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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최약, 최강을 무너뜨리다. 나당전쟁(1) ─ 지렁이도 밞히면 꿈틀한다.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11.04|조회수1,052 목록 댓글 1




엔하위키에 작성한 글이고 주로 참조한 책은 이상훈 - 나당전쟁연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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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670~676년에 진행된 신라와  사이의 전쟁. 삼국통일전쟁의 마지막 파트.

한국사에서 가장 거대한 영향력을 끼친 전쟁 중의 하나라고 말 할 수 있으며,[2] 삼국통일전쟁의 마지막을 장식하는것이 바로 나당전쟁이다. 나당전쟁은 백제와 고구려기 멸망한 후, 신라와 당이 한반도의 주도권을 놓고 669년부터 676년까지 벌인 전쟁으로, 문자 그대로 민족 생존을 위한 전투 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 다시 말해 당의 한반도 직할영토화 정책과 신라의 삼국통일정책이 정면으로 부딪힌 것으로, 전자가 실현 되었다면 한반도의 모든 영역과 한국이라는 모든 주체가 중국의 것이 되었을 것이다. 아 ! 이 얼마나 무서운가

다윗, 골리앗에 맞서다

 나당연합군은 백제를 무너뜨렸고, 고구려마저 멸망시켰다. 그러나 이제 거대한 당제국은 그것만으로 멈출 생각을 추호도 없었고, 신라는 자신들이 불러온 이 괴물을 자신들의 손으로 내쫓아야할 의무에 처하게 되었다. 동아시아의 압도적 최강국 당 제국과, 불과 반세기 이전만 해도 멸망이 눈 앞에 다가온듯 했던 '약소국' 신라. 승패는 누가보더라도 명약관화明若觀火) 해 보였지만, 그러나……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후 영토문제를 비롯한 당 과의 내·외부적 이익들이 상충되기 시작하면서, 신라왕과 신라군, 그리고 신라민의 불만은 점점 축적되어 갔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당이라는 압도적 거대제국의 위압감 속에서, 신라 수뇌부는 결국 당과의 전쟁을 고려하게 되었다.


3.1 정치·외교적 요인 

시간을 앞으로 돌려, 고구려가 멸망하기 직전, 백제 부흥군이 진압된 뒤 옛 백제 지역의 대부분은 다시 당의 지배에 귀속되었다. 웅진도독보를 중심으로 이 지역의 지배권을 강화하려고 했던 당나라는, 이 지역의 대내외적 여건이 여전히 불안한 상황인 것을 보게 된다. 오랜 전란으로 기존 백제의 행정체계는 완전히 무너져내렸고, 인구는 이산하였으며,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신라나 왜와의 관계 등 주변 상황도 매우 유동적이었다. 당 조정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백제 지역을 대고구려전 수행을 위한 거점으로 만들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구체적 작업을 일임받은 사람은 백제부흥군 격파에서 자신의 안목을 보여준 유인궤였다. 손인사와 유인원이 귀국하고 난뒤, 유인궤는 웅진에 머물며 전후 복구사업을 주관하였다. 그는 민생 안정을 위한 행정적 조처를 취하면서, 정치적으로는 백제 유민을 웅진도독부를 중심으로 결집하는 작업과, 웅진도독부의 관할 범위를 확정하는 일을 추진하였다. 후자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바로 멸망한 옛 백제 왕족을 전면에 내세워 백제 유민을 회유하는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백제가 멸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제 왕실이 여전히 남아있게 되는것이고, 그렇다면 신라는 이 지역으로는 한발자국도 더 들어올 수 없다. 옛 백제 왕실을 신라와 병립시켜 신라의 백제 침투를 방지하는것이 유인궤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보다 앞서, 663년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이 귀국하였다. 이때 신라의 왕은 2년 전에 죽은 무열왕의 뒤를 이은 문무왕으로, 일전에 문무왕은 부여융에게 침을 뱉은 적이 있었다. 이 당시 부여융의 가치는 백제 부흥군과 왜국이 내세우는 부여풍의 가치를 내리끌어, 부여풍을 중심으로 백제인들이 규합하는것을 막을 뿐만 아니라, 백제 유민을 회유하는 데도 쓸만했다. 부흥군이 진압된 뒤에도 '도구' 로서 부여융의 가치는 여전하였다.

