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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110) ─ 무릎을 꿇은건 추진력을 얻기 위해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6.09|조회수375 목록 댓글 1


입헌제를 주장한 장건(張謇)


기민한 태도로 처신을 잘해오고 있던 원세개 였지만, 그러나 세력이 점점 커질수록 그에 대한 의심도 늘어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원세개는 무려 여덞가지의 요직을 겸하고 있었고 의형제인 서세창과 심복 조병균, 양사기 등도 중앙과 지방의 요직을 장악하고 잇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정에 무슨 일이 생기면 군기처에서 북양에 물어본다."


 이렇게 되면서 양계초 등은 천진을 아예 "제2정부" 라고 지칭 할 정도였는데, 점점 물밑에서 여러 혁명운동과 입헌운동이 고조됨에 따라 원세개 역시 의심의 눈초리를 사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원세개가 입헌 개혁에 앞장선것이 원인이었습니다.


 당시 입헌운동을 중국 내에서 주도하고 있는 사람은 장건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양강총독 위광도, 호광총독 장지동을 찾아가 입헌할 것을 상소하라며 대신 상소문 초고까지 작성해 줄 정도로 열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지동은 두려운 마음이 들어, 일단 먼저 원세개에게 가서 의논을 해보고 그 의향을 알아본 다음에 일을 추진하자고 대답했습니다.


 장건과 원세개에 대해서는 이전에 아주 짦게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원세개가 오장경의 심복으로 조선에 주둔하고 그 권세가 커질 무렵, 당시 오장경의 참모였던 장건도 함께 있었는데 워낙 젊은 나이에 출세해 기고만장했던 원세개는 처음에는 장건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다가, 이내 "어르신" 으로 호칭을 바꾸었고, 나중에는 "장형" 이라고 부르며 동네 아저씨 대하듯 하여 둘의 사이는 멀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때는 절교한지 20여년 정도가 지난 후였고, 장건이 생각하기에도 원세개 같은 거물이 입헌운동에 나선다면 일이 수월해질 것이라고 여겨 오랜만에 원세개를 만났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원세개는 지금은 때가 아니니 잠시 상황을 지켜보자는 식의 대답을 했습니다.


 1905년이 되자, 이제 입헌운동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대단히 커져 단순히 '역도' 들의 외침으로 무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심지어 일부 고위급 관리들도 입헌제 실시를 상소하였고, 청나라 조정에서도 외국에 대신을 파견하여 정치제도를 시찰케 하는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장건은 그 무렵에 원세개에게 편지를 보내 다시 한번 설득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개인적 안위, 그리고 영욕적인 측면을 주로 자극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원세개가 가만히 보니 이제 입헌제는 막을 수 없는 대세처럼 보였습니다. 그러자 원세개는 이쪽으로 편승을 하려고 마음을 굳히게 된 것입니다. 원세개는 그떄부터 장지동과 함께 입헌 실시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또한 대신을 외국에 파견하여 정치제도를 시찰한 후, 각국의 헌법을 응용하여 헌법을 제정 실시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요구가 있자 7월 16일 무렵, 청 조정은 진국공 재택, 호부시랑 대홍자, 군기대신 서세창 등이 수행원을 대동하고 동서양 각국의 정치제도를 시찰하겠다고 선포했습니다. 원세개는 더 목소리를 내며 조정의 관료들을 일본에 파견하고 국민의 지혜를 모아 장차 지방 자치제를 실시하기 위한 풀뿌리의 기초를 다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외국 시찰 경비로 직접 10만원을 냈습니다. 또한 맏아들 원극정의 식견을 넒히기 위해 수행원의 일원으로 포함시켰습니다.


File

 원세개 휘하 북양3걸 중에 '용' 에 해당하던 왕사진(나머지는 '호랑이'인 단기서와 '개' 풍국장)


 원세개의 아들인 원극정은 어릴 때부터 병이 많고 몸이 약했습니다. 원세개는 자신이 과거에 급제하기 못했기 때문에 아들이라도 과거에 붙게 하려고 우수한 선생을 거금을 주고 초빙했지만, 처음에 열심히 공부를 했던 원극정은 한번 낙방하자 다시는 과거를 보지 않았고, 과거에 쓰는 글은 쓸모없는 이야기 뿐이라면서 몽땅 불살라 버렸습니다. 이에 대해 우려하는 어른들도 있었지만 원세개는 그 이야기를 듣고 그냥 웃어 넘겼습니다.


 대신 원세개는 외국어를 열심히 배웠고, 게중에 독일어와 영어와 능숙하여 외국의 관리들을 상대할때도 청산유수 같았습니다. 게다가 야심도 작지 않았고, 원세개는 이런 맏아들을 좋아해서 자기 대신 바깥 일을 보게 하거나 외국 사람들을 접견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원극정은 원세개 밑의 사람들과는 별로 사이가 좋지 못했는데 왕사진과 조병균 정도만이 원극정과 친한 편이었습니다.


