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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108) ─ 불, 더 거센 불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5.26|조회수409 목록 댓글 1



 도산 안창호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국민들에게 말했습니다. "힘을 기르소서." 라고 말입니다. 그 힘이란 무엇인가, 지력(知力)과 금력(金力) 입니다. 그리고 지력은 교육을 통하여 길러지는 것이므로, 죽고 살고 노예 되고 독립되는 것은 교육으로 인해 판명이 난다는 이야기 입니다.


 지식이 곧 힘이다. 그러나 소수의 엘리트 지식인들 만으로는 바꿀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갑신정변에서 보았듯이, 몇몇의 '선지자' 를 자처하는 인물들이 움직이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몇몇 '선지자' 만이 아니라, 두명, 세명, 다섯명, 열명, 그리고 모두에 이른다면? 


 그것이 바로 교육의 힘입니다. 그리고 그 교육의 중심은 젊은이들 입니다. 1902년에 이를 무렵, 청나라는 왕대섭(汪大燮)이라는 인물을 일본에 파견 했습니다. '일본 유학생 총감독'으로 말입니다.



  왕대섭


 당시 일본에는 무수히 많은 중국인 유학생들이 있었습니다. 신문물, 신사조에 대한 요구가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과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도 신사조를 받아들인 일본은 매력적인 유학지였습니다. 무엇보다 한자 문화권이라 말이 통하지 않아도 어찌어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어 미국이나 유럽보다 유학하기가 쉬웠습니다.


 청조 정부의 입장에서는 이제 소위 말하는 근대화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니 일본에서 배워야 할 근대문물도 있지만, 문제는 이것들은 청년들을 '반체제' 로 몰고 갈 수 있는 독약이기도 했습니다.


일본에는 무수히 많은 '개혁가' 와 '혁명가' 들이 본거지를 차리고 있었습니다. 양계초는 '신민총보' 와 '청나라의보' 등으로 자리를 잡고 문필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쑨원도 일본을 혁명의 기지로 삼고 있었고, 장병린(章炳麟) 역시 있었습니다.
 

장병린


 장병린은 고증학을 배우고, 춘추좌씨전을 공부했습니다. 강유위가 주재한 강학회에서 '시무보'의 편집에 주재하기도 했지만, 워낙 성경이 불 같았기에 마찬가지로 '불' 이었던 양계초와 의견이 맞지 않아 그곳을 떠났습니다. 무술변법 당시에는 강유위, 양계초 등과 함께 하진 않았지만 '변법의 일당' 으로 취급을 받아 대만으로 도망쳤다가 일본에 망명했습니다.


 의화단 사건이 일어나자 장병린은 변발을 자르고 노골족인 반 만주족의 기조를 보였습니다. 그는 만주족인 청조를 부정하고, 한족의 정권을 세우고자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노선을 '종족 혁명' 이라고도 부릅니다. 장병린은 일본에서 '중국 망국 242년 기념회' 라는 것을 열려고 하다가 일본 관헌에게 저지 당했습니다. 


 망국을 기념하는 일 따위는 있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망국이란 명나라의 멸망을 말합니다. 장병린은 젊은 유학생들에게 '지금 중국은 망국에 있고, 나라가 망한지 242년이나 지났으며, 그 사실을 자각하라' 고 호소했던 것입니다. 



 중국의 대문호인 루쉰(鲁迅)은 이 무렵에 일본으로 유학 왔습니다. 루쉰은 그 당시의 일을 회고하면서, 자신은 본래 외진 시골 출신이라 소위 '만한' 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고 고백했습니다. 만주족은 숫자가 적으니, 시골에서 사는 사람은 그 실체를 느끼기 힘들었습니다. 시골 시림들이 시국을 가지고 심심풀이 이야기를 한다고 쳐도 기껏해야 이홍장이니, 장지동이니 하는 당대 유명한 정치가들의 뜬소문에 대한 정도였습니다.


 그런 루쉰이 1년 후에는 당당하게 변발을 싹뚝 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일본에서 민족의식에 눈을 뜬 것입니다. 청나라에서라면 엄격한 통제로 금서가 되었을 '불온서적' 들도 일본에서는 아무런 문제 없이 읽을 수 있었습니다. 


