게중에서도 소위 '의화권', '매화권' 이라는 권법을 익힌 무리들이 크게 성행했습니다. 마침내 1899년 무렵이 되자 이 의화단의 세력은 실체를 드러내었고, 10월 무렵에 평원현(平原縣)이라는 마을을 습격했습니다. 그곳에 있는 중국인 기독교 신자들을 노린 테러였던 것입니다. 관군은 당연히 이 습격을 진압했지만, 진압군의 대장은 갑자기 해임되었습니다.


 육현(毓賢)


 이 일이 갑자기 이렇게 된 까닭은 당시 산동의 순무였던 육현이라는 인물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극단적인 반양무파였는데, 이것은 단순히 정치적인 입장이 아니라 근대화, 그리고 그것에 관련한 모든 사물에 격렬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지금은 단순한 불씨에 불과한 의화단을 진압하기 보다는, 차라리 그들을 '단련' 에 포함시켜 써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육현은 의화단이 부청멸양(扶淸滅洋)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활동하기를 원했습니다. 육현은 서태후의 도움으로 산동 순무가 되었는데, 육현의 사고방식은 서태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불장난을 불쾌하게 여긴것은 다름 아닌 원세개였습니다.


 기민한 정치 감각을 가지고 있는 원세개는 이러한 행위가 의미가 없다고 여겼고, 육현의 방치 아래 점점 산동에서 세력을 불려가는 의화단에 대해서도 좋은 감정이 없었습니다. 원세개는 산동의 상황을 보고했고, 육현이 무능하다고 고발했습니다. 이 무렵에는 여러 열강들도 육현의 행위에 반감이 강해진 참이라 육현은 베이징으로 소환되고 원세개는 산동순무 대리가 되었습니다.



 원세개는 의화단이 사람들을 현혹하고 무도한 사람들을 공격한다면서, 이 활동을 엄격하게 금지한다는 포고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은근히 압력을 가했습니다. 원세개는 이에 대해 상당히 불쾌하게 여겼는데, 이후 청나라 조정에서는 아예 대놓고 의화단을 관에서 운영하는 지방군으로 개편할 준비를 하며, 이에 대한 의견을 원세개에게 물어보기까지 했습니다. 이에 대해 원세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의화단은 많은 사람을 모아 시위를 하고, 수백 리 밖에서 재물을 약탈하니 일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없고, 살인과 방화에 사람을 납치하여 몸값을 요구하며 관병에 항거하니 법을 어기지 않았다고 할 수 없으며, 평민들을 해치고 지방을 소란스럽게 만들었으니 서양 종교만을 증오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의화단은 엄하게 금해야 할 단체이므로, 절대 그냥 두어서는 안 됩니다."


 결국 산동은 원세개의 의지로 인해 의화단이 세력을 잡기에는 무리가 있는 지역이 되어버렸고, 산동에서 쫒겨난 의화단은 하북으로 들어가서 철도, 철교, 전신선 등 조금이라도 서양과 관련 있는 모든 물건을 박살내었습니다. 경황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이것이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고 알 수 있었지만, 서태후는 이를 막지 않았습니다.


 서태후와 그 주변의 사람들은 반변법, 반양무의 보수 정권을 만들고자 했으니 사사건건 외국의 간섭으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찢어죽이고 싶었던 강유위나 양계초, 장음환 등을 죽이는 일도 외국의 간섭때문에 죽이지 못한것도 한스러웠습니다. 이들은 의화단을 외국에 대항하는 장기말로 삼으려고 했는데, 보수파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강의(剛毅)는 서태후 앞에서 의화단을 거듭 칭찬하며 이들이 충성스럽고 용맹하다고 떠벌렸습니다. 심지어, 그는 변법파에 동조한 광서제를 '한간(漢奸)' 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반란의 물결이 번지는데, 조정에서는 그들을 칭찬하고 있고, 되려 외국에서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안갑힘을 쓰는 괴이한 상황. 마침내 1900년 6월, 의화단은 베이징으로 물밑듯이 들어왔습니다. 산동에서는 반란군의 취급을 받았지만, 베이징에서는 '근황군' 으로 대접받은 것입니다. 베이징에 입성한 의화단은 숫자는 무려 20만에 달했습니다. 


 베이징은 청나라의 수도이고, 당연히 외국인들도 상당수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각국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의사를 표시하고, 러시아 - 영국 - 미국 - 일본 - 독일 - 이탈리아 - 오스트리아 - 프랑스 등 8개국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서태후는 다급해져 원세개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원세개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원세개가 생각하기에 청나라는 지금 자그마한 일본 하나조차 시원하게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여덞 개의 나라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지금 군대를 파견한다면 원세개는 열강의 미움을 받아 패망합니다. 그러나 서태후의 명령을 듣지 않아도 곤란합니다. 고민 끝에 원세개는 신묘한 대책을 생각해 내었습니다. 원세개는 3천 정도의 병사만 베이징으로 올라가게 하는 시늉을 보이면서, 만일 산동에서 베이징으로 군대를 보낸다면, 그 틈에 산동은 난리가 벌어진다는 이유를 들었던 것입니다. 이후 군대 파견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받기가 무섭게 부대를 회군시켰습니다.


