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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삼국통일전쟁, 동아시아의 세계 대전(2) ─ 백제 부흥 운동의 종말과 고구려의 최후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10.31|조회수599 목록 댓글 0




7.3 김춘추의 움직임 

진덕여왕 즉위와 함께 대내적 문제가 일단락 되자,신라 조정의 최대과제는 국가적 위기의 원인인 대외관계의 혼돈을 수습하고, 대외정책의 방향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이 과제를 풀기 위해 권력의 핵으로 부상한 김춘추, 본인이 직접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7.3.1 김춘추의 왜국 방문 

일본서기에 따르면, 646년 9월 왜의 조정이 도당 유학생출신 다카무쿠노겐리(高向玄理)를 신라에 보내어 '질(質)'[45]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에 신라가 응해 비담의 난이 진압된 뒤 647년 다카무쿠노겐리와 함께 김춘추가 왜국으로 건너갔다.[46] 신라왕의 명령을 받았겠지만, 김춘추 자신의 판단과 의지가 주요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인질이라고 표현했지만, 김춘추는 신라 최고 귀족이고 실제로 왜국을 방문한 후 곧바로 신라로 귀환하였다. 김춘추가 왜의 인질이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일본서기에 종종 나타나는 서술 태도다. 더 나아가서, 아예 일본서기의 이 기록을 회의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일단, 김춘추가 이찬의 관등을 지닌 고위 귀족[47]이고 신라 정계의 실력자였다는 점이 주목되는데, 이전의 신라 사신들이 급찬이나 사찬이었던 것과 뚜렷이 다르다. 이는 신라 측으로서도, 고위 귀족의 방문을 요구한 왜국으로서도 이 방문을 통해 무엇인가를 추구하였음을 말한다.

우선 김춘추가 왜국에 대백제전의 군사원조를 요청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다. 물론 왜와 백제는 오랜 지원국이다. 하지만 모처럼 신라의 최고위급 인사가 왜국을 방문하였던 만큼 백제에 대한 왜국의 군사적 지원을 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는 없다. 고위급 회담으로 왜국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려는 시도는 신라에게 주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그러면 왜의 조정은 어떤 배경에서 무슨 목적으로 다카무쿠노겐리를 신라에 파견하여 고위귀족 파견을 요청하였을까. 다카무쿠노겐리는 607년 승려 '민'과 함꼐 당으로 건너간 유학생 출신이며, 640년 귀국할 때 신라를 거쳐 왜국으로 돌아갔고, 다이카 개신 후 국박사(國博士)로서 승려 민과 함께 개신 정권의 주요 브레인 노릇을 했다. 승려 민도 632년 당에서 신라를 거쳐 귀국하였다. 그리고 개신정권은 친백제적인 소가씨 세력을 타도하고 집권하였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다카무쿠노겐리와 김춘추의 상대국 방문은 무엇인가를 둘러싼 양국 협상이 시도되었을 가능성을 암시할수도 있다. 646년은 당의 동방 침공이 있은 다음 해이며, 그 전쟁에서 신라는 당의 편에 서서 참전하였고, 백제는 신라를 공격하여 당의 반대편에 섰다. 다카무쿠노겐리는 당나라의 힘을 아주 잘 알고 있던 만큼 적어도 반당적인 인사는 아니었던것 같고, 당에서 귀국할때 신라를 통한적이 있어 오히려 당과 신라에 우호적인 입장을 지녔을 수도 있는 인물이다. 왜국이 신라에게 다카무쿠노겐리를 파견한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이런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그 점에서 유의되는것은 왜가 648년 신라사에 부탁하여 당에 국서를 보내어 교섭을 시도하였다는 것이다. 이해에 김춘추의 경우를 포함해 신라는 당에 세 차례 사신을 파견하였다. 김춘추가 왜의 국서를 당에 전달하였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어느 편에 왜의 국서가 전달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당시 국제정세에서 신라가 왜의 국서를 당에 전달하는 것은 신라나 왜국으로선 중대 사안이다. 이런 주요 문제를 고위 귀족인 김춘추가 왜에 갔을 때 논의는 하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왜 조정이 신라에 '질' 요청을 하였을 때는 이 문제도 고려하였을 것이다.

당시 왜와 당은 632년 당의 사신 고표인(高表仁)의 왜국 방문 때 마찰이 있은 이후 국교가 두절된 상태였다. 이런면을 파악하였기에 김춘추는 직접 왜로 건너가 왜의 개신정권 핵심인사와 협상하려 하였을 수도 있다. 구체적으로 양자 간 협의된 내용이 무엇인지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또 왜가 신라에게 그리고 신라를 통해 당에 전달하려는 메세지의 내용도 전해지는 바가 없다.

다만 추정을 하자면 왜구 고구려와 백제 측에 일방적으로 기울지 않았다는 뜻을 전달하려 하였을 수는 있다.[48]그런 의향을 표한 바 있었기에, 왜국은 오랜 국교 두절 이후인 653년 제2차 견당사로 240여명에 달하는 유학생을 파견하였고, 이듬해 3차 견당사를 파견하였다. 

그런데 646년 이후 왜의 대외관계를 볼 때 앞서 말했듯이 왜가 대외 정책을 두드러지게 변경한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다. 즉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였지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당과 신라라는 두 개의 대립 축에서 어느 한편에 일방적으로 기우는 선택을 하여 노선을 분명히 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백제와의 우호관계를 중시하던 기존 대외 정책이 지속되었음을 의미한다. 직접 일본까지 왔지만 별 성과를 보지 못한 김춘추는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였다.

7.3.2 김춘추의 당나라 방문 

마침 신라에는 당나라와의 연호 사용 문제가 발생했다. 648년 3월, 당나라에 파견된 산라사신에게 당태종은 신라가 독자적인 연호를 쓰는것을 문제 제기했고, 이는 신라가 정변 이후 새로운 왕이 즉위한 것을 기회로 삼아 신경전을 벌이는것으로 보여진다. 그러자 일본에서 돌아온 김춘추가 당나라로 파견되었다.

당태종은 김춘추를 광록경(光祿卿) 유형(柳亨)으로 하여금 교외에 나가 그를 영접하는 등, 매우 융숭하게 대접하였다. 김춘추에게는 정2품인 특진의 관작을 주었고 춘추의 아들 김문왕(金文王)에게 정3품의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을 봉하였다.

당시 당 조정은 수년째 치고 빠지는 기습전으로 고구려를 괴롭히고 있었다. 소모전 결과 고구려가 피폐해졌다는 보고를 접한 당태종은 다음 단계로 대규모 병력을 투입한 전면적 공격에 나서겠다고 다시 한번 선포하였다.

○ 二十二年, 又遣右武衛將軍薛萬徹等往靑丘道伐之, 萬徹渡海入鴨綠水, 進破其泊灼城, 俘獲甚衆. 太宗又命江南造大船, 遣陝州刺史孫伏伽召募勇敢之士, 萊州刺史李道裕運糧及器械, 貯於烏胡島, 將欲大擧以伐高麗. 未行而帝崩. 高宗嗣位, 又命兵部尙書任雅相·左武衛大將軍蘇定方·左驍衛大將軍契苾何力等前後討之, 皆無大功而還.

○ 22년에 또 右武衛將軍 薜萬徹 등을 보내어 靑丘道로 가서 치게 하니, 萬徹은 바다를 건너 鴨綠水로 들어가서 泊灼城을 함락하고 많은 포로를 사로잡았다. 太宗은 또 江南에 命하여 큰 배를 건조하게 하는 한편, 陜州刺史 孫伏伽를 보내어 용감한 兵士를 모집시키고, 莢州刺史 李道裕를 보내어 軍糧 및 器械를 운반하여 烏胡島에 쌓아두게 하는 등 장차 군사를 크게 일으켜 高麗를 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끝내 시행하지 못하고, 太宗은 죽었다. 高宗이 位를 이어받아서 또 兵部尙書 任雅相·左武衛大將軍 蘇定方·左驍衛大將軍 契苾何力 등에게 명하여 前後로 보내어 토벌케 하였으나, 모두 큰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 舊唐書 卷 199 東夷列傳 第 149


이런 방책과 함께 당태종이 645년 전쟁 이후로는, 대고구려전의 새로운 전략으로 주목하게 된 것이 고구려 서부 국경선 이외에 타방면에 제2전선을 구축, 고구려의 방어력을 분산시키고, 가장 중요한 군수품 보급의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세력을 찾는데 집중하였다. 따라서 앞으로의 고당전쟁의 향방에 있어서, 신라의 중요성이 급부상하게 되었다.

1차 고당전쟁 당시에 당나라가 백제, 신라에 군사 협조를 촉구하였지만, 실제로는 전쟁 자체에서 거의 한반도 남부 세력의 원조를 크게 필요로 하지도 않았고 전쟁 과정에서 이 문제로 말이 나온 적이 없었다. 하지만 한 차례 패배를 당한 상황에서는 또 이야기가 달라, 이런 과정에서 김춘추에 대한 환대가 더욱 커졌던 것이다.

김춘추는 당태종 이세민을 비롯한 당 조정의 중신들과 교류했고, 돌아오면서 아들 김문왕이 장안에 머물게 하였다. 이제 신라는 당과 교섭하는 데 유리한 거점을 확보했고, 김춘추 개인으로서도 자신의 아들을 당 조정에 두어 당나라 유력자들과 교류하게 함으로서, 다른 진골귀족들보다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김문왕이 귀국한 후에도 김춘추는 훗날의 문무왕은 아들 김법민(金法旼)을 650년 당나라에 파견하는등 당나라와의 교섭을 주도하여?.

또, 이때 당태종과 김춘추 사이에서 주목되는것이 문무왕이 671년 설인귀에게 보낸 서한이다. 이는 이해 7월에 설인귀가 문무왕에게 신라가 신의를 등지고 당을 공격한 것을 힐난하는 서한을 보내온 데에 대한 답신 형태로 보낸 것이었다.

여기서 문무왕은 당나라의 배신을 언급하면서, 구체적으로 648년에 김춘추와 당태종 사이에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 시킨 뒤, 대동강 이남 지역은 신라에 귀속시킨다는 약속이 있었음을 지적하였다.

“선왕께서 정관(貞觀) 22년에 중국에 들어가 태종 문황제를 직접 뵙고서 은혜로운 칙명을 받았는데, ‘내가 지금 고구려를 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너희 신라가 두 나라 사이에 끌림을 당해서 매번 침략을 당하여 편안할 때가 없음을 가엽게 여기기 때문이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내는 바가 아니고 보배와 사람들은 나도 가지고 있다. 내가 두 나라를 바로 잡으면 평양 (平壤) 이남의 백제 땅은 모두 너희 신라에게 주어 길이 편안하게 하겠다’ 하시고는 계책을 내려주시고 군사 행동의 약속을 주셨습니다."─三國史記 卷第七 新羅本紀 第七

이 기록은 삼국사기 외에 보이지 않고, 어디까지나 당과의 개전을 합리화하기 위해 신라가 일방적인 주장을 펼친것에 불과하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김춘추와 당태종 간의 대화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별도의 공식적 기록으로 남지 않았을 수도 있으며, 당시 고구려 원정을 앞둔 당태종의 입장에선 그런 식으로 김춘추를 회유하려 할 수도 있다. 648년에 두 사람이 평양 이남 지역을 신라령으로 한다고 약속한다면, 이는 곧바로 바로 그때 당군이 백제 공략에 나설것을 약속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향후에 벌어진 대백제전쟁등의 군사동맹의 큰 틀은 바로 이때 김춘추가 당나라에 건너가서 확정지은것이 된다. 물론 아직 그런것들은 구체화 되진 않았다.

당에서 귀국한 김춘추는 신라 조정에 건의하여 관복의 양식을 바꾸어 당의 그것과 같이 하여으며, 그간 행해왔던 신라 고유의 연호를 폐지하고 당의 연호를 사용하도록 했다. 신라가 취한 조치는 신라가 당나라 중심의 천하 질서에 귀속하겠다는것을 공식적으로 표명한 것이었다.

