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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최약, 최강을 무너뜨리다. 나당전쟁(2) ─ 선제 타격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11.04|조회수801 목록 댓글 1



4 신라의 전쟁 준비 

전쟁을 준비하는 태도는 승리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나당간의 군사적 충돌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으로 670년 3월, 신라군과 고구려 유민군이 합동으로 압록강 이북의 오골성 방면으로 진격, 4월 4일 말갈병을 박살내버렸다는 기록이 있다. 전쟁은 가장 늦게 잡아도 이 시기에는 벌어졌으므로, 전쟁 준비는 그 이전부터 진행되어 왔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신라는 669년 5월, 당나라에 급찬 지진산(祗珍山) 등을 당나라에 보내 자석 두 상자를 바치고, 사죄사로 각간 김흠순과 파진찬 김양돌를 파견하였다. 신라 조정이 파진찬 등의 고위 귀족을 보내어 '사죄' 할 건이 무엇일까?

10년 봄 정월에 고종이 흠순(欽純)에게는 귀국을 허락하였지만 양도(良圖)는 억류하여 감옥에 가두었는데 마침내 감옥에서 죽었다. 왕이 마음대로 백제의 토지와 남은 백성을 빼앗아 차지하여 황제가 책망하고 성내면서 거듭 사신을 억류하였기 때문이다.─ 三國史記 卷第六 新羅本紀 第六

이 기사에서 말하는 '사자를 재차 억류' 하게 한 사건과 처음 김흠순 등이 '사죄사'로 가게 된 건이 같은 종류의 사건인지 별개의 일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왕이 마음대로 백제의 토지와 남은 백성을 빼앗아 차지하여 라는 기록이 있고, 또 이 이야기가 당나라에 보고되기까지의 시간을 고려하면 이 백제 지역에 대한 신라의 공격은 669년 중반쯤에는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은 확실하고, 670년 3월에 이루어진 신라와 고구려 유민군이 공격 역시 이 무렵에는 계획이 세워져 있어을 것이다.

그리고, 김유신의 동생이자 문무왕의 외숙인 각간 김흠순, 고위귀족 파진찬 김양도를 목숨 마저 보장할 수 없는 '사죄사'로 파견해야 할 일은, 백제 지역에 대한 신라의 공격 말고는 따로 떠올리기 어렵다. 아마 백제 지역 공략을 위한 탐색전을 벌였는데, 당의 항의하자 이를 무마하기 위해, 달리 말하면 당의 신속한 반격을 늦추기 위해, 김흠순과 김양도가 669년 5월에 사죄사로 파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나당전쟁의 실질적인 개전 시점은 669년 5월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수 있다.

이 일에 나선 김흠순과 김양도 등이, 자신들의 무사 귀환을 장담할 수 없음을 모르고 당나라로 떠났을 거라고는 보기 힘들다.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 하겠다는 식으로 목숨은 내다버리는 것처럼 여긴 그들의 결연한 태도가 신라에게 귀중한 시간을 벌어다 주었다.

이처럼 나당 전쟁의 개전 시점은 가장 늦어도 670년 3월에서, 빠르면 669년 봄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 하였으니, 고구려가 멸망하고 670년에 신라가 당을 분명하게 선제 타격하기전까지의 시간, 즉 699년의 움직임에 주목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실제 신라는 그 시기 대내외적으로 적지 않은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다.

4.1 정치·외교 분야의 준비 

669년 정월, 당나라의 승려 법안(法安)은 신라에 자석을 요청했고, 앞서 말한대로 신라는 이에 자석 두 상자를 바쳤다. 자석은 당시에는 지혈제로서 사용되었으며, 베이거나 창이 찔린 금창 치료에 사용되었다.[10]

그런데 중국은 자석산지가 따로 있을만큼 자석에 대한 공급이 원할하던 나라다. 그리고 법안은 670년 무렵에 다른 당나라의 관리들과 함께, 고구려 부흥 운동을 일으킨 검모잠에게 살해당했던 인물로, 당시 각국의 승려들이 정보전달이나 정보수집 역할을 한 점에서 볼 때 당나라의 스파이였을 가능성이 높다. 당이 자석을 요구하고 신라가 헌상을 한 일은 기본적으로는 외교의 일환이지만, 한편으로는 정보수집을 위한 나당간의 탐색전이라 볼 여지가 충분하다.

