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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삼국통일전쟁, 동아시아의 세계 대전(1) ─ 고수전쟁에서 비담의 난까지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10.31|조회수1,346 목록 댓글 5


글은 엔하위키에 '삼국통일전쟁'이란 항목으로 작성한 글이고

(막상 항목을 들어가면 여러가지 수정이 되어서 되서 아래 글하고는 구성이나 내용면에서 틀린 부분이 있을 겁니다.)



글의 내용 자체는 대부분 노태돈 교수의 '삼국통일전쟁사' 의 내용입니다.

(다만 나당전쟁 부분은 이상훈 교수의 나당전쟁 연구나 서영교 교수의 나당전쟁사 등을 더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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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에 있는, 신라가 이룩한 삼국 통일의 위엄을 기리고, 한국의 통일에 의지와 염원을 밝히는 목적으로 1977년 건립된 통일전(統一殿)의 기념비. 순서대로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 문무왕(文武王), 김유신(金庾信) 기념비이다. 호국영령의 뜻을 기리는 장소여서 초·중등학생들의 통일이념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남산 칠불암과 전망대로 오르는 등산로도 설치되어 있다.

“과인의 시대는 운(運)이 어지러울 시기에 속하고 때는 다투어 싸우던 때였다. 

서쪽을 정벌하고 북쪽을 토벌하여 능히 영토를 안정시켰고 배반하는 자들을 치고 협조하는 자들을 불러 마침내 멀고 가까운 곳을 평안하게 하였다. 위로는 조상들의 남기신 염려를 위로하였고 아래로는 부자(父子)의 오랜 원한을 갚았으며, 살아남은 사람과 죽은 사람에게 두루 상을 주었고, 중앙과 지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균등하게 벼슬에 통하게 하였다.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었고 백성을 어질고 오래살게 하였다. 

세금을 가볍게 하고 요역을 살펴주니,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들이 풍족하며 민간은 안정되고 나라 안에 걱정이 없게 되었다. 곳간에는 언덕과 산처럼 쌓였고 감옥에는 풀이 무성하게 되니, 혼과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았고 관리와 백성에게 빚을 지지 않았다고 말할 만하다. 스스로 여러 어려운 고생을 무릅쓰다가 마침내 고치기 어려운 병에 걸렸고, 정치와 교화에 근심하고 힘쓰느라고 다시 심한 병이 되었다. 

운명은 가고, 이름만 남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이제 갑자기 긴 밤으로 돌아가는 것에, 어찌 한스러움이 있겠는가?"

- 삼국사기 제7권 신라본기 제7 三國史記 卷第七 新羅本紀 第七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문무왕의 유조 내용 중 일부.


"옛날엔 조그마했던 세 나라가, 이제는 장하게도 한 집이 되었다."
최치원, 지증대사적조탑비문(智證大師寂照塔碑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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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기병 전투도 ─ 삼실총(三室塚), 5-6세기, 중국 길림성 집안현

한국 고대 삼국시대(三國時代) 말기,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의 대결과 그로 인한 신라의 삼국통일과정, 그리고 이 과정 속에 중국의 통일 제국들과 일본, 북방 유목민족, 넒게 보면 티베트에 이르기까지 얽힌전쟁전투와 외교에 대한 총괄적인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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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12호분 벽화의 개갑 무사 전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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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벽화의 고구려군 기병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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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6세기 후반,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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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문수막새, 백제 6세기, 부여 능산리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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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구리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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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경 일본 군대의 갑옷 묘사

목차

 
1 개요
2 '삼국통일' 이란 개념이 성립하긴 하는가?
2.1 '신라 통일론'의 전개
2.2 '신라 통일론'을 부정하는 여러 설
2.2.1 고려시대의 인식 - 고려의 진정한 통일
2.2.2 남북국시대론
2.2.3 후기 신라론
2.2.4 중국 고구려사론
2.3 검토
3 삼국통일전쟁은 언제부터 시작하였나?
3.1 4세기 후반설
3.2 6세기 중엽설
3.3 중국 통일 제국의 등장에서 찾는 설
3.4 642년설
4 전쟁의 서막
4.1 남북조시대의 종결과 수 제국의 탄생
4.2 고구려의 반응
5 고구려-수 전쟁
5.1 백제의 움직임
5.2 신라의 움직임
5.3 전쟁의 결과
6 또다른 서막
6.1 당 제국의 성립과 팽창
6.2 영류왕(榮留王)의 유화책
6.3 대야성의 참극
6.4 연개소문의 정변
6.5 연개소문과 김춘추
7 1차 고구려-당 전쟁
7.1 신라의 사신과 당나라의 전쟁준비
7.1.1 신라, 백제에 대한 당의 압박
7.2 설연타의 움직임
7.3 신라와 백제의 움직임
8 국제전(國際戰)
8.1 각자의 사정
8.1.1 당나라의 입장
8.1.2 고구려의 입장
8.1.3 백제의 입장
8.1.4 왜국의 입장
8.1.5 신라의 정변 - 비담의 난
8.2 김춘추의 움직임
8.2.1 김춘추의 왜국 방문
8.2.2 김춘추의 당나라 방문
9 백제 700년의 종말
9.1 백제 내부의 혼란
9.2 나당연합군의 진격
9.3 백제 조정의 대응
9.4 황산벌 전투
9.5 사비성 함락과 백제의 멸망
10 백제 부흥운동
10.1 백제 부흥운동의 시작
10.2 노도처럼 번지는 부흥군의 기세
10.3 2차 고당전쟁과 유인궤의 전략
10.3.1 왜군이 고구려를 도우려 했다?
10.4 백제 부흥군, 패배하다
10.4.1 복신의 사정
10.4.2 부여풍의 사정
10.5 주류성 공략전과 백강구 전투
10.6 에필로그
11 고구려, 무너지다
11.1 연개소문의 사망과 후계자 구도
11.2 남생의 반란
11.3 평양성은 불타오르고
11.4 고구려 유민들의 에필로그
11.5 말갈 인들의 행보
12 나당전쟁
13 삼국통일전쟁 연표


1 개요 

한국사에서 가장 거대한 영향력을 끼친 사건 중의 하나.
- 노태돈,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9 

한국사에 있어서 삼국시대의 삼국이라고 하면 위에 쓴 대로 고구려, 백제, 신라를 말하지만, 사실 엄밀히 따지면 삼국만이 남아있던 시대는 562년 ~ 660년 뿐, 고작 100여 년이다. 그러나 이 수많은 국가들 중 율령제를 통해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한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세 나라뿐이므로 삼국시대라는 단어 자체는 타당성이 높은 편이다. (물론 가야등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삼국시대 항목 참조.)

그리고 바로 이 시기, 완성된 중앙집권국가인 삼국은 그 이전보다 훨씬 치열한 규모로 전쟁을 벌였고, 이는 결국 상대 나라의 멸망과 분열로 이어져 삼국시대의 종말, 그리고 통일신라 혹은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결과가 나오게 된다.

삼국통일전쟁은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된 삼국의 사회적 변화와 국가적 발전의 귀결인 동시에, 동아시아 국제전의 면모를 띠었던 전쟁이었다. 삼국 외에 탐라(耽羅)나 중국의 (隋), (唐) 제국과 일본의 (倭)가 직접적으로 참여했으며, 돌궐(突厥), 철륵(鐵勒), (奚) 등 북아시아 유목종족이 당군의 일원 등으로 동원되어 참전하였다. 거란(契丹)과 말갈(靺鞨)의 일부는 고구려에, 일부는 당에 가담하여 전투하였다. 

그리고 몽골 고원의 유목민 국가인 설연타(薛延陀)는 직접 개입하여 한반도(韓半島) 혹은 만주(滿洲) 지역에서 전투를 벌이지는 않았지만, 고구려와 연결하여 당에 대항하는 정책을 취해, 오르도스(ordos) 방면에서 당과 전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직접 군대를 파견하여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토번(吐蕃)의 발흥은 이 전쟁의 추이에 바로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이처럼 삼국통일전쟁은 가히 파미르고원(Pamir Plat) 이동 지역 대다수의 나라와 종족들이 직·간접으로 관계된 국제전이었다. 동아시아 각국의 정세 변동은 직·간접적으로 크든 작든 삼국통일전쟁의 진행에 영향을 미쳤다. 임진왜란과 더불어 동아시아 대전이라 불리기에 충분한 국제 전쟁.

이 삼국통일전쟁과정은 한국사에서 매우 많이 논의되었던 연구 주제이고, 세세한 부분에 대한 논의는 물론이고 심지어 기본적인 개념 설정에서부터 국내외 여러 학자들이 <del>키배</del> 논쟁을 벌이고 있다.


2 '삼국 통일' 이란 개념이 성립하긴 하는가? 

<del>시작부터 논쟁거리</del> 
<del>삼국통일이란 개념이 성립을 안하면 항목 제목부터 고쳐야 하는데</del>

구체적으로 삼국 통일 전쟁에 관한 그간의 논급(論及)을 살펴보면 많은 경우 논지 전개의 기저에는 '민족(民族)' 이라는 화두가 깔려 있고 그것을 둘러 싸고 다양한 시각이 교차하고 있다. 그것은 '삼국통일' 개념이 성립 할 수 있는지를 둘러싼 논란으로 집약되어 표출되고 있다. 비단 남한 학계 만이 아니라, 남북한 학계 간, 한국학자와 외국학자들 간의 상이한 역사 인식의 틀을 보여주고 있다. 

국내외 학계에서는 삼국통일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널리 사용되지만, 동시에 그것은 성립하지 않는 개념이라는 인식이 뿌리 깊게 퍼져 있다. 후자는 다시 그 안에 여러 갈래의 시각이 있다. 그 하나가 민족주의(民族主義) 사학(史學)의 일부 입장에서 신라의 통합을 삼국 통일이라 볼 수 없다는 주장이라면, 다른 한 주장은 민족주의적 시각을 비판하는 입장에서 삼국통일 개념은 그 전제와 사실 파악이 잘못되었다고 강조한다. 

그런가 하면 근래 중국 학계에선 중국 고구려사 시각에서 신라의 삼국 통일은 성립할 수 없는 그릇된 가정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삼국 통일을 둘러싼 이런 상이한 주장들은 전문적인 학자들간의 논의를 넘어, 한국인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는 역사인식의 차이를 반영하는 면이 있다.

2.1 '신라 통일론'의 전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였다는 주장을 처음 제기한것은 신라인들이었다. 삼국을 통일하여 한 집안을 이루었다는 삼한 일통 의식이 그것이다. 이런 의시은 7세기 종반에 등장하였다.

신라 조정은 668년 평양성을 공략한 후 곧이어 고구려 유민들의 반당 부흥 운동을 지원하였고, 고구려 유민 집단을 금마저[3]에 안치하고 안승(安勝)을 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였다. 이 '고구려'는 684년에 해체되어 신라에 완전 흡수되었다. 그리고 백제의 주민과 지역은 669년부터 벌인 당과의 전쟁을 통해 완전히 병합되었다. 이는 신라 조정이 삼국을 통합하였다고 자부하는 데 객관적 요소가 되었다.

신라 중대 왕실은 삼한 일통을 그 정통성의 근저로 삼아 강조하였다. 신문왕(神文王 ) 대에 당의 사신이 무열왕(武烈王)의 시호 태종(太宗)이 당태종(唐太宗)과 같다며 바꿀 것을 요구하자, 무열왕이 일통삼한(一統三韓)의 위업을 달성하였음을 들어 거부한 사건이나, 혜공왕(惠恭王)대에 행한 5묘제에서,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文武王)은 '백제와 고구려를 통합한 대공을 세운 임금' 이라며 불천지주(不遷之主)[4]으로 종묘에 모신 것은 그런 면을 말해준다.

삼한일통의식은 주요 정책에도 반영되었다. 신라 조정은 전국을 9주로 나누었는데, 소백산맥(小白山脈) 이남 지역을 신라 영역으로 설정해 3개 주를 설치하고, 옛 백제 지역에 3개 주, 한강 유역 등을 고구려 남계(南界)라고 하여 3개 주를 두었다. 그리고 왕 직속의 중앙 군단인 9서당(九誓幢)을 만들면서 고구려인으로 3개, 백제인으로 2개, 신라인으로 3개, 말갈인으로 1개 서당을 편성하였는데, 이 또한 같은 의식이 배경이 되어 행해진 조처였다.

http://imgnews.naver.com/image/041/2006/11/19/news1200611192002530.jpg?width=250
최치원(崔致遠)

신라인들의 일통삼한의식은 다름 아닌 발해(渤海)의 등장으로 중대한 도전에 직면하였다. 발해는 건국 직후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통교하였다. 이에 신라 조정은 대조영(大祚榮)에게 대아찬(大阿飡) 관등을 수여하였다. 이 대아찬은 신라의 17등 관등에서 제5등에 해당하는 진골(眞骨)에 준하는 대우를 한 셈인데, 당시까지 신라는 발해의 실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을 것이다.

이런 신라의 대접에 발해에서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는 기록의 부재로 알 방법이 없으나 만세를 부르며 좋아했을리는 만무하고, 신라가 당나라의 요청으로 발해에 공격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다.[5] 그런 가운데서도 양국은 시종일관 대결만 하지 않고 적잖은 교류가 있었던 같은데, 그 가운데 발해의 이러저러한 정보를 입수했을 것이다.

가령, 발해가 일본과의 교섭에서 자국을 고려라 자칭하였던 사실 등이 신라에게도 알려졌을 가능성이 있다.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한다는 것은 곧 신라 조정이 자부하던 삼국통일론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신라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야 기록의 부재로 알 방법이 없지만, 삼한일통의식이 신라 지배층에서 계속 견지되었음은 신라 하대의 금석문(金石文) 등을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그 중 하나인 890년에 세워진 월광사(月光寺) 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圓朗禪師大寶禪光塔碑)에서는 "지난날 우리 태종 대왕께서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기 위해……무력과 예로서 삼한을 일통할 때에……" 운운하였다. 그리고 924년에 세워진 최치원(崔致遠)의 지증대사비(智證大師碑) 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과연 여·제(麗濟)를 크게 무찔러서 재앙(災殃)을 제거하도록 하며, 무기를 거두고 경사를 칭송하게 하니, 옛날엔 조그마했던 세 나라가 이제는 장하게도 한 집이 되었다."

어느 면에서는 발해가 고구려 계승 의식을 표방하여 신라의 일통삼한론에 도전하고, 당나라에서의 쟁장(爭長) 사건[6] 등으로 신라를 압박함에 따라, 신라 지배층에서는 신라 통일론을 더 강조하게 되었고, 아울러 발해를 말갈의 나라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나타났을 수 있다.[7]

그런데, 신라 말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가 정립되고 이어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高麗) 시대에 들어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론' 과는 다른 일통론이 제기 되었다.

고려인들은 고구려와 신라 중 어느 나라가 정통인가, 바꾸어 말하면 고려 왕조가 어느 나라를 이었는가에 대해 두 가지 인식이 있었음은 많은 사람들이 논했던 부분이다. 고구려 정통론, 신라 정통론이 그것으로, 고려 왕조 개창에 중심적 역할을 하였던 이들은 고려라는 국호가 말해주듯 고구려 정통론의 입장에 섰다. 그런데 실제에선 신라의 영역과 주민 및 문화가 고려의 주된 부분을 구성하였으므로, 자연히 신라 정통론이 제기되게 마련이었다. 두 정통론은 고려 중앙 정계에서 정치적 상황 전개에 따라 이에 높아졌다가, 저게 높아졌다가 한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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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金富軾)과 삼국사기(三國史記)

동아시아에서 왕조의 정통을 확립하는 방안이 앞 시대의 역사서를 만드는 일인데, 이에 따라 고쳐 고이데 앞 시기의 역사를 정리한, 흔히 구삼국사(舊三國史)로 알려진 삼국사가 편찬되었고, 이어서 12세기에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가 편찬되었다. 두 사서 모두 삼국의 역사를 정리한 것이고, 구삼국사의 내용은 윤곽이 전해지지 않지만, 삼국사기와 마찬가지로 신라 말까지의 역사를 정리한것으로 보이며, 신라의 삼국 통일을 인정하는 역사인식이라면 삼국시대의 역사를 하나의 사서로 편찬하고, 통일 후에 신라의 역사를 따로 신라사라는 이름으로 편찬하여야 하는것이 순리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삼국사(기)라는 책명으로, 삼국 초기부터 신라 말까지의 역사를 편찬하였다. 이는 곧 진정한 삼국통일은 고려에 와서 이루어 졌다는 인식의 반영 <del>네놈들은 그냥 위대한 삼한 일통의 대고려 앞에 있던 훼이크 보스일 뿐이지</del> 이라고 여겨진다.

물론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는 신라의 삼국 통합 사실을 전하고 있고, 견훤(甄萱)과 궁예(弓裔)를 반역 열전에 기술하여 신라 정통론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책의 명칭과 구성에서, 고려 초 이래로 나려오던 '고려 토일론'의 틀을 전면전으로 거부하기 어려웠음을 보여준다. 이는 고려 전기까지도 삼한일통의식이 가진 양면성이 청산되지 못함과 유관하다.

즉 고려인들의 의식 기저에는 그때까지도 삼국의 주민을 아우른 차원의 통일체 의식과 함꼐 삼국별 분립적 역사계승의식인 삼국유민의식의 잔재가 남아 있었음을 의미한다.[8]

그러한 면은 새로운 역사 의식이 대두하던 고려 후기를 거치면서 청산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조선(朝鮮) 초기에 편찬된 동국통감(東國通鑑)은 변화된 면을 보여주었다. 동국통감에서는 고조선(古朝鮮)에서 비롯하는 일원적인 역사체계를 정립하여 삼국유민의식 청산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구체적인 사서의 구성에서 삼국기에 이어 신라기를 설정하여 삼국 병립기와 문무왕대 이후의 통일기를 명확히 구분하였다. 즉, 신라의 삼국통일을 긍정하고 그 의의를 뚜렷이 인식하였음을 나타내었다.

신라 통일론을 긍정하는 동국통감의 구성은 그 뒤 조선 시대의 각종 사서에 기본적으로 이어졌다. 물론 조선 중기 이후 신라 통일론을 비판하는 견해가 제기되었으나, 조선 후기의 대표적 사서인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도 '신라통일도' 를 실어 신라통일론을 이어갔으며 발해사는 부록 처럼 취급하였다. 통일 이후 신라를 정통으로 처리한 것은 조선 후기 강목체 사서에서 공통적으로 보인다. 

