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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무적의 천하명장 "한신"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2.28|조회수1,643 목록 댓글 7

엔하위키 항목이지만 제가 대대적으로 수정해서 이렇게 올립니다.



서한삼걸(西漢三杰)
유후(留侯) 장량(張良)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찬후(酇侯) 소하(蕭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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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1의 고대무장 일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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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2의 고대무장 일러스트

목차

 
1 한나라의 장수
1.1 개요
1.2 출신
1.3 막장 시절
1.3.1 밥 좀 주십쇼
1.3.2 과하지욕
1.4 한군의 대장
1.4.1 죽을 지경에서 벗어나다
1.4.2 소하가 천거하다
1.4.3 유방에게 진면목을 보이다
1.5 전설의 시작
1.5.1 삼진 평정
1.5.2 한군의 대패 - 한신은 패전과 관련이 되지 않았나?
1.5.3 위표를 박살내다
1.6 한신, 북상하다
1.6.1 배수진(背水陣)
1.6.2 연나라를 항복시키다
1.6.3 잠자다가 군사를 빼앗기다
1.6.4 역이기의 어처구니없는 죽음
1.6.5 용저를 격파하고 제나라를 평정하다
1.7 한나라의 신하가 되느냐, 왕의 길을 걷느냐
1.7.1 제나라 왕이 되다
1.7.2 천하 삼분
1.8 해하전투
1.9 토사구팽
1.9.1 밥값을 갚다
1.9.2 회음후
1.9.3 다다익선
1.9.4 성야소하 패하소하
1.10 평가


1.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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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BC 196
이름한신(韓信)
작위회음후(淮陰侯)
출생지강소성 회음(淮陰)[1]

중국 전한(前漢) 한고조(漢高祖) 시대의 명장(名將). 한나라의 대장군. 장량소하와 함께 한초삼걸(漢初三傑)[2]의 일인으로, 중국사를 대표하는 명장 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3]

과하지욕(胯下之辱)의 고사를 만들었고, 국사무쌍(國士無雙)이라는 표현을 받았으며, 전한 건국 이후 최초에 봉해진 7명의 이성왕(異姓王) 중에 한명이었다. 그러나 엄청난 공적에도 불구하고 유방(劉邦)의 견제와 본인의 처세 문제가 겹치면서, 천수를 누린 장량과 소하와는 달리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다. 이로인해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고사가 널리 퍼졌으며[4] '토사구팽' 이라는 고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되어버렸다.

1.2 출신 

먼저 짚고 넘어가자면, 한신의 출생에 관해서 한(韓)나라 왕족 출신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도 많은데 이건 명백한 오류다. 한신의 출생지인 회음현[5]은 서주와 회남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이곳은 전국시대 나라 영역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그런데 역사소설 등을 쓰는 와중에 한신과 동명이인이었던 한왕 신이, 이 한신을 혼동되어 한나라 왕족 출신이라고 묘사하는 작가도 있었고, 이 영향으로 한신이 한 왕족 출신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심지어는 80년대에 연재된 고우영 초한지에도 방대한 내용에 걸쳐 한신이 한나라 왕자로 설정되어 있다. 강조하지만 한신은 절대 한(韓)나라와는 관련이 없다. 사기(史記)나 한서(漢書) 그저 '한신은 회음현 사람이다'라고만 적혀 있다.

1.3 막장 시절 

1.3.1 밥 좀 주십쇼 

한신의 집안은 왕족과는 백만광년 떨어진 집안으로, 별볼일 없는 가난한 집안에 지나지 않았다. 집안 후광이랄것도 없고, 가난하게 자란 탓에 한신 본인의 품행도 그다지 단정하지 못해 어디서 추천도 받지 못했다. 아래 과하지욕 고사에 나오듯이 일단 한신 본인의 키는 꽤 큰 편으로 보이지만<del>루저는 피했다</del>장사꾼 노릇도 그럴듯하게 하지 못해 항상 누군가에게 빌붙어서 밥을 얻어먹는 안습한 백수 신세였다. 이때문에 주위 사람들은 거의 한신을 찌질이로 여기면서 싫어했다.

그러다가 한신의 어머니도 돌아가셨는데, 한신은 장례를 치를 비용도 없었다. 그러나 물기 없는 높은곳에 어머니를 매장하여 마치 그 주위에 1만여 가를 둔 것 같이 했는데, 사마천(司馬遷)은 자신이 직접 회음에 가보니 진짜로 그러하였고, 한신이 그때 상황은 막징이었어도 뜻은 높은곳에 두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저러나 묫자리를 잘 쓴다고 해서, 당장 없는 밥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비참한 꼴의 한신은 어떤 정장(亭長)을 줄줄 따라다니며 밥을 빌어먹었는데, 이 덩치 큰 빈대를 정장의 아내는 대단히 싫어했다. 그래서 하루는 일부러 남편의 밥을 새벽에 해서 먹였는데, 해가 뜨고 어느날처럼 아침을 빌어먹으러 한신이 찾아왔지만, 이미 정장 내외는 식사를 마친 후라 한신이 빈대짓을 할 수 없었다. 한신은 눈치가 보여 다시는 그 집에 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딱히 밥을 먿을 수 있는 재주도 없고, 굶주린 채로 낚시터를 어슬렁거렸는데, 빨래 하던 아낙네 중에 그 모습을 불쌍히 여긴 한 사람이 한신에게 밥을 주었고, 한신은 그걸 얻어먹으면서 굶주림을 해결했다. 

며칠을 이렇게 하고 난뒤, 한신은 워낙 고맙기도 해서 이렇게 약속하였다.

"내가 후일, 반드시 부인들이 베풀어준 은덕에 보답하리라!" 

그러나 그런 말을 들은 아낙네는 되려 벌컥 화를 내었다.

"사내 주제에 자기 먹을 것 하나 해결하지 못하면서 무슨 보답 운운하는가? 앞길이 창창한 왕손[6]이 밥을 굶고 있어 불쌍히 여겨 밥을 먹도록 해 주었거늘, 어찌 내가 보답을 바라겠는가?"

1.3.2 과하지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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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l>아이고 신나라</del> 
<del>진나라에선 말 대신 한신을 탑니다</del>
<del>한신 : 답이 없다</del>

이렇게 동네 아낙네들에게도 까일 지경인데, 젊은 사람들에게는 말할 나위도 없었다. 회음의 젊은 사람들은 대놓고 한신을 욕하면서 소리쳤다.
"네가 멀대처럼 키가 크고 칼차기를 좋아하지만, 그러나 겁만 많을 뿐이다. 네가 죽음을 겁내지 않는다면 그 칼로 나를 찌르고 이 길을 지나가고, 만일 죽음이 두렵다면 내 가랑이 밑으로 기어 지나가라!"
당연한 소리지만 가랑이 사이로 지나려면 무릎을 꿇고 포복 자세로 질질 기어가야만 한다. 자존심으로 죽고 사는남자에게는 이런 굴욕도 없는 일이다. 보통 어지간하면 화를 내서 싸움을 하거나 하겠지만……

한신은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허리를 굽혀서 가랑이 사이를 질질 지나갔다. 생각을 해보자. 다 큰 어른이 무릎 꿇고 질질 다른 사람 가랑이 밑을 기어가는 모습을……정말 추할 것이다. 마침 길거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그 모습을 보고는 비웃음을 터뜨리면서 한신에게 겁쟁이라고 놀려대었다. 고향에서는 그야말로 웃음거리 신세로 떨어져버린것.

1.4 한군의 대장 

1.4.1 죽을 지경에서 벗어나다 

답이 없는 찌질이가 되어 막장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던 한신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진나라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진시황(秦始皇)의 시대부터 이어진 폭정으로 백성들은 신음했고, 이세황제(二世皇帝)는 환관 조고(趙高)에게 일을 맡긴채 사치와 방종에 빠졌다.

결국 폭탄은 터져버려 BC 209년, 진승(陳勝) 등이 처음으로 저항을 시작하여 이윽고 장초(張楚)를 건국했고, 이에 여러 군현의 백성들도 모두 진나라 관리를 때려 죽이고 봉기에 동참했다. 이때, 오현(吳縣)에서 거병한 항량(項梁) 역시 북상하여 회수(淮水)를 건넜던 것이다. 한신은 칼을 하나 차고 서둘러 항량에게 달려가 그 부하가 되었다.

그러나 항량의 부하가 되었다고 해서, 무슨 대반전이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한신은 철저하게 이름이 묻혀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곧 항량이 싸움에서 패해 항우(項羽)가 그 세력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한신은 낭중(郎中) 자리에 임명되었다.

상황이 조금 나아진듯 싶기도 했지만, 한신이 무슨 제안을 올릴때마다 항우는 철저하게 무시했고, 어떤 계책도 써주지 않았다. 결국 참다 못한 한신은 항우에게서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마침 그 시기는 유방이 홍문연(鴻門宴)의 일이 있은 후에, 천하의 벽지인 파촉(巴蜀)으로 터벅터벅 들어가고 있던 시기였다. 한신은 그 행렬에 합류해 한군에 귀순했다.

