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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삼척검을 들고 천하를 평정하다 ─ 한고조 유방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7.07|조회수936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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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rigvedawiki.net/r1/wiki.php/%ED%95%9C%EA%B3%A0%EC%A0%9C?action=show




전한의 역대 황제
1대 태조 고제 유방2대 혜제 유영

http://misc.home.news.cn/public/images/original/00/34/05/AE/AE.JPG

중국 한중 석문잔도풍경구(石門棧道風景區)에 있는 유방의 석상. 왼편으로 소하, 오른편으로 한신이다.


"경의 말은 실로 지나치다. 짐이 만약 고황(高皇 : 유방)을 만났다면 응당 북면하여 그를 기쁘게 섬겼을 것이고, 공을 세우기 위해 팽월(彭越), 한신(韓信)과 채찍질을 경쟁하며 선두를 다투었을 것이다. 광무(光武)를 만났다면 한번 중원(中原)에서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 말을 달려 재간을 겨루어보겠다. 그러나 사슴이 누구 손에 죽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1] 사내가 일을 행함에 있어 응당 정정당당하며 해와 달처럼 밝아야 하는 법이다. 조맹덕(曺孟德), 사마중달(司馬仲達) 따위는 말할 것도 없다. 고아와 과부를 속여 여우처럼 눈짓하여 천하를 강탈한 자들이 아닌가?" ─ 진서 권105, or 자치통감 中[2]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f/f6/Hangaozu.jpg/200px-Hangaozu.jpg
묘호태조(太祖)
시호고황제
(高皇帝)
이름유방(劉邦)[3]
계(季)
출생지패현(沛縣)
영문표기한고조(Emperor Gaozu of Han) 유방(Liu Bang)
생몰기간음력B.C. 247년? ~ B.C. 195년 (52세?)
재위기간음력B.C. 202년 ~ B.C. 195년 (7년)[4]

목차

 [-]
1 개요
2 출생과 외모
3 생애
3.1 패현의 허풍쟁이
3.2 거병
3.3 반(反) 진 전쟁
3.3.1 풍읍의 배반
3.3.2 항량의 부장으로
3.3.3 함양으로의 진격
3.3.4 홍문연(鴻門宴)
3.4 초한대전
3.4.1 권토중래
3.4.2 삼진평정과 팽성대전
3.4.3 형양 함락과 성고 함락
3.4.4 광무대치
3.4.5 해하의 결전
3.5 제국의 황제
3.5.1 나는 세 사람 보다 못하지만, 세사람을 부릴 줄은 안다
3.5.2 내가 이제야 황제 귀한 줄 알겠다
3.5.3 백등산 포위전과 토사구팽
3.5.4 대풍가(大風歌)
3.5.5 그 다음은 당신이 알 것 없소
4 평가
4.1 군사적 능력
4.2 정치적 능력
4.3 인간적인 면모
4.4 총평
5 기타
6 대중문화 속의 한 고조 유방
6.1 초한전기
6.1.1 행적
6.1.2 능력 및 인품표현
6.1.3 기타

1 개요 

중국의 통일 왕조인 전한(西漢)의 제 1대 황제.[5]

중국 역사상 최초의 평민 출신 황제로서 기존의 지배층이었던 제후나 귀족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이 피지배층에서 벼락출세하여 지배층으로 떠오른 입지전적인 인물. (秦) 말기의 대혼란에서 세력을 일으켜, 초한대전에서 최대의 호적수이자 압도적인 항우(項羽)을 몰락시키고 승리를 거두어 중국 천하를 손아귀에 넣었다. 

이후 각지의 반란을 평정하고 이성왕(異姓王)들을 숙청하여 대제국 한나라의 기틀을 닦은 인물. 한나라, 특히 전한 왕조가 여러 국가들이 난립해있는 시대를 넘어 '하나의 중국' 으로서 중국사에 미친 영향을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이후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워낙 파격적인 행동이 많고 질기게 살아남고 버틴 타입이라 인물에 대한 호불호가 꽤 극단적으로 갈리는 탓에 이를 배경으로 하는 초한지 소설 등에서는 라이벌인 항우나 부하인 한신 등에 비해 인기가 아주 높은편은 아니지만, 최후의 승리자로서 가지는 역사적 입지와 비중은 가장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출생과 외모 

http://book.interpark.com/blog/blogfiles/userblogfile/1/2011/08/01/15/mer0329_6039628649.JPG?width=170
유방(劉邦)
유방은 패현(沛縣) 풍읍(豊邑)[6] 중양리(中陽里) 출신이었다. 부친은 태공(太公)이었고 어머니는 유온(劉媼)이었다. 그러나 태공이나 온은 현대어로 풀이하자면 그저 아저씨, 아줌마 정도의 의미로[7] 유방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이름조차 사서에 보이지 않는셈이다. 

사실 이는 부모뿐만 아니라 유방 본인도 마찬가지인데, 사기나 한서(漢書)에서는 아예 유방(劉邦)이라는 이름 자체가언급되지 않는다. 그저 성이 유씨이고 자(字)가 계(季)라고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유방이라는 이름이 언급되는것은순열(荀悅)의 한기(漢紀)에서 부터인데, 물론 다른 이야기를 하는 설은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관점으로는 유방이 어렸을 당시에는 유계라는 호칭으로 통하다가, 즉위한 후 유방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유방의 형제를 살펴보면 이 이름이 형제간의 서열, 순서를 간편하게 나타내는 백중숙계(伯仲叔季)를 붙여서 지어진것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유방의 큰형으로 유백(劉伯)과 유중(劉仲)이 언급되는것을 보면 '유계' 라는 호칭이 어떻게 붙여졌는지는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유방은 본래 개별적인 이름은 없는것이나 다름 없고, 그저 "유씨네 막내" 정도로 통용될 수 있는 유계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8]

유방의 출생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유방의 어머니인 유온이 연못가 근처에서 쉬다가 문득 잠이 들었는데, 꿈 속에서 (神)을 만났다고 한다. 그때 뇌성벽력이 치고 하늘이 시커멓게 변했는데, 근처에 있던 태공이 그 모습을 보자 유온의 배 위쪽에 교룡(蛟龍)이 떠 있었고, 유온의 몸에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으니 그 사람이 유방이었다.

물론 창업군주의 출생에 대해 온갖 전설이 따라 붙는건 고금을 막론하는 이야기지만, 간혹 어떤 사람들인 이 이야기에서 교룡의 존재가 강간범을 이야기하는게 아니냐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별 근거는 없다. 그보다 유방은 외모에 대해서도 융준용안(隆準龍眼), 용안미수염(容顔美鬚髥)과 같은 식으로 용과 연결이 자주 되는 편인데 이러한 과정에서 나온 전설이라고 보는것이 좋을 듯 싶다.

유방의 외모에 대해서는 앞서 말한대로 콧날이 높고 이마는 넒어 용의 얼굴을 닮았으며, 수염이 아주 그럴듯 해서 멋있었다고 한다. 또한 왼쪽 넒적다리에는 72개의 반점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많은 반점의 숫자야 '비범한 인물' 에 대한 묘사에서 자주 나오는 특징 중에 하나고, 용의 얼굴을 닮았다지만 사람 얼굴을 보고 연상시키는 동물이야 모두 다른 법이니 일단 알 수 있는 사실은 콧날이 높고 이마는 넒고 수염이 꽤 멋있었다는 정도다.

그리고 좀 뒤의 이야기지만, 유방은 정장(亭長)의 벼슬을 하고 나서부터는 자기 밑의 부하를 설(薛)[9] 땅으로 보내 죽피관(竹皮冠)[10]을 만들어 오게 하여 외출 할때는 무조건 이를 쓰고 다녔는데, 허세를 위한 용도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훗날 황제가 되고 나서도 이 죽피관은 계속 착용하고 다녔다고 한다. 대체로 유방의 초상화에서는 넒은 이마, 콧날, 죽피관이 강조되는 편이다.

3 생애 

3.1 패현의 허풍쟁이 

젊은 날의 유방은 변변한 일도 하지 않고 지냈었다. 사기 고조본기에서는 유방에 대해 아예 대놓고 술을 좋아하고 여자를 밝혔다 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통일 제국의 창업 군주에 대한 묘사로서는 이례적인 일이다. 베풀기를 좋아하고 성격이 활달했다고 하는데, 본인이 가진건 없더라도 한 턱 낼때는 화끈하게 내는 남자들의 행동과 비슷한듯. 훗날 유방이 황제가 되고 나서 아버지인 태공에게 "저보고는 생업도 못 꾸리고 형처럼 노력도 안한다고 하셨는데, 지금 보면 어떻습니까?"라고 농담하면서 부친의 장수를 기원한 일이 있었는데, 이를 보면 당시의 유방은 집에서도 천덕꾸러기 같은 처지였다. 

그 당시 유방은 가진건 쥐뿔도 없었지만 패기는 실로 남달라서, 왕온(王媼)과 무부(武負)라는 사람들의 집에서 매일매일 외상술을 퍼마시고 그러다 잠이 오면 아무데서나 널부러져 잠을 잤다.[11]

그런데 특별히 직업은 없지만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사람을 만나고는 했던듯 하다. 아직 진나라가 천하를 모두 집어삼키기 전에 떵떵거리며 살던 장이(張耳)를 만난적도 있을 정도. 그러다 어느날은 진나라의 수도인 함양(咸陽)에서 요역을 하고 있었는데, 진시황(秦始皇)의 위풍당당한 행차 모습을 보고 감탄하여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오호라! 대장부라면 실로 저래야 하지 않겠는가?"[12]

이렇게 일도 없는 백수였던 유방은 사수(泗水)의 정장(亭長)[13]이라는 조그만 자리를 얻게 되었다. 여기에 대해서 오해하는 부분이 소하(蕭何)가 자리를 추천하여 만들어주었다는 것인데, 유방이 이 자리를 얻게 된것은 소하와는 관련 없이 유방이 시험을 쳐서 획득한 자리다.[14] 소하는 자리를 얻게 도와준것이 아니라, 유방이 평민 시절부터 몇가지 일을 도와주다가 유방이 말단의 자리를 얻자 업무를 도와준 정도다.] 직업을 얻었다고 해도 조그만 자리에 불과한 말단이었지만, 워낙 유방의 패기가 대단해서 관아의 모든 관리들을 아랫사람 처럼 같잖게 여겼다고 한다.

이때 유방은 따로 만나던 조(曹) 씨라는 여자가 있었다. 다만 둘은 정식으로 혼례를 치루거나 한 사이는 아니었는데, 조씨는 이 관계에서 훗날 제도혜왕(齊悼惠王)이 되는 유비(劉肥) 낳았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끝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어느날 선보(單父)[15] 출신인 여공(呂公)이라는 인물이 패현으로 이주하는 일이 생겼다. 본래 살던 곳에서 원수가 있어 이를 피해서 도망친것인데, 이 여공이 패현의 현령과 안면이 있어 손님으로 와서 지내다가 아예 모든 가족을 이끌고 이주를 했던 참이었다. 현령이 돌봐주는 사람이니 패현의 여러 호걸들이나 관리들도 이 여공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만나서 축하를 하고 하례금을 바쳤는데, 이 사람들의 숫자가 꽤 되서 소하가 나서서 사례금을 걷는 일을 맡게 되었다. 소하는 사례금의 액수가 천 전(錢) 이하인 사람들은 대청 아랫 자리에 않게 했다.