신라 통일론은 20세기를 통해 비판이 많이 제기되었어도 꾸준히 견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한의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와 다수의 개설서에서도 신라의 삼국통일론을 취하고 있다. 그중에는 남북국시대론을 취하면서도 신라의 '삼국통일'을 긍정하는 서술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가운데서, 신라 통일론 비판은 일각에서 제기되었고, 특히 20세기에 들어 민족주의 사학에서 신라 통일론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2.2 '신라 통일론'을 부정하는 여러 설 

2.2.1 남북국시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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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삼국통일론에 있어서 반대적인 시각으로 가장 먼저 지적된것은, 영토의 불완전성 문제다. 조선 중기 사람한백겸(韓百謙)은 동국지리지(東國地理誌)애서 이런 면을 수도의 위치와 연관시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나라를 세우고 수도를 정할 때는 그 규모가 크지 않으면 안 되며, 그 형세를 잘 살펴야 한다. 신라가 삼국을 통합한 초기에 당군이 철수한 뒤 수도를 국토의 중앙 지역으로 옮겨 사방을 제압하였다면,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할 수 있어, 부여와 요양 심양 지역을 우리 판도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어찌 저 거란이나 여진(女眞)이 홀로 그 땅을 마음대로 차지할 수 있었겠는가. 

신라의 군신이 일이 성사되자 쉽게 만족하여 한 모서리에 안주하여 당장의 안전을 추구하며 나날을 보내고, 서북 지역 태반을 헌신짝 버리듯 인접한 적들에게 내주어, 마침내 그 뒤 고려조에 이르기까지 7백여 년간 계속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되어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었으니, 어찌 가히 탄식치 않으리오.
─ 한백겸(韓百謙) 동국지리지(東國地理誌) 中


한백겸은 신라 지배층이 안정책을 취해 고구려의 옛 땅을 방기한 것을 비판하면서, 고구려 영토의 태반을 포기한 점이 결국 나라를 곤경에 처하게 만들었다며 불만스러운 점을 비판하였다. 하지만, 그는 신라의 삼국통일 자체는 부정하지 않았다. 18세기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에서 9주5소경을 기술하면서, 위에 제시된 한백겸의 글을 인용하였다. 안정복도 고구려 영역 통합의 불완정성에 대해 불만이 있었던 것.

신라 삼국통일론에 대한 불만이 높아진것은 조선 후기, 발해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다. 

고려가 발해사를 짓지 않았으니, 고려의 국력이 떨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옛날에 고씨가 북쪽에 거주하여 고구려라 하였고, 부여씨가 서남쪽에 거주하면서 백제라 하였으며, 박·석·김 씨가 동남쪽에 거주하여 신라라 하였다. 이것이 삼국으로 마땅히 삼국사가 있어야 했는데 고려가 이를 편찬하였으니, 옳은 일이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영유하였고, 대씨가 그 북쪽을 영유하여 발해라 하였다. 이것이 남북국이니,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것은 잘못된 일이다.

무릇 대씨가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가 소유한 땅은 누구의 땅인가. 바로 고구려의 땅으로, 동쪽과 서쪽 북쪽을 개척하여 (고구려의 영역)보다 더 넒었다. 김씨가 망하고 대씨가 망한 뒤에 왕씨가 이를 통합하여 고려라 하였는데, 남쪽으로 김씨의 땅을 온전히 소유하게 되었지만, 북쪽으로는 대씨의 땅을 모두 소유하지 못하여, 그 나머지가 여진에 들어가기도 하고 거란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 유득공(柳得恭), 1784년, 발해고(渤海考) 서문


유득공은 남북국시대론을 개진하면서 고려 통일의 문제점을 지적했는데, 이는 결국 신라 삼국통일론을 부정하는것이나 다름없다. 

신라 통일의 불완정성을 논하는것은 결국 고구려의 영토를 신라가 제대로 통합하지 못했고, 그것때문에 우리나라가 약소국이 되었다.는 식의 인식과 연결되었다. 이런 인식이 근대에 들어와 민족주의와 연결되어 신라통일론을 비판하고 남북국시대론을 진전시켰다. 그러면서, 신라가 외세와 결탁하여 동족을 팔아먹었다는 식의 비자주성, 비민족성을 강조하여 비판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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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신채호가 1908년에 발표한 독사신론(讀史新論)에서 그는 신라의 통일을 부정하고, 신라와 발해의 양국 시대를 주중하였으며, 이종(異種)을 불러 동종(同種)을 며람은 도적을 끌어들여 형제를 죽임과 다를 바 없는 행위라면서 신라의 통합 전쟁을 비난 하였다. 신라가 민족적 역량과 영토의 축소를 가져왔으며, 외세와 결탁한 반민족적 행위로 사대주의(事大主義)의 독소를 심었다는 것이다.

삼국통일론과 남북국시대론을 둘러싼 논의에서, '민족'이 핵심 화두가 되었다.

역사의 도덕화, 이념화는 민족주의 사학의 주요 특성이고, 이에 따른 신라 통일론 비판과 남북국시대론의 강조의 사론은 20세기에 꾸준히 이어졌다. 그런가 하면 삼국시대에는 아직 민족 관념이 성립하지도 않았다면서 민족 관념으로 삼국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당

신라 통일론을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671년, 당나라 장수 설인귀(薛仁貴)가 보낸 문무왕의 서한에서 언급한, 대동강 ㅣ남 지역을 신라 영토로 한다는 김춘추(金春秋)와 이세민(李世民,)의 합의를 주된 논거로 하여, 신라 조정의 전쟁 목적이 삼국통일이 아닌 백제의 병합이었다고 파악하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 설에서는 신라가 고구려 영역을 온전히 통합하지 못한 것은 본래 의도부터가 그러한 만큼, 이에 대한 비판은 삼국통일론에 집착함으로서 야기된 불필요한 비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남북국시대를 깊이 추구하다 보면 결국 통일신라라는 명칭에 대해 거부감을 보일 수 밖에 없고, 이에 따라 7세기 말 이후의 신라국가의 명칭에 대한 문제가 제기 되었다.

북한 학계에서는 '후기 신라'라는 명칭을 본격적으로 사용했고, 초기에는 신라가 당과 결전을 벌여 이를 몰아낸 사실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다가 1960년대 이후부터는 발해사를 강조하고 신라 통일론을 부정하였다. 나중에 가면 오히려 더 발해에 비중을 두는 식으로 전개가 되었다. 남한 학계에서도 남북국론에 서서 후기 신라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이 시기의 역사를 서술한 개설서등이 출간되었다.[9]

이러한 견해등에서 일반적으로 공통적인 시각이 7세기 이전의 이른 시기에 한국 민족이 형성되어 있었고, 삼국이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는 식이다. 그런 인식에 의거하면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의 나라를 멸망시킨것은 죄악의 행위이며, 그나마 온전히 통합하지 못하고 남은 일부가 따로 나라를 세웠으니, 이를 남북국시대로 규정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2.2.2 후기 신라론 

통일은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던 공간과 집단들을 통합하거나, 원래 하나였다가 나누어진 여러 지역과 집단들을 다시 하나로 합치는것을 의미한다. 

당시 삼국인들이 주관적으로 서로를 외국인으로 간주하였고, 객관적으로도 서로 다른 존재양태를 지녀 하나의 동질적 족속이 형성되기 이전이었다면, 이 시기 역사상과 인물을 대상으로 '민족'을 기준으로 한 포펌이나통일의 허실을 논하는것은 민족주의 역사학의 자위에 불과하다는 식이로, 결국 '삼국통일'이라는 점도 후세인의 관념에 따라 만들어진 주장이므로, 삼국통일의 개념을 사용하는것 자체가 무리라는 식이다.

민족 근대형성설 입장에 선 논자들이 피력한 이런 개념은 삼국시대에 삼국은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지 못하였고, 신라와 발해는 서로 이질적인 실체였다고 주장하면서, 7세기 후반의 신라를 통일 신라라는 말 대신 후기 신라로 명명하는 개념이다. 이는 남북국시대론에서의 후기 신라와 같은 표현이지만 뜻은 전혀 다르다.

8세기 이후 신라인들은 발해 지역을 이역(異域)으로 여겼고, 양자는 시종 대립적이었다고 보며, '말갈족의 발해'와 신라가 시종 대립적 관계였다고 보기도 한다. 이런 견해에서 신라 삼국통일론은 부정되며, 더 나아가서 아예 발해사를 한국사에 포함시키는거 자체가 거부되는 것이다. 남북국시대론도 이런 견해에선 설 자리가 없다.

2.2.3 중국 고구려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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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가 중국사에 귀속되었기 때문에, 삼국이라는 범주를 설정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시각이다. 이 논리에선 한강 이남에 거주하였던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의 한족(韓族)과 이들 한족에 바탕을 둔 신라와 백제의 역사만이 한국사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으로는 한강 이북 지역에 거주하던 예맥족(濊貊族)과 관련된 고대 국가들은 모두 중국사 범위에 귀속시키며, 이들에 세운 부여나 고구려의 역사는 중국사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입장에서는 자연히 삼국통일론을 부정하고, 한강 이북 지역을 중국의 역사영역으로 설정하는 식의 역사관을 내세웠다. 이 역시 신라 통일론을 부정하는 논리이다. 물론 남북국시대론도.

2.3 검토 

3 삼국통일 전쟁은 언제부터 시작하였나? 

삼국통일전쟁은 삼국의 성장에 따라 삼국 사이에 벌어진 장기간의 전쟁, 대립인 동시에 동아시아의 많은 나라와 종족이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국제전이었기 때문에, 긴 기간에 걸쳐 전개된 만큼 어느 시기를 끊어 삼국통일전쟁기로 설정하는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마 삼국통일전쟁 시기를 서술하려면 자연적인 시간의 흐름에서 어느 시기를 정해 전쟁기로 특정화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간 이에 관한 다양한 견해가 발표되었다.

3.1 4세기 후반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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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전반 낙랑(樂浪), 대방군(帶方郡)이 소멸된 뒤, 국경을 접하게 된 고구려와 백제가 옛 중국 군현 지역 지배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전쟁을 벌인 데서부터 통일전쟁의 시작을 설정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당시 양국은 중앙집권적 영역국가체제의 구축을 지향하였으며, 전쟁으로 획득한 영토와 주민을 중앙정부가 직접 장악하여 통치하려 했다. 이런 영역 국가체제로의 발전에 필연적으로 고구려와 백제 간에 더 많은 영토와 주민 획득을 위한 상쟁이 벌어졌고, 신라도 뒤이어 영역국가체제로 발전해 이 대열에 참가하게 되어 삼국 간의 혈전으 더욱 치열해졌다.

많을 때는 수만 명이 동원되던 대규모 전쟁은 막대한 인력과 물자의 징발을 요구했고, 이에 부응하기 위해 삼국은 조직력, 동원력 확충에 거의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 과정 속에 새로운 야철 기술 보급, 수리시설 확충 등의 생산력 정진에 성공하고, 관등제 정비, 중앙 관서조직과 지방제도 확충이 이루어지는 등 중앙집권적 영역구가체제로의 진전이 있었고, 삼국통일은 4세기 중엽 이후 장장 3백여년에 걸쳐 벌어진 움직임의 산물로 보아야 하며, 이 과정 속에 한국 고대사회가 중세 사회로 전환하였다고 보는 시각이다.

즉, 이러한 담론에서 삼국통일전쟁의 가장 큰 역사적 의의는 고대에서 중세로 전환하는 진통이었다는 것이다.[10] 통일신라 시기를 중세로 볼 수 있느냐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이 점은 삼국통일전쟁의 근본적 동인을 삼국사회 내부의 변화와 발견에서 찾은 견해로서 거시적 관점에서 통일 전쟁의 역사적 성격을 조망하는 부분이다.

3.2 6세기 중엽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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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간의 전쟁이 6세기 중엽, 그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띠어 통일전쟁으로 이어졌다는 시각이다. 즉, 신라가 한강 유역과 가야 지역을 영역화함에 따라 삼국의 역관계에서 중대한 변화가 발생했고, 6세기 중엽 이후 전쟁은 성숙된 집권국가들 간의 격렬한 쟁패전으로 이어졌고 일방의 군사적 승리는 즉각 상대국 내부의 질서를 위협하는 주요 동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영역지배의 강화에 따른 삼국의 새로운 전쟁 양상이, 수·당 왕조의 출현 이후의 변화와 결부되어 국제적인 대전으로 치닫게 되었다는 식이다.[11]

이 설은 주요한 역사적 진전의 동인을 삼국 내부의 발전에서, 구체적으로는 영역국가체제로의 발전에서 찾은 견해로, 내재적 발전론 시각을 깔고 있다는 점에서는 첫번째 설과 동일하다. 실제 신라의 6세기 대약진은 삼국의 역관계에 한 획을 긋는 중대한 사항이었다.

그리고 신라가 뒤늦게 이 무렵에 영역구가체제를 구축함에 따라, 삼국 사이의 전쟁의 양상도 더 많은 영토와 인민의 쟁취를 위해 대규모화하고 빈번해지며, 전쟁의 결과가 한 국가나 집권세력의 안위와 직결되었다. 하지만 고구려는 이미 그 전부터 영역국가체제로의 진전을 계속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4세기나 5세기가 아닌 6세기 중엽설을 내세운다면 이는 통일전쟁의 승자인 신라의 처지에서 그렇다는 것이 된다.

이 시각의 또다른 하나는 신라사를 보는 범위에서, 신라의 국가적 기반을 확립한것은 다름 아닌 진흥왕(眞興王) 시대 였으므로, 통일의 기반도 이 시기(540 - 576)에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견해이다.[12]

이러한 시각에 따른다면, 통일전쟁사의 시작은 한강 유역과 낙동강 서안을 차지한 진흥왕대의 팽창이 그 시점이다.

3.3 중국 통일 제국의 등장에서 찾는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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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隋) 제국

통일된 중국 제국의 힘은 그야말로 가공할만 하며, 그 제국들은 지구 역사를 통틀어서도 항상 가장 강력한 영향력들을 보였다. 한국의 삼국시대가 펼쳐지던 시기, 중국은 대부분의 시기를 서진(西晉)의 멸망 후 온갖 이민족들이 난립하고 끝없는 내부 전쟁이 벌어지던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로 이어졌고, 직접적으로 고구려 등에 군사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던 화북의 국가들은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등의 대혼란으로 상대적으로 군사적인 위협이 덜했다.[13] 

하지만 화북을 통일한 국가인 북위(北魏)가 등장하자, 그것만으로도 고구려는 상당부분 국제적인 정책을 수정해야만 했다. 북위가 남조와 유연(柔然)등을 상대하는게 더 먼저였음에도…… 하물며 남조까지 병합하며 결국 300여년만에 중국 통일을 이뤄낸 통일 제국들의 등장은 중국의 주변 국가인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에 어마어마한 후폭풍을 날릴 수 밖에 없는 초대형 사건이었음에 분명하다.

3.4 642년설 

642년 이후의 일련의 상황 전개가 삼국통일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에 토대를 두는 주장이다. 

642년 7월, 백제의 의자왕(義慈王)이 친히 신라의 낙동강 서쪽 40여 성을 공략하였고, 8월에는 백제 장군 윤충(允忠)이 대야성(大耶城)을 공략하였다. 이듬해인 643년 고구려와 함께 신라의 서해안 주요 항구인 당항성(黨項城)을 공격해 당과의 교통로를 차단하려 하자, 신라가 급히 당에 구원을 요청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어 신라와 당이 동맹으로 연결되어, 백제 멸망과 고구려 멸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한편 642년 이후 일련의 상황 전개는 562년 대가야(大伽倻)를 멸망시킨 뒤 유지되던 신라의 가야 지역 지배권과 기존 삼국 관계를 뒤흔드는 것이며, 왜국에도 외교노선을 둘러싼 갈등을 표면화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아, 이 해를 특히 주목한 논고들이 발표되었다.

즉 당 제국의 출현에 따른 동아시아 국제관계 재편 파장 속에서 그것이 구체적으로 삼국 관계의 갈등과 연결되고, 또 왜국의 동향과 연결되는 계기로 642년에 주목한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4 전쟁의 서막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시작점을 설정하는 부분에서만도 수많은 주장과 논의들이 있다. 본 항목에서는 편의성과 집약성등을 위해 고구려-수 전쟁 시점부터 이야기를 전개하려고 한다.

4.1 수 제국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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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문제(隋文帝) 양견(楊堅)

팔왕의난(八王之亂)과 그 뒤를 이어 밀려든 이민족으로 서진 제국이 붕괴되고 동진(東晉)이 되고, 화북에서 이민족 국가들이 끊임없이 서로 죽고 죽이며 헬게이트가 벌어진지 장장 300년 가까이가 지나 마침내 중국은 통일의 시기를 맞이했다.[14]

북위는 강력한 힘으로 화북을 통일했으나, (梁)의 명장 위예(韋叡)[15]에게 종리(鐘離)에서 대패하기도 했고, 또 그 후에 6진의난(六鎭─亂), 진경지(陳慶之)의 북벌등이 벌어지며 헬게이트가 열렸고, 여러가지 이후로 동위, 서위로 나뉘어진 다음 이들이 각각 북제(北齊), 북주(北周)로 변모하였다.

이 중 북주는 무제(武帝) 시절에 북제를 멸망[16] 시켰다. 이후 무제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사망했고, 그 후에 이른 선제(宣帝)는 매우 어리석어 난폭한 짓만 하다가 죽었고, 틈을 보던 양견은 제위를 얻어내고 마침내 수나라를 건국하였다.

이후 그는 개황 8년인 588년 10월, 한금호(韓擒虎), 하약필(賀若弼)등의 명장들에게 무려 52만 대군을 집결, 여덞 갈래로 군사를 나누어 전면적인 진군을 명령하여 남조의 (陳)을 공격하였다. 진의 수도 건강(建康)은 순식간에 함락되었고 우물에 숨어있던 황제 진숙보(陳叔寶)는 사로잡혀 진나라는 완전히 망하게 되었다.

이제 수문제는 장장 300여년만에 중국 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것이었다. 게다가 검소한 절약가였던 그는 소위 개황의 치(開皇之治)라고 칭송받는 뛰어난 정치를 펼쳐,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져있고 지쳐있던 백성들에게 여유와 희망을 주었고 수나라의 재정의 부유함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번영하게 되었다. 

게다가, 수는 국제적인 행보에서도 성공 일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 영역을 모두 합치면 카스피해에서 바이칼호와 내몽골에 이르는 실로 광활하고 강력한 힘을 지녔던 돌궐[17]을 두개로 완전히 붕괴시켜버린것도 수나라의 외교책이었다.

서돌궐과 동돌궐은 나누어지긴 했어도 그 이전에는 동돌궐이 우위를 확보한채 서돌궐은 이인자의 칭호에 만족하면서 지냈는데, 결국 대립이 일어나 서로 전투를 하게 되자 수나라는 이 뒤에서 한쪽을 지원하거나, 갑자기 편을 바꾸거나, 일부러 도망친 사람을 보호하거나, 비밀리에 또다른 쪽을 지원하는등, 별다른 전투를 벌어지도 않고 단지 '오랑캐를 다루는' 상투적인 계략만으로 돌궐의 힘을 대단히 약화시켰다. 

