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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마카오를 놓고 벌어진 네덜란드와 포르투칼의 대격전(2)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5.09|조회수798 목록 댓글 6

전 글에 대한 간략한 설명

동남아시아에 동인도회사를 차린 네덜란드지만, 제대로 장사를 하기 위해선 중국 내에 있는 항구가 필요.
그런데 포르투갈이 이를 장악하고 있고, 마침 포르투갈의 수비가 약한 틈을 타서 800명에 가까운 네덜란드 군대가 마카오를 습격, 해안을 장악





한스 루핀의 지휘 아래 네덜란드 군은 마카오 카시야스 해안에 상륙을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1차 교전의 승리는 어디까지나 제한적인 범위 아래서 이루어진 것으로, 실질적으로 포르투갈의 카발리뉴 부대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데 비하여 네덜란드군은 사상자가 여럿 있었고 레이예르센 함장이 부상으로 빠진 상황이었습니다. 즉 이 승리의 효과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네덜란드 군과 한스 루핀이 해야할 일은 재빠른 공격으로 혼란에 빠진 적을 무찌르는것이지만, 다른 네덜란드 선박의 선장들이 방해가 되었습니다. 초전의 승리로 포르투갈 병사들이 물러나자, 배에 남아있는 네덜란드 선장들과 선원들은 이 싸움이 너무나 손쉽게 끝날 줄 알고 너도나도 상륙을 했습니다. 어차피 이긴 싸움, 한몫 잡아나 보자는 것이었는데, 이미 한스 루핀이 상륙한 시점에서 네덜란드 군대는 카발리뉴 부대의 여섯배에 달하는 대군이었지만, 루핀은 잔여 병력과 화포 3개가 하선을 마칠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분명히 병력 자체는 많아졌습니다. 네덜란드 군은 이 카시야스 해안에 아마 마카오를 지키는 포르투갈인들 전원과 비슷할 숫자인 200여명의 수비대를 배치하고도 여전히 많은 숫자로 여유롭게, 서두르지도 않고 진군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허비된 2시간 동안, 패닉 상태에 빠져있던 포르투갈 현지민들은 정신을 차리고 전투준비를 어느정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상파울루 대성당(Collegiate Church of Sao Paulo)에서는 종치기가 마구 종을 치면서 주민들을 몬테(Monte) 요새로 불러들이면서 수비를 증강했습니다. 포르투갈인들 뿐만 아니라 그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마카오 주민들고 협력을 했습니다.



이런 난리 통 가운데, 예수회 선교사들만이 외따로 이게 무슨 상황인가 하고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네덜란드가 승리하는 일 만은 막아야 한다는것입니다. 저 "간악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들이 마카오의 주인이 되어 반 가톨릭 정책이 시행되면 자신들은 포르투갈의 다른 본거지인 고아(Goa)까지 후퇴해야만 하며, 고아는 인도에 있는 만큼 일본과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예수회의 선교 활동을 모조리 포기해야함과 동시에 "간악하고" 또한 무책임한 프로테스탄트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중국 - 일본인들을 상대로 포교 활동을 하는것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네덜란드는 비교적 포교에 대해선 크게 관심을 가지는 편은 아니지만, 어쨌건 상황이 자신들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나는건 참을 수는 없는 일이었죠.



이 당시 마카오에 있던 예수회 선교사들 중에는 요한 아담 샬 폰 벨(Johann Adam Schall von Bel), 즉 중국에선 탕약망(湯若望)으로 불리며 한때 청나라 순치 황제가 "할아버지" 라고 부를 만큼 신임했던 아담 샬도 있었습니다.


이 당시 아댬 샬은 31살의 건장하고 건강한 청년이었으며 바로 이 해 마카오에 도착해 모든것이 신기하며 의욕에 넘치던 인물이었습니다. 아담 샬을 비롯해 몬테 요새에 모인 선교사들은 고민을 하다가 불연듯 엄청난 사실을 기억해냈습니다. 이 요새는 아직 미완성 상태긴 했지만, 분명하게도 4개나 되는 대포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이 신부(神父)들은 그들이 믿는 하나님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거룩한 사명은 잠시 내버려둔채, 대포를 잡고 정조준했습니다. 동아시아에 파견된 신부들은 모두 고등수학에 관하여 뛰어난 이해를 가지고 있었고, 네덜란드 군을 향해 정조준한 포문에서는 ─ 비록 화약과 포탄은 재고가 아슬아슬했지만 ─ 단 한발의 낭비도 없을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었습니다.