헌데 이 자리에 땡전 한 푼 없던 유방이 나타났다. 유방은 돈도 없었지만 당당하게 하례금 일만전이라고 쓰고 들어왔다. 일만전이라는 숫자를 본 여공은 깜짝 놀라서 나와 유방을 직접 맞이했는데, 본래 관상을 즐겨 보던 여공이 한번 유방을 보자 꽤 그럴듯한 면모가 있었다. 여공은 유방을 극진히 대접해서 윗자리에 앉게 했는데, 소하는 그런 모습을 보고 이렇게 빈정거렸다고 한다.

"유계라는 작자는 본래 큰소리만 치지 일을 끝마치는것은 드뭅니다."

적당히 눈치나 보라는 이야기겠지만, 유방은 그런 이야기는 다 무시해버리고 계속 윗자리에 앉았다. 앉아있는것도 앉아있는 일인데, 태도가 너무 당당해서 사양하는 기색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술자리가 끝날 무렵이 되자, 여공은 슬쩍 유방을 자리에 남겨놓더니 자신의 딸인 훗날의 여후(呂后)를 주겠다고 권했다.[16] 이에 대해 여공의 부인이 "아니, 패현 현령이 딸을 주라고 할때도 안좋았는데 저런 거렁뱅이에게 딸을 주다니요?" 하고 노발대발했지만, 여공은 "아녀자가 무슨 일을 알아!" 하면서 무시하고 기어코 딸을 유방에게 주고 만다.

그렇게 여후와 결혼한 유방은 훗날의 혜제(惠帝) 유영(劉盈과 노원공주(魯元公主) 등의 자식을 얻었다. 유방과 조씨의 관계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는데, 당초에 둘이 제대로 살림을 차리고 산것도 아니라서 그리 문제는 없었거나 혹은 유방이 유력자인 여공과 관계를 맺기 위해 조씨와의 인연을 정리하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17][18]

그러던 어느날, 여후가 아이들을 데리고 밭에서 일을 하고 있던 중 어떤 노인이 물을 좀 주라고 부탁했고 여후가 물을 주자 노인은 여후의 관상을 보더니 "부인은 천하의 귀인이 되실 겁니다." 고 대답했다. 여후가 두 아이의 관상도 봐달라고 부탁을 하자, 노인은 혜제를 보고는 "부인이 귀하게 되는 것은 이 사내아이 때문입니다." 라는 이야기를 했다. 노원공주의 관상도 칭찬을 한 노인이 자리를 떠나자, 마침 사랑채에서 나온 유방에게 여후가 이 말을 전하자 유방은 노인을 찾아가 자신의 관상도 물었다. 그러자 노인은 이런 대답을 했다.

"조금 전의 부인과 아이들이 모두 당신의 상을 닮았습니다. 당신의 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귀합니다."

이에 유방은 감사하면서 "혹시 그 말대로 된다면, 은덕을 잊지 않겠다." 고 대답했다. 하지만 유방이 어느정도 세력자가 되고 난 후에는 노인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19]

3.2 거병 

이때 진나라의 여산(驪山)에서는 진시황릉(秦始皇陵)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끌려와 고통스럽게 노역을 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정장이었던 유방은 패현의 죄수들을 호송해서 여산으로 끌고 가야 하는 임무를 맡았다.[20] 하지만 현시창의 상황이었던 여산에 끌려가고 싶은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기에 죄수들은 하나, 둘씩 달아나기 시작했는데 여산에 도착할 즈음이면 모두 도망치고 한명도 남지 않을 판이었다. 그렇게 되면 책임자인 유방도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었다.

이에 유방은 아예 행렬을 멈추게 하고 속 편하고 을 진탕 마시고는, 밤이 되자 "가고 싶은 대로 가라. 나도 도망칠 테니까." 라고 말하면서 죄수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그렇게 자유의 몸이 된 무리 중 열명 정도가 유방을 따르기를 원했다. 

유방은 그들과 술을 더 마신 후, 한밤중에 이동을 하면서 먼저 사람을 보내 앞 길을 살펴보게 했다. 앞서가던 사람은 이내 돌아오더니 "앞에 큰 이 길을 막고 있으니 되돌아가는게 좋다." 고 권했다. 그러자 유방은 술김에 "장사가 길을 가는데 그깟 뱀이 뭐라고!" 라며 소리치고 앞으로 가더니 칼로 뱀을 베어서 죽여버렸다. 그런 다음 몇 리를 더 가다가 기어코 술에 취해서 그대로 뻗어버렸다. 

유방을 따르던 사람들이 이를 쫒아서 와보자, 뱀이 죽은 자리에서 한명의 노파가 통곡하고 있었다. 왜 그러느냐고 묻자 노파는 "어떤 사람이 내 아들을 죽여서 그렇다." 고 대답했고, 자신의 아들은 백제(白帝)의 아들인데, 뱀으로 변해 있다가 방금 적제(赤帝)에게 참살 당했다고 이야기 했다. 사람들이 노인네가 헛소리를 한다고 여겨 두들겨 패서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들으려고 할때, 노파는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술에서 깬 유방은 그 이야기를 듣자 비범한 이야기라고 여겨 내심 좋아하게 되었고, 따르던 사람들도 유방이 뭔가 특이한 인물이라고 여겨서 더욱 그를 경외하게 되었다.[21]

그 무렵 진시황제는 "동남쪽에 천자의 기운이 있는것 같다." 고 여기며 동쪽으로 순행해 그 기운을 억누르려 했는데, 여러가지 묘한 일도 있고 해서 스스로 특이한 사람이 아닐까 여긴 유방은 "혹시 나 잡으려고 그런게 아니야?" 라고 생각해서 망(芒) 산과 탕(碭) 산[22]의 연못가 근처 암석 사이에 은둔하면서 몸을 피했다. 

그런데 혹시 여후가 유방을 만날 일이 있을때, 여후는 유방이 어딘가에 숨어있어도 항상 귀신같이 그를 찾아내었다. 이에 유방이 신기해서 어떻게 찾았느냐고 물어보자, 여후는 "당신이 머무는 곳 위에는 항상 운기(雲氣)가 서려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고 대답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패현의 많은 자제들은 더욱 유방을 대단하게 여겨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23]

유방이 숨어 다닐 당시, 진나라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진시황(秦始皇)의 시대부터 이어진 폭정으로 백성들은 신음했고, 이세황제(二世皇帝)는 환관조고(趙高)에게 일을 맡긴채 사치와 방종에 빠졌다.

결국 폭탄은 터져버려 BC 209년, 진승(陳勝) 등이 처음으로 저항을 시작하여 진승 · 오광의 난이 발발 했고, 진승 등은 장초(張楚)를 건국했다. 이에 여러 군현의 백성들도 모두 진나라 관리를 때려 죽이고 봉기에 동참했다.

패현의 현령 역시 그런 분위기는 느끼고 있었고, 자기가 죽지 않으려면 먼저 반란에 동참해야 하겠다고 여겼다. 하지만 자신은 진나라 관리라 사람들이 따르지 않을 것 같으니, 마침 숨어 지내던 유방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우면 적절하다고 여겨 번쾌(樊噲)를 불러 유방을 돌아오게 하였다. 

그런데 정작 유방이 돌아올 때가 되자, 마음이 또 바뀐 현령은 성문을 걸어 잠구고 유방이 들어오는것을 막으면서, 유방과 친해보이던 소하와 조참(曹參)을 죽여버리려고 했다. 느닷없이 죽을 지경에 놓이게 된 소하와 조참은 부리나케 성벽을 넘어 도망쳐서 유방에게 붙어버렸다. 유방이 "현령 그 놈을 잡아 죽여야 패현이 무사하다." 는 내용의 글을 적어 성 내로 화살을 쏘아 보내자, 성 내에서 반응이 일어나 현령을 때려 죽이고 성문을 열게 된다.

일단 반란이 일어나고 나자, 이제 사람들을 이끌 주모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물론 사람들은 유방에게 이 일을 부탁했다. 유방은 짐짓 거부하는 제스처를 취했지만, 소하나 조참이나 여기서 유방을 거슬려서 좋을 것도 없고, 또 만약 주모자로 모반을 저질렀다가 일이 실패하면 자기 친척들이 모조리 도륙 당할까봐 두려웠던 그들은 유방에게 모든 일을 양보했다. 유방은 이렇게 추대되었고, 이후부터 패공(沛公)으로 불리게 된다.

추대된 유방은 패현의 관청에서 황제(黃帝)와 치우(蚩尤)에게 제사를 지내고, 짐승을 죽여 피를 북에 바르고 깃발을 모두 붉은색으로 했다.[24] 이에 소하와 조참, 번쾌 등과 젊은 관리들이 패현의 젊은이 이삼천 명을 모았고, 호릉(胡陵)[25]과 방여(方輿)[26]을 공격하고 다시 돌아와 풍읍(豊邑)을 지켰다.

3.3 반(反) 진 전쟁 

3.3.1 풍읍의 배반 

이렇게 유방이 거병을 한 BC 208년, 천하의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장초군의 장수 주장(周章)[27]은 수십만의 대군을 이끌고 진나라 수도 함양에서 불과 50km 정도 떨어진 위치까지 진군했으나, 진나라 최후의 명장인 장한(章邯)이 대반격을 가하자 여지없이 분쇄되었다. 또한 장초의 장수들은 각각 (燕), (趙), (魏) 등을 세워 독립하였고 또한 (齊) 역시 전(田) 씨 형제들이 거병하여 나라를 세웠다. 또한 오나라 땅에서는 항량(項梁)이 봉기하고 있었다.

그 무렵, 진나라의 진나라의 사수군감(泗水郡監)[28] 평(平)이 반란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를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거느리고 풍읍을 포위하였다. 

하지만 유방은 이틀 후 출진하여 그들을 쳐부셨다. 이제 수비가 아니라 공세에 나서기로 결정한 유방은 옹치(雍齒)에게 풍읍의 수비를 맡기고는 자신은 군대를 이끌고 설현으로 진군, 사수군을 지키는 장(壯)을 격파했다. 장은 도망쳤지만 유방군의 좌사마(左司馬) 조무상(曹無傷)은 이를 추격하여 장을 잡아 죽였다. 이후 유방은 군대를 돌려 항보(亢父)를 거쳐 방여(方輿)에 이르기까지 진군했다.