당연하게도, 그 여파는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삼국에게도 밀려들어왔다.

4.2 고구려의 반응 

4.2.1 평원왕 

수나라가 내부의 엄청한 힘을 외부로 돌리기 시작한다면 당장 개피를 보는것은 물론 고구려였다. 고구려는 평원왕(平原王) 시절 부터 수나라에 계속해서 조공을 바치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정보 탐색과 돌아가는 모양새도 어느정도 파악은 했을 것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581년부터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는데, 584년까지 비교적 짦은 시기동안 일곱 차례나 되는 조공을 바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던 와중, 마침내 남조의 진이 수나라에 멸망하여, 기어코 수나라가 중국 통일의 대업을 완수했다는 소식이 고구려에 전해졌다. 

三十二年王聞 陳 亡大懼理兵積穀爲拒守之䇿
32년(590)에 왕이 진 (陳)이 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병기를 수선하고 곡식을 축적하는 것으로 막고 지켜낼 방책을 삼았다. 
─ 三國史記 卷第十九 髙句麗本紀 第七


수나라의 중국 통일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을 평원왕은 크게 두려워했고, 서둘러 병기를 수선하고 곡식을 모으면서, 대처 방법을 생각하는 등 발 빠른 행보를 보였다. 

고구려에 그나마 다행인것은, 평원왕이 이 당시 쇠퇴일로를 걷던 고구려를 안정시키는데 큰 노력을 했다는 것이다. 안원왕(安原王) 이래로 점점 쇠퇴하던 고구려[18]에서 국왕으로 즉위하며, 스스로 검소한 모습을 보였고,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고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고 무리한 궁궐 수리를 중단하기도 했다.

여하간에 당시 수서(隋書)의 기록을 보면, 수문제 초기에는 고구려 사신들이 자주 왔는데, 수나라가 진나라를 평정한 후에는 고구려가 크게 두려워하며 곡식을 저축하고 방어할 계획을 하고 있었다는 기사가 보인다. 

이 점이 당시 수문제에게 꽤나 거슬리게 보였는지, 수문제는 옥새를 찍은 조서인 새서(璽書)를 보내 평원왕을 질책했다.

隋 髙祖 賜王璽書責以雖稱藩附誠節未盡且曰彼之一方雖地狹人少今若黜王不可虚置終湏 更選官屬就彼安撫王若洒心易行率由憲章即是朕之良臣何勞别遣才彦王謂 遼水 之廣何如 長江 髙句麗之人多少 陳 國朕若不存含育責王前愆命一將軍何待多力殷勤曉未許王自新耳王得書惶恐將奉表陳謝而未果 

수 고조 (高祖)가 왕에게 새서(璽書)를 주어 질책하기를 

“ 비록 번부(藩附)라고는 하나 정성과 예절을 다하지 않는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그대의 지방이 비록 땅이 좁고 사람이 적다고 할지라도 지금 만약 왕을 쫓아낸다면 비워둘 수 없으므로 마침내 관청의 아전과 하인을 다시 선발하여 그곳에 가서 다스리게 해야 할 것이다. 왕이 만약 마음을 새롭게 하고 행실을 고쳐 법을 따른다면 곧 짐의 좋은 신하이니, 어찌 수고롭게 별도로 재주있는 사람을 보내겠는가?"

"왕이 요수(遼水)의 넓이를 말하나 어찌 장강(長江)만 하겠으며 고구려 인구의 많고 적음이 진(陳)만 하겠는가? 짐이 만일 포용하고 기르려함이 없고, 이전의 잘못을 질책하려 한다면 한 장군에게 명할 것이지 어찌 많은 힘을 필요하겠는가? 하여 은근히 타이르고 왕이 스스로 새로워지도록 할 뿐이다.” 왕이 글을 받고 황공해서 표(表)를 올려 사과하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三國史記 卷第十九 髙句麗本紀 第七


이렇게 대립의 불씨가 보이는 와중에, 평원왕은 사망하였다. 그 뒤를 이어, 영양왕(嬰陽王)이 즉위하게 된다.

4.2.2 영양왕 

590년에 즉위한 영양왕은 평원왕의 장자였고, 풍채와 정신이 뛰어나고 호쾌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고 한다. 

영왕왕의 시대에도 당분간은 고구려쪽에서 조공을 바치고, 수나라쪽에서 영양왕을 인정하고 옷을 선물로 주는등 눈치만 보면서 서로 교류를 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물론 그런 와정에 서로 각자 조정에서 돌아가는 분위기들을 살폈을 것이다.

한편 수나라가 강대해지고 수나라의 포섭이 이어지자, 일부 속말말갈의 무리가 고구려를 뒤로하고 수나라에 합류했다.[19] 또한 거란의 한 부족인 출복부도 고구려를 배반하고 수나라에 내부(內附)해 버렸다. 고구려는 계속 수나라의 팽창과 영향력을 좌시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영향력을 보이는 동시에 수나라의 반응을 한번 보려는 등 여러가지 이유로 요서(遼西) 지역을 선제 공격했다. 이때 영양왕은 말갈의 기병 1만여 명을 동원했고, 정황상 대규모 침공이 아니라 치고 빠지는 형태의 싸움으로 보인다.[20] 

이 공격 자체는 수나라의 영주총관(營州總管) 위충(韋沖)이 막아내었다. 이제 문제는 수나라의 반응이었다.

5.1 1차 고구려-수 전쟁 

수문제는 이 소식을 듣고 매우 화를 내었다. 그는 즉시 한왕(漢王) 양(諒)[21]을 원수로 삼고, 왕세적(王世積)에게 명령하여 수군과 육군을 동원, 고구려를 공격하게 했다. 삼국사의 기록대로라면 이 당시 동원된 수나라군의 병력은 모두 30만에 이른다.

동시에 수문제는 영양왕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문제는 그 당시가 음력 6월. 이제 슬슬 한여름에 접어들게 되는 시점이었다.

수나라 육군은 장마 때문에 보급의 수송에 어려움을 느꼈고, 설상가상으로 전염병까지 발생했다. 더구나 수군을 이끌던 주라후(周羅睺)는 배를 타고 평양성으로 가다가 바람을 제대로 맞고 수군이 대부분 표류하고 가라앉았다.

수군은 어찌어찌 요수(隋軍)에 도착했지만[22] 음력 9월이 될 무렵 수나라군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후퇴하였다. 그럴만도 한것이 기록으로 보면 당시 죽은 자가 10명 중 8~9명이었다. 게다가 영양왕이 그 무렵 스스로 자신을요동 분토(糞土)[23]의 신하 운운하는 표문을 보내자, 수문제도 망한 원정이지만 체면은 그럭저럭 차릴 수 있어 퇴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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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식(姜以式)

이때에 고구려군이 철수하는 수나라 군을 공격하여 대파했다는 '임유관 대첩' 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있으나 근거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 1차 전쟁 당시에 고구려의 장수 강이식(姜以式)이 활약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당시 이 임유관 대첩을 지휘한 장수가 바로 강이식이었다는 설이 있다. 다만 전투 자체도 실제로 그런게 있었는지도 알 수 없고, 더구나 강이식의 경우도, 삼국사기를 비롯한 '정사' 라 할 수 있는 사료에는 강이식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지않으며, 신채호의 저서인 조선상고사에 올라와 있는 기록마저도 현재는 남아있지 않는 《서곽잡록(西郭雜錄)》과 《대동운해(大東韻海)》에 올라와 있는 기록을 참고했다고 하여 하여 실제에 의문이 있다.

중국측에서 하도 심하게 털려 기록에서 삭제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렇게 따지면 더한 패배였던 살수대첩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건……

참고로 저 태풍과 전염병과 관련해 몇가지 설들이 있는데, 천재지변으로 당했음에도 장수를 벌했다는게 모순된다면서 고구려가 수나라 군대를 힘대결로 이겼는데도 그걸 의도적으로 축소시키려고 태풍과 전염병으로 피해를 입었다고 왜곡했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고구려가 선제공격으로 수나라를 도발한 이유가 태풍과 전염병으로 대군을 부리기 어려울 여름철에 공격하게끔 함정을 판것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5.2 수양제의 야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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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제(隋煬帝) 양광(楊廣)

전쟁 후에 문제는 고구려를 대하는것을 전쟁 이전에 하듯이 했고, 영양왕도 해마다 수나라에 사신을 보냈다.[24] 

그렇게 별다른 없이 시간이 지난지 얼마 되지 않아 604년, 수나라에 크나큰 변고가 일어나게 된다. 명군으로 이름난 수문제가 아들 양광에게 당하고, 양광이 새로운 수나라의 군주로 등극하게 된것.

양제는 즉위하자마자 만리장성(万里长城)을 보수했고, 대운하를 다시 건설한다. 대운하는 사실 부황 문제 때부터 시작되었으나, 스케일이 커진 것은 바로 양제 때문이다.

양광의 폭정은 너무나 엄청나고 스케일이 큰 데다 셀 수 없이 많아 이 항목에서 따로 열거하는게 불필요해보일 지경이다. 자세한 부분은 수양제 항목 참조.

하지만 수양제의 이런 폭정과는 별개로, 수나라의 국력 자체는 대단히 막강하였다. 수양제가 그렇게 해먹을 수 있는것도 워낙 나라의 저력이 있으니 그런 것이고……실제로 훗날 당태종 시기, 심지어 당고종(唐高宗) 시대에 이르기까지 당나라는 수나라 최전성기 시절의 호구를 뛰어넘지 못했다.

패기와 야심이 남달랐던 수양제는 즉위 이후에 친히 원정을 떠나 서방의 토욕혼과 북방의 돌궐을 토벌하고 남쪽으로는 베트남까지 진출하는 등 그 위세를 떨쳤다. 그런 수양제에게 고구려는 성가시게 거슬리는 존재였다. 이 무렵 고창국(高昌國)의 왕과 돌궐의 계인가한(啓人可汗)이 모두 친히 대궐에 나와 공물을 바쳤다. 호사스럽고 허세를 좋아하는 수양제는 이때 영양왕에게도 입조(入朝) 하라고 말했지만, 영양왕은 두려움을 느꼈고, 수서의 표현대로라면 '번국의 의무를 소홀히 했다.' 아마도 수나라가 보기에 불경스러운, 전쟁 대비 등의 작업에 착수 했을 수도 있다.

이런 양광의 과시욕과 통일 제국의 팽창하는 힘, 자신의 서쪽에 초강대국이 출현한것에 대해 고구려는 극히 긴장하였다. 수나라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선 동돌궐의 힘을 빌릴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607년, 한 고구려 사신은 동돌궐의 계민 가한을 만나고 있었는데……하필 그때 수양제가 계민 가한을 만나러 왔다! 앞서 계민가한은 고창국과 함께 수나라 조정에 입조를 했던적이 있었고, 수나라의 힘을 몹시 두려워 했기에 차마 숨길 수가 없어 고구려 사신과 함께 수양제를 만날 수 밖에 없었다. 마침 앞서 말한 '번국의 의무를 소홀히 했다.'는 언급도 그렇고, 그 이전의 전쟁도 그렇고 고구려와 수나라가는 그다지 감정이 좋은 상태가 아니었는데, 여기서 수나라의 황문시랑(黃門侍郞) 배구(裵矩)가 수양제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고구려는 본래 기자(箕子)가 책봉을 받은 땅으로, (漢)·(晉) 때에 모두 군현으로 삼았습니다. 지금 신하가 되어 섬기지 않고 따로 외국의 땅이 되었으므로 앞의 황제께서 정벌하고자 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다만 양량(楊諒)이 못나고 어리석어 군대가 출동했으나 공이 없었습니다. 폐하의 시대가 되어 어찌 멸망시키지 않음으로써 예의 바른 지역을 오랑캐의 고을로 만들겠습니까? 지금 그 사신은 계민(啓民)이 온 나라를 들어 모시고 따르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을 이용하여 사신을 위협해 입조하게 하십시오.” ─ 三國史記 卷第二十 髙句麗本紀 第八

이에 양제는 우홍(牛弘)이라는 신하에게 자신의 뜻을 선포하게 하였다.

“짐은 계민이 성심으로 나라를 받든 까닭에 친히 그 장막에 왔소. 내년에는 마땅히 탁군 (涿郡)으로 갈 것이오. 그대는 돌아가는 날에 그대의 왕에게 마땅히 빠른 시일 내에 들어와 조회하고 스스로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아뢰시오. 보존과 양육하는 예절은 마땅히 계민(啓民)과 같이 할 것이오. 만약 조회하지 않으면 장차 계민을 거느리고 가서 그대들의 땅을 돌아볼 것이오.”─ 三國史記 卷第二十 髙句麗本紀 第八

이것은 수나라가 고구려에 하는 최후통첩, 실질적인 선전포고나 다를 바 없었다.

5.3 백제의 움직임 

앞서 598년 무렵, 백제 위덕왕(威德王)은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고, 스스로 군도(軍道)가 되기를 요청하였다. 이건 고구려 좀 어떻게 해주라는 움직임에 가까운데, 당시 수문제는 이미 전투에서 성과라곤 없이 철수하고 난 상황. 그래서 이런 식으로 대답하였다.

"왕년에 고구려가 조공을 바치지 않고 신하로서의 예절을 갖추지 않았기에 장군들로 하여금 그들을 토벌케 하였는데, 고원(高元)[25]의 신하들이 겁을 내며 잘못을 시인하기에 내가 이미 용서하였으니 그들을 칠 수는 없다." ─ 三國史記 卷第二十七 百濟本紀 第五

이에 고구려가 그 사실을 알고 화가 나 백제의 변경을 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백제는 무왕(武王) 시대에도 자주 수나라와 연락하였고, 607년에는 좌평(佐平) 왕효린(王孝隣)을 보내 다시 한번 고구려 공격을 제안하였다. 이는 고구려의 남진을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또한 신라 변경에 대한 집요한 공격 등이 성과를 내었고, 혜왕과 법왕으로 이어지는 불안한 정국을 수습하면서 자신감을 가지고 국제 무대에 뛰어든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5.4 신라의 움직임 

신라 역시 백제와 마찬가지로 수나라의 개입을 바라고 있었다. 진평왕(眞平王) 시절 신라에 대한 백제와 고구려의 공격이 가중되었다. 602년에는 백제가 아막성(阿莫城)을, 불과 1년만인 603년에는 고구려가 북한산성(北漢山城)을, 605년 8월에는 역으로 신라가 백제를 공격해보기도 했지만 608년 2월에는 백제가 고구려 변경을 침략하여 8천여명을 잡아가 버렸다. 다시 2개월 뒤인 4월에는 고구려가 우명산성(牛鳴山城)을 공략해서 함락시켰다. 611년 음력 10월에는 백제 군대가 가잠성(椵岑城)을 100일간 포위한 끝에, 결사항전을 한 찬덕(讚德)이 죽고 성이 함락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견딜 수가 없었던 신라는 611년, 수나라와 연락하여 군사를 청하였고, 수양제는 이를 허락하였다. 그리고 611년 2월, 마침내 수양제가 움직였다.

5.5 2차 고구려-수 전쟁 

대업(大業) 7년. 611년 2월. 양제는 양주 땅에서 백관을 초대해 큰 연회를 베푼 다음, 원정을 위해 북상했다. 양제는 화려한 용주(龍舟)를 타고 운하를 거슬러 북쪽으로 올라가 황하로 나간 다음, 영제거(永濟渠)라는 새로운 운하로 들어가 하북의 탁군에 도착하였다. 이때 선발된 사람 3천여명이 걸어서 배를 따랐는데, 추위와 굶주림과 피로로 열에 한 둘은 죽었다고 하였다. 수양제는 탁군에 오겠다는 자신의 말을 지켰으며, 이는 고구려를 침공하겠다는 의사표시였다.

5.5.1 유례없는 준비 

수나라 군대는 탁군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산동성 동래에 병선 300여척을 건조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원정에 늦지 않도록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사를 강행했다. 일꾼들은 허리까지 물에 잠긴 채 일하느라 전체의 3·4할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천하에 명령이 떨어져 탁군으로 병력이 모였고, 7월에는 드디어 군량을 수송했다. 여양(黎陽)과 낙구(洛口)에 큰 식량창고군이 있어 그곳에서 배를 이용해 탁군으로 실어 날랐다. 꼬리를 물고 이어진 배가 1천리 였다고 하니 실로 어마어마한 소동이었다. 육로로 가는 병대들은 마음 놓고 쉴 수도 없었다. 밤에도 걸어야 했기 때문에 피로로 쓰러지는 자가 속출했다.

죽은 자가 머리를 나란히 하고 누웠고, 썩은 내가 거리에 진동하여 천하가 소동했다.

이때의 상황을 사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군대만이 아니었다. 군수품을 나르는 인부와 차부가 60만 명이나 징용되었는데 길은 멀고 험했으며, 두 사람이 쌀 석 섬을 날랐는데 그것은 자기들 식량으로도 부족했다. 정해진 분량을 나르지 못하면 처벌 받기 때문에 징용된 사람들은 도망칠 수 밖에 없었고, 도망치면 불법자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천하에 쫓기는 자가 넘쳐났다. 그들은 여기저기서 떼를 지어 비적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612년 음력 1월, 수양제는 공식적으로 고구려 총공격을 명했다. 

“고구려 작은 무리들이 사리에 어둡고 공손하지 못하여,발해(渤海), 와갈석(碣石) 사이에 모여 요동 예맥 의 경계를 거듭 잠식하였다. 비록 한(漢)과 위(魏)의 거듭된 토벌로 소굴이 잠시 기울었으나, 난리로 많이 막히자 종족이 또다시 모여들어 지난 시대에 냇물과 수풀을 이루고 씨를 뿌린 것이 번창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저 중화의 땅을 돌아보니 모두 오랑캐의 땅이 되었고, 세월이 오래되어 악이 쌓인 것이 가득하다. 

하늘의 도는 음란한 자에게 화를 내리니 망할 징조가 이미 나타났다. 이거 본인 사망 플래그 아닌가?도리를 어지럽히고 덕을 그르침이 헤아릴 수 없고, 간사함을 가리고 품는 것이 오히려 날로 부족하다. 조칙으로 내리는 엄명을 아직 직접 받은 적이 없으며, 조정에 알현하는 예절도 몸소 하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도망하고 배반한 자들을 유혹하고 거두어들임이 실마리의 끝을 알 수 없고, 변방을 채우고 개척하여 경비초소를 괴롭히니, 관문의 닦다기가 이로써 조용하지 못하고, 살아있는 사람이 이 때문에 폐업하게 되었다. 