부여융은 반당적인 백제유민의 동향에 대응할 수 있는 도구 일뿐만 아니라, 동맹국인 신라의 동향에 대한 고려에서도 쓸만한 패였다. 부흥군을 진압하는 동안 신라는 백제 여러 지역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침투시켰고, 당나라는 이 점을 우려하였다. 당은 대신 부여융을 웅진도독부를 대표하는 인물처럼 내세워서, 문무왕과 회맹하게 하였다.

신라 측 기록에 따르면, 주류성을 함락시킨 후 당의 대부 두상(杜爽)은 "백제를 평정한 후 서로 회맹하라." 는 당 고종의 칙명을 내세워 부여융과 회맹할 것을 신라에게 종용했다. 신라는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거부했지만, 임존성이 함락된 후 회맹하지 않을 것을 당고종이 책망하자 별 수 없이 맹약을 맺게 되었다. 이에 따라 따라 664년 2월, 각간 김인문과 이찬 천존(天存)이 당의 칙사 유인원과 더불어 백제 부여융과 웅진에서 맹서하였다.[4]

이에 따라 당은 부흥군과의 전쟁 기간 중 확장된 신라의 세력을 통제하고 차단하기 위해 백제왕자인 부여융을 내세워 신라와 대등한 회맹을 하게 하여, 공식적으로 신라와의 경계를 분명히 하였다. 다른 하나는 부여융을 백제를 대표하는 존재로 내세워 백제 유민을 회유하는 작업에도 이용하였다. 하지만 이 회맹 당시 신라에서는 문무왕의 신하인 김인문과 천존이 나섰다. 이렇게 되자 문무왕은 부여융에 대해서는 물론, 회맹을 주재하였던 당나라 칙사보다도 상위인 형태로 남게 되었다.

이에 회맹이 다시 한번 추진되었고, 664년 문무왕이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으으로 책봉되자, 부여융 역시 웅진도독으로 664년 10월에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665년 8월, 웅진의 취리산(就利山)에서 유인궤과 회맹문을 짓고 유인원이 주재하는 부여융과 문무왕의 회맹이 이루어졌다. 이때 양자는 "땅을 구획하여 양측의 경계를 확정하고, 백성을 살게 하여 각각 산업을 영위하게 하는" 의식을 행했다.

이 이후로, 웅진도독부는 자체적으로 곽무종(郭務悰) 등을 왜에 파견하는 등 자체의 위상을 확보하려 애를 썻다. 먼저 자신들의 위상을 세우고 부여융이 문무왕과 대등한 위상을 갖는 회맹을 하게 함으로서, 신라의 정치적 영향력이 서쪽으로 밀고 들어오는것을 막아버렸다. 이 모든 그림을 뒤에서 조종한 유인궤는 복구사업을 진쟁하고 행정 체계를 갖추면서 고구려전을 준비하였다. 단기적으로는 큰 효과를 보기 힘들지만, 장기적으로는 웅진도독부 체제를 굳히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 것이다.

그런데 신라 입장에선 이런 행동이 마음에 찰 리가 없다. 당나라의 압력에 못 이겨 결국 취리산에서의 회맹등에 참여했지만, 부여융과의 회맹은 당의 괴뢰정권인 백제의 재건을 승인하는 의식인데 신라가 마음으로 따랐을 리가 없다. 당과 개전한 이후, 문무왕이 설인귀에게 신라의 불만으로 '가장' 강조한 부분이 이 문제였다. 당나라의 손을 빌린 백제 재흥은 결과적으로 신라의 대백제전 성과를 모조리 앗아가는 일일뿐 아니라, 신라의 안보를 더욱 심각하게 위협하는 일이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재흥 백제국의 본체는 세계 최강의 국가 대당 제국의 군사력 이다. 그런것이 신라 국경에 바로 생기게 되는 것이었다.

660년 8월, 당군이 백제를 멸한 뒤에 신라까지 침공하려 한다는 첩보가 입수되어 신라 조정이 긴급하게 대책 마련을 위한 논의를 한 적이 있었다. 물론 헛소문에 따른 한바탕의 소동으로 끝났지만, 강대한 무력을 인접하게 되면서 신라는 늘 이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만 했다. 웅진도독부가 왜와의 교섭을 시도한 사실도 신라가 몰랐을리 없다.

