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중국사]소하 ─ 화려하지 않은, 그러나 가장 빛나던 영웅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2.25|조회수1,171 목록 댓글 6

엔하위키에 있는 항목이고 소하 항목은 본래 작성 되 있던 항목이나,

개인적으로 좀 많이 뜯어고친지라 이렇게 올립니다.


http
삼국지 11의 고대무장 일러스트

http
삼국지 12의 고대무장 일러스트

목차

 
1 개요
2 진나라의 관리
3 전시재상(戰時宰相)
3.1 유방을 추대하다
3.2 한나라의 승상
3.3 한신을 천거하다
3.4 전쟁의 기반
4 제국의 재상
4.1 사냥개와 사냥꾼
4.2 성야소하, 패야소하
4.3 처세술로 위기를 모면하다
5 최후
6 평가



1 개요 

http
생몰년도? ~ BC 193
이름소하(蕭何)


시호문종후(文終侯)
출생지패현(沛縣) 풍읍(豊邑)

중국 전한(前漢) 한고조(漢高祖) 시대의 정치가. 서한삼걸(西漢三杰)의 일인[1]으로, 중국사를 대표하는 재상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름이다. (秦) 시대에도 관직에 있었으며, 이후 유방(劉邦)의 막료(幕僚)로 그의 천하통일에 공헌했다.

이 과정에서 개국 공신 서열 1위에 인정받은 인물. 즉 공식적으로 한나라에서 한제국의 통일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인정했다는 말이다. 이때 찬후(酇侯)로 봉해지고 식읍 7,000호를 하사받았다. 상국에 임명되고 "구석"을 수여받아 한나라 역사에서도 최고의 명예를 누렸다. 시호인 문종(文終)과 합칭해 찬문종후(酇文終侯)라고도 한다.

2 진나라의 관리 

소하는 강소성(江蘇省) 서주시(徐州市)에 있는 패현의 풍읍이 고향이었다. 평소에 법 관련 공부를 했었는지, 현내에 소하보다 딱히 법률이 밝은 사람이 없어 패현의 현령은 소하를 주리(主吏)로 두고 있었다.[2]. 사마천의 말에 따르면 처음에는 별달리 특별할것도 없은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유방과는 이때부터 면식이 있었다.

이때 유방은 딱히 벼슬도 하지 않는 백수였는데, 이것저것 관청에서 곤란해질 일이 많았지만 그때마다 소하는 유방을 적당히 도와주었다. <del>이거 부정부패 아닌가</del> 나중에 유방이 정장(亭長)이라는 조그마한 벼슬을 하나 하자 그때도 일을 돌봐주었다고 한다.

소하가 유방의 사정을 이것저것 도와준 이유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보통 의례적으로라도 "태조의 신령한 덕을 알아보아서……" 같은 식의 언급이 있을만도 한데, 사기(史記)나 한서(漢書)나 그 동기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조차 없다. 소하가 유방의 진면모를 알아차려 그를 도와주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고조본기(高祖本記)에서는,

"유계(유방)는 원래 큰소리를 자주 치나 이루어지는 일은 드뭅니다."

라고 발언하는 부분이 있다. 여공(呂公)에게 유방이 땡전 한푼도 없으면서 하례금을 1만전 낸다고 허세를 부린 일에 대하여 소하가 빈정거리듯이 말한 것. 

딱히 유방을 소하가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 일 하나만으로는 사람 마음을 알 수가 없는 부분이다. 높이 여겼다고 해도 하는짓이 너무 터무니없으면 빈정거릴 수도 있고……임협(任俠)의 태도로 이웃끼리 돕자고 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여하간에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므로 그 이유에 대해선 알아서 생각해보자.

여하간 이런 이후에도 유방을 소하가 꾸준히 도와준 사실은 분명하다. 유방이 함양(咸陽)으로 요역하러 떠날 당시에도, 다른 사람들이 300전 씩을 보태줄때 유독 소하만 혼자 500전을 보태주었다.

