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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한나라 개국공신 이야기 ─ 역상, 주발, 조참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6.02|조회수1,389 목록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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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공신후자연표(高祖功臣侯者年表第六) 후제(侯第)
5위 무양후(舞陽侯) 번쾌6위 곡주후(曲周侯) 역상7위 노후(魯侯) 해연


생몰년도? ~ BC 180
이름역상(酈商)
작위곡주후(曲周侯)
시호경후(景侯)
고향진류(陳留) 고양(高陽)[1]


초한쟁패기에 활약한 (漢)나라의 장군. 역이기(酈食其)의 동생이다.

처음에는 미치광이 같은 형(……)과 함께 그냥 평범하게 지내고 있었지만, 진승 · 오광의 난이 일어나자 소년들을 사방에 풀어 사람들을 모았고, 이로 인해 수천 명의 세력을 얻었다.

이후 유방에게 합류한 역이기의 활약으로 진류가 함락되고 패공(沛公) 유방이 성 내로 들어오자, 6개월 후 역상은 4천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본인도 형처럼 유방에게 합류했다. 이후 장군이 되어 서쪽으로 진군 해 개봉(開封)을 공격했지만, 함락시킬 순 없었다.

그 후 장사(長社)를 공격할때는 가장 먼저 성 위에 올라 신성군(新城君)의 봉호를 받았고, 낙양의 동쪽에서 (秦)을 격파하는 등 활약을 했다. 별동대를 이끌고 한중을 평정하기도 했다.

초한전쟁 때는 농서(隴西) 도위가 되어, 한군이 옹왕 장한(章邯)을 물리칠 때 장한의 부장을 언지(焉氏)에서 물리쳤다. 항우와 싸우는 부대에서도 힘을 보태다가, 거야(鉅野)에서 종리매(鍾離眛)와 싸워 그 공으로 양나라 상국의 신분이 되었다. 

항우가 몰락하고 한나라가 천하를 통일 했을때, 연왕 장도(臧荼)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을 평정하는 부대에 역상도 장군으로 종군했는데, 가장 먼저 성벽에 올라 연나라 군을 격파하는 등 대활약을 해서, 열후의 작위를 받고 제후의 부절을 주어 세세손손이 끊이지 않도록 해졌으며, 탁현(涿縣)의 5천 호를 식읍으로 주어 탁후(涿侯)라는 봉호를 내렸다. 그리고 우승상이 되었다.

이후 주발 등과 함께 대나라 평정에서도 활약하고, 경포 토벌전에서도 적 선봉부대와 교전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 공 때문에 곡주현(曲周縣)의 5100호를 식읍으로 받았다.[2]

평생동안 모두 3개의 군단을 격파하고, 6개 군과 73개 현의 항복을 받아 평정했으며, 승상, 수상(守相), 대장 각 1명 씩, 소장 2명, 2천석 이사 6백 석 이상의 관리 19명의 목을 얻거나 포로로 잡았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초한전쟁 보다 이후 반란 평정에서 활약한것으로 보인다.

이후 유방이 사망했을때, 정권을 잡은 여후는 유방의 죽음을 숨기고 측근인 심이기(審食其)에게 "여러 장수들이 어린 황제 말을 들을것 같지 않으니 모두 죽여버리자." 라는 계획을 말했는데, 그 계획은 우연히 역상에게도 전해졌다.

역상은 곧바로 심이기를 만나서 "지금 형양에서는 진평하고 관영이 10만 부대를 거느리고 있고, 번쾌하고 주발은 20만 대군을 가지고 연나라와 대나라를 평정하는 중인데, 제장들을 모두 죽이면 그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까? 그러면 나라 꼴이 말이 아니겠지?" 라고 말했다. 심이기는 그 말을 여후에게 전했고, 여후는 그 계획을 취소했다.

이후에는 불치병에 걸려 죽을 날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역상의 아들인 역기(酈寄)는 여후의 인척인 여록(呂祿)과 친분이 있었다. 이후 여후가 죽고 다른 공신들이 여씨를 타도하려고 할때, 군사권을 가진 여록이 껄끄러워 일을 벌이기가 힘들었다.

그러자 주발과 진평은 사람을 시켜 역상을 위협하여 손을 쓰게 만들었고, 역상은 어쩔 수 없이 역기에게 여록을 유인하도록 시켰다. 여록이 유인되어 나오자 주발은 곧바로 군권을 장악해서 여씨를 학살했다.

바로 그 해에 역상은 사망했고, 경후(景侯)라는 시호를 받게 되었다. 여록과 역기의 친분 등을 보면 주발, 진평, 왕릉 등과는 달리 여씨를 극렬하게 반대하는 쪽은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본의 아니게 여씨 척살에 큰 역할을 해버렸다.

