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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2차 대전 에이스, 포로가 되기보단 죽음을 택한 피뉴케인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8.26|조회수861 목록 댓글 1

 



 Brendan Eamonn Fergus Finucane, 피뉴케인은 1920년 무렵, 북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영국인 어머니와 아일랜드 인 아버지 사이에서, 다섯 아이들의 맏이로 태어났습니다. 집안은 독실한 천주교 가문이었고, 열 여섯살 까지 천주교 가르침에 따라 엄격하고 절제된 생활 양식 속에서 행동한 그는, 그 나이가 되자 서리 주의 리치먼드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런던의 회게사 사무실에서 직원으로 근무했습니다.


 미래의 에이스에게는 의외의 면모일 수 있으나, 그는 숫자와 씨름하는 하는 일을 좋아했습니다. 전쟁터에 나가 있는 상태에서도, 이 재앙이 끝나면 회계사로 복귀하겠다고 공공연하게 말할 정도 였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하늘을 나는것이 그의 운명이었고, 체질이었습니다.


 영국 공군의 당시 지원 최저연령은 열 일곱살. 나이가 찬 그는 곧바로 공군에 지원했고, 조국을 지키기 위한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이때가 바로 1938년 5월, 히틀러의 낌새는 불안정했고, 영국 공군은 현대화를 서두르고 있었습니다. 필요 인력이 늘어남에 따라, 피뉴케인은 별 어려움도 없이 조종사 훈련과정에 참여했고, 1년뒤엔 실전에 배치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940년 6월 초, 첫 출격의 시간이 다가왔지만, 이 일은 피뉴케인에겐 그다지 유쾌한 경험은 되지 못했습니다.


 독일군에게 몰려 프랑스로부터 쫒겨난 영국군은 벨기에의 됭케르크 항구에서 대대적인 철수 작업을 감행했고, 국가적 치욕의 순간에 피뉴케인은 패잔병들을 실은 영국 함대를 엄호하기 위해 떠오른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활약에 독일 적기의 접근을 막았다고 치켜세웠지만, 피뉴케인은 "적기라고는 한 대도 보지 못했다." 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치욕을 씻을 기회는 금방 찾아왔습니다. 1940년 7월, 혼쳐치의 제65전투비행대대에 배치된 피뉴케인은 영불해협의 역구 상선을 폭격하려는 독일 공군에 맞서 거의 매일같이 출격해야 했습니다. 한달 가량 분주하게 공중전을 치른 피뉴케인은 한달이 넘어서야 '손맛'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8월 12일, 독일은 마침내 침공을 위한 전초전으로 영국 공군의 궤멸에 나섰습니다. 장엄한 영국 본토 항공전의 서막이었던 것입니다.




 아침 일찍부터 독일 공군 폭격기는 영국 각지의 비행장을 향해 떠올랐고, 레이더에 나타난 이 무시무시한 벌떼들을 상대로 65중대도 피뉴케인을 포함해 12대의 전투기를 출진시켰습니다. 그들은 몇분뒤, 그 유명한 매서슈미트 Me109 전투기가 포함된 20여대의 적 편대와 교전에 들어섰습니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피뉴케인의 스팟파이어 전투기 앞을 매서슈미트 1대가 스쳐 지나섰고, 그의 동료기 바로 꼬리에 붙었습니다. 피뉴케인은 사격을 퍼부어댔지만 적기는 피했고, 오히려 다른 적기 2대가 그를 잡아먹기 위해 달려들었습니다. 그는 격렬하게 회피 기동을 거듭하다, 갑자기 주위를 둘러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방금전까진 벌떼들처럼 몰려서 싸우고 있었는데, 어느새 주위에 아무 비행기도 사라졌던 것입니다. 공중전에서 정신을 잃으면 흔하게 나타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상황을 보기 위해 신중히 7,000m 상공으로 올라섰습니다. 그의 눈에 12대의 Me109가 프랑스로 돌아가는 것을, 그야말로 완벽한 위치에서 발견했습니다. 위에서 아래로 적기를 내려다보며, 적기가 자신을 눈치 채지 못한 상황. 사냥을 위한 최적의 조건이었던 것입니다.