이런 가운데 신라 조정은 자국의 위상과 당나라와의 관계에 대해 근본적으로 재인식하게 되었던듯 하다. '웅진도독' 부여융과 '계림주대도독' 문무왕이 동격으로 당나라 장수의 주재 아래 회맹하였으니, 이는 결국 신라도 백제와 같은 성격의 존재로 당나라에게는 규정되고, 또 백제처럼 될 수 있음도 의미하는 일이었다.

다시 정리해서, 나당전쟁의 원인은 크게 3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번째. 648년 당태종과 김춘추간에 맺은 영토분할약정을 당이 위반했기 때문이다. 이 영토분할약정을 부정하는 견해도 있지만, 734년 당이 대동강 이남 지역의 영토권을 신라에게 승인한 점에서 볼떄, 당은 신라의 요구를 그 이전부터 인식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나당전쟁의 가장 기본적인 원인은 여기에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백제 부흥군의 활동 시에 신라는 적극적으로 진압에 나섰지만 그 대가는 거의 없지 못했다. 신라가 주도적으로 작전을 이끌어 나간것은, 그러한 움직임을 통해 백제고지에 대한 자신들의 주도권을 키우려는 행동이었겠지만, 당군의 요청이나 지휘에 의하여 당을 돕는다는 인상을 면할 수 없었으며, 앞서 본 바와 같이 되려 부흥군이 진압된 뒤 신라는 백제고지로 자신들의 영향력을 한치도 더 늘릴 수 없었다.

셋째. 부여융과 취리산 회맹 문제다. 취리산 회맹으로 당나라의 괴뢰 정권인 백제와 신라는 동등한 위치에 서버렸고, 신라의 입장에서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패망한 백제가 다시 당의 의해 신라와 대등한 국가로 부상되었다는것은 엄청난 모순이었다. 물론 양자를 구분하여 백제는 당의 내번(內藩)이고 신라는 내번(外藩)이라 할 수 있지만, 신라는 당의 의지에 따라 외번에서 내번으로 강제 전환 될 상황에 놓여진 것이었다.

이러한 신라의 입장을 잘 대변하는 것이 「답설인귀서」(答薛仁貴書)이다. 이는 671년 설인귀가 보낸 서한에 대해 문무왕이 답신을 한 것이다. 이 내용으로 신라가 불만으로 제기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 648년 합의된 영토분할 약정을 당이 위반함
  • 백제평정은 신라의 공로가 절대적이었음
  • 백제평정 후 신라군도 함께 주둔하며 백제부흥군과 싸움
  • 백제주둔 당군에게 지속적으로 군수품을 제공함
  • 웅진도독 부여융과 회맹시킨것은 부당한 처사임
  • 고구려평정도 신라의 공로가 컸음
  • 고구려 펑정 후 비열흘의 안동도호부 귀속은 부당함

여기에서 신라는 당이 영토분할 약정을 위반한 점, 백제·고구려 평정에 신라의 공이 컸다는 점, 부여융과의 취리산 회맹은 부당한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신라는 답설인귀서를 보낸 직후 소부리주를 설치하고 아찬 진왕을 도독으로 임명하는데, 이는 문무왕의 답서가 백제의 고지를 완전히 접수하겠다는 것을 당에게 통보하는 성격의 편지임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5]

당은 648년 당시에는 기미정책(羈靡政策)의 대상으로 고구려만을 상정하고 있었으나,[6] 650년 대 이후 대외 팽창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전략으로 수정하였다.[7] 당이 비록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과정에서 신라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지만, 신라와 외교관계를 맺은 이래로 당은 여전히 신라를 '연합' 이 아니라 '군대를 이용' 했다는 관점을 유지했다.

결국 신라는 당의 지배체제 속에 포함됨으로서, 신라가 멸망시킨 나라들과 형식상으로는 별 차이도 없는 동등한 것이 되고 말았다. 신라는 삼국통일과정에서 대단한 역할을 수행했음에도,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실익도 없는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쌍방의 공동이익이 없는데 나당동맹이 유지될리가 없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신라는 당나라 세력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쫒아버리기 위한 전쟁이라는 적극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다.[8]

3.2 군사적 원인 

군령권은 실질적인 군대와 운용 및 통솔과 직결되는 군에 대한 지휘·명령·감독권이다. 이러한 군에 대한 군령권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최고 군사통수권 가운데 내포되어 있는것이 보통일 것이다. 그런데 나당연합이 결성되고 백제와 고구려에 대한 대규모 원정이 진행되면서, 신라왕의 군령권은 당나라에 의해서 심하게 훼손되기 시작했다.

