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김춘추의 움직임
7.3.1 김춘추의 왜국 방문
7.3.2 김춘추의 당나라 방문
○ 二十二年, 又遣右武衛將軍薛萬徹等往靑丘道伐之, 萬徹渡海入鴨綠水, 進破其泊灼城, 俘獲甚衆. 太宗又命江南造大船, 遣陝州刺史孫伏伽召募勇敢之士, 萊州刺史李道裕運糧及器械, 貯於烏胡島, 將欲大擧以伐高麗. 未行而帝崩. 高宗嗣位, 又命兵部尙書任雅相·左武衛大將軍蘇定方·左驍衛大將軍契苾何力等前後討之, 皆無大功而還. ○ 22년에 또 右武衛將軍 薜萬徹 등을 보내어 靑丘道로 가서 치게 하니, 萬徹은 바다를 건너 鴨綠水로 들어가서 泊灼城을 함락하고 많은 포로를 사로잡았다. 太宗은 또 江南에 命하여 큰 배를 건조하게 하는 한편, 陜州刺史 孫伏伽를 보내어 용감한 兵士를 모집시키고, 莢州刺史 李道裕를 보내어 軍糧 및 器械를 운반하여 烏胡島에 쌓아두게 하는 등 장차 군사를 크게 일으켜 高麗를 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끝내 시행하지 못하고, 太宗은 죽었다. 高宗이 位를 이어받아서 또 兵部尙書 任雅相·左武衛大將軍 蘇定方·左驍衛大將軍 契苾何力 등에게 명하여 前後로 보내어 토벌케 하였으나, 모두 큰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 舊唐書 卷 199 東夷列傳 第 149 |
이런 방책과 함께 당태종이 645년 전쟁 이후로는, 대고구려전의 새로운 전략으로 주목하게 된 것이 고구려 서부 국경선 이외에 타방면에 제2전선을 구축, 고구려의 방어력을 분산시키고, 가장 중요한 군수품 보급의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세력을 찾는데 집중하였다. 따라서 앞으로의 고당전쟁의 향방에 있어서, 신라의 중요성이 급부상하게 되었다.
“선왕께서 정관(貞觀) 22년에 중국에 들어가 태종 문황제를 직접 뵙고서 은혜로운 칙명을 받았는데, ‘내가 지금 고구려를 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너희 신라가 두 나라 사이에 끌림을 당해서 매번 침략을 당하여 편안할 때가 없음을 가엽게 여기기 때문이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내는 바가 아니고 보배와 사람들은 나도 가지고 있다. 내가 두 나라를 바로 잡으면 평양 (平壤) 이남의 백제 땅은 모두 너희 신라에게 주어 길이 편안하게 하겠다’ 하시고는 계책을 내려주시고 군사 행동의 약속을 주셨습니다."─三國史記 卷第七 新羅本紀 第七 |
이 기록은 삼국사기 외에 보이지 않고, 어디까지나 당과의 개전을 합리화하기 위해 신라가 일방적인 주장을 펼친것에 불과하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김춘추와 당태종 간의 대화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별도의 공식적 기록으로 남지 않았을 수도 있으며, 당시 고구려 원정을 앞둔 당태종의 입장에선 그런 식으로 김춘추를 회유하려 할 수도 있다. 648년에 두 사람이 평양 이남 지역을 신라령으로 한다고 약속한다면, 이는 곧바로 바로 그때 당군이 백제 공략에 나설것을 약속했다는 의미가 된다.
9 백제 700년의 종말 ¶
9.1 백제 내부의 혼란 ¶
16년 봄 3월에 왕이 궁녀들을 데리고 음란과 향락에 빠져서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좌평 성충(成忠)이 적극 말렸더니, 왕이 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간하려는 자가 없었다. 성충은 옥에서 굶주려 죽었다.─ 三國史記 卷第二十八 百濟本紀 第六 |
삼천궁녀 이야기야 훨씬 후대에나 나온 야사이니 그렇다치더라도, 그 이전까지 해동증자라는 언급까지 나오며 좋은 면모만 보였던 의자왕이 갑자기 폭정을 저지르고 향락에 빠졌다, 라는 식의 언급이 나오는 것에 대해 '역사는 승리자의 것'이라는 식으로 신라의 의도적인 악마 만들기라고 보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의자왕이 신라를 마구 공격한 것은 신라인들에게 악마와도 같았고 말이다.