 피뉴케인은 곧바로 스로틀을 활짝 열고, 적기를 향해 급강하했습니다. 230m거리까지 다가온 그는 일제히 포문을 열어 적기를 격추시켰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쳐갔습니다. 적기는 추락했고, 다른 매서슈미트들은 연료가 부족한지 피뉴케인을 쫒아오지 못했습니다.


 몇분뒤, 맨스턴의 모기지로 돌아온 피뉴케인은, 겨우 한시간의 공중전이었지만 엄청난 떨림에 땀을 잔뜩 흘려 탈진했습니다. 생사를 뒤흔드는 공중전의 스트레스가 그 정도였지만, 쉬고 있을 시간은 전혀 없었습니다. 적기들이 또다시 달려온 것입니다.


 피뉴케인의 비행기에 정비사들이 달려들어 서둘러 연료를 넣고 실탄을 장전했고, 그는 동료들과 함꼐 이륙을 위해 활주로를 박차고 나섰습니다. 그순간, 독일 공군의 50kg 폭탄이 맨스턴 기지를 박살내기 시작했고, 전투기들은 간발의 차이로 피해를 입지 않고 공중으로 날아올랐습니다. 스핏파이어 전투기들은 폭격기들을 맹렬하게 추격했꼬, 약 1,400m 고도에서 15대의 Me109와 마주쳤습니다. 서로는 서로를 향해 맹렬하게 전투를 벌였고, 피뉴케인은 적기를 명중시켰지만 이는 스코어에 인정되지 못했습니다.


 숨막히던 순간이 끝나고, 많은 피해를 입은 65중대는 스코틀랜드로 옮겨져서 휴식과 재충전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다시 영국으로 돌아올때는, 영국 본토 항공전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후입니다. 이후 독일군의 폭격 목표가 군사시설이 아닌 대도시로 바뀌었고, 이것도 밤에 이루어지면서 당분간 피뉴케인은 전투를 거의 겪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1941년 1월 4일, 느닷없이 초계중에 매서슈미트 Me 110쌍발 전투기를 발견했습니다. 적기는 기겁하여 달아났지만 그는 재빨리 달려들어 일제사격을 퍼부어 격침시켰습니다. 그후 몇건의 전과를 더 올린 그는 영국에서 창설된 오스트레일리아 공군 제452전투비행중대의 편대장으로서 커턴 린제이로 옮겨갔습니다. 그의 부대는 9개월 동안 62대의 적기를 격추하는등 순주로운 활약을 보였습니다.


 피뉴케인은 탁월한 리더십을 가지고 있어, 오스트레일리아 조종사들은 자연스럽게 그에게 이끌렸습니다. 그는 조용하고, 또 침착했으며, 나이에 비해 현명했고, 파티를 싫어하지 않으면서도 술은 거의 마시지 않았으며, 다음날 출격이라도 있다 치면 장교 클럽에서 파이프를 물고 골몰히 생각하다가 그대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막사로 되돌아갔습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조종사들도 모두 피뉴케인의 모습을 흉내내었습니다.


 피뉴케인은 엄격한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 기회만 있으면 미사에 참석해서 마음의 안식과 위안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종교에 의지하면서도, 일상 생활에서의 행동이나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종교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었고, 이러한 신사다움때문에 그는 동료와 부하 등 주위 모두에게 존경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 후 1941년 6월 10일, 서리 주의 켄리로 옮긴 452중대는 새로운 비행 대장인 번지와 B편대의 편대장 키스 '블루이' 트러스콧을 만났습니다. 트러스콧, 번지, 피뉴케인은 서로 좋은 팀워크를 보였고, 452부대의 전투력은 곧 절정으로 끌어올랐습니다.


 1941년 7월 11일, 피뉴케인과 452중대는 프랑스 상공으로 진입하여 매서슈미트를 격추했고, 피뉴케인도 한대를 격추했습니다. 이 이후로 시동이 올린 그는 3개월 사이에 18대의 매서슈미트를 혼자서 격추하는 기염을 발휘했습니다. 8월 16일, 그는 8대의 적기와 교전하여 게중 6대를 격추시켰습니다. 아군의 피해는 탄흔 하나 뿐이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그는 확실히 우세하다고 생각하기 전에는 아군에 도박을 걸지 않았고, 위기 속에서도 침착하게 그들을 이끌었습니다. 한번은 피뉴케인과 요기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다가, 스핏파이어 한대가 매서슈미트 2대에게 공격당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위쪽에는 더 많은 Me109들이 드글드글했지만, 그는 아군기를 도와줄 시간은 충분하다고 여겼습니다.