 이 원극정은 부친의 앞에서는 항상 공손스러운 태도를 취했고, 아버지의 첩들에게도 깍듯이 예의를 차렸으며, 동생들에게도 친절했고 항상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야심을 위해 꾸며낸 태도로, 원극정의 동생들은 원극정의 이런 행위를 "위선적이다" 라고 여겨 원극정과 가까이 하기를 꺼려했습니다. 원극정은 아내와 사이가 좋지 못했는데, 아내가 심한 귀머거리라 제대로 대화를 하려면 글을 써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문끼리는 격에 맞았고, 부친이 손수 결행한 혼인이었기에 원극정은 일부러 원망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찌되었건, 원극정은 입헌을 위한 해외 순방의 시찰단에 일원으로 포함되어 떠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9월 24일, 해외 헌정 시찰단 일행등이 베이징에서 기차에 오르려고 할때 혁명당원 '오월' 이라는 인물이 폭탄을 던져 십여 명이 죽고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원극정은 가까스로 무사했지만 대신들 중에서도 부상당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서태후는 시찰단 파견을 잠시 미루었는데, 여기서 원세개는 특유의 '대세에 따라 처신하는' 태도를 보여주었습니다. 시찰단 파견이 늦춰지는 모습을 보고 서태후가 외국 시찰을 아예 최소하려는게 아닌가 여기면서, 은근히 입헌주의를 반대하는 쪽으로 태도를 바꾼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입헌주의를 반대하는 태도를 취했던 원세개는, 이후 우여곡절 끝에 출발한 시찰단이 1906년 여름에 귀국하여 헌법을 만들것을 주장하자 또다시 입헌정책의 가장 열성적인 지지자가 되었습니다. 원세개는 베이징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벼슬은 못 해도 상관 없지만 법은 개혁하지 않으면 안된다. 죽을 힘을 다해 입헌해야 한다. 입헌을 방해하는 자는 역적이다! 곧, 혁명당이란 말이다!"


 어찌되었건, 입헌의 분위기가 무르익은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시찰단의 보고서를 본 대부분의 대신들도 입헌에 찬성을 했고, 이제 문제는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입헌군주정을 실시할지 제도 개혁의 밑그림을 짜는일이 필요했습니다. 원세개는 이 작업을 주도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입헌 군주정을 한다는것은, 곧 기존 권력의 재분배 과정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조정에 있는 모든 관리 세력의 이해가 첨예하게 얽혀있는 문제이므로 주목도도 엄청나고, 지분을 주장할 사람들도 대단히 많았습니다. 원세개가 주장하는 밑그림은 군기처와 기존 내각을 폐지하고, 책임내각을 설치하자는 식이었지만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책임내각 설치에 주장하는 사람들도 국회 설립에는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아 체제 개혁 작업은 시간만 잡아먹고 진통에 시달리며 앞으로 시원하게 나가지를 못했습니다.


 가장 불만이 큰 사람들은 체제 개혁으로 인해 자신들의 지분이 줄어들 지경에 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황실의 여러 왕들과 다른 황족, 장군들은 원세개가 정권에서 자신들을 배제하려 한다고 여기고, 이에 크게 앙심을 품고 순친왕 재풍을 부추겨 원세개를 공격하게 한 것입니다. 



 순친왕 재풍.


 순친왕은 광서제의 이복 동생으로, 당시 만주 정홍기의 도통을 지냈으며 나이는 고작 23세였습니다. 순친왕은 원세게에게 여러 압력을 가했는데, 어는날은 심지어 회의석상에서 권총을 꺼내들고 원세개에게 겨누면서 이렇게 소리치기도 했을 정도입니다.


 "네가 이렇게 난리를 치니, 내가 황제를 위해 너를 죽이겠다!"


 이는 혁광이 나서서 간신히 말릴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환관들도 원세개에게 증오심이 대단했습니다. 지금은 조정 내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 환관들이었지만, 환관제가 폐지되면 그들은 마땅히 할 일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루는 원세개가 조회를 마치고 나오는데, 무려 백여명의 환관들이 원세개를 포위한 뒤 욕을 하고 비난을 퍼부었으며, 심지어 때리려고까지 했습니다. 


 백여명의 환관에게 둘러쌓인 원세개는 어찌할바를 모르다가 혁광에게 구원을 청했고, 혁광이 절대로 환관제를 폐지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나서야 원세개는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결국 책임내각제는 공중에 붕 떠버리고 말았고, 새로운 중앙 관제 발표에서 군기처도 모두 그대로 존재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진정한 의미의 '입헌'은 실행되지 못했습니다. 물론 원세개가 입헌제를 밀고 나가던 이유는 그 과정에서 군기처등을 폐지하고 내각을 장악하여 자신의 권력을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절대적인 그것으로 만들기 위한 의도도 있었지만 말입니다.