항차 밖으로 곧은 신하는 버리고 안으로 요사스러운 부인을 믿어, 형벌은 오직 충직스럽고 어진 자에게만 미치고 총애와 신임은 아첨하는 자에게 먼저 더해졌다. |
결정적으로, 신라나 당나라의 입김이 미치지 않은 일본의 일본서기에도 이러한 언급이 있다.
고려 사문 도현(道顯)의 일본세기(日本世記)[21]에 "7월에 운운, 춘추지(김춘추)가 대장군 소정방의 손을 빌려 백제를 협공하여 멸망시켰다."고 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백제는 스스로 망하였다. 임금의 대부인이 요사스럽고 간사한 여자로서, 무도하여 마음대로 권력을 빼앗고 훌륭하고 어진 신하들을 죽였기 때문에 이러한 화를 불렀다. 삼가지 않을 수가 있는가, 삼가지 않을 수가 있는가." 라고 하였다.─ 일본서기 권26 |
주목할만한 것은 지속적으로 언급되는 임금의 부인이 문제를 일으켰다는 표현이다. 정확히 누군가를 말하는지도 알 수 없고, 임금의 권한과 그 부인이 맞섰다는 것인지, 혹은 임금을 등에 엎고 횡포를 부렸다는 것인지 알 방법이 없다.[22] 여하간에 귀족들간에 분열을 낳고 무력감을 느끼게 할만한 국정운영의 난맥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모습이다. 일단 적어도 나당연합군이 공격해오려는 이 상황에서, 긍정적인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9.2 나당연합군의 진격 ¶
소정방(영화 황산벌) |
당나라는 대백제전에 앞서 위협요소를 먼저 제거하였다. 당의 서부지역에서 서돌궐의 아사나하로(阿史那賀魯), 즉 사발라(沙癖)가 노실필 부족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서부의 칸국을 부활시켰고, 곧바로 중국의 종주권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제거하거나 적어도 통제하지 않고는 한반도 방면의 작전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는데 어려움이 예상되었다. 당나라는 이에 따라 소정방(蘇定方)을 사령관으로 하는 원정군을 구성하여, 바람이 휘몰아치는 서북의 황야로 출정하였다.
"안개는 어디든지 어둡게 만든다. 바람은 얼음같이 사납다. 야만인들은 우리가 이런 계절에 원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신속히 진군하여 그들을 놀라게 해주자." ─르네 그루세,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 |
소정방은 준가리아의 에비 노르 근처에 있는 보로탈라 강에서 아사나하로와 조우하여 정말로 그들을 놀라게 하였고, 이어 그를 이식쿨의 서쪽에 있는 추 강가에서 대파하여 타슈겐트(Toshkent)로 달아나게 했다. 타슈겐트인들은 아사나하로를 잡아서 중국으로 보냈다. 659년에는 도만(都曼)이 소륵(疏勒 = 카슈가르)·주구파(朱俱波 = 카르가리크)·알반타(謁般陀 = 타슈크르간) 등 3국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켰는데, 소정방은 안무대사(按撫大使)에 임명되어 반란을 평정했다. 이제 당나라의 천하는 천산과 파미르를 넘어가고 있었다.
9.3 백제 조정의 대응 ¶
성충(成忠) |
나당연합군이 공격해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백제 조정은 패닉에 빠졌고, 어떻게 대응할지를 놓고 논란이 분분하였다. 주요 방어책으로 백제 조정에 제기되었던 것이 백강, 즉 금강 입구를 막아 적의 해군이 백강으로 진입하지 못하게 하며, 육로는 탄현을 봉쇄하는 것이었다. 이는 일전에 백제의 성충이 전에 같은 내용을 간언했고, 귀양을 가 있던 흥수(興首)에 자문을 구하자 이 계책을 또다시 개진하였는데 다른 귀족들이 반대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결과 적군은 이들 요충지를 큰 어려움 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9.4 황산벌 전투 ¶
계백(階伯) |
전쟁에 나서기 앞서, 계백은 가족들이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한다며 자신의 일가를 몰살하고 비장한 각오로 전쟁에 나섰다.[23] 백제군은 황산벌의 세 개의 군영을 설치하여 서로 의지하며 방어 태세를 취하였다. 좌평 충상과 상영, 그리고 달솔이었던 계백이 각기 하나씩 군영을 지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24] 전투를 이끌던 중심은 계백이었다.