여담으로 당대에 호걸로 이름이 높았던 나라의 전횡(田橫)이 유방에게 항복하려던 때, 전횡이 가장 머뭇거린 것은 바로 역상 때문이었다. 제나라는 역상의 형인 역이기를 삶아서 죽인 적이 있었기 때문.[3] 

유방은 그 이야기를 듣고 역상을 불러, "지금 전횡이 올텐데, 만약 니가 원수 갚는다고 설치면 멸족시켜버리겠다." 하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전횡은 "그렇다고 내 마음이 편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라며 자살해버렸고, 유방은 이를 안타깝게 여겼다고 한다. 형의 원수를 갚지는 못했지만, 전횡 나름대로 목숨으로 사죄를 한 셈. <del>이게 다 한신 탓이다</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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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 하남성 기현
[2] 이전의 식읍은 폐지되었다.
[3] 사실 제나라도 처음에는 역이기를 융숭하게 대접 했지만, 한신의 제나라 공격 때문에 역이기를 죽인 것이다.





고조공신후자연표(高祖功臣侯者年表第六) 후제(侯第)
3위 선평후(宣平侯) 장오4위 강후(絳侯) 주발5위 무양후(舞陽侯) 번쾌


목차

 
1 개요
2 출세길에 나서기 전
3 반(反) 진 전쟁
4 초한전쟁
5 반란 평정
6 말년
7 그 외 이야기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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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BC 169
이름주발(周勃)
작위강후(絳侯)
시호무후(武侯)
고향패군(沛郡)
중국 초한쟁패기전한(前漢) 한고조(漢高祖) 시대의 군인이자 정치가. 유방(劉邦)의 막료(幕僚)로 그의 천하통일에 공헌했다. 의 개국 공신. 이후 여씨를 숙청하여 유씨 천하의 안정을 가져온 인물.

2 출세길에 나서기 전 

본래 패 땅에서 살던 평범한 사람으로, 이 곳은 현재의 강소성 지역인데 본래 선조는 현재 하남성 지역인 권(卷) 땅 출신이었지만 패로 집단 이주를 왔다고 한다. 누에를 치고 엮어 근근히 먹고 살면서, 남의 집 초상(初喪)이 나면 피리를 불러 위로 했다. 힘이 장사였는지 강궁을 다루는 재관(材官)이라는 병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만 해도 딱히 특색은 없었던 사람으로, 사마천은 아예 비루하고 소박한 사람이었고 재능은 범용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라고 말할 정도.

3 반(反) 진 전쟁 

이후 유방이 거병하자 중연(中涓)[1]의 신분으로 유방을 따라 다니며, 이후 유방이 치루는 여러 싸움에서 앞장 서서 싸웠다. 하읍(下邑)을 함락시킬 때는 가장 먼저 성벽 위에 올라가는 용맹을 보여주기도. 이 공으로 오대부(五大夫)의 작위를 받았다. 주발 뿐만 아니라 주발이 다루는 병사들도 다른 군졸들보다 용맹 했는지, 개봉(開封)을 공격할 때는 주발의 병사들이 다른 병사들보다 더 많이 위험한 성벽 아래로 가장 빨리 당도했다고 한다.

이후 유방은 주발을 호분(虎賁)[2]의 책임자로 임명했고, 그 이후에도 유방을 따라 종군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장사(長社)을 점령할 때 역시 가장 먼저 성벽에 올라갔다고 한다.

4 초한전쟁 

홍문연의 일이 있은 후 유방이 한왕이 되었을때는 위무후(威武侯)라는 작위를 받았다. 유방이 삼진을 평정하면서 나설 때는 괴리(槐里)와 호치(好畤)의 전투에서 가장 많은 공을 세웠고, 조분(趙賁)과 내사(內史) 보(保)를 공격할 때도 가장 큰 공을 세웠다. 북쪽으로 진공하여 칠(漆)을 공략하고 장평(章平)과 요앙(姚卬)의 군사를 무찔렀다. 팽성대전에는 참여하지 않은 듯? 

이후 서쪽의 견(汧)을 점령하고 곡역(曲逆)을 평정하면서 많은 공을 세웠는데, 항우가 사망하고 나서는 사수군(泗水郡)과 동해군(東海郡) 관하의 22개 현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다만 역시 한신과 같이 엄청난 공훈을 세운 조참 보다는 초한전쟁 중 공은 밀리는 듯한 인상은 있다.

5 반란 평정 

한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이후에도 주발은 계속 일선에 나서 전투를 지휘했다. 연왕 장도(臧荼)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는 유방의 군대에 종군하여 많은 공을 세웠고, 이로 인해 열후가 되어 8180호의 식읍을 받고 강후(絳侯)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한왕 신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도 유방을 따라 종군하여 무천(武泉)에서 흉노의 기병을 물리치고, 동제(銅鞮)에서 한왕 신의 부대를 격파하고 반란군에게 함락되었던 진양성 등을 수복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한군이 흉노 묵돌선우의 유인책에 속아 평성(平城)[3] 동북쪽의 백등산(白登山)에서 큰 곤경을 당한백등산 포위전에서도 다른 장수들 중에서도 가장 큰 공을 세웠다. 백등산 포위전 자체야 완전히 포위되어 간신히 빠져나온 전투긴 하지만. 이때의 공으로 태위가 되었다.