일 잘하는 사실은 이때부터 유명했는지, 진나라의 어사(御史)들이 패현으로 와서 감찰을 하거나 같이 일을 처리할때도 가장 일을 잘했고, 진나라 어사들도 감탄해서 그를 데려가서 입조시키려고 했지만 소하는 손사레를 치며 가지 않았다. 역시 그 이유에 대해서도 별다른 언급이 없는데, 망해가는 진나라의 상황을 꿰뚫어보고 물에 잠기는 배에 안 타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다. 

3 전시재상(戰時宰相) 

3.1 유방을 추대하다 

소하에게 500전을 받고 유방이 함양으로 떠나던 당시, 진나라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진시황(秦始皇)의 시대부터 이어진 폭정으로 백성들은 신음했고, 이세황제(二世皇帝)는 환관 조고(趙高)에게 일을 맡긴채 사치와 방종에 빠졌다.

결국 폭탄은 터져버려 BC 209년, 진승(陳勝) 등이 처음으로 저항을 시작하여 이윽고 장초(張楚)를 건국했고, 이에 여러 군현의 백성들도 모두 진나라 관리를 때려 죽이고 봉기에 동참했다.

소하가 있던 패현의 현령 역시 그런 분위기는 느끼고 있었고, 자기가 죽지 않으려면 먼저 반란에 동참해야 하겠다고 여겨, 마침 함양으로의 이동을 때려 치우고 망탕산(茫荡山)에서 숨어 지내던 유방을 번쾌(樊噲)를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그런데 정작 유방이 돌아올 때가 되자, 마음이 또 바뀐 현령은 성문을 걸어 잠구고 유방이 들어오는것을 막으면서, 유방과 친해보이던 소하와 조참(曹參)을 죽여버리려고 했다. 느닷없이 죽을 지경에 놓이게 된 소하와 조참은 부리나케 성벽을 넘어 도망쳐서 유방에게 붙어버렸다. 유방이 "현령 그 놈을 잡아 죽여야 패현이 무사하다." 는 내용의 글을 적어 성 내로 화살을 쏘아 보내자, 성 내에서 반응이 일어나 현령을 때려 죽이고 성문을 열게 된다.

일단 반란이 일어나고 나자, 이제 사람들을 이끌 주모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물론 사람들은 유방에게 이 일을 부탁했지만, 유방은 짐짓 거부하는 제스처를 취했지만, 소하나 조참이나 여기서 유방을 거슬려서 좋을 것도 없고, 또 만약 일이 실패하면 자기 친척들이 모조리 도륙 당할까봐 두려워서 유방에게 모든 일을 양보했다. 유방은 이렇게 추대되었다.

3.2 한나라의 승상 

거병 후 소하는 유방의 옆에서 여러 공무를 도왔다. 한동안 소하는 기록에서 별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유방이 항량(項梁)의 세력에 편입되고 이곳저곳에서 전투를 계속하는 와중에 장수도 아니었던 소하가 눈에 뛸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던 것이다.

소하의 면모가 드러나는것은 유방이 함양 입성에 성공하고 난 후였다. 본래 시골 무리들 정도였던 유방과 그 부하들이 진나라 제국의 수도였던 함양에 입성하고 나서, 대부분은 보물을 찾아 헤맸지만 오직 소하만은 진나라 승상부에 보관되어 있던 여러 문서와, 어사부의 율령도서(史律令圖), 지적도 및 호적부 등의 문헌들을 수집하여 깊숙한 곳에 감추어 보관했다.