그러나, 한군에서도 한신의 자리는 없었다. 한신은 그저 작은 자리를 하나 얻었을 뿐이었다. 그러던 와중, 무슨 막장 짓을 했는지 한신은 참수형을 당하게 되었고,[7] 한신과 같이 있던 죄수들도 모두 끌려와 눈 앞에서 차례로 목이 베었다. 한신의 앞으로 13명이 모두 처형되고 이제 한신의 차례가 되자, 한신도 이렇게 죽기는 어이가 없었는지 하늘을 바라보다, 마침 눈 앞에 있는 하후영(夏侯嬰)에게 소리쳤다.

"상(上)께서는 천하를 취하고 싶지 않으신가? 그렇다면 이 장사(壯士)를 참하라!"

하후영이 듣기에 묘한 소리였으므로, 하후영은 우선 한신이 죽지 않게 했고, 이야기를 해보니 이 사람이 키도 크고 허우대도 좋고 해서 유방에게 그를 추천했다. 말을 들은 유방은 한신에게 군량을 담당하는 치속도위(治粟都尉) 자리를 주었지만, 아직은 한신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1.4.2 소하가 천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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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하(蕭何)

이때, 소하는 한신과 몇번 대화를 해볼 기회가 있었고, 말을 나눠 보니 이 사람이 생각보다 뛰어난 인물이었다. 

이 당시 한나라는 대단히 상황이 좋지 못했는데, 터벅터벅 촉으로 걸어온 유방의 군대가 산시성 남정(南鄭)에 이를 무렵이 되자, 이 벽지를 견디지 못하고 하루에도 여러 장수 수십명이 도망가버리는 막장스런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머나먼 지역에 고향을 두고 있는 병사들도 매일매일 동쪽의 고향에 돌아갈 생각으로 노래만을 불러대었다.

그리고 그렇게 도망가는 장수들 중에는 한신도 있었다. 어차피 여기 있어봐야 유방은 자기를 써주지도 않을 것이라고 여긴것. 이 사실을 들은 소하는 미처 사정을 고할 겨를도 없이 한신의 뒤를 쫒아 추격했다. 

이때 유방은 이제 소하마저 나를 버리고 가는구나라는 생각에 두 팔을 잃은 것처럼 낙담하고 있었다. 그러자 소하가 돌아오자 기쁘기도 하고 분통이 터지기도 해 연유를 물었는데, 소하는 한신을 쫒아간 사실을 말하고, 그를 대장으로 임명할 것을 권했다.

"여러 장수들 같으면 얻기 쉽지만, 한신 같은 자라면 나라안의 선비중 그에 비견할 자가 없습니다. 왕께서 꼭 오래토록 한중(漢中)의 왕이 되려고만 하신다면, 한신을 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반드시 천하를 다투고자 하신다면, 한신이 아니면 더불어 대사(大事)를 도모할 만한 자가 없습니다. 원컨대 왕께선 편안히 결정하십시오.”

이때 한신은 그저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던 인물에 지나지 않았지만, 소하는 그 진면목을 완전히 꿰뚫어 본 것이다. 유방 역시 이런 벽지에 쳐박히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한신을 장수로 쓰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소하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비록 장수로 삼으신다해도 한신은 머무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유방은 한신을 대장군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소하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또다른 제안을 했다.

"대왕은 평소에 오만무례하십니다. 오늘 대장군을 임명한다고 하시면서 대장 될 사람에 대한 태도가 마치 어린아이 대하듯 하십니다. 이런 자세로 인해 한신 같은 호걸들이 대왕 곁을 떠나려고 합니다. 왕께서 한신을 대장군에 임명하시려고 한다면, 필시 좋은 날을 택해 목욕재계(沐浴齋戒) 하신 다음, 단을 세우고 예를 갖추어 의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에 유방은 소하의 제안대로 단을 세우고 대장군을 임명하는 예를 갖추었다. 그러자 다른 장수들은 "아 신난다! 보나 마나 내가 대장군에 되겠지?" 같은 반응을 보였는데, 정작 모이고 보니 왠 키만 큰 놈이 단에 오르고 있던 것이었다. 이에 장수나 병졸이나 할것없이 모두 경악했다고 한다.[8] 

1.4.3 유방에게 진면목을 보이다 

이렇게 임명식이 끝나고 난 뒤, 유방은 따로 한신을 불러들였다. 소하가 하도 칭찬해서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진것. 이 자리에서 한신은 유방에게 이렇게 물었다.
'''오늘의 적은 항왕(項王)이 아니겠습니까? 대왕께서 생각하시기에, 스스로 용맹하고 날래며 인자하고 강인한 것을 항왕과 비교해보신다면 어떠십니까?"

이 시기 항우는 거록의 싸움에서 진나라군을 격파하고, 모든 제후들을 영향권 아래 두고 있는 그야말로 리즈 시절이었다. 유방은 솔직하게 "내가 다 항우만 못하다."고 인정했고, 이에 한신은 유방에게 절을 올리고 말했다.

"저 한신 또한 대왕이 항왕만 못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신이 일찍이 항왕을 섬겼사온대, 항왕의 사람됨을 말하고자 청합니다. 항왕이 노해 화내어 갑자기 소리치면 천 사람이 모두 나가 떨어집니다. 그러나 현명한 장수를 임명해 맡기지 못하니 이는 필부의 용맹입니다. 항왕은 남을 보면 공손히 삼가고 화기애애하게 말을 하며 남에게 병이 생기면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나눠주다가도, 남에게 공이 있어 마땅히 봉작(封爵)해야 할 때면 인수를 새김에 각박하여 어쩔 수 없이 주니, 이는 소위 아녀자의 인자함입니다.

항왕이 비록 천하를 제패해 제후를 신하로 삼았다 해도, 관중(關中)에 머물지 않고, 팽성(彭城)에 도읍했습니다. 또 의제(義帝)와 약속을 어기고, 왕을 친애함에 제후들에게 고르지 않습니다. 제후들은 항왕이 의제를 강남(江南)을 쫓아낸 것을 보고, 모두들 또한 돌아가 제 주인을 쫓아내고, 좋은 땅에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항왕이 지나는 곳마다 망하여 잔멸(殘滅)하지 않은 곳이 없어, 백성의 원망이 가득합니다. 백성들이 (항왕을) 의지한 것은 아니며, 다만 그 위세에 겁을 먹어 강제로 복종되었을 뿐입니다. 이름은 비록 패왕(覇王)이 되었지만, 실제론 천하의 인심을 잃었으니, 그래서 그 강성함이 쉽게 약해진다고 한 것입니다. 

지금 대왕께서 진실로 그 도를 바로잡으시어, 천하의 무용(武勇)있는 자를 임명한다면, 어찌 주살치 못하겠습니까! 천하의 성읍을 공신들에게 봉해주면 어찌 복종치 않겠습니까! 의병의 마음을 쫓아 동쪽으로 돌아가신다면 무엇인들 무너뜨리지 못하겠습니까! 또 삼진(三秦)의 왕은 진(秦)의 장수가 되었는데 진의 자제를 거느린 지 수년이어서 죽은 자는 헤아릴 수 없고, 또한 그 무리를 속여 제후들을 항복시켰습니다. 신안(新安)에 이르렀을 때, 항왕은 진의 항졸(降卒) 20여만 명을 속여 파묻고, 오직 장한(章邯)‧사마흔(司馬欣)‧동예(董翳)만 살려주었습니다. 

진의 부형들이 이 세 명을 원망함이 골수에 사무칩니다. 대왕께서는 무관(武關)에 들어가 추호도 해를 끼친 바 없고, 진의 가혹한 법을 없애고, 백성들에게 법 3장만 약속하여, 진의 백성들은 대왕이 진의 왕이 되지 않길 바라는 자가 없습니다. 제후들과 약속에서 대왕은 당연히 관중의 왕이 되어야 하며, 관중의 민호(民戶)들은 이것을 압니다. 

왕께서 (관중의) 왕을 빼앗기고 촉으로 가셨으니, 백성들 중 이를 한탄치 않는 자가 없으니, 지금 왕이 병사를 일으켜 동쪽으로 가신다면, 삼진은 격문만 돌려도 평정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파촉에 처박혀 미래의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는 유방에게, 그야말로 막힌 곳을 뻥 뚫어주는것 처럼 시원한 말이었다. 유방은 한신의 말을 듣고 대단히 기뻐하면서, 한신을 너무 늦게 얻었다고 여겼다. 유방은 마침내 한신의 능력을 완전히 신뢰했고, 한신은 유방의 신뢰를 바탕으로 작전을 수립해 각 장수들이 움직일 곳을 정했다.

드디어 한군이 동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1.5 전설의 시작 

1.5.1 삼진 평정 

마침내 BC 206년 8월, 한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방은 한신의 제안에 따라 옛날의 길을 이용해 우회하여 옹왕(雍王) 장한(章邯)을 공격했다. 당시 한군은 파촉에 들어오면서, 장량의 건의에 따라 여러 절벽 등에 만들어놓은 잔도(棧道)를 모두 불태워버린 상황이었다. 잔도가 모두 불탔으니 한군이 나오려면 시간이 걸릴 텐데……라고 생각했을 장한등에게 한방을 제대로 먹일 수 있는 것이다.