한스 루핀은 계속해서 중간에서 공격하는 카발리뉴 부대의 공격을 견디며 그들을 구이아(Guia)라고 부르던 바위 언덕의 기슭까지 퇴각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포격이 여러차례 이루어져 엄폐호가 된 곳을 따라 오른쪽으로 이동하며 포르투갈군을 포위하려 시도했습니다. 이때, 사제옷을 입은 포수(砲手)들의 포격 - 문자 그대로 신벌 - 이 가해졌습니다. 맹폭이었습니다.



네덜란드 군대는 자기들에게 미친듯이 포격을 하는 저자들이 실상 주님 말씀 전하는 일을 하는 사제라는것을 깨닫는 것 까지의 상상력은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그들에게는 "전혀 알지도 못하던 요새" 에서 "대체 얼마나 되는 숫자인지 알수도 없는" 포르투갈 포수들이 공격을 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전방과 우측에서의 집중 포격에 루핀 부대는 일단 구이아 언덕 아래까지 퇴각을 했지만 그곳에서 포르투갈 총병 부대가 기다리다가 그들에게 총을 쏘아댔습니다.



혼란의 연속이었습니다. 루핀 부대는 적군이 대체 몇명이나 되는지 짐작조차 못했습니다. 공격을 감행한 포르투갈 군대의 실상은 무모한 사제 몇명과, 8명의 유럽인 총병 그리고 20여명의 현지 마카오 인들과 아프리카 흑인 노예 몇명에 불과헀지만, 루핀 부대는 이를 알수가 없었습니다. 의혹이 생긴 루핀 부대는 머리를 잔뜩 웅크리고 숨어서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격렬하게 토론했습니다.



한참 동안의 실랑이 끝에, 루핀은 우선 이 부대를 카시야스 해변으로 퇴각 시킨 후에, 원병과 화포의 지원을 구하여 다시 공격하기로 계획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움직임을 눈치챈 포르투갈 병사들은 퇴로를 막아버리기 위하여 지원군을 더 보냈습니다.



루핀은 계획을 실행하기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그 순간 그의 눈에 보이는 광경은 포르투갈인, 중국인, 온 몸이 검은 아프리카 흑인들, 그리고 사제옷을 입은 선교사들 ─ 금발에 거대한 체격으로 돌진하는 아담 샬 까지 ─이 한꺼번에 고함을 지르며 달려오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희극적이라면 희극적인 모습에 루핀이 잠시 아무것도 못하고 서 있는 순간, 2발의 총성이 울려퍼졌습니다.



루핀은 고꾸라졌습니다.



치명상으로,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아무튼 그는 이 전투에서 가장 자기 일을 제대로 한 네덜란드 인이었고, 포르투갈 인들도 그에 대해서는 호의적으로 기록을 했습니다. 리더가 죽자 네덜란드 병사들은 패닉에 빠졌습니다. 포탄도 다량이 파손되었습니다. 만약 리더의 지휘 아래 효과적으로 싸웠다면야 거점을 마련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패닉에 빠진 네덜란드 병사들은 총칼을 모두 내던지고 미친듯이 울부짖으며 해변으로 도망치고 맙니다.



해변에는 200여명의 네덜란드 군대가 기다리고 있었고, 만약 다시 한번 전열을 정비해 싸움을 벌였다면 모를 수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200여명의 네덜란드 군대는 도망치는 자기 동족들이 "작전장 후퇴"를 벌이는 줄 알고 교전 준비를 벌였습니다.



도망치던 네덜란드 인들은, 그런 200여명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채 물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미친듯이 보트에 올라타서는 도망가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자, 200여명의 네덜란드 군사들도 일순간 사기기 꺾였고, 동시에 분노한 마카오 군중들이 밀려들자 전투고 뭐고 다 포기하고 모두 보트에 올라타기 시작합니다.



네덜란드 군사들은 보트에 타다가 총에 맞아 쓰러졌고, 일부는 만원이 된 보트에 올라타다가 동료들의 발길질에 밀려나버렸고, 또 다른 보트는 너무 많은 사람을 태워 뒤집어 지고 병사들은 물먹은 생쥐꼴로 수염을 적시거나 하는등 혼란의 연속이었습니다. 온갖 추한 모습이 다 연출된 끝에 레이예르센은 136명이 죽고, 또 126명이 심각한 중상을 입은것을 알아내었습니다. 이는 유럽인들만을 따진것으로, 인도인등을 합치면 100명이 더 추가되었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당한 최대의 참패이자 극동에서의 대망신이었던 것입니다.