9.5 사비성 함락과 백제의 멸망 ¶
“대장군(大將軍)은 황산(黃山)에서의 싸움을 보지도 않고 약속한 날짜에 늦은 것만을 가지고 죄를 삼으려고 하는데, 나는 죄가 없이 모욕을 받을 수 없다. 반드시 먼저 당나라의 군사와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깨뜨리겠다!”─三國史記 卷第五 新羅本紀 第五 |
이 당시 삼국사기의 표현으로는 김유신이 큰 도끼를 잡고 군문에 섰는데, 그의 성난 머리털이 곧추 서고 허리에 찬 보검이 저절로 칼집에서 뛰어나왔다.고 할 정도. 이런 기세를 보고 소정방의 우장(右將)이었던 동보량(董寶亮)이 슬쩍 소정방의 발을 밞고 "이러다 신라군이 변란을 일으키겠음.' 하고 주의를 주자 소정방은 김문영의 죄를 풀어주었다.
10.1 백제 부흥운동의 시작 ¶
10.2 노도처럼 번지는 부흥군의 기세 ¶
10.3 2차 고당전쟁과 유인궤의 전략 ¶
龍朔元年, 大募兵, 拜置諸將, 天子欲自行, 蔚州刺史李君球建言: 「高麗小醜, 何至傾中國事之? 有如高麗旣滅, 必發兵以守, 少發則威不振, 多發人不安, 是天下疲於轉戍. 臣謂征之未如勿征, 滅之未如勿滅.」 亦會武后苦邀, 帝乃止. 八月, 定方破虜兵於浿江, 奪馬邑山, 遂圍平壤. 明年, 龐孝泰以嶺南兵壁蛇水, 蓋蘇文攻之, 擧軍沒, 定方解而歸. 顯慶 3년高句麗 寶藏王에 다시 名振을 보내어 薜仁貴를 거느리고 高句麗를 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2년 뒤에 天子가 百濟를 평정하였다. 이에 左驍衛大將軍 契苾何力·右武衛大將軍 蘇定方·左驍衛將軍 劉伯英에게 명하여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浿江·遼東·平壤道로 각각 진군하여 高句麗를 치게 하였다. ─ 新唐書 卷 220 東夷列傳 第 145 |
이어서 661년 정월 하남, 하북 등지에서 모병한 4만 4천여 명을 평양 루방(鏤方) 방면으로 진발하게 하고, 같은 달에 소사업(蕭嗣業)을 부여도행군총관(扶餘道行軍摠管)으로 삼아 회흘(回紇)(위구르 제국) 등 여러 유목민 집단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4월에 당고종은 철륵 출신의 계필하력을 요동도행군대총관, 소정방을 평양도행군대총관, 임아상을 패강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총 35도(道) 병력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아주 밞아 버리려고 하였다.
고려(고구려)인이 말하기를 '12월에 고려국에서는 추위가 매우 심해 패수가 얼어붙었다. 그러므로 당군이 북과 징을 요란하게 치며 운거와 충팽을 동원해 공격해왔다. 고려의 사졸들이 용감하고 씩씩하였으므로 다시 당의 진지 2개를 빼앗았다. 단지 2개의 요새만이 남았으므로 다시 밤에 빼앗을 계책을 마련하였다. 당의 군사들이 무릎을 끌어안고 곡을 하였다. (그러나) 날카로움이 무디어지고 힘이 다하여 (당의 진지를) 빼앗을 수가 없었으니, 후회해도 어찌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라는 것이 이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라 하였다. ─ 일본서기 권27 |
위기에 빠진 당나라 부대에게 신라의 지원은 너무나 절실하였고, 간신히 퇴로를 확보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소정방은 계속 사람을 보내어 신라의 지원을 재촉하였다.
10.3.1 왜군이 고구려를 도우려 했다? ¶
661년에 왜국에서 고구려를 구하러 간 군의 장수들이 백제 가파리(加巴利)의 해안에 배를 대고 불을 피웠다. 재가 변해 구멍이 되어 작은 소리가 났는데 화살이 날며 우는 소리와 같았다. 어떤 사람이 고구려와 백제가 끝내 망할 징조인가라고 했다. ─ 일본서기 권27 |
그렇다면 과연 왜군이 실제로 고구려에 파견되었을까? 일본서기가 전하는 왜의 고구려 구원 움직임에 관한 기사가 있다.