이로 인해 유방은 훗날의 전쟁에서 중국 전역의 요새, 각 지역의 호구 숫자,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는 지역 등의 여러 정보를 파악하여 한발 앞서 나갈 수 있었다. 반면에 유방의 뒤를 이어 입성한 항우는 롸끈하게 궁실들을 모두 불태워버리는 대조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항우가 유방의 뒤를 이어 함양으로 진격해 옴으로서 유방의 처지는 곤란해졌고, 홍문연(鴻門宴)의 일이 있은 후에 천하의 벽지인 파촉(巴蜀)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다. 거기다가 항복한 장한(章邯)을 비롯해 진나라의 기라성 같은 장수들이 유방을 견제하는 형세가 되자, 유방도 어그로가 머리 끝까지 올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같은 심정으로 항우를 공격해버릴 생각을 품었다. 주발(周勃), 관영(灌嬰), 번쾌 등도 모두 이에 동의했다.[3]

하지만 소하는 이를 저지하고 나섰다. "죽는것 보다야 낫지 않습니까?"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유방은 처음에는 화가 풀리지 않아서 "그럼 니가 죽을래?" 같은 반응을 보였지만, 결국 소하의 설득에 납득했고, 그를 승상으로 임명했다.

3.3 한신을 천거하다 

이 즈음, 미래의 천하대장군 한신은 하후영(夏侯嬰)의 천거를 받고 군량을 담당하는 치속도위(治粟都尉)에 임명되었으나, 딱히 주목을 받고 있지는 못했다. 그러나 눈썰미가 남다른 소하는 한신과 몇차례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그가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것을 눈치챘다.

이 당시 한나라는 대단히 상황이 좋지 못했는데, 터벅터벅 촉으로 걸어온 유방의 군대가 산시성 남정(南鄭)에 이를 무렵이 되자, 이 벽지를 견디지 못하고 하루에도 여러 장수 수십명이 도망가버리는 막장스런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머나먼 지역에 고향을 두고 있는 병사들도 매일매일 동쪽의 고향에 돌아갈 생각으로 노래만을 불러대었다.

이런 망해가는 판국의 분위기에 한신 역시 중용을 받지 못하자 냅따 달아나버리고 만다. 이 사실을 들은 소하는 미처 사정을 고할 겨를도 없이 한신의 뒤를 쫒아 추격했다. 이때 유방은 이제 소하마저 나를 버리고 가는구나라는 생각에 두 팔을 잃은 것처럼 낙담하고 있었다. 그러자 소하가 돌아오자 기쁘기도 하고 분통이 터지기도 해 연유를 물었는데, 소하는 한신을 쫒아간 사실을 말하고, 그를 대장으로 임명할 것을 권했다.

이 당시 소하의 직언은 몹시 충격과 공포.

"대왕은 평소에 오만무례하십니다. 오늘 대장군을 임명한다고 하시면서 대장 될 사람에 대한 태도가 마치 어린아이 대하듯 하십니다. 이런 자세로 인해 한신 같은 호걸들이 대왕 곁을 떠나려고 합니다. 왕께서 한신을 대장군에 임명하시려고 한다면, 필시 좋은 날을 택해 목욕재계(沐浴齋戒) 하신 다음, 단을 세우고 예를 갖추어 의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자기 주군이 되는 사람에게 "너 평소에 너무 건방을 부린다." 고 까는것(……) 다만 유방이 황제가 된 후 에도, 왕릉(王陵) 등이 "폐하는 본래 오만무례하십니다." 같은 발언을 하기도 하는것을 보면, 당시 유방의 세력은 군신간의 격의가 그리 없었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3.4 전쟁의 기반 

한신을 얻은 유방이 이윽고 동쪽으로 나가 삼진(三秦)을 평정할때, 소하는 산시성 남정에 남아 파(巴)와 촉(蜀) 지방을 진무하고 법령을 발포하여 이 지역을 확실한 한나라의 세력권으로 만들었다. 삼진을 평정하는 한나라 군대의 군량과 마초는 모두 여기서 끌어올린 부세 덕택이었다.

BC 205년, 삼진을 평정한 유방이 마침내 여러 제후들과 함께 (楚) 나라의 항우에게 도전할떄, 소하는 같이 움직이지 않고 훗날의 한혜제(漢惠帝)인 태자 유영(劉盈)과 함께 섬서성 임동현 동북쪽인 역양(櫟陽)에 남아 관중(關中) 지방을 지켰다. 