그런데 이 무렵 장초의 진승은 수하의 장수 주불(周巿)을 시켜 위나라 땅을 공격하게 하려고 했는데, 주불은 이에 풍읍에 사자를 보내 "풍읍은 본래 위나라가 천도한 곳이었으니[29] 항복해라. 항복하면 후로 삼아 맡기겠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모두 도륙할 것이다." 라고 협박을 했다. 

헌데 당시 유방은 밖으로 나가 전투를 치르고 있었기에, 이 연략을 받은 사람은 옹치였다. 본래부터 유방과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던 옹치는 이에 넘어가 훌라당 풍읍을 바쳐버렸고, 이 소식을 듣고 놀란 유방이 귀환해 풍읍을 공격했지만 함락 할 수가 없었다. 결국 병이 난 유방은 일단 패현으로 물러났다.

옹치와 풍읍의 배반에 원통하고 분한 유방은 마침 동양(東陽)[30] 출신 사람인 영군(寧君)과 진가(秦嘉)가 경구(景駒)라는 사람을 임시왕으로 삼아 유(留)[31]에 있다는 사실을 듣자 경구를 만나 의탁하여 군사를 빌렸고 다시 풍읍을 공격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 무렵이 장한은 진승의 세력을 완전히 격파해버리고 있던 참이었다. 장한의 부장이었던 사마니(司馬夷)는 북쪽으로 초나라 땅을 평정하고 상현(相縣)[32]을 도륙하고 탕(碭)[33]에 이르렀다. 이에 유방은 영군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소(蕭)[34]로 진군하여 전투를 벌였지만 그다지 상황이 좋지 않아 일단 유 땅으로 물러나 전열을 정비했다. 그 후 재차 공격을 감행, 3일간의 싸움 끝에 사마니에게 함락된 탕성을 재함락하고 탕성의 장정을 거두어 대략 오천명 가량의 병력을 얻을 수 있었다. 유방은 이 부대를 가지고 하읍(下邑)[35]을 함락시키고 풍읍 부근에 주둔했다.[36]

3.3.2 항량의 부장으로 

이때 유방의 지상과제는 물론 풍읍의 옹치를 박살내는 일이겠지만, 당시의 전력으로는 어려운 면이 많았다. 그런데 봉기군 중 최강의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던 항량이 설(薛) 땅에 주둔하자 기회라고 여긴 유방은 직접 백여명의 기병만 거느리고 항량을 방문했다. 유방과 이야기를 나눈 항량은 오천여명의 병사와 오대부(五大夫)에 해당하는 장수 십여명을 빌려주었고 유방은 이를 바탕으로 다시 풍읍을 공격했다. 하지만 풍읍은 여전히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이로부터 한달 뒤, 양성(襄城)을 함락하고 대학살을 자행한 항우는 항량의 본군으로 귀환하였고, 이에 맞추어 항량이 각지를 공격하고 있는 장수들을 소집하였기에 유방도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진승이 살해된 것이 확실해졌기에 항량은 이에 맞추어 초회왕(楚懷王)의 손자 웅심(熊心)을 새로운 초회왕으로 추대하고 초나라를 다시 부활시켰다.[37]

그 무렵 진나라의 장한은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제나라를 공격중이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항량은 곧바로 동아로 진군하여 장한을 물리쳤다. 항량은 기세를 타고 장한을 추격했지만, 장한은 군세를 수습해서 다시 강력한 진영을 갖추었다. 이에 항량은 별동대를 조직하여 항우와 유방에게 이를 이끌고 하고 성양(城陽)을 공격하게 했다. 성양을 함락하고 성 내의 사람들을 학살한 별동대는[38] 이윽고 복양(濮陽)으로 진군하면서 진나라 군을 한번 격파하고, 다시 성에 공격을 가해 복양을 점령했다. 그리고 정도(定陶) 공략에 나섰지만 쉽지 않자 옹구(雍丘)로 진군하여 진군을 격파하고, 진나라의 재상 이사(李斯)의 아들 이유(李由)를 죽이는데 성공했다. 이후 별동대는 외황(外黃)을 향해 진군했다.

그런데 교만을 부리던 항량은 이후 장한의 반격에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항우와 유방의 별동대는 외항을 버리고 진류를 공략 중이었지만, 항량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병사들의 사기가 염려되어 여신(呂臣) 등과 함께 퇴각을 했다. 그 당시 초나라의 기둥이었던 항량을 참살한 장한은 이제 초나라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며 말머리를 북쪽으로 돌렸다. 조나라를 박살내기로 한 것이다.

3.3.3 함양으로의 진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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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과 항우의 진격로

장한은 한단(邯鄲)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부장 왕리(王離)[39]를 파견해 장이(張耳), 진여(陳餘) 등이 몸을 피한 거록(巨鹿)을 공격 중이었다. 조나라 마저 무너지면 진나라의 세력이 다시 천하를 뒤덮을 것이 자명하였기에, 이를 구원하는것이 급선무였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초회왕은 관중에 먼저 입성하는자가 그 지역의 왕이 되리라 라는 선언을 한 상태였다. 또한 항우는 진나라를 멸망시켰야만 항량의 복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유방과 함께 서쪽으로 가길 원했지만, 회왕의 주변에 있는 노장들이 항우를 서쪽으로 보내는 일을 꺼려 이 일은 유방이 맡게 되었고, 항우는 송의(宋義)와 함께 북쪽으로 진군해 거록의 진나라군을 격파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유방은 독자적으로 군단을 이끌 수 있게 되었다. 유방은 강리(杠里)[40]의 진나라 군을 물리치고 서쪽으로 나아가다, 창읍(昌邑)[41]에 이르렀다. 바로 이때 팽월(彭越)을 만나 양 군대는 힘을 합쳐 창읍을 공략했으나, 창읍의 수비가 완강하여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이에 잠시 율현(栗縣)으로 후퇴하였다가 강무후(剛武侯)[42]의 군사 4천여명을 빼았아 위나라 장군 황흔(皇欣), 신도(申徒) 무포(武蒲) 등과 함께 창읍을 재차 공격했지만 여전히 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그 무렵 항우가 거록대전에서 놀랄만한 승리를 거둔 참이라, 유방은 시간을 낭비할 수 없어 창읍을 내버려 두고 서쪽으로 진군하며 고양(高陽)을 지나갔다. 바로 이때 역이기(酈食其)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 유방은 양다리를 떡 벌리고 마루에 걸터앉아 두 여자에게 발을 씻기고 있었다. 손님을 대하는 태도로서는 무례한 행위였는데, 그 모습을 본 역이기는 절을 하지 않고 길게 읍만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족하께서는 진나라를 도와 제후들을 공격하려고 하십니까? 아니면 제후들을 이끌고 진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십니까?"

유방은 이 말을 듣고 역이기에게 욕을 퍼부었다.[43]

"이 비루한 유자 놈아! 지금 천하가 진나라의 폭정으로 고통을 받은지 오래 되었다. 그래서 제후들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몸을 일으켜 진나라를 공격하려고 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진나라를 도와 제후들을 공격한다고 하느냐?"

그러나 역이기는 기가 꺾이지 않고 "무리를 모아 의병을 일으켜 무도한 진나라를 멸하기 위해서는 장자(長子)를 거만한 태도로 맞이하심은 옳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따지자, 유방은 그 즉시 발씻기를 멈추고 벌떡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역이기를 윗자리에 모셔 조언을 구했다. 유방은 역이기의 조언에 따라 진류(陳留)를 습격해 진나라가 비축한 양식을 얻어 군량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었다. 그 후 역상(酈商)[44]을 장수로 삼고 개봉(開封)을 쳤지만 여기도 쉽게 함락이 되지 않자 그대로 서쪽으로 나아가 백마진(白馬津)[45]에서 진나라 장수 양웅(楊熊)을 쳐부수고 이를 추격하여 곡우(曲遇)에서 대파하였다.

이후 유방은 남쪽으로 나아가 영양(穎陽)을 함락시켰고, 장량과 다시 재회하여 그 도움을 바탕으로 환원(轘轅)[46]을 점령하였다. 

그런데 조나라의 별장 사마앙(司馬卬) 관중으로 진입해 왕이 되고 싶은 마음에 하수를 남하하여 함곡관(函谷關)으로 진입하려고 하자, 유방은 평음(平陰)[47]을 공략하여 나룻터를 끊어버렸다. 다시 남쪽으로 이동해 낙양 동쪽에서 전투를 치루었으나 유리하지 못해 양성(陽城)으로 후퇴하여 병력을 추스린 후, 남양현(南陽縣) 동쪽에서 남양 태수 여의(呂齮)를 무찔러 남양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여의는 완성(宛城)으로 도망쳤고, 유방은 여기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그대로 서쪽으로 진군할 요량이었지만 장량이 "후방에 적을 남기는건 좋지 않다." 고 충고하여 완성을 함락시켰다.[48] 완성을 함락시킨 유방의 세력은 이 무렵에는 무시못할 정도로 강력해져서 주위의 성들이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했는데, 게중에는 왕릉(王陵)도 있었다. 유방은 파군(番君) 오예(吳芮)의 별장 매현(梅鋗)과 함께 석현(析縣)과 역현(酈縣)을 함락시켰다. 이때는 장한이 은허에서 항우에게 항복을 했고, 유방은 더욱 서둘러야 했다.

그런데 이때 뜻밖의 사람으로부터 연락이 들어왔다. 바로 그 악명이 자자한 조고가 유방에게 접촉을 시도한것. 조고는 당시 호해를 이미 살해한 후였는데, 관중을 쪼개서 서로 나눠 왕이 되자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유방은 이것이 속임수라고 여기고 그대로 진군했고, 무관(武關)을 돌파한 후 남전(藍田)에서 진나라의 대군을 격파하고 이어서 북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BC 206년 10월. 마침내 유방의 병사들은 패상(覇上)에 이르렀다. 천하의 그 어떤 제후들보다 가장 먼저 함양 근방에 도달한 것이다.

3.3.4 홍문연(鴻門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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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함양은 황제를 살해하고 복마전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던 괴물 조고를 자영(子嬰)이 살해한 후였다. 자영은 백마가 끄는 흰 수레를 타고 목에는 밧줄을 메고서, 황제의 옥새(玉璽)와 부절(符節)을 봉해 가지고 나와 지도(軹道)[49]로 나와 유방에게 항복했다. 유방의 장수들 중에 자영을 죽여 분을 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유방은 이를 거절했다. 

"처음 회왕이 나를 관중으로 보낸 이유는 원래 내가 관대하고 남을 용납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소. 이미 항복한 사람을 죽이는 일은 또한 앞일이 상서롭지 않을 것이오."