또 앞서 말한대로 사죄사를 669년 5월 신라가 당에 보낸것은, 4월 경에는 신라군의 일부가 백제고지로 들어가 작전을 벌였기 때문이라는것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신라는 당의 신속한 반격과 대응을 늦추기 위해, 또 급격한 정세 변경에서 신라인 자신들의 충격도 완화하기 위해 사죄사를 파견하여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668년 급찬 김동암이 왜국에 간 일도 주목할 수 있다. 이 시기는 고구려가 멸망하던 시점이므로, 신라가 벌써 이 무렵 부터 향후 당나라의 충돌에 대비하여 왜가 어떤 태도를 취할지에 대한 타진과 왜와의 화해, 국교 재개 등을 모색하였던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나당전쟁 직전 당 외에는 우방이 없던 신라가, 일본과 외교창구를 열어 후방의 염려를 줄인 후에 나당전쟁에 국가의 모든 역량을 집중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4.2 사회·경제 분야의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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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文武王)

문무왕 대에는 재위 기간 중에 다섯 차례나 되는 사면조치가 진행되었다. 대사면이 활발했던 이유는 기념비적인 사건을 축하하기 위한 조치일 뿐만 아니라, 그만큼 사면해야할 범법자가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669년의 대사면에 관한 사면 대상과 내용이 명기되어 있다. 문무왕은 신하들에게 교서를 내리면서, 범죄자 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까지 포괄하여 사면하였다.

나라 안의 죄수 들을 풀어줄 것이니, 총장(總章) 2년 2월 21일 새벽 이전에 5역(五逆)의 죄를 범하여 사형을 받는 죄목 아래로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죄의 크고 작음과 관계없이 모두 다 풀어주고, 그에 앞서 풀어준 뒤에 또다시 죄를 범하여 관작을 빼앗긴 사람들은 모두 그 이전과 같게 하라. 남의 것을 훔친 사람은 다만 그 몸을 풀어주고, 훔친 물건을 돌려줄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징수의 기한을 두지 말라. 백성들이 가난하여 다른 사람의 곡식을 빌려 쓴 사람으로 흉년이 든 곳에 사는 사람은 이자와 원금을 모두 갚을 필요가 없고, 만약 풍년이 든 지방에 사는 사람은 올해 곡식이 읽을 때까지 단지 원금만 갚고 그 이자는 갚을 필요가 없다. △△ 30일을 기한으로 하여 담당 관청에서는 받들어 행하라.─ 三國史記 卷第六 新羅本紀 第六

5역의 큰 죄를 범한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범죄자와, 손해배상을 해야할 자들을 모두 사면하였으며 백성 가운데 부유층에 곡식을 빌어 그 이자부담 때문에 노비로 전락할 운명에 처한 사람들을 모두 구제하였다. 이 같은 사면은 신라사회의 경제적 피폐화에 따른 민신분층의 붕괴를 막기 위한 조치로 파악된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 중에서는 삼국통일전쟁 과정에서 신라의 포로가 되었을 고구려 장정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며, 장기간의 전쟁으로 생활고에 시달려 범죄를 저지른 신라 장정들도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11]

고대의 전쟁에서는 보다 많은 병력을 확보하고 효율적인 동원체제를 구축하는것이 가장 중요했다. 무열·문무왕 어간에 군사총동원체제를 운영하면서 , 군사 참여층은 중앙과 지방을 포함한 전국의 민으로 확대되었는데, 훈련된 적군의 포로나 사면된 장정들이 있다면 이들을 활용하여 새로운 병력자원으로 충당하였을 가능성도 상정해 볼 수 있다.

4.3 군사·기술 분야의 준비 

나당전쟁을 준비하며 신라의 첩보활동이나 정보수집능력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는데, 669년 5월 기진산을 보내 당에 자석을 바치고, 그 해 겨울 복한(福漢)을 당으로 보내 목재를 바친것도 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정보를 수집한것으로 볼 수 있다. 당나라 역시 신라의 기술자 구진천(仇珍川)을 당으로 데리고 가는 등, 669년에는 나당간의 본격적인 정보수집과 군사기술 획득을 위한 첩보전이 활발하게 발생하고 있었다.

노 제작 기술자인 구진천이 당으로 갔던 것은 신라의 노가 우수한 성능을 가졌기 때문이며, 이러한 노의 성능 개량은 문무왕대에 무기 발전 정책을 추진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신라는 병부에 노사지(弩舍知)와 노당(弩幢)이라는 관직을 설치하여 노에 대한 생산과 관리를 전담시킬 정도로 적극적으로 배려했다.