 청나라로서는 그런 '독약' 으로부터 유학생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관리 감독관을 파견한 것이지만, 이곳은 중국이 아니라 일본입니다. 아무리 청나라의 고위급 인사가 온다해도 감독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반체제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들이 늘어남에 따라, 이에 대한 토론과 논의도 활발해졌습니다. 개혁을 주장한다고 해도 그 노선, 정도는 차이가 있는 법입니다. 강유위와 양계초는 '혁명파' 가 아닌 개혁파였습니다. 사실 양계초는 일전에 '파괴주의' 등의 글을 쓰면서 청조를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스승의 영향 탓인지 이후 약간 후퇴한 입장을 보인 것입니다.


 장병린은 상하이의 학교에 교원으로 초빙되어 근무하면서, '소보(蘇報)' 에 강유위의 보황론을 반대하는 글을 썻습니다.


 "재첨이라는 작은 추물은 아직도 숙맥을 분간하지 못한다!"


 재첨은 광서제의 본명입니다. 콩과 보리도 구별 못하는 얼간이라는 소리이니 대단히 과격한 발언이었습니다. 19세 나이였던 추용(鄒容)는 역시에 소보에 실린 글에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추용


 "중국에 거주하는 만주인을 쫓아내거나 살해해서 원수를 갚아야 한다. 만주인이 세운 황제를 주살함으로써 만세에 다시 전제 군주가 있을 수 없도록 경고해야 한다."


 청조 정부는 당연히 격노하여 그 둘을 사형시키기 위해 안감힘을 썻습니다. 상하이에 있던 추용과 장병린은 잡혀 왔는데, 당시 상하이는 상해공동조계로 청나라가 전권을 행사하기 어려운 지역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상하이의 민심이 이상야릇해서, 이 둘을 죽인다 해도 좋을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재판을 오래 끌면 결국 혁명파의 선전만 될 뿐이라고 여긴 청나라는 장병린에게는 금고 3년, 추용에게는 금고 2년의 판결을 내렸습니다. 장병린은 형기를 견디고 개선장군처럼 일본으로 돌아왔지만, 추용은 형기 만료를 70일 남겨두고 옥사했습니다. 21세의 나이였습니다. 청나라 관리가 모살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 두명이 유치장에 감금되어, 아직 판결이 내려지지 않았을 무렵입니다. 이미 두 명은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기에, 장병린은 추용에게 이러한 시를 전했습니다.


 옥중에서 추용에게 보내다.

 추용, 나의 동생.
 머리를 풀고 일본으로 내려가다.
 날카로운 가위로 변발을 자르고,
 쇠고기를 말려 말린 고기로 만들다.

 영웅이 한번 옥에 들어가니,
 천지 또한 슬픈 가을이도다.
 목숨이 다할 때는 두 손을 맞잡으니,
 천지에 오직 두 머리가 있을 뿐.


 처형 전에 손을 맞잡자, 잃을 것은 천지에 오직 우리 둘의 목 뿐이니. 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추용의 글은 청나라에서는 당연히 금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젊은이들에게 수없이 읽혔고, 일본을 통해 다시 청나라에도 은밀하게 반입되었습니다. 19세 젊은이의 글은 차라리 절규에 가까웠고, 이것을 읽은 수많은 다른 젊은이들은 엄청난 흥분 때문에 자리에서 안절부절 못할 정도로 열기에 젖었습니다.


 혁명을 하려면 노예 근성을 없애야 한다, 혁명을 하라, 혁명을 하라, 혁명을 하라, 혁명을 하라, 혁명을 하라, 혁명을 하라, 혁명을 하라, 혁명을 하라, 프랑스는 세번 혁명을 했고 미국은 7년간 전쟁을 했다. 그러므로 중국은 혁명하고, 또 혁명하고, 또 혁명하라…… 2만자가 넘는 추용의 글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대는 참으로 완전무결한 독립의 자격을 갖추고 있다.

 그대는 여기 4만만(4억) 동포를 이끌고, 동포를 위해 목숨을 바쳐라.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라. 그대의 두개골을 땅에 내던지고, 그대의 간뇌를 드러내어, 그대의 원수 만주인과 그대의 공적 아이신기오로씨와 더불어 창과, 총알, 빗발치는 속에서 내달려라. 

 그런 연후에 다시 그대의 주권에 간섭하는 외래의 악마를 소탕하면 곧 그대의 역사정 오명을 씻을 수 있으며, 그대 조국의 명예를 드높이고, 그대의 독립 깃발은 이미 하늘 높이 펄럭일 것이다. 

 그대의 자유의 신은 이제 왼손으로 하늘을 가르키고, 오른손으로 땅을 가르키며, 그대를 위해 나타날 것이다.