장한은 이에 진창(陳倉)에서 한군을 막기 위해 달려나왔다. 진창은 현재의 섬서성 보계시(寶鷄市)로, 사천 땅에서 관중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요지였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패배한 장한은 지금의 섬서성 건현(乾縣)인 호치(好畤)로 불러나서 다시 싸웠으나, 여기서도 또다시 패배했다. 이에 장한은 폐구(廢丘)로 물러났다. 

이후 유방은 장한을 폐구에서 포위하고, 다른 장수들을 시켜 옹 땅을 모조리 평정했다. 잠시 양하(陽夏)[9]에서 막혔던 한군은, 그러나 다음해 다시 진격을 시작하여 색왕(塞王) 사마흔(司馬欣), 책왕(翟王) 동예(董翳), 하남왕(河南王) 신양(申陽) 등을 모조리 격파하고 관중을 평정했다. 

이 과정에서 사마흔, 동예, 장한, 신양 등을 격파한 공을 모조리 한신의 공적처럼 말하는 경우도 있긴 한데, 기록으로 보아서는 알 수 없다. 회음후 열전에서는 이 진격 과정이 잘 나와있지 않고, 고조본기에서는 딱히 한신만 움직였다고 볼 근거는 없으며, 그보다 한군 전체가 같이 움직인 케이스에 가깝다. 즉, 한신의 공적도 있겠지만 정확히 한군 전체의 공적으로 보아야 한다는것.

이때 한신이 개별적으로 움직인 경우에 대해, 당시 항복을 하지 않고 버티던 한왕(韓王) 정창(鄭昌)을 격파했던 일을 한신이 독자적으로 움직인 경우라고 볼 수도 있다. 다만, 이 한신은 그 한신이 아니다. 한자까지 완전히 똑같아서 헷갈릴 수 있지만 이 사람은 한왕 신이다. 한서 고제기에 한(韓)의 태위(太尉)라는 언급이 있기 때문. 

여하간에 마침내 삼진이 평정되었고 관중이 유방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즉, 이제 항우와 한번 싸워볼만 해진 것이다.

1.5.2 한군의 대패 - 한신은 패전과 관련이 되지 않았나? 

이후 유방은 위왕(魏王) 표(豹), 은왕(殷王) 사마앙(司馬卬) 등을 격파하며 순조롭게 진격을 거듭했다. 당시 항우는 북쪽에서 제나라와 싸우고 있어고, 유방은 다섯 제후를 끌어모아 무려 56만이라는 대군으로 항우의 본거지인 팽성(彭城)에 진입했다.

이때, 제나라에서 싸움이 끝나지 않았던 항우는 3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급히 달려와 한군을 그야말로 개발살내었다. 한군은 곡수(穀水)와 사수(泗水) 10만이 죽고 수수(睢水)에서 또 10만이 죽었다. 그야말로 처참할 정도의 패전을 당한것.

이 싸움에 대해서, 한신이 공적을 세우는것을 시기한 유방이 한신의 군지휘권을 빼앗고 자기가 해먹으려고 하다가 된통 당해버렸다고, 한신이 이를 수습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다만 이는 사기나, 한서같은 정사의 기록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기록이다. 이러한 언급은 대부분 소설 초한지 등에서 유방의 악랄함(……)을 강조하기 위해 집어넣은 에피소드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제 싸움에서는 유방이 한신의 지휘관 같은 것을 박탈한 경우는 없고[10], 한신이 이 전투에서 관련되지 않았다는 기록도 찾아보기 힘들다. 고조본기, 항우본기, 회음후 열전, 하후영 열전, 관영 열전, 유후 세가, 조상국 세가, 한서 고제기, 한서 한신전 등등 관련 기록을 모두 살펴 보아도 딱히 둘이 독자적으로 움직였다고 보기 힘들기 때문. 그냥 이 싸움은 유방이고 한신이고 항우에게 영혼까지 쳐맞았다고 보는게 옳을 것이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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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한신은 패잔병을 수습하여 형양에서 유방과 만나 초나라 군을 격파하여 그 동진을 저지했다. 이로 인해 유방은 위기를 넘기게 되었다. 다만, '한신이 패잔병을 수습해서' 유방과 만났다는 점에서 '역시 한신은 후방에서 패전에 관련되지 않았다가, 유방이 삽질한걸 수습한거 아님?' 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만약 한신이 후방에서 "패잔병을 수습" 했다면 팽성에서 패배한 전투를 하남성인 형양보다 뒤에서 수습해서 형양에서 "유방과 만나" 그 수습한 패잔병으로 초나라 군사를 물리쳤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뭔가 이상한 이야기이다.

또, 회음후열전에서도 유방과 한신이 형양에서 만나 적을 격파했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항우 본기나 하우영 열전 등에서도 유방이 형양에 도착한 뒤에 패잔병들을 모두 모을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패잔병을 모으고 수습한게 한신만의 공은 아니라는것. 무엇보다, 소하가 관중의 인력을 모두 끌어모아 형양으로 미친듯이 보내고 있었다.[11]

즉, 여러가지면에서 볼때 한신은 이 엄청난 패배의 똥물에서 완전히 벗어나긴 힘들다. 또, 그 이후에 초나라군의 공격을 저지한 싸움에 있어서도 한신만의 공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적어도 '유방 개색히가 한신 물먹여서 한군이 대패함 ㅈㅈ' 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한신의 진가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1.5.3 위표를 박살내다 

팽성에서 한군이 처참하게 박살이 나자, 항우의 지릴듯한 포스에 정신이 번쩍 든 제후들은 죄다 편을 갈아타기 시작했다. 새왕(塞王) 사마흔(司馬欣)과 동예(董翳)이 모두 항우에게 도망쳤으며, 제‧조‧위나라가 모두 유방을 배신하고 항우에 붙어먹었다. 특히, 위왕 위표(魏豹)는 부모의 병문안을 가야 한다고 구라를 치고는, 유방의 곁을 떠나자마자 항우의 편으로 갈아탔다(……) 

이때, 유방은 위표를 다시 이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역이기(酈食其)를 보내 설득을 해봤지만, 통하지가 않았다. 그러자 유방은 무력 행사로 나가기로 하고, 한신을 좌승상으로 임명해서 위표를 치게 했다.

이때, 한신은 역이기에게 위표가 주숙(周叔)이라는 자를 장수로 삼으면 성가실거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역이기에게 백직(栢直)이라는 자가 주숙 대신 장수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그 놈은 젓비린내 나는 더벅머리일 뿐임." 하며 좋아했다.

이때, 위표는 포판(蒲坂)이라는 곳에 군대를 주둔시켜 놓고, 임진(臨晉)쪽으로 한신이 강을 건너 오는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한신은 일부러 임진 쪽으로 도강하려는듯한 제스처를 강하게 보여주고, 실질적인 주력은 더욱 북쪽의 하양(夏陽)으로 가게 하여 강을 건너서 위나라의 수도 안읍(安邑)을 공격했다.

위표는 경악해서 군대를 돌려 안읍으로 돌아가자, 임진 쪽에서 적의 주의를 끌던 한나라 군이 위나라 군의 뒤를 쳤고, 안읍으로 갔던 병력 역시 위표를 공격, 앞뒤에서 적을 공격하자 위나라 군은 단박에 무너지고 위표는 사로잡혔다. 단 한번의 싸움으로 나라 하나를 멸망시키고, 적 군주를 사로잡은것. 위나라를 평정한 한신은 그곳에 하동군을 설치했다.

1.6 한신, 북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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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의 이동루트

하동을 평정한 한신은 유방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의 의견을 전했다.

“원컨대 3만 병사를 더해주시면, 신이 북으로 연(燕)‧조를 잡고, 동으로 제를 치고, 남으로는 초의 보급로를 끊은 후, 서쪽에서 대왕과 형양에서 만나기를 청합니다.”[12]

그리고, 장량 역시 이를 권하자, 유방은 장이(張耳)와 병사 3만을 보내주었다. 한신은 3만의 군대를 이끌고, 유방과는 별개로 장이조참을 옆에 두고 독자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1.6.1 배수진(背水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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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이 위표를 격파했을 때가 8월이었다. 그런데 9월 무렵, 한신은 대(代)를 평정하고 있었다. 대의 재상 하열(夏說)이 안간힘을 써봤지만, 연여(閼與)에서 대패하고 한신에게 사로잡혔다. 

그런데 이 무렵, 유방은 사정이 급했는지 한신의 부대에서 정예병들 차출하여 형양으로 데려가 초군을 막도록 했다. 그렇다면 한신의 부대는 규모가 줄어들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한신과 장이, 조참 등은 아랑 곧 하지 않고 동쪽 정형(井陘)으로 나아가 조나라를 격파하려고 했다. 이에 조왕과 성안군(成安君) 진여(陳餘)등은 20만[13]에 달하는 군대를 이끌고 한신을 막으려고 했다.

