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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107) ─ 부화뇌동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5.19|조회수435 목록 댓글 3




 이홍장 등의 현실적인 관료들은 의화단 운동이라는 전쟁을 '승인 받지 않은 폭동' 이라고 선전하면서 이것이 중국의 뜻이 아니라고 강변했고, 열강이 군함과 전함을 파견하지 않는다면 자신들이라도 먼저 진압하겠다고 천명했습니다. 여기서 의화단의 '반란' 이라는 허구가 탄생했습니다. 

 앞서 설명했다시피, 당시 의화단은 베이징에 위풍당당하게 진입했고 조정의 신임을 받고 있었습니다. 조정에 신임을 받는 반란군 따위가 있을 리 없으니, 이것은 베이징의 뜻 자체입니다. 하지만 '실체대로' 베이징의 합법적인 정부가 8개국 연합군에 선전포고를 했다면, 중국은 멸망할 것입니다. 이때문에 이홍장 등은 의화단의 운동과 8개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반란군의 수작' 이라고 선전했습니다.


 열강은 돌아가는 모양새를 훤하게 꿰고 있으면서도 이에 장단을 맞추어 주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교전을 화북 지역으로만 제한 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중국의 외채에 대한 상환을 포함한 조약의 의무가, 중국의 나머지 지여겡서는 고스란히 존중된다는 뜻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일단 전쟁이 화북 지역에서만 제한된 규모에서 치루어진다고 보면, 이것은 중국 내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키우기에도 딱 적절한 규모였습니다. 러시아의 국방장관은 의화단의 소동을 차라리 환영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만주를 장악하기 위한 구실을 마련해줄 것이다."


 당시 사이공에 머물고 있던 쑨원에게 있어서도, 의화단 운동은 흥미로운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쑨원은 회남 지역에서 봉기를 일으키기 위해 삼합회 등과 음모를 꾸미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중국에서의 사태가 극심해짐에 따라 쑨원을 비롯한 다른 개혁가들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혁명' 을 꿈꾸는 쑨원과는 다른 '개혁' 을 꿈구는 개혁가들도 마찬가지였는데, 당시에 서태후가 유폐된 광서제를 처형하려 한다는 소문이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양계초는 하와이에서 '황제를 구하자' 는 구호를 이용하여 자금을 얻었고(그 자금줄은 대부분 본래 쑨원의 후원자들이었습니다.) 강유위는 싱가포르에서 화교 백만장자의 지원을 받고 있었습니다(그 백만장자는 쑨원도 눈여겨보고 있던 사람이었지만 선수를 뺏겼습니다). 경쟁자들이 조금씩 앞서나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고, 이들을 전부 후원하려 하는 일본 측도 이런 개혁 세력들이 하나로 뭉치기를 원하고 있었기에, 쑨원은 이들에게 타협을 위한 협상을 제시했습니다. 


 6월 말 무렵, 쑨원의 친구였던 미야자키 도텐은 두 명의 다른 일본인을 대동하고 싱가포르에 도착했습니다. 강유위를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도텐은 자신이 강유위가 서태후로부터 도망칠때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자신을 만나줄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정부에서 강유위를 암살하려 한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었고(베이징의 정부는 강유위의 목에 쑨원 보다도 더 높은 현상금을 걸어놓았습니다), 영국 경찰이 이 일본인들의 몸 수색을 했을때 '날카롭고 깨끗한' 일본도 두 자루와 현금이 발견되었을때 이러한 의심은 절정으로 치달았습니다.


 낭인이었던 도텐은 '어떤 일본 무사든, 여행 때에는 반드시 칼을 소지한다' 는 이유로 영국 경찰을 납득시키려 했습니다. 쑨원이 자신들의 친구들을 이용해서 강유위를 암살하려 했는지 아닌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강유위 암살은 일본의 계획과도 맞지 않은 방법일 뿐 아니라, 쑨원은 동료들이 체포되자 곧바로 싱가포르로 와서 그들을 구하기 위해 모든 설득력을 총 동원했습니다. 여하간, 사태는 쑨원과 도텐을 비롯한 인물들이 5년간의 추방령을 당한 것으로 해결되었습니다.


