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하위키에 작성한 글이고 주로 참조한 책은 이상훈 - 나당전쟁연구 입니다.
다윗, 골리앗에 맞서다
3.1 정치·외교적 요인
- 648년 합의된 영토분할 약정을 당이 위반함
- 백제평정은 신라의 공로가 절대적이었음
- 백제평정 후 신라군도 함께 주둔하며 백제부흥군과 싸움
- 백제주둔 당군에게 지속적으로 군수품을 제공함
- 웅진도독 부여융과 회맹시킨것은 부당한 처사임
- 고구려평정도 신라의 공로가 컸음
- 고구려 펑정 후 비열흘의 안동도호부 귀속은 부당함
3.2 군사적 원인
칙명(勅命)으로 (신라)왕을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으로 삼아서 군사를 거느리고 (당군을) 응원하게 하였다. ─三國史記 卷第五 新羅本紀 第五 정방이 기뻐하며 법민을 돌려보내 신라의 병마(兵馬)를 징발케 하였다.─三國史記 卷第五 新羅本紀 第五 |
660년 나당연합군의 백제원정에 앞서 당은 신라왕을 우이도행군총관에 임명하고 신라의 병마를 징발케 하였다. 이때의 모습을 보면 신라왕이 당나라의 1게 행군총관으로 전락한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는 큰 문제가 아니다. 이 행군의 병력은 모두 신라군으로 구성되어 신라왕이 신라군을 그대로 지휘·통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신등이 약속한 기일보다 늦었다고 하여 신라의 독군(督軍)인 김문영(金文潁)을 군문(軍門)에서 목을 베려고 하였다. ─三國史記 卷第五 新羅本紀 第五 23일에 백제의 남은 적병이 사비성 (泗沘城)에 들어와서 항복하여 살아남은 사람들을 붙잡아 가려고 하였으므로 남아서 지키던 유인원이 당나라와 신라 사람들을 내어 이를 쳐서 쫓았다.─三國史記 卷第五 新羅本紀 第五 당나라 황제가 유인궤에게 검교(檢校) 대방주자사(帶方州刺使)로 삼은 조칙(詔勅)을 내려 이전의 도독(都督)을 맡았던 왕문도(王文度)의 무리와 우리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군영으로 향하게 하였다. ─三國史記 卷第六 新羅本紀 第六 |
첫번째 기록을 보면 소정방이 김유신과 아무런 협의도 없이 신라군의 김문영을 임의대로 처벌하려고 했다. 결국 신라군의 반발로 무산되기는 했지만, 문제는 당군이 기본적으로 신라군보다 우위에 있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던 점이다. 이러한 인식과 행동은 이후에 점차 강화되어 나갔다. 두번째와 세번째 사례를 보면, 웅진도독부에 주둔하고 있던 당군과 신라군이 모두 당나라에 의해서 지휘되고 통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백제 멸망 이후 당군은 백제 주둔 신라군에 지휘·통솔권을 일부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나라 황제가 칙명을 내려 지경 (智鏡)과 개원(愷元)을 장군(將軍)으로 삼아 요동 의 싸움에 나아가게 하였다. 왕이 곧 지경을 파진찬(波珍湌), 개원을 대아찬(大阿湌)으로 삼았다. 또한 황제가 칙명을 내려 대아찬(大阿湌) 일원(日原)을 운휘장군(雲麾將軍)으로 삼았는데, 왕은 왕궁의 뜰에서 칙명을 받도록 명령하였다.─ 三國史記 卷第六 新羅本紀 第六 |
해당 기사를 보면, 고구려 원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당은 신라의지경과 개원, 그리고 일원을 당의 장수로 임명하여 전장에 투입시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신라왕은 단순히 이를 수용하고 인준하는 수준에서 머물고 있다. 신라가 모든 장군에 대한 임명권을 당나라에게 넘겨준 것은 아닐테지만, 최소한 당은 원하는 인물을 자기 마음대로 임명해 신라왕에게 통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이러한 상황은 목전의 고구려 원정이 계획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한나라의 군통수권자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고종이 유인원 (劉仁願)과 김인태 (金仁泰)에게 비열도(卑列道)를 따르도록 하고, 또한 우리 군사를 징발하여 다곡(多谷) 과 해곡(海谷)두 길을 따라서 평양 에서 모이도록 명령하였다.─三國史記 卷第六 新羅本紀 第六 |
당은 백제진장인 유인원으로 하여금 비여도를 따라 신라의 군사를 징발케 하였다. 이는 신라의 병력 징발을 신라군에게 위임하는것이 아니라, 당군이 직접 징발·편성하여 당군에 편입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즉, 당은 장군 임명에서 나아가 병력 편성까지 주관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 경우도 장군 임명 때와 마찬가지로 신라의 전병력을 당군이 장악한것은 아니지만, 당군이 신라의 백성을 마음대로 징발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 의미하는 바가 작지 않다.