이때, 조나라의 광무군(廣武君) 이좌거(李左車)는 진여에게 자신의 계책을 말했다.

“듣자하니, 한의 장수 한신이 서하(西河)를 건너, 위왕을 사로잡고 하열을 붙잡고, 알여 땅을 피로 물들였다 합니다. 오늘 다시 장이(張耳)의 보좌를 받은 한신은 조나라를 함락시키려는 계책을 정했, 이 군대는 승세를 타고 나라를 떠나 멀리에서 싸우고 있으니, 그 예봉(銳鋒)은 당할 수 없습니다. 

신이 듣건대,‘천 리 밖에서 군량을 운송하여 먹는 군사들은 그 얼굴에 주린 기색을 띄우고, 또한 장작을 패고 풀을 베어 불을 지펴야만 밥을 해 먹을 수 있는 군사들은 항상 굶주려 있다고 했습니다.고 했습니다. 지금 정형의 길은 수레가 굴러 다닐 수 없고, 기병이 대열을 이룰 수 없습니다. 수백 리를 행군하였으니, 그 군대의 군량은 반드시 뒤에 있을 것입니다. 

원컨대 족하(足下)께서는 신에게 뛰어난 병사(奇兵) 3만을 빌려주시면, 샛길을 따라 그 수송대를 끊겠습니다. 족하께서는 도랑을 깊이 파고 성채를 높게 쌓고 적과 더불어 싸우지 마십시오. 적은 앞에서는 싸울 수 없고, 퇴각해서는 돌아갈 수 없으니, 신이 병사로 그 배후를 끊으면, 들에는 노획할 것도 없어, 열흘도 지나지 않아 두 장수의 머리를 아래서 회롱하게 될 수 있습니다. 원컨대 군(君)께서는 신의 계책에 유의하시어 필히 두 사람에게 잡힌 바가 되지 않게 하십시오.”

즉 우주방어로 일관하면서, 따로 별봉대를 뽑아 적의 길어진 보급로를 차단해서 박살을 내버리자는 것.[14]

하지만 진여는 싸움은 항상 정정당당하게 해야 하는것 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냥 싸워도 우리가 이길텐데 비겁하게 그런 방법까지 써야겠음?"(……)라는 이유로 그 제안을 거절했다. 한신은 적을 정탐하다가, 이좌거의 계책이 쓰여지지 않았다는 말을 듣자 대단히 기뻐하였다. 원정군을 이끌고 온 한신으로서는 갖아 싫은 대처법이었기 때문.

한신은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나섰는데, 당시 조나라군은 정형구(井陘口)의 높은 지대에서 한군을 내려다보면서, 높은 곳을 공격하려고 하는 한신이 멍청한 짓을 한다고 비웃었다. 한신과 장이는 조나라군에 싸움을 걸었지만, 이내 못 당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한군의 본대는 강가에 있었는데, 조나라 군은 한신을 추격해 본대가 있는곳까지 왔고, 강때문에 도망갈 방법도 없는 한나라 부대는 치열하게 싸워 쉽게 적에게 무너지지 않았다.

조나라 군은 싸움이 쉽지 않자, 일단 자기들의 보루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조나라 군의 진영은 이미 한나라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는것 아닌가! 사실 한신이 배수진을 치며 미친듯이 버튈때, 따로 경기병 2천여명은 우회하여 적의 보루를 급습한 것이었다. 보루가 적에 장악되어 있는 모습을 본 조나라 군은 패닉에 빠졌고, 조나라 장수들이 도망치는 병사들의 목을 베어보았지만 이미 전열이 붕괴된 조나라 군은 달아나기 바빴다. 한신은 계속해서 적을 추격하여 진여의 목을 베었고, 조왕 헐(歇)을 사로잡는데 성공했다.

한신이 굳이 배수진을 친 이유는, 작전이 성공하려면 적의 거센 공격을 한번 막아내는 방법이 필요한데 훈련이 잘 된 병사들이 아니라 시장바닥의 사람들을 대충 끌어모은 그 병력으로는, 그런 사지가 아니면 도망치기 바빴을 것이라는게 이유였다. 처음에는 한신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던 수하 장수들은 한신의 생각에 감탄하였다.

1.6.2 연나라를 항복시키다 

==== 연나라를 항복시키다 ==== 
한신은 조나라를 평정한 후, 광무군을 죽이지 말라고 엄명을 내리고, 그를 만나서는 융숭하게 대접했다. 그리고 자신이 연나라와 제나라를 공격할 의도가 있음을 설명하고, 이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그러자 이좌거는 굳이 싸울 필요는 없다고 대답했다. 

"원래 성안군 진여는 백전백승(百戰百勝)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단 한 번의 실수로 그의 군사는 호성(鄗城)에서 패하고 그의 몸은 저수(泜水) 강안에서 죽었습니다. 오늘 장군께서는 서하에서 하수를 건너 위왕 표(豹)를 사로잡고, 북쪽으로 진격하여 연여(閼與)를 피로 물들이며 대(代)나라의 상국 하열(夏說)을 포로로 삼았습니다. 계속 진격하여 일거에 정형(井陘)의 관문을 떨어뜨리고 오전도 미처 다 가기 전에 조나라의 20만 대군을 격파하고 그 대장 성안군 진여를 죽였습니다."

"장군의 이름은 해내에 멀리 퍼지고, 그 위세는 천하를 진동시켰습니다. 이에 병화가 머지않아 자기 몸에 이르리라고 생각한 농부들은 농기구를 손에 놓아 밭 갈기를 멈추고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언제나 동원령이 내릴지를 알기 위해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정세는 장군에게는 매우 이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백성들은 과로에 시달리고 군사들은 피로에 지쳐있어 사실은 전투에 동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오늘 장군께서 피로에 지친 군사들을 다시 일으켜 연나라로 진격하여 그 견고한 도성 밑에 진을 치고 비록 싸우려고 하신다 할지라도 장시간의 공격에도 그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기라도 한다면, 오히려 한군의 피폐한 실상만 드러나고, 군대의 기세는 꺾이어 결국은 시일만 오래 끌게 되어 군량미만 다하게 될 것입니다."

"약한 연나라를 굴복시키지 못한다면 제나라는 필시 국경의 경비를 강화하여 전력을 다해 한군에 대항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연(燕)과 제(齊)는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며 서로 양쪽에서 버티며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로써한(漢)과 초(楚)의 싸움은 승부가 분명하게 되지 않고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면 천하의 정세는 장군에게 불리하게 변하게 됩니다. 

"소인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연제(燕齊) 두 나라를 공격하려는 장군의 계획은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고로 용병에 능한 자는 자기의 단점으로 상대방의 장점을 공격하지 않으며, 자기의 장점으로 상대방의 단점을 공격합니다."

즉, 사실 이미 한신의 군대는 한계에 봉착했고, 연나라와의 싸움에서 고전하게 된다면 그 어려운 실상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니 연나라도, 제나라도 결코 항복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지금은 한신의 명성이 절정에 오르고, 모두가 한신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에 이좌거는 굳이 싸움 할 필요없이, 적당한 사람을 보내서 항복을 권유하면 저쪽에서 항복할것이고 말해주었다. 한신은 그 계책에 따라 연나라에 사람을 보냈고, 연나라의 왕 장도(臧荼)와 신하들은 바람에 쓰러지는 풀잎처럼 모두 한나라에 항복했다.

1.6.3 잠자다가 군사를 빼앗기다 

이즈음 유방은 승승장구를 거듭하는 한신과는 달리 상당히 위급한 지경에 처해 있었다. 형양에서 1년 넘게 항우의 공격을 근근히 막아내고 있었지만, 이제 한계에 가까워진것. 급한대로 진평(陳平)의 계략을 이용하여 범증(范曾)을 쫒아내는 일은 성공했지만, 눈 앞에 있는 항우의 군대는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기신(紀信)이 유방으로 분장하여 초나라 군대의 시선을 끌고, 본인은 관중으로 몸을 피했다. 이후에 다시 군대를 모집하여 성고(成皐)로 진입했지만, 항우의 공격이 너무 강력하여 하후영과 함께 간신히 몸을 피해 황하를 건너 한신과 장이가 있는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때, 유방이 한신의 군영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이었다. 처음에 한나라의 사자라고 자신의 이름을 대고 성벽으로 들어온 유방은, 곧바로 장군의 인수(印綏)와 부절(符節)을 손아귀에 넣고, 순식간에 인사배치를 끝내 그 병력을 완전히 자신의 통제 하에 놓았다. 이때 한신은,

잠 자고 있었다.