이때 신라가 650년부터 656년 사이 왜에 해마다 사신을 파견하자, 왜는 신라 사신이 당 양식의 새로운 관복을 입고 왜를 방문한것을 보고 극렬한 반응을 보이며 접견을 거부했다. 왜에 있어 신라의 당복 착용은 당과 연결한 신라가 노골적으로 왜국을 위협하는것으로 보였다. 반면에 신라 입장에선 당나라와 자신들의 결속을 과시하며, 왜의 선택을 촉구하는 방향도 있을 것이다.

백제, 고구려 등의 압력에 시달리는 신라로서는 배후의 왜에 대해 항시 민감한 주의가 필요했다. 신라로선 당과의 동맹을 확실히 하고 백제와의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는 상황에서 왜의 미온적인 태도는 불만인 동시에 위협이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관복 시위도 하면서 해마다 사신을 보내었지만, 왜가 계속 미온적인 태도를 계속하자 신라 역시 왜와의 관계에 매달리기보다 대결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이에 따라 657년 왜의 조정이 사신과 유학생이 신라를 거쳐 당나라에 파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하였는데, 신라 조정은 이를 거부하고 그들을 왜국으로 돌려보냈다. 이후 신라와 왜 사이의 공식적 접촉은 단절되었다.

이제 동북아시아의 국제 관계의 구도는 점차 명확해졌다. 당나라와 신라를 연결하는 횡적(橫的)인 연결과, 고구려와 백제, 왜가 연계하는 종적(縱的)인 연결이 그것이었다. 합종연횡(合從連衡)의 움직임 속에서 전쟁의 폭풍이 한반도를 휘감아 몰아치려 하였다. 



9 백제 700년의 종말 

신라는 원수를 물리치고 숙적을 꺾어버리기 위해, 당나라는 최종목표인 고구려를 물리치기에 앞서, 백제를 멸망시켜 고구려를 고립시키기 위해. 이제 양자의 이해관계가 동일해졌고 실행에 옮겨지고 있었다. 700년에 가까운 백제 사직은 풍전등화의 형세에 놓여지고 말았다.

9.1 백제 내부의 혼란 

16년 봄 3월에 왕이 궁녀들을 데리고 음란과 향락에 빠져서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좌평 성충(成忠)이 적극 말렸더니, 왕이 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간하려는 자가 없었다. 성충은 옥에서 굶주려 죽었다.─ 三國史記 卷第二十八 百濟本紀 第六

삼천궁녀 이야기야 훨씬 후대에나 나온 야사이니 그렇다치더라도, 그 이전까지 해동증자라는 언급까지 나오며 좋은 면모만 보였던 의자왕이 갑자기 폭정을 저지르고 향락에 빠졌다, 라는 식의 언급이 나오는 것에 대해 '역사는 승리자의 것'이라는 식으로 신라의 의도적인 악마 만들기라고 보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의자왕이 신라를 마구 공격한 것은 신라인들에게 악마와도 같았고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언급은 삼국사기만의 내용이 아니다. 백제 사비성(泗沘城)의 주요 사찰인 정림사(定林寺)의 그 유명한 오층탑에 새겨 넣은 대당평제비(大唐平濟碑)에서 기술된 백제 멸망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

항차 밖으로 곧은 신하는 버리고 안으로 요사스러운 부인을 믿어, 형벌은 오직 충직스럽고 어진 자에게만 미치고 총애와 신임은 아첨하는 자에게 먼저 더해졌다.

결정적으로, 신라나 당나라의 입김이 미치지 않은 일본의 일본서기에도 이러한 언급이 있다.

고려 사문 도현(道顯)의 일본세기(日本世記)[21]에 "7월에 운운, 춘추지(김춘추)가 대장군 소정방의 손을 빌려 백제를 협공하여 멸망시켰다."고 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백제는 스스로 망하였다. 임금의 대부인이 요사스럽고 간사한 여자로서, 무도하여 마음대로 권력을 빼앗고 훌륭하고 어진 신하들을 죽였기 때문에 이러한 화를 불렀다. 삼가지 않을 수가 있는가, 삼가지 않을 수가 있는가." 라고 하였다.─ 일본서기 권26

주목할만한 것은 지속적으로 언급되는 임금의 부인이 문제를 일으켰다는 표현이다. 정확히 누군가를 말하는지도 알 수 없고, 임금의 권한과 그 부인이 맞섰다는 것인지, 혹은 임금을 등에 엎고 횡포를 부렸다는 것인지 알 방법이 없다.[22] 여하간에 귀족들간에 분열을 낳고 무력감을 느끼게 할만한 국정운영의 난맥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모습이다. 일단 적어도 나당연합군이 공격해오려는 이 상황에서, 긍정적인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백제에서 내전이나 격심한 권력다툼이 있었다면 정작 삼국사기에 이에 대한 언급이 없는 점이 의문으로 남는다. 이에 대해서 삼국사기에 기재된 의자왕대의 변고들이 권력투쟁이나 대숙청 혹은 내전을 암시한다고 보기도 한다.

9.2 나당연합군의 진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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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방(영화 황산벌)

당나라는 대백제전에 앞서 위협요소를 먼저 제거하였다. 당의 서부지역에서 서돌궐의 아사나하로(阿史那賀魯), 즉 사발라(沙癖)가 노실필 부족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서부의 칸국을 부활시켰고, 곧바로 중국의 종주권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제거하거나 적어도 통제하지 않고는 한반도 방면의 작전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는데 어려움이 예상되었다. 당나라는 이에 따라 소정방(蘇定方)을 사령관으로 하는 원정군을 구성하여, 바람이 휘몰아치는 서북의 황야로 출정하였다. 

소정방은 10세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를 나갔다고 하는, 그야말로 전쟁을 위해서 태어난 인물이었다. 구당서에서는 그를 날쌔고 사납고 힘이 ?, 담력이 대단히 뛰어남, 등의 수식어로 묘사하고 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어서 두 자 정도의 눈이 쌓여 있었고, 소정방은 병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안개는 어디든지 어둡게 만든다. 바람은 얼음같이 사납다. 야만인들은 우리가 이런 계절에 원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신속히 진군하여 그들을 놀라게 해주자." 르네 그루세유라시아 유목 제국사

소정방은 준가리아의 에비 노르 근처에 있는 보로탈라 강에서 아사나하로와 조우하여 정말로 그들을 놀라게 하였고, 이어 그를 이식쿨의 서쪽에 있는 추 강가에서 대파하여 타슈겐트(Toshkent)로 달아나게 했다. 타슈겐트인들은 아사나하로를 잡아서 중국으로 보냈다. 659년에는 도만(都曼)이 소륵(疏勒 = 카슈가르)·주구파(朱俱波 = 카르가리크)·알반타(謁般陀 = 타슈크르간) 등 3국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켰는데, 소정방은 안무대사(按撫大使)에 임명되어 반란을 평정했다. 이제 당나라의 천하는 천산과 파미르를 넘어가고 있었다.

한편 당은 백제공략전에 앞서 658년과 659년 고구려 서부 국경에 공격전을 감행하였다. 658년에는 영주 도독 정명진(程名振)과 설인귀가 고구려의 적봉진(赤峰鎭)을 습격해 함락하였으며, 659년 11월에는 계필하력(契苾何力)과 설인귀가 요동 지역을 공격하였다. 고구려는 방어력을 서부 국경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고, 당은 이로 인해 백제를 공략하려면서 고구려가 개입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양동작전을 구사했다.

중국의 서북면에서 소정방이 도만을 사로잡아, 낙양의 건양전에 바친 것이 현경 5년 정월. 그리고 곧바로 3월이 되자 소정방은 대총관(大摠管)에 임명되어 백제 전선에 파견되었다. 원정군의 숫자는 모두 13만의 대군. 이와 동시에 극동의 신라에서도 무열왕과 김유신이 이끈 신라군이 5월 26일 수도를 출발하여, 6월 18일에는 남천정(오늘날의 경기도 이천)에 이르렀다. 6월 21일 무열왕은 태자 김법민을 서해 덕물도로 파견하여 당군을 영접하게 하였다. 양측은 7월 10일, 백제의 수도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신라 최고의 명장 김유신이 이끄는 병력은 모두 5만. 당나라 부대의 절반 정도 되는 숫자였다. 김유신은 7월 9일, 황산벌로 나아갔고, 당군은 덕물도에서 10여 일 이상 항해의 피로를 풀고 휴식을 충분하게 취한 뒤, 백강구(白江口)를 바라보고 진격하였다.

서쪽과 동쪽에서 도합 20여만에 가까운 대군이 백제를 압박하고 있었다.

9.3 백제 조정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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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충(成忠)

나당연합군이 공격해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백제 조정은 패닉에 빠졌고, 어떻게 대응할지를 놓고 논란이 분분하였다. 주요 방어책으로 백제 조정에 제기되었던 것이 백강, 즉 금강 입구를 막아 적의 해군이 백강으로 진입하지 못하게 하며, 육로는 탄현을 봉쇄하는 것이었다. 이는 일전에 백제의 성충이 전에 같은 내용을 간언했고, 귀양을 가 있던 흥수(興首)에 자문을 구하자 이 계책을 또다시 개진하였는데 다른 귀족들이 반대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결과 적군은 이들 요충지를 큰 어려움 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성충과 흥수의 주장은 적군이 요충지에 진입하는것 자체를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에 비해 다른 귀족들은 적군을 요충지로 진입하게 한 뒤,말이나 배가 나란히 횡대를 지어 나아갈 수 없는 좁은 진격로의 중간에서 적군을 요격하자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편이 더 나은 판단이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실제로는 논란이 벌어지는 동한 신라군을 탄현을 무난하게 지나갔고, 백제군 5천여 명은 황산벌로 나가 이를 막으려고 하였다. 사령관은 계백(階伯)이었다.

9.4 황산벌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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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階伯)

전쟁에 나서기 앞서, 계백은 가족들이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한다며 자신의 일가를 몰살하고 비장한 각오로 전쟁에 나섰다.[23] 백제군은 황산벌의 세 개의 군영을 설치하여 서로 의지하며 방어 태세를 취하였다. 좌평 충상과 상영, 그리고 달솔이었던 계백이 각기 하나씩 군영을 지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24] 전투를 이끌던 중심은 계백이었다.

계백의 비장한 태도와 함께 백제군도 용맹하게 싸웠다. 7월 9일부터 10일까지 신라군은 4차례나 백제군을 공격했으나 백제군은 4번 모두 신라의 공격을 패퇴시켰다. 이에 신라군의 사기가 떨어지고 당군과의 합류 날짜를 맞추기 어렵게 되자 신라군은 화랑 반굴과 관창을 백제군을 향해 필마단기로 돌격시킨다. 

반굴은 처음 돌격 때 전사하고, 관창은 한 번 사로잡혔다가 풀려났으나, 다시 돌격하여 결국에는 사로잡히고, 계백도 이번엔 어쩔 수 없이 관창의 목을 베어 돌려보낸다. 이에 분노한 신라군이 백제군을 향해 마지막 공세를 펼친다. 그 전까지 4차례의 전투로 크게 소모되어 있던 백제군은 마지막 5번째 공세에는 버텨내지 못하고 3영이 붕괴되었고 충상, 상영을 비롯한 20여 명만 사로잡히고 계백을 위시한 결사대 5천은 전멸한다. 

백제군이 신라군의 진격을 저지한 것은 하루에 불과하다. 하지만 애초에 제대로된 방어진지도 아닌 3개의 군영에서, 당군과의 합류를 위해 최대한 공격적으로 나왔을 신라군을 상대로 4차례나 승리한 것은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고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다. 더구나 신라의 지휘관이 지난 1세기 동안 신라를 지탱하던 희대의 명장 김유신이라는것을 생각하면……

9.5 사비성 함락과 백제의 멸망 

그 사이 백강에서는 백제군이 강 입구를 막고 강변에 주둔하였는데, 당군이 강의 왼편 기슭으로 상륙하여 산 위로 올라가 진을 쳤고, 양군이 접전하여 백제군이 패배하였다. 만조때가 되자 당나라 해군은 일제히 강을 거슬러 진격하여 사비성 부근까지 나아갔고, 이곳에서 서진하는 신라군과 만났다. 그런데 양군이 합류하자마자 사단이 벌어졌다. 

소정방은 신라군이 약속한 기일을 하루 넘긴 11일에 도착했다고 역정을 내며 신라의 독군(督軍) 김문영(金文潁)을 참수하겠다고 나섰다. 그러자 김유신이 대노하여 소리쳤다.