유신(庾信)등이 군사를 쉬게 하고는 다음 명령을 기다렸는데, 당나라 함자도(含資道) 총관(摠管)인 유덕민(劉德敏)이 와서‘평양 으로 군사의 양식을 보내라.’는 황제의 뜻을 전하였다.三國史記 卷第六 新羅本紀 第六 10월 2일에 영공(英公)이 평양성 (平壤城)의 북쪽으로 2백 리 되는 곳에 도착하였다. 이동혜(尒同兮) 촌주(村主) 대나마(大奈麻) 강심(江深)을 뽑아 보내면서 거란(契丹) 기병(騎兵) 80여 명을 이끌고 아진함성 (阿珍含城)을 거쳐 한성(漢城)에 이르러 편지를 전하여 군사 동원 시기를 독려하니 대왕이 따랐다.─ 三國史記 卷第六 新羅本紀 第六 정방은 군량을 얻자 곧 전투를 그치고 돌아갔다.─ 三國史記 卷第六 新羅本紀 第六 유신(庾信) 등은 당나라 군사들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역시 군사를 돌려 과천(果瓜川)을 건넜다. ─ 三國史記 卷第六 新羅本紀 第六 그래서 성을 막 깨뜨리려고 할 때 영공이 보낸 강심(江深)이 와서‘대총관의 처분을 받들어 신라 병사와 말은 성을 공격할 필요없이 빨리 평양 으로 와서 군량을 공급하고 모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행렬이 수곡성(水谷城)에 이르렀을 때 대군이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신라 병사와 말도 역시 곧 빠져나왔습니다.─ 三國史記 卷第七 新羅本紀 第七 처음에 당나라 군사가 고구려를 평정할 때 왕은 한성(漢城)을 출발하여 평양(平壤)에 이르러 힐차양(肹次壤)에 도착하였는데, 당나라의 여러 장수가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돌아와 한성에 이르렀다.─ 三國史記 卷第六 新羅本紀 第六 |
첫번째 사례를 보면 당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신라군의 식량수송이나 행군독려시에는 철저히 조서나 서신을 보내어 명령을 전달하였다. 그런데 그 뒤의 기사들을 보면 나당연합군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정보 공유가 전혀 되지 않고 있다. 신라군은 당군의 연락 하에 철수한 것이 아니라, 매번 당군이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철수할 만큼 철저하게 배제되고 소외되어 있었다. 신라왕이 직접 참전했음에도 당이 정보전달을 제대로 해주지 않았고, 군사작전권은 오로지 당군에 있고 신라는 이를 수동적으로 따라야만 했다.
3.3 비열흘 반환의 문제
또한 비열성(卑列城)은 본래 신라 땅이었는데 고구려가 쳐서 빼앗은 지 30여 년만에 신라가 다시 이 성을 되찾아 백성을 옮기고 관리를 두어 수비하였습니다. 그런데 당나라가 이 성을 가져다 고구려에 주었습니다. 또한 신라는 백제를 평정한 때부터 고구려 평정을 끝낼 때까지 충성을 다하고 힘을 바쳐 당나라를 배신하지 않았는데 무슨 죄로 하루 아침에 버려지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이와 같이 억울함이 있더라도 끝내 배반할 마음은 없었습니다.─ 三國史記 卷第七 新羅本紀 第七 |
비열흘은 지금의 함경남도 안변일대이다. 진흥왕 17년인 556년에 비열흘주가 설치되었다가 나중에 폐치되고, 다시 복치되었다가 폐치되고를 반복했다. 위의 기록은 설인귀에 대해 문무왕이 답신을 보낸 답설인귀서의 내용으로, 신라가 비열성의 처리 과정에서 당나라의 행동에 대해 불평하는 모습이다. 문무왕은 비열성이 원래 신라의 땅이었는데, 고구려에게 빼앗긴 지 30여년 만에 되찾아, 백성을 이주시키고 수비를 하였는데 이를 당이 도로 고구려에게 주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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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캐세라세라 작성시간 12.11.04 한반도 동해안을 보면 남동해안쪽에 포항에서 울산, 기장, 부산으로 이어지는 쪽에 터가 좀 되고, 원산, 함흥, 청진일대의 한국전쟁당시 미해병대가 작전지역으로 삼았던 곳이 땅이 좀 있고, 가운데의 강원도와 금강산쪽은 산에 막혀서 해안가말고는 살만한 곳이 별로 없죠.
고로 안변 안 내주겠다는 것은 신라에게 니네는 함경도 넘보지 말고 한강유역과 강원도를 경계로 아래쪽에서만 그러고 살아라라는 뜻 아닌가요? 신라가 열받는 것은 당연했을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