 이때, 쑨원은 여러 손길을 통한 주선으로 이홍장과 회담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실현되지는 못했습니다.


 77세의 이홍장은 계속해서 선택을 저울질 하고 있었습니다. 6월 18일 무렵, 베이징에서는 이홍장에게 수도로 와 보고를 하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이홍장은 의도적으로 출발을 미루고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홍콩에 있었는데, 홍콩의 당국은 이홍장이 떠나려는 모습을 보고 대단히 당혹스러워했습니다. 이홍장이 떠난다면, 화남을 의화단이 휩쓸어버릴 것이라고 두려워 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독일 황제는 이홍장을 체포해서 볼모로 삼아야 한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는데, 어찌되었건 이홍장은 상하이까지 이르렀을때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이홍장은 죽기 직전까지도 천진을 점령하고 베이징으로 나아가고 있던 침략군에게 '관대한 조치' 를 요청하는등 일평생 계속해 왔던 제국에 대한 봉사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어찌되었건 이홍장의 죽음으로 쑨원과 이홍장의 회담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의화단 운동은 분명 큰 사건이고, 여기에서 개혁파들이 활약을 할 여지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가장 큰 장애가 되는것은 오히려 청 제국보다도 제국주의 세력이었습니다. 개혁 세력들이 열강에 큰 기대를 가지고 도움을 갈구했던 사실과는 달리, 열강은 대체로 이러한 개혁의 후원에는 미온적이었습니다.


 간단한 사실 입니다. 비록 열강 자신들이 그 기반을 손상시키고 있기는 하지만, 중국 문제에 있어 가장 간단한 해결책은 개혁파들을 후원하는것이 아닌, 썩어 문드러지고 있는 기존의 체제를 후원하는 것이었습니다. 협박과 강제를 통해 획득한 이권을 보호하는데는 이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제국주의는 기본적으로 현상(現狀)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혁명가들의 '불장난' 을 저지하고 '기존하는 당국' 에 대한 호의를 유지하는 쪽이 훨씬 나은 판단입니다.


 이홍장이던, 영국을 비롯한 열강의 당국이든, 아무런 방도도 제공해주지 못한다는 것이 명백해질 무렵, 쑨원과 그 동료들에게 남은 마지막 선택은 그들이 이전부터 고려해 오던 군사적 선택 뿐이었습니다. 혜주봉기(惠州蜂起)는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그보다 앞서, 청나라가 8개국 연합군에 선전포고를 시작했을 무렵, 각국의 공사관들도 공격을 받았습니다. 체류하는 외국인들과 중국의 기독교 신자들은 이에 맞서 농성을 벌였습니다. 선전포고는 6월 21일에 시작되었고,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한 것이 8월 14일이었으니 55일간을 버틴 셈입니다. 그렇게 잘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의화단은 숫자는 많았지만 우두머리들도 그만큼 많아서 명령이 제각각 이었습니다. 심지어 게중에 일부는 농성하는 사람들에게 식료품과 탄약을 팔아서 재미를 보기까지 했습니다. 


 그 무렵, 8개국 연합군은 대고 포대를 함락시키고 천진에 이르렀습니다. 연합군의 전력은 군함 47척, 장병 2만여 명이었습니다. 일본군이 가장 숫자가 많았는데, 여기서도 서로간의 이해 관계 문제가 있었습니다. 러시아는 조선을 둘러싼 영향력 다툼에서 일본과 대립했으므로 일본이 대군을 파견하는것을 반대했고, 반면에 영국과 미국은 일본을 지지했습니다. 영국도 중국 문제에 관해서는 영향력이 막대했지만, 보어인들간의 전쟁에서 수렁으로 빠지고 있었기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긴 힘들었습니다. 또한 의화단이 러시아의 이권인 철로를 파괴하고 있었기에, 러시아도 일본의 대군 파견을 결국 승인했습니다. 