“대장군(大將軍)은 황산(黃山)에서의 싸움을 보지도 않고 약속한 날짜에 늦은 것만을 가지고 죄를 삼으려고 하는데, 나는 죄가 없이 모욕을 받을 수 없다. 반드시 먼저 당나라의 군사와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깨뜨리겠다!”─三國史記 卷第五 新羅本紀 第五

이 당시 삼국사기의 표현으로는 김유신이 큰 도끼를 잡고 군문에 섰는데, 그의 성난 머리털이 곧추 서고 허리에 찬 보검이 저절로 칼집에서 뛰어나왔다.고 할 정도. 이런 기세를 보고 소정방의 우장(右將)이었던 동보량(董寶亮)이 슬쩍 소정방의 발을 밞고 "이러다 신라군이 변란을 일으키겠음.' 하고 주의를 주자 소정방은 김문영의 죄를 풀어주었다.

일단 상황을 봉합한 뒤 7월 12일, 양군은 사비성을 포위하고 소부리 들판에 진을 쳤다. 13일에 의자왕과 그 아들 효는 웅진성(熊津城)으로 달아났다. 웅진성이 산간에 위치한 만큼 방어에는 개활지는 사비성보다 유리할 수 있고, 사비성과 웅진성이 서로 의지하는 기각지세를 이루어 침공군에 대항하는 모양새를 취하려 했을 수도 있다.

일단 왕이 사비성을 떠나자 왕자 부여융(扶餘隆)과 대좌평 사택천복(沙宅千福) 등이 성을 나와 항복하였다. 사비성에 남아 있던 왕자 태가 즉위하였으나, 태자 부여효의 아들들이 불안을 느껴 항복하였고, 이제 더는 견디기 어려워진 부여태도 항복하였다.

그리고, 웅진성의 의자왕과 부여효도 항복하였다. 웅진성에 들어간지 단 5일만이었다. 이 때 예식진(禰寔進)이라는 인물이 사실상 왕과 태자를 사로잡아 항복을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25] 이 날은 당군이 기벌포에 상륙한 7월 9일부터 겨우 10여 일만인 18일이었다.

수백 년을 이어오며 한국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백제는 이로서 멸망하였다. 

10 백제 부흥운동 

10.1 백제 부흥운동의 시작 

한 나라가 망하면 승전국은 온갖 정복의 과실을 가지지만, 패전국은 비참한 처지로 떨어지게 되기 마련이다. 백제 땅은 여러 곳이 약탈당했다.[26][27] 또한 의자왕이나 부여융 등 또한 온갖 굴욕을 당해야만 했다. 그도 그럴만 한것이, 김춘추는 대야성 함락때 자신의 딸을 백제군 때문에 잃었던 것이다. 

8월 2일 현장에 도착한 무열왕은 소정방과 함께 상석에 앉고, 의자왕 등을 마루 아래 앉혀서 자신의 술을 따르게 하였다. 백제 신하 중에 이 모습을 보고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 이전에 김법민은 부여융을 자신의 아래 꿇게 해놓고 얼굴에 을 뱉으면서, "너의 아비가 나의 누이를 죽였다."고 비난했다. 부여융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땅에 엎드리기만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의자왕이 완전히 굴복했지만, 실제 전쟁은 아직 종식되었다고 보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신라군과 당군이 점령한 것은 사비성과 웅진성 등, 백제의 중심지 지역 뿐이었다. 이 지역을 제외한 백제의 군사적 역량은 아직 온전하게 남아 있었고, 당나라 군사들의 노략질이 겹쳐지면서[28] 백제인들은 계속해서 봉기했다.

두시원악(豆尸原嶽)에서는 좌평 정무(正武)가, 구마노리성(久麻怒利城)에선 달솔 여자긴(餘自進)이, 그리고 임존성에서는 복신(福信)·도침(道琛)·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이 봉기하였다. 소정방은 8월 26일 임존성을 공략하려했지만 실패하는 등 부흥군의 기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del>멸망 당하기 이전에 좀 이러지 그랬어</del> 

하지만 나당 연합군은 우선은 철수하기로 하였다. 이미 백제의 중심부는 공략당했고, 대규모 봉기를 주도할만한 왕과 핵심인사들은 이미 사로잡았다. 정통성을 한군데로 모으기 힘든한, 따라서 나머지는 힘을 합치기 어려운 잔병에 가까울테고, 좁은 백제의 수도권에 당나라와 신라의 대규모 부대가 모여있는것 또한 유지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당나라의 최대 목표는 고구려. 백제는 고구려를 치기 위한 징검다리일 뿐이었다.

신라로서도, 661년 초 전염병이 창궐하여 백제 부흥군을 진압하기 위한 병력 동원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 전염병은 당나라 원정군이 중국에서 가져온 전염병일 가능성이 있다.[29]

10.2 노도처럼 번지는 부흥군의 기세 

나당 연합군은 유인원(劉仁願)을 지휘관으로 한 당나라 군사 1만 명과 무열왕의 서자인 김인태(金仁泰)가 이끈 신라군 7천을 주둔군으로 남겨놓고 전면 철수를 시작하였다. 소정방은 귀국에 앞서 정림사 5층 석탑에 자신의 공적을 과시하는 글을 쓰고 의자왕 이하 왕족과 귀족 93인, 백성 1만 2천여 명의 포로를 끌고 9월 3일 귀국하였다. 의자왕은 낙양에서 당고종이 승자의 아량을 보여주는 도구로 이용되었다.

일단 나당 연합군이 대부분 철수하자 백제 유민은 기세를 탔다. 각지에서 일어난 봉기 가운데, 9월 23일 백제 부흥군이 사비 도성까지 진격, 나당연합군과 격전을 벌였다. 부흥군은 패퇴하였지만 사비성 남쪽 산에 버티면서 여전히 사비를 위협하였다. 10월 9일에는 무열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백제 부흥군을 공격하여 18일에는 이례성(尒禮城)을 점령했고, 이를 따라 백제 20여 성이 한번에 항복하였다. 또 30일에는 사비 도성에 있는 부흥군을 격파하여 우선 사비 주둔군에 대한 포위는 풀어 내었다.[30]

하지만 신라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음에도 백제 부흥군의 활동은 되려 더 거세졌다. 그 당시까지 부흥군의 움직임은 조직적인 면이 없었으나, 점차 임존성의 복신이 부흥 운동의 중심으로 떠올라 승려 도침과 함께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그는 소정방이 당나라에 개선하기 직전, 그를 막아내는 기염을 보이기도 했다. 

그 뒤 복신은 660년 10월, 왜 조정에 좌평 귀지(貴智) 등을 보내 당나라 포로 100여 명을 바치고 일본에 머물고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扶餘豊)[31]의 귀환을 요청하였다. 왜 조정은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12월에는 일본의 사이메이 덴노(齊明天皇)가 거처를 나니와(浪速)로 옮기고 무기와 군사 등을 점검하였으며, 이어 북큐슈의 쓰쿠시로 가서 백제 구원군을 보낼 계획을 세웠다.

당나라가 대고구려 전쟁의 준비에 열중하던 사이, 661년 2월 복신과 도침은 사비성을 재차 포위하였다. 아울러 웅진강구를 봉쇄하여 당의 보급로를 차단하려고 하였고, 이에 당나라 사령관인 유인원은 지난해 9월 웅진도독으로 임명되어 왔다가 갑자기 죽은 왕문도(王文度)의 병사를 다른 지휘관인 유인궤(劉仁軌)에게 맡기고, 그와 함께 방어에 나서는 한편,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당군은 웅진강구의 양편에 구축한 백제 부흥군의 목책을 격파하여 부흥군을 압박했고, 부흥군은 포위를 풀고 도침 등은 임존성으로 물러갔다. 한편 신라군은 이해 3월 두량윤성(豆良伊城)을 공략하려 했으나 백제 부흥군의 저항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어 주류성을 포위하였으나 백제 부흥군의 반격에 타격을 입고 퇴각하였고, 되려 이 패배의 여파로 백제 남방 여러 성들이 반기를 들어 복신에 귀속하였다.

복신은 주류성에 머물었고, 이 무렵을 전후로 주류성은 부흥군의 주요 거점으로 부각되었다. 사비 공략이 실패로 끝났지만 백제 부흥군은 오히려 더 세력을 떨쳤다. 

하지만 신라군, 그리고 무엇보다 백제 주둔 당나라 군은 부흥군보다도 고구려가 더 큰 목적이었다. 따라서 계속해서 병력을 투입, 전투를 지속할 형편은 못 되었다. 신라군은 백제를 무너뜨리는게 가장 큰 목표였지만, 평양성 공략에 나서는 당군의 식량을 보급하고 또 백제 주둔 당군에도 보급해야 했기 때문에 여력이 부족했다. 따라서 나당연합군은 일단 대고구려전 이후로 모든 것을 미루고, 백제 지역에서 현상유지에 들어갔다.

이에 따라 당군은 사비성에서 방어에 유리한 웅진성으로 사령부를 옮겼고, 신라와의 수송로 확보에 주력하였다. 이 사이에 부흥군은 661년 9월, 왜국으로부터 부여풍이 돌아오자 그를 왕으로 옹립하였고, 백제의 서부와 북부 지역, 남부 지역등이 복신에 호응하였으며, 왜국의 원병 5천여 명까지 도착하여 기세가 대단해졌다.

10.3 2차 고당전쟁과 유인궤의 전략 

당나라에게 있어서, 실질적으로 백제와의 전쟁 따위는 어디까지나 고구려를 집어삼키기 위한 준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당나라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고구려를 꺾어버리는 것이었고, 백제 원정 역시 고구려를 꺾어버리기 위한 필요성에서 시작하였다.

백제 공략전에서 해로를 통한 작전이 성공하였고, 병력 손실도 경미한데다, 병사들의 사기가 한껏 달아오르자 당고종은 660년 12월 15일 고구려 원정 계획을 발표하였다.

龍朔元年, 大募兵, 拜置諸將, 天子欲自行, 蔚州刺史李君球建言: 「高麗小醜, 何至傾中國事之? 有如高麗旣滅, 必發兵以守, 少發則威不振, 多發人不安, 是天下疲於轉戍. 臣謂征之未如勿征, 滅之未如勿滅.」 亦會武后苦邀, 帝乃止. 八月, 定方破虜兵於浿江, 奪馬邑山, 遂圍平壤. 明年, 龐孝泰以嶺南兵壁蛇水, 蓋蘇文攻之, 擧軍沒, 定方解而歸. 

顯慶 3년高句麗 寶藏王에 다시 名振을 보내어 薜仁貴를 거느리고 高句麗를 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2년 뒤에 天子가 百濟를 평정하였다. 이에 左驍衛大將軍 契苾何力·右武衛大將軍 蘇定方·左驍衛將軍 劉伯英에게 명하여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浿江·遼東·平壤道로 각각 진군하여 高句麗를 치게 하였다. ─ 新唐書 卷 220 東夷列傳 第 145


이어서 661년 정월 하남, 하북 등지에서 모병한 4만 4천여 명을 평양 루방(鏤方) 방면으로 진발하게 하고, 같은 달에 소사업(蕭嗣業)을 부여도행군총관(扶餘道行軍摠管)으로 삼아 회흘(回紇)(위구르 제국) 등 여러 유목민 집단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4월에 당고종은 철륵 출신의 계필하력을 요동도행군대총관, 소정방을 평양도행군대총관, 임아상을 패강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총 35도(道) 병력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아주 밞아 버리려고 하였다. 

아울러 6월, 당에서 숙위하던 김인문을 귀국시켜 신라의 문무왕에게 군사작전 날짜를 알리고 출병을 요구하였다. 이 달에 부왕인 무열왕이 병사함에 따라 바로 즉위한 직후였지만, 문무왕은 빠르게 응해 7월 17일, 신라의 영웅인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한 북벌군을 편성하였다. 이어 8월에는 스스로 제장을 거느리고 남천주로 나아갔고, 그 와중에 저항하던 옹산성과 우술성 일대의 백제 유민군을 진압하였다. 이 때, 웅진성에 머물고 있던 당나라의 유인원도 일부 당군을 끌고 해로를 통해 혜포(鞋浦)로 와서 그곳에서 남천주로 나아가 신라군과 화합하였다.