진희(陳豨)의 반란군을 물리칠 때도 진희의 장수 승마치(乘馬絺)를 죽이고, 마읍(馬邑)을 함락시키고[4] 승리를 거두는가 하면, 노관(盧綰)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도 대활약을 했다. 반란군 진압에서 오히려 더 공을 세우는듯한 모습.

이리하여 평생동안 유방을 따라 전쟁터를 전전하며 상국1명, 승상2명, 장군과 이천석의 고관 3명을 포로로 잡고 별도의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여 2개의 군대를 격파했으며, 3개의 성을 함락시켰으며 5개의 군에 속하는 79개의 현을 평정하면서 승상과 대장 각1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한다.

6 말년 

이렇게 대활약을 했던 주발이었지만, 유방이 사망하고 여후의 시대가 오자 그도 몸 조심을 해야 할 지경이 되었다. 왕릉은 주발과 진평(陳平)의 여후가 독단적으로 행동하는것을 견제하지 않는것을 비판하기도 했을 정도.

그렇지만 이것은 당장의 숨고르기에 지나지 않았다. 꾸준히 때를 기다린 주발 등은 결국 여후가 먼저 사망하자 손을 쓰기 시작했다. 가장 문제가 되는것은 여록(呂祿)이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었는데, 역상의 아들인 역기가 여록과 친하다는 점을 이용, 역상을 협박 해서 역기를 유인하여 군사권을 내려놓게 했고, 이틈에 군사권을 장악하여 병사들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여씨들을 따르겠다는 군사들은 오른쪽 어깨를 들어내고, 유씨들을 따르겠다는 군사들은 왼쪽 어깨를 들어내라!"

이에 모든 병사들이 왼쪽 어깨를 드러내자, 주허후(朱虛侯) 유장(劉章)과 함께 여씨들을 척살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그는 한문제를 즉위시켜 다시 유씨의 천하를 부활시켰다. 이후 주발은 그 공으로 우승상의 자리에 임명되었고, 황금 5천금과 식읍 1만호를 얻었다.

하지만 이렇게 공을 세운것 치고는 그리 깨끗한 말년은 보내지 못했는데, 문제가 즉위한지 한달 정도 지났을때 누군가가 주발에게 충고를 해주었다.

"여씨들을 주살하고 천자를 추대한 장군의 위엄은 천하를 진동시켰습니다. 그리고 장군께서는 많은 상금과 식읍을 하사 받아 신분이 더할 수 없이 높아지고 황제의 총애도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이 상태가 오래 간다면 화가 몸에 미치게 될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주발은 불안한 느낌이 들어 스스로 직위를 반납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년이 지나 진평이 사망하자, 주발은 다시 올라와서 승상이 되었는데 10개월이 지나자 문제는 주발에게 넌지시 이런 말을 하였다.

"옛날, 내가 열후들에게 조칙을 내려 봉국에 부임하라고 했소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부임하고 어떤 사람은 부임하지 않고 있소. 승상이 내 말을 중하게 생각한다면 그들에게 솔선수범을 보이시오."

결국 주발은 그 말 한마디로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야 했다. 이후 주발은 위풍당당한 과거와는 달리, 자신이 숙청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 전전긍긍하며 불안감 속에 살았고, 항상 갑옷을 입고 지내고 따로 무장시킨 병사들을 거느리고 나서야 주이 사람들과 만났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주발이 모반을 일으키려 한다." 는 소문이 되었고, 결국 고발이 들어와 문제는 주발을 감옥의 옥리에게 보내 조사하게 하였다.

잔뜩 겁을 먹은 주발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전전긍긍했고, 옥리는 그런 주발을 더욱더 괴롭혔다. 결국 주발이 천금을 옥리에게 주자 이를 받은 옥리는 주발이 살 수 있는 방도를 넌지시 전해주었다. 

당시 주발의 장남 주승지(周勝之)는 문제의 딸, 즉 공주를 부인으로 데리고 있었다. 이 관계를 이용하면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주발은 당시 태후였던 박태후의 동생 박소(薄昭)에게 많은 돈을 주었고, 박소는 박태후에게 "아니, 공주의 시아버지가 이런 꼴을 당하면 되나." 는 식으로 주발의 편을 들어주었다.

박태후는 황제가 문안 인사를 하러 자신을 찾아오자, 두건을 내던지며 그를 꾸짖었다.

"강후는 여씨의 난 때 황제의 옥새를 보관했고 북군의 군사들을 장악했음에도 모반을 꾀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한 개의 작은 현에 의지하여 반란을 꾀했겠소?"

이미 옥리와 주발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문제는 주발 이미 기가 완전히 꺾인 것을 보고 그를 손봐주는 일을 멈추기로 했다. 가까스로 풀려난 주발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고 한다.

백만 대군을 지휘하던 장군의 신분이었던 나는, 옥리 한 사람의 권세가 그렇게 대단한 줄 몰랐다!"