 8개국 연합군은 천진을 함락했습니다. 이렇게 성큼성큼 군대가 진격하고 있는데도, 베이징에서는 '배외' 라는 입장을 이용해 숙청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서양 서적이나 외국과 관계가 있는 물건이 발견이라도 되면 이를 구실로 사람을 죽이는것입니다. 그전까지 전혀 실권을 잡지 못했던 사람들이 그저 '배외' 라는 두 글자를 앞세워 정권을 잡았습니다. 


 대학사나 공부상서 같은 고관들의 집도 수색을 당하고, 본인들은 몸만 도망쳐 나오는 형편이었습니다. 황족인 부륜의 집까지 약탈 당했습니다. 부륜은 영록에게 이를 호소했지만, 심지어 영록마저도 이제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을 넘었습니다. 아니, 영록 자신도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의화단이 베이징에 입성하기 전, 영록이 이에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의화단은 이제 스스럼 없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일룡(一龍), 이호(二虎)를 매장하겠다."


 이호는 양무파인 이홍장과 경친왕을 말합니다. 일호는, 바로 정치를 개혁하고자 한 광서제입니다. 황제를 묻어버리겠다는 소리가 나오는 판국이었습니다. 



 광기가 소용돌이치는 베이징으로 8개국 연합군은 8월 14일 진입했습니다. 이 모든 만행을 충동질한 서태후는 광서제와 함께 가장 먼저 서화문(西華門)을 빠져 나가 베이징에서 달아났습니다. 또한 서태후는 달아나면서 감금하고 있던 '진비'를 우물에 던져 죽였는데, 그녀는 광서제가 사랑하던 여인이었습니다. 무술변법이 실패로 끝날 무렵, 광서제를 위해 변명하다가 서태후의 노여움을 사서 감금된 여자였습니다.


 그토록 기존 질서가 무너지는것을 혐오하던 서태후는 자신이 목숨이 달아날 지경이 되자, 머리를 만주족이 아닌 한족처럼 꾸미고 서화문 밖에서 노새가 이끄는 수레를 타고 서안으로 달아났습니다. 주인 없은 도시인 베이징은 8개국 연합군이 공동으로 관리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대약탈의 시간이 벌어졌습니다. 유서 깊은 위대한 도시는 끈힘없은 약탈과 폭행이 이어졌고, 시체가 산더미를 이루고 보물들은 탈취되었습니다. 특히 독일이 가장 열성적이었는데, 독일 공사가 살해된 탓에 독일의 황제가 중국을 야만국과 똑같이 취급하라는 훈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독일 뿐만이 아니라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모두 눈에 불을 키고 약탈을 했습니다. 청나라 쪽의 기록으로는 게중에 미군과 일본군 정도만이 비교적 기율이 있었다고 합니다. 


 "내가 독일에 유학을 갔을때,"


 주더는 아그네스 스메들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중국산 융단이나 그림, 꽃병, 조각장식이 붙은 가구, 그 밖의 귀중한 예술품이 장식된 여러 집에 가끔 손님으로 초대받았습니다. 그때 내가 '이런 귀중한 물품들을 어디서 구했는가' 하고 물으면 주인들은 당황하는 빛을 감추지 못했는데, 그로 미루어 그 물건들이 베이징의 가정집이나 궁전에서 약탈한 것임을 알 수 있었지요. 나는 베를린에 있는 군사박물관에서 의화단의 기치가 몇 개 전시되어 있는 것도 보았어요. 내가 찾고자 했다면 프랑스인, 미국인, 영국인, 일본인의 집에서도 독일인 가정에 장식된 것과 비슷한 물건들을 발견 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한바탕 살육의 시간이 끝나고 뒷처리를 위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토록 사건을 일으킨 주모자들에 대해 처벌 등의 문제에 대한 논의가 벌어졌는데, 여기서 가장 신경전이 치열한것은 영국과 러시아로 양국은 사사건건 대립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와 불편한 관계인 일본은 자연스레 영국의 편을 들었습니다. 