유방이 눈 깜짝할 사이에 군대의 지휘관을 강탈하는 동안, 한신은 장이와 함께 꿈나라 여행을 떠나고 있던 중이었다. 자고 일어나 보니 느닷없이 유방이 있자 한신은 경악했고(……) 유방은 장이에게는 조나라를 지키게 하고, 한신은 조나라의 상국으로 삼아 즉시 제나라를 공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보통 역사에서 군대의 지휘권을 가진 장수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경우가 많고, 역으로 군주가 군사력이 전무하다면, 결국 그 장수의 파워에 휘둘리다가 비명횡사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아니, 보통은 이런 시나리오가 일반적인데, 이때 유방은 미역국 마시듯이 순식간에 한신의 지휘권을 자기에게 가져왔고, 잠 자고 있던 한신은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순식간에 털렸다.(……)

한신과 유방의 악연은 이때부터 시작된 셈인데, 이후로도 한신은 잠 자다가 창졸간에 군대를 빼앗긴 이때처럼, 이상할 정도로 유방에겐 약한 모습을 자주 보여주고 만다.

1.6.4 역이기의 어처구니없는 죽음 

유방의 명령대로, 한신은 군대를 이끌고 제나라의 평원(平原)으로 이동했다. 이때, 아직 한신이 도착하기 이전,역이기가 먼저 유방에게 청하여 제나라를 항복시키기 위해 떠났다. 

역이기의 화려한 언변을 들은 제왕 전광(田廣)은 싸워봐야 더 나을것도 없다고 생각하여, 유방에게 항복하기로 하고 역하(歷下)[15]에 주둔하고 있던 제나라 군사들의 경계를 풀게 했다. 이대로라면 싸우지 않고도 한나라가 제나라를 영향권 아래 둘 수 있는 상황.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말 잘하는 변사였던 괴철(蒯徹)이라는 인물이 한신을 충돌질 한것. 괴철은 "님은 일년 동안 고생해서 조나라 50여 성을 함락시켰는데, 저 역이기라는 서생 놈은 눈깜짝할 사이에 제나라 70여성을 항복시키려고 하고 있는데, 형씨의 공이 저 서생 놈 보다 못하다는 거임?" 하고 한신을 꼬드겼다. 이에 훌라당 넘어간 한신은 즉시 군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껏 준비를 하고 싸워도 승부가 어떨지 모르는 판에, 경계를 완전히 풀고 있다 기습을 당했으니 상대가 될리 없었다. 한신은 적을 순식간에 격파했고, 패주하는 적을 쫒아 제나라 수도 임치(臨淄)에 까지 이르렀다. 

당시 역이기는 제나라 사람들과 좋게 술자리를 가지면서 끽연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졌고, 놀란 전광은 역이기에게 "너 지금 당장 저 한신의 군대 못 오게 안 막으면, 삶아서 죽여주마."라고 협박했다. 하지만 역이기는 이런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도 불구, 기개를 끝까지 잃지 않았다.

“큰일을 도모하는 사람은 자질구레한 일을 개의치 않으며, 덕이 높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책망을 사양하지 않는다고 했소.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가 공을 위해 무슨 일을 다시 할 수 있겠소?"

결국 역이기는 인생 최대의 하이라이트 시기에서 삶아서 죽었다.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대해서 사마천은 전담열전(田儋列傳)에서 "참으로 심하도다, 괴통(蒯通)의 지모여! 제나라를 혼란에 빠뜨렸으며 회음후를 교만하게 만들어 마침내는 그 두 사람을 망하게 만들었다." 고 하며 비난했다. 

만일 이때 괴철이 한신을 꼬셔대지 않았다면, 제나라 전씨는 유방에게 무난하게 항복했을 테고, 연왕 장도나 조왕 장오(張敖)처럼 이성왕에 임명되면서 가문을 좋게 보존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16] 그러나 이 괴철의 제안 때문에 제나라는 박살이 났다.

그런데 사마천은 이 일이 제나라 전씨의 몰락 뿐만 아니라, 한신을 교만하게 만들었다. 고 지적한다. 이때, 역이기는 유방의 승낙을 받고 제나라에 파견되었으며, 한신의 이 행위는 한왕 유방의 뜻을 분명하게 거스르는 행위였다. 보는 시각에 따라 한신에 대한 유방의 분노, 이후에 '왕을 시켜달라' 고 조르는 한신의 행태 등이, 여기서 씨앗을 뿌렸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사마천의 지적은 이러한 면을 이야기 하는것일 수 있다.

1.6.5 용저를 격파하고 제나라를 평정하다 

제왕 전광은 역이기를 삶아 죽이고 고밀(高密)[17]로 달아나면서,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을 구했다. 한신은 유방의 부하고, 유방에 적대한다면 붙을 사람은 한명 밖에 없었다. 전광은 항우에게 사람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항우 역시 한신이 초나라 북쪽을 완전히 평정하는 일을 두고 볼 수는 없었기에, 항우로서는 이례적으로 무려 20만이나 되는 대군을 용저(龍且)와 주란(周蘭)에게 맡겨, 한신을 상대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용저는 군대를 이끌고 전광과 합류했다.

이때, 용저가 한신과 겨루기 전, 어떤 사람이 하나의 전략을 제시했다. 지금 싸우면 형세가 좋지 못하니 싸움은 피하고, 제왕 전광을 내세워 항복한 제나라의 성들을 설득하고, 초나라 20만 대군의 기세를 보이면 항복한 성들이 모두 다시 분위기를 보고 들고 일어날 것이며, 후방이 막히게 되는 한신은 싸움 한번 제대로 못하고 박살나버린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용저는 거절했다.

“나는 평생 한신의 사람됨을 알아 왔는데, 쉬운 상대일 뿐이다. 빨래하는 아낙에게 밥 얻어 먹었으니 자신의 계책을 취하는 바가 없고, 가랭이 밑을 지나가는 치욕을 받았으니 사람의 용기라곤 겸한 것이 없으니, 족히 두려워 할 바가 아니다. 또 제를 구하고 그를 항복시킨다면 내게 무슨 공이 있는가? 지금 싸워서 그를 이긴다면 제의 반을 얻을 수 있는데, 어찌 그만두겠는가?"[18]

한신이 초나라 군대에 있던 적이 있었으니, 용저 역시 한신의 막장 시절 이야기는 들어본 것으로 보인다. 용저는 한신의 찌질한 일화들을 들먹이며 그를 무시했고, 즉시 교전을 벌이기 위해 유수(濰水)를 사이에 두고 한군과 대치했다.

이때, 한신은 밤 중을 틈타 만개의 주머니를 만들고, 그 안에 모래를 잔뜩 넣어 모래 주머니를 만든 뒤, 강의 상류에 가서 그것을 던져 물의 흐름을 막아버렸다. 그리고 용저의 군대에 싸움을 걸다가, 짐짓 패하는 장면을 연출하여 달아났고, 이를 본 용저는 기뻐하며 말했다.

"나는 원래 한신이라는 위인은 겁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부대를 총동원해 한군을 추격했는데, 바로 그때 상류가 다시 뚫리면서 엄청난 물이 떠밀려 왔고, 초나라 군은 강을 절반도 건너지 못하고 박살이 날때, 다시 한군이 재차 반격을 가하자 용저는 전사했고, 사령관이 죽자 초나라 군대도 여지없이 박살이 나버렸다. 제왕 전광도 달아났고, 한신은 도망치는 부대를 성양(城陽)까지 추격하여 대부분의 병사들을 사로잡았다.

BC 203년, 마침내 한신은 위, 대, 조, 연, 제 5개국을 모조리 평정하는데 성공했다.

1.7 한나라의 신하가 되느냐, 왕의 길을 걷느냐 

1.7.1 제나라 왕이 되다 

이때, 한신의 기세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 했고, 한신은 유방에게 자신을 제나라의 가왕, 즉 임시적인 왕으로 봉해주기를 청하였다.

"제나라 사람들은 속임수가 많고 변화무쌍하니 반복이 심한 나라입니다. 또한 초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 제가 이곳의 가왕(假王)이라도 되어 진정시키지 않는다면 정세가 안정이 안 되어 후일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 한신의 제안이, 천하 삼분의 일을 차지하고 있는 사나이의 야심인지, 아니면 진실로 그저 일시적인 계책으로 제안을 하는 일인지, 그 동기에 대해 사기나 한서에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이때 유방의 상황을 보자면 사수(汜水)에서 초나라 대사마(大司馬) 조구(曹咎)와 장사 사마흔을 격파했으나, 소식을 들은 항우가 팽월(彭越)을 공격하다 말고 돌아와서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19]

게다가 이미 한신은 역이기 사건으로 유방의 의중을 거스른 전례도 있었고, 이때문에 유방은 몹시 분개해서 앞뒤 생각하지 않고 한신을 공격해버리려고 했지만, 장량이[20] 유방의 발을 슬쩍 밞고, "지금 한신을 건드려서 좋을게 없습니다." 라는 말을 해주자, 열받긴 했지만 사리분별을 할 능력은 충분히 있던 유방은 순식간에 태도를 돌변해서 소리쳤다.
"사내 자식이 왕 노릇을 하려면 진짜 왕을 해야지, 가왕이 뭐라더냐?""