당나라 군의 행로나 전쟁 양상은 기록이 적어 확인하기 힘들다. 소정방이 661년 8월, 패수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마읍산을 점령하고, 평양을 점령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보다 뒤인 9월, 계필하력이 압록강에서 연남생(淵男生)이 이끄는 고구려군을 돌파하기 위한 전투의 기록이 보인다. 그렇다면 소정방은 당 본토에서 요동으로 진군하여 압록강을 돌파하여 간 것이 아니라, 해로로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으로 진격하였다는 식으로 볼 수 있다. 이런 견해라면 계필하력의 움직임은 소정방의 움직임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 고구려 방어군을 끌어내려는 의도로 볼 수도 있다.

그런데 갑자기 서부 몽골 방면에 있던 철륵이 당나라에 대항하여 일어났고, 철륵 출신인 계필하력이 급히 철군하여 싸우러 나갔다. 소정방은 갑자기 오도가도 못하고 고립되어 버렸고, 그 상태에서 평양성 포위를 지속하였다.

평양성은 쉽게 함락되지도 않았고 싸움은 장기화되었다. 게다가 날씨도 점점 추워지고 식량 공급이 매우 빈곤해졌다. 이에 당고종의 사신에게 칙서를 받은 문무왕이 김유신을 보내어 쌀 4천 석, 조 2만 2천 석을 평양으로 보내게 하였다. 김유신은 최고 권력자이자 이제 완연한 노장이었지만 강건하게 직접 현장으로 출동했고, 또한 웅진성의 당군이 식량이 바닥나자 신라는 전력을 기울여 군대와 보급품을 보냈다.

신라가 보급을 위해 필사적일 무렵, 평양의 당군은 고립상태에 빠졌고, 고구려군이 반격을 하기 시작했다. 패수로 흘러가는 지류인 사수(蛇水)에서, 연개소문은 당나라의 옥저도행군총관 방효태(龐孝泰)를 전사시켰고 그의 아들 13명도 죽였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12월의 혹한으로 대동강이 얼어붙은 것을 이용한 평양성으로의 총공세도 결국 실패로 끝났고, 소정방군은 위기에 처한다.

고려(고구려)인이 말하기를 '12월에 고려국에서는 추위가 매우 심해 패수가 얼어붙었다. 그러므로 당군이 북과 징을 요란하게 치며 운거와 충팽을 동원해 공격해왔다. 고려의 사졸들이 용감하고 씩씩하였으므로 다시 당의 진지 2개를 빼앗았다. 단지 2개의 요새만이 남았으므로 다시 밤에 빼앗을 계책을 마련하였다. 당의 군사들이 무릎을 끌어안고 곡을 하였다. (그러나) 날카로움이 무디어지고 힘이 다하여 (당의 진지를) 빼앗을 수가 없었으니, 후회해도 어찌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라는 것이 이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라 하였다. ─ 일본서기 권27

위기에 빠진 당나라 부대에게 신라의 지원은 너무나 절실하였고, 간신히 퇴로를 확보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소정방은 계속 사람을 보내어 신라의 지원을 재촉하였다.

북상하던 신라군은 눈으로 큰 곤경에 처했고, 고구려군이 출몰하여 행군이 더뎌졌다. 신라군은 많은 희생을 내면서도 강행군하여 661년 2월 6일 당군 진영에 양곡을 운송했다. 신라군의 식량 공급을 받은 당군은 퇴로를 확보하여 바닷길로 철군하였고, 신라군도 압록강 이남에서 철병하였다.

이 전쟁의 양상을 보면 신라군의 지원이 없었다면 당나라 부대는 이견의 여지가 없이 전멸했다. 하지만 신라의 도움으로, 비록 당은 군사적 목표를 이루진 못했지만 전멸을 피하고 돌아갈 수 있었다. 이는 전쟁의 양상이 크게 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전이라면 배후가 막힐 것을 두려워 할 수도 없었던 평양성에 대한 직공도 가능해졌다. 고구려가 쓸 수 있는 전략적 패는 점점 숫자가 줄어들고 있었다.

고구려 공략전을 당나라가 실패했고, 피해가 누적되어가는 고구려 역시 마냥 기뻐할 형편은 아니었는데, 기세가 살아오른 것은 바로 백제 부흥군이었다. 부흥군이 기세가 오르자 웅진성의 당나라 군대는 고립되었고, 본국인 중국 본토와의 연락, 군량미를 비롯한 군수품 보급의 어려움에 시달렸다. 믿을 것은 우방인 신라의 현지 보급이었는데, 신라와의 교통로마저 백제 부흥군에게 자주 차단당하는 형편이라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런 기세를 부흥군은 한껏 드러내었고, 부여풍과 복신은 웅진성의 유인원에게 "언제 당나라로 돌아갈 것이냐, 마땅히 환송하겠다."면서 조롱하는 태도를 보였다. 실질적으로는 희롱하는 동시에 역으로 평화적 귀국을 보장하겠으니, 철병하라는 제의도 담겨 있었을 것이다.[32]

아무튼 당나라는 고립된 당군을 구원하고, 확대된 백제인의 저항을 어떻게 진압할지가 문제였다. 당고종은 웅진성에 틀어박혀 있는 유인원에게 칙서를 보내, 평양의 당군이 회군하는데 웅진성만 홀로 버티기는 어려우니 신라로 철수하고, 다시 신라와 상의하여 (당나라 본토로) 귀환하여도 좋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당연히 대다수 장졸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좋아라 했다. 만약 이때 당군이 철수했다면 전개가 묘하게 돌아갔을텐데, 검교대방주자사(檢校帶方州刺史) 유인궤가 반대하고 나섰다. 지금 철수하면 순식간에 백제는 다시 일어날 테고, 고구려를 무너뜨릴 기회는 영영 다시 오지 않게 되어, 결국 당나라의 대 동방 전략은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었다.

유인궤는 주장했다. 만일 고구려를 병탄하길 원한다면 먼저 백제를 멸해야 한다. 그리고 군대를 주둔시켜 배와 가슴을 눌러야, 즉 고구려의 뒤뜰을 압박하여야 한다. 신라로 들어가면 당군은 한갓 빌붙어 지내는 식객 따위에 지나지 않게된다. 백제 지역은 능히 제압할 수 있다. 병력을 증파해달라.

662년 7월, 유인궤는 신라군과 연계하여 진현성(眞峴城)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이것이 의미가 있는 것은 백제 부흥군의 포위망을 뚫고 신라에서 웅진성에 이르는 수송로를 재차 확보하였다는 것이다. 신라의 보급품이 조달되자 웅진성은 위기에서 벗어났다. 곧바로 당나라 조정은손인사(孫仁師)를 장수로 하여 7천의 지원병을 증파하였다.

유인궤의 제안과 활약으로 당나라의 백제 주둔은 여전히 이어지게 되었다. 

10.3.1 왜군이 고구려를 도우려 했다? 

2차 고당전쟁 당시, 왜군이 고구려를 지원하려고 했다는 전승이 전해지기도 한다.

661년에 왜국에서 고구려를 구하러 간 군의 장수들이 백제 가파리(加巴利)의 해안에 배를 대고 불을 피웠다. 재가 변해 구멍이 되어 작은 소리가 났는데 화살이 날며 우는 소리와 같았다. 어떤 사람이 고구려와 백제가 끝내 망할 징조인가라고 했다. ─ 일본서기 권27

그렇다면 과연 왜군이 실제로 고구려에 파견되었을까? 일본서기가 전하는 왜의 고구려 구원 움직임에 관한 기사가 있다.

이 달에 당과 신라인들이 고구려를 공격했다. 고구려가 우리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므로 장군과 군사들을 보내어 소류성(梳留城)에 웅거하게 했다. 이로 말미암아 당나라가 그 남쪽 경계를 침략할 수 없었으므로, 신라가 서쪽 진지를 떨어뜨릴 수 없었다.─일본서기 권27

즉 당시 왜 조정은 고구려를 구원하기 위해 왜군을 백제 부흥군 본거지인 주류성에 주둔시켰고, 그것이 실효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은 야마토 왜와 고구려의 군사동맹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런데 이로 말미암아 당나라가 그 남쪽 경계를 침략할 수 없었으므로, 신라가 서쪽 진지를 떨어뜨릴 수 없었다. 의 뜻은 분명하지 않다. 다른 기사 등에서 말하는 당시 상황과 맞물려지지 않는다. 따라서, 이 기사의 '고려'가백제를 착오로 적은것이라는 주장이 있다.[33] 곧 백제를 지원하려고 주류성에 왜군이 주둔함에 따라, 당군이 웅진성 이남의 구백제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지 못하였고 신라군 또한 서진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기사가 전하는 왜의 고구려 지원은 없었던 것이 된다.

혹은 백제 부흥운동에 왜가 개입하여 주류성에 주둔, 당과 신라를 측면에서 견제하여 고구려를 지원한 것을, 그런 식으로 표현했다고 보기도 한다. 백제에 주둔하던 왜의 장수가 고구려에 가서 군사 사항을 협의하고 백제 부흥군으로 돌아와 규해(糾解)에게 보고하였던 일도 있었다. 왜 조정은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는 것이 고구려를 지원하는 방략이 될 수 있다고 여겼을 수 있고, 결과적으로 어느정도 지원하는 면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때는 일본서기가 만들어질 시점 편찬차의 해석과 의미 부여라는 시각이 강하다. 왜국의 당면 과제는 눈앞에 전개되는 백제 부흥군 지원이었다.

10.4 백제 부흥군, 패배하다 

10.4.1 복신의 사정 

해가 지날수록 강해지는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인물은 바로 복신이었다. 백제 부흥운동을 이해하려면 복신을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복신의 단편적인 기록들은 또 차이가 있다.

8월에 왕이 조카 복신(福信)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니, 태종 이 백제와 신라가 대대로 원수를 맺어 서로 자주 침공한다고 하면서 왕에게 조서를 보내 말했다. ─ 三國史記 卷第二十七 百濟本紀 第五

무왕의 조카 복신(福信)은 일찍이 군사를 거느리는 장수였는데, 이때 중 도침(道琛)을 데리고 주류성(周留城)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켜서, 전 임금의 아들로서 왜국에 인질로 있던 부여풍 (扶餘風)을 맞아서 왕으로 추대하였다. ─ 三國史記 卷第二十八 百濟本紀 第六

백제 본기에서 복신은 무왕의 조카로 기술되었다. 그런데, 앞서 전자의 기사인 무왕 시대의 기사는 기본적으로 백제 사신에게 준 당태종의 새서에 근거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구당서는 그 당사자의 이름이 복신이 아니라 신복(信福)으로 되어 있다. 

"매번 듣건대 군사를 보내어 쉬지 않고 征討하며, 무력만 믿어 잔인한 행위를 예사로 한다 하니 너무나도 기대에 어긋나오. 朕은 이미 王의 조카 信福 및 高麗·新羅의 使人을 대하여 함께 通和할 것을 命하고, 함께 화목할 것을 허락하였오. 王은 아무쪼록 그들과의 지난날의 원한을 잊고, 朕의 본 뜻을 알아서 함께 鄰情을 돈독히 하고 즉시 싸움을 멈추기 바라오." ─舊唐書 卷 199 東夷列傳 第 149

후자의 경우는 신당서의 백제전 기사를 전제한 것인데, 신당서 백제전의 기록은 앞부분 조금을 제외하면 구당서 백제전 기사와 동일하다. 그래서 후자인 의자왕 시대의 삼국사기 기록은 구당서 백제전이 전하는 왕의 조카 복신의 기록과 부흥운동에 관한 기사를 조합하여, 전자의 신복과 후자의 복신이 다른 사람인데 동일인으로 간주하여 후자의 복신을 왕의 조카로 기술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또 660년 8월 거병하였을때 귀실복신(鬼室福信)의 관등에 대해 유인원기공비(劉仁願紀功碑)에서는 5위인 한솔이라고 하였고, 일본서기는 3위인 은솔이라고 하여다. 복신이 이미 무왕 28년인 627년부터 당에 사신으로 파견되는 등 이른 시기부터 활약하였고, 장수로 복무한데다, 심지어 무왕의 조카이기도 하다면 만년에 해당하는 660년에 여전히 한솔, 혹은 은솔이었음은 납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성씨가 부여가 아니라 귀실이라는 점도 이러한 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흑치상지의 흑치처럼 부여씨에서 분기되어 그 봉지에 따라 성을 취하였듯이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만년의 낮은 관등은 여전히 이해하기엔 어렵다.