칙명(勅命)으로 (신라)왕을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으로 삼아서 군사를 거느리고 (당군을) 응원하게 하였다. ─三國史記 卷第五 新羅本紀 第五 

정방이 기뻐하며 법민을 돌려보내 신라의 병마(兵馬)를 징발케 하였다.─三國史記 卷第五 新羅本紀 第五


660년 나당연합군의 백제원정에 앞서 당은 신라왕을 우이도행군총관에 임명하고 신라의 병마를 징발케 하였다. 이때의 모습을 보면 신라왕이 당나라의 1게 행군총관으로 전락한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는 큰 문제가 아니다. 이 행군의 병력은 모두 신라군으로 구성되어 신라왕이 신라군을 그대로 지휘·통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당연합군에 의한 백제와 고구려 원정이 진행되면 될수록 당군의 영향력은 확대대고 신라왕의 군령권은 약화되어다. 이러한 당군에 의한 신라왕의 군령권 행사의 제한은 여라가지가 있었는데 첫번째는 지휘·통솔권의 문제였다.

유신등이 약속한 기일보다 늦었다고 하여 신라의 독군(督軍)인 김문영(金文潁)을 군문(軍門)에서 목을 베려고 하였다. ─三國史記 卷第五 新羅本紀 第五 

23일에 백제의 남은 적병이 사비성 (泗沘城)에 들어와서 항복하여 살아남은 사람들을 붙잡아 가려고 하였으므로 남아서 지키던 유인원이 당나라와 신라 사람들을 내어 이를 쳐서 쫓았다.─三國史記 卷第五 新羅本紀 第五 

당나라 황제가 유인궤에게 검교(檢校) 대방주자사(帶方州刺使)로 삼은 조칙(詔勅)을 내려 이전의 도독(都督)을 맡았던 왕문도(王文度)의 무리와 우리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군영으로 향하게 하였다. ─三國史記 卷第六 新羅本紀 第六


첫번째 기록을 보면 소정방이 김유신과 아무런 협의도 없이 신라군의 김문영을 임의대로 처벌하려고 했다. 결국 신라군의 반발로 무산되기는 했지만, 문제는 당군이 기본적으로 신라군보다 우위에 있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던 점이다. 이러한 인식과 행동은 이후에 점차 강화되어 나갔다. 두번째와 세번째 사례를 보면, 웅진도독부에 주둔하고 있던 당군과 신라군이 모두 당나라에 의해서 지휘되고 통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백제 멸망 이후 당군은 백제 주둔 신라군에 지휘·통솔권을 일부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번째로 장수의 임명권에 관한 부분이다.

당나라 황제가 칙명을 내려 지경 (智鏡)과 개원(愷元)을 장군(將軍)으로 삼아 요동 의 싸움에 나아가게 하였다. 왕이 곧 지경을 파진찬(波珍湌), 개원을 대아찬(大阿湌)으로 삼았다. 또한 황제가 칙명을 내려 대아찬(大阿湌) 일원(日原)을 운휘장군(雲麾將軍)으로 삼았는데, 왕은 왕궁의 뜰에서 칙명을 받도록 명령하였다.─ 三國史記 卷第六 新羅本紀 第六

해당 기사를 보면, 고구려 원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당은 신라의지경과 개원, 그리고 일원을 당의 장수로 임명하여 전장에 투입시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신라왕은 단순히 이를 수용하고 인준하는 수준에서 머물고 있다. 신라가 모든 장군에 대한 임명권을 당나라에게 넘겨준 것은 아닐테지만, 최소한 당은 원하는 인물을 자기 마음대로 임명해 신라왕에게 통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이러한 상황은 목전의 고구려 원정이 계획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한나라의 군통수권자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셋째로, 병력 징발권의 문제이다.