이때 소하는 단순히 관중을 지키기만 한게 아니라, 한나라의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세우고, 궁실을 건축하고, 법령과 규악을 제정하고 관중 각 지역에 군과 현을 두어 행정조직을 완비했다. 즉, 개인이 국가의 기반을 마련해놓은것. 소하는 이러한 일을 할때마다 유방에게 보고했으며, 만일 유방에게 보고하기 힘들때도 적절하게처리하고 유방에게 보고하면 유방은 이에 따랐다. <del>뭐 따질게 있어야지, 혼자 다 하는데</del>

생각을 해보면, 이 시점에서 한나라는 관중과 파촉을 병합했던 부분인데, 이건 전국칠웅 중 최강이자 다른 육국을 벌벌떨게 했던 진나라의 세력권 그 자체다. 물론 전쟁의 여파 등으로 과거 진나라 정도의 생산력은 나오지 않더라도, 이미 그 시점에서 항우의 세력이 비해 생산력으로 그리 꿇릴것은 없었던 것. 문제는 진나라가 멸망하며 무너진 행정조직을 완비하는 일인데, 소하는 매우 빠른 시기에 이 일을 해내었다.

이후 항우와 유방의 전쟁이 장기화되자, 소하는 이렇게 만들어놓은 행정력을 바탕으로 양식과 마초를 끊임없이 유방에게 지원해주었다. 유방은 항우와의 싸움에서 여러번 패하였지만, 소하의 도움으로 계속해서 재기할 수 있었다.

http
형양(滎陽)의 위치

이러한 보급들은 일일히 그 기록이 세세하게 남아있지는 않지만, 이를테면 팽성전투의 사례가 있다. 팽성의 싸움에서 60만 대군이 항우의 군대에게 처참하게 박살난 유방은 형양(滎陽)에서 한신과 합류하고 패잔병을 수습하며 어떻게든 재기를 하려고 했다. 이때, 소하는 관중의 노약자들까지 끌어모아서 어떻게든 병력을 만들어 유방에게 보냈고, 유방은 이 병력을 바탕으로 세력을 다시 규합하여 초나라 군대를 격파해서 대치 상황을 이루어냈다.[4]

항우는 몇차례 유방에게 인상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결국 전쟁 자체를 종결시킬 만한 결정적인 패전은 안겨주지 못했다. 유방이 싸움에서 밀려도 이내 소하의 보급으로 세력을 어느정도 다시 회복했고, 이때문에 계속해서 대치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것. 이렇게 유방이 어떻게든 항우를 막아내고 있는 사이에, 한신은 북방을 완전히 쓸어버리고 있었다.

이때, 유방은 관중의 일을 완전히 소하에게 일임하고 본인은 항우를 막아내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이렇게 되면 유방의 본거지인 관중은 완전히 소하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되고, 소하가 만약 다른 마음을 먹게 된다면 유방은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라는것. 

이때문에 유방은 계속해서 소하에게 사람을 보내 칭송하는 말을 했지만, 뭔가 꺼름칙했다. 이때 포생(鮑生)[5]이라는 사람이 소하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한왕은 전장에 나가 풍찬노숙하며 목숨을 걸고 싸움에 임하고 있음에도, 오히려 사자를 여러 번 승상께 보내 위로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왕이 승상을 의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승상을 위해 한 말씀 드리자면, 승상께서는 자식과 손자 및 형제들 중 싸울 수 있는 장정들을 모아 모두 한왕에게 보내 한왕의 싸움을 도와 온 힘을 다하라고 하십시오. 한왕은 필시 승상에 대해 안심을 하고 다시 신임을 할 것입니다.” 

이에 소하는 그 말대로 시행했고, 이에 유방도 안심하고 마음을 놓았다. 가장 군주에게 의심받을 위치에 있었지만, 뛰어난 처세술로 문제가 생기지 않게 만든 것이다. 결국 이러한 소하의 도움 등에 힘입어 BC 202년, 유방은 마침내 항우를 격파하는데 성공했다.