이에 자영을 관리에게 맡기고, 본인은 함양에 입성하여 호화로운 진나라의 보물과 여자들을 취해서 신나게 노려고 하였다. 하지만 번쾌(樊噲)와 장량의 설득으로 결국 그만두고, 진나라의 보물에 일절 손을 대지 않고 군대를 패상에 주둔시켜 함양의 백성들이 민폐를 당하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여러 현의 호걸들과 노인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여기 계시는 나이든 어른들께서는 진나라의 가혹한 법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고통을 당해 왔습니다. 이를 비방하는 사람들은 멸족을 당해왔고, 서로 모여 말을 나눈 사람들은 죽임을 당하여 거리에 내던져졌습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 제후들은 나와 ‘관중에 먼저 들어간 사람이 그곳의 왕이 된다’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약속대로 나는 마땅히 이곳의 왕이 될 것입니다."

"이에 나는 여러분들과 ‘살인자는 죽인다, 남을 상하게 하거나 남의 물건을 훔치는 자는 법에 따라 처벌한다’는 내용의 법삼장(法三章)을 약속합니다. 나머지 진나라의 모든 법은 폐지하겠습니다. 모든 관리와 백성들은 예전처럼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대저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은 부로들을 위해 나쁜 것들을 제거하기 위해서입니다."

"내 마음대로 당신들을 해치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결코 두려워하지 말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내가 휘하의 군사들을 패상으로 물리쳐 주둔하는 이유는 제후들이 오기를 기다려 그들과 함께 규약을 제정하기 위함에서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각 현(縣), 진(鎭), 향(鄕), 촌(村) 등에 이 소식을 전하니 진나라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며 와 을 잡고 을 가져와 대접하려고 했지만, 유방은 "이미 우리는 먹을게 많다." 면서 모두 물렸다. 이에 모든 백성들은 기뻐하면서 오직 유방이 진나라 왕이 되지 못할까만을 걱정하였다.

그런데 이 무렵 어떤 사람이 유방에게 이러한 제안을 했다. 지금 항우가 진격하고 있는데, 서둘러 함곡관을 막아 관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계책에 솔깃해진 유방은 이대로 행했지만…… 이는 항우의 어그로만 잔뜩 끌게 하는 행위였다. 11월 무렵, 항우는 유방이 함곡관을 막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엄청나게 분노해 경포(黥布) 등을 시켜 함곡관을 뚫어버리게 했다.

이렇게 되자, 유방의 부하였던 조무상은 '이럴 바에야 항우에게 항복해서 녹봉이나 받자.' 는 생각으로 "유방이 관중에서 왕 노릇 할 생각으로 금은보화를 챙기고 있습니다." 라고 고자질을 했고, 범증(范增) 역시 지금 유방을 죽여야 한다고 권하자 항우는 병사들을 배불리 먹인 후 다음 날 아침 유방을 박살내버릴 생각을 하였다.

이 당시 양측의 전력은 유방은 십만 명의 군사를 이십만이라고 부풀린 형국이었고, 항우는 사십만의 병사를 백만이라고 부풀리는 상황이었다. 전력으로는 전혀 상대도 되지 않을 수준이었는데, 항백(項伯)은 친분이 있던 장량을 살리고 싶어 몰래 진영을 빠져나와 장량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50]

이에 장량은 "나 혼자 도망치면 의(義)가 아니다." 라면서, 유방에게 이 모든 일을 말해주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유방은 경악했으며, "항우를 이길 자신이 있느냐." 는 장량의 물음에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나는 결코 항우와 대적할 수 없소. 어떻게 하면 좋겠소?" 라고 물었다. 이에 장량은 항백을 데려와 유방과 만나게 했고, 둘의 자식들이 혼인하도록 약속을 한뒤 항백을 돌려보냈다.

환대를 받고 돌아온 항백은 "아, 패공은 자네에게 개기려고 그런게 아니라, 도적들 막으려고 함곡관을 잠군 것 뿐이야. 개길 생각은 전혀 없던걸?" 이라고 변명을 해주었고, 유방은 항우를 만나 사죄했다. 그러나 범증은 이 자리에서 유방을 죽여버릴 심산이었으나, 번쾌와 장량의 도움으로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유방은 돌아오자마자 조무상을 죽였다.[51]

이후 항우는 함양에 입성해서 대학살을 하고 모든것을 불태워버렸다.

3.4.1 권토중래 

천하의 지배자가 된 서초패왕 항우는 각지의 제후왕을 분봉했는데, 가장 위협이 되는 유방은 파촉(巴蜀)의 벽지에 처박히게 되는 신세가 되었다. 

유방의 본래 고향이었던 강소성 지역의 위치를 생각해보자면 돌아버릴 수 밖에 없는 일이었는데, 이는 유방 뿐만이 아니라 주발(周勃), 관영(灌嬰), 번쾌등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유방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한번 항우하고 싸워볼까?" 라는 생각까지 품었고 장수들도 동의했지만, 소하는 "이까짓거 죽는것보다는 낫다."고 설득했다. 처음에는 소하에게 화를 내던 유방이었지만, 결국 그 의견에 동의하고 소하를 승상으로 삼았다.[52]

유방 입장에서 더 열받는 일은, 본래 유방의 군단은 10만에 육박했는데 항우는 게중 3만명만 유방을 따를 수 있게 하였다(……).[53] 그 정도로 항우는 아직 유방에 대한 의심을 풀지 못하고 있었는데, 장량은 잔도(棧道)를 불태우라고 충고해서 항우의 의심을 덜게 하였다.

그러나 유방을 따라온 많은 병사나 장수들은 이내 이런 촌구석에서 여생을 보내게 될까 두려워 도망치기 시작했고, 병사들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노래를 불러제꼈다. 유방으로서는 괴로운 나날이었는데, 어느날 소하마저 달아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유방은 어이쿠, 이제 난 망했구나!" 같은 반응을 보였지만 소하는 달아난게 아니었다. 그는 한신을 데려왔다.

소하의 추천으로 한신을 대장군으로 삼은[54] 유방은 한신과의 대화에서 용기를 얻었고, 세력을 정비해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3.4.2 삼진평정과 팽성대전 

마침내 BC 206년 8월, 한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방은 한신의 제안에 따라 옛날의 길을 이용해 우회하여 옹왕(雍王) 장한(章邯)을 공격했다. 당시 한군은 파촉에 들어오면서, 장량의 건의에 따라 여러 절벽 등에 만들어놓은 잔도(棧道)를 모두 불태워버린 상황이었다. 잔도가 모두 불탔으니 한군이 나오려면 시간이 걸릴 텐데……라고 생각했을 장한등에게 한방을 제대로 먹일 수 있는 것이다.

장한은 여러차례 한군과 교전을 벌였으나 한군은 장한을 연달아 격파했고, 곧 관중을 평정하는데 성공했다. 장한은 폐구(廢丘)에서 포위되어 꼼짝도 할 수 없는 형국이 되었고, 이후 한군은 색왕(塞王) 사마흔(司馬欣), 책왕(翟王) 동예(董翳), 하남왕(河南王) 신양(申陽), 한왕(韓王) 정창(鄭昌) 등을 어린아이 손목 비틀듯이 간단하게 제압했다. 그 후 본격적으로 동쪽으로 진군한 유방은 위왕(魏王) 위표, 은왕(殷王) 사마앙도 항복시키게 된다.

당시 항우는 제나라에서 전영(田榮)과 교전을 치룬 후 완전히 늪에 빠진것처럼 허우적대던 판이라 이에 대응할 수 없었다. 마음껏 세력을 키우고 제후들을 끌어들은 유방은 죽은 의제(義帝)를 위해 3일 장을 치룬 후, 제후군을 집결시켜 56만이라는 어마어마한 대군을 모아 초나라의 본거지인 팽성으로 진격했다.

항우가 없는 팽성은 당연히 이런 공격을 막을 수 없었고, 유방은 손쉽게 성을 점령 할 수 있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제나라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항우도 무언가 결단을 내려야 했다. 

항우는 부하 장수들에게 성양의 공격을 맡긴 채, 단 3만명을 인솔하여 엄청난 속도로 남하, 팽성의 서쪽인 소현에 이르고 그때부터 다시 동쪽으로 진군하면서 눈 앞에 보이는 한군을 개미처럼 밞아 죽였다. 이때 양군의 전력차는 무려 19배 정도. 심지어 과장을 고려해 한군의 전력을 10분의 1로 줄여도 초나라군의 숫자 열세는 변함이 없다. 제후 연합군은 숫적으로 압도했지만 여러 제후들의 군대가 모여 통일된 체계가 아니었고, 그 상태에서 기습을 당해 모랄빵을 먹자 제대로 반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박살이 나버렸다.

결국 팽성의 동쪽인 곡수(穀水)와 사수(泗水)에서 10만여명의 병사들이 때죽음을 당했고 남쪽으로 도망친 병사들도 수수(睢水)에서 무참하게 살육 당하여 10만여 명이 물귀신이 되었다.[55]

워낙 엄청난 패배라 유방 본인도 죽을 고비를 두번이나 겪었지만, 한번은 모래 폭풍 때문에 목숨을 구했고 다른 한번은 정공(丁公)을 설득해서 죽음을 벗어날 수 있었다. 유방은 도망치는 와중에 패현(沛縣)에서 가족들을 챙기려고 했는데, 항우도 유방의 가족을 잡기 위해 패현에 사람을 보냈고 가족들도 난리를 피해 도망친 와중이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냥 달아나는데, 도중에 유방의 아들인 유영과 장녀인 노원공주가 길거리에 버려져 있는것을 보고 이들을 자기가 타고 있는 수레에 태웠다.

그런데 저 멀리서 초군의 추격군이 보이기 시작하자, 당황하고 지친 유방은 수레의 속도를 빠르게 하기 위해서 아이들을 수레 밖으로 던져 버렸다. 이때 수레를 몰고 있던 하후영(夏侯嬰)은 그때마다 수레를 멈추고 아이들을 태운 후에야 다시 달렸는데, 그것도 처음에는 아이들을 목에 매달고 일부러 천천히 달리다가, 아이들이 진정하고 난 후에야 다시 전속력으로 달렸다. 이 짓을 3번 반복하자 어그로가 머리 끝까지 오른 유방은 10번이나 하후영을 찔러서 죽이려고 했으나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다.[56] 하후영은 유방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비록 사태가 급박하다 하여 수레를 빨리 몰 수 없다고 하지만, 어찌 두 아이를 버릴 수 있겠습니까?"

이런 온갖 우여곡절 끝에 유방은 간신히 초군의 추격을 피할 수 있었고, 두 아이들도 무사히 풍읍(豊邑)으로 올 수 있었다. 유방은 그 후에 하후영에게 기양(祁陽) 땅을 식읍으로 주고 공신으로 평생 우대했다.

그러나 유방의 아버지인 태공(太公)과 마누라가 되는 여후(呂后)는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다. 심이기(審食其)라는 인물은 이 둘을 호위하면서 어떻게든 유방과 만나려고 했지만, 오히려 초군을 먼저 만나 꼼짝없이 사로잡히고 말았고 초군은 태공과 여후를 항우에게 바쳤다. 항우는 이들을 군중에 두어서 데리고 다녔다.