비교도 안되는 전력으로 눈부신 대승리를 거둔 마카오 해안에서는 백전 노장의 포르투갈 퇴역병, 현지에서 살던 중국인,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온 상인들과 이 싸움에 기꺼이 끼어들어 한 몫을한 여행가들, 예수회 선교사들 ─ 아담 샬은 심지어 네덜란드인 선장을 한명 해변에서 체포하기까지 합니다 ─ 거기에 아프리카 흑인을까지 모두 부둥켜 안고 환호의 기쁨을 내질렀습니다. 이 흑인들은 눈부신 용맹을 인정받아 그 자리에서 모두 해방되어 자유민이 되는 합당한 기쁨까지 누렬ㅆ습니다.




반면에 네덜란드는 비참한 기분에 젖어있었습니다. 처음의 교전에서 많은 포격을 당한 데 갈리아스 호는 침몰해버렸고, 포로를 되찾기 위해서 마카오에 사람을 보냈지만 포르투갈인들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쿤이나 레이예르센은 혹시 이 전투가 잘 안풀릴 경우에 대비한 계획을 세워놓긴 했습니다. 싸움이 안 풀릴 시 우선 팽호 제도(澎湖諸島)에 근거지를 세워놓고 후일을 노릴 생각이었죠.


Penghu County Location Map.png


비참한 꼴의 패잔병인 네덜란드 인들은 팽호 제도에 도착을 했는데, 그곳은 아름답고 수심이 깊어 대양 항해 선박들도 정박하기에는 무리가 없었지만, 담수가 나오는 샘은 두 곳 밖에 없는데다 여름이면 수질이 나빠져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또한 나무도 적어 잠시 들리는 곳이면 몰라도, 잠재적인 근거지로 삼기는 어정쩡했습니다.


네덜란드는 팽호 제도에서 50여 킬로미터를 좀 더 전진하여, 대만을 탐사했습니다. 대만의 서쪽 어귀에 상륙한 그들은 현지의 주민들과 어느정도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기도 했지만, 일부 네덜란드 선원들은 중국인을 살해하기도 했습니다.


부하들이 그런 상황일때, 지휘관인 레이예르센은 이단(李旦)이라는 수상쩍은, 노회한 중국 해적의 두목과 아리송한 협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단은 캡틴 차이나(Captain China)라고도 불리우면서, 영국 상인들과도 깊은 관계를 맺었고 마닐라와 마카오에서 류쿠, 대만, 필리핀, 복건, 안남, 통킨 만등 다양한 곳에 무역 항로를 만들어 놓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에스파냐 갤리선에서 무려 9년동안 노예로 지내다가 탈출했던 적이 있는 전설적인 경력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이단은 자기가 중국 정부를 대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볼 것도 없이 이는 거짓말입니다. 하지만 멋 모르는 이 촌뜨기 네덜란드 인들은 이단에게 질질 끌려가면서 매달렸습니다. 사실 그들은 누구와 협상을 벌여야 할지도 전혀 몰랐기에 어쩔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네덜란드 인들에게 불행이 닥쳐오기 시작합니다. 복건의 명나라 신임 순무(巡撫) 남거익(南居益)은 네덜란드 인들의 움직임이 전혀 흥미롭지 않았고, 그들을 팽호 열도에서 몰아내려고 마음을 먹은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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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O-di | 작성시간 12.05.10 채플린을 여기서 보네.
  • 작성자Happiness | 작성시간 12.05.10 2편이 더 흥미진진해요^^ 3편도 기대합니다.
  • 작성자찰목합 | 작성시간 12.05.10 와 마카오주민 네덜란드 포르투갈 예수회 명나라순무까지 얽히고 섥혀 그야말로 흥미진진하네요
  • 작성자jowlaw2 | 작성시간 12.05.10 캐플러 인가 엄마가 70세때 마녀로 몰려서 엄청 절절한 편지쓰고 온갖 난리쳐서 근근히 빼냏다던데
  • 작성자오로쿠트 | 작성시간 12.05.10 예수회들 보니까 생각난게...네덜란드가 식민모국이었던 스페인의 잔혹한 식민지 지배에 대해 엄청나게 깠었는데, 정작 그 네덜란드의 식민지배도 스페인 못지않게 잔악했던게 웃겼죠. 오히려 스페인의 경우 생색내기 정도 차원이었지만 어찌 되었건 인디언 보호관이라던가 각종 보호제도들을 마련하는 노력을 했었고, 공식적으론 개종한 인디오들은 모두 국왕의 신민으로 인정되었죠. 아무래도 스페인의 정복엔 신앙이란 부속물이 들어있어서 그렇겠지만(하지만 인디오들의 수호자 바스톨로메 라스 카사스도 '연약한' 인디오 대신 흑인노예를 쓰자 했으니;).

    반면 네덜란드의 식민지배는 좀 더 자본주의적이라고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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