4 제국의 재상 

4.1 사냥개와 사냥꾼 

천하가 평정되고 나자, 이젠 천하통일에 힘쓴 공신들의 논공행상을 할 차례였다. 문제는 왠만한 공신들 모두가"내가 제일 공을 많이 세웠지." 하면서 싸우는 바람에 1년이 지나도록 도저히 결론이 나지 못한것. '유경, 숙손통 열전'의 언급을 보면, 이 당시 공신들의 모습을 아주 잘 묘사하고 있다.

군신들이 연회석 상에서 서로 공을 다투다가 심지어는 술에 취해 망동하며 검을 뽑아들고 기둥을 내려치는 자들도 있었다. 고제가 보고 매우 근심했다.<del>아 망했어요 유방 : 답이 없다</del>

이때, 보다못한 유방은 자신이 직접 소하를 찬후(酇侯)에 봉하고, 공신들 중 최고의 대우를 하여 가장 많은 식읍을 하사하였다. 이에 여러 장수들은 모두 들고 일어나서 항의했다.

“우리들은 모두 몸에 갑옷을 두르고, 병장기를 손에 들고 전투에 친히 참가하기를 많게는 100여 회, 적게는 10여 회에 걸쳐 했습니다.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고, 적군의 땅을 평정함으로 해서 모두가 크고 작은 전공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지금 소하는 우리와 같이 전투에 참가하여 힘들여 싸워 세운 공로가 있다고 하겠습니까? 그는 단지 필묵을 잡고 입으로만 전쟁을 하고 전투에는 한 번도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오히려 소하의 공을 우리들 맨 위에 놓으시려합니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입니까

이 때 유방의 대답은 그야말로 걸작 그 자체. "니들은 사냥개를 알고 있나?"라고 유방이 묻자 모두 당연히 알고 있다고 말했고, 유방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사냥을 할 때 짐승을 추격하여 물어뜯어 잡는 것이 사냥개의 역할이다. 그러나 짐승의 종적을 추격하여 숨어 있는 곳을 사냥개에 알려는 주는 것은 사냥꾼의 임무이다. 지금 그대들이 한 일이라고는 간신히 짐승들을 잡아왔을 뿐이라 그 공로로 말하면 단지 사냥개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소하는 짐승들의 소재를 파악하여 사냥개들에게 그 목표를 분명히 알려주어 잡아오게 하는 것이 그 공로는 마치 사냥꾼의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동안 여러분들은 혼자, 많아봐야 2-3명이 나를 따랐다. 그러나 소하는 자기들 종족들 수십 명으로 하여금 나를 따르게 하여 천하를 횡행하며 전쟁을 치르게 했다.어찌 그의 이러한 공적을 잊을 수가 있겠는가?"

이에 모든 군신이 데꿀멍 했다고 한다(……)

일단 소하가 가장 대우를 높게 모두 봉작을 받고 나자, 이번에 여러 군신들은 "공신의 서열을 정해주세요." 라고 말하면서 조참을 최고 공신으로 추천했다. 조참이 수많은 싸움터를 전전하며 몸에 70개가 넘는 상처를 입었다는것이 그 이유.[6]

하지만 이미 유방은 군신들의 반대를 모두 꺾어버리고 소하에게 최고의 봉작을 주었는데, 이제 와서 조참을 최고 공신으로 하면 이런저런 말이 나올게 뻔해 소하를 최고 공신으로 해주고 싶었다. 이때, 유방의 심기를 알아차린 관내후(關內侯) 악천추(鄂千秋)가 발언하였다.