그리고 곧바로 장량을 한신에게 보내 한신을 제나라 왕으로 임명했고, 곧바로 초나라를 치도록 명령했다. 밥을 빌어먹고 지내던 회음의 찌질이가, 제나라의 당당한 왕이 되는 순간이었다.

1.7.2 천하 삼분 

믿었던 용저까지 죽어버리고 나자, 항우 역시 한신의 기세에 덜컥 겁을 먹었다. 게다가 제나라는 초나라의 바로 머리 위쪽이니, 한신이 항우를 압박하기 시작하면, 이미 팽월만으로도 부담스러운 항우에게는 정말 가공할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항우는 우태(盱胎) 사람 무섭(武涉)을 보내, 한신을 회유하려고 시도했다.

무섭은 "유방 그 양반 못 믿을 사람임. 오늘은 댁하고 친교가 두터운것 같아도, 나중에는 댁을 배신할걸? 그러니 우리 왕하고 연합하셈."하고 제의 했지만, 한신은 단칼에 거절하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이 사람이 항왕을 모실 때는, 관직은 낭중에 불과했고, 하는 일은 극(戟)을 들고 항왕의 신변이나 지켰습니다. 간언을 올려도 귀를 기우려주지 않았고, 계책을 내어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 나를 한왕은 나를 상장군에 임명하고 그 인장과 함께 수만 명의 군사를 주었습니다. 또한 나를 대하기를 자기의 옷을 벗어 나를 입혀주고, 자기의 식사를 같이 나누어먹게 했습니다. 나의 말에 귀를 기울려주고 나의 계책을 채택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이에 무섭도 대답할 말이 없어 물러갔다. 그런데, 이때 또 괴철이 슬금슬금 한신에게 다가왔다. 괴철이 보기에 천하의 향방이 한신에게 달려 있었으므로, 그를 위해 계책을 한번 내어보기로 한것. 괴철은 처음에는 '관상을 봐주겠다.' 라는 시덥잖은 소리를 하며 한신에게 접근하더니, 곧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천하에 처음으로 일어나 어지러워졌을 때, 영웅호걸들이 제각기 명분을 내걸고 한 번 소리치니 천하의 재사들이 구름과 같이 몰려들어 물고기 비늘처럼 서로 뒤섞이더니, 들불처럼 번지는 화염과 같이, 일진광풍의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일어났습니다. 

당시 선비들의 관심사는 단지 진나라의 멸망에 대한 것뿐이었으나, 그러나 지금은 초와 한이 나뉘어 다툼으로써, 천하의 죄 없는 백성들은 그들의 간과 쓸개가 땅에 깔리게 되었고, 황량한 교외의 들판에 나 뒹굴고 있는 아비와 자식의 해골은 그 수효가 많아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초나라가 팽성에서 일어나 사방의 적을 쫓아다니다 그 패주하는 적의 뒤를 따라 형양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승세를 탄 초군이 천하를 석권하며 천하를 진동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초군도 경(京)과 색(索) 사이에서 한군의 반격으로 기세가 꺾이고 성고의 서쪽에 있는 험악한 산세에 막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한지가 이미 3년이 되었습니다. 한왕은 몇 십만이나 되는 인마를 이끌고 공현(鞏縣)과 낙양(洛陽) 일대에서 초군의 서진을 막고, 그곳의 험준한 산과 강의 요충지에 의지하여 초군의 공격에 간신히 버티고 있습니다. 

한왕은 그 동안 하루에도 몇 번이나 싸움을 치렀음에도 지금까지 한 치의 공도 세우지 못하고 패전만 계속하다가 외부로부터 구원도 받지 못하고 결국은 형양과 성고의 싸움에서 타격을 입고 완(宛)과 엽(葉) 땅으로 달아났습니다. 이것이 소위 지혜는 바닥이 나고 용기는 다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군대의 사기는 험준한 요새에서 꺾이고 창고의 양식은 다 떨어졌으며 백성들은 고통과 피로에 지쳐 그 원성은 길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어 민심은 동요되어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제 소견으로는 이러한 형세는 천하의 성현일지라도 그 화란을 그치게 할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오늘 결국 한왕과 초왕 두 왕들의 운명은 모두 장군의 손안에 달려있게 되었습니다. 장군께서 한왕에게 협조하면 한왕이 승리할 것이고, 초왕에게 협조하면 초왕이 승리를 취하게 될 것입니다. 이에 제 속마음을 피력하여 어리석은 계책이나마 올리고자 하오나 단지 걱정되는 것은 장군께서 제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진실로 능히 장군께서 저의 계책을 받아들이신다면 한과 초 두 나라에 이익을 주어 모두 존속케 하고, 천하를 삼분하여 정족지세(鼎足之勢)를 이루어 아무도 감히 먼저 움직이지 못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된다면 장군의 뛰어난 능력과 성스러운 덕성으로 수많은 무기와 군사들을 거느리고 부강한 제나라를 근거지로 삼고, 연과 조 두 나라를 복종시키고 유(劉)와 항(項)의 군대가 없는 땅으로 나아가 그들의 후방을 압박한다면, 그것은 바로 백성들의 마음에 순응하는 바가 될 입니다. 

또한 계속해서 서쪽의 형양성 쪽으로 진격하여 유(劉)와 항(項)의 분쟁을 중지시켜 군사들과 백성들을 위해 그들의 목숨을 보전시키라고 요구한다면, 천하 사람들은 바람처럼 달려와 메아리처럼 호응할 것입니다. 누가 감히 장군의 명을 듣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큰 나라는 쪼개지고, 강한 나라는 약하게 되어 제후들을 세울 수 있게 됩니다. 이에 제후들이 일단 서게 된다면, 천하는 장군이 베푼 덕에 감격하여 제나라의 명을 받들며 귀의할 것입니다. 

이에 제나라의 옛 땅을 안정시키고 교하(膠河)와 사수(泗水) 유역을 근거지로 하면서 덕을 베풀어 감동시킨 제후들을 소집해서 두 손을 높이 들어 읍을 하면서 겸양의 자세로 자신을 낮춘다면 천하의 제후왕들과 그 재상들은 줄을 서가며 제나라에 들어와 조배를 드릴 것입니다. 

나는 ‘하늘이 주는 것을 취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후에 벌을 받고, 때가 왔을 때 행동하지 않는다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는다.’(盖聞天與不取 反受其咎, 時至不行 反受其殃 )라고 들었습니다. 원컨대 장군께서는 심사숙고하시기 바랍니다."

괴철이 설득하고, 한신이 고민하는 이 부분은 회음후 열전은 물론, 사기 전체에서도 명장면으로 손꼽히는 부분이다. 한신은 이 말을 듣고, "한왕이 나에게 잘 해주었는데, 내가 배신하는게 옳겠는가?" 하고 고민했다. 그러자 괴철은 다시 한번 "어차피 평생 가는 우정 따위는 없다."는 논지로 사이가 좋았다가 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열거했고, 한신은 "조금 생각해 보겠다." 면서 답변을 미루었다.

며칠 뒤, 애가 탄 괴철은 다시 한번 한신을 설득했다. 그러나 결국 한신은 주저주저 하다가 결국 괴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또, 자신의 공이 워낙에 크기 때문에, 자신에게서 유방이 제나라를 쉽게 빼앗아가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자 괴철은 일이 글렀음을 알고, 일부러 미친 사람 행세를 하며 돌아다녔다. 유방이 승리하면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만으로도 처형 감인데, 정신병자 행세를 해서 이를 모면해 보려고 한것.

이 이야기에서 한 가지 의문은, 괴철과 한신의 이 대담은 그야말로 완전히 밀담인데, 어떻게 사마천이 바로 이 이야기를 옆에서 본것마냥 생생하게 기록했냐는 점이다.[21] 이는 진시황 사망 후, 이사와 조고, 호해가 사구(沙丘)에서 모의를 하는 부분과 더불어 사마천이 절대로 그 내막을 알 수 없는 상황으로 손꼽힌다.

다만, 거의 사마천의 창작(혹은 사마천의 시대에 떠돌아다니던, 그 당시 상황에 대한 이야기들) 임이 분명할 사구 모의와는 달리, 일단 한신과 괴철의 대담을 했었던 사실 자체는 확실하다. 한신의 사망 후에 유방은 괴철을 잡아들였으며, 이때 괴철은 "내가 한신에게 반란을 권했다." 고 인정을 했기 때문. 

다만 자세한 대화 내용이 문제인데, 괴철이 결국 죽지 않고 풀려났음을 생각해본다면 괴철이 구전이나마 대략 상황을 말했고, 훗날 사마천이 어떻게 떠돌아다니던 이야기를 들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1.8 해하전투 

=== 해하전투와 반전 === 
항우는 팽월과 유방의 협공 때문에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있었고, 군량도 부족해졌으며, 또한 한신의 기세 때문에 두려움에 떨었다. 결국 항우는 먼저 유방에게 홍구(鴻溝)[22] 이서의 땅은 한나라에, 그 이동의 땅은 초나라 땅으로 하여 천하를 양분 하자는 제안을 내었다. 유방도 이에 승낙하여, 두 사람은 각자 동쪽과 서쪽으로 떠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쪽으로 떠나던 유방은 장량과 진평의 제안으로 항우의 뒤를 치기 시작했고, 동시에 팽월과 한신에게도 연락 하여 움직이기를 권하였다. 그런데 한군이 고릉(固陵)[23]에 이르렀음에도 불구, 팽월과 한신은 꼼짝도 하지 않고 버티기만 했고, 유방은 초나라의 반격을 받아 패배했다. 