 군사 시설권, 병력 주둔권 등 민감한 부분들도 많이 건드렸지만 가장 와닿을 배상금에 대한 부분을 보면, 배상금의 액수는 총 4억 5천만냥이 정해졌습니다. 이것을 39년 동안 나누어서 내기로 했는데, 장기 할부지만 연리를 합하면 총 10억 냥 정도나 되는 거액이었습니다. 이것은 청조가 멸망하고 난 뒤에도 중화민국이 부담해서 내었고, 무려 1940년이 되어서야 모두 해결 할 수 있었습니다. 


 광기의 시간은 끝났습니다. 의화단에 대한 평가는 상반된 입장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현대 중국에서의 평가를 대체로 말하자면, "비록 반동적인 목적이 역이용 되기는 했지만, 중국 민중의 엄청난 힘과 용기, 대담성을 과시했다." 는 정도입니다. 좀 더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중국 분할의 야심을 가진 열강의 목적을 모조리 포기하게 했다는 내용입니다. 영국인 총세무사였던 로버트 하트는 이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50년 후에는 갑옷으로 몸을 감싸고, 밀집부대를 만들 수 있는 백만 명의 의화단원이 중국 정부의 소집에 응할 것이다."


 보통 우리가 식민지배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때, 막연히 생각해보곤 하는 '일부의 독립 운동가 정도가 아니라, 아예 모든 국민들이 약속이나 한듯이 들고 일어나면 어떨까.' 라는 상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의화단 운동은 이것과 비슷한 일이 실제로 일어난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의의도 있는 반면에, 의화단의 기본적인 본질은 어설프고 허약했습니다. 분명히 의화단은 반봉건적이고 반외세적인 성격이 있으며, 열강의 침략에 머리를 숙이고 순종하고 있지만은 않겠다는 의식을 보여준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체계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의화단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과거 태평천국 운동 시에 보았던 홍수전, 양수청, 풍운산, 석달개 같은 이름을 떠올 릴 수 없었습니다. 물론 의화단 운동의 지도자들도 몇명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고, 그 말은 통합적이고 발전된 목표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베이징의 각국 대사관을 공략할때, 서로 통제권이 분산되어 있어 농성군을 뚫어내지 못한것은 이러한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의화단은 분명 힘을 가지고 번질 가능성이 있었지만, 통합되고 발전된 양상을 보여주지 못해 '혁명' 이 아닌 '폭동' 에서 더 나은 모습을 그다지 보여주지 못했고, 결국은 서태후 등에게 이용만 당했습니다. '일룡이호' 를 매장하겠다는 구호에서 반체제의 기상을 엿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반체제였다면 허수아비인 광서제가 아니라 서태후를 묻어버리겠다고 했어야 합니다. 


 당초에 원세개에 쫒겨날 무렵의 의화단에게는 반체제적인 성격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통합되지 못하고 발전하지 못한 탓에 서태후 등에게 이용 당하였고, 베이징에 들어섰을 무렵에는 정부에게 인정받은 단체가 되었습니다. '반체제' 가 아니라, '체제 내 과격파' 로 끝나고 만 것입니다. 이들은 반체제 집단과는 달리 아무리 과격해도 체제 내 과격파는 처벌을 당하거나 수위를 조절 하기 힘듭니다. 이러한 체제 내 과격파가 황족이나 고관까지 '배외' 의 이름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공격한 것은 문화대혁명 시기를 연상시키는 모습까지 있습니다.


 문혁의 이야기를 하자면, 의화단 운동의 평가가 높아진것은 문혁 시기의 영향도 있습니다. 물론 그 이전부터 의화단 운동을 애국적인 운동으로 보는 시각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를 다룬 청궁비사(清宮秘史)라는 영화를 류사오치(劉少奇)가 '애국적이다' 라고 평가한 것을, 척본우(戚本禹)라는 인물이 비판한것이 문화혁명 추진의 한 단계가 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변법 정책을 실행하는 광서제에게 진비가 협력했다는 줄거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척본우는 변법파의 노선은 부르주아 개량주의라면서, 제국주의에 몸을 팔아 제국주의의 힘으로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면서 비판하고, 또 영화 상에서 의화단 운동이 무지한 우민이 일으킨 야만적인 소동으로 그려진것에 대해서도 비판했습니다. 