이 달에 당과 신라인들이 고구려를 공격했다. 고구려가 우리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므로 장군과 군사들을 보내어 소류성(梳留城)에 웅거하게 했다. 이로 말미암아 당나라가 그 남쪽 경계를 침략할 수 없었으므로, 신라가 서쪽 진지를 떨어뜨릴 수 없었다.─일본서기 권27 |
즉 당시 왜 조정은 고구려를 구원하기 위해 왜군을 백제 부흥군 본거지인 주류성에 주둔시켰고, 그것이 실효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은 야마토 왜와 고구려의 군사동맹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런데 이로 말미암아 당나라가 그 남쪽 경계를 침략할 수 없었으므로, 신라가 서쪽 진지를 떨어뜨릴 수 없었다. 의 뜻은 분명하지 않다. 다른 기사 등에서 말하는 당시 상황과 맞물려지지 않는다. 따라서, 이 기사의 '고려'가백제를 착오로 적은것이라는 주장이 있다.[33] 곧 백제를 지원하려고 주류성에 왜군이 주둔함에 따라, 당군이 웅진성 이남의 구백제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지 못하였고 신라군 또한 서진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기사가 전하는 왜의 고구려 지원은 없었던 것이 된다.
10.4.1 복신의 사정 ¶
8월에 왕이 조카 복신(福信)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니, 태종 이 백제와 신라가 대대로 원수를 맺어 서로 자주 침공한다고 하면서 왕에게 조서를 보내 말했다. ─ 三國史記 卷第二十七 百濟本紀 第五 |
무왕의 조카 복신(福信)은 일찍이 군사를 거느리는 장수였는데, 이때 중 도침(道琛)을 데리고 주류성(周留城)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켜서, 전 임금의 아들로서 왜국에 인질로 있던 부여풍 (扶餘風)을 맞아서 왕으로 추대하였다. ─ 三國史記 卷第二十八 百濟本紀 第六 |
백제 본기에서 복신은 무왕의 조카로 기술되었다. 그런데, 앞서 전자의 기사인 무왕 시대의 기사는 기본적으로 백제 사신에게 준 당태종의 새서에 근거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구당서는 그 당사자의 이름이 복신이 아니라 신복(信福)으로 되어 있다.
"매번 듣건대 군사를 보내어 쉬지 않고 征討하며, 무력만 믿어 잔인한 행위를 예사로 한다 하니 너무나도 기대에 어긋나오. 朕은 이미 王의 조카 信福 및 高麗·新羅의 使人을 대하여 함께 通和할 것을 命하고, 함께 화목할 것을 허락하였오. 王은 아무쪼록 그들과의 지난날의 원한을 잊고, 朕의 본 뜻을 알아서 함께 鄰情을 돈독히 하고 즉시 싸움을 멈추기 바라오." ─舊唐書 卷 199 東夷列傳 第 149 |
후자의 경우는 신당서의 백제전 기사를 전제한 것인데, 신당서 백제전의 기록은 앞부분 조금을 제외하면 구당서 백제전 기사와 동일하다. 그래서 후자인 의자왕 시대의 삼국사기 기록은 구당서 백제전이 전하는 왕의 조카 복신의 기록과 부흥운동에 관한 기사를 조합하여, 전자의 신복과 후자의 복신이 다른 사람인데 동일인으로 간주하여 후자의 복신을 왕의 조카로 기술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10.4.2 부여풍의 사정 ¶
겨울 12월 병술 그믐에 백제왕 풍장은 그 신하 좌평 복신 등과 狹井連, 朴市田來津과 의논해 말하기를 “이곳 주유라는 곳은 농토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도 메말라서 농사지을 땅이 아니고 막아 싸우기에 적합한 곳이다. 이곳에 오래 있으면 백성들은 굶주릴 것이니 피성으로 천도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피성은 서북으로는 옛부터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강물이 띠를 두르듯 흐르고 있고 동남으로는 깊은 수렁과 커다란 제방의 방벽에 의거하고 있으며, 주위에는 논으로 둘려져 있고 물꼬를 터 놓은 도랑에는 비가 잘 내려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이 삼한에서 가장 비옥하다. 의복과 식량의 근원이 하늘과 땅 사이에 감추어진 곳이다. 비록 지대는 낮으나 어찌 천도하지 않으리오.”하였다. 이에 에치노다쿠쓰(朴市田來津)가 혼자 나아가 간하며 말하기를, “피성과 적이 있는 곳과의 거리는 하룻밤이면 갈 수 있습니다. 서로 이렇게 매우 가까우니 만약 예기치 못한 일이 있게 되면 후회하여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무릇 굶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망하는 것이 먼저일 것입니다. 지금 적이 함부로 오지 못하는 것은 州柔가 산이 험한 곳에 설치되어 있어 방어력을 모두 갖추고 있고, 산이 높고 계곡이 좁아 지키기에는 쉽고 공격하기에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약 낮은 곳에 거처한다면 어찌 굳건히 살겠으며 흔들리지 않음이 오늘날에 미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드디어 간청을 듣지 않고 피성에 도읍하였다.─일본서기 권 27 |