이후 봉국으로 돌아가 사망했고, 무후(武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런데 괴이하게도 아들인 주아부 역시 비슷한 말로를 당했는데……

7 그 외 이야기 

전형적인 화통하고 단순 화끈한 인물이라, 성품이 강직했다고 한다. 딱히 배운것도 없어 문학을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유세객들이나 선비들이 말을 좀 하려고 하면 "빨리 빨리 말하쇼!" 하며 재촉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왕릉이 여씨의 전횡을 보다 못해 따지고 들다 쫓겨나는 셈이나 다름없는 상황에 처했던 일 하고는 달리, 은근히 끈질긴 면이 있어서 여후의 권세가 극심할때는 참고 있다가 이후에 여씨를 쫒겨내는 일에 성공했다. 이런 점 때문인지 유방은 평소에 주발에게 일을 맡길만 하다고 여겼다. 실제 유방은유언에서 "왕릉은 우직해서 진평으로 보좌하게 해야 하는데, 진평에게만 일을 맡기면 안된다. 주발은 배운건 없지만 행동거지가 무겁고 믿음직하니 장차 유씨 왕조의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예언에 가까운 말을 했고, 이는 완벽하게 실현되었다.

유방이 처음 진평을 등용할 당시, 관영(灌嬰)과 함께 가장 거세게 반대했던 인물이 주발이었다. "그 놈이 얼굴은 잘생겼지만 단지 관에 매다는 아름다운 옥구슬에 불과하여 그 심성은 비어있는 놈이다. 반복무상한 간신배에 불과한 작자다." 라며 엄청나게 폭언을 퍼부었지만, 유방은 진평과 면담한 후 아랑 곧 하지 않고 진평을 썻다.

이후 여씨를 평정할 때는 보조를 맞추었는데, 이후 문제가 즉위할 당시에는 오히려 주발이 굴욕을 당하고 만다. 문제가 주발에게 "온 나라를 통틀어 일 년 동안 옥사를 판결하는 소송은 몇 건이나 되는가." 라는 질문을 하자, 주발은 "모르겠습니다."라고 답을 했고, "전국을 통틀어 일 년 동안 국가 재정으로 걷어들이고 지출하는 양식과 돈은 얼마나 되는가." 라는 질문도 "모르겠습니다." 라고 대답하며 부끄러워 땀을 뻘뻘 흘릴때, 진평은 같은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일을 맡아 하는 관리에게 물어보시면 될 것입니다. 폐하께서 옥사에 관한 일을 알고 싶으시면 정위(廷尉)를 불러 물으시고, 식량과 세금의 수입과 지출을 알고 싶으시면 치속내사(治粟內史)에게 물으십시오."

"재상이란 직위는 위로는 천자를 보좌하고 음양을 다스려 사시를 순조롭게 하며, 아래로는 천지 만물의 생육을 제 때에 자라게 하고 밖으로는 사방의 오랑캐와 제후들을 진무하며, 안으로는 백성들을 백성들로 하여금 황실에 의지할 수 있도록 어루만져 주고, 관리들을 감독하여 각기 자기의 맡은 바 임무를 다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문제가 진평을 칭찬하자, 부끄러움에 어쩔 줄을 모르던 주발은 황제의 앞을 벗어나자 진평에게 "그런 대답을 알고 있었으면 왜 나한테 안 가르쳐 주었소!" 라며 따졌고, 여기에 대해 진평은 웃으면서 "나보다 윗자리에 있으면서도 그것도 몰랐나." 라고 대답했다.[5] 그 말을 들은 주발은 딱히 대답할 말도 없어 진평이 자기보다 재주가 뛰어나다고 인정을 했다. 이후 주발이 우승상을 그만두었기에, 그때부터 승상은 하나로 통합되었다. 물론 그 자리는 진평이 차지했다.

한문제를 추대한 당사자였지만, 여러가지 일화를 보면 문제를 굉장히 두려워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가의(賈誼)을 개혁을 주장할 당시에는 "어린 놈의 색히가 뭘 아는척을 하냐"는 식으로 욕을 퍼부어, 가의가 개혁을 못하게 하기도 했다. 

사마천은 이렇게 평론하였다.

「강후 주발은 처음 미천한 신분이었을 때 비루하고 소박한 사람이었고 재능은 범용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이윽고 고조를 따라 천하를 누비고 다니다가 장상의 자리에 오르고 다시 제려(諸呂)가 란을 일으키려고 하자 주발은 다시 한 번 나라를 바르게 세웠으니 비록 이윤(伊尹)이나 주공(周公)이라 한들 그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 사기, 강후주발세가(絳侯周勃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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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참 역시 처음에 중연으로 유방을 따라 다녔다.
[2] 경호를 담당하는 군사들
[3] 현재 산서성 대동시(大同市)
[4] 이때의 표현이 도(屠) 마읍이라, 마읍을 함락하고 학살이 일어난듯 싶다.
[5] 당시 주발은 우승상으로 최고의 자리였고, 진평은 좌승상으로 두번째 직위였던 상황