 또한 원세개는 산동 내의 서양인들이 피살되어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자신의 군사를 풀어 산동 안의 모든 서양 사람들을 무역항으로 대피시켰고, 교회와 신자들도 엄밀하게 보호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영리하게 머리를 굴리는 원세개와는 별개로, 20만의 군세를 얻은 베이징은 완전히 이성을 상실했습니다. 6월 11일, 일본 공사관의 스기야마 서기관은 살해당해 버렸고, 6월 20일에는 독일 공사 케틀러가 총리아문으로 가던 도중 살해되었습니다. 변법파도 몰락했고, 양무파도 무너진 지금 이 자리에는 고집불통의 수구세력이라는 괴물만 남았습니다. 서양인 1명을 죽이면 50냥, 여자를 죽이면 40냥, 어린아이를 죽이면 30냥을 준다는 현상금까지 내걸렸습니다. 


 모두가 괴이하게 미쳐가고 있었습니다. 예부상서 계수라는 인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대산의 승려인 보제라는 인물이 신병(神兵) 10만 명을 거느리고 있다고 한다. 보제를 불러라!"


 어사 팽술이라는 인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의화권의 부적은 대포를 맞아도 타지 않는다. 그 술법이 참으로 신통하므로 오랑캐의 군세는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서도혼이라는 사람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물주는 다섯 마리의 용에게 명하여 해구를 지키게 했다. 오랑캐의 배는 그야말로 하나도 빠짐없이 침몰할 것이로다."


 광기가 여기까지 미친 이상, 더 이상 돌이킬 수는 없었습니다. 독일 공사가 살해된 다음날, 청조는 기어코 각국에 선전포고를 실시했으며, 각 성에 의화단을 소집해 싸우라고 권고했습니다. 




 이 무렵, 이홍장은 그야말로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후가 멀지 않은 이홍장의 눈에도 이 광기의 어리석음은 똑똑히 보이고 있었습니다. 베이징의 바보들이 어리석은 최후를 향해 나아갈 무렵, 이홍장은 조정의 '선전포고' 는 애써 무시하면서 다른 지방의 지도자들과 함께 전국적으로 평화를 역설했습니다. 


 이홍장을 비롯한 현실적인 관료들은 여전히 청조에 대해 충성을 맹세했지만, 그러나 '반란군' 이 베이징을 장악해 권력을 탈취하여, '승인받지 않은' 전쟁을 일으켰다고 각국영사에 통보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영역에서 의화단의 세력을 일소할 것이라며 외국을 달래는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따로 있는데, 치우는 사람은 따로 있는 것입니다.


 의화단의 문제를 최초부터 지적한 원세개 역시 이들을 막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원세개는 의화단은 한낱 사교 집단으로 관군이나 지방의 의용군조차 이길 수 없는데, '서양을 물리친다' 는 것은 현실을 기만한 구호라고 여기며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무릇 나라에 충성하는 의로운 백성으로서, 나라를 위한다면 지금 당장 천진으로 가서 서양 사람들과 싸워야 한다!"


 이는 조정의 생각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교활한 원세개는 이러한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러니, 만약 천진에 가지 않고 성내에서 약탈하고 소란을 피우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비적이지 의화단이 아니지 않는가? 의화단은 모두 전선에 나가 있다!"


 이러한 구실을 내걸은 원세개는 산동에 남아 있던 의화단을 모조리 섬멸해버렸습니다.
 

 그 무렵, 주더가 살고 있는 조그만 마을에도 의화단에 대한 이야기는 전해졌습니다. 주더가 다른 서당의 아이들과 의화단의 봉기가 그곳까지 미칠 지 이야기를 나누자, 한참 동안 그 토론을 듣고 있던 노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편전쟁이나 태평천국의 난, 중일전쟁을 생각해 보거라. 이런 전쟁에서 한 나라나 고작 두 나라가 중국을 패배시켰다. 내가 묻겠다.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중국보다 더 강한가?"


 "더 약합니다."


  학생들은 일제히 대답했습니다. 선생은 다시 질문했습니다.


 "그러면 의화단이, 현재 그들을 향해 포진하고 있는 8개 외국군의 연합 공세에 대항해 승리를 거둘 수 있으리란 희망이 있는가?"


 학생들은 서글픈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없습니다."


 "그러면 지금의 태후가, 옛날보다 국가의 국민의 복리를 더 깊이 생각하는가?"


 "덜 생각합니다."


  떨리는 목소리가 돌아왔습니다. 노선생은 이제 신랄한 어조로 물었습니다.


 "의화단에게 싸우라고 명령을 내리고, 서안으로 도망친 사람은 누구인가?"


 "태후입니다."


 이제 대답은 숫제 기어들어가는 말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노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희들에게 조국을 구하는 유일한 방도를 가르쳐 주었다. 내가 가르친 내용이 무엇인가?"


 "외국에 나가, 서양과학을 습득할 수 있을 때까지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선생은 마지막으로 질문했습니다.


 "의화단이 나아가는 길은 올바른 길인가, 아니면 그릇된 길인가?"


 질문이지만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학생들은 일부는 서글픈 표정으로, 또 일부는 울먹거리면서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그릇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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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배달민족 | 작성시간 13.05.14 근데 저런 '주술적' 모습이 동학군에게도 있었다는게 참....
  • 작성자2Pac | 작성시간 13.05.14 일단 선리플 후감상 고맙습니다~
  • 작성자SteelCan | 작성시간 13.05.14 아 중국사 수업에 엄청난 도움이 되었는데 이제 신해혁명까지 나가버렸네요. 아쉽습니다 ㅎㅎ
  • 작성자명일 | 작성시간 13.05.18 서태후는 의화단이 주술을 쓸주 안다고 진짜 믿은거 같다고(정치적으록 아니라 진심으로)
  • 작성자▦무장공비 | 작성시간 13.05.20 주덕 기억속의 서당의 노선생도 참 대단한 사람이군요.

    저런 혼란 속에서 그런 늦은 나이에 뒷날을 생각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는것도 참 어려운 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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