“ 여러 대신들의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조참이 비록 전쟁터를 누비고 다니며 적군의 성과 땅을 점령한 공이 비록 크다고 하나, 그것은 일시적인 공로에 불과한 것입니다. 항왕(項王)과 5년 동안에 걸쳐 서로 대치하고 전투를 벌린 폐하께서는 여러 번에 걸쳐 싸움에 지고 그때마다 그 군사들은 모두 달아나 뿔뿔이 흩어져 버리자 홀홀 단신으로 도망치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소하는 그럴 때마다 관중의 자제들을 모아 페하가 계시는 전선으로 보내 그 잃어버린 병력을 보충시켰습니다. 그러한 일들은 모두 폐하의 지시를 받고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한 일입니다." 

"또한 관중에서 수만의 군사들을 전선으로 보낼 때는 언제나 폐하께서는 싸움에서 패한 직후의 가장 위급한 때였습니다. 한군과 초군이 형양에서 몇 년간에 걸쳐 대치할 때, 군중에는 양식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에 소하가 관중에서 수레나 선박을 이용하여 양식을 보내주어 한군은 굶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폐하께서는 비록 여러 번에 걸쳐 효산(崤山) 이동 지역의 싸움에서 패하는 동안 소하는 오로지 관중 지방을 굳건히 보전하여 만세에 길이 빛날 공훈을 세웠다고 하겠습니다."

"지금 비록 조참과 같은 사람 100명이 없다한들 한왕실에 무슨 영향이 있겠습니까? 한왕실은 조참과 같은 사람들을 얻음으로 해서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어찌하여 일시적인 공로를 세운 사람을 만세에 길이 빛날 공적을 세운 사람 위에 놓으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마땅히 소하의 공을 맨 위에 올리고 조참을 그 다음으로 하시옵서소."

즉, 조참 같은 사람은 100명이 없어도 무방하지만 소하의 공은 맨 위로 올려야 한다는것.<del>이게 무슨 굴욕</del> 이에 유방은 소하를 최고 공신으로 정했고, 소하에게는 신발을 신고 전당에 오를 수 있고, 칼을 찬 상태로 황제를 볼 수 있고, 황제를 배알할때도 작은 걸음이 아니라 큰 걸음으로 걸을 수 있게 하는 등 최고의 대우를 해주었다. 눈치빠르게 소하의 편을 든 악천추도 역시 보상을 받았다.

유방은 이런 조치 이외에 따로 2천호의 식읍을 더해주었다. 이는 과거 유방이 함양으로 떠날때, 소하만 2백전을 더 주었던 일 때문.

4.2 성야소하, 패야소하[7] 

그렇게 무탈하게 지내던 와중, BC 196년 한나라를 떠들썩 하게 했던 진희(秦豨)의 반란이 일어났고, 유방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떠났다. 이때, 관중에 있던 한신은 진희의 반란에 동조하여 내부에서 협력하기로 결정했다. 이미 초한전쟁이 이어질 시기부터 "나 왕 시켜 주라" 등등 유방의 어그로를 끌기도 했고, 그 이후에도 유방에게 사로잡혔다가 풀어지는 등 분위기가 대단히 심상찮았기에 선수를 쳐보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계책은 여후(呂后)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

계책을 알았어도 한신의 이름이 워낙 대단하니 함부로 적대의사를 표방하고 잡으려고 하면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 이때 여후가 계책을 물어본 사람이 바로 소하였다. 소하는 이미 진희가 패배했다고 거짓 정보를 꾸몃고, 한신에게 "축하하러 오는게 몸보신에 좋을것" 이라는 충고를 해주었다. 이에 한신은 의심없이 궁으로 나왔다가, 여후가 준비해놓은 무사에게 사로 잡혀서 결국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한신은 소하의 추천으로 인해 한나라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지만, 정작 소하 때문에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된다. 

송(宋)나라 사람 홍매(洪邁)는 자신의 저서인 용재속필(容齋續筆)에서 "한신이 대장군이 된 것은 소하가 천거했기 때문이요, 이제 그가 죽음을 맞이한 것도 소하의 꾀에 의한 것이었다. 그래서 항간에 성공하는 것도 소하에게 달려 있고, 실패하는 것도 소하에게 달려 있다라는 말이 떠돌게 되었다(信之爲大將軍, 實蕭何所薦, 今其死也, 又出其謀. 故俚語有成也蕭何敗也蕭何之語)" 라고 기록하였다.