 여하간 이러한 혼돈 속에서 대활약을 한 사람이 있었다면, 바로 원세개 입니다. 원세개는 의화단의 준동을 초기부터 염려하고 그들의 세력이 산동에 미치지 않게 했을 뿐만 아니라, 8개국 연합군이 진군할 때에도 "의화단은 이미 산동에서 섬멸되었으니, 연합군이 산동에 올 이유는 없다." 는 명분을 내세워 연합군의 산동 진출을 저지했습니다. 만일 이러한 지시에도 연합군이 산동에 접근을 한다면, 관리들을 내보내 예를 갖춰 대접함으로서 분쟁이 생길 여지 자체를 막아버렸습니다.


 또한 교회 등이 수난을 당하지 않게 보호했고, 각 현에 명령을 내려 "예방 대책" 을 세우게 하고는, 다른 성과의 경계에 푯말을 수없이 세워 놓아서 혹시라도 모르게 산동 내로 군대가 진입하는 일도 막았습니다. 원세개의 이러한 기민함에 열강은 원세개에게 상당한 호감을 표시했습니다. 의화단의 준동과 외국군의 진입을 막아 재산을 지킨 산동의 관료, 지주들도 '산동이 무사한것은 원세개의 덕분' 이라면서 칭송이 대단했습니다. 원세개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이홍장이나 장지동 같은 거물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로 성장했습니다. 원세개는 득의양양해서 부하들에게 자랑했습니다.


 "이번 난에 만약 우리 네 사람이 없었다면(이홍장, 장지동, 유곤일, 그리고 원세개 본인) 나라가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느냐?"


 단 한가지 문제가 있다면, 서태후 였습니다. 의화단의 운동은 박살이 났지만, 서태후는 복귀했습니다. 비록 서태후는 과거 변법파가 실행했던 여러 조치들을 자신의 손으로 실행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지만, 일단 건재하긴 건재했습니다. 하지만 원세개는 서태후가 지원병을 파견하라는 조치를 열강에게 미움을 받을까봐 거절했던 처지입니다.


 하지만 원세개는 이 문제에 대해서도 안배를 해 놓고 있었습니다. 


 서태후는 도망칠 무렵 서둘러 도망쳤기에 아무런 기반이 없었습니다. 원세개는 그런 서태후에게 아부를 했고, 서태후가 무엇을 시키든 바로 실행했습니다. 서태후가 경비를 마련해 달라고 하자 원세개는 즉시 은 10만 냥에 군대의 급료까지 보냈고, 그 후에도 은 21만냥, 비단 2백 필에 식량을 보냈으며, 무기를 보내라고 명령했을때도 즉시 이행했습니다.


 어려운 처지에서 원세개만큼 도움을 준 사람이 없었기에, 서태후 역시 원세개에 대해 의심을 지웠습니다. 의화단 단원들은 도처에 벽보를 붙여 원세개를 '간웅' 이라고 비난하고, '원세개를 죽여 반찬으로 만들어버리자' 라고 노래를 부르거나, 커다란 거북이 서양 사람들의 엉덩이 뒤에 납작 엎드려 있는 그림을 순무 관공서의 벽에 붙여놓는등 원세개에 대한 증오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원세개는 이 난리를 이용해서 순식간에 입지를 강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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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나도사랑을했으면 | 작성시간 13.05.19 수고하셨어요 ^o^. 제가 응원하고 있다는거 잘(?) 아시죠? ㅎㅎ
  • 작성자청계천거대쥐전설 | 작성시간 13.05.20 저도 열심히 읽고있어요 ~~~ 어서어서 올려주세요
  • 작성자Reichskanzler | 작성시간 13.06.30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원세개가 저래서 올라설수 있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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