고종이 유인원 (劉仁願)과 김인태 (金仁泰)에게 비열도(卑列道)를 따르도록 하고, 또한 우리 군사를 징발하여 다곡(多谷) 과 해곡(海谷)두 길을 따라서 평양 에서 모이도록 명령하였다.─三國史記 卷第六 新羅本紀 第六

당은 백제진장인 유인원으로 하여금 비여도를 따라 신라의 군사를 징발케 하였다. 이는 신라의 병력 징발을 신라군에게 위임하는것이 아니라, 당군이 직접 징발·편성하여 당군에 편입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즉, 당은 장군 임명에서 나아가 병력 편성까지 주관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 경우도 장군 임명 때와 마찬가지로 신라의 전병력을 당군이 장악한것은 아니지만, 당군이 신라의 백성을 마음대로 징발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 의미하는 바가 작지 않다.

넷째로, 군사작전권에 관한 문제이다.

유신(庾信)등이 군사를 쉬게 하고는 다음 명령을 기다렸는데, 당나라 함자도(含資道) 총관(摠管)인 유덕민(劉德敏)이 와서‘평양 으로 군사의 양식을 보내라.’는 황제의 뜻을 전하였다.三國史記 卷第六 新羅本紀 第六 

10월 2일에 영공(英公)이 평양성 (平壤城)의 북쪽으로 2백 리 되는 곳에 도착하였다. 이동혜(尒同兮) 촌주(村主) 대나마(大奈麻) 강심(江深)을 뽑아 보내면서 거란(契丹) 기병(騎兵) 80여 명을 이끌고 아진함성 (阿珍含城)을 거쳐 한성(漢城)에 이르러 편지를 전하여 군사 동원 시기를 독려하니 대왕이 따랐다.─ 三國史記 卷第六 新羅本紀 第六 

정방은 군량을 얻자 곧 전투를 그치고 돌아갔다.─ 三國史記 卷第六 新羅本紀 第六 유신(庾信) 등은 당나라 군사들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역시 군사를 돌려 과천(果瓜川)을 건넜다. ─ 三國史記 卷第六 新羅本紀 第六 

그래서 성을 막 깨뜨리려고 할 때 영공이 보낸 강심(江深)이 와서‘대총관의 처분을 받들어 신라 병사와 말은 성을 공격할 필요없이 빨리 평양 으로 와서 군량을 공급하고 모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행렬이 수곡성(水谷城)에 이르렀을 때 대군이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신라 병사와 말도 역시 곧 빠져나왔습니다.─ 三國史記 卷第七 新羅本紀 第七 

처음에 당나라 군사가 고구려를 평정할 때 왕은 한성(漢城)을 출발하여 평양(平壤)에 이르러 힐차양(肹次壤)에 도착하였는데, 당나라의 여러 장수가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돌아와 한성에 이르렀다.─ 三國史記 卷第六 新羅本紀 第六


첫번째 사례를 보면 당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신라군의 식량수송이나 행군독려시에는 철저히 조서나 서신을 보내어 명령을 전달하였다. 그런데 그 뒤의 기사들을 보면 나당연합군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정보 공유가 전혀 되지 않고 있다. 신라군은 당군의 연락 하에 철수한 것이 아니라, 매번 당군이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철수할 만큼 철저하게 배제되고 소외되어 있었다. 신라왕이 직접 참전했음에도 당이 정보전달을 제대로 해주지 않았고, 군사작전권은 오로지 당군에 있고 신라는 이를 수동적으로 따라야만 했다.

백제 원정 후 신라는 웅진도독부 신라 주둔군에 대한 지휘권을 일부 이양해야 했고, 고구려 원정시에는 장군임명권과 병력징발권까지 당이 마음대로 행사하는 상황에 이르렀으며, 정보전달이나 작전계획은 협의가 아니라 일방적 통보 내지는 미통보로 이루어졌다.

나당연합군은 점차 평등관계에서 종속관계로 이행되고 있었다. 신라는 삼국통일전쟁을 거쳐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지만 그 대가로 영토를 얻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왕권과 신라군의 입지가 강화된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왕권의 추락과 신라군의 사기저하가 일어나면서 내부적으로 불만이 축적되기 시작했다.