유방은 소하가 한신을 죽이는데 한 몫 했다는 말을 듣고, 소하를 상국(相國)에 봉하고 5천호의 식읍을 더하고 호위대를 붙여주었다

4.3 처세술로 위기를 모면하다 

소하가 상국이 되자 여러 사람들이 소하를 축하하였는데, 유독 소평(召平)이라는 사람만은 축하를 하지 않고 소하에게 충고를 해주었다.

"지금 황제는 반란군을 때려잡느라 황야에서 고생하는데, 댁은 큰 고생을 하지 않고도 상을 늘려주는데 이게 과연 좋은 일임? 지금 황제는 한신이 반란한 일때문에 크게 놀란 상태인데, 지금 여기서 '호위대'를 붙여준게 과연 좋은 의도일까?"

이에 소하는 곧바로 식읍의 추가와 호위대를 사양하고, 모든 가산을 황제의 군비로 사용하게 했다. 이에 유방은 의심을 풀었다.

BC 195년, 이번에 유방은 구강왕 경포(黥布)의 반란을 진압하고 있었다. 이때 유방은 소하에게 사람을 계속 보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 보았는데, 이 모습을 본 소하의 주변 사람이 그에게 충고를 해주었다.

"지금 황제가 댁을 여러번 떠보는것은, 그 명성이 너무 엄청나서 그런것임. 일부러 명성을 떨어뜨리는게 좋지 않을까?"

이에 소하는 일부러 백성들의 집을 싸게 사들여 명성을 더럽혔다. 이에 유방은 어느정도 안심을 했는데, 실제로 귀환하는 길에 보니 백성들이 "상국이 미쳐서 강제로 백성들의 집을 사들임. 벌써 수천명이 당했음 ㅠㅠ"이라고 하는 모습을 보고 진심으로 이를 믿게 되었다. 

이에 유방은 소하에게 "니가 백성들에게 사죄해야지." 라고 말했는데, 눈치 없는 소하는 이때 자기 나름대로 백성들을 위한답시고 진나라때 조성된 황제 전용 사냥터인 상림원을 개방하여 백성들에게 농사를 짓게 해달라고 주청을 올렸다. 

이에 유방은 소하가 백성들의 인심을 사려는 의도가 아닌가 의심하면서 "너 이 색히, 상인들에게 뇌물 먹었지? 그리고 너는 사냥터를 내놓으라고 해서 니 명성이나 올리려고?" 하며 소하를 감옥에 쳐넣어 버렸다.

이때, 왕(王) 씨 성을 가진 한 사람이 소하가 뭘 그리 잘못 했느냐 하고 유방에게 따졌다. 유방이 소하가 뇌물을 받아 먹고 인심을 사서 못된 짓을 꾸미려 한다고 말하자,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가 항우, 경포, 진희와 싸울때도 관중을 지키던게 소하인데, 그때 소하가 한발만 움직였어도 일을 이뤘을 텐데 그때도 반란을 안 일으킨 소하가 이제와서 왜 반란을 하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유방은 뉘우치는 바가 있어서 마음이 편치 않아 소하를 곧바로 석방했다. 감옥에서 나온 소하는 맨발로 유방을 찾아와 사죄하였고, 그 모습을 본 유방은 "내가 걸주(桀紂) 같은 폭군이다." 라고 하면서 소하에게 사죄하였다.

여담으로, 이때 유방은 경포와의 싸움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후였다. 소하에 대한 갑작스러운 공격적인 태도는 자신이 죽고 난 후에, 명성이 어마어마한 소하가 헛된 짓을 꾸몄을 경우에 대한 불안감이 이유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앞서 왕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말했듯이, 소하가 정말 반역을 할 생각이었다면 그 전에도 얼마든지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유방은 곧 숨을 거두었고, 이후 혜제가 즉위하게 되었다.