이렇게 엄청난 패배를 겪었지만, 유방은 소하의 보급 등을 바탕으로 다시 재기를 할 수 있었다. 초군을 경읍(京邑)과 색읍(索邑)에서 격파한 유방은 형양(滎陽)을 중심으로 항우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3.4.3 형양 함락과 성고 함락 

팽성대전의 패배 이후 유방은 수하(隨何)를 이용해 경포를 회유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한신을 시켜 도망친 위표를 물리치게 하고, 이후 하북으로 진군하여 개별적인 활동을 하게 지시했다. 팽성대전 이후 기세를 보자면 단박에라도 한군을 부셔버릴 수 있을 법한 초군이었지만 의외로 한군을 시원하게 몰아내지 못했고 한군은 거의 1년 동안 형양에서 초군을 막아내었다.

그러나 초군이 한군의 군량을 끊어버리게 되자 한계에 봉착했고 BC 204년 5월, 형양은 거의 함락 직전이 되었다. 유방은 이때문에 심하게 우려스러워 하면서 항우에게 강화 요청을 하고, 형양의 이서 지역을 경계로 하여 초나라와 한나라의 국경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하지만 범증은 유방이 위험한 인물이니 강화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에 항우는 더욱 강하게 형양을 공격했다. 

이 무렵, 유방은 진평(陳平)을 수하로 삼았다. 여러 장수들은 진평이 형수와 간통을 한 색마이며, 배신을 밥먹듯이 하는 작자라고 욕을 퍼부었지만 진평과 면담을 해본 유방은 되려 진평에게 후한상을 내리고 호군중위의 벼슬에 임명했다. 그 진평은 이 위기상황에서 하나의 계책을 내놓았는데, 이간책을 사용해 항우와 범증의 사이를 약화시키자는 것이다. 사실 방법 자체는 간단했다. 유방은 항우의 사자가 한군의 진영에 오자, 일부러 으리으리하게 대접을 했는데, 정작 사자를 만나자 깜짝 놀라는 체하며 "어, 우린 범증의 사자가 온 줄 알았는데 항우의 사자구만?" 이런 소리를 하며 대접한 음식을 모조리 빼앗고는(……) 그냥 평범한 음식을 내준 것이다. 그런데 항우는 이런 간단한 수작에 넘어가 범증을 의심했고, 격분한 범증은 항우의 곁을 떠나게 되었다. 범증은 곧 몸에 등창이 나서 죽었다. 

하지만 범증이 죽었어도 포위망은 풀어지지 않았다. 진평은 2천여명의 여자들을 성 밖으로 내보내 눈속임을 하고,[57] 기신(紀信)은 진짜 유방은 탈출시키고 스스로 유방 행세를 하여 성 밖으로 나가 초군에 항복했다. 속임수에 당한것을 깨달은 항우는 기신을 불태워 죽였다.

유방은 우선 관중으로 들어가 세력을 다시 추스린 후 항우와 재결전 하기 위해 동쪽으로 나아갔다. 이때, 원생(袁生)이라는 인물은 유방에게 충고를 했다.

"한과 초 두 나라는 형양성을 사이에 두고 몇 해를 대치해 왔으나 한나라는 항상 수세에 몰렸습니다. 원컨대, 왕께서 무관(武關)으로 나가시면 항우는 필시 군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달려올 것입니다. 그럴 경우 대왕께서는 해자를 깊이파고 보루를 높이 올려 지키신다면 형양과 성고 일대의 백성들과 군사들은 모두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사이 한신 등에게 명하여 하북의 조(趙), 그리고 연(燕)과 제(齊)를 평정하도록 하게 하십시오. 그때 형양으로 들어가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신다면 초군은 우리의 양동 작전에 대비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며 그 전력은 분산되어 그 틈에 한나라 군사들은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다시 한 번 겨룬다면 틀림없이 초나라를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유방이 남쪽으로 이동해서 형양에 대한 압박을 풀고, 그 사이에 한신은 북방을 평정하게 하자는것. 이에 따라 유방은 완성(宛城)과 섭(葉)에서 경포와 주둔하며 항우의 주의를 끌었다. 항우는 이에 유방과 결전하기 위해 달려왔지만 유방은 도전에 응하지 않았고, 그 사이 팽월은 뒤치기를 시전해 항성(項聲) 및 설공(薛公) 등의 장수를 격파해서 항우를 성가시게 했다. 항우의 주위가 팽월에 쏠리는 사이 유방은 성고에 입성했다.

그런데 항우는 순식간에 팽월의 군대를 격파하고는 다시 형양으로 나아가 주가(周苛)와 종공을 모두 죽이고 한왕 신은 사로잡았으며, 성고를 포위했다. 성고가 풍전등화의 상태에 놓이자 유방은 하후영과 함께 둘만 간신히 도주했고, 의지할 수 있는 한신의 군단으로 도망쳤다.

이 당시 한신은 장이와 함께 상당한 세력을 이끌고 있었다. 유방이 한신의 군영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이었다. 처음에 한나라의 사자라고 자신의 이름을 대고 성벽으로 들어온 유방은, 곧바로 장군의 인수(印綏)와 부절(符節)을 손아귀에 넣고, 순식간에 인사배치를 끝내 그 병력을 완전히 자신의 통제 하에 놓았다. 이때 한신은,

잠 자고 있었다.

유방이 눈 깜짝할 사이에 군대의 지휘관을 강탈하는 동안, 한신은 장이와 함께 꿈나라 여행을 떠나고 있던 중이었다. 자고 일어나 보니 느닷없이 유방이 있자 한신은 경악했고(……) 유방은 장이에게는 조나라를 지키게 하고, 한신은 조나라의 상국으로 삼아 즉시 제나라를 공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보통 역사에서 군대의 지휘권을 가진 장수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경우가 많고, 역으로 군주가 군사력이 전무하다면, 결국 그 장수의 파워에 휘둘리다가 비명횡사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아니, 보통은 이런 시나리오가 일반적인데, 이때 유방은 미역국 마시듯이 순식간에 한신의 지휘권을 자기에게 가져왔고, 잠 자고 있던 한신은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순식간에 털렸다.(……)

한신과 유방의 악연은 이때부터 시작된 셈인데, 이후로도 한신은 잠 자다가 창졸간에 군대를 빼앗긴 이때처럼, 이상할 정도로 유방에겐 약한 모습을 자주 보여주고 만다.

3.4.4 광무대치 

이후 유방은 한신에게 지시하여 조참부관주설 등과 함께 제나라를 평정하게 했고, 본인은 새롭게 충원한 군단을 거느리고 항우와 교전하기 위해 나섰다. 낭중(郎中) 정충(鄭忠)은 "항우와 싸워봐야 이길수가 없으니, 보루를 높이하고, 참호를 깊이 파서 굳게 지키기만 하자." 고 제안했고 이를 받아들인 유방은 그 대신 노관과 유가(劉賈)에게 군사 2만을 주어 팽월과 협력하게 해서 항우를 괴롭히게 했다.

그런데 아직 한신의 군단이 제나라로 진입하기 이전, 역이기는 자신이 나서면 싸움 한번 없이 제나라를 항복시킬 수 있다고 장담했다. 이에 유방은 역이기를 제나라로 보냈는데, 과연 그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 내어 제나라를 항복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괴철(蒯徹)의 꼬드김에 넘어간 한신이 제나라를 침공함으로서, 역이기는 삶겨서 죽게 되었다. 여기서부터 유방과 한신 사이의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지만, 일단 전황 자체는 최악의 시기를 넘어 호전되고 있었다. 한신은 제나라를 괴멸시키고 이후 용저(龍且)의 대군마저도 격파하여, 초나라에 대한 북방에서의 세력 우위를 확실하게 손에 넣게 되었다.

항우의 가장 큰 문제는 서쪽으로 진군하여 유방과 결전을 벌이고 싶어도 팽월 때문에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유방과 팽월은 기각지세를 이루어 협공을 취했는데, 항우는 팽월을 막기 위해서 군사를 서쪽이 아닌 동쪽으로 이동시킬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유방은 항우가 팽월을 공격하려고 간 틈을 타 성고를 다시 수복했고, 광무(廣武)[58]에 주둔하면서 오창(敖倉)의 양식을 확보, 장기전을 벌일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팽월을 물리친 항우는 다시 돌아와 수개월 동안 광무에서 주둔했지만, 또다시 후방에서 유격전을 벌이며 보급선을 끊어버리는 팽월 때문에 항우는 대단히 근심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판사판으로 항우는 큰 도마를 만들고, 그 위에 유방의 아버지인 태공(太公)을 올려 놓고 "항복 하지 않으면 삶아서 죽이겠다!" 고 엄포를 놓았다. 조금만 생각해도 상당히 막무가내 식의 작전인데, 당시 항우가 얼마나 초조해져 있었는지 볼 수 있는 부분.

그러나 유방은 이런 충격과 공포 급 제안에 "우리가 예전의 의형제를 맺었는데, 지금 우리 아버지를 죽이면 너는 네 아버지를 스스로 죽이는 거다. 그래도 죽이려면, 아버지 요리한 국물 나한테도 한 사발 다오!" 라고 더욱 충격적인 발언으로 응수, 항우는 격분하여 정말 태공을 죽이려고 하다가 항백의 만류로 그만두었다.[59]

하지만 항우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지금 천하가 혼란한건 우리 둘 때문인데, 차라리 우리가 맞짱 한번 떠서 이 싸움을 끝내자." 고 제안했다. 물론 항우와 대결할 생각이 전혀 없던 유방은 "난 힘이 아니라 지혜로서 싸우려고 한다" 고 거절했고, 대신 누번(樓煩)이라는 활 잘 쏘는 인물이 나서 초나라의 장수를 쏘아 죽였다. 이에 화가 난 항우는 완전무장을 하고 누번에게 달려들었고, 누번은 항우에게 활을 쏘려고 하다가 항우가 눈을 부릅뜨고 꾸짖는 소리에 식겁하고 그대로 한군의 진영으로 도망쳐 와 버렸다. 유방은 튀어나온 장수가 항우라는 사실을 알고 크게 놀랐다고 한다.

항우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나가 유방에게 말을 걸었고, 유방 역시 항우와 마주보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유방은 항우가 지금까지 저지른 10가지의 죄목을 열거하며 항우를 비난했다.

"하나, 팽성에서의 약속을 위반했다. 당초에 초회왕과 제후들이 먼저 관중에 입성한 자가 관중의 왕이 될 것이라 서로 굳게 약속하였지만 스스로의 욕심으로 이러한 제후들과 회왕의 맹약을 묵살하고 최초로 관중에 진입한 자신을 협박하여 파촉으로 쫓아버렸다"

"둘, 주군인 초회왕이 직접 임명한 송의를 왕명을 사칭하여 살해함으로서 상전에 칼을 들이밀었고 초회왕과 그의 군신들의 위엄을 무너뜨림으로서 그들이 이를 갈게 만들었다."