만약 복신을 무왕의 조카로 여기기 어렵다면, 되려 복신에 대한 평가는 더욱 올라가야 한다. 달리 말하면 복신이 부흥운동의 중심으로 부상한 것은 출신 가계보다는 그의 군사적·정치적 역량에서 비롯된 면이 더 크다는 것이다. 

복신은 사비성 함락 직후 거병하여 임존성을 중심으로 점령군에 저항하였고, 그 명성이 자자한 명장 소정방 휘하 당군의 공격을 격퇴하여 부흥군의 기세를 크게 세웠다. 일본서기의 기록에서는 "오직 복신만이 신기하고 용감한 꾀를 내어 이미 망한 나라를 부흥시켰다."는 기록도 있다.[34]

복신은 정치적으로 기민하게 움직여 왜에 사신을 보내 왕자 부여풍의 환국과 왜의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였다. 부흥운동이 산발적으로 각지에서 일어나던 상황에서, 정통성을 지닌 의자왕의 적자인 부여풍을 영입하여 옹립하고 덤으로 왜국의 지원까지 확보함으로서 부흥운동의 구심력을 만들어내었다. 그에 따라 각지의 부흥군이 복신과 연계하게 되었다. 흑치상지와 사타상여가 거병하여 복신과 연계 호응한 것이 그 증거이다. 

특히 그는 군사적으로 나당 연합군과의 전투를 통해 군사적 역량을 확대함과 동시에 자신의 세력 기반을 구축하였고, 뒤이어서 부흥군 동료 장수인 승려 도침을 죽여 막강한 지위를 차지하는듯 했다. 하지만 이런 복신의 지나친 영향력은 결국 부여풍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10.4.2 부여풍의 사정 

부여풍은 부여풍장이라고도 하고, 일본서기의 기록으로는 631년 백제에서 왜국으로 건너갔으며, 의자왕의 아들이었다. 다만 631년은 백제 무왕 32년으로 의자왕 즉위 전이다. 그 때문에 실제로 건너간 시점에 대해 631년 설과 641년 설이 있다. 어느쪽이건 간에 부여풍은 왜국에서 십수년을 보내며 긴 시간을 지나다가, 660년 10월 복신이 왜 조정에 부여풍의 귀환을 요청하자 되돌아왔다. 귀환 시기도 661년 9월과 662년 5월로 기록이 제각각이다.[35] 

일본서기의 기록으로는 부여풍이 입국하자, 복신이 영접하여 맞이하면서 머리를 조아리고 나라의 정사를 모두 맡겼다, 고 한다. 일단 명목상으로는 부흥군의 모든 국정이 왕족인[36] 부여풍의 휘하에 귀속되었다. 그런데 합리적으로 생각해보자. 과연 정말로 부여풍이 실권자일까?

부여풍은 일본에서 최소 20년 이상을 보냈고, 백제 땅은 최근에야 발을 디뎠으며, 당연히 내부 세력 기반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복신은 반대로 소정방 등을 물리치며 자신의 능력으로 부흥군을 이끌었다. 부여풍이 귀환한 직후인 662년 정월, 왜국은 복신에게 화살 10만개, 실 500근, 포 1천 단, 쌀종자 3천곡을 보냈으며, 3월에 부여풍에게 포 300단을 주었다. 이것이 단순히 부흥군에 대한 지원이라면 별 문제는 없다. 그런데 '복신'과 '부여풍' 으로 구분을 짓고 복신에게 주요 군수 물자를 직접적으로 하사한것은, 그가 부흥군의 중심임을 현실적으로 왜국에서 인정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부여풍의 기반도 무시할 수 없다. 부여풍의 기반은 왜군으로, 그를 호송한 세력이기도 하다. 백제 부흥군에게 왜군과 백제 주둔 왜군은 가장 중요한 지원세력이었다. 

한편, 662년 12월, 백제 부흥군의 중심지는 주류성에서 피성(避城)으로 이동하였다. 피성은 김제로 비정된다.[37]

겨울 12월 병술 그믐에 백제왕 풍장은 그 신하 좌평 복신 등과 狹井連, 朴市田來津과 의논해 말하기를 

“이곳 주유라는 곳은 농토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도 메말라서 농사지을 땅이 아니고 막아 싸우기에 적합한 곳이다. 이곳에 오래 있으면 백성들은 굶주릴 것이니 피성으로 천도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피성은 서북으로는 옛부터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강물이 띠를 두르듯 흐르고 있고 동남으로는 깊은 수렁과 커다란 제방의 방벽에 의거하고 있으며, 주위에는 논으로 둘려져 있고 물꼬를 터 놓은 도랑에는 비가 잘 내려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이 삼한에서 가장 비옥하다. 의복과 식량의 근원이 하늘과 땅 사이에 감추어진 곳이다. 비록 지대는 낮으나 어찌 천도하지 않으리오.”하였다.

이에 에치노다쿠쓰(朴市田來津)가 혼자 나아가 간하며 말하기를,

“피성과 적이 있는 곳과의 거리는 하룻밤이면 갈 수 있습니다. 서로 이렇게 매우 가까우니 만약 예기치 못한 일이 있게 되면 후회하여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무릇 굶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망하는 것이 먼저일 것입니다. 지금 적이 함부로 오지 못하는 것은 州柔가 산이 험한 곳에 설치되어 있어 방어력을 모두 갖추고 있고, 산이 높고 계곡이 좁아 지키기에는 쉽고 공격하기에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약 낮은 곳에 거처한다면 어찌 굳건히 살겠으며 흔들리지 않음이 오늘날에 미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드디어 간청을 듣지 않고 피성에 도읍하였다.─일본서기 권 27


경제적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농산물이 풍부한 피성으로 천도하자는 말이고, 반대하는 측에서는 방어의 문제점을 말한 것이다. 결국 천도가 결정되었는데, 천도 후 663년 2월, 신라군이 백제 남부의 4개 주를 불태우고 안덕(安德)(오늘날의 충남 논산) 등을 점령하였고, 이곳이 신라군 수중에 들어가자 인접한 피성 지역은 바로 위협을 받게 되어 결국 주류성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이 사태 자체만 보면 병크 혹은 해프닝에 가까우나, 해석에 따라 백제 부흥군 내부의 권력 다툼과 연결 시킬 수도 있다.

인용문에서는 피성 천도를 주장한 사람이 부여풍이다. 그런데 도침이 제거된 이후로 복신의 권한은 대단히 막강하여, 부여풍은 심지어 단지 제사를 주재할 뿐 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는데, 그렇다면 이 일은 적어도 복신이 동의는 했다는 것이다. 복신이 동의한 일에 대해서 왜군의 장수가 반대하였다.

에치노다쿠쓰 등은 5천여 명의 병력으로 부여풍을 호송했고, 주류성에 주둔하였다. 왜군은 지원군의 본진이 도착할때까지 나당 연합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버티는 것이 중요한 목표일 테고, 그들에게 있어 이 전쟁은 전쟁의 차원에서 끝나는 단기적인 일이다. 즉 그들은 군사적 판단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하지만 토착 기반을 지닌 복신 등은 장기적 측면에서 백성을 결집할 정책을 추구하여야만 한다. 그에 따라 복신과 왜장들 사이에서 입장 차이가 있을 수 있고, 그 경우 부여풍은 자신의 기반인 왜군의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갈등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는, 비록 모든 근거가 추정에 불과할 뿐이지만 한번 해봄직한 가정이다.

혹은 진짜로 이 일은 부여풍이 주도하였을 수도 있다. 주류성 인근 지역은 부흥운동 초기부터 이를 주도하던 복신의 세력 근거지였으므로, 왜국에서 온 부여풍은 아무래도 거북하여 금강 남쪽의 평원인 김제 지역으로 천도하여 새로운 근거지를 구축하려고 했을 수 있는 것이다[38] 그리고 복신으로서도 한 방책이라고 여겨 특별히 반대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말이다.

이 모든건 추정에 불과할 뿐이다. 어느정도 확실해 보이는건 피성 천도가 실패한 뒤 복신과 부여풍의 갈등이 좀 더 노골화 되었다는 정도다.

신라군의 압박이 한층 강화되자 백제 부흥군은 왜국에 달솔 금수(金受)를 보내 구운을 요청하였다. 이에 왜국은 663년 3월 가미쓰케누노기미와카코(上毛野君稚)라는 장수에게 2만 7천의 병사를 이끌고 신라를 치게 하였다. 이해 5월에는 이누가미노기미라는 인물이 고구려로 가서 군사관계 일을 고하였다. 아마도 3워에 왜 있은 왜 지원군 본진 출병에 관한 사항을 알리고, 왜와 고구려가 남북으로 협동하여 나당연합군에 대응할 전략적 문제를 상의하려고 했던 것처럼 보이나, 고구려는 당시 평양성 침공을 막 저지한 후였기 때문에 백제 부흥군을 지원한 여력이 없었다.

여하간에 그는 이후 돌아와서 석성으로 가 규해(糺解)를 만났는데, 규해는 복신의 죄를 거듭해서 말하였다. 규해는 다름아닌 부여풍의 다른 이름으로 여겨진다. 부여풍이 왜군에게 복신의 죄를 계속해서 말하였다, 라는 것은 그가 복신 처리 문제에서 왜군의 지지를 요청했다고 볼 수 있다. 왜군 입장에서도 토착 기반세력을 지닌 복신보다 부여풍 쪽이 좀 더 기호에 맞을 것이다.

당나라의 기록에 따르면 양자 간의 불신이 심해지자 복신이 부여풍을 제거하려고 병을 칭하였고, 부여풍이 문병하러 오면 죽이려 하였다. 음모를 눈치챈 부여풍이 측근을 규합하여 기습, 복신을 제거하였는데 일본서기에서는 복신의 최후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였다. 

백제왕 풍장은 복신이 모반하려는 마음을 가졌다고 의심하여 손바닥을 뚫고 가죽으로 묶었다. 그런 뒤에 이를 어떻게 처결하여야 할지 몰라 여러 신하들에게 '복신의 죄가 이미 이와 같으니 목을 베는 것이 좋겠는가, 아닌가?' 라고 물었다. 이에 달솔 덕집득(德執得)이 '이 악한 반역 죄인은 풀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라고 하였다. 복신이 덕집득에게 침을 뱉으며 '썩은 개와 같은 어리석은 놈' 이라고 하였다. 왕이 시종하는 병졸들로 하여금 목을 베어 소금에 절이도록 하였다.─ 일본서기 천지천황 2년 6월

풍운아 복신은 이렇게 사라져 버렸다. 백제부흥운동에 있어 복신의 절대적인 비중을 생각하면 이는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일이었다. 복신의 목을 소금에 절이는 매우 강경한 처벌은 복신의 추종세력에 대한 경고의 차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일로 백제부흥군의 상호 신뢰와 헌신은 큰 타격을 입었고, 내분의 틈을 타 신라군과 당군도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부여풍이 믿을것이라곤 왜과 고구려의 지원 밖에 없었다.

10.5 주류성 공략전과 백강구 전투 


웅진성에 버티고 있던 당군은 여러모로 힘든 상황이었으나, 유인궤의 제안 이후 당나라 본토에서 손인사의 7천여 구원병이 도착하자 사기가 크게 올랐다. 이 7천의 병사는 산동 해안지역에서 선발되었다. 여기에 문무왕의 김흠순·김인문 등 장군 28명과 대병을 동원하여 합세, 웅진성으로 향하였다.

나당연합군은 웅진성에서 합동회의를 열어 최종 작전을 마무리 지었다. 육군은 문무왕이 이끄는 신라군과 손인사·유인원의 당군이 주류성으로 진격하고, 유인궤와 두상(杜爽), 그리고 부여융[40]이 지휘하는 해군과 식량 보급선단은 '웅진강에서 백강으로 가' 육군과 합류하여 주류성으로 진군하기로 합의하였다.