고조공신후자연표(高祖功臣侯者年表第六) 후제(侯第)
1위 찬후(酇侯) 소하2위 평양후(平陽侯) 조참3위 선평후(宣平侯) 장오


목차

 
1 개요
2 진나라의 관리
3 반(反) 진 전쟁
4 초한전쟁
5 통일 이후
5.1 소하에 밀린 콩라인
5.2 제나라의 상국
5.3 아무것도 안하는 재상
6 기타
7 기타 매체에서의 조참

1 개요 

http
생몰년도? ~ BC 190
이름조참(曹參)
작위평양후(平陽侯)
시호평양정후(平陽靜侯)
고향패군(沛郡)
중국 초한쟁패기전한(前漢) 한고조(漢高祖) 시대의 군인이자 정치가. (秦) 시대에도 관직에 있었으며, 이후 유방(劉邦)의 막료(幕僚)로 그의 천하통일에 공헌했다. 의 개국 공신. 한자 때문에 간혹 조삼이라고 읽는 사람들이 있는데 조참이 맞다.

2 진나라의 관리 

아직 진나라의 힘이 천하에 건재할 당시, 조참은 패현에서 죄수들을 관리하는 옥리(獄吏) 였다. 일단 조상국세가에서는 '소하(蕭何)와 조참은 아전들 중 호걸이었다.' 라고 말하고 있긴 한데, 관열전(樊酈縢灌列傳)에서 사마천(司馬遷)은 "내가 소하, 조참, 번쾌 등이 살던 곳을 가 봤는데, 그들이 여기에 살때 누가 훗날 그렇게 귀해질지 상상이나 했겠는가?" 라는 식으로 말을 했다. 여하간 그 당시엔 별 달리 특색은 없었던 모양.

그러나 시대가 그들을 본의 아니게 영웅호걸의 길로 들이밀었다. 당시 진나라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진시황(秦始皇)의 시대부터 이어진 폭정으로 백성들은 신음했고, 이세황제(二世皇帝)는 환관 조고(趙高)에게 일을 맡긴채 사치와 방종에 빠졌다. 

결국 폭탄은 터져버려 BC 209년, 진승(陳勝) 등이 처음으로 저항을 시작하여 진승 · 오광의 난을 일으켰고, 이윽고장초(張楚)를 건국하는데 이르렀다. 이에 여러 군현의 백성들도 모두 진나라 관리를 때려 죽이고 봉기에 동참했다.

조참이 있던 현의 현령 역시 그런 분위기는 느끼고 있었고, 자기가 죽지 않으려면 먼저 반란에 동참해야 하겠다고 여겨, 마침 함양으로의 노역 이동을 때려 치우고 망탕산(茫荡山)에서 숨어 지내던 유방을 번쾌(樊噲)를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그런데 정작 유방이 돌아올 때가 되자, 마음이 또 바뀐 현령은 성문을 걸어 잠구고 유방이 들어오는것을 막으면서, 유방과 친해보이던 소하와 조참을 죽여버리려고 했다. 느닷없이 죽을 지경에 놓이게 된 소하와 조참은 부리나케 성벽을 넘어 도망쳐서 유방에게 붙어버렸다. 유방이 "현령 그 놈을 잡아 죽여야 패현이 무사하다." 는 내용의 글을 적어 성 내로 화살을 쏘아 보내자, 성 내에서 반응이 일어나 현령을 때려 죽이고 성문을 열게 된다.

일단 반란이 일어나고 나자, 이제 사람들을 이끌 주모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물론 사람들은 유방에게 이 일을 부탁했지만, 유방은 짐짓 거부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하지만 소하나 조참은 무슨 숭고한 뜻 같은 것보다는, 만약 일이 실패하면 자기 친척들이 모조리 도륙 당할까봐 두려워서 유방에게 모든 일을 양보했다. 반란의 우두머리가 되면 가족은 물론이고 다른 친척들까지 모조리 엮어들어가는건 피할 수 없지만, 유방이 얼굴마담으로 나서 준다면 설사 일이 실패해서 자기들이 죽더라도 연좌제는 최소한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내린 판단. 유방이 이에 시원스레 응하면서 소하와 조참은 유방을 추대하게 되었다.

3 반(反) 진 전쟁 

그리하여 유방이 처음 거병 할 때, 조참은 중연(中涓)[1]으로 종군을 시작했다. 그 후 전투에도 나서 유방이 호릉(胡陵)[2]과 방여(方輿)[3]를 공격할 때 진나라 감공(監公)의 부대를 물리치는 공을 세우고, 유방이 설(薛)을 함락시키고 사수군(泗水郡)의 태수 장(壯)을 물리칠 때도 활약 했다. 

그 후 (魏)에 항복한 풍(豊)을 공격하여 칠대부(七大夫)의 작위를 받았다. 그 후로도 계속 유방과 보조를 같이 하며 움직이면서 싸웠는데, 원척(爰戚)과 항보(亢父)를 점령할 때는 병사들보다 먼저 성벽에 오르는 화끈한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4]

이후에 초회왕(楚懷王)이 유방을 탕군(碭郡)의 수장에 임명하자 건성군(建成君)이라는 봉호를 받았으며 집백(執帛)[5]이 되었다.