옛날에 정벌할 때 천자가 행하는 형벌에서 빠져 이미 앞에 사로잡힌 자는 죽음을 늦추어주고, 뒤에 항복한 자는 아직 죽음을 내리지 않았는데, 일찍이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악을 길러, 거란 의 무리를 합쳐서 바다를 지키는 군사들을 죽이고, 말갈의 일을 익혀 요서 를 침범하였다. 또 청구(靑丘)의 거죽이 모두 직공(職貢)을 닦고, 벽해(碧海)의 물가가 같이 정삭을 받드는데, 드디어 다시 보물을 도둑질하고 왕래를 막고, 학대가 죄 없는 사람들에게 이르고 성실한 자가 화를 당한다. 사명을 받던 수레가 해동에 갔을 때 정절(旌節)이 행차가 번방의 경계를 지나야 하는데, 도로를 막고 왕의 사신을 거절하여, 임금을 섬길 마음이 없으니, 어찌 신하의 예절이라고 하겠는가? 

이를 참는다면 누구를 용납하지 않을 것인가? 또 법령이 가혹하고 부세가 번거롭고 무거우며, 힘센 신하와 호족이 모두 권력을 쥐고 나라를 다스리고, 붕당끼리 친하게 지내는 것으로 풍속을 이루고, 뇌물을 주는 것이 시장과 같고, 억울한 자는 말을 못한다. 게다가 여러 해 재난과 흉년으로 집집마다 기근이 닥치고, 전쟁이 그치지 않고 요역이 기한이 없고 힘은 운반하는 데 다 쓰이고 몸은 도랑과 구덩이에 굴러 백성들이 시름에 잠겨 고통스러우니 이에 누가 가서 따를 것인가? 

경내(境內)가 슬프고 두려워 그 폐해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머리를 돌려 내면을 보면 각기 생명을 보존할 생각을 품고, 노인과 어린이도 모두 혹독함에 탄식을 일으킨다. 풍속을 살피고 유주(幽州), 삭주(朔州)에 이르렀으니 무고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죄를 묻기 위해 다시 올 필요는 없다. 

이에 친히 6사(六師)를 지배하여 9벌(九伐)을 행하고, 저 위태함을 구제하며 하늘의 뜻에 따라 이 달아난 무리를 멸하여 능히 선대의 정책을 잇고자 한다. 지금 마땅히 규율을 시행하여 부대를 나누어서 길에 오르되 발해를 덮어 천둥같이 진동하고, 부여 를 지나 번개같이 칠 것이다. 

방패를 가지런히 하고 갑옷을 살피고, 군사들에게 경계하게 한 후에 행군하며, 거듭 훈시하여 필승을 기한 후에 싸움을 시작할 것이다. 좌(左) 12군(軍)은 누방(鏤方)·장잠 (長岑)·명해(溟海)·개마·건안 (建安)·남소·요동·현도·부여·조선·옥저·낙랑 등의 길, 우(右) 12군은 점제(黏蟬)·함자(含資)·혼미(渾彌)·임둔(臨屯)·후성 候城)· 제해(提奚)·답돈 (踏頓)·숙신·갈석 (碣石)·동이 (東▣)·대방·양평(襄平) 등의 길로, 연락을 끊지 않고 길을 이어 가서 평양 에 모두 집결하라.─三國史記 卷第二十 髙句麗本紀 第八


삼국사기에 묘사된 바로는 당시 수나라 군의 총병력은 113만 3천 8백 명 <del>아 씨바 할말을 잃었습니다</del> 이를 부풀려 200만이라 하였고 군량을 수송하는 자는 그 두배에 달했다. 매일 1군씩을 보내었는데 서로 거리가 40리가 되게 하고 진영이 연이어 점차 나아가니, 40일만에야 출발이 완료되었다고 한다. 부대의 총 길이가 960여리에 이르렀다고 하니……

5.5.2 수나라 군의 공격과 요동성 전투 

612년 음력 2월, 수양제가 이끄는 부대는 요수(遼水)에 이르렀다. 그리고 여러 군대가 다 모여 대단한 숫자를 이루었지만, 고구려 군은 우선 강을 막고 지켜서 수나라 군대가 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수양제는 수나라의 공돌이였던 공부상서(工部尙書) 우문개(宇文愷)에게 명령하여 강을 건널 수 있는 부교를 만들게 하였다.

우문개는 시키는대로 부교 3개를 만들었는데, 정작 놓고 보니 어른 한명 키 남짓하게 애매하게 작았던지라, 수나라 군은 혼란을 겪었고 이에 고구려 군대가 공격하자 큰 피해를 받았다. 수나라군은 맥철장(麥鐵杖) 등의 장수가 용감하게 부교로 뛰어올라와 싸워보려 했으나 전사웅(錢士雄)·맹차(孟叉) 함께 전사하였다.

이에 수양제는 잠시 물러났다가 부감(少府監) 하조(何稠)에게 명령을 내려 다시 부교를 만들고, 하조는 이틀만에 이를 완성하여 다시 한번 공격해오자, 이번에는 고구려군이 대패하여 무려 만명의 사망자를 내었다. 확실히 야전에서는 수나라 군대의 우위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형세가 되었다.

수나라 군은 승리의 기세를 몰아 요동성을 포위하고 이를 공격했지만……

기록을 보면 요동성 내의 군사들은 가끔씩 나가서 싸우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다시 불리해지면 들어와서 성문을 닫고 버티기로 나갔고, 수나라 군은 시간이 지나도 요동성 하나를 함락하지 못하며 본래부터 세웠던 전역의 그림이 모조리 엉망이 되어 버렸다.

이 원인 제공자는 다름 아닌 수양제. 그는 장수들에게 “일체 전쟁은 진격하고 정지함을 모두 반드시 아뢰어 회답을 기다릴 것이며 제멋대로 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고, 덕분에 수나라 장수들은 급하게 싸워야 할때 감히 멋대로 나서지 못하고 황제의 명을 받느라 기회를 놓쳐버렸다.

급기야 요동성이 함락될수도 있는 급박한 위기가 올때는, 성 내에서 항복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하면 장수들은 감히 싸우지 못하고 항복한다는 요동성의 의견을 성 내에 알렸고, 황제의 말을 듣고 다시 나서려 할때면 이미 요동성은 다시 수비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두고 있는 상태였다. 수서의 기록에 따르면, 이런 짓을 세번 했다. 

6월 무렵이 되어도 여전히 수나라 백만대군은 요동성 앞에 모여있기만 할 뿐이었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 수양제는 장수들을 불러 질책하였다.

6월 기미(己未)에 수 황제가 요동성 남쪽으로 행차하여 성과 못의 형세를 보고 여러 장수를 불러 잘못을 따져 꾸짖어 말하기를

“공(公)들은 자신이 관직의 높음을 가지고 또 집안의 지체를 믿고 어리석고 나약한 사람으로 나를 대우하려 하느냐? 서울에 있을 때 공들이 모두 내가 오는 것을 원치 않은 것은 병패(病敗)를 당할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여기에 온 것은 바로 공들이 하는 바를 보아 공들의 목을 베려함이다. 공들이 지금 죽음을 두려워하여 힘을 다 내지 않으니 내가 공들을 죽일 수 없을 것이라 여기느냐

하였다. ─三國史記 卷第二十 髙句麗本紀 第八


장수들은 모두 두려워서 얼굴 빛이 잃었다고 한다. <del>사실 너님이 제일 문제인데 그렇게 말 할 수도 없고</del> 수양제와병크와 고구려군의 분전이 이어지며 수나라 대군은 요동성 근처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5.5.3 내호아의 수나라 수군의 움직임 

그 무렵, 수나라의 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가 내호아(來護兒)가 이끄는 수나라의 수군이 패수(浿水)로 들어왔다. 요동성 밖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에 비하면야 소수지만, 그 부대 숫자만 해도 수만명이나 되어, 앞선에서 병력을 빼낼 수도 없는 고구려엔 매우 치명적일 수 있는 병력이었다.

내호아의 군대는 평양에서 60여리 떨어진 곳에서 고구려군과 교전, 고구려군을 격파하였다. 이에 신이 난 내호아는 승세를 타고 쾌속 진격을 하려고 했고, 이것이 무모하다고 여긴 부총관(副摠管) 주법상(周法尙)은 좀 더 기다리자며 이를 반대하였다. 

하지만 내호아는 이를 무시하고 정예병력 수만명을 동원하고 진격을 감행했다. 이에 고구려 지휘관은 일부러 전투를 하고 패하여 내호아를 끌어들인 후, 여러 절 안에 교묘하게 병력을 숨겨두고 내호아군을 성안으로 끌어들였다. 내호아 부대는 성내에 진입하자 약탈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이 틈에 숨어있는 복병이 기습하자 수만명 중에 수천명만이 살아남았고, 내호아는 간신히 목숨만 건져 주법상이 있는곳으로 도주하였다.

고구려 군대는 내호아를 추격하다가 주법상이 진영을 정비하고 있자 후퇴하였다. 내호아는 부대를 이끌고 바닷가 포구에 주둔하였으나 함부로 더 움직이지 못했다.

이 전투는 2차 여수전쟁에서 대단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만일 요동성 앞에 있는 수나라 대군이 움직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도 수만 부대에 달하는 수군은 대단한 위협이 되며, 무엇보다 뒤에 나올 수나라 30만 별동대와 합류, 보급 문제를 덜어주게 된다면 수나라와는 달리 전력의 제한이 있는 고구려로서는 망했어요를 외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볼때, 이 내호아의 수군을 격파한 전투는 전쟁의 전개에 있어 대단한 영향을 보였다.

5.5.4 수나라 별동대의 움직임 

요동성 앞에서 전황이 답답하게 흐르자 수양제는 좌우익대장군인 우문술(宇文述), 우중문(于仲文) 등에게 100일치 식량을 지급하고, 또 방패, 갑옷, 창과 옷감, 무기, 화막(火幕) 등을 지급하여 별동대를 꾸렸다. 문제는 너무 무거워서 병사들이 이것을 버렸고, 버리면 죽은다고 엄포를 놓자 이번에는 땅을 파고 그곳에 보급품들을 묻어버렸다. 

별동대는 요동성 앞의 본대와 따로 떨어져 진군하였는데, 목적지는 절반도 도착하지 못하여 벌써 식량이 떨어지려는 사태에 직면하였다. 

한편, 영양왕은 을지문덕(乙支文德)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을 하게 하고, 적군의 모습을 살펴보게 하였다. 이 경우에 대해서, 수양제는 만일 영양왕이나 을지문덕이 항복하러 온다면, 반드시 사로잡으라고 명령을 해놓은 상태였다.

그리하여 우중문이 을지문덕을 사로잡으려고 하는데, 상서우승(尙書右丞) 유사룡(劉士龍)이라는 인물이 그러지 말자고 제안하여 우중문을 을지문덕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후회하여 다시 을지문덕을 잡으려고 하면서, “다시 할 말이 있으니 다시 오라.”고 하였지만 당연히 을지문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강을 건너서 가버렸다.

적군 총사령관이 코 앞에 왔는데, 잡지도 못하고 내부 사정만 다 보여주고 돌려보내주는,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벌어진것.

5.5.5 그리고 살수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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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쪽의 안 좋은 사정이 사정없이 까발려지자 우중문과 우문술은 매우 불안해 하였다. 우문술은 급기야 돌아가려고 하였으나, 우중문은 정예 병력으로 공격하면 일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우문술이 그래도 신중론을 펴며 반대하자, 우중문은 벌컥 화를 내며 우문술을 꾸짖었다. 이때 우문술은 우중문의 지휘를 받는 처지라 별 수 없이 명령을 따라야만 했다.

결국 시망이 보이는 추격이 벌어졌다. 배고프고 지친 수나라 군대는 정처없이 을지문덕을 추격하였고, 적군의 지친 기색을 눈치챈 을지문덕은 이들을 피곤하게 만드려고 싸울때마다 거짓 패하여 달아났다. 하루에 일곱번을 싸워 일곱번을 모두 지는 일도 있었는데, 우중문은 기고만장 했지만, 막상 평양성 앞에 도착하자 이 지친 병사들로는 무엇을 할 도리가 방법이 없었다.

이때 을지문덕이 입조하겠다는 발언을 하자, 간신히 체면을 잡을 수 있는 우중문, 우문술은 서둘러 군사를 이끌고 퇴각하였다.

7월, 수나라 군대는 살수(薩水)에 이르렀는데, 군대가 강을 반쯤 건넜을 무렵 갑자기 고구려 군대가 뒤에서 공격해오자 모든 부대가 한꺼번에 무너져내렸다. 전투고 뭐고 없는 상태에서 살아남은 수나라 군대는 하루에 450여리를 달아났으며, 수나라 지휘관 왕인공 (王仁恭)만이 최후의 부대로 남아 고구려군을 물리쳐 다른 부대가 달아날 수 있게 하였다. 

처음 9군이 요하에 이르렀을 때는 무릇 30만 5천 명이었는데, 요동 성으로 돌아온 것은 겨우 2천7백명이었고 수만을 헤아렸던 군수와 기계는 모두 잃어버려 없어졌다. 양제는 크게 화가 나서 우문술 등을 쇠사슬로 묶고 돌아갔다.

수나라 군대는 요수 서쪽에서 우리 무려라 (武厲邏)를 함락시키고, 요동군과 통정진(通定鎭)을 설치하였을뿐, 그 외에 성 하나도 제대로 함락 시키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그야말로 대패였고,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상상 할 수 있는 최고의 승리였던 것이다.

5.6 3차 고구려-수 전쟁 

613년, 수양제는 2차 전쟁 당시에 겪었던 패전의 울분과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한번 30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 원정을 감행하였다. 

살수에서의 패배 당시 나름 활약하여 주목받은 신예 장수였던 왕안공이 이끌었던 선봉대는 우선 신성을 가격하였으며 이후 요격에 나선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신성에서 타 지역 지원에 나서는 것을 봉쇄하였다. 그 다음에 본대가 요하에 도하하여 요동성을 재차 공략하면서 20여 일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진다.

초반의 맹공에도 불구하고 요동성이 함락되지 않자 포대 1백여만 장을 쌓아 요동성을 내려다보며 공세를 펼첬고, 2차 전쟁때와 마찬가지로 별동대를 차출, 압록강 인근까지 접근시킨다. 113만이란 물량으로 밀어붙인 2차때보단 덜하지만 이때 역시 고구려의 위기였다.

그러나 이때, 수양제의 휘하에서 보급 임무를 담당하던 예부상서 양현감이 수양제의 폭정에 불만을 품어 친구인이밀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면서 수양제는 비밀리에 철군을 결정한다. 그러나 이때 양제의 측근 참모였던 곡사정이 고구려로 망명하는 바람에 이것이 발각되고 만다.

곡사성의 투항으로 수나라 군대에 대한 기밀, 특히 철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5] 고구려는 이 기밀과 정보를 활용하여 늦게나마 수나라 군대의 후미를 가격하였다. 이때 고구려는 크게 승리하였으며 이때 수천여명의 적군을 패사시키는 전공을 올렸다.

어찌보면 2차 전쟁때보다도 더한 위기였을 수도 있으나 결국 수나라는 성 하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가야만 했다.

5.7 4차 고구려-수 전쟁 

수양제는 수나라로 귀국한 이후에 양현감의 반란을 진압하여 일단 발등의 불은 껐으나 그의 친구였던 이밀은 독자적인 세력을 거느리고 군웅의 행세를 하며 위세를 떨쳤다. 또한 양현감의 반란을 계기로 하여 각지의 세력가들과 농민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이러한 와중에도 수양제는 고구려에 대한 깊은 원한과 집착으로 인하여 수군 대장 내호아로 하여금 비사성을 공격하게 하였고 이때 비사성이 함락되면서 고수전쟁에서 최초의 성 함락이란 소득을 얻었다. 그러나 반란이 갈수록 거세져 육군은 움직이지도 못했고 내호아가 지휘하는 수군만으로 고구려를 침공하는 것도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오랜 전쟁으로 고구려도 무척 지쳐 있었으므로 영양왕은 고구려로 망명했던 곡사정을 귀국시키고 형식상 귀부하는 형태로 수나라에 화친을 제의하니 수양제는 이를 받아들였으며 내호아에게 귀국 명령을 내린다. 이렇게 하여 고구려와 수나라 간의 전쟁은 완전히 끝이 났다.

5.8 전쟁의 결과 

수나라는 수문제, 수양제의 2대에 걸쳐 고구려와 싸웠으나 결국 패하였다. 특히 수양제가 고구려와 벌였던 2차 전쟁의 경우에는 살수대첩으로 인하여 순식간에 30만의 대군이 괴멸당하는 엄청난 대패를 겪고 말았다. 그에 따라 피해도 막심하여 엄청난 군량미와 군수물자가 소진되었으며 수나라 조정의 재정도 상당히 소모되었다. 

또한 이미 수양제는 대운하 건설과 대규모 황궁 건설 등의 잦은 토목공사로 인하여 민심을 잃었고 부황과 형제를 죽이고 황위를 찬탈했던 만큼 성격도 잔혹하여 점차 신하와 장군들도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결국 수나라는 내분에 휩싸여 멸망하였고, 당국공 이연이 당을 세움으로써 수왕조는 완전히 멸망하였다. 최후에 수양제 자신도 고구려 원정 당시 육군 대장 중 하나였던 우문술의 아들 우문화급에게 피살당하며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러나 고구려 역시 4차례에 걸친 전쟁으로 인하여 국력을 크게 소진하였고 무엇보다 통일된 중국 왕조의 엄청난 국력을 몸소 실감하게 되었다. 때문에 영양왕이 사망한 후에 그의 뒤를 이어 영류왕이 된 고건무는 그 자신이 평양성에서 수나라 군대를 크게 무찔렀음에도 불구하고 수나라의 뒤를 이어 중원을 재패한 당나라와 화친을 맺는 등 중국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6 또다른 서막 

고구려는 수 제국이라는 대적을 물리쳤다. 하지만 이는 시작일 뿐이었다. 다음 상대는 수나라보다도 가공할만한 적이었던 것이다.

6.1 당 제국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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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

수양제의 폭정과 대운하 공사, 무리한 고구려 원정 실패 등으로 중국은 엉망이 되었고, 각지에 군웅이 할거하여 호시탐탐 천하를 노렸으나 이세민은 20대의 나이에 왕세충(王世充), 두건덕(竇建德) 등을 모두 격파하여 단숨에 중국을 통일 시켰다. 그후 방현령(房玄龄), 두여회(杜如晦) 같은 명신과 이정(李靖) 같은 명장의 도움을 얻어 순식간에 분위기를 일신했다. 

비록 국력으로 따지면 당나라는 수나라 전성기에 비해 훨씬 동원력 등에서 뒤떨어졌으나[26] 그 지도부의 능력이나 판단력에 있어서만큼은 비교도 안되는 능력을 지녔던 것이다. 당나라의 시선이 동쪽으로 향하면서 다시 한번 전운이 감돌게 된다.