경제적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농산물이 풍부한 피성으로 천도하자는 말이고, 반대하는 측에서는 방어의 문제점을 말한 것이다. 결국 천도가 결정되었는데, 천도 후 663년 2월, 신라군이 백제 남부의 4개 주를 불태우고 안덕(安德)(오늘날의 충남 논산) 등을 점령하였고, 이곳이 신라군 수중에 들어가자 인접한 피성 지역은 바로 위협을 받게 되어 결국 주류성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백제왕 풍장은 복신이 모반하려는 마음을 가졌다고 의심하여 손바닥을 뚫고 가죽으로 묶었다. 그런 뒤에 이를 어떻게 처결하여야 할지 몰라 여러 신하들에게 '복신의 죄가 이미 이와 같으니 목을 베는 것이 좋겠는가, 아닌가?' 라고 물었다. 이에 달솔 덕집득(德執得)이 '이 악한 반역 죄인은 풀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라고 하였다. 복신이 덕집득에게 침을 뱉으며 '썩은 개와 같은 어리석은 놈' 이라고 하였다. 왕이 시종하는 병졸들로 하여금 목을 베어 소금에 절이도록 하였다.─ 일본서기 천지천황 2년 6월 |
풍운아 복신은 이렇게 사라져 버렸다. 백제부흥운동에 있어 복신의 절대적인 비중을 생각하면 이는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일이었다. 복신의 목을 소금에 절이는 매우 강경한 처벌은 복신의 추종세력에 대한 경고의 차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일로 백제부흥군의 상호 신뢰와 헌신은 큰 타격을 입었고, 내분의 틈을 타 신라군과 당군도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부여풍이 믿을것이라곤 왜과 고구려의 지원 밖에 없었다.
10.5 주류성 공략전과 백강구 전투 ¶
무경총요(武经总要)의 몽충(艨衝) 그림 |
당나라 수군은 그런 왜 선단을 추격하지 않았다. 이 당시 양측의 전력을 보면, 당나라 병선은 170여척. 왜선은 400여척이었다.[43] 접전은 다음날부터 벌어졌다.
일본 장수들과 백제왕은 기상을 살피지 않고 서로 일러 말하기를, "우리들이 앞다투어 싸우면 저들이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 라고 하면서, 중군의 군졸들을 이끌고 대오가 어지롭게 나아가 굳게 진치고 있는 당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당이 바로 좌우에서 배를 협공하여 에워싸고 싸우니 잠깐 사이에 일본군이 계속 패하여 물에 빠져 죽는 자가 많고 배가 앞뒤를 돌릴 수 없었다. 에치노다쿠쓰가 하늘을 우러러보고 맹세하고 분하여 이를 갈며 성을 내고, 수십 인을 죽이고 전사하였다. 이때 백제왕 풍장이 몇 사람과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로 달아났다.─일본서기, 천지 2년 8월 |
간단하게 결과만 말하자면 왜군의 대패. 그야말로 처참할 정도의 패배였다.
무경총요(武经总要)의 해골선 그림 |
아예 이런 점을 토대로 백강 전투뿐만이 아니라 백제 부흥 운동에 파견된 왜군 전체의 성격을 보려는 경우도 있다. 662년 5월의 1차 파견군이나 663년 2월의 2차 파견군은 전·중·후 장군이 이끈것으로(1차에선 중군은 생략) 되어 있고, 백강구 전투에서도 중군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그런데 이게 상호간의 상하 통속관계를 나타내는것이 아니라 징병 지역에 따른 편제나 혹은 출병 시간에 따라 구분된 것으로 여기면서, 각 장수는 죄다 상호 병렬적 관계이며 3군 또는 2군 전체를 통솔하는 수직적 지휘계통 결여 상태였다고 보는 것이다.
10.6 에필로그 ¶
11.1 연개소문의 사망과 후계자 구도 ¶
이 달에 고려 대신 개금이 죽었다. 그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유언하기를 '너히 형제는 물과 고기처럼 화합하여 작위를 둘러싸고 다투지 마라. 만약 그렇지 못하면 반드시 이웃 나라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라 하였다. ─ 일본서기 권 27 |
실로 그렇게 되었다. 그저 웃음거리가 되는것보다는 더 심각한 일이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