"셋, 초회왕이 진나라에 들어가 폭행과 노략질을 하지 말 것을 엄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살로 함양성을 피로 물들이고 아방궁을 불살라 파괴만을 일삼으며 시황의 능묘를 파헤쳐 진나라의 보물을 착복하고 죽은 자마저 모독했다."

"넷, 대의에 따라 명을 받고 조나라를 구원하였으나 스스로의 욕심으로 마땅히 그 결과를 회왕에게 보고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하지 않고 제후들을 협박해 관내로 들어갔다."

"다섯, 진왕 자영이 이미 투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당한 이유 없이 멋대로 죽여버렸다."

"여섯, 투항한 진나라 병사 20만명을 속여 신안 경내에서 하룻밤 사이에 이들을 살아있는 채로 땅에 묻어 유래없는 대학살을 벌이고 그들의 장수인 장한과 사마흔을 보란 듯이 왕에 봉하니 진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자아내게 했다."[60]

"일곱, 자신과 가까운 사람에게는 사사로이 좋은 땅을 주고 왕에 봉하며, 공이 있음에도 아랫사람들을 농락하며 유배지를 주었다. 원래의 제후들은 벽지로 내쫓아버리고 그들의 장수들은 중요한 땅의 왕으로 삼아버리니 군신의 법도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모든 지역의 신하들이 앞 다투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여덟, 진의 도읍을 불태운 후 자신의 마음대로 팽성을 도읍으로 정하고 그곳에 초회왕을 의제로 지칭하며 끌고와 감금하였다. 한왕의 봉지를 빼앗고 양나라와 초나라 땅을 마음대로 자신의 소유로 만들어버렸다."

"아홉, 의로서 우리 모두가 초회왕을 섬기기로 맹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추악한 성품으로 결국 강남에서 의제를 살해해버리고 그 시체를 장강에 처넣으니 원통함이 하늘에 사무칠 지경이다."

"열, 군주의 자리에 있으면서 정치를 함에 공정함이 없고, 약속을 초개처럼 버렸다. 신하된 자로서 군주를 시해하고 이미 항복한 자를 죽였으며 가벼운 마음으로 신의를 저버리니 이야말로 천하가 용납하지 않는 대역무도함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는 모두 틀린 게 아니었으니 본전도 못 찾고 악명만 잔뜩 높이는 꼴이 된 항우는 격분하여 미리 숨겨놓은 쇠뇌를 쏘아 유방을 맞춰버렸다. 하지만 가슴팍에 화살을 맞은 유방은 또다시 한술 더 떠 "저 도둑놈이 내 발가락을 맞추네!" 라고 하며 달아났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괴상한 제안과 기습은, 역으로 당시 항우의 사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전황은 이제 완전히 뒤집어지고 있었다.

3.4.5 해하의 결전 

한신은 북방의 패자가 되었고, 팽월은 징그러울 정도로 초나라의 후방을 후벼파며 보급을 말아먹고 있는 상황. 앞에는 유방이 있고 경포마저도 유방의 편이 되었기에, 항우는 싸움 한번 져본적도 없으면서 패전 직전에 놓이는 환국 실사판 괴이한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보급 때문에 항우는 전진 할 수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팽월을 물리치러 갈 수도 없었다. 항우가 주력을 이끌고 팽월을 물리치러 갔을때 유방은 초나라 장수 조구(曹咎)를 죽여버렸다. 항우로서는 승리는 고사하고 마음대로 움직이는것조차 불가능했다.

이에 항우와 유방은 협상을 해서 홍구(鴻溝) 이서의 땅은 한나라에, 그 이동의 땅은 초나라 땅으로 하자는 협약을 맺었다. 항우는 한왕의 부모와 처자를 한나라에 보내주었다. 한나라 진영의 군사들은 모두 만세를 불렀으며, 항우의 군사들은 초나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협악을 맺은 후 항우는 자신에게 아직까지 협력을 했던 제후들의 군사를 해산하고 팽성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유방 역시 장안으로 돌아가려고 할 무렵, 장량과 진평은 그런 유방을 만류했다. 지금이야말로 항우를 끝장 낼 수 있는 최후의 기회라는것. 이 말을 들은 유방은 다시 군사를 모아 돌아가는 항우를 기습하는데 이른다. 하지만 항우는 고릉(固陵)[61]에서 그런 유방의 군대를 무찔렀다. 본래 유방은 팽월과 한신에게도 연락 하여 움직이기를 권하였다. 하지만 팽월과 한신은 꼼짝도 하지 않고 버티기만 했기에 유방은 항우와 교전하여 패배했던 것이다.

화를 꾹꾹 눌러 참으며 유방은 장량의 제안에 따라 팽월과 한신의 봉지를 넒혀주기로 약속하고[62], 항우의 대사마 주은(周殷)을 회유하였고, 수춘을 공격하던 경포(黥布)와 유가(劉賈)까지 합류시켰다. 한신과 팽월이 결국 유방의 제안을 뿌리치지 못하고 군대를 이끌고 옴으로서, 영웅들은 마침내 해하(垓下)에서 모두 집결하였다. BC 202년, 해하에서 집결한 연합군은 항우의 최후를 장식하기 위해 진격하였다.

결국 이 최후의 해하전투에서 유방은 승리했고, 항우는 몰락하여 오강에서 자결했다. 초나라군은 10만의 군대 중 8만명이 목 없는 귀신이 되었으며, 최후의 최후까지 저항하던 노현(魯縣) 지방도 항우의 목을 보자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전쟁은 종결되었고, 천하의 주인은 이제 유방이 되었다.

혹여 이 시점에서 천하의 주인으로 다른 적절한 후보가 있다면 그 인물은 바로 한신이었다. 그런데, 승리를 거둔 후 서쪽으로 가던 유방이 정도(定陶) 부근에 이를 무렵, 유방은 갑자기 한신의 진영으로 달려가 한신의 군권을 빼앗았다. 갑작스런 기습에 한신은 놀랐는지 제대로 반항도 못해보고 고스란히 병권을 넘겨주게 된다. 유방은 한신을 본거지인 제나라에서 초나라 왕으로 옮기고, 도읍을 하비(下郫)에 정하게 하였다.[63]

3.5 제국의 황제 

3.5.1 나는 세 사람 보다 못하지만, 세사람을 부릴 줄은 안다 

당시 한왕이었던 유방은 이후 범수(氾水) 북안에서 형식적인 겸양을 표시한 뒤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후 군국제(郡國制)의 방식으로서 이성왕들을 배치한 유방은 낙양(洛陽)에 수도를 정했으며[64] 적절하게 부역을 면제하고 대사면령을 내리면서 전후 복구에 힘을 쏟았다.

이렇게 승리자가 되어 황제로 즉위한 유방은 남궁(南宮)에서 여러 군신들과 주연을 베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유방은 "내가 어떻게 항우를 이긴것 같나? 계급장 때고 편하게 이야기 해봐."라고 권했고, 이에 고기(高起)와 왕릉이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오만무례하여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시나 항우는 인자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합니다. 페하께서는 휘하의 장수를 부리시어 성을 함락하고 그 땅을 점령한 다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봉함으로써 천하의 사람들과 함께 그 이익을 같이 누리려고 하십니다."

"그러나 항우는 현능한 사람들은 시기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은 미워하며, 능력 있는 사람들은 의심하여, 싸움에서 승리했음에도 그 공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지 않고, 땅을 얻어도 나누지 않아 그 이익을 같이 누리지 않음으로 인해, 항우는 천하를 잃은 것인가 합니다."

그러자 유방은 자신의 의견을 말해주었다. 

"경들은 하나만 알지 둘은 모르는도다! 무릇 군영의 장막 안에서 계책을 마련하여 천리 밖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승리로 이끄는 것은 내가 장량만 못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위무하며, 군량을 준비하여 그 공급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은 내가 소하(蕭何) 보다 못하다. 또한 백만대군을 이끌고 싸우면 항상 이기고, 성을 공격하면 반드시 함락시키는 데는, 내가 한신만 못하다."

"이 세 사람은 호걸 중의 호걸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 세 사람을 능히 부릴 줄 알았기 때문이다. 항우는 그나마 있었던 범증(范曾) 한 사람도 제대로 쓰지 못했기 때문에 나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이후 유방은 각지의 반란평정에 전력을 다하였다. 임강왕(臨江王) 환(驩)을 노관과 유가를 시켜 토벌케하고, 연왕 장도(臧荼)의 반란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서 격파하고 노관을 새로운 연나라 왕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이기(利幾)의 반란도 직접 격파하였다. 

유방은 황제가 되고 나서도 5일에 한 번씩 아버지인 태공에게 아침 문안 인사를 드리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예법이라는게 일반 가정에서 행하는 거리낌이 없는 태도와 똑같았다. 이를 본 태공의 집사장이 충고 해주었다.

"하늘에는 태양이 둘이 없으며, 땅위에는 두 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황제께서는 비록 태공님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백성들의 임금이십니다. 또한 태공께서는 비록 황제폐하의 아버지가 되시지만, 또한 그 신하도 됩니다. 어찌 그 임금되는 사람이 그 신하되는 사람에게 절을 올릴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행한다면 황제의 위엄을 세우지 못할 것입니다." 

그 후 유방이 태공을 다시 만나게 되자, 태공은 빗자루를 부여잡고 대문 앞에 나와 뒷걸음치며 유방은 맞이했다. 유방은 깜짝 놀라서 어가에서 내려 태공을 부축했는데, 태공은 유방에게 이렇게 말했다. 

"황제는 천하 만백성의 임금되시는 분이라! 내가 어찌 천하의 법을 어지럽힐 수 있겠는가?"

이에 유방은 "그럼 그 황제보다 높으면 되겠군." 이라는 의도로 태공을 태상황(太上皇)으로 올려 버렸다. 다만, 태공에게 충고를 한 집사장에 대해서도 황금 500냥을 상으로 내렸다.

3.5.2 내가 이제야 황제 귀한 줄 알겠다 

천하가 평정되고 났지만, 본래 개백정 도적 출신이 대부분이던 공신들은 규율이고 뭐고 전혀 없던 판국이었고 왠만한 공신들 모두가 "내가 제일 공을 많이 세웠지." 하면서 싸우는 바람에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 판국이었다. '유경, 숙손통 열전'의 언급을 보면, 이 당시 공신들의 모습을 아주 잘 묘사하고 있다.

군신들이 연회석 상에서 서로 공을 다투다가 심지어는 술에 취해 망동하며 검을 뽑아들고 기둥을 내려치는 자들도 있었다. 고제가 보고 매우 근심했다.아 망했어요 유방 : 답이 없다

이때, 보다못한 유방은 자신이 직접 소하를 찬후(酇侯)에 봉하고, 공신들 중 최고의 대우를 하여 가장 많은 식읍을 하사하였다. 하지만 난리는 멈추지 않아 유방은 난감해 했는데, 이때 유학자였던 숙손통(叔孫通)이 유방에게 간언을 올렸다.