화를 꾹꾹 눌러 참으며 유방은 장량의 제안에 따라 팽월과 한신의 봉지를 넒혀주기로 약속하고, 항우의 대사마 주은(周殷)을 회유하였고, 수춘을 공격하던 경포(黥布)와 유가(劉賈)까지 합류시켰다. 한신과 팽월이 결국 유방의 제안을 뿌리치지 못하고 군대를 이끌고 옴으로서, 영웅들은 마침내 해하(垓下)에서 모두 집결하였다. BC 202년, 해하에서 집결한 연합군은 항우의 최후를 장식하기 위해 진격하였다.

이때, 한신은 무려 30만 대군을 이끌고 초군과 정면으로 격돌하였다. 한신은 처음에 초나라 군대에게 밀리는듯 물러나다가, 측면 부대를 이용해 초나라 군대를 요격했고, 다시 본대가 뒤돌아 공격을 퍼부어서 초군을 대파하였다. 결국 항우가 달아나다 자결함으로서 전쟁은 드디어 종결을 맞이했다.

유방은 최후까지 버티던 노현(魯縣)을 굴복시켜, 완전한 끝을 장식했다. 그런데, 승리를 거둔 후 서쪽으로 가던 유방이 산둥성 딩타오(定陶) 부근에 이를 무렵, 유방은 갑자기 한신의 진영으로 달려가 한신의 군권을 빼앗았다. 갑작스런 기습에 한신은 놀랐는지 제대로 반항도 못해보고 고스란히 병권을 넘겨주게 된다(……) 유방은 한신을 본거지인 제나라에서 초나라 왕으로 옮기고, 도읍을 하비(下郫)에 정하게 하였다. 

1.9 토사구팽 

1.9.1 밥값을 갚다 

졸지에 제왕에서 초왕이 되긴 했지만, 초나라 지역은 한신의 고향이기도 했다. 한신은 위풍당당한 왕이 되어, 과거 자신을 찌질이로 여겼던 사람들 앞에 다시 나타났다. 한신은 자기에게 밥을 주던 아낙네들을 찾아나서 천금(千金)을 주었고, 밥을 빌어먹었던 정장에게는 백금(百金)을 주면서 이런 소리를 덧붙였다.

"그대는 참으로 소인이다. 남에서 덕을 베풀면서 중도에서 그만 두었다."

그리고 과거 자신을 가랑이 사이로 걸어가게 했던 사람도 찾아내서, 초나라의 중위(中尉)에 임명하였고, 이번에는 이런 말을 부하들에게 하였다.

"이 사람은 장사다. 그가 나를 욕보였을 때, 내가 어찌 그를 죽일 수 없었겠는가? 비록 내가 그를 죽인다 한들 이름을 얻을 길이 없어, 그 치욕을 참음으로써 오늘 내가 공을 이루어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이다."

이 이야기들은 한신의 대인배스러움 등을 나타내는 일화로 설명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때까지도 굴욕을 기억하고 일일히 사람을 찾아다니며 돈을 주고, 선물을 주면서도 싫은 소리를 하고, 조롱했던 사람을 임명하는 모습에서 한신의 묘한 소인배스러움이나 찌질함(……)이 아니냐고 하는 경우도 있다. <del>왠지 마이클 조던이 생각나는데</del>

여하간에 용저 등에게 조롱받았던 그 막장 시절의 생활이, 왕이 되고 난 후의 한신에게도 잊혀지지 않을 만큼 인고의 생활이었던 점만은 알 수가 있다. 

1.9.2 회음후 

그렇게 무탈하게 지내던 BC 201년 무렵, 문득 유방에게 한신이 모반을 꾸민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신하들이 한신을 토벌해야 한다고 하자, 유방은 진평의 계책에 따라 남방의 운몽택(雲夢澤)으로 놀이를 나간다고 하면서 제후들을 모두 진현으로 모이게 했다. 물론 이는 한신을 사로잡기 위한 계책이었다.

처음에 한신은 그 사실을 몰랐다. 그러나 이후에는 알게 되었는데, 당초에는 놀라 아예 한번 군대를 이끌고 한나라와 전쟁을 벌일까도 생각했었지만, 이내 괴철의 제안에 우물쭈물 했었던 그때처럼 머뭇거리다가, 직접 나서서 억울함을 밝히면 유방이 용서해 줄거라고 믿고 그만두어버렸다. 그때, 마침 한신에게는 과거 항우의 부하였던 종리매(鍾離昧)가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방은 종리매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어 그를 사로잡으려고 하던 처지였다.

이에 누군가가 '종리매의 목을 가져다 바치면, 황제가 용서해줄것.' 이라고 말하자 한신은 그 이야기를 종리매에게 꺼냈다. 그러자 종리매는 한신에게 욕을 퍼부었다.

"황제가 초를 공격하지 않은것은 내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나를 바치면 나도 죽지만, 곧 너도 죽을 것이다. 너 같은 자를 어찌 장자(長者)라고 하겠는가?"

그리고 자신의 목을 찔러서 자결해버렸다. 한신은 종리매의 목을 베어 바리바리 싸들고 유방을 만나러 갔는데, 당연히 유방은 그런건 관계없이 한신을 붙잡아서 수레에 태워버렸다. 한신은 이렇게 한탄하였다.

“과연 사람들이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좋은 사냥개가 삶기운다(狡ꟙ死 良狗烹) 라 한 것과 같구나!"

그 말을 들은 유방은 "아니, 니가 모반한다는 말이 있더라고." 라고 하면서, 낙양에 도착해서는 한신을 풀어주었다. 다만, 한신을 초왕이 아니라 회음후에 봉했고, 한신은 이번에도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막대한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는 초왕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1.9.3 다다익선 

http
유방(劉邦)

그 이후로 한신은 유방이 자신을 두려워한다고 여기고, 병을 칭하면서 조정의 조회나 행사에 전혀 참석하지 않으면서 방안에 틀어박혔다. 그러다보니 불만도 날이 갈수록 높아졌고, "내가 주발이나 관영 같은 놈들하고 동급이 되다니 ㅠㅠ"하고 불평을 했다. 어느날은 번쾌를 만났는데, 번쾌가 한신에게 절을 했지만 한신은 "내가 이제 번쾌 같은 사람들의 반열에 되었구나!"하고 웃어버렸다. 

하지만 어느날은 그래도 기분이 괜찮았는지, 유방을 만나 각 장수들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도 있었다, 이때, 유방이 한신에게 "내가 어느정도 숫자나 이끌 수 있을 것 같으냐." 고 묻자, 한신은 "10만 정도." 라고 대답했고, "그럼 니는?" 이라는 유방의 질문에, 한신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신 같으면, 많으면 많을수록 더 잘 다스립니다.”

이에 유방이 왜 그럼 자신의 포로가 되었는지 물어보자, 한신은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비록 군사를 많이 거느릴 수 있는 재능은 부족하시지만, 그 군사들을 잘 통솔할 수 있는 장군들을 거느릴 수 있는 재능이 있으십니다. 그래서 제가 폐하의 포로가 된 것입니다. 하물며 폐하는 하늘의 도움을 받고 계시기 때문에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하늘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말은, 유방이 실제로 재주 없는데 운이 좋았다는 식의 조롱일 수도 있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한신을 몇번이나 간단하게 요리해버리는 유방에 대한 한신의 솔직한 감정일 수도 있다. 이런 부분에 대한 해석이야 각자 알아서 해보자.

1.9.4 성야소하 패하소하 

이렇게 불만이 쌓이는 와중에, 진희(秦豨)라는 인물이 거록군의 태수로 임명되는 일이 생겼다. 진희는 유방이 직접 "무척이나 믿음직했었다." 라고 말했을 정도로 신임받던 인물. 그런데 한신은 진희를 따로 만나더니, 하늘을 우러러 보고 탄식하고 속내를 털어 놓았다.

그 속내는 바로 반란에 관한 일이었다. 진희가 부임하는 거록에는 강병들이 많으니 진희가 반란을 하고, 한신 본인이 내부에서 흔들어버리면 일은 쉽다는게 요지였다. 이에 진희는 제안을 받아 들였고, BC 197년 8월 실제로 반란을 일으켰다. 유방은 9월 달에 진희를 진압하러 떠났지만, 한신은 병을 핑계로 같이 나서지 않았다.

한신은 몰래 진희와 연락을 계속하면서 조서를 가짜로 꾸미고 사람들을 움직일 계획을 세우고는, 먼저 여후부터 족치려고 하였다. 그런데 한신의 밑에 있던 사람들 중 한명이 죄를 지어 한신이 가두어 놓았는데, 그 사람이 여후에게 도망쳐 이 모든 일을 고해버리고 말았다.