이후 유방이 함양에 입성할때까지 계속 함께 움직이며 전투에 참여했다.

4 초한전쟁 

홍문연의 일이 있은 후 유방이 한왕에 봉해지자 조참은 건성후(建成侯)가 되었다. 그 후 유방이 삼진을 평정할때 계속 종군하다가, 경릉(景陵)이라는 곳을 20일 정도 지키고 있을때 장평(章平)[6] 등이 공격해 왔지만 대패를 안겨주었다.

유방이 동쪽으로 진군 할때도 마찬가지로 따라가면서 용저(龍且)와 항타(項他)을 물리치면서 순조롭게 팽성까지 장악했지만, 아주 가루가 되도록 박살이 나고는, 서쪽으로 물러나면서 한군이 박살난 틈에 배반을 하거나 분탕질를 치는 왕무(王武), 정처(程處), 주천후(柱天侯) 등을 모두 물리쳐서 대패 이후에 있을 동요를 최소한으로 억제하는데 성공했다.

그 이후 BC 205년에는 잠시 좌승상 대리로 후방인 관중(關中) 지역에 머물다가, 위표(魏豹)가 배반하자 한신(韓信)의 군대에 속해 보조를 함께 했다. 이후 한신과 조참은 눈부신 공을 세우게 된다.

위나라와의 싸움에서는 별도의 부대를 이끌고 위나라 장수 손속(孫遫)을 동장(東張)[7]에서 격파하고 내친김에 위나라의 수도 안읍(安邑)까지 공격해서 위나라 장수 왕양(王襄)을 사로잡았다. 당시 위표는 임진(臨晉)쪽으로 오는 한신의 부대를 경계하고 있던 참이라, 이에 크게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하열(夏說)을 물리친 후에 한신, 장이(張耳)와 함께 (趙) 공략에 나서, 한신의 명령으로 오성(鄔城)에 주둔하던 조나라의 별장 척(戚)을 참살하는 공을 세웠다.

이후엔 잠시 유방의 본대에 합류해 있다가, 한신이 (齊)를 공략 할때 한 몫을 거들었다. 해하전투 때는 한신이 유방의 요청으로 항우를 물리치기 위해 이동했지만, 조참은 제나라 지역에 머물며 항복하지 않은 지역을 평정하느라 참전하진 못했다.

5 통일 이후 

5.1 소하에 밀린 콩라인 

통일 이후에는 10630호라는 어마어마한 식읍을 받게 되었다. 워낙 여기저기서 싸우면서 챙긴 공이 막대했던 것.[8] 그야말로 전쟁터에서 살았던 정도이기에 전쟁이 끝난 후 조참은 온 몸에 상처가 70여개 가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탓에 전쟁이 끝난 후 유방이 소하를 최고 공신으로 삼으려고 하자, 여러 장수들은 모두 반발하기까지 했다. 소하는 걍 뒤에서 숫자 셈이나 했고, 조참은 직접 전쟁터에서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면서 엄청난 공훈을 세웠는데 당연히 조참이 최고 공신이여야 한다는 것. 일단 소하를 최고 공신으로 하려는 마당에, 장수들의 반발 때문에 이를 물린다면 자신의 권위에도 문제가 생길 유방은 영 기분이 나쁜 상황이었다.

이때, 유방의 심기를 알아차린 관내후(關內侯) 악천추(鄂千秋)가 발언하였다.

“ 여러 대신들의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조참이 비록 전쟁터를 누비고 다니며 적군의 성과 땅을 점령한 공이 비록 크다고 하나, 그것은 일시적인 공로에 불과한 것입니다. 항왕(項王)과 5년 동안에 걸쳐 서로 대치하고 전투를 벌린 폐하께서는 여러 번에 걸쳐 싸움에 지고 그때마다 그 군사들은 모두 달아나 뿔뿔이 흩어져 버리자 홀홀 단신으로 도망치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소하는 그럴 때마다 관중의 자제들을 모아 페하가 계시는 전선으로 보내 그 잃어버린 병력을 보충시켰습니다. 그러한 일들은 모두 폐하의 지시를 받고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한 일입니다." 

"또한 관중에서 수만의 군사들을 전선으로 보낼 때는 언제나 폐하께서는 싸움에서 패한 직후의 가장 위급한 때였습니다. 한군과 초군이 형양에서 몇 년간에 걸쳐 대치할 때, 군중에는 양식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에 소하가 관중에서 수레나 선박을 이용하여 양식을 보내주어 한군은 굶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폐하께서는 비록 여러 번에 걸쳐 효산(崤山) 이동 지역의 싸움에서 패하는 동안 소하는 오로지 관중 지방을 굳건히 보전하여 만세에 길이 빛날 공훈을 세웠다고 하겠습니다."