5 최후 

소하는 본래 조참과 사이가 나쁘지 않다가, 어떤 일을 계기로 해서 그와 몹시 사이가 나빠지게 되었다. 혜제 2년, 소하는 이미 나이가 100여살에 가까워졌고, 병에 걸려 죽을 날이 다가왔다. 이에 혜제가 소하를 찾아와, 차기 재상에 "조참이 어떤가?" 라고 묻자, 소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황제께서 좋은 재상을 얻었으니, 소하는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소하는 전답과 가옥을 살 때는 항상 외딴 벽지에 마련했는데, 집을 지을 때는 담장을 세우지 않았다. 소하가 숨을 거두면서 남긴 말은 이러하였다. 

“나의 후대가 현명하다면 나의 검소한 면을 배울 것이고, 현명하지 못하더라도 권세있는 사람들에게 빼앗기지는 않으리라!”

6 평가 

사기 소상국세가에서는, 소하가 죽고 난 후에도 황실이 소하의 후손을 찾아 작위를 잇게 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소하가 이룩한 공훈은 다른 공신들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높고 컸기 때문이었다.

비록 그 역할 때문에 초한지 같은 소설에서 소하의 활약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또 실제 사기나 한서 같은 정사의 기록에서도, 소하는 한신같이 군대를 이끌고 추풍낙엽으로 적을 무찌르거나, 장량처럼 계책을 내어 전략을 수립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소하는 그런 영웅들의 화려한 전설 뒷편에서, 그 영웅들이 활약할 수 있는 무대를 묵묵히 마련해주었다. 삼진을 평정한 한신의 공에는 파와 촉에서 물자를 끌어올린 소하의 공훈이 있었다. 유방은 팽성의 싸움에서 유례없는 대패를 당했으나 소하의 보급에 힘입어 궤멸적인 패배를 극복해 내었다. 유방과 항우 최후의 광무(廣武) 대치 당시, 유방의 군량은 풍족하였지만 항우의 초군은 빈곤에 시달렸다. 항우는 그 이전까지 유방을 수차례 격파했지만, 소하의 보급이 이어지면서 결코 유방에게 결정타를 먹이지 못했다.

천하가 통일된 후에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소하는 관중을 지키며 그 기반을 든든하게 했다. 또한 한신의 반란을 사전에 차단했고, 엄청난 명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떤 경거망동도 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다른 공신들이 주살되는 와중에서 몇번을 의심받으면서도 천수를 누렸다. 서한삼걸 중 소하는 가장 튀지 않는 일생을 살았지만, 그러나 의심할 여지없이 그의 일생은 영광된 일생이었다.

사마천은 소하에 대해 이렇게 평론을 남겼다.

"백성들이 진나라의 가혹한 법에 원한을 품고 있다는 정황을 파악하고, 역사의 흐름에 순응하여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제공했다. 

한신(韓信), 경포(黥布) 등 한나라 창업공신의 대부분은 주살되었으나, 소하가 이룩한 공적만은 찬란히 빛나 그의 지위는 공신 중에서 제일 높았으며, 그 명성은 후세에 까지 전해져 주문왕을 도와 주나라를 일으킨 굉요(宏夭)와 산의생(散宜生) 등이 이룩한 공적과 비견될만하다고 하겠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多爾袞 | 작성시간 13.02.25 행보관의 시조
  • 작성자블라디미르 대공 | 작성시간 13.02.25 만렙 행보관
  • 작성자gksmf | 작성시간 13.02.25 한신 장량의 비해서 말년이 평안했던건 저런 처세술 덕분인가..ㅋㅋ
  • 작성자자우림 | 작성시간 13.02.26 쇼미더 머니의 원조!!!!!!!!!!!!!!!
  • 작성자centurion | 작성시간 13.03.03 밥굶는 군대에 승리란없다.
    사흘만 굶어봐 밥한그릇이 하나님으로 보일테니 ㅋㅋ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