"무릇 유자들과는 앞으로 달려가 무엇을 빼앗아 오는 일은 못하지만 수성은 할 수 있습니다. 신에게는 노나라에서 데려온 유생들이 있습니다. 신의 제자들과 함께 조정의 의례를 일으켜보고 싶습니다."

본래 유학자들을 보면 관을 벗겨 오줌을 눌 정도로 오만불손하고 유학자를 싫어하던 유방이었지만, 이 이야기를 듣자 솔깃했다. 다만 유방의 걱정은이게 내가 이해못할 정도로 너무 어렵지 않겠느냐는 점이었다. 이에 숙손통은 이렇게 대답했다.

"오제는 각기 다른 음악을 즐겼고 삼왕의 예는 서로 달랐습니다. 예란 시대와 사람들의 정서에 따라 간략하게 하기도 하고 화려하게도 합니다. 고로(夏殷周) 삼대(三代)의 예는 빼기고 하고 더하기도 해서 서로 중복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은 원컨대 고대의 예법과 진나라의 의례를 취해 한나라의 의례를 만들고자 합니다."

그러자 유방은 "한번 만들어 보는데, 내가 이해할 수 있게 쉽게 만들어야 된다."고 말했다. 혹자는 이 부분을 보고 천하를 통일한 사람도 어려운 예법은 두려워 했다고(……)[65]

이렇게 만든 예법이 시행되어 그동안 깽판을 치던 공신들이 얌전해지자, 유방은 그때서야 "야, 이제야 내가 황제 귀환 줄 알겠다!" 며 좋아했다. 황제나 신하들이나 예법 등을 전혀 모르던 상황이었으니 벌어진 촌극. 

3.5.3 백등산 포위전과 토사구팽 

이후 유방은 당시 초나라 왕으로 있던 한신이 모반을 하려고 한다는 고발을 듣고, 진평의 계책을 이용해서 한신을 사로잡은 후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려 한신도 같이 풀어주면서, 그를 회음후로 만들어 버렸다. 

그후 전긍(田肯)이라는 인물의 충고를 들은 유방은 유가(劉賈)를 형왕(荊王)에 봉하여 회수 동쪽을 다스리게 하고, 생 유교(劉交)를 초왕에 봉하고 회수 이서의 땅을 다스리게 했다. 또한 아들 유비를 제나라 왕으로 삼아 70여성을 다스리게 하면서 본격적으로 유씨성을 가진 인물들을 왕으로 임명하기 시작했다. 또한 유방은 형인 유중(劉仲)을 대나라 지역의 왕으로 임명했다. 

이 무렵, 북방의 흉노(匈奴)는 중국이 초한대전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묵돌(冒頓)의 지휘 아래 절정의 세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유방은 한왕 신을 전방에 파견하여 흉노를 막게 했지만, 오히려 그는 묵돌에게 항복해버렸고 흉노의 편이 되어 한나라를 공격하였다.

이에 격분한 유방은 한왕 신을 격파하기 위하여 직접 출진했고 유방의 군단에게 한왕의 부장들이 패배함에 따라 겁을 먹은 한왕 신은 흉노의 땅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그런데 사태는 만구신(曼丘臣)과 왕황(王黃) 등이 끼어든데다 이들 모두 흉노의 지원을 받는지라 사태는 묘하게 커지고 말았다. 당초에 한왕 신을 무찌르기 위한 싸움에서 종내에는 갑자기 묵돌과의 대전으로 전황은 전개되었는데, 나름대로 주의 깊게 행동했음에도 불구하고 묵돌의 유인책에 당해버린 유방은[66] 결국 평성 부근에서 대패를 당하고 간신히 포위망을 돌파하였다.

이후에도 유방은 한왕 신의 잔병들을 토벌하면서 계속 군사를 움직였는데, BC 198년 8월 조나라 상국 진희(秦豨)가 모반을 일으키자 유방은 이때 역시 직접 출진하여 반란을 진압했다. 이때, 궁중에서는 소하와 여후가 음모를 꾸며 한신을 살해했다. 조나라의 반란을 모두 격파한 유방은 유항(劉恒)을 대나라 왕으로 임명했다. 

이후 여름 무렵에는 팽월을 참살했고, 아들인 유회(劉恢)를 양나라 왕으로 임명했다. 7월 무렵에는 경포의 반란을 진압하고 아들인 유장(劉長)을 회남왕으로 임명하여 일단의 정리를 끝났는데, 문제는 이 전투에서 유방이 유시에 맞아버린 것이다. 유방은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지만, 현지에서 치료를 하지 않고 귀환하기 시작했다.

3.5.4 대풍가(大風歌) 

부상을 당한 유방은 귀환하는 와중에 고향인 패현을 들렀다. 태공의 친구들인 노인들과 여러 집안의 자제들을 불러 모아서 신명나게 먹고 놀면서 즐겼는데, 유방은 패현의 어린이 120명에게 직접 노래를 가르치다가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서 흥이 오르자 축(筑)을 타면서 직접 노래를 불렀다.

大風起兮雲飛揚 
대풍(大風)이 일어 구름이 날아오른다. 
威加海內兮歸故鄕 
위(威)를 해내(海內 : 천하를 말함)에 떨치며 고향에 돌아왔는데 
安得猛士兮守四方 
어디서 맹사(猛士)를 얻어 사방을 지키게 할까.

유방은 이 노래를 아이들이 따라 부르게 했는데, 울려 퍼지는 노랫 소리를 듣자 흥이 나서 한참을 일어나서 직접 춤을 추다가 문득 강개(慷慨)한 마음에눈물을 흘렸다. 그 후 유방은 패현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객지를 떠돌아다니는 나그네는 고향 생각에 슬픈 법입니다. 내가 비록 관중에 도읍하고 있지만, 만년 뒤에라도 나의 혼백은 여전히 패현을 좋아하고 그리워할 것입니다. 게다가 나는 패공일 적부터 포악한 반역자들을 정벌해 마침내 천하를 얻게 되었은, 패현을 내 사유지로 삼아 이곳 백성들에게 부역을 면제해 주어 대대로 납세와 복역이 없게 할 것입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기뻐했고, 패현의 어른들과 형제들, 부녀들, 옛 친구들은 날마다 흥겹게 술을 마시고 지난 일들을 회상하며 즐겁게 지냈다. 열흘 남짓이 지나 유방이 떠나려 하자, 패현의 사람들은 유방이 더 머물기를 원했지만 유방은 "내 수행원이 너무 많아 어르신네들이 비용을 다 감당 할 수 없다." 면서 이를 거절했다. 그리고 떠났지만, 패현의 사람들이 예물을 바치면서 전부 환송하러 나오자 발걸음이 안 떨어지는데 3일간 더 머물면서 술을 마셨다.

이 틈을 타서 패현 사람들이 풍읍(豊邑)은 아직 부역을 면제 받지 못했다고 하자, 유방은 "풍읍은 내가 자란 곳이라 잊을 수가 없지만, 옹치를 따라 나를 배신한 사람들이 아닌가?" 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패현의 어른들이 계속해서 권하자 못이기는 척 풍읍도 부역을 면제 해 주었다. 

이후 유방은 장안으로 귀환했다. 곧 이어 노관의 배신 소식이 들려왔다.

3.5.5 그 다음은 당신이 알 것 없소 

유방의 상처는 귀환하던 있는 와중에 더욱 심해졌고, 여후는 의원을 불러 이를 고치게 했지만 유방은 한바탕 욕을 퍼부으면서 치료를 거부했다.

"나는 평민의 신분으로 일어나 삼척의 칼을 들고 천하를 얻었다. 이것이야말로 천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사람의 명은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니, 비록 편작(扁鵲)이 온들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유방은 50근의 황금을 의원에게 주고 그냥 물러가게 했다. 이후 유방은 최고 공신은 소하가 위협적이라고 생각해 잠시 감옥에 집어 넣었지만, 이내 풀어주고 자신의 잘못을 사과했다. 이 무렵 유방은 죽음이 멀지 않은 자신의 후사로 척(戚)부인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는 문제로 여후(呂后)와 갈등을 벌이고 있었다. 태자를 폐하고 새로 다시 임명하는 일이라, 대부분의 공신들은 비판적이었지만 유방의 결심이 너무 확고해서 아무도 함부로 말을 못하고 있었고, 이에 애가 탄 여후는 어찌할바를 모르고 두려워했다.

하지만 여후가 장량의 조언을 바탕으로 상산사호(商山四皓)를 초청해 유리한 고지를 장악하자, 유방도 방법이 없음을 느끼고 척부인에게 한탄했다.

"내가 태자를 바꾸고 싶으나, 저 네 사람이 태자를 보좌하고 있으니, 그것은 이미 태자의 날개가 자라버렸음이라! 이제는 나도 어쩔 수가 없구나! 여후는 당신의 주인이로다!"

척부인이 그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자, 유방은 "그대는 나를 위해 초나라의 춤을 추시오. 나는 초나라의 노래를 부르리다." 라고 말하고 노래를 불렀다.

鴻鵠高飛 一擧千里 고니새 높이 날아 한번에 천리를 가는도다 
羽翮已就 橫絶四海 날개가 이미 자라, 천하를 마음껏 날아다니네 
橫絶四海 當可奈何 온 천하를 마음껏 날아다니니, 이제는 어쩌겠는가? 
雖有矰繳 尙安所施 비록 화살이 있다 해도 어찌 쏠 수 있으리오

노래를 들은 척부인은 다시 눈물을 흘렸다.[67]

얼마 후에 여후는 유방에게 "폐하가 돌아가신 후 소하가 죽게 된다면 후임을 누구로 맡겨야 하느냐." 고 물었고, 이에 유방은 이런 방안을 내려주었다.

"조참이 좋소."

여후는 조참 사후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재차 물었고, 유방은 다시 대답해 주었다.

"왕릉(王陵)으로 하시오. 그러나 왕릉은 우직함으로 진평으로 하여금 돕도록 하시오. 진평은 지혜로운 사람이나 그렇다고 그에게 모든 맡기지는 마시오. 또한 주발(周勃)은 행동거지가 무겁고 믿음직하오. 비록 배운 바는 부족하지만 장차 유씨 왕조를 지켜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주발일 것이오. 그를 태위(太尉)로 삼으시오."

하지만 여후는 계속해서 그 뒤를 물어보았고, 유방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 다음은 당신이 알 바가 아니오!"[68]

유방의 마지막 명령은 번쾌에 대한 부분이었다. 황제가 사망하면 번쾌가 군사를 동원하여 척부인 일행을 몰살할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유방은 대노하여 번쾌를 죽이려 했으나,[69] 일이 마무리 되기전에 장락궁(長樂宮)에서 숨을 거두었다. 여후는 4일 동안 유방의 죽음을 숨기며 이를 외부에 알리지 않았는데, 여후가 공신들을 숙청할 틈이 있음을 눈치 챈 역상은 여후의 측근인 심이기(審食其)를 찾아가 "공신들이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데 지금 그들이 움직이면 나라 꼴이 참 잘돌아갈 것이다." 는 요지의 협박을 했고, 이 이야기를 들은 여후는 계획을 취소하고 유방의 죽음을 천하에 알렸다. 