"지금 비록 조참과 같은 사람 100명이 없다한들 한왕실에 무슨 영향이 있겠습니까? 한왕실은 조참과 같은 사람들을 얻음으로 해서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어찌하여 일시적인 공로를 세운 사람을 만세에 길이 빛날 공적을 세운 사람 위에 놓으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마땅히 소하의 공을 맨 위에 올리고 조참을 그 다음으로 하시옵서소."

즉, 조참 같은 사람은 100명이 없어도 무방하지만 소하의 공은 맨 위로 올려야 한다는것. <del>지못미 조참</del> 이에 유방은 소하를 최고 공신으로 정했고, 소하에게는 신발을 신고 전당에 오를 수 있고, 칼을 찬 상태로 황제를 볼 수 있고, 황제를 배알할때도 작은 걸음이 아니라 큰 걸음으로 걸을 수 있게 하는 등 최고의 대우를 해주었다. 눈치빠르게 소하의 편을 든 악천추도 역시 보상을 받았다.[9]

5.2 제나라의 상국 

소하와의 비교에서는 굴욕을 당하긴 했지만(……) 조참은 그 후에도 활약을 멈추지 않았다. 진희(秦稀)가 반란을 일으킬 때는 진희의 장수 장춘(張春)을 격파했고, 경포(黥布)가 반란을 일으켰을 당시에는 제나라 상국의 신분으로 제도혜왕(齊悼惠王) 유비(劉肥)의 12만의 원정군을 이끌고 유방과 합류하여 경포를 박살내었다. 

그리하여 평생동안 2개의 제후국을 무너뜨리고, 122개 현을 평정하거나 점령했으며, 제후왕 2명[10], 제후국의 상국 3명, 장군 6명, 대막오(大莫敖), 군수(郡守), 사마(司馬), 후(侯), 어사(御使) 각 1명씩을 포로로 잡거나 죽였다거 한다. 

혜제 시절인 BC 192년에는 제후국에 상국을 두는 법이 폐지되어 제나라의 승상이 되었다. 이때 제나라 관할의 성읍은 70여개가 넘었는데, 전쟁이 막 끝난 뒤인데다 제도혜왕 유비는 나이가 어려 여러가지로 나라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이에 조참은 사람들의 조언을 들으려고 학자들을 불러모았지만, 말하는 학자들마다 서로 "이거해라, 저거해라." 는 등 중구난방이라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교서(膠西)의 개공(蓋公)이라는 인물이 학식이 깊다는 이야기를 듣고 많은 예물을 두고 초청했다. 개공은 이런 의견을 내었다.

"치도(治道)의 가장 좋은 방법은 청정무위(淸淨無爲)로써, 그렇게 하면 백성들은 스스로를 안정시킬 것 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조참은 그러한 황로학파(黃老學派)의 학술로 제나라를 다스렸고, 이에 효과를 보았고 사람들은 조참이 현명한 재상이라고 칭찬하였다. 이후 조참은 이러한 무위지치의 정치를 계속 유지하였다.

5.3 아무것도 안하는 재상 

소하는 본래 조참과 사이가 나쁘지 않다가, 어떤 일을 계기로 해서 그와 몹시 사이가 나빠지게 되었다. 혜제 2년, 소하는 이미 나이가 100여살에 가까워졌고, 병에 걸려 죽을 날이 다가왔다. 이에 혜제가 소하를 찾아와, 차기 재상에 "조참이 어떤가?" 라고 묻자, 소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황제께서 좋은 재상을 얻었으니, 소하는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소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조참은 "내가 상국이 되겠지." 하고 사정도 알아보지 않고 짐을 꾸렸는데, 진짜로 황제의 사자가 곧 조참을 부르러 왔다. 조참은 제나라를 떠나기 전, 후임 승상에게 이러한 충고를 해주었다.

"나라의 감옥과 시장은 간사한 사람들이 모여드는 장소이니, 그러한 곳에 대해서는 마땅히 신중해야 하며 혼란이 있어서는 알 된 것이오." 

이에 후임 승상이 "국가를 다스리는 일에, 말씀하신 부분이 가장 중요한 일인가" 하고 묻자, 조참은 다시 이러한 말을 해주었다.

"그렇지는 않소! 그러나 감옥과 시장이라는 곳은 선과 악이 공존하는 곳이오. 만약 그대가 그곳을 엄중히 관리하지 않는다면 간악한 사람들이 몰려와 그곳에 가득 찰 것이오. 나는 이 때문에 이 일을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오." 

이후 한나라의 상국이 된 조참은, 갑자기 괴이한 짓을 하기 시작했다. 글을 잘 쓰거나 출세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은 되려 쫓아 보내고, 별 생각도 없거나 문서도 현란한 표현을 못 쓰고 질박하게 쓰는 사람들을 느닷없이 데려와 승상부(丞相府)의 관리로 임명했다.

또한 소하가 정한 법률에서 바꾼 것도 없었고, 정확히 말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게 문제가 아니라, 그냥 술만 디립다 퍼 마시고 살았다. 