 아아!

 하늘은 맑고 땅은 희니, 벽력일성이 수천 년 잠자는 사자를 놀래 잠에서 깨우고 춤추게 하리라. 이것이야말로 혁명이요, 이것이야 말로 독립이다! 

 황한 인종 독립 만세!
 중화공화국 독립 만세!
 중화공화국 4만만 동포, 자유 만세!



 온갖 열기가 소용돌이치며 고조될 무렵, 쑨원은 그동안 계속해온 '말' 을 그만 하고 행동으로 혁명에 나서고 있었습니다.  


 1898년, 영국은 자신들의 홍콩 식민지를 확장하면서, 혜주 지역의 일부를 가져갔고 이 때문에 이곳에서는 분노가 극에 달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 지역은 삼합회, 도적때, 밀수업자들과 기타 무법자들이 들끓는 곳이었습니다.


 쑨원의 친구 정사량은 정부군을 성도에서 끌어냄으로서 견제 작전을 벌이고, 광동에서는 쑨원이 끌어들인 동지 '등음남'이 이끄는 부대가 기습공격을 하는 계획입니다. 등음남은 쑨원이 하와이에서 데려온 농장경영자 였고, 쑨원에 협력한 동지 중 한명인 '사견여'는 명망 있는 사대부의 집안에서 태어난 21세의 젊은이였습니다. 쑨원의 혁명 세력은 그 시대를 상징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역시 자금과 군수품입니다. 홍콩의 백만장자 상인의 아들, '이기당' 은 2만 홍콩 달러라는 금액을 기부했지만, 아직 자금은 충분하지 못했고 군수품의 부족은 행동을 굼뜨게 했습니다. 쑨원은 일본의 도움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 도움을 줄 수 있는 동경의 분위기는 우선 조심스러웠습니다. 당시 일본이 보고있던 대상은 오직 러시아 였습니다. 러시아라는 거대한 흑곰에 맞서고 있을때, 중국에서 일어나는 어떤 자극스러운 사건은 만주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통제를 강화시키는 구실을 줄 우려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비해 대만의 일본 관리들은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대만의 관리들 입장에서는, 화남에서 일어나는 반란은 대만의 맞은편 중국 본토에 발판을 마련할 수 있는 좋은 사건으로 보였습니다. 쑨원은 당시 이전에 협력했던 유학순에게 호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유학순은 이제 상당한 고관이 되었는데, 쑨원은 유학순이 백만 달러를 지원하면 이후 '총통' 이나 '황제' 로 취임케 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쑨원이 생전에 내뱉은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지대한 의미를 부여하는것은 그리 신통한 효과를 볼 수 없습니다. 쑨원은 자기가 필요함에 따라 언제든지 말과 입장을 바꾸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쑨원은 자신만만한 사람이었고, 상황을 자기가 통제할 수 있다고 여기는 인물이었기에 그 상황에 따라 사람들이 자기 의지에 따르게 하기 위해 자신을 민족주의자, 세계주의자, 아시아주의자, 근대론자, 자유주의자, 공산주의에 호감을 가진 자 등으로 수없이 변모시켰습니다.  


 미래의 일이지만, 장제스의 고문이 되었던 호주 출신 도날드는 쑨원이 철도 관련 계획을 이야기할때에 대해 이렇게 회고 했습니다. 당시 쑨원은 중국이 지구상 최강국이 되기 위해서는 100만 마일의 철도망이 필요하며, 이는 10년 안에 달성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중국 전역의 철도망은 6천 마일이 되지 못했고, 이후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승리자가 되어 중국을 지배한 후에도, 65년간 2만 5천마일이 추가 건설 되었을 뿐입니다.


 "그가 사방이 각 6피트 정도의 커다란 지도를 가져와 펼쳐놓았을 때,"


 도날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쑨원이 그저 단순하게 '미친'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 이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를 보았다."


 쑨원은 지도에 있는 지형상의 장애를 전혀 꺼리지 않고, 붓 하나를 든채 티베트에서 몽고, 신강을 포함한 모든 영토에 그가 그려 놓을 수 있는 한 가장 많은 선을 채워 놓았습니다. 그렇지만 도날드는 그것 때문에 쑨원이 미쳤다고 생각한것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쑨원이 돈과 충분한 시간만 있다면 그가 그린 선, 또한 그 이상이 건설될 수 있다고 믿고 지도를 그렸기 때문에 그가 미쳤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도날드의 의견은 이러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미쳤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가 그렸기 때문에' 외국의 자본가들이 5년이나 10년 안에 그 모든 지점을 건설 할 수 있도록 충분한 돈을 주리라고 생각한 그 무모함 때문에 미친 것이다!"