또 이 시기에는 174개의 목장을 재분배하였는데 이는 신라의 기병 강화 정책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670~680년대 신라의 급진적 기병 증설은 669년 목장 재분와 이를 받은 진골 귀족들의 참여를 상정해 볼 수 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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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급한 사항들과 위의 표를 참조하여 보면, 신라는 늦어도 668년 하반기부터는 이미 당에 대한 전략을 수립하여 일본에 외교사절을 파견하였고, 669년은 전쟁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철저하게 전쟁의 대비를 했으며, 670년 초에는 요동의 선제공격에 나섰던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신라는 이러한 철저한 전쟁준비를 바탕으로 하여, 전격적인 요동의 선제공격과 백제고지에 대한 타격을 감행, 나당전쟁의 초기 주도권을 장악해나갔다.

5 전개 

5.1 신라의 요동 선제 공격 

668년 고구려 멸망 후, 670년 3월, 신라의 설오유(薛烏儒)와 고구려 부흥세력 고연무(高延武)의 2만 연합군이 전격적으로 압록강을 건너 요동을 선제 공격하였다. 이 시점이 바로 나당전쟁의 본격적인 신호탄이었다. 이 공격으로 인해 신라는 나당전쟁 초기의 주도권을 가져왔고, 671년에는 백제 고지를 대부분 영토화 하였다.

3월에 사찬(沙湌) 설오유(薛烏儒)가 고구려 태대형(太大兄) 고연무(高延武)와 함께 각각 정예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옥골(屋骨)에 이르렀는데, △△△ 말갈 군사들이 먼저 개돈양(皆敦壤)에 이르러서 기다리고 있었다. ─ 三國史記 卷第六 新羅本紀 第六 


여름 4월 4일에 맞서 싸워 우리 군사가 크게 이겨 목베어 죽인 숫자를 가히 헤아릴 수가 없었다. 당 나라 군사가 계속 이르렀으므로, 우리 군사는 물러나 백성(白城)을 지켰다. ─ 三國史記 卷第六 新羅本紀 第六


경주에서 오골성(요녕성 봉황성)까지는 약 1,850리(740km), 서울에서 오골성까지는 약 1,000리(400km)이다. 당시의 1일 행군 속도는 30리(12km)~60리(24km)인데,[13] 장거리에다 대규모의 행군이었으므로 1일 평균 30여리로 행군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들 부대가 경주인근에서 출발했다고 한다면 62일, 한강 인근에서 출발했다고 가정하더라도 33여일이 소요된다. 물론 이는 당시의 행군로나[14] 보급 여건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은 단순한 수치로서, 실제로는 이 보다 더 길어졌을 것이다. 즉, 최소 1~2달 가량의 시간이 필요함으로, 3월에 압록강을 건너는 부대는 670년 1월 경에는 주둔지를 출발했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부대편성과 계획은 669년 말기에는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걸리는 부분은 신라 조정에서 설오유 부대 등을 의도적으로 혹한기에 이동시켰다는 이야기가 된다. 의도적으로 설오유 부대를 강행군 시켰다면,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된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다. 설오유 부대가 1월경에 출발했고, 3월에 압록강을 건넜으며, 4월에 교전을 치루었다면 작전 수행기간만 3개월 이상이 된다. 혹한기에 장거리 행군을 하고, 교전에서 승리를 했으며, 물러났을 시기에도 패배해서 물러난것이 아니라 전략상 후퇴를 한것으로 되어 있다. 이 사실을 볼때 설오유 부대는 사기가 높았으며, 분명 뚜렷한 부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케우치 히로시등은 2만의 이라는 적은 부대가 황해도와 평안도를 지나 압록강을 건너 요동 지역까지 침입한다는것은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에, 압록강을 현재의 대동강으로 인식하였다. 하지만 노태돈은 이에 반발하였으며, 실제로 압록강이라고 명확히 기록된 것을 신라 주제에 요동까지 어떠케 감? 이라는 식으로 착오라고 볼 근거는 없다.

669년, 고구려 유민을 강제 이주시키는 작업에 평양 주둔 당군의 상당수가 동원된듯 한데,[15] 이에 따라 평양 일대에 대한 당의 지배력과 군사력은 일시적으로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즉, 670년 3월 설오유와 고연무의 2만 군대가 압록강을 넘어 당군과 충돌 할 수 있었던것은, 당시 평양 일대가 일시적으로 군사적 공백상태였기에 가능한 것이다.