이에 경(卿)과 대부(大夫) 이하의 관리들이나 조참의 빈객들이 어처구니가 없어 하며 조참을 찾아와 "자네, 이러면 안되지!" 하고 따지려고 했는데, 그럴 때 마다 조참은 손님들에게 억지로 술을 퍼 먹여서 아무 말도 못하게 했다. 어떻게 입을 좀 떼보려고 하면 계속 술을 권해서 결국 따지려고 찾아온 사람들은 인사불성이 되서 나가기 일쑤였다.(……)

별 생각도 없었는데 어거지로 끌려온데다 그 당사자는 술만 퍼마시고 있으니(……) 승상부 관리들은 조참을 매우 미워했지만 따지기만 하면 술을 먹여대니 뒤에서 씹어대는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생각한 끝에 승상부 관리들은 조참을 아예 후원으로 나와서 놀게 하고, 이웃에 있는 관사에서 다른 관리들이 모두 술을 진탕 먹고 고성방가를 하며 놀게 했다. 이 모습을 보면 조참도 화가 날테니, 따지면서 자기도 술을 안 먹을 것이라 여긴 것이다.

그런데 조참은 오히려 술을 가져와서 그런 관리들과 고성방가를 같이 하며 놀았다. <del>고만해 미친놈들아</del> 게다가 승상부 관리들이 실수라도 하면, 이를 따지기는 커녕 오히려 "됐어, 됐어." 라는 식으로 숨겨주고 덮어주었다.

황제인 혜제는 조참의 그런 괴이한 모습을 보고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어서 <del>아무래도 미친 것 같아요</del> 조참의 아들 조줄(曹窋)을 불러 이렇게 지시를 내렸다.

"그대가 집에 돌아가거든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부친께 다음과 같이 한 번 물어 보기 바라오 ‘ 고제(高帝)가 돌아가시어 신하들과 이별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또 황제의 나이도 아직 젊은데, 부친께서는 상국이 되어 날마다 술만 마시고 황제께 소청하거나 보고하는 일도 없으니 무엇으로써 천하대사를 걱정하십니까’라고 묻고, 결코 내가 시켰다고는 말하지 마시오." 

조즐은 황제가 시키는 대로 집에 가서 아버지에게 "아버지, 왜 일을 안하세요?" 하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조참은 갑자기 버럭 화를 내며 아들을 두들겨 팼다. 

"넌 빨리 궁으로 들어가 황제를 모시기나 잘해라! 천하의 일은 네 까짓게 말할 바가 아니다!"

이후 조참이 조회에 나가자, 혜제는 그 이야기를 하며 조참을 나무랐다. 이에 조참은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께서 보실 때, 폐하와 돌아가신 선제이신 고제(高帝)와 비교하여 누가 더 영용(英勇)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어찌 감히 선제(先帝)와 비교를 할 수 있겠오?" 

"그렇다면 폐하께서 보실 때 저와 소하 중 누가 더 능력이 낫다고 생각하십니까?"

"조상국이 소상국보다 못한듯 싶소!"

"폐하께서 말씀하신 것이 옳습니다. 또 고제와 소하가 천하를 평정하였고, 법령도 이미 밝게 정하셨습니다. 폐하께서는 팔짱만 끼고 계시고 저희들은 직분을 지키면서 옛 법도를 따르기만 하고 잃지 않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 

이에 혜제도 말문이 막혔고, "알겠소. 이제 상국은 쉬도록 하시오." 하고 돌려보냈다. 이는 황로술의 영향이 강한 전한 초기의 정치 풍토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조참이 딱히 하는건 없었지만(……) 아무 생각 없이 노는게 아니라 정책에 대한 분명한 생각이 있었던것.

그러한 방책은 헛되지 않았고, 조참이 사망하자 백성들은 모두 노래를 지어 부르며 조참의 덕을 추모했다. 

蕭何爲法 若畵一
소하가 제정한 법, 한 글자도 밝고 옳지 않은 것이 없었네 
曹參代之守而勿失
조참이 그 뒤를 이어 그 법을 지켜가며 잃지 않았네 
載其淸淨 民以寧一
맑고 공정하게 정사를 돌보니 온 백성들 한결같이 편안하네
 

사마천은 이렇게 조참을 평론하였다.

"상국 조참이 야전(野戰)의 공로가 많음은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과 같다. 그런데 한신이 멸망한 후에 열후에 봉해진 공신 중에서 유독 조참만이 그 이름을 빛냈다. 조참이 한나라의 상국이 되자 시행했던 그의 정치사상 청정무위(淸淨無爲)는 도가의 원칙과 가장 부합된다고 하겠다. 더욱이 백성들이 진나라의 잔혹한 통치를 받은 후, 조참이 그들에게 무위이치(無爲而治)로 휴식하게 하자, 천하 사람들이 모두 조참의 공덕을 칭송하였다." 
─ 사기(史記) 조상국세가(曹相國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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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싸이코 투투★ | 작성시간 13.06.04 조참이 유방에게 지도자 자리를 양보한 것도, 어떻게 보면 보신의 한 형태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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