6.2 영류왕(榮留王)의 유화책 

영류왕이 고구려의 국왕으로 즉위할 무렵, 당태종은 신강성 투루판에 위치한 고창국을 명한 뒤, 위징(魏徵) 등의 반대를 뿌리치고 주현으로 편제하여 당 조정이 직접 지배하는 영역으로 삼았다. 고창국 멸망은 곧 당 제국의 북부와 서부에 있던 세력들이 모두 당에 복속되었음을 말한다. 이제 동으로 바다에 이르고, 서로는 언기(焉耆), 북으로는 사막, 남으로는 임읍(林邑)에 이르는 지역이 모두 당의 주현으로 편제되었다. 이제 당은 무릇 동서 9천5백10리, 남북 1만9백19리에 달하는 대제국을 구축하게 된 것이다.

한편, 서남의 티베트 방면에 대해서도 당은 641년 공주를 하가(下嫁) 하는 등 회유책을 써서 안정을 꾀하였다. 게다가, 당나라 명장 이정은 628년, 동돌궐의 힐리가한(頡利可汗)을 격파하고 동돌궐을 완전히 멸망시켰으며, 몽골고원을 제압하였다. 이에 당의 위세에 압도된 유목민 집단들은 630년, 당 태종을 유목 세계의 패자라는 뜻을 지닌천가한(天可汗) 으로 추대하였고, 돌궐 패망과 함께 그간 돌궐의 세력에 예속되어 있던 거란, 해, 습(飁) 등 동부 내몽골의 홍안령 기슭 일대에 거주하던 유목 민족들이 당나라에 투항하였다. 이에 따라, 고구려의 서북부 국경 일대가 당을 향해 정면으로 열린 셈이 되었다.

당태종이라는 걸물이 몰고 온 파장은 어마어마했고, 영류왕은 이에 대해 현실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힐리가한이 격파된 직후인 629년에 당에 사신을 보내 지도를 헌상하는 등 유화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러한 동시에, 당의 팽창을 경계하며 631년 이후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이해 7월, 당 조정은 관인을 파견하여 고구려와 수나라와의 전쟁 때 죽은 수군의 유골을 수습하고, 요서 지역에 고구려 만든 경관(景觀)[27]을 허물어버렸다. 이는 명백하게 고구려에 대한 위협이자 도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더구나 이제 당나라는 티베트 고원 북편 경사면에 있던 토욕혼을 격파하였고, 고창국 격파와 더불어 서쪽으로 실크로드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제 당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나라들 가운데, 당에 대적할 수 있는 정도의 나라는 오직 고구려만 남게 되었다.

641년 5월, 당태종은 직방랑중 진대덕(陳大德)을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그 전해 영류왕이 태자를 당에 보낸것에 대한 답례 형식이었는데, 직방랑중은 병부 소속으로 국내외의 주요 군사시설을 포함한 지도 제작을 관장하는 직으로서, 군사정보 수집의 실무를 총괄하였다. 진대덕은 자신이 경치 좋은곳 탐방을 좋아한다면서 평양으로 가는 도중에 고구려의 주요 산천과 성곽 및 교통 요지들을 두루 살폈고 정보를 모았다.

당시 고구려는 매우 심각하게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고, 고구려의 최고위직인 대대로(大對盧)가 진대덕의 숙소를 세 번이나 찾아가는등 예우를 극진히 하면서 어떻게든 정보를 얻어보려고 하였다. 이해 8월, 진대덕은 귀환하는데 그가 얻은 정보를 당태종에 보고하였다. 당태종은 기뻐하며 노골적으로 고구려 공격에 대한 야욕을 보였고, 기회만 오면 공격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했다.

진대덕의 평양성 방문은 고창국 멸망 소식등과 함께 고구려 지배층의 내분을 촉발하였다. 귀족들은 강경과 온건의 의견차로 대립하였고, 고구려는 안팎으로 중대한 시련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 무렵, 반도 남부에서도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6.3 대야성의 참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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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義慈王)

641년 3월, 백제의 무왕이 사망하고 의자왕이 즉위하였다. 의자왕은 궁정 내부의 문제를 정리한 뒤 곧바로 신라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의자왕은 642년에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미후성(獼猴城) 등 40여 성을 공략 하였다. 단기간에 새로운 군주의 지도력을 과시하는데는 전승 이상만한것도 없으니……

의자왕은 계속해서 공세의 조삐를 조였다. 다음달 8월에는 신라의 대당 교통로인 당항성을 고구려와 협력하여 공략하려 하였으며, 장군 윤충에게 1만의 병력을 주어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대야성은 신라의 낙동강 서쪽 지역을 전수하는 요충지였다. 백제는 무왕 대에 무산성과 속함성 등을 공략하여 소백산맥 이동으로 진출하였는데, 더 나아가 황강 유역의 대야성을 공략하려 하였다.

당시 대야성을 지키던 신라의 도독 김품석(金品釋)은 김춘추의 사위였다. 윤충이 이끈 백제병이 대야성을 포위하였는데, 대야성은 내부가 더 문제였다. 

성주 김품석은 여색을 밝히는 색골이었고, 자신의 참모인 검일(黔日)의 부인이 예쁘다는 이야기를 듣자 NTR을 하였고, 이를 갈던 검일은 백제군이 성을 포위하자 창고에 불을 질러 호응하였다. 화염이 치솟고 민심이 흉흉하여 상황이 어려워졌는데, 죽죽(竹竹) 등은 끝까지 싸우자고 하였으나 김품석은 항복하여 목숨을 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도 여의치 않아서 처자식을 죽이고 자결하였다. 죽죽 등은 최후까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대야성이 함락되자 신라 조정이 당혹스러워했다. 대야성 함락으로 백제군은 낙동강 본류 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게 되어, 신라의 본거지를 바로 위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울러 대야성을 비롯한 40여 성이 함락됨에 따라 낙동강 서안 옛 가야지역에 대한 신라의 지배권이 뿌리채 흔들릴 위기에 처해졌다. 그리고 김춘추는,

춘추가 이를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三國史記 卷第五 新羅本紀 第五


김춘추는 사위와 딸을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몹시 곤궁해진 상황이 되었다. 대야성 성주 김품석의 입신에는 아무래도 장인인 김춘추의 영향력이 있었을텐데, 대야성 상실의 주요 원인이 김품석의 부도덕 행위이니 이것은 김춘추에게 큰 짐이 된다. 김춘추는 대안을 강구해야만 했다.

이번 사태는 일차적으로 백제의 공세로 벌어졌다. 즉, 해결하려면 백제를 압박해야 하는데, 당장 638년에도 고구려와 칠중성에서 격전을 벌인 바 있던 신라로서는 고구려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바다 건너 왜는 신라를 외교적으로 압박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그 해 10월, 마침 고구려에서 일대 파란이 일어났다.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정변이 발생한 것이다.

6.4 연개소문의 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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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淵蓋蘇文)

642년 10월,[28] 평양에서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하고 고위 귀족과 관인 180여명을 살해하는 대규모 유혈 참극을 일으킨 것이다.

冬十月 蓋蘇文 弑王
겨울 10월에 개소문 이 왕을 시해하였다.─ 三國史記 卷第二十 髙句麗本紀 第八


有蓋蘇文者, 或號蓋金, 姓泉氏, 自云生水中以惑衆. 性忍暴. 父爲東部 大人·大對盧, 死, 蓋蘇文當嗣, 國人惡之, 不得立, 頓首謝衆, 請攝職, 有不可, 雖廢無悔, 衆哀之, 遂嗣位. 殘凶不道, 諸大臣與建武議誅之, 蓋蘇文覺, 悉召諸部, 紿云大閱兵, 列饌具請大臣臨視, 賓至盡殺之, 凡百餘人, 馳入宮殺建武, 殘其尸投諸溝. 更立建武弟之子藏爲王, 自爲莫離支, 專國, 猶唐兵部尙書·中書令職云.

개소문(蓋蘇文)이라는 자(가 있는데, 혹은 개금(蓋金)이라고도 한다. 성(姓은 천씨이며, 자신이 물 속에서 태어 났다고 하여 사람을 현혹시켰다. 성질이 잔인하고 난폭하다. 아비인 동부대인 대대로가 죽자, 개소문이 당연히 이어 받아야 했지만, 나라 사람들이 미워하여서 이어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머리를 조아려 많은 사람들에게 사죄하고, 섭직을 청하면서 시켜보아 합당하지 않으면 그 때는 폐하여도 후회가 없다고 하였다. 뭇사람들이 불쌍히 여겨서 드디어 위를 잇게 하였다. 그러나 너무 난폭하고 나쁜 짓을 하므로, 여러 大臣이 建武와 상의하여 죽이기로 하였다. 蓋蘇文이 이를 알아차리고 諸部의 兵을 불러 모아 거짓으로 크게 閱兵을 한다고 말하고, 잔치를 베풀어 大臣들의 臨席을 청하였다. 손님이 이르자, 다 죽여버리니 무려 백여명이나 되었다. 또 王宮으로 달려 들어가 建武를 죽여서 시체를 찢어 도랑에 던져 버렸다. 이어 建武 아우의 아들인 藏을 세워 王으로 삼고, 자신은 莫離支가 되어 國政을 마음대로 하였다. 莫離支란 唐의 兵部尙書 中書令에 해당하는 직위라고 한다.─ 新唐書 卷 220 東夷列傳 第 145


대신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가 대왕을 시해하고 이리거세사(伊梨渠世斯) 등 180여 인을 죽였다. 이어 왕의 어린 조카를 왕으로 옹립하였으며, 자기와 같은 성인 도수류금류(都須流金流)를 대신으로 삼았다.─ 일본서기 권20

신당서에 따르면 연개소문의 아버지는 동부대인이어고, 구당서 고려전에 따르면 서부대인으로 나온다. 하지만 당시 고구려의 동향을 민감하게 파악 할 수 있었던 당나라 영주도독 장검(張儉)이 정변 발발 한 달 뒤인 11월에 보낸 보고문에서 '고려 동부대인 천개소문' 등등의 언급을 하고 있으므로 동부대인으로 보는게 더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를 보면 정변 전 연개소문의 위치는 동부대인으로 보인다.

노태돈은 동부대인이 '동부 소속의 대인' 이 아니라, '동부를 관장하는 장' 이라는 의미라고 하여다. 또한 그는 대신들이 연개소문의 섭직을 거부한것은 연씨 집안이 동부의 병권을 오랫동안 장악한 데 대한 견제와 반발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결국 오랫동안 동부의 군병을 장악해온 연개소문 집안의 연고권과 위세를 부정할 수 없어, 그의 섭직에 동의하였다는 식이였다.

여하간에 이러한 귀족회의의 견제를 뚫어버리고 그 자리에 오른 연개소문의 세력은 오히려 더욱 강력해졌고, 그 기세에 위협을 느낀 귀족, 그리고 영류왕은 연개소문을 없애버리려고 했다. 또한 일본서기에서 연개소문은 '이리가수미'로 기록되고 있는데,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키는 와중에 '이리거세사'를 죽였다는 언급에서 나오는 이리거세사는 같은 이리(伊梨) 씨로 보이며, 그렇다면 연씨 집안내에서도 이에 가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연개소문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그해 초에 조정이 천리장성 축조의 감시역으로 연개소문을 임명하면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이 시도는 연개소문을 지방으로 내려보내, 중앙 정계에서 격리시키거나 혹은 동부대신 직을 내놓게 하려는 등의 시도로 보이는데, 자신에 대한 압박이 가중되자 연개소문은 열병식을 개최한다고 하면서 여러 대신과 고위 관인들을 초대하였다. 그러나 식이 열리자마자 정변이 시작되었고 왕궁까지 무자비하게 유린되었다.

수도에서는 정변과 함께 순식간에 반대파를 제압하고 보장왕(寶臧王)을 옹립했지만, 지방 각지에 포진한 반대파들은 연개소문이 쉽사리 제거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물론 양만춘(楊萬春)으로 알려진[29] 안시성주였다. 그는 연개소문의 공격을 잘 막아내었다. 하지만 정국의 대세가 연개소문으로 기울자 연개소문은 현재 안시성주의 지위를 인정하고, 후자는 연개소문이 새로운 집권자임을 승복하는 선에서 절충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정세가 요동치는 와중에 남쪽에서 김춘추가 고구려를 찾아왔던 것이다.

6.4.1 연개소문과 김춘추 

新羅謀伐百濟遣 金春秋 乞師不従
신라가 백제를 정벌하려고 김춘추 (金春秋)를 보내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三國史記 卷第二十一 髙句麗本紀 第九


冬王將伐百濟以報 大耶 之役乃遣伊湌 金春秋 於高句麗以請師初 大耶 之敗也都督 品釋 之妻死焉是 春秋 之女也 春秋 聞之倚柱而立終日不瞬人物過前而不之省旣而言曰嗟乎大丈夫豈不能呑百濟乎便詣王曰臣願奉使高句麗請兵以報怨於百濟王許之高句麗王高臧素聞 春秋 之名嚴兵衛而後見之 春秋 進言曰今百濟無道爲長蛇封豕以侵軼我封疆寡君願得大國兵馬以洗其恥 乃使下臣致命於下執事麗王謂曰 竹嶺 本是我地分汝若還 竹嶺 西北之地兵可出焉 春秋 對曰臣奉君命乞師大王無意救患以善鄰伹 威劫行人以要歸 地臣有死而已不知其他 臧 怒其言之不遜囚 之別館 春秋 潛使人告本國王王命大將軍 金庾信 領死士一萬人赴之 庾信 行軍過 漢江 入高句麗南境麗王聞之放 春秋 以還

겨울에 왕이 장차 백제를 쳐서 대야 (大耶)에서의 싸움을 보복하려고 이찬(伊湌) 김춘추 (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서 군사를 청하였다. 처음에 대야가 패하였을 때 도독(都督)인 품석(品釋)의 아내도 죽었는데, 이는 춘추 의 딸이었다. 춘추가 이를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얼마가 지나서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겠는가
하고 곧 왕을 찾아 뵙고 말하기를

“신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게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라고 하자 왕이 허락하였다.

고구려의 왕인 고장(高臧)은 평소 춘추의 명성을 들었기 때문에 군사의 호위를 엄중히 한 다음에 그를 만나 보았다. 춘추 가 나아가 말하기를

“지금 백제는 무도하여 긴 뱀과 큰 돼지가 되어 우리 강토를 침범하므로 저희 나라의 임금이 대국(大國)의 군사를 얻어서 그 치욕을 씻고자 합니다. 그래서 신하인 저로 하여금 대왕께 명을 전하도록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고구려의 왕이 말하기를

“ 죽령(竹嶺)은 본래 우리의 땅이니, 그대가 만약 죽령 서북의 땅을 돌려준다면 군사를 보낼 수 있다.”라고 하였다. 춘추 가 대답하기를

“신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군대를 청하는데, 대왕께서는 어려운 처지를 구원하여 이웃과 친선을 하는 데에는 뜻이 없고 단지 사신을 위협하여 땅을 돌려 줄 것을 요구하십니다. 신은 죽을지언정 다른 것은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고장이 그 말의 불손함에 화가 나서 그를 별관(別館)에 가두었다. 춘추가 몰래 사람을 시켜서 본국의 왕에게 알렸는데, 왕이 대장군(大將軍) 김유신 (金庾信)에게 명하여 결사대 1만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게 하였다. 유신이 행군하여 한강 (漢江)을 넘어 고구려의 남쪽 경계에 들어가자 고구려의 왕이 이를 듣고 춘추를 놓아 돌려보냈다. ─ 三國史記 卷第五 新羅本紀 第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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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金春秋)

이 당시 김춘추는 고구려 수뇌부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양국이 그간의 항쟁을 중지하고, 나아가 고구려가 현재 백제의 공격으로 곤경에 처해있는 신라를 군사적으로 구원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에 보장왕이 죽령 이북의 땅을 원하자 김춘추는 거부했고, 이에 김춘추가 구금되자 신라 조정과 김유신은 분개하여 1만명의 구원병을 이끌고 출격, 이에 보장왕은 김춘추를 석방시켰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러한 보장왕의 태도는 연개소문의 태도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 당시 김춘추의 의도에 대해서는, 정변이라는 유혈 내분을 겪고 현재도 불안정한 면이 있는데다, 당나라와의 긴장이 고조되는 고구려에 동맹을 청해, 주력을 당의 침공에 대비하게 만듬으로서 신라의 위협을 덜게 하려는 정도로 추측해볼 수 있다. 연개소문의 정변 사실이 신라에 알려지지 않았을리는 만무하며, 당나라와 고구려의 대립은 고구려의 십수년이 넘는 천리장성 공사만으로도 파악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나라의 침입이 예상되는 이 상황에서 왜 고구려 조정은 제발로 찾아온 김춘추의 제안을 거부했을까?

642년까지 신라가 백제보다도 당나라와 '특별하게' 더 가깝다고 볼 근거는 없는데, 642년까지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한 횟수는 되려 백제가 신라보다 더 많았다. 그런데 643년 신라가 고구려의 공격을 당에게 호소하며 구원을 요청해, 당이 상리현장(相里玄奬)이라는 사신을 파견하여 공격을 중지할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연개소문은 수나라와 고구려와 싸우던 상황에서, 신라가 자신들의 뒤를 쳐서 땅 500리를 탈취했다면서 이를 거부하였다. 하지만 당시 신라가 딱히 고구려를 기습하여 확인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데, 연개소문이 말한것은 6세기 중반 고구려가 북제, 돌궐의 동진에 직면하는 상황에서 남부에서 신라, 백제의 위협이 계속되자, 고구려가 신라와 밀약을 맺어 땅을 넘겨주었던 사례를, 짐짓 수나라 시대의 일로 이야기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여하간에 연개소문의 제안을 따른다면 신라 - 고구려 관계는 6세기 중반 이전의 형세로, 즉 고구려가 신라에 대해 압도적 우위를 가지고 있으면서 신라와 협력하던 과거의 형세로 돌아가는 모양이 된다. 또, 대규모 유혈 정변으로 집권하고 집권 후에도 여파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연개소문이 계속 자신의 자리를 해먹기 위해서는 대외적으로 강경한 정책을 펼쳐 긴장을 고조시키는 편이 유리했다는 시각도 있다. 그리고 당나라가 눈 앞에 있는 상황에서 신라가 후방을 위협하는 문제는 백제와 왜를 이용해 신라를 충분히 견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어찌되었건 삼국시대 말기, 가장 거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두 거인의 회담은 이렇게 끝났고, 그 여파는 어마어마했다. 신라는 절망적인 고립 상태에 빠졌고, 결과적으로 자신들을 살려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 즉 당나라에 절대적으로 매달렸고, 이는 신라와 당의 군사적 동맹으로 이어졌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일단 고구려는 남과 북, 양쪽으로 적을 맞이하는 상황이 되었다.