3.3 비열흘 반환의 문제 

또한 비열성(卑列城)은 본래 신라 땅이었는데 고구려가 쳐서 빼앗은 지 30여 년만에 신라가 다시 이 성을 되찾아 백성을 옮기고 관리를 두어 수비하였습니다. 그런데 당나라가 이 성을 가져다 고구려에 주었습니다. 또한 신라는 백제를 평정한 때부터 고구려 평정을 끝낼 때까지 충성을 다하고 힘을 바쳐 당나라를 배신하지 않았는데 무슨 죄로 하루 아침에 버려지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이와 같이 억울함이 있더라도 끝내 배반할 마음은 없었습니다.─ 三國史記 卷第七 新羅本紀 第七

비열흘은 지금의 함경남도 안변일대이다. 진흥왕 17년인 556년에 비열흘주가 설치되었다가 나중에 폐치되고, 다시 복치되었다가 폐치되고를 반복했다. 위의 기록은 설인귀에 대해 문무왕이 답신을 보낸 답설인귀서의 내용으로, 신라가 비열성의 처리 과정에서 당나라의 행동에 대해 불평하는 모습이다. 문무왕은 비열성이 원래 신라의 땅이었는데, 고구려에게 빼앗긴 지 30여년 만에 되찾아, 백성을 이주시키고 수비를 하였는데 이를 당이 도로 고구려에게 주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신라가 비열흘주를 되찾은 시기가 언제인지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문무왕 8년인 668년의 비열흘주 설치에 대응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 이전 30년간 고구려가 비열흘을 지배했다는 말을 소급해서 30년 전으로 가 보면 선덕여왕 시기 637년의 우수주 설치가 나타나는데, 이 우수주(춘천)의 설치는 비열흘의 상실에 따른 통치 지역의 개편이었다. 고구려 원정 과정에서 보면 비열흘의 이름이 여러번 언급되는데, 이 지역을 경유해서 가거나 혹은 이 지역에서 병력을 진발하는 등 상당한 요충지로 보인다.

이렇듯 주요한 군사거점이었던 비열흘을 고구려 멸망을 전후로 신라가 재빨리 확보하였지만, 전후처리과정에서 다시 고구려로 넘어가 버린 것이다. 물론 이때는 고구려라는 나라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안동도호부의 관할로 귀속되었다고 보는게 옳은 해석이다. 하지만 669년 무렵의 기록을 보면 신라가 비열흘 등에 기근이 들자 창고를 열어 진휼한 기록이 보인다. 신라는 당나라가 비열흘을 반환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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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당나라와의 전면전으로 번질 수 있는 사안임에도 불구, 신라는 왜 당의 명령을 거부하고 비열흘에 집착하였을까.

안변은 평양·서울과 더불어 트라이앵글을 이룬다. 당이 평양과 안변지역을 장악할 경우 신라는 서울 지역을 지키기 어려워 지고, 반대로 신라가 서울과 안변지역을 장악할 경우 평양 지역을 압박하는데 유리해진다. 이렇듯 비열흘(안변)은 신라가 평양의 안동도호부를 견제하고, 한강하류지역을 방어하는데 있어 절대적으로 필요한 군사전략상 핵심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비열흘은 평양 일대와 한강 하류 일대를 견제할 수 있고, 접근로가 제한되어 있는 천혜의 군사 요충지였기 때문에, 신라로서는 결코 양보할 수 없었던 것이다.[9]

게다가 장기간의 전쟁을 통해 되찾은 비열흘 지역이 문무왕에게 주는 위신의 문제도 있다. 이미 전쟁의 성과에 대한 불만이 축적되는 상태에서 신라가 당에 굴복, 비열흘에서까지 물러난다면 문무왕의 위상은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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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캐세라세라 | 작성시간 12.11.04 한반도 동해안을 보면 남동해안쪽에 포항에서 울산, 기장, 부산으로 이어지는 쪽에 터가 좀 되고, 원산, 함흥, 청진일대의 한국전쟁당시 미해병대가 작전지역으로 삼았던 곳이 땅이 좀 있고, 가운데의 강원도와 금강산쪽은 산에 막혀서 해안가말고는 살만한 곳이 별로 없죠.

    고로 안변 안 내주겠다는 것은 신라에게 니네는 함경도 넘보지 말고 한강유역과 강원도를 경계로 아래쪽에서만 그러고 살아라라는 뜻 아닌가요? 신라가 열받는 것은 당연했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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