이 백강(白江)이 어느 강인가, 의 문제는 금강 하류설, 그리고 동진강(東津江) 설이 대립하고 있고, 이는 주류성의 위치 비정 문제와도 연결된다. 

일단 나당연합군의 이 당시 주력은 분명히 육군이었다. 당장 참가하는 인원들의 면면만 봐도 알 수 있는데, 문무왕과 손인사, 유인원이 이끌었고, 이에 반해 해군은 유인궤와 두상, 부여융 등이 이끌었다. 물론 유인궤는 나중에 가면 열전이 남을 정도로 유명해지지만, 이 당시는 유인원이 웅진도독부의 책임자였고 유인궤나 두상은 참모, 별장 급 인물들이었다.[41] 병력도 문무왕이 28명의 장수들을 동원한 만큼 숫자는 수만이 넘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나라 부대 중 웅진성에 주둔하던 유인원의 1만 명은 이미 오랜 전투로 피폐해졌을 것이고, 새로 투입된 병력도 손인사의 7천 정도라는 점을 보면 이 당시 육군의 핵심은 절대적으로 신라군이었다.

나당연합군은 진격로에 대해 논의했고, 여기서 결정된 것은 부흥군의 세력 아래 있는 성으로서 지금의 서천군 임천면의 성흥산성(聖興山城)으로 비정되는 가림성(加林城)은 사비성에 근접해 있지만 성이 가파르고 험준한 만큼 공략하려면 병력 손실이 많고 기일이 걸릴 것이므로 건너 뛰어버리고, 주류성을 직공하자는 계책이었다.

이 움직임은 부흥군 진영에도 알려졌다. 동시에 이호하라노기미오미(廬原君臣)가 이끄는 왜군 지원병 1만여명이 온다는 소식이 있자, 8월 13일 부여풍은 이를 맞이하러 백강구로 나섰다. 이 부대가 앞서 말한 신라를 친다는 2만 7천여 병력의 일부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 당시 파견된 부대는 사비기노강(沙鼻岐奴江) 등 두개의 성을 빼앗았다는 것만 알려져 있다. 상대적으로 신라 군이 백제에 집중되어 정작 본토가 약할테니 이를 공격하여 백제 지역에서 신라군의 공세를 풀어보려 했다는 시각이 있다.

그런데 그 부대 일부가 부여풍이 긴급하게 구원을 요청하자 진로를 급하게 바꿔 백강구로 달려갔는지, 혹은 또 다른 파견군이 도착했는지 기록 부재로 알기가 어렵다. 

8월 17일 무렵, 나당 연합군은 주류성을 포위했고, 170여척의 당나라 수군은 백강구에 이르러 육군에 공급할 군량을 하역한 후, 진을 치고 바다로부터 주류성을 구원하러 진입하려는 왜병을 대비하였다. 27일 왜 수군이 백강구에 도달하여 주류성에 온 일부 왜군 및 부흥군과 합세하였고, 백제의 기병이 강어귀 언덕에 포진하여 왜선을 엄호하였다.[42]곧이어 왜 선단이 당 수군에게 선공하였으나 불리해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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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경총요(武经总要)의 몽충(艨衝) 그림

당나라 수군은 그런 왜 선단을 추격하지 않았다. 이 당시 양측의 전력을 보면, 당나라 병선은 170여척. 왜선은 400여척이었다.[43] 접전은 다음날부터 벌어졌다.

먼저 신라의 기병이 백제의 기병을 공격했고, 왜의 해군이 당나라 해군에 돌격하였다.

일본 장수들과 백제왕은 기상을 살피지 않고 서로 일러 말하기를,

"우리들이 앞다투어 싸우면 저들이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 

라고 하면서, 중군의 군졸들을 이끌고 대오가 어지롭게 나아가 굳게 진치고 있는 당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당이 바로 좌우에서 배를 협공하여 에워싸고 싸우니 잠깐 사이에 일본군이 계속 패하여 물에 빠져 죽는 자가 많고 배가 앞뒤를 돌릴 수 없었다. 에치노다쿠쓰가 하늘을 우러러보고 맹세하고 분하여 이를 갈며 성을 내고, 수십 인을 죽이고 전사하였다. 이때 백제왕 풍장이 몇 사람과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로 달아났다.─일본서기, 천지 2년 8월


간단하게 결과만 말하자면 왜군의 대패. 그야말로 처참할 정도의 패배였다.

원인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견해들이 있다. 우선, 당나라 군대가 백강구에 도착한건 8월 17일로 충분히 여유가 있었고 주변 환경이나 전술 준비에 유리한데 비하여, 왜 수군은 뒤늦게 도착했는데도 불구하고, 앞의 일본서기의 기록처럼 기상도 살피지 않고 바로 전투에 들어간 전술적 실책이다. 구당서의 기록으로 이 전투에 대한 묘사를 보면 연기와 화염 혹은 바닷물이 모두 붉게 물들었다 같은 언급들이 보이는데 왜군의 선단들이 화공에 당해버렸다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화공에서 제일 중요한건 기상을 살피는 일이다.[44]

또 관련 기록을 보면 당나라 군대는 진을 형성하여 일정한 전술에 따라 절도 있는 움직임을 보여준것이 나타난다. 이에 비해 왜군은 그런 모습이 부족했는데, 왕조 국가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는데는 세계에서 최고로 이골이 난 중국이나, 여하간에 국가가 징발 편성하여 훈련시킨 신라군에 비해 왜군은 여러 지방 세력가들의 군대를 연합한 상태라 일원론적 지휘체계에 따른 군령들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중군의 군졸들을 이끌고 대오가 어지롭게 나아가 굳게 진치고 있는 당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라는 기록에서 보이듯, 왜군은 개별적인 전투에선 개인적으로 용맹하게 돌진하는 식으로 싸우려 했으나 이에 비해 중국은 집단 전술에 관해서는 일본이 신석기 시대였던 조몬시대(繩文時代) 무렵에는 이미 역량이 쌓일대로 쌓인 나라다. 왜군의 개별적인 용약 돌진은 당군의 두꺼운 진형을 뚫지 못하였고, 당의 전선이 정연하게 대오를 갖추어 좌우로 전개하여 왜선을 포위하자, 왜선들이 우왕좌왕 하며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혼란에 빠진 채 화공을 당하여 대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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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경총요(武经总要)의 해골선 그림

아예 이런 점을 토대로 백강 전투뿐만이 아니라 백제 부흥 운동에 파견된 왜군 전체의 성격을 보려는 경우도 있다. 662년 5월의 1차 파견군이나 663년 2월의 2차 파견군은 전·중·후 장군이 이끈것으로(1차에선 중군은 생략) 되어 있고, 백강구 전투에서도 중군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그런데 이게 상호간의 상하 통속관계를 나타내는것이 아니라 징병 지역에 따른 편제나 혹은 출병 시간에 따라 구분된 것으로 여기면서, 각 장수는 죄다 상호 병렬적 관계이며 3군 또는 2군 전체를 통솔하는 수직적 지휘계통 결여 상태였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면에서 볼 경우, 백강구 전투의 승패는 단순히 싸우고 잘 싸우고를 못 떠나서 양측 국가 체제의 상이함에서 비롯하는 군대의 편성원리와 성격 차이, 율령(律令) 제도에 기저를 둔 국가와 군대 운영 여부에 따른 차이에서 근본 원인을 찾는것이 되어버린다.

이에 대해서 출전한 장수와 사병의 출신지역이 매우 광범위함을 지적하기도 한다. 즉 당시 참전한 사병과 장수의 출신지가 일치하지 않음으로, 이를 중시하여 병사가 장수에 사적으로 속한 병력이 아니라 국가가 각지에서 징발한 병력이고, 장수는 조정 관원 중에서 파견하였음을 말한다고 해석하여, 이들 군대가 각지 호족의 무장력을 임시적으로 규합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전·중·후 표현 역시 보편적인 군대 편제이고, 출정군에 '대장군'의 존재를 전하는 기록이 중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 입각할 경우, 당시 왜군 부대의 성격을 지방 유력자 휘하 부대들의 임시적 연합이라고 보는 그간의 설은 백강구 전투에 관한 구체적 기사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그 무렵까지 왜국의 군대 동원 형태와 성격 이해를 토대로 설명한 것으로서,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논리적 비약이라는 것이다.

일단 당시 왜국이 율령제를 정착 시키기 전이기는 하다. 그것만으로 전투 패배에 대한 설명이 다 되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더 나아질 수 있는 부분이 그렇지 못하게 된 부분 정도는 있을 것이다.

또한 복신의 처형에 따른 부흥군 내부의 분열과 갈등 문제다. 왜군과 부흥군 사이의 갈등과 불협화도 상정 할 수 있다. 어느정도 전투력 저하의 요인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함선의 차이에 대한 고려다. 당나라의 여러 주력함들은 견고한 대형 군선이고, 몽충은 높고 커서 접근전에서 적을 내려다보며 싸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배끼리 부?혀 상대방 배를 부수는 방법에서도 우위를 가지고 있고, 해골선은 적선을 쳐서 격파하는 부분을 장치하여 접근전에서 유리하게 고안된 군선이다.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왜군의 함선들은 소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백강구 전투에 대해 생각해볼것은 이 전투의 비중을 어느 정도로 볼 것이냐는 문제이다. 이 전투를 동아시아 국제 정세를 판가름하는 결정적인 회전이라고 까지 보는 경우도 있지만, 이 전투의 주력이 당군과 왜군이었음을 매우 강하게 의식하여, 마침 임진왜란이나 청일전쟁처럼 고대 중국세력과 일본 세력이 한반도에서 양자간에 자웅을 겨룬 전투인것처럼 인식하려는 의도가 어느정도 있다.[45]

물론 이 전투를 고비로 왜 세력이 고대 한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니, 이는 한일관계사에서는 대단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전투 후에 일본이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인 율령제를 형성하였던 만큼, 일본사 전개에 있어서도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당나라에게는 이 전투는 별로 비중이랄게 없는 전투였다.[46] 이는 신라에게도 주된 전장은 아니었고, 전투 규모도 양측 모두 실제 동원한 병력이 만 수천여명 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백강구 전투에 관한 과도한 강조는 신라군의 존재를 홀시하게 하고, 신라는 피동적 존재로 파악하는 부작용이 있다.

백강구 전투가 벌어지기 전인 8월 13일, 신라군이 주축인 육군은 주류성 지역에 도착했고, 8월 17일부터 성을 에워싸고 공략전을 펼쳤다. 일본군이 백강구에 도착한것은 이때부터 10일 후였다. 또 부여풍은 신라군이 도착한 13일 휘하의 일부 왜군과 성에서 빠져나가 왜군을 맞이하러 떠났다. 성이 포위되기 전에 나가서 왜의 지원군과 연결, 성 안팎에서 협공하려 하거나, 최소한의 퇴로를 확보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앞서 설명한 대로 백강구 전투에서 부여풍은 대패했고, 주류성은 며칠 더 버텨보았지만 부여풍이 고구려로 달아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마침내 9월 7일 농성하던 백제 부흥군과 왜군이 항복하였다. 주류성의 함락 소식이 전해지자 인근 백제의 여러 성도 잇따라 투항해버렸고, 좌평(佐平) 여자신(余自信), 달솔(達率) 곡나진수(谷那晉水) 및 억례복류(憶禮福留)와 목소귀자(木素貴子) 등이 많은 백제인과 함께 퇴각하는 왜군을 따라 일본 열도로 망명하였다.

그런데 이례적인 기록이 있는데, 이 백강구 전투 당시 탐라(耽羅) 국사가 포로로 잡혔다는 것이다.[47] 이 말은 탐라인이 어떤 형식으로든 전투에 참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탐라가 동성왕(東城王) 시기에 백제에 귀복하였고, 백제 멸망 후인 661년 5월에는 왜국에 '왕자' 아파기(阿波伎) 등을 보냈다고 한다. 그 해 8워에는 당나라에 조공사를 보냈고, 문무왕 2년에는 탐라국주 좌평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신라에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백제 멸망 이후 급변하는 주변 정세를 탐라국 나름으로 탐색하려는 움직임으로 보인다.

백강구 전투 현장에 탐라인이 있었음은 탐라인이 백제와 왜 측에 가담하였던것으로 보이는데, 탐라국사가 잡혔다는 이야기로 보아 군사적인 참여는 아닌것으로 보이고, 백제 부흥군에 보낸 사절로 보인다. 