 이것은 쑨원이라는 사람에 대한 단면을 볼 수 있는 사례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마치 망상가처럼 보일 정도로 무모하고, 어떤 순간에는 환상적이었던 행동으로 인해(비록 매번 실패를 반복했지만) 쑨원은 자신의 위대함을 후세에 남겼습니다. 어찌보면 혁명이라는것 자체가 일반적인 사람의 관점에서는 미친 행위 입니다.


 어찌되었건, 혜주 봉기는 어떻게든 실행되었습니다. 당초에 정사량이 모은 부대는 6백명이었지만 준비기간이 오래 걸림에 따라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고, 쑨원은 일단 계획 연기를 위해 해산을 명령했으나 전보가 너무 늦게 오는 바람에 불과 80여명의 반란군은 청조군을 찾아 선제공격을 가했습니다. 


 일단 봉기가 시작되자 사람들이 합류하여 게릴라 군은 숫자가 늘어났고, 유리한 지역을 찾아 천진하면서 정부군을 잇달아 패배시켰습니다. 그러나 정부군의 숫자가 2만 명으로 늘어날 무렵이 되자 게릴라 군의 전진은 저지당했습니다. 그로부터 3일 후, 쑨원은 다시 한번 봉기의 해산을 명령했습니다. 일본으로부터의 지원이 완전히 취소된 것입니다.


 계획대로라면 정사량의 군대가 하문을 점령하고, 이를 통해 무기와 장교단이 지원될 예정이었지만 일본은 이를 취소시켰습니다.


 쑨원이 순전히 이 지원만 믿고 일을 저지른것은 아니었습니다. 쑨원의 계획대로라면, 본래 필리핀으로 가기로 했다가 취소된 군자금 6만 5천엔으로 무기를 사서 게릴라 군을 도울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중개 역할을 한 나카무라 야로쿠라는 인물이 이 중에 무려 1만 5천엔을 자신이 삼켜버렸습니다. 그리고 기껏 도착한 무기도 무기와 탄약이 사용할 수 없는 쓰레기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정사량은 사태가 이쯤되자 군대를 해산하고 수백명의 동지와 함께 홍콩으로 철수했습니다. 선전을 하고 있었지만, 무기와 탄얍이 바닥나면 싸울 도리가 없습니다. 


 광저우에서는 사견여가 이곳을 혼란시켜서 봉기에 도움을 주려고 했습니다. (실제로는 혁명을 돕기에는 늦은 시간)사견여는 광저우 순무의 집 지하에 굴을 파고 폭약을 설치해 터뜨렸습니다. 그러나 뇌관이 작아 폭발력이 약해 순무에게 부상을 입히지는 못했고, 체포되어 처형당했습니다.


 홍콩으로 피한 동지 중 육호동은 자택에서 영어 강의를 하던 중, 진림이라는 자객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정사량도 이듬해 7월 병사했는데, 독살이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쑨원은 이후 요코하마로 이동했습니다. 혜주 봉기는 철저하게 실패로 끝났지만, 이로 인해 일본 내에서 강유위의 보황파와 혁명파의 관계는, 이제 혁명파가 그들을 역전하기 시작해씃빈다.


 강유위의 가장 큰 경력은, 목숨을 걸고 베이징 한가운데로 가, 서태후에 맞서 변법을 시행했다는 점입니다. 강유위를 비판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보황파가 자신들이 스스로 목숨을 걸고 일을 벌였던 과거를 말한다면 말문이 막히게 되는 셈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운동권 세력에서 과거 민주화 운동 중에 '감옥에 다녀왔나, 다녀오지 않았나' 같은 늬앙스 입니다.


 그런데 쑨원의 혜주봉기로 인해 혁명파도 실제로 일선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피까지 흘렸으니, 강유위의 보황파만이 가지고 있던 독점적인 지위도 흔들리게 된 것입니다. 다만 쑨원 개인으로 치면 명성이 높아지는 대신 혁명운동을 계속할 당장의 수단을 모조리 상실하는 결과가 되었지만, 이 일은 '보황' 과 '혁명' 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여러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불이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너무도 세찬 그 불은, 모조리 태워버리기 전에는 결코 꺼지지 않을 만큼 거대한 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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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2Pac | 작성시간 13.05.28 오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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