해당 기사에서 언급되는 개돈양은 위치를 알기가 어렵고, 비정되고 있는 지역도 없다. 다만 오골성 주변이므로 압록강 이북 지역임은 틀림 없을 것이다. [16]


그런데 이들이 압록강 유역으로 진군했다면, 평양 부근에 있는 안동도호부 세력을 지나갔다는 소리가 된다. 비록 안동도호부의 세력이 약화 되었다곤 하나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하였을까?

설오유 등이 취할 수 있는 루트는 크게 3가지다. 첫번째는 경기만에서 병선을 타고 압록강 하구로 가는것인데, 가장 수월하긴 하나 당나라 수군에 발각되기 쉽다. 그리고 기록을 보면 이들은 육로를 이용했다.

둘째, 강원도와 함경도를 우회하는 일이다. 발각될 위험은 적으나 거리가 멀고 보급문제가 야기된다. 기습 공격을 하기 위한 시간상 선택하기 어렵다.

세번째로는 평양 주둔 당군을 직접 공격한 후, 평양을 경유하여 그대로 북상하는 것이다. 이는 거리상으로는 가장 빠르지만, 대규모 전투를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기습 공격을 하려는 의도라면 역시 어렵다.

오골성과 평양성을 연결하는 구간은 안동도호부의 주요 간선도로로서, 고려시대에는 복계서로라고 불렀으며 거란군의 공격 루트이기도 하다. 고려시대 교통로가 통일신라의 교통로를 계승하면서 발전했다는 점을 생각해볼때, 설오유와 고연무의 연합군은 북계동로를 이용, 평양을 조금 우회하고 대규모 전투를 회피하면서 빠르게 북상해 나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5.1.1 요동 공격군의 편성과 성격 

설오유 부대는 정병 1만여 명으로, 고연무 부대의 1만여 병사와 연합으로 요동작전에 나섰다. 설오유와 고연무의 부대를 '정병'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이들은 이미 군사적 경험이 있는 자들로 여겨진다. 이들은 4월 4일 말갈군과 교전하게 되는데, 공성전이라기 보다는, '맞서 싸워' 라는 표현을 보았을때 야전을 수행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당군이 계속 이르자 물러나서 백성을 지켰고, 이는 수성전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설오유 부대는 야전과 수성전을 모두 수행했고, 이들은 기병·보병 혼성부대였을 가능성이 높다.

지휘관 설오유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삼국통일전쟁기에 접어들어, 신라의 인물 중에 대규모 부대를 지휘한 인물은 왕, 왕족, 진골 및 유력 귀족 외에는 없다. 그런데 유독 설오유만 사찬의 직위로 1만 명에 이끄는 독립 원정군을 이끌고 있었다.
 
 나당전쟁 시기 신라 관인의 활동 중에, 진골 귀족이 아닌 자가 직접 병력을 지휘한 예는 오직 두 가지 사례 뿐이다. 하나는 670년의 설오유와, 676년의 시득 뿐이다. 기벌포 해전을 지휘한 사찬 시득은 대아찬 철천의 휘하에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그렇다면 사찬의 신분으로 대규모 원정군을 지휘한 사례는 오직 설오유 밖에 없다.
 
또한 당시 신라군의 병력동원능력에서 1만여 명은 결코 적은 병사가 아니다. 이 정도 규모의 원정군을 이끈 지휘관이 진골이 아니라는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를테면, 670년 7월 백제공략 시, 장군 대다수는 진골귀족이었다.
 
 설오유 부대는 또한 진골귀족의 책임자도 없었다. 672년의 석문 전투 등의 사례에서도 나타나지만, 나당전쟁 시기 독립 작전을 수행하는 원정군이나 방어군에는 기본적으로 진골귀족이 책임자로 임명되고, 실무담당자로 사찬급이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설오유가 대규모 원정군의 총 책임자가 된 것은 주목할 만한 일로, 이는 설오유 부대의 성격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설오유 부대가 정병이라는 표현이 있고, 실제로 이들은 작전지속기간이 3개월 이상으로 비교적 길었으며, 30일 이상의 원거리 행군과 도하작전을 실시했고, 혹한기에 부대이동을 강행했다. 또한 행군간 및 전투 후 이탈자가 발생하지도 않았다. 또한 적극적으로 당군과 교전했다. 사서상에서는 설오유 부대가 어떻게 조직되었는지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런데 668년의 기록을 보면,11월 5일 문무왕이 포로로 잡은 고구려 사람 7천여 명을 서울로 데려왔다는 말이 나오고, 671년의 설인귀서에서는 '군사와 말과 재물을 왕 또한 가지게 되었다.'는 표현이 보인다.