 이후 원세개는 한동안 잠춘훤(岑春煊)과 구홍기(瞿鴻䘛)의 공격을 조정에서 받아야 했습니다. 이 과정의 이야기는 여기서 언급하기에는 지나치고 번거롭고 세세한 이야기라 굳이 언급하지 않고 결과를 보면, 원세개는 강유위와 잠춘훤의 사진을 따로 구해 그 두개의 사진을 하나로 만들어 마치 두 사람이 몰래 만나는 듯한 사진을 연출해서 서태후에게 넘겼고, 이를 통해 잠춘훤을 파직시키는 일은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과정 이후, 원세개에 대해 공격을 퍼붓는 상소문은 끊이지가 않았습니다. 원세개의 권력은 너무나 큰데다 많은 관리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심지어 원세개의 막내 동생인 원세동 마저 형에게 이런 편지를 보낼 정도였스빈다.


 "지난 봄에 제가 하남에 갔었는데, 거기서 형님에 대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조정에 형님을 제어할 만한 사람이 없기에 장차 세력이 더 커지면 큰일이니 군권을 빼앗고 베이징으로 소환해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 말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빈다. 지금이라도 형님께서 잘못을 뉘우치고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 보답하시기 바랍니다."


 원세개는 이 편지를 보고는 웃어넘겼지만, 원세개에 대한 탄핵문은 끊임이 없었습니다. 이런 와중, 서태후와 광서제라는 양대 권력자가 동시에 사망하는 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광서제가 먼저 죽고 서태후가 나중에 사망했는데, 둘 모두 같은 11월에 사망했던 것입니다. 서태후야 노령이니 언제 사망해도 이상하진 않지만, 광서제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2003년부터 이루어진 조사에 따르면, 광서제의 머리카락과 유골, 의복이 비상에 심각하게 오염된것으로 나타나, 광서제가 자연사 하지 않았다는것은 거의 확실해졌습니다. 그리고 이미 그 당시부터 광서제의 사망에 대해서는 온갖 추축들이 난무했습니다. 당시에 나돈 소문 중에 하나는 광서제가 원세개가 보낸 약을 먹고 목숨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광서제가 죽기 직전 원세개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유서를 썻다는 이야기도 나돌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서태후가 광서제를 독살했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외국에 있던 강유위는 광서제의 사망 소식을 듣자 원세개를 비난했으며, 다른 황족등도 원세개를 처치해야 한다고 목소리르 높였습니다. 원세개는 언제 화가 미칠지 몰라 좌불안석이었는데, 문제는 이제 권력을 잡은 사람이 순친왕 재풍이라는 것이빈다.


 순친왕은 과거 원세개가 광서제를 배신한 일에 대해 크게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고, 원세개의 큰 권력을 위험하다고 여겨 원세개를 처치하려고 했고, 조정의 안팎에서도 이에 호응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원세개의 편이었던 혁광은 "원세개를 죽이는 일은 쉽지만, 그렇다면 북양군이 반란을 일으키면 어찌하겠는가?" 라고 만류했지만 상황이 워낙 좋지 않아 "죽이는것보다는 그냥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는것이 어떠한가" 라고 설득했습니다.


 혁광으로부터 대략의 분위기를 전해들은 원세개는 겁에 질려 허름한 옷으로 갈아입고 밤을 틈타 차를 타고 처진으로 달아났습니다. 심지어 그는 일본으로 달아나려고 했지만, 직례총독은 원세개를 다시 베이징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순친왕은 돌아온 원세개에게, 지금 병으로 걷기도 어려우니 고향으로 돌아가 요양하라고 권했습니다. 당시 원세개는 다리가 아파 조정에 나올 때 부축을 받아 나오던 처지였는데, 이를 이유로 삼아 사실상의 파직을 한 셈입니다. 원세개는 조서를 받고 얼굴이 파래졌지만, 억지로 웃으면서 절을 했습니다.


 "성은이 망극합니다."


 그리고는 천연덕스럽게 황궁으로 허겁지겁 들어가 자신을 파면시킨 순친왕에게 감사의 절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모르긴 모르되, 속에서는 불이 타오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원세개는 비참한 꼴이 되어 쫒겨나야 했습니다. 고향에 원세개의 집이 있기는 했지만 원세개는 둘째 형과 사이가 나빠 그곳으로 가지는 않았고, 하남성 북부에 집을 마련해 놓아 그곳에서 은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909년 1월 6일, 어둡고 삭풍이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운 날, 원세개는 극소수의 일행과 함께 기차를 타고 베이징을 떠났습니다. 역에서 배웅하는 사람도 별로 없어, 몹시 쓸쓸하고 처량해 보이는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원세개는, 이렇게 끝을 낼 생각 따윈 전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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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튜어니즘. | 작성시간 13.06.10 마지막 황제 부이가 순친왕의 아들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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