부흥 운동의 핵심이었던 복신이 비참하게 죽었고, 왜군의 지원군마저 모조리 박살나고 주류성이 함락된 시점에서 백제의 부흥운동은 사실상 실패가 결정되었다고 불 수 있다. 하지만 임존성에서는 지수신(遲受信)이 끝까지 저항을 계속하였다. 그러자 당군이 한때 백제 부흥군의 장수였던 흑치상지와 사타상여를 전면에 내세워 압박하자, 마침내 연말에 임존성이 함락되었고 지수신은 고구려로 달아났다. 

이로 만 3년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백제 부흥 운동은, 완전히 종결되었다. 

10.6 에필로그 

백제는 멸망했고, 부흥 운동도 실패하여 역사속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치열하게 저항하던 일부 백제인들 중, 많은 숫자가 왜로 망명하였다. 지배층이 아닌 일반 민중 중에서도 바다를 건너간 사람들이 있어, 지금의 도쿄 일대의 관동지역인 동국에 거주하던 백제인 2천여명에게 663년부터 3년간 식량을 왜의 조정에서 공급하기도 하였다.

조국이던 백제는 완전히 사라졌고, 이제 다시 일어날 방법도 없었다. 왜로 떠나간 백제인들은 이제 돌아올 곳이 없었고, 일본 땅에 남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백제인에서 일본인으로 동화되었다.

왜로 망명한 백제인 가운데 상당수는 자신들의 재능을 최대한 활용하여 왜 조정에 등용되었다. 665년, 달솔 답발춘초(答鉢春初)는 장문성을, 달솔 억례복류와 사비복부(四比福夫)는 다자이후의 방어를 위해 쌓은 오오노성과 연성의 축초 책임을 맡았다.

671년에 목소귀자·곡나진수·억례복류·답발춘초 등은 병법에 밝다는 점을 평가해 대산하(大山下)의 관위가 주어졌다. 좌평 여자신과 사택소명(沙宅紹明)은 법관대보(法官大輔)에 임명되었다. 그 이에 몇몇은 의약, 오경, 음양 등에 밝다는 재능을 인정받아 관위를 받았다.

백강구 전투 이후 망명한 그들은 일본에서 전문인으로 능력에 대한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일본 조정의 배려에 의지하여 살아갈 수 밖에 없었고, 여기에 기댈 수 밖에 없었다. 백제 부흥과 고국 복귀를 바라더라도, 자력으로는 이를 구체화할 역량 같은건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자연스럽게 사라져갔다. 일본이라는 바다에 파묻힌 백제인으로서 말이다.

11 고구려, 무너지다 

11.1 연개소문의 사망과 후계자 구도 

백제의 멸망은 고구려에게도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당나라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력해졌고 그들을 견제할 수 있는 중국 서북과 북방의 이민족들도 모조리 당군의 발길 아래 무릎을 꿇었다. 왜군은 백강구 전투에서 괴멸당했고, 이제 동아시아에 고구려를 도와줄 수 있는 세력이라고는 단 하나도 남지 못했다. 이미 고구려는 수나라 시기부터 이어진 끝없는 전쟁, 전쟁, 전쟁으로 이미 나라는 피폐해져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외부적 요인이 끝을 모르고 악화되는데 내부에서도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연개소문은 막리지, 대모달로서 군사권을 장악하여 국정을 주도하였다. 과도기를 거친 후엔 대대로가 되어 귀족회의를 통해 국정을 운영하는 방식을 부활시켰는데, 공고해진 자신의 권력을 귀족회의라는 공식적인 기구를 통해 행사함으로서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연개소문은 뒤이어 아들에게 자신의 권력을 넘겨주기 위한 조처를 취하였다.

장남인 연남생은 묘지명에 따르면 이미 15살에 중리소형(中裏小兄)을, 18살엔 중리대형(中裏大兄), 23살엔 중리위두대형(中裏位頭大兄)이 되었으며 이듬해 장군직을 받았고, 28세에는 막리지 삼군대장군이 되었으며 32세에 태막리지가 되어 군국을 총괄하였다. 이는 연남산도 비슷하며, 연개소문의 아들들은 아버지를 뒤이어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연남생이 태막리지가 될 무렵 연개소문이 사망하였다. 연개소문은 세 아들 중 누구 한명을 골라 권력을 집중시키지 않았고, 세 아들 모두 군국의 운영에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 이는 그가 죽은 후에 권력 투쟁을 야기할 수도 있는 조치였다. 물론 세 아들이 협력을 하며 외적을 물리친다면야 죽은 연개소문이나 고구려 입장에선 아주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것이 어떻게 사람 마음대로 되겠는가. 특히나 자식 일이란 마음대로 안되는게 세상 이치다.

이 달에 고려 대신 개금이 죽었다. 그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유언하기를 '너히 형제는 물과 고기처럼 화합하여 작위를 둘러싸고 다투지 마라. 만약 그렇지 못하면 반드시 이웃 나라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라 하였다. ─ 일본서기 권 27

실로 그렇게 되었다. 그저 웃음거리가 되는것보다는 더 심각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11.2 남생의 반란 

연씨 집안의 장남 연남생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최고 집권자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666년 초, 지방의 여러 성을 순시하러 나가면서 수도의 일을 두 동생에게 일임하였다.

그런데 수도를 비운 사이 두 동생에게 어떤 사람이 형인 남생이 그들을 미워하니 먼저 도모하는 것이 옳다고 이간질하였고, 남생에게는 두 동생이 형이 수도로 돌아오면 권력을 빼앗을 것을 두려워하여, 형을 몰아내려 한다고 참소하였다. 남생은 그런 말을 듣자 불안함을 느껴 평양으로 사람을 몰래 보내 두 동생의 동태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 사람이 남산과 남건에게 사로잡혔다. 두 동생에게 있어서는, 형이 자신들을 의심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다.

위기의식을 느낀 남산과 남건은 즉시 평양으로 돌아오는 남생을 가로막아 오지 못하고 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졸지에 권력에서 밀려난 남생은 급히 부수도였던 국내성으로 달아나 그곳에 자리를 잡고 동생들과 대결하였다. 하지만 국내성 세력만으로는 수도 탈환이 어려웠고,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해지는 처지에 초조해하다가, 결국 당나라에 나라를 들어 항복하는 길을 택하였다.

남생은 대형 불덕(弗德)을 당나라에 파견하였고, 오골성을 공격하였다. 오골성 공격은 쉽지 않았고, 당나라는 고구려의 최고 집권자가 느닷없이 투항하겠다고 하자, 전혀 예상외라 쉽게 믿어주지 않았다. 다급해진 남생은 다시 서북쪽으로 소자하 유역을 거쳐 혼하 방면으로 나가 대형 염유(冉有)를 재차 보내 투항의 의지를 밝혔고, 여름에는 아들인 연헌성(淵獻誠)을 보내 당에 거듭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제 당나라가 보기에도 남생의 투항은 분명해졌다. 일단 확신이 생기자 당은 적극적으로 나섰고, 계필하력을 파견하여 남생을 구원하였다. 666년 9월, 요하를 건너 침공해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남생군과 조우하였고, 남생은 가물(可勿)·남소(南蘇)·창암(倉巖) 등의 성을 들어서 당나라에 바치고 투항하였다.

남생은 또 국내성 등 6개 성을 바쳤는데, 이렇게 되자 고구려 서북부 지역 깊숙이 당의 세력권이 뻗쳐서 들어온 형상이 되었다. 고구려 중앙정부는 군대를 파견하여 남생을 공격하려 했지만, 고구려의 옛 수도인 국내성은 압록강 중류 지역의 요새로 외부에서 공략하기에 힘들었으며, 무엇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고구려 최고 집권자였던 남생이 적이다 보니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667년 남생은 직접 당나라에 입조하였다.

연남생은 고구려의 최고 집권자였고, 연개소문 생전부터 단계를 밞아 올라가면서 이 자리에 오른 만큼, 고구려 내부의 각종 기밀이나 정보에 대해서는 빠삭했다. 더구나 남생이 당나라에 투항한것도 형제간의 원한인 만큼 어떤 가치나 이념보다도 강한, 복수심이라는 요소 때문에 그는 당나라에 적극 협력하였다.

이미 고구려가 피폐해진 것은 몇십년도 훨씬 지난 일이다. 전쟁은 끊어질 날이 없었고, 당나라의 압력은 가공할만 했으며, 백제 마저 절망적으로 사라졌고, 백제 부흥군도 말라버렸다. 왜군은 또한 한반도에서 모조리 철수했다. 몽골 고원에는 고구려를 도와줄 세력이 단 한 세력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집권층의 분열이 벌어지자, 누가 보아도 고구려의 패망은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그 기미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것은 고구려인들 본인들이었다.

666년 12월,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淵淨土)는 자신의 관할 지역인 12성을 들어 신라로 투항하였다. 이 12성은 지금의 강원도 북부와 함경남도 남부 일대였다.

기록의 부재로 이 형제들의 다툼이 벌어지며 분열되는 과정에서 어느 편이 먼저 대립을 촉발시켰는지, 그 중간에서 부추긴 주체들이 과연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형제들이 분열하고 그 과정에서 당이나 신라의 공작이 있었을 수는 있다. 이미 20년 동안의 연개소문 집권기를 거친 고구려의 정치기구는 이 분열의 대립에서 별다른 역할을 한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왕이나 귀족회의 등 어떠한 권력 장치도 이 과정에서 작용하지 못했고, 갈등을 조정한다던가 혹은 어느 한 편으로 힘을 몰아주어 권력의 혼돈 상태가 빨리 종결되게 하는 일에도 실패하였다.

11.3 평양성은 불타오르고 

연남생의 투항이라는 절호의 기회를 이용, 당나라는 666년 12월, 이세적을 사령관으로 한 대규모 원정군을 투입하였다. 667년 2월 이세적이 이끈 대군은 요하를 건너 신성을 포위하였다. 신성의 고구려군은 치열하게 항전했지만, 마침내 9월에 성내에 투항자가 있어 성주를 묶고 항복하여 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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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락시킨 신성에 고간(高侃) 등의 장수를 두어 지키게 한 이세적은 주력군을 이끌고 요동성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이에 대응해 남건은 고구려군과 말갈군을 파견하여 신성 탈환을 시도하며, 한편으로는 소자하 유역의 목저성·창암성·남소성 등을 공격하여 재차 고구려 중앙 정부에 귀속시켰다. 그렇게 되자 신성의 당군과 연결이 차단된 국내성 지역의 남생군은 고립되었다.

만일 이 작전이 유효하게 전개되었다면 고구려는 국내성 지역을 회복하고 신성을 타환, 이세적의 군대를 북쪽에서부터 압박하고 보급선을 위협하면서 지구전을 펼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은 그렇게 희망사항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신성을 공격하던 고구려군은 당군에게 격파 당했고, 나아가 계필하력과 설인귀는 당군을 이끌고 소자하 유역에 진출, 고구려군을 박살내고 남생군과 다시 조우하였다. 이에 당군은 신성을 중심으로 동으로는 국내성에 이르는 넒은 지역을 확보하고, 압록강 이북의 고구려 영역을 남북으로 양단하는 형세를 구축하였다. 당군은 이 축을 중심으로 점령지의 폭을 확대하면서 고구려의 숨통을 조였다.

이세적이 이끄는 당나라 본대는 신성을 떠나 16개 성을 한번에 쓸어버린 후, 압록강 하구에 있는것으로 알려진 대행성(大行城)으로 나아갔다. 이 진역에 국내성 방면으로 진격하던 계필하력의 당군도 오골성을 지나 대행성으로 나아가 이세적의 군단과 결합하였다.

이미 여기까지만 해도 고구려는 시망에 가까운데, 신라군마저 북진을 개시하였다. 667년 이세적의 당군이 요동을 공격할때 신라는 파진찬지경(智鏡)과 대아찬 개원(愷元)을 요동 전선에 파견하였고, 당으로부터 평양성 공략전에 신라군이 합류해줄 것을 요청받았다. 이에 따라 문무왕은 8월 김유신 등 장군 30여명을 거느리고 수도를 떠나 9월 한성정(漢城停)에 도착하여 당군이 평양으로 오기를 기다렸다. 같은 시기 당나라 장군 유인원과 신라 장수 김인태는 각각 백제 지역에 주둔하던 당군과 신라군을 거느리고 비열도(卑列島)를 따라 북진하였다.