 급강하한 피뉴케인과 요기는 1대의 Me109를 격추했고, 아군을 위기에서 구해내었습니다. 피뉴케인과 트레스콧은 각각 22대, 13대의 스코어를 기록하며 사이 좋은 경쟁을 했고, 언론도 이 대결을 주목했습니다. 그러나 트레스콧이 어둠속에서 담을 넘가 발목을 부러뜨리는 바람에, 경쟁은 싱겁게 끝나버렸습니다.



 1942년, 그는 리처드 루이스라는 오스트레일리아 조종사와 함께 벨기에에서 적함을 공격하던중, 2대의 포케-볼프Fw190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다리와 허벅지에 기관포탄의 파편이 박혔고, 치명적인 부상 속에서 리처드에게 명령했습니다.


 "당장 영국으로 돌아가라고!"


 하지만 리처드는 도망가지 않았고, 피뉴케인 뒤를 엄호했습니다. 적기들의 계속된 공격 속에서 그는 여섯 차례나 뒤돌아 공전을 벌여 한대를 격추했고, 나머지 한대를 쫒아내었습니다. 과다 출혈로 정신을 잃기 직전의 피뉴케인은 필사적으로 버텨, 안전하게 착륙하고 나서야 엔진을 끄고 바로 기절해버렸습니다. 다행히 상처는 생각보다 심하지 않아, 3월 13일에는 다시 출격하여 Fw190을 격추시킵니다.


 이후 그는 계속해서 성공적인 격추를 하여 32대에까지 이르렀고, 누군가 그 비법을 묻자 단순한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전 그저 좋은 눈을 타고 났을 뿐입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사격술을 배웠지요. 적이 나를 보기 전에 내가 적을 먼저 보고, 그 적을 제대로 쏴서 한번에 제대로 맞출 수 있다면, 승부는 그 한번으로 끝난 겁니다. 두 번쨰 기회란 오지 않습니다."


 6월 27일, 피뉴케인은 겨우 21세의 나이에 비행 대대장으로 승진했습니다. 그리고 7월 15일, 그는 스핏파이어 편대를 이끌고 프랑스에 있는 독일군 시설에 대한 대규모 공격작전을 벌였습니다. 임무는 성공적이었고, 그는 언제나처럼 주위를 신중하게 살피며 귀환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늘을 향해 있는 그의 눈은 바닷가에 있는 적의 기관총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단 한 자루의 독일군 기관총이 쏜 총탄, 이것이 하필이면 스팟파이어의 배에 있는 냉각기를 관통해버린 것입니다.


 순식간에 엔진은 과열되기 시작했습니다. 피뉴케인은 뒤돌아서 프랑스 해변을 보았고, 잠깐 생각했지만 포로가 되는것은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그는 연기를 뿜기 시작한 자신의 사랑하는 애기를, 조국 영국쪽으로 방향을 향하고 하고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바다로 16km쯤 날던 기체는, 결국 고도를 잃고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동료들은 옆에서 이를 지켜보았지만,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때, 피뉴케인이 헬멧을 벗어던지고는, 무전기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끝이로군, 친구들."


 언제나 처럼 침착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습니다. 그가 탄 기체는 바다로 곤두박칠 쳤습니다. 요기는 피뉴케인이 천운으로 바다 위로 ─ 그게 안된다면 그를 수습이라도 하기 위해, 바다로 떠오르기를 기다렸지만, 떠오르는것은 기름과 파편뿐이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3,000여명의 조문객들은 한데 모여 그를 기렸고, 수많은 위문편지와 전보가 피뉴케인의 부모에게 배달이 되었습니다. 이 가운데서는 소련의 조종사 두 명의 편지도 있었습니다. 트레스콧도 그를 애도하며 편지를 보냈지만, 그 역시 1943년, 훈련중 바다로 추락했습니다. 기록을 다투던 두 친구는, 저 너머에서도 선의의 경쟁을 이어갔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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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BACCANO | 작성시간 12.08.26 참;; 사람 인생사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걸 잘 말해주는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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