계책을 알았어도 한신의 이름이 워낙 대단하니 함부로 적대의사를 표방하고 잡으려고 하면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 이때 여후가 계책을 물어본 사람이 바로 소하였다. 소하는 이미 진희가 패배했다고 거짓 정보를 꾸몃고, 한신에게 "축하하러 오는게 몸보신에 좋을것" 이라는 충고를 해주었다. 이에 한신은 의심없이 궁으로 나왔다가, 여후가 준비해놓은 무사에게 사로 잡히고 만다. 

결국 장락궁(長樂宮)에서 참형을 당하게 된 한신은, 일이 이렇게 된게 어이가 없어서 마지막으로 소리쳤다.

"내가 괴철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참으로 원통하구나! 내가 한낱 아녀자에게 속임을 당해 죽게 되었으니, 이것은 분명 하늘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참수를 당해 죽었다.[24] 일세 영웅의 최후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어이없는 죽음이라, 이 한신의 반란 의도가 거짓말이자 조작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일단 사기나 한서에 그런 언급도 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 정도로 보아야만 한다. 한신의 삼족도 모두 참살당했다.

어찌되었건, 한신의 사망에 소하가 관여한 사실은 분명하다.[25] 한신은 소하의 추천으로 인해 한나라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지만, 정작 소하 때문에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었다. 

송(宋)나라 사람 홍매(洪邁)는 자신의 저서인 용재속필(容齋續筆)에서 "한신이 대장군이 된 것은 소하가 천거했기 때문이요, 이제 그가 죽음을 맞이한 것도 소하의 꾀에 의한 것이었다. 그래서 항간에 성공하는 것도 소하에게 달려 있고, 실패하는 것도 소하에게 달려 있다라는 말이 떠돌게 되었다(信之爲大將軍, 實蕭何所薦, 今其死也, 又出其謀. 故俚語有成也蕭何敗也蕭何之語)" 라고 기록하였다.

1.10 평가 

중국의 역사는 기나긴 수천년에 달하며, 무수하게 많은 나라와 수많은 영웅호걸이 있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한신은 그런 중국 역사상 최고 중의 최고로 손꼽히는 명장이다. 모든 지휘관들은 각자 상황이 처해있는 상황이 다르니 일괄적인 비교는 어렵더라도, 적어도 가장 뛰어난 명장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수없이 손꼽혔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실제로 한신은 단 3만의 병력을 이끌고 시작하여 여섯개의 나라를[26] 무너뜨렸으며, 두 명의 왕을 사로잡았고, 한명의 왕을 참살했다.[27] 그 기간은 불과 몇년에 불과했다. 또한 그 과정에서 기동전, 배수진, 우회공격, 전면전 등 온갖 방식의 전투 방법을 총동원 했고, 다 이겼다.

물론 이렇게 한신이 상대한 적들이 비록 국가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고 해도, 실상을 보자면 이후 출현하는 중앙집권형 국가들처럼 그 체제나 동원력이 어마어마한 경우와는 백만 광년 정도 떨어져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즉 상대한 군사의 질이나 적의 수준이 아주 높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배수진의 일화에서 보듯이, 병력 질이 막장이기는 한신도 마찬가지였다. 즉 한신이 특별히 정예군을 이끌고 상대적으로 만만한 적을 두들겨 팬 것도 아니었고, 똑같은 조건에서 시작했지만 한쪽은 추풍낙엽으로 당하는 역할이었던것에 비해, 한쪽은 무패의 군단이 되어 있었다. 이는 지휘관 능력의 차이라고 밖에는 볼 수가 없는 부분이다.[28] 

하지만 그 이상으로 재밌는 부분은 한신이라는 사람의 개성이다. 한신은 젊은 시절에는 그야말로 찌질이 그 자체로 평가받았고, 항우의 군단에 있을때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었다. 즉 그전에는 제대로 군사 한번 다뤄본적이 없었던 사람인데, 그러나 유방의 밑에서 한번 기회를 잡자, 천연덕스러울 정도로 완벽한 지휘관으로서 자신의 능력을 내보였다. 병법으로 말하자면 거의 타고난 명장이라고 밖에는 표현하기 힘들 것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지휘관으로서 활약만 엄청난게 아니라, 이좌거의 이야기를 듣고 연나라를 항복시키는 등 기본적인 식견도 충분했다. 

그러나 그런 지휘관으로서 엄청난 활약에도 불구하고,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의문이 간다는게 대체적인 평가. 특히 처세술에 관해서는 거의 빵점이나 다름 없다.

이미 전쟁 중에 유방을 수없이 자극했지만, 정작 괴철이 독립을 권했을 때는 "유방이 그래도 나에게 잘 대했는데, 그럴 수는 없지." 라고 거절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 한신 본인의 인간적인 의리가 돈독하다고 여길 수 있지만, 이게 역이기 사망과 유방이 위급해졌을때 왕 시켜주라고 하기 이후에 나온 말이라는게 문제다. 즉, 감정적, 정치적으로 어그로는 수없이 끌어놓고, 정작 본인이 자립할 수 있을 때는 딱히 정치적으로 자기에게 유리한 목적이 아니라 그냥 인간적인 감정으로 판단했다는 부분이다. 당장 항우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도 무슨 상황에 대한 정치적인 고려가 아니라 "너는 나 형편없이 대했는데, 유방은 인간적으로 나 잘 대해주던데?" 같은 감정적인 이유였다. 이런 모습으로 보면, 한신은 자신이 유방의 어그로를 끌었다고 생각조차 못했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유방에 당하는 부분을 보면 황당함을 넘어 괴이할 정도인데, 사실 한신같은 전쟁 영웅은 군주로서는 언제나 부담스러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한신은 너무나도 싱겁게 유방에게 당해버렸는데, 잠 자다가 털리기 라던지, 제나라 왕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기습에 한번 걸려 반항 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잡혀서 초나라 왕이 되었으며, 초나라 왕으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내가 죄가 없는데 어쩌기야 하겠어?"같은 안일한 판단 때문에 역시 칼 한번 써보지 못하고 회음후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사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그러려니 할 수도 있지만, 전쟁터에서는 그렇게 귀신같은 능력을 보여준 한신이 이토록 정세 판단에 어둡다는게 사람들을 답답하게 하는 부분.

이렇게 되어, 정작 가장 유리한 시점이었던 제왕 - 초왕 시절에는 손도 못 써보다가, 회음후가 되고 나서야 손을 쓰다가 당해버리는 황당한 모습을 보여준다. 사마천은 이에 대해 "천하가 다 평정 되고 나서,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인가?" 라고 황당하다는 의견을 보였다.

이런 점 때문에 간혹 한신에 대해 "영웅의 모습과 찌질이의 모습이 섞였다." 라는 식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시바 료타로는 자신의 소설 항우와 유방에서 한신의 이런 모습을 부각시켰는데, 작중 괴철이 한신에 대해 "무인으로서는 걸출한 재능의 소유자지만 다른 면에서는 백치 같은 인물" 이라고 평가하는 부분이 있다. 

여담이지만 한신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유방은 "한편으로는 기뻐하면서, 한편으로는 안타까워 했다."<del>뭐야 이게</del> 아무래도 그런 인물이 사라져서 부담이 덜해진 부분은 기쁘지만, 그래도 그렇게 열심히 공을 세운 사람이 허망하게 죽어버린 일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을 느꼈던것으로 보인다.

사마천은 다음과 같은 평론을 남겼다.

"만약 한신이 도리를 배우고 겸양의 미덕을 발휘하여 자기를 공을 과시하지 않고, 자기의 재능을 과신하지 않았다면, 그가 세운 공은 아마도 주나라 천 년 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주공(周公), 소공(召公), 태공(太公)에 세운 공훈에 비견되어 후세들로부터 혈식(血食)을 받아먹으며 받들어졌을 것이다. 

이렇게 되려고 힘쓰지 않고, 천하의 정세가 이미 정해진 뒤에야 반역을 꾀했으니, 일족이 멸망한 것은 역시 당연한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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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惡賭鬼 | 작성시간 13.02.28 ㅠㅠ
  • 작성자밥묵고자자 | 작성시간 13.02.28 내용도 내용이지만 글이 너무 재미납니다~ +_+
  • 작성자惡賭鬼 | 작성시간 13.02.28 잘 봤습니다^^
  • 작성자찰목합 | 작성시간 13.02.28 한신도 한신이지만 별볼일 없는 직위의 장수를 느닷없이 대장군으로 발탁한 유방의 선택은 진짜 미스테리입니다. 역사상 그런예가 있을수 있을까요? 유방휘하의 역전의 맹장들은 죄다 멘붕이었을듯
  • 작성자바실리우스 2세 | 작성시간 13.02.28 한신은 장군의 대범함과 소시민의 찌질함은 동시에 가지고 있는 영웅이네요. 장군으로서 전략, 전술은 누구보다 밝은면서 정치에는 아이와도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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