10월 2일, 이세적은 평양성 북 2백여리 지점까지 도달하였다. 그리고 촌주 대나마 강심을 거란병 80여기와 함께 한성에 파견, 신라군의 진격을 촉구하였고, 이에 응한 문무왕은 북진하여 11월 11일, 장새에 이르렀다. 그런데 11월 이세적의 군대가 회군하였다는 소식을 들어 별 소득도 없이 철수하였다.

평양성 일대에서 당군이 철수하였지만, 당나라 군이 본토로 철수한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듬해 668년의 작전은 다시 요동에서부터 진군해야 한다. 하지만 668년 2월 설인귀는 당군을 끌고 북으로 진격하여 지금의 장춘 농안 지역에 있었던 북부여성을 공략하고 부여천 일대의 30, 40여성을 점령하였다. 당은 이 작전으로 요서의 연군 ─ 통정진 ─ 신성으로 이어지는 당군의 주된 보급선을 북에서 위협할 수 있는 고구려 세력을 제거하였다.

이는 설인귀의 당군이 신성 상변에 주둔하던 당군 본영에서 출발하여 북으로 진군했음을 말한다. 당군은 667년 11월 이후 당 본토와 연략이 용이한 요동의 신성과 요동성 일대로 전선을 축소하고, 국내성 일대의 남생군과 연결하여 방어에 임하면서 겨울을 버텨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영역에서 당군이 월동할 수 있음은 고구려의 저항력이 바닥에 바닥까지 약화되었음을 말한다.

충분히 휴식하고 보급을 받아 전력을 재정비한 당군은 668년 여름, 재차 평양성 공략에 나섰다. 신라군도 6월 21일 평양성을 향해 수도를 떠나 진발하였다. 이번에는 김유신은 고령에다 풍병에 시달리고 있어 수도에 머물면서 후방의 주요 문제를 총괄하게 하였다.[48] 

6월 25일에는 고구려의 대곡성과 황해도 신원군에 있는 한성 등 2군 12성이 웅진도독부에 항복하였다. 이제 한강 하류에서 대동강까지는 문이 훤하게 열려졌다. 7월 16일 문무왕은 한성주로 행차하여 독전하였다. 마침내 9월 21일, 신라군과 당군이 회합하여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고구려는 이미 물리적으로는 역량이 바닥난지 오래고, 정신적인 저향력도 지배층끼리의 내분과 투항 등으로 고갈된지 오래였다. 평양성 방어 임무를 총괄하는 승려 신성(信誠)이 당군에 내응하여 성의 문루에 불을 지르고 투항함에 따라 마지막 방어벽도 무너졌다. 연남건은 칼로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포로가 되었다.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 한 영역을 차지하고, 기나긴 세월동안 동아시아 세력권의 한 자리를 차지했던 고구려는 이렇게 멸망했다. 당나라 부대는 성에 올라 북을 쳤고, 성에 불을 질렀다. 둥둥 북치는 소리가 울려퍼지면서, 타오르는 불꽃과 함께 고구려는 무너져내렸다.[49] 

11.4 고구려 유민들의 에필로그 

고구려 멸먕 후 졸지에 '유민' 이 되어버린 고구려들의 행보는 몇 갈래로 나뉘어졌다. 평양성 함락 이후 이세적은 보장왕 이하 고구려 지배층을 포로로 잡아 회군하였다. 보장왕 등은 당군의 전승 기념 의식으로 당태종의 무덤에 포로로 바쳐졌으며, 당고종에게 사죄하는 의례를 올려야 했다. 당고종은 보장왕에게 벼슬을 주었다.

연씨 삼형제 중 남생은 고구려 공략에 힘쓴 군공을 인정받아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 벼슬을 받았고 남생의 아들 헌서도 관직을 얻었다. 평양성에서 일찍 항복한 남산은 사재소경(司宰小卿)에 임명되었다. 끝까지 저항한 연남건은 머나먼 중국 남부에 유배되었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은 평양성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고 설인귀에게 2만의 병사를 주어 주둔하게 하였다. 그런 뒤에 5부 176성 69만 호의 옛 고구려를 9도독부, 42주, 100현으로 재편하고 고구려인 가운데 투항하였거나 협력한 자들을 도독·자사·현령으로 임명하여 표면에 내세우고, 당나라인 관리가 실제적으로 통치하게 조처하고 안동도호가 이들을 총괄하게 하였다. 새로이 행정단위를 구획하는 등의 일에는 장안에 머물던 연남생이 깊이 간여하였다. 

안동도호부는 고구려인의 반발을 원천적으로 약화시켜 당의 지배를 원할히 하기 위한 방책으로, 부유하고 힘 있는 고구려인을 당의 내지로 대거 강제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감행하였다. 고구려 중심부 지역에 거주하던 유력한 민호 2만 8천 200백여 호가 강제 이주당했고, 이는 고구려인 사회를 뿌리채 흔들어버리는 일이었다. 

이에 고구려 유민 중 일부는 당의 지배에 적극적으로 무력 저항하였다. 또 다른 방책으로는 당의 지배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였는데, 전자의 경우는 검모잠의 봉기가 그 예에 해당한다. 요동지역에서도 고구려 유민의 봉기가 잇따랐다. 당태종의 침공을 저지했던 안시성이 주요 근거지로, 다만 유민들의 무력 봉기는 서로간의 조직력 부족과 당군의 대처때문에 673년 무렵까지는 거의 진압되었다. 

이러한 반당 저항 운동 과정에서 다수의 고구려 유민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나갔다. 첫째는 신라로 합류한 이들로, 원주지가 신라에 병합됨에 따라 귀속된 사람들과 연정토 등처럼 집단적으로 신라에 내투해온 이들이 있었다. 물론 전쟁 포로로 잡혀온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 부흥운동 과정에서 활약하던 사람들은 전황이 좋지 않아 대부분 신라군으로 합류하였다. 이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둘째는 발해가 건국이 되면서 발해인이 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고구려 멸망 후에도 계속 만주지역에 거주하던 집단과, 대조영 집단 처럼 요서 지역의 영주 방면에 옮겨져 있다가 동으로 탈주한 집단, 그리고 요동 방면에서 동부 만주 지역으로 옮겨온 사람들이 있었다. 세번째로, 일본 열도로 이주해간 집단도 이었다. 일본세기의 저자인 승려 도현처럼 668년 이전에 일본에 갔다가 고구려가 망해버려 아예 그곳에 머문 사람들도 있고, 대부분은 고구려 멸망 이후 일본 열도로 건너간 사람들이다. 

네번째는 당나라 내지로 강제 이주된 사람들이다. 세분하면 요서의 영주 지역에 정주하게 된 이, 농우도(隴右道) 방면 등 변경지대로 옮겨진 이, 회하 유역 등 강회 방면에 배정된 이들로 나뉘어지는데 농우도 방면을 보면 지금의 섬서성 서부, 감숙성 지역 등으로 많이 옮겨졌다. 이 지역은 티베트와 몽골고원의 유목민 세력의 연결을 차단한 긴 회랑지대로서, 당은 고구려인들의 군사력을 활용하기 위해 이 지역에 정착시키고 단결병(團結兵)으로 편성하였다. 단결병은 이 지역의 자위를 위한 일종의 지방병이었다. 이 사람들의 후예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이 고선지(高仙芝) 이다.

다섯번째로, 몽골고원의 유목민 사회로 이주한 사람들로, 당의 지배를 피해 집단적으로 옮겨갔는데 게중에는 고문간(高文簡) 처럼 묵철(默啜)의 사위가 되어 '고려왕 막리지'라 칭한 이도 있었다. 이들 중 고문간, 고공의(高拱毅), 고정부(高定傅) 등이 각각 이끄는 집단은 돌궐에서 내분이 일어나자 몽골고원을 떠나 당으로 내투하여 내몽골 지역에 정주하였다.

여섯째, 요동 지역에 그대로 머문 이들이다. 이 부류는 668년 이후 당의 안동도호부 통치를 받았는데, 여러 차례 저항과 당 내지로의 강제 이주를 겪였고, 많은 수는 동부만주나 몽골고원 및 신라로 이주해 안당도호부에는 약하고 가난한 소수만 남게 되었다.

676년 당은 한반도에서 철수한 뒤 요동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재건하기 위한 조치들을 취했다. 그 일환으로 보장왕이 677년 고구려 유민과 함께 요동으로 귀환하여 고구려 유민들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맡겼는데, 이 보장왕이 귀환한 후 얼마 안되어 속말말갈 등과 연결하여 당에 반대하는 거사를 도모하려 하였다. 하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당 내지로 유배되었고, 귀환 조치했던 고구려 유민은 다시 당 내지로 강제 이주되었다. 

11.5 말갈 인들의 행보 

다수의 말갈족은 오랫동안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었고, 상당수는 이런저런 경로로 고구려화 되었다. 당사자들이야 별 문제는 없겠지만 당나라와 같은 제삼자 입장에서 보면 고구려화 된 말갈인과 말갈족과 인접해서 살던 변경의 고구려인 등을 제대로 구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를테면 대조영에 대한 당나라 사서의 언급이 그렇다.

이렇게 관련이 깊다보니 말갈족은 고구려 지배 아래 고구려군에 많이 동원되었다. 당연히 고구려 멸망은 그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수나라 대의 말갈 7부 중에 백산(白山), 백돌, 안거골(安車骨), 호실(號室) 부 등은 분산되어 미약해졌다. 그 밖에 속말부는 속말수 유역이 거주하던 돌지계 집단 등 일부는 이미 그 이전에 수나라에 투항하여 당군에 종군하였다. 돌지계의 아들이자 나당전쟁에서 활약한 이근행이 가장 대표적인 경우이다. 속말부의 다른 다수는 고구려에 복속하여 대당전에 참여하였다. 걸사비우(乞四比羽)가 대표적이다.

668년 이후 말갈족의 기존 질서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고구려에 충성하던 유력 말갈족들 촌락들은 전란의 피해를 입어 약화되었고, 하위 촌락들이 이탈과 저항을 하였다. 668년 이후 월희부(越喜部), 철리부(鐵利部) 등 새로운 집단이 출현하였고, 고구려 세력권 밖에 있던 흑수부가 강성해졌다.[50]

또 나당전쟁이 한반도 남부에서 펼쳐지고 신라가 당나라의 공격을 멋지게 격파함으로서, 중·동부 만주지역은 당과 신라, 돌궐 등 어느 국가도 세력을 뻗치지 못하는 국제적인 힘의 공백지대가 되었다. 대내적으로도 고구려인과 말갈족의 여러 집단이 소규모 단위로 흩어져 자치를 영위하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이들 집단을 규합하는 새로운 정치적 구심력 형성은 7세기 말 요서지역에서 탈주해온 대조영 집단의 등장을 기다려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고구려가 버티고 있는 동안은 신라는 당나라의 직접적인 야욕에서 한발자국 물러나서 버티고 있을 수 있었다. 당나라의 목표가 고구려의 소멸인 만큼, 고구려가 멸망하지 않았는데 신라를 건드릴 순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고구려의 패망이 눈 앞에 보이자, 전쟁의 징조들이 속속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때에, 668년 9월 12일, 신라 사신 김동암(金東嚴)이 왜를 방문하였다. 신라와 왜의 국교가 단절된지 11년 만이었다. 자세한 목적은 전해지지 않으나, 김동암이 왜국을 찾은 시점이 고구려 멸망 직전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11월 5일 김동암은 귀국했고, 그 뒤 나당전쟁이 발발하였다. 이에 따라 김동암이 당시에 반당적인 주장을 했고, 이를 전제로 해서 양국의 화평과 국교 회복 제의가 있었으며, 왜가 동의했다는[51] 시각이 있다. 

하지만 당시 당 제국의 위세가 절정에 달했고, 구체적인 증거가 없으며, 무엇보다 신라가 국운을 거는 사업임에 분명한, 당나라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 의사를 표명하기에는 더욱 큰 국제적 계기가 필요했다는 시각 때문에 이에 대한 반발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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