7 국제전(國際戰) 

이제 당나라와 고구려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신라는 의지할곳이 없어져 당나라에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단순히 당나라와 고구려의, 백제와 신라의 전쟁으로 끝나는것이 아닌, 동아시아 세계 모든 각국에 크고 작은 영향력을 끼치는 국제전의 성격으로 전개될 수 밖에 없었다. 

7.1 1차 고당전쟁 

645년 벌어진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

7.1.1 개전 

김춘추과 (실질적으로)연개소문의 회담이 결렬 된 후, 고구려는 신라에 한층 압박을 가하였다. 또한 백제 역시 고구려와 연결하여 신라의 당항성을 공략하려고 하였다. 신라에게 있어 당항성은 황해를 통해 당나라와 연결될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었고, 가뜩이나 고립된 상태에서 백제가 당항성을 차지하면 신라는 더욱 절망적인 늪으로 빠지게 된다. 최대의 위기에 직면한 신라는 당에 사신을 파견해 구원을 요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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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 제국

이 당시 사태를 주시하고 있던 당나라 조정, 그리고 당태종은 신라 사신에게 세 가지 방책을 제시하였다.

첫째. 거란 말갈병을 동원, 고구려의 서부 국경을 기습하는 안. 이 제안을 따르면 고구려가 방어에 주력할 터이고, 신라에 대한 공세가 중단될 것이며, 신라는 일년쯤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가 당나라의 주력이 공격해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결국 안전해질 수 없을 터이다.

둘째. 신라군에게 당나라군의 깃발 수천을 주어 성에 걸어놓게 하여, 백제와 고구려군을 놀라게 하는 계책. 그야말로 단발성의 계책으로, 상식적으로 큰 효과가 일어날것이라고 보긴 힘든 계책이다.

셋째. 백제가 바다의 험함을 믿고 방어에 소홀할 것이니, 수백척의 배를 동원해 바다를 건너 백제를 기습하게 한다. 그런데 신라의 왕이 현재 선덕여왕으로 여자가 왕이라 백제의 업신여김을 받고 있으니, 당나라 종친 한명을 보내 신라의 왕으로 삼고 당병으로 호위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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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善德女王)

신라 사신은 이 세가지 제안 중 어떤것이 좋냐, 하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당태종 입장에서 이 제안은 그 자리에서 막 나온 상당히 즉흥적인 제안인듯 하며, 실제로도 그저 한 차례 해프닝 정도로 끝나버렸다. 그런데 신라 입장에선 그렇지만도 않았는데, 특히 여자가 왕이라서 업신여김을 받는다.는 발언이 그것이다. 이는 나중에 벌어진 신라 내부의 난리와 어느정도 연관성을 찾을 수도 있다.

한편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에 사람을 보내 신라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라고 요청하면서 양국의 상황을 파악하고 명분을 쌓아올렸다. 전통적인 조공 책봉 관계로 보면, 제후국들이 서로 싸움을 벌이는데 천자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이를 계속한다면, 천자가 개입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기는 셈이다. 연개소문은 이러한 당나라 사신의 요구를 거절하였고, 의자왕의 경우에는 겉으로는 일단 응하는 듯한 자세를 보였다. 고구려에 대해 당나라가 다시 한번 사신을 파견하여 압박하자 연개소문은 당 사신을 굴에 가두어버렸다.

외교적 압력은 효과가 있었고, 이렇게 되면 무력 행사밖에 남은 길이 없었다. 당태종은 직접 고구려 정벌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 요동은 옛 중국 땅이고 막리지 가 그 임금을 죽였으므로, 짐이 몸소 가서 이를 경략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어른들과 약속하니 아들이나 손자가 나를 따라가는 자는 내가 잘 위무할 터이니 염려할 것이 없다.”고 하고, 포백과 곡식을 후하게 주었다. 군신들이 모두 황제에게 가지 말기를 권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나는 알고 있다. 근본을 버리고 말단으로 가며, 높은 것을 버리고 낮은 것을 취하며, 가까운 곳을 두고 먼 곳으로 감은 셋이 모두 좋지 못하다. 고구려를 정벌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개소문 은 임금을 죽이고 또 대신들을 살육하고 즐거워하고 있으므로, 한 나라의 사람들이 목을 내밀고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 의논하는 사람들은 이를 살피지 못하고 있다.”─三國史記 卷第二十一 髙句麗本紀 第九

당나라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연개소문은 백금과 관원 50여명을 바치면서, 이들이 당나라 수도에 머물기를 원한다고 요청했다. 당나라 조정을 달래고 상황을 살피려는 의도로 보이는데, 연개소문이 당 사신을 박대한것처럼 당태종도 고구려 관원을 구속하고 백금을 거부하여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이 당시 당태종의 상황을 살펴보면, 후계자 책봉 문제로 상당히 곤혹스러운 시기를 지났었다. 후군집(侯君集)등의 원로들이 죽었고, 장손무기와 저수량등이 셋째 이치를 지지하고 나서면서 뜻을 이루고 반대했던 사람들을 처벌하는등 위풍당당한 당태종의 이름치고는 꽤나 골치아픈 상황에 시달렸었다. 심지어 현장 법사에게 환속을 권유하여 자신을 도와줄것을 요청했을 정도. 

이런 상황에서 고구려 정벌은 자신의 권위를 다시 한번 세울 수 있고, 또 유약해보이는 셋째 이치가 차기 황위계승자가 된 상황에서, 자신이 안정적인 발판을 깔아줄 수 있는 수단도 될 수 있었다. 어찌되었건 모든 상황이 전쟁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7.1.2 당나라의 전쟁 준비 

644년 7월, 당태종은 출병에 필요한 군량 징발과 수송에 관한 조처를 취하고, 한편으로 영주도독 장검에게 영주, 유주 도독부의 군대와 거란·해·말갈 등의 기마 군단을 이끌고 먼저 요동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방어 상태와 형세를 탐색하게 하였다. 장검은 마침 요하가 범람하여 강을 건너지는 못하였지만, 소규모 정찰대를 잠입시켜 요동 각지의 지형과 기후, 수초(水草)의 상태 등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수집하여 보고했다.

그리고 10월, 당태종은 수도 장안의 노인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면서 고구려 원정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아무래도 전대 왕조인 수나라의 폭정 중에 하나가 고구려 원정이었고, 그때문에 고구려 원정이라면 치를 떠는 사람들이 많았을테니 이는 민심을 다스리기 위한 조치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11월, 형부상서 장량이 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임명되었고, 남부 지역에서 징발한 병사 4만, 장안과 낙양에서 모병한 3천, 전함 5백여척을 동원해 산동반도를 떠나 해로로 평양을 향해 진군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세적(李世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보·기병 6만과 난주·하주의 유목민 항호를 거느리고 요동으로 진군하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645년 2월 12일, 낙양을 출발하여 6군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향하였다.

○ 十九年(645), 命刑部尙書張亮爲平壤道行軍大總管, 領將軍常何等率江·淮·嶺·硤勁卒四萬, 戰船五百艘, 自萊州汎海趨平壤; 又以特進英國公李勣爲遼東道行軍大總管, 禮部尙書江夏王道宗爲副, 領將軍張士貴等率步騎六萬趨遼東; 兩軍合勢, 太宗親御六軍以會之.

19년에 형부상서(刑部尙書) 장량(張亮)을 평양도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總管)으로 삼아 장군(將軍) 상하(常何) 등과 江·淮·嶺·硤의 강한 군사 4만명·전선(戰船) 5배척을 이끌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平壤)으로 향하게 하였다. 또 특진(特進)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總管)으로 삼고, 예부상서 강화왕 도종(禮部尙書 江夏王 道宗)을 부총관(副總管)으로 삼아서 장군(將軍) 장사귀(張士貴) 등과 步兵·騎兵 6만을 이끌고 요동(遼東)으로 나아가게 했다. 兩軍이 합세하도록 한 다음, 태종(太宗)은 친히 6軍을 거느리고 가서 전군을 합류하기로 했다.─舊唐書 卷 199 東夷列傳 第 149


수나라와의 전쟁 당시와 달리, 이 당시 당나라 군의 자세한 전체 숫자는 명기되어 있지 않다. 이를 당태종의 패배를 드러내는것이라 꺼렸다는 말도 있는데, 반대로 당나라가 수나라의 실패를 두드러져 보이게 하기 위해 고수전쟁 당시의 기록을 일부러 과장되게 했다는 식도 있고[30] 여하간 말하는 사람마다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었다 하는 부분이라 논란이 많다. 

가장 무난한 식으로는 10~20만 사이의 병력에, 영주도독부, 거란과 해등의 유목민 부대가 합쳐질것을 고려해서 10만 후반대 혹은 20만을 좀 넘는 보는 식이 무난할 것이다. 다만 50만설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7.1.3 신라와 백제에 대한 당나라의 압박 

또한 당태종은 644년 귀국하는 신라의 사신 김다수(金多遂)에게 국서를 보내어, 선덕여왕에게 신라군이 대고구려 전에 참전할 것을 요구하였다. 논란이 벌어졌는지 신라 조정에선 별다른 소식을 전하지 않았고, 당태종은 이듬해인 645년 2월 고구려 원정에 나서면서 다시 한번 조서를 보내어 당군이 4월 상순에는 고구려 경내에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니, 신라군이 당의 수군대총관 장량의 절도를 받을 것이며, 장량의 주둔처에 신라 군관을 파견할 것을 요구하였다.

한편 백제 의자왕에게도 당나라의 조서가 도착하였다. 644년 말 무렵 백제 사신인 부여강신(扶餘康信)이 당나라에 파견되어 백제가 당나라의 명을 어기고 고구려와 협력하여 신라를 공격하지 않았다고 발뺌하고, 당나라 의원을 백제에 보내줄 것, 백제 학문승의 귀환 등을 요청하였다. 그에 대한 답신의 형태로서 당 태종은 의자왕이 요청한 사항에 대해 조처하였음을 알리고, 대 고구려전에 백제가 참여할 것을 요규하였다. 동시에 신라에 파견하는 당의 사신이 안전하고 신속하게 신라에 도착하게 협조해줄것을 요청하였다. 이 조서는 645년 초봄에 전해졌다.

그런데 이 조서에선 선덕여왕에게 보내진 앞의 조서와는 달리, 파병이 주요한 목적으로 다뤄지진 않고 여러 가지 사항을 포괄적으로 언급하였으며, 파병을 요청하면서도 당군이 언제 출병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언급 하지 않았고, 여하간에 구체적인 내용이 없었다. 그리고 첫머리에 백제가 고구려와 한 편이 되었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며 은연중에 백제를 위협하는 서술을 하였다.

이 조서는 오히려 신라가 대고구려전에 참전할 경우, 백제가 이를 공격하여 저지하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백제를 견제하려는 목적도 있을 것이다.

7.1.4 파죽지세의 당나라군 

전역의 초기, 당나라 군대는 압도적인 군사적 역량을 과시하며 고구려를 사정없이 몰아쳤다. 고구려는 이에 쩔절 매었으며, 마침내 주필산 전투라는 비극이 닥쳐오게 되었다.

7.1.4.1 당나라 군대의 진격 

645년, 마침내 당나라 군의 선봉이 요서의 영주에 다다랐다. 당시 영주에서 요동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세 갈래로, 하는 연군성(燕郡城), 여라수착(汝羅守捉)을 거쳐 요하 하류를 건너 한(漢) 대의 요대현(遼隊縣)에 이르는 남도이고, 다른 하나는 연군성 ─ 회원진(懷遠鎭)을 거쳐 요동성으로 이르는 중도였다. 북도는 연군성에서 북으로 통정진(通定鎭)을 지나 신성, 현토성 방면으로 나아가는 길이었다. 당군은 이 세 길을 따라 진격하였다.

이세적의 선봉군은 중도를 취하는 듯 하다가, 일순간 갑자기 방향을 틀어 우회하는 노정이지만 가장 평탄한 북도로 움직여 신속히 이동하여 요하를 건넜다. 4월 1일, 당군은 고구려군의 요하 방어선을 기습적으로 돌파하여, 이세적은 현도성(玄菟城)을, 부총관인 강화왕 도종은 병력 수천으로 신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군은 매우 놀랐으나 성문을 틀어박고 수비를 하였는데, 공략이 여의치 않자 당군의 일부로 신성 방면의 고구려군을 묶어둔 뒤 주력을 남으로 돌려 개모성(盖牟城)을 함락시켰다. 이때 연개소문이 가시성(加尸城)의 700여명을 보내 성을 지키게 하였는데 이세적에게 사로잡히고 당나라 군대에 종군하길 원하자, 나중에 당태종은 그 병사들의 집이 가시성에 있는데, 만일 지금 내 부대에 들어오게 된다면 그 처자들이 모두 살해당할테니 그럴 수는 없다고 하여 모두 풀어주었다. 당태종으로서는 인덕을 과시함과 동시에, 아무래도 첩자가 있을지도 모르는 병력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개모성을 함락시킨 당나라 군대는 이곳을 근거로 삼아 일부 당군을 주둔시켜 신성 방면의 고구려군과 교전하면서 그 동향을 견제하게 한 뒤, 5월 들어 주력은 남쪽의 요동성으로 진군시켰다.

7.1.4.2 요동성 공방전 

한편으로 영주도독 장검은 남도를 취해 도하한 뒤, 이민족 부대를 거느리고 건안성(建安城)을 타격하였다. 이 무렵 당태종의 본군은 중도를 취해 요택(遼澤)을 건너 요동성으로 몰려들었다. 요택은 진흙이 200리여서 사람과 말이 모두 건너갈 수가 없음으로, 장작대장(將作大匠) 염입덕(閻立德)이 흙을 넓게 깔아 다리를 만들어 군대가 지체하지 않고 요택 동쪽으로 건넜다. 

당태종이 힘겹게 요택을 건너고 있을떄 앞서 이동한 이세적의 군대는 이미 요동성 앞에 나와 있었다. 수나라군의 경우, 중도를 취해 요동성을 공략한 뒤, 곧바로 천산산맥을 넘어 오골성을 공격하고 압록강으로 나아가 평양으로 진격하자는 계획이었지만, 그것이 요동성 공략전부터 실패하자 모든것이 꼬여 버렸다. 그에 비해 당군은 요동 평야에 확실한 교두보를 구축한 뒤 동침한다는 방침으로, 요하를 건너는 작전부터 세 방향에서 전개, 요동성을 삼면에서 압박하였다. 

이는 동시에 요동성 공략전 때 고구려측이 북으로 신성 방면, 남으로는 건안성과 안시성 방면에서 지원군을 보내는것을 견재하는 방책으로, 실제로 보장왕은 신성과 국내성의 병력 4만으로 요동성을 지원하여 남북으로 협격하려 했으나, 장검이 4천 기병으로 저지하자 뜻을 이루지 모했다. 남쪽에서 요동성을 지원하는것은 장검이 이끈 당군이 이미 건안성 등에 선제공격을 취하는 바람에 이에 대비하는 차원에서라도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당군은 전쟁에서의 선택권을 처음부터 자신들이 쥐고, 고구려는 여기에 끌려다닐 수 밖에 없었다.

요동성 앞에 주둔해 있는 이세적의 군대안에서는 두가지 의견이 나왔는데, 바로 싸우자는 측과 당태종의 주력이 도착한 후 싸우자는 주장으로, 후자가 우세했으나 강화왕 도종은 속전을 주장했다. 교전이 벌어지자 당나라의 행군총관 장군예(張君乂)가 달아나는 바람에 당군이 패배하였는데, 도종과 이세적이 역습을 하는 바람에 고구려군이 천명이 사망하였다. 

이렇게 교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당태종은 요택을 다 건넜고, 늪지대 등을 통과하면서 사용한 다리를 모두 치워버려 군대의 마음을 굳게 하였고, 속전을 한 강화왕 도종을 칭찬하고 도망친 장군예를 처형했으며, 용감하게 싸웠던 도위(都尉) 마문거(馬文擧)는 중랑장으로 임명하였다. 

당태종의 주력이 도착함에 따라 요동성의 상황은 급속도로 암울해졌다. 태종은 직접 기병을 이끌고 성 가까이 와서, 흙을 지고 나름으로서 전투를 독려하였다. 과장이 있을것은 감안해야 하겠지만, 기록상 당나라군이 수백겹으로 요동성을 포위하고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고함을 치자 그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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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경총요(武经总要)의 당차(撞车) 그림

이 당시 고구려군은 상황이 몹시 좋지 않자 미녀를 단장하고 무당이 굿까지 했고, 그러는 상황에서 당나라 군대의 이세적은 포거(抛車)를 쏘아 큰 돌을 3백보까지 멀리 날려 성 안에 타격을 가했다. 남풍이 불자 당군의 정예 병력이 달려들어 성 내에 불까지 번졌고, 고함소리, 불꽃, 포격, 굿 등 그야말로 난장판 속에 마침내 당군이 성내로 진입하였다. 고구려군은 죽을 힘을 다해 싸웠으나 적이 워낙 막강하였다. 마침내 요동성이 무너지고, 이 전투에서 죽은 자가 만여 명이었다. 또한 체포된 병사가 만여 명, 남녀가 4만 명이고, 양곡이 50만 석이었다.

수양제가 100만 대군을 이끌고 왔음에도 그렇게 견고하게 버티던 요동성이, 이토록 허망하게 무너져내린 것이다.

7.1.4.3 주필산 전투의 대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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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군의 주력 병종인 기병, 궁병 등의 이미지

요동성을 단박에 무너뜨린 당군은 기세를 살려 백암성(白巖城)을 공략했고, 백암성의 성주 손대음(孫代音)이 내응함으로서 백암성 역시 함락당했다. 당나라 군대는 개모성에서 백암성이 이르는 넒은 지역을 장악, 확실한 교두보를 마련하게 되었다. 동시에 당나라 수군을 이끄는 장량 역시, 요동반도 남단에 있는 비사성을 함락시켰다. 이 부대가 당나라 본진과 합류하는것도 두려운 일이지만, 더 큰 위협은 해로를 통해 군수물자등을 보급하는데 있었다.

전역의 초기에 당나라군은 기동성과 강력한 전투력을 이용해서 고구려군에 대하여 압도적인 군사적 역량의 우위를 보였다. 하지만 이제 고구려 중앙군이 역량을 집중시키게 되었고, 한번 크게 싸워볼 준비가 되었다. 문제는 어떻게 싸우느냐일 것이다.

요동성과 백암성이 공략이 되어버린 후에 당군은 남쪽에 있는 안시성을 목푤로 진격하였다. 당나라 대군이 안시성의 북쪽으로 접근할 무렵, 북부 욕살(褥薩) 고연수(高延壽)와 남부 욕살 고혜진(高惠眞)이 대군을 이끌고 이를 구원하러 달려왔다. 고구려군은 물론 말갈 부대까지 합쳐진 이 부대의 숫자는 무려 15만으로, 단일 전투에 투입된것으로 기록된 고구려 병력의 숫자로는 역사상 최대의 규모였다. 