 이 시기라면 고구려의 유력민은 당나라로 압송된 상태였다. 고구려 포로를 데려왔다는 말과 함께 671년의 언급을 통해, 신라가 끌고 온 사람들이 일반 백성이 아니라 전투가 가능한 고구려의 잔병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시각에 주장한 이정빈등은, 신라는 이들을 억류 관리하기보다는 이들을 활용하여 새로운 전략을 수립했고, 670년 3월의 설오유 부대와 고연무 부대의 요동진출에는 고구려 포로들의 역할이 상당부분 기여했다는 것이다. 

5.1.요동 공격군의 의미


신라는 670년 3월, 설오유 부대를 요동으로 진출시킨 후에, 7월부터 백제고지로 대규모 진격을 시작했다.


가을 7월에 왕이 백제의 남은 무리들이 돌이켜 뒤집을까 의심하여 대아찬(大阿湌) 유돈 (儒敦)을 웅진도독부 (熊津都督府)에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으나 도독부는 따르지 않고, 곧사마(司馬) 예군 (禰軍)을 보내 우리를 엿보았다. 왕은 그들이 우리를 도모하려는 것을 알고 예군을 머물게 하고 보내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쳤다. 품일 (品日). 문충 (文忠), 중신 (衆臣), 의관 (義官), 천관 (天官) 등이 63곳의 성을 쳐서 빼앗고 그곳의 사람들을 내지(內地)로 옮겼다. 천존 (天存)과 죽지(竹旨)등은 일곱 성을 빼앗고 2천 명의 목을 베었으며, 군관 (軍官) 문영 (文穎)은 12성을 빼앗고 오랑캐 군사를 쳐서 7천 명을 목베었는데 빼앗은 말과 병기들이 매우 많았다. ─三國史記 卷第六 新羅本紀 第六


 기록을 보면 신라가 먼저 웅진도독부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또한 '답설인귀서' 의 기록을 보면, 670년 6월 고구려가 당에 반역을 꾀하였기 때문에, 신라가 이를 먼저 웅진도독부에 알린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만 본다면 신라가 웅진도독부와 협력하여 고구려 부흥운동을 진압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말했다시피, 이미 3월에 요동으로 신라군이 진격을 했고, 또한 백제 80여성을 전격적으로 함락하는것은 사전에 치밀한 준비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을 종합하면, 백제고지 점령은 신라가 사전에 충분한 준비를 취하였기 때문이다. 갑자기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답설인귀서에는 신라가 671년 7월 시점까지 당나라와의 전면전을 가능한 회피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설오유와 고연무 부대의 움직임은 신라 입장에서는 '공식적인' 작전이 아니었으며,신라가 웅진도독부에 공동출병 교섭을 시도한 것은 당에 대한 공격 의지를 은폐하기 위한 허위 전략이라는 시각이 있다.(이케우치 히로시) 


 노태돈은 신라의 요동 작전이 평양 지역의 당군을 소탕하고, 압록강 이북으로 진격하여 당으로 하여금 우선 요동방면의 안전 확보에 주력하게 하여, 백제 고지에 대한 신라군의 작전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게 하는 양동작전이라고 주장하였다. 고간, 이근행 등은 670년 4월, 고구려 부흥운동을 진합하기 위해 편성되었지만, 671년 요동에서 고구려 부흥세력을 진압하고, 9월이 되어서야 평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요동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당군의 한반도 진격은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때 노태돈이 언급한 바대로, 설오유 부대의 요동작전은 당군의 한반도 진군시기를 늦추는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


 이상의 여러 주장을 종합해보면, 신라의 정규군은 백제고지와 고구려고지 남부에 투입시켜 영토를 확보한다. 이때 설오유 부대는 요둥으로 진격하여, 견제작전을 수행함으로서 당이 백제고지에 대한 군사지원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하는, 최소한 시간을 벌어주는 역할을 맡았다는것이다. 설오유 부대가 백성으로 후퇴한 후의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671년 신라가 백제 고지의 중심지에 소부리주를 설치함으로서, 설오유 부대의 목표는 결과적으로 달성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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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사탕찌개 | 작성시간 12.11.05 호오... 잘싸우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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