양대 대군이 대격전을 벌이기에 앞서, 고구려군의 군사회의에서 경험 많은 장군인 고정의(高正義)가 자신의 전략을 내놓았다. 

"진왕(秦王)[31]은 안으로 여러 영웅을 제거하고, 밖으로 오랑캐를 복속시켜 독립하여 황제가 되었으니, 이는 한 시대에 뛰어난 인재이다. 지금 나라 안의 무리를 거느리고 왔으니 대적할 수 없다. 나의 계책으로는 병력을 멈추고 싸우지 않고 세월을 허송하며 오래 버티어 견디며 기습 병력을 나누어 보내어 그 식량을 보급하는 길을 끊는 것만 같지 못하다. 양식이 이윽고 떨어지면 싸우려고 해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으니 곧 이길 수 있다.” ─ 三國史記 卷第二十一 髙句麗本紀 第九

고정의가 주장한 지구전은 실제로 당태종이 가장 두려워하는 바이기도 했다. 당태종은 신하들에게 고구려군의 고연수가 취할 계책은 세가지인데 가장 상책으로 바로 고정의가 주장한 바와 똑같은 말을 하였다. 중책은 안시성의 병력과 함께 달아나는것이고 하책은 일단 싸우자는 식인데, 당태종은 고연수가 소위 그 하책을 선택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당태종은 아사나사이(阿史那社尒)의 돌궐 기병 1천여명으로 일부러 짐짓 패하는 장면을 연출하여 고연수를 방심하게 했고, 고연수는 “상대하기 쉽구나.”라는 드립을 치면서 자신감을 얻어 계속 당군에 접근하였다. 마침내 고구려군은 안시성 동남쪽 8리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오게 되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안시성 내의 고구려 군과 협력한 듯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유공권(柳公權)의 소설에 따르면, 당시 고구려군의 많은 숫자의 위용을 보고 당태종이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고 한다. 당나라 군대의 규모를 이십만으로 여긴다면, 이 중 장량의 수군은 요동반도 방면에 있고, 개모성이나 요동성 등지에 일부 당군이 주둔하면서 방어에 주력했을 것을 생각한다면 15만이나 그 이하까지로 예상해볼 수 있다. 확실히 15만이나 되는 고구려군은 당태종으로서도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이에 강화왕 도종은 고구려의 대군이 이곳에 집중한 틈을 타, 평양을 기습적으로 타격한 제안을 제시하였다. 이때 도종이 요구한 병력은 5천. "그 근본을 뒤엎으면 수십만의 군대를 싸우지 않고도 항복시킬 수 있습니다." 라는것이 도종의 주장이었는데, 이런 말이 나올 정도면 고구려 군대의 숫자나 위용이 당나라 지휘관들에게도 압박을 주는 규모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모험책을 동의하지 않은 당태종은 고연수에게 연락을 취해, 자신은 연개소문을 문죄하러 왔을뿐, 교전은 바라지 않고 다만 신하의 예만 취해준다면 철수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보였다. 뻔히 보이는 기만책이지만, 고연수는 이에 속아넘었던지, 혹은 은연중에 경계를 늦추고 자만했던지 방비를 게을리 하는 실수를 보였다.

다음 날, 고연수는 1만 5천여 병력을 이끌고 서쪽 고개에서 진을 치고 있는 이세적의 군대를 보고, 그 숫자가 적다고 여겨 공격을 가하였다. 고구려군이 당군에 집중하여 돌격한 사이, 장손무기가 이끄는 부대가 고구려군을 기습적으로 강타하였고, 전면의 이세적은 1만 장창병을 전면에 배치함으로서, 고구려 기병의 돌진을 저지했다. 고구려군은 앞으로 돌진하자니 이세적의 부대에 막히고, 뒤로는 장손무기의 병력에 막혀 크게 당황하였고, 더구나천둥과 번개가 치는데다, 전면에서 설인귀가 기이한 옷을 입고 크게 소리를 치며 돌진하며 고구려 군의 전열을 흩어지게 하자, 고구려군은 큰 피해를 입어 3만명이 전사하였다.[32]

고연수 등을 비롯한 고구려 수뇌부 3만 7천여명은 자그마한 구릉에 올라가 방어책을 강구하려 하였지만, 당군이 이를 포위하자 결국 항복하였다. 항복한 고구려 장교만 3천 5백여명이었고, 말갈 병사 3천 3백여명은 모두 땅에 파묻어버렸다.[33] 또 이 전투에서 당군이 거둔 말만 5만여 필이나 되었으며, 항복한 고연수는 홍려경(鴻臚卿)으로, 고혜진을 사농경(司農卿)으로 봉해졌다. 

이 전투의 결과로, 고구려군은 사실상 야전능력을 상실하였다. 이제 당나라 군이 평양성까지 가는 길에 남은것은, 교통로의 맥점에 있는 안시성만 넘으면 그만이엇다. 

7.1.5 안시성 공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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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성 상상도

당나라군은 요동성을 순식간에 함락시켰으며 고구려 역사상 최대 규모인 15만 대군도 분쇄하였다. 하지만, 당태종은 묘하게도 안시성에 대해서는 그 성주의 능력등에 몹시 우려하는 기색을 역력하게 보이면서, 이세적에게 건안성을 공격하는 방안에 대해 이야기했다. 건안성을 함락시킨다면, 안시성은 당나라 군이 함락한 지역에 둘러쌓여 있는 셈이니 이것은 성이 배 안에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세적은 이에 부정적이었다. 건안성은 남쪽에 있고, 안시성은 그 북쪽에 있다. 그리고 당나라 군의 보급은 모두 요동에 있는데, 만일 건안을 치는 틈에, 고구려 군이 보급로를 끊어버리면 아군은 고립무원이다. 마땅히 안시성을 함락하고, 건안성을 쳐야 할 것이다. [34]

이에 당태종이 따르면서 결국 전투가 벌어졌다. 당나라 군대는 고연수등 항복한 사람들을 옹위하여 성 밑에서 안시성 내의 사람들을 불러 내었는데[35], 안시성 사람들은 꿈쩍도 하지 않고 북을 치면서 되려 도발하였다. 이에 이세적이 몹시 약이 올라 성이 함락되면 모든 남자를 죽여버리겠다고 공헌하였으나,[36] 되려 이건 안시성 주민들의 결사항전만 독려하는 결가과 되었다.

계속된 공격에도 안시성이 끄떡도 없자, 항복한 고구려 장수 ─ 즉, 고연수와 고혜진이 되려 계책을 내었다. 어서 빨리 당군이 승리해야 자신들의 가족이 무사하기 때문이었다. 오골성(烏骨城)을 지키는 인물은 늙었으니 쉽게 공략할 수 있을테고, 오골성을 무너뜨리면 바로 평양을 타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장량의 병력이 비사성에 있는데 이틀이면 당도함으로, 힘을 합치면 오골성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장손무기가 반대하고 나섰다. 황제가 출전하였다면, 철저히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을 취해야지 무리한 계책을 쓰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만일 오골성으로 진군하자면, 아직 함락이 되지 않은 신성과 안시성의 병력이 10만 가까이가 되어 당군의 뒤를 후릴 것이므로, 필히 안시성과 건안성을 미리 깨뜨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장손무기는 그 조정에서도 꽤 발언력이 있었기도 했고, 당태종은 그런 말을 듣자 오골성 공략 논의를 그만두었다. 

그리하여 다시 공성전이 재개되었다. 당태종은 돼지 등이 우는 소리를 듣고 고구려군의 기습을 예측하여 막아내기도 하였으나, 전체적으로는 전황이 효과가 없었다. 강화왕 도종은 토산을 쌓아 성을 위에서 공략하려 하였으나 안시성에서는 토산을 더 높게 쌓아올려 대응하였다. 서로 하루에도 계속 산을 쌓으며 싸움을 벌였으나 강화왕 도종이 발에 부상을 입었고, 도종은 과의(果毅) 부복애(傅伏愛)로 하여금 토산을 지키게 했으나 마침 부복애가 잠시 통솔하는곳을 벗어났을때 토산이 무너져내렸고, 그 높이가 안시성 위에서 바로 넘어가기 딱 좋은 위치가 되어 고구려군이 토산을 장악해버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당태종은 부복애를 참하고 전군을 동원해 공격하였으나 3일이 지나도 함락이 되지 않았고, 도종은 무릎을 꿇고 죄를 청했다. 일전에 다리에 부상을 입었을 당시, 그를 직접 치료까지 해주던 당태종이었지만 사태가 이리되자 "당연히 죽을죄지만 공이 있으니 살려둔다." 는 식으로 꽤나 차가운 태도를 보였다. 

7.1.6 설연타의 움직임 



이러한 때, 당나라에 있어 이변이 발생하였다. 그 당시 몽골 고원의 강자였던 설연타의 계입이 그것이었다.

설연타는 터키 계통의 유목민으로서 철륵(鐵勒)의 한 부족으로, 북방의 최강자였던 돌궐이 당나라의 힘에 의해 망해버린 뒤 강자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마침 고구려에 대해 당나라가 공격을 하게 됨으로서, 그 심장부인 관중 지대의 방어가 약해질것은 자명한 일이었고, 당태종 역시 그 사실을 알아 고구려 원정에 나서기 전에 설연타의 진주가한(進駐可汗)에게 사신을 보내 "내가 지금 고구려 작살내러 가는데, 그 사이에 쳐들어오고 싶으면 함 해봐."라는, 대단히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러면서 돌궐 사람인 집실사력(執失思力)에게 병사를 주어 주둔하게 하여 설연타를 막아내게 하였다.

주필산에서 고구려군이 개발살이 나며 나라가 풍전등화에 처해지자, 연개소문은 뭐라도 해봐야 되겠다는 움직인지 말갈 사람을 보내 설연타의 참전을 호소했다. 하지만 진주가한은 대단히 두려워했고, 당시 당태종이 천가한이라고 유목민에게 불릴 정도로 그 위망이 엄청났던것을 생각하면 무리도 아니다. 그리고 진주 가한이 곧 사망함으로서 고구려의 희망도 사라지는듯 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645년 9월, 진주가한이 사망하고 난뒤, 발작(拔灼)이라는 인물이 다른 형제인 예망(曳莽)을 습격, 살해하고 새로운 가한, 다미가한(多彌可汗)으로 즉위하였다. 

이러한 정황을 당군이 몰랐을리가 없다. 새 가한의 동향은 의심이 대상이 될만하고, 특히 고구려는 설연타와 동맹을 맺으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 게다가 점점 겨울이 다가오면서 요동평야의 기온이 떨어졌고 풀이 시들고 서리가 내렸다. 주필산의 대패를 조금이라도 수습한 고구려가 보급로를 본격적으로 조여오면 더욱 답이 없어질 것이다. 결국 더 머뭇거리지 않고 당군은 전면적인 철수를 명령하였다. 아울러 공략한 요동성과 백암성·개모성 등 10개 성의 백성 7만 명을 함께 끌고 갔다.

설연타의 동향이 문제가 되는 만큼, 당군은 신속한 철군이 요구되었다. 당군은 추이 속에 요하 하류의 뻘밭을 통과하는것은 매우 어려웠고, 고구려군도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온갖 고생끝에 당태종은 12월 14일 무렵 산서성 태원에 도착하였고, 그 사이에 설연타가 오르도스 지역으로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인회(田仁會)가 급파되어 미리 파견되어 있던 집실사력과 힘을 합쳐 설연타 군대를 격파하였고, 퇴각하던 설연타 군은 재차 하주를 공격하였다. 이제 당군은 고구려 정벌이 문제가 아니라 설연타의 압박을 저지하는것이 더 큰 목적이 되었다.

이로서 1차 고당전쟁은 끝이 났다. 당태종의 고구려 정벌은 실패했다. 수차례 승리에도 불구하고 안시성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함으로서, 당나라는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돌아왔고 설연타와 싸워야만 했다. 

당태종은 위징이 살아있었더라면, 자신이 원정을 나서지 않게 하였을 것이라고 후회하였고, 이정은 강화왕 도종의 계획, 즉 오골성을 치고 평양성을 치는 계책을 써야 했다고 주장하였다. 여하간에 전쟁은 실패로 끝났지만, 당태종은 패배를 설욕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다만 수양제와 같은 막무가내 원정을 계획하고 있는것은 아니었다.

7.1.7 신라와 백제의 움직임 

고구려군이 당군과 격돌하고 있었을 당시, 한반도의 남부 지역에서도 전쟁의 여파가 번졌다. 당태종은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면서 신라에게 움직임을 요구했는데, 과거 수양제가 요구할 당시 신라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지금 신라에게 당나라 말고는 믿을 대상은 아무도 없었다. 당과의 협력 여부를 확실하게 표현하여야 하는 만큼, 신라 조정은 참전과 파병을 결정하였다. 신라는 이제 대외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반 고구려·친당의 선택을 내렸다.

645년 4월 당군이 요하를 건너 고구려 침공을 감행할 때, 신라는 5월 무렵 신라는 북으로 임진강을 건너 수구성(水口城)을 공격하였다. 이때 동원된 병력은 3만. 

그런데 백제의 움직임이 문제가 되었다. 신라가 북진함에 따라 당연히 백제 방면의 수비는 약해졌고, 이에 백제군은 서부 국경선을 공격, 신라의 7성을 함락시켰다. 신라는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카드인 김유신을 파견하여 대응하였고, 결국 북진하던 신라군은 더이상 작전수행이 불가능해져 백제군의 침공을 막아내는데 주력하였다.

신라는 당나라와 확실한 연합 작전을 벌였고, 백제는 당나라와 교전하진 않았지만 결과론으로 신라의 당에 대한 협조를 저지시켰으니 이는 당나라와 척을 지게 되는 셈이다. 이제 동아시아의 정세는 묘한 합종연횡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7.2 각자의 사정 

645년, 당시 중앙아시아 - 동아시아에 가장 거대한 명성을 떨치던 인물인 당태종이, 고구려 침공을 실패하게 됨으로서 당나라의 위신은 크게 손상을 입었다. 하지만 패배에도 불구하고, 당나라가 아시아 국제정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압도적인 강대국인 사실은 변하지 않았고, 고구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당나라는 수나라처럼 자멸해줄 생각도 없었다. 고구려는 대응책 마련에 골몰할수 밖에 없었고, 당나라라는 차르 봄바급 핵폭탄의 여파는 백제, 심지어 바다 건너 일본에 까지 영향을 미치며, 자신들의 입장을 정할것을 강요당했다. 그리고, 신라가 이에 가장 필사적으로 반응하였다.

7.2.1 당나라의 입장 

1차 고구려 원정 실패 후, 당태종은 곧바로 설연타 정벌전에 착수했다. 토번의 세력이 절정으로 치닫기 이전에, 설연타야말로 당의 수도권을 직접적으로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라는 점에서, 나중에 다시 고구려로 진격한다고 해도 설연타는 반드시 눌러놓을 필요가 있었다. 646년 6월, 당나라는 대규모 군단을 동원, 설연타를 대파하여 다시는 세를 떨치지 못할 지경까지 만들었다.

이어서 당태종은 고구려 원정 재개를 논의하였고, 일전의 대규모 군단으로 직접적으로 강대한 타격을 주는 전략에서, 소규모 부대를 이용, 해로나 육로로 고구려를 기습하고, 반격하면 치고 빠지는 형태로 소모전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물론 당 측도 군사비가 많이 들겠지만, 고구려가 입는 막대한 손해에 비할바는 아니다. 더구나 당나라의 생산력은 고구려에 비해서 압도적이었다.

647년 5월, 이세적은 3천의 병사와 영주도독부의 병력을 동원해 남소성 등 소하자 유역 일대에 기습적인 타격을 가했고, 성의 외곽에 불을 지른뒤에 신속히 퇴각하였다. 7월에는 해군 1만여 명이 요동반도의 남쪽 해안지대로 침입하고, 고구려군은 물리친 후 석성을 공략하고, 적리성積利城)을 공격하다가 퇴각하였다. 

이듬해 648년 4월에는 당의 해군이 압록강 하구로 진입, 1백여리를 거슬러 올라가 박작성(泊灼城)을 포위하였다. 고구려가 병사 3만을 보내어 강력하게 방어하려고 하자, 당군은 서둘러 출군하였다.

이러한 전황 속에, 당태종은 648년 8월 재차 고구려 원정 계획을 발표하였다. 30만 대군을 동우너해 일거에 고구려를 무너뜨리겠다고 호언했고, 방현령이 이는 무익하며 시망인 일이라고 반대하였지만 무시당했다. 바로 그 무렵, 신라는 김춘추를 파견하였다.

7.2.2 고구려의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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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라시압 궁전벽화 고구려 사신


전쟁이 끝난 후 고구려는 관계 회복을 위한 움직임을 보였으나 당나라의 반응은 싸늘하였다. 그리고 647년 이후 실제로 당나라의 공격도 이어졌다. 대규모 침략에 앞서 고구려는 대제국 당나라에 맞설 우방을 구하는것이 필요했다. 중국의 왕조를 견제할 최고의 파트너는 북방의 유목민족이었다.

문제는 그 유목 국가들이 없다 는 것이었다. 돌궐은 이미 진작에 박살이 났고[37], 설연타 역시 당에 꺠진 후에 몽골고원의 여러 유목 민족들은 모두 당의 가공할 위력에 귀속된 상태였다. 

그런데 1965년부터 3년간 이루어진, 사마르칸트(Samarkand) 시 교외에 있는 아프라시압 언덕의 궁전 유지 발굴에서 벽화가 발견되었다. 이 궁전 벽에는 소그드어로 와르흐만(Varkhman) 이라는 왕의이름이 쓰여져 있는데, 벽화의 내용은 와르흐만 왕이 인근의 차가니안(Chaganian) 국의 사절을 맞이하는 것이 주된 주제이고, 그 밖에 여러 외국 사절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 벽화에 고구려인으로 여겨지는 두 명의 외국 사절이 있다.

이 사람들이 이곳에 왔던 시기의 정확한 연대 측정은 할 수 없다. 무슨 성과를 거두었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최소한 7세기 후반으로 추정은 해볼 수 있고 고구려가 우군을 구하러 북아시아와 중앙아시아 방면까지 적극적으로 손을 뻗어보았다는 식으로는 생각해 볼 수 있다.

또, 650년대 전반부에 당나라와 고구려는 요서 지역의 거란족 사회에 대한 통제권을 놓고 다투는 듯한 모습이 있는데, 이는 고구려측의 기록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다만 당나라 쪽의 기록에 신문릉(辛文陵)이 이 지역의 고구려군을 제압하기 위해 이르렀다가 고구려군에 패배하고 위기에 처한것을, 위대가(韋待價)와 설인귀가 이를 구철하였다. 655년에는 고구려 장수 안고(安固)가 거란 지역을 공격하였다가, 이굴가(李窟哥)에게 패배하기도 했다. 

한편 고구려는 바다 건너 왜와의 연결을 공고히 하고,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에 대한 압박을 한층 가중하였다.

7.2.3 백제의 입장 

당태종이 고구려 원정을 선포하면서 백제에게 호응을 요구하자, 백제 조정은 당초에 이에 응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645년 신라군 3만이 고구려 공격을 위해 북진하였을때, 되려 신라의 공백을 이용하여 서부 국경선을 공격하였고, 신라는 이를 막기 위해 황급히 퇴각하여 백제군에 대처하였다. 이는 백제가 고구려 편을 들어버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백제가 배짱을 부린대로 전쟁은 고구려의 승리로 끝났고, 더욱더 판단에 확신이 들었는지 백제는 647년, 648년, 649년 연속으로 신라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다. 당나라의 공격은 고구려가 위에서 막아줄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말이다. 혹은 고구려 측이 신라 견제를 위해 백제를 부추겼을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백제는 당나라와의 관계 파탄만은 피하려고 했는데, 651년에도 조공사를 파견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라에 대한 공세는 여전했고, 이런 형태 속에서는 결국 당나라와의 대결은 피할 수가 없었다.

7.2.4 왜국의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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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토쿠 덴노(孝德天皇)

고구려와 당나라의 싸움이 한창이던 645년 6월, 왜의 조정에서 정변이 벌어졌다. 그 당시 왜의 조정을 주도하던 세력은 소가씨(蘇我氏). 6세기 중엽 불교 수용 문제를 둘러싸고 왜 조정 내의 유력 귀족들 간에 갈등이 벌어졌는데, 이 불교 수용 문제에 반대하던 모노노베씨(物部氏)와 수용을 찬성하던 소가씨가 각각 양 편을 대표하는 집단으로서 대립하였다. 소가씨는 도래인(渡來人)[38] 세력을 휘하에 포섭하면서 확대를 거듭해 모노노베씨를 타도하였다.

이후 소가씨는 왜 조정의 대표적 귀족세력으로 대두하였고, 쇼토쿠 태자(聖德太子) 사후 세력을 더욱 강화하였다. 소가씨의 전횡에 위협을 느끼고 불만을 품은 왕족과 다른 귀족들이 합세, 645년 나카노오에노오지(中大兄皇) 왕자와 나카토미노 카마타리(中臣鎌足)가 소가씨의 대표인 소가에미시(蘇我蝦夷)와 아들 이루카(蘇我入鹿)를 죽이고 소가씨를 몰아내었다. 이 정변으로 고교쿠 덴노(孝德天皇)가 퇴위하였고, 동모제인 고토쿠 덴노가 즉위하였다. 고토쿠 덴노는 나카노오에노오지를 태자로 삼았다. 그는 즉이 휘 연호를 다이카(大化)라 하고 다이카개신(大化改新)을 단행하였다.

복잡한 국제 정세의 흐름을 느끼면서, 개신정권은 653년, 654년에 제2차, 3차 견당사(遣唐使)를 당나라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고구려, 백제와 교류하면서 신라와도 어느정도 교섭관계를 지속하였다. 그리고 백제와 신라, 어느 한쪽에 완전히 편을 드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으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였다.

654년 당고종은 덴노에게 출병하여 신라를 구원하라 요청하였으나, 왜 조정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만약 신라를 구원하러 간다면 백제와의 관계는 파탄될 것이다. 단 신라에 대해서도 드러내놓고 적대적인 태도는 취하지 않았다. 당나라의 직접적인 압박을 받지 않고, 삼국간의 상쟁에서도 한발 떨어져 있는 지정학정 위치에서 왜 조정은 사태를 관망하면서 지켜보았고, 신라는 어떻게 해서는 자기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그 입장을 선회시키려고 노력하였다.

7.2.5 신라의 입장 

백제와 고구려, 왜 등의 압력에 찌부라져 있던 상황에서, 믿었던 당나라의 동진마저도 고구려에 저지당했고, 이 과정에서 백제의 옆치기까지 당한 신라는 고립무원의 상태였다. 이런 상태에서 별다른 수를 내지 못하자 국가의 안위에 대한 우려감은 고조되었고, 나아가 내부의 갈등을 증폭시켰다. 마침내 647년 초, 비담의 난과 같은 대규모 내분이 폭발하였다.

7.2.6 비담의 난 

647년 1월 초, 신라 수도에서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이 중심이 된 일단의 귀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비담의 반란 명분이 걸작인데,

十六年春正月 毗曇 廉宗 等謂女主不能善理因謀叛擧兵不克

16년 봄 정월에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이 말하기를
“여자 임금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라 하고 반역을 꾀하여 군사를 일으켰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 三國史記 卷第五 新羅本紀 第五


선덕여왕은 신라 최초의 여왕이고, 기록상으로 남아있는 한국 역사상 최초의 여군주이다. 진평왕에게 아들이 없어 이루어진 일인데, 이미 진평왕 말년인 631년에 일어난 이찬 칠숙, 아찬 석품의 모반 등이 구체적 예로 논급되어 왔다.

삼국유사 등에서 계속해서 강조되는 여왕의 현명함 등은 제위 내내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선덕여왕의 노력을 어느정도 설명해 주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643년 당태종이 신라는 여자가 왕위에 있기 때문에 남들이 우습게 본다.<del>측천무후(則天武后)가 해먹을진 몰랐겠지</del>는 식의 발언에 당나라 황실 종친을 보내 왕위에 오르게 하면 어떻느냐는 드립까지 나오면서, 가뜩이나 여왕 즉위에 불편한 감정이 있을 중신들에게는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거기다가 백제, 고구려의 연이은 공격으로 나라 사정도 뒤숭숭하니 말이다.

게다가 645년 5월, 당태종의 고구려 공략에 호응하여 병사를 동원했지만, 백제에게 옆치기를 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런 병크에 불만이 더 커질 수 밖에 없었을 테고, 무엇보다 선덕여왕은 혼인은 한적 있지만 후계자가 없었다. 성골(聖骨)의 남자가 없어 여왕이 즉위하였는데, 같은 논리대로라면 다음 왕도 여왕이 되는것이 아닌가?[39]

이렇게 진골귀족들의 불만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40] 647년 정월 초, 상대등 비담을 중심으로 한 반란이 터졌다.[41] 

반란은 10여일 간 지속되었으나 <del>신라의 수호신</del>김유신이 이를 진압하였다. 이 와중에 선덕여왕이 세상을 떠났고, 김춘추와 김유신 세력의 후원 아래 진평왕의 막내 동생인 국반 갈문왕의 딸, 승만이 진덕여왕(眞德女王)으로 즉위하였다. 사실상 김춘추와 김유신의 바지사장 격으로 보인다.

7.2.6.1 비담의 난에 대한 여러가지 견해들 

비담의 난의 성격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적지 않게 학계에서 제출되었다. 그런데 사실 정작 비담의 난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 자체는 터무니 없이 적다.

우선 비담의 지위가 상대등이라는 점. 그리고 그 난을 진압하는 주축이 김유신이라는것 자체는 명명백백한 fact다. 그리고 김유신과 김춘추가 깊이 연결되어있는것도 확실한데, 대체로 김유신은 지방 출신이고, 김춘추는 귀족회의에 의해서 폐립된 진지왕(眞智王)의 손자라는 점, 그리고 반란군 측이 내세운 명분이 '여자가 나라를 잘 못 다스린다' 라는 점, 난을 진압한 뒤에 김춘추와 김유신이 실권을 잡고 급속하게 중앙관서조직 확대 등이 일어난것이 일단 역사적 사실이다. 이를 바탕으로 무엇을 중시하고, 또 무엇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견해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7.2.6.1.1 왕권 vs 귀족 세력? 
상대등은 귀족회의 의장으로 여겨진다. 본래 왕(마립간)이 귀족회의의 의장이었는데, 법흥왕(法興王) 시기에 상대등이 설치됨에 따라 왕은 귀족회의의 직접적인 제약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상대등의 설치는 왕권 강화를 나타낸다. 또한 동시에 귀족회의가 약화되었지만 여전히 국정운영에서 주요 기능을 담당하였다는 데서 상대등의 존재는 왕권 강화의 한계를 나타내는 면을 지녔다. 처음에는 상호 보완적 관계였던 왕과 상대등은, 6세 중반 신라의 왕권 강화와 이에 나타난 귀족회의의 진지왕 폐립 사건 등 양자 간에 갈등이 발생하였다. 

비담의 난을 이러한 측면에서 볼때, 이 과정의 연장선 끝에 비담의 난이 벌어졌다는 의견이다.

왕을 관점으로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려는 세력, 그리고 기존의 귀족연합정권적인 성향을 유지하려는 귀족 세력간의 갈등을 축으로 삼아, 신라의 중고기(中古期) 정치동향을 파악하려는 것은 장기적 측면에서 보면 타당성이 있을 것이다. 실제로, 비담의 난 이후 진덕여왕과 태종 무열왕 시기를 거치면서 신라의 중앙집권화는 진전되었고, 그것은 이전과는 다른 정권의 성격을 나타내었다.

그런데 소위 말하는 '귀족세력'이라고 하더라도 그 안에는 여러 분파가 있을 수 있다. 왕권과의 관계에서도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이는 곧 당시 귀족세력의 면모에 대해 더 구체적인 파악이 요구되는 점이다.

그리하여, 귀족세력 안의 여러 정파를 추출해 보려는 시도가 행해졌다. 그 기준으로 제시된 것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친족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적 관계이다.

후자의 견해를 먼저 보자면 비담의 난은 촌락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보수적인 족장층인 비담 등과, 김유신 같은화랑(花郞) 출신의 진취적 신흥군사귀족의 대결이었으며, 후자가 봉건적인 김춘추를 지원하여 중앙집권적 봉건사회를 구축하는 토대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반란을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과도기에서 나타난 사건이라고 성격을 규정하였다.[42]

당시 김춘추와 김유신 세력이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한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중앙집권화의 구축이 곧 중세사회의 도래를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각자의 견해가 다를 것이다. 그리고 비담과 김유신, 김춘추가 각각 지닌 세력 기반이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한 것이었는가, 에 대해서도 의문들이 있다.

다른 견해로, 김춘추계를 하급귀족 또는 몰락귀족으로 보고 김유신 세력을 지방 세력으로 파악하여 이들이 왕권 강화를 통해 경주의 문벌귀족과 대결을 벌인것이 비담의 난이라고 파악하는 설이다. 

이 설은 신라 중고기 정치정세를 파악하는 기본 틀에서 수긍할 점이 있는데, 지방 출신이나 하급귀족이 왕권과 연결되었고 이들의 뒷받침을 받아 왕권이 강화되는 추세를 보였으며, 그 연장에서 무열왕 이후 중대의 왕실이 성립되었음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정치세력의 분류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위험성이 있다.[43]구체적으로 김춘추는 어머니가 선덕여왕의 자매이고, 아버지는 왕실 측근으로서 내성사신같은 고위적을 역임하였던 유력한 진골귀족이었다.

다른 기준으로 제시된 것은 친족관계이다. 즉, 귀족들 간의 세력 결집의 토대가 친족관계와 그것에 바탕을 둔 혈연의식이었다는 주장이다. 계보친족은 세대의 진전에 따라 포괄 범위가 달라지는데, 7세기 중엽 진골 귀족 사이에서 가장 큰 범위의 계보친족(maximal lineage)이 내물왕(奈勿王)을 시조로 한 것이고, 이보다 작은 범위의 계보친족이 지증왕(智證王) 후손들의 그것이며, 하위의 소(小) 계보친족이 태자 동륜계와 진지왕계인데, 내물왕계의 대(大) 계보힌족회의에서 선덕여왕 폐위를 결의하였는데 이를 김유신 등이 반발하여 비담의 난이 발생했다는 설이다. 또한 진흥왕의 두 아들의 후손인 진지왕계와 태자 동륜계 사이의 대립에서 난의 배경을 찾는 설도 발표되었다.

두 설 모두 계보친족 사이의 혈연의식에서 당시 귀족들의 세력 결집의 구체적인 동인을 찾았다는 점에선 동일하다. 

원시 및 고대사회에서 혈연이 개인 간의 연결과 결속에 매우 중요한 기능을 미쳤으며, 어느 경우엔 개인의 생존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중고기 신라사회는 이미 고대사회에서 사회분화가 크게 진전되었고 부체제가 해체되는 등 정치구조와 운영에서 새로운 바람이 형성되고 있었다. 그런만큼 혈연적 의식은 그 전대에 비해선 훨씬 약화되었을텐데, 자칫 혈연의식을 정치적 성향과 동일시할 경우, 그것이 실제 상황과 부합할지도 의문이 갈 수있다.
7.2.6.1.2 대당 의존파 vs 자립파? 
귀족들 간의 뚜렷한 파별성을 확인하기 힘든 상황에서, 비담의 난의 동인을 내부에서 찾으려는 데 반대하고, 외부의 영향에서 찾으려는 시각이 제기되었다. 이 견해에서 "여자가 잘 다스리지 못한다." 는 반군 측의 구호를 중시하고, 여왕 교체안이 다름 아닌 당태종의 발언에서 제기되었음을 주목하여, 난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대당 의존파와 자립파로 나누고 후자가 왕실을 지지한다는 식이다. 당시 신라가 대내외적으로 곤경에 처해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의 지도력에 대한 신뢰가 크게 흔들리는 상황이었으므로, 여자가 해서 말아먹는다는 논리는 여왕에 반대하는 귀족 세력에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여왕 반대파와 지지파를 대당 의존파와 자립파로 그 성격을 규정할 수 있는 가이다.

여왕에 대한 불만은 그 전부터 있었던것으로 보염, 국가적 위기는 여왕과 다음 왕위 계승자로서 여왕의 등장 가능성에 반대를 촉발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굳이 여왕 반대파를 '대당 의존파' 라고 규정하는가의 문제다. '자립파' 라는 세력 또한 당과의 동맹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정책을 전개하였기 대문이다. 따라서 이는 지나치게 외인론에 의거해 신라 정치를 설명하는 주장일수 있다. 오히려 역으로 비담 일파가 여왕이 친당정책에 반발하여 일어난 것일 수도 있다.

7.2.6.2 비담의 난의 결과 

비담의 난 후 즉위한 진덕여왕 재위 기간 중, 신라의 중앙집권화가 크게 진전되었고, 김춘추와 김유신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김유신의 집안은 신라에 병합된 김해의 금관가야 왕실의 후예였고, 진골로 편입되었지만 정통 진골 귀족들에게는 냉대를 받았다.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金舒玄)이 숙흘종(肅訖宗)의 딸인 만명부인(萬明)과 결혼하려 하자 여자 집안의 반대에 봉착하여, 만노군(萬弩郡) 태수로 발령 받은 김서현이 밤에 담장을 넘어 보쌈을 하여 김유신을 탄생시켰다. 게다가 김유신이 자신의 여동생인 문희(文姬)를 김춘추와 고생고생해서 결혼시키는 모습 등은 금관 가야 왕족인 김유신 집안이 경주로 이주한 뒤 진골 신분에 편입은 되었지만, 정통 진골귀족사회에서 여전히아웃사이더 처지 였음을 말해주는 일일 수 있다.

김유신 집안은 진골 신분에 의존해서라기보단, 실제적으로 조부 김무력(金武力) 대부터 김서현, 김유신에 이르기까지 무장으로서 탁월한 능력을 통해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로 말미암아 김유신은 사람을 대할 때에 상대적으로 신분보다도 능력을 중시하는 경향에 있었다.

가령, 662년 대고구려 원정에서 돌아온 김유신은 문무왕에게 자신이 임의로 9등급인 급찬의 관위를 수여한 열기(裂起)와 구근(仇近)에게 8등급 사찬을 수여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문무왕이 지나치다며 난색을 표하자 김유신이 "작록(爵祿)은 공기(公器)로서 공로에 대한 보수로 주는 것이온데, 어찌 과분하다고 하겠습니까?" 하자 문무왕이 이를 따랐다. 구근은 지방의 출신이고, 열기는 사서에 족성이 전해지지 않음을 보아 평민이나 하급 귀족 출신으로 여겨진다. 김유신은 평소 이들의 능력을 평가하여 국사(國士)로서 대우하였다.

출신 신분이 아니라 능력을 평가해 포용하고 발탁하는 자세를 견지함에 따라, 김유신의 문객으로 당시 소외되었던 유능한 지방 출신 인사나 하위 골품 출신 인사들이 많이 모여들었다.[44] 대백제전에서 김유신의 수하로 큰 공을 세우고 장렬하게 전사한 비령자(丕寧子)도 그러한 인물이었다. 김유신과 김춘추는 이런 이들을 규합하여 자신들의 세력기반의 일부로 삼았으며, 나아가 이들을 국가의 공적 질서에 포괄하기 위해 관료조직의 확충과 왕을 정점으로 하는 집권체제 확립을 지향하였다. 비담의 난도 그러한 과정에서 벌어진 대립의 이해할수 있다.

비당믜 난이 진압되고 그 후 진덕여왕 재위 기간 중 신라에선 중앙관서 조직이 크게 확충되었다. 진덕여왕 5년인 651년에는 재정 지출을 담당하는 창부(倉部)와 형률과 입법을 관장하는 좌리방부(左理方部)가 창설되었으며, 국가의 기무를 총괄하는 최고 집행기구로서 집사부가 개설되었다. 집사부는 왕에 직속되어 정치적으로는 강력한 왕권과 중앙 집권력을 뒷받침하는 기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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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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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多爾袞 | 작성시간 12.10.31 수도를 평양이나 한성으로 옮겼음 좋았겟지만 통일세력인 신라가 자신의 터전인 경상도의 수도를 버리고 올라가기엔 기득권인 신라귀족층이 반대를 심하게 했겟죠....
  • 답댓글 작성자어하라 | 작성시간 12.10.31 신문왕때 대구로 수도를 옮기려고 했다죠 ㅎ
  • 답댓글 작성자多爾袞 | 작성시간 12.11.01 그런데 대구나 경주나 그게그거라서.. 고구려 영토랑 이런거 바라보려면 평양이 좋은데 말이죠
  • 답댓글 작성자포레스트벨 | 작성시간 12.11.01 신라는 한번도 평양을 먹은 적이 없지 않나요? 평양이 다시 한국 영토로 귀속되는건 후고구려-고려 대인걸로... 뭐 한성쪽으로 갈 수도 있겠지만 당시 생각하면 한성은 반대로 너무 북쪽에 치우친 수도였겠죠.
  • 답댓글 작성자多爾袞 | 작성시간 12.11.01 안동도호부가 요동으로 물러가고 대동강 이남을 신라가 차지했고 평양을 먹을순 있었는데 수도인 경주와 너무멀고 남북국시대에 발해가 차지 한걸로 압니다.신라,발해의 국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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