4 평가 

유방에 대해 일반적인 견해는 능력이 없고 무식하며, 욕심만 많은 인물. 군사적인 능력은 다른 장수들의 방해만 되는 수준이며, 판세를 읽는 능력도 부족하고 그저 운만 좋아서 천하를 얻은 인물이라는 인식이다. 또한 성격적으로도 호쾌하고 남자다운 면모가 있는 항우에 비해 비열하고 추악한 인물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다만 이런 인식은 대부분 초한지 소설등에서 퍼진 부분이 대부분이며, 실제 사기나 한서, 자치통감 등의 기록으로 살펴본 유방은 무능하다는 부분과는 거리가 있는 편이다.

4.1 군사적 능력 

유방에 대한 가장 크게 비난을 하는 부분이 바로 군사적 능력이다. 대부분의 인식에서 유방은 무능하고 졸렬한 지휘관으로 인식되는 편이다. 특히 상대가 전술적 차원에서 엄청난 능력을 보였던 항우이고, 한신이라는 불세출의 지휘관이 옆에 있었기에 더욱 그러한 측면도 크다.

그러나 실제 역사 기록상에서 유방은 대단한 지휘관은 아닐지언정, 평균보다 떨어지는 지휘관이었다고 볼 근거는 없다. 유방은 거병 후 대부분의 전투에서 직접 군대를 지휘했으며, 그 대부분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조참번쾌나 주발 등의 초반 행적을 살펴보면 이들은 전투에서 앞장 서 싸우는 정도였으며, 실제 군을 이끈건 유방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항우와의 교전에서는 최후의 해하전투를 제외하면 유방은 항우를 상대로 이긴 적이 없다시피 하지만, 당시 항우는 가히 최강의 힘을 가진 세력이었음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또한 항우 자체가 그 시대 최고의 야전지휘관이기도 하니, 항우에게 패배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졸렬하고 무능한 지휘관으로 보기는 힘들다. 팽성대전에서의 참담한 패배가 가장 큰 굴욕 요소로 손꼽히는 부분이었지만, 이 부분은 특수한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70]이것을 단순히 '군사적 식견' 으로만 생각하면 항우는 이후에도 팽성대전같은 전투를 수차례는 더 치루어야 하겠지만, 그렇지는 못했다. 항우로서도 특수한 승리였다는 점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초한대전의 거의 대부분의 시간동안 항우의 발목을 잡고 중원에서 버틴것은 유방이다. 항우는 형양 등에서 생각보다 빠르게 한군을 밀어내지 못했으며, 이 사이를 틈타 팽월, 한신이 세력을 잡고 항우를 괴롭힐 수 있었다. 이들이 망치에 해당한다면 유방은 전쟁 중 모루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또한 한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 난 뒤 벌어진 여러 차례의 반란을 제압한 인물이 유방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개국 초기의 반란들은 상당히 위험하기 마련인데 유방은 이 반란들을 수차례 제압했다. 게중 경포같은 인물은 거록대전 당시 눈부신 공을 세우기도 하는 등 당대에도 이름이 높은 지휘관이었지만,[71] 유방을 상대로는 패배하고 말았다.

다만 백등산 포위전은 확실히 유방의 흑역사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유목민족의 유인 후 포위 전술은 거의 필살기에 가까운 전법으로서, 역사상 최고의 정복자 중 한사람으로 손꼽히기도 하는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Cyrus II)조차 죽음에 이르게 했던 방식이다. 또한 전투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유방이 아무 생각도 없이 포위에 말려든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유방은 여러 차례 흉노의 상황을 살피면서 신중한 면모를 보였는데, 기만책으로 이를 속여낸 묵돌의 기민함을 칭찬해야 할 것이다.

유방의 진정한 군사적 능력은 전술적 차원이 아닌 전략적 차원이다. 대전략의 개념조차 없던 항우에 비해 유방은 전쟁의 큰 그림을 그리고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고, 이를 달성함으로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항우가 자신의 꽁무니만 쫒아다니는 틈을 타 한신을 파견해 하북을 평정케 했고, 경포를 회유하고 유가와 노관으로 하여금 팽월을 지원케 함으로서 적을 고립무원 상태로 만들었다. 또한 이간책을 사용해 적의 지도부에 내분을 초래하기도 했다.

이러한 전략적 식견은 정치적인 부분과 연계가 되기에, 유방의 정치적 능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4.2 정치적 능력 

유방의 정치적인 능력은 당대 모든 사람을 통틀어서도 가장 고단수라고 칭할 수 있다. 적어도 거시적인 식견이 눈꼽만큼도 없던 항우에 비해 유방은 몇배나 앞선 인물이었다.

행적을 살펴보면 비교적 늦게 합류한 항량의 기의군에서도 유방은 금세 주동적인 위치에 놓인 주요인물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군사력을 모아 함양에 입성 한 후에도 관대한 처분과 주도면밀한 태도로 민심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는데, 이는 신안대학살 후 함양에 입성하고 온갖 만행과 행패를 부려 민심을 잃어버린 항우의 태도와 대조되는 부분이다. 이후 관중은 유방의 지배 영역이 되는데, 진나라 사람들이 항우와 유방 중 누가 이기기를 바랬을 지는 너무 뻔한 이야기다.

또한 살해된 의제를 추모하는 부분이나 팽성대전 패배 후 바로 경포에게 연락을 취해 그를 회유하고, 팽월과는 계속해서 연락을 취하며 노관 등을 보내 지원을 하는 부분에서 보이듯이 기본적으로 유방은 항우보다 큰 그림을 그릴 줄 알았다. 춘추전국시대의 마인드에서 한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했던 항우에 비하면, 유방은 훨씬 유연한 사고를 하는 편이었다. 

또한 비판받는 토사구팽은 왕조의 안전성을 목적으로 한다면 위협적인 이성왕을 제거한 일로 오히려 유익한 편에 속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대규모 내전에 이르는 상황도 거의 없었고, 주로 책임자와 그 가족들이 제거되는 정도에서 끝나 사건의 파장도 적은 편이었다. 유방이 이러한 정책 기조를 깔아 놓았기에 제후왕들의 궐기는 개국 후 한참을 지난 한경제 시절에나 오초칠국의 난으로 표면화 되었으며, 이를 제압함으로서 전한은 군현제도를 확립했고 이후 고대의 초강대국으로 발돋음 할 수 있었다.

또한 미앙궁 축조 등에 대해 비판적이던 모습에서 보듯이 사치만 부리면서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는 일과는 거리가 멀었던 편.

유방의 능력 중에 가장 큰 능력은 사람을 쓰는 능력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보통 이에 대해 "유방의 부하 운이 좋다." 는 식으로만 이야기를 하는 편이지만, 실제 유방의 모습은 단순히 그런 정도가 아니다. 성격, 면모, 출신배경 조차 모두 제각각인 한군의 인물들이 각자 제각각의 이야기를 하면, 유방은 게중에서 가장 좋은 판단을 고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유방 특유의 리더쉽은 진평의 등용 사례 등이 있다.

무엇보다 유방은 자신에게 비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비판을 경청 할 줄 알았다. 유방의 부하들은 수차례 엄청나게 강도 높은 직언(直言)[72]을 퍼부었지만 싫은 소리를 못참던 항우에 비해 유방은 그 대부분의 말을 수용했다. 가장 적절한 사례로 육가(陸賈)와의 대화가 있다.

"이 어르신(乃公)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 시서(詩書)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육생이 대답했다. 

"말 위에서 얻은 천하를 말 위에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고제(유방)는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부끄러운 표정을 짓고 말했다. 

"나를 위해 진나라가 어떻게 천하를 잃었고, 내가 어떻게 천하를 얻었으며, 과거에 나라를 얻은 일, 잃어버렸던 일을 글을 지어 올려주시오." ─ 사기, 역생 육가 열전

이렇게 충고를 들을 줄 아는 태도는 유방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73] 아무리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해도 그 충고와 제안을 써주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다. 한신도, 진평도 본래 항우의 군단에 있었다.

그리고 여러 비판을 수용할 줄 안다는것은 자신의 그릇을 정확하게 재고 있었다는 점이다. 유방이 "나는 한삼걸보다 지략, 내정, 통솔 능력이 모두 부족하지만 이들을 쓸 줄은 알았다. 항우는 범증 한 사람도 제대로 쓰지 못했다." 에서 보이듯이 유방은 독선적인 지도자들이 자주 보이는 지독한 아집, 자만심과는 거리가 있었다. 유방과 비슷하게 가방끈이 짦은 편이었던 아돌프 히틀러 등이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로 주위 사람들의 의견을 무시해버리며 몰락해버린 부분과는 대조적인 부분. 

즉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참모들의 의견을 수립해서 채우는데, 그 의견을 수립하는 과정에서도 게중 가장 적절한 의견을 수용 할 줄 아는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에 대해 사람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날선 비판을 수용할 줄 알며, 자신의 태도와 행적을 반성하고 나아지는 지도자 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이상적인 지도자상의 끝판왕 급이라고 볼 수 있다. 

고문원(古文苑)에 실린 手敕太子文에서는 유방의 이러한 태도가 가장 적절하게 보여진다. 이 글은 유방이 태자에게 경각심을 가지게 하기 위해 지었다는 부분인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내가 난세를 만나 진나라가 학문을 금하자, 스스로 기뻐하여 책을 읽는 것이 유익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임금이 되고 난 뒤로부터 비로서 때때로 책을 살펴보았는데 글 쓴 사람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이에 비추어 내가 옛날에 행동하였던 것을 생각해보니 옳지 않은 일이 많았다."[74]

4.3 인간적인 면모 

대체로 유방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서는 토사구팽 등을 이유로 비열하고 추악한 인간으로 그려지는 편이 많고, 그 적수인 항우에 대해서는 남자답고 화통한 면면으로 묘사되는 편이 많다. 실제로 단순한 태도에서 보자면 귀족 출신인 항우는 다른 사람들 공경하고 배려 할 줄 알았던 편에 비하면, 유방은 오만무례하고 마구 욕을 내뱉는 편이었다.[75][76]

그러나 귀족 출신과 평민 출신으로 인한 기본적인 몸가짐의 차원을 지나면, 실제 항우의 인물됨은 작은 일에서는 멋진 일을 보여주면서 정작 크게 통을 보여야 할 때는 쓸때없는 의심을 하며 아까워하기 일쑤였던 것이 비해, 유방은 일단 결정을 내리면 그야말로 배포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신이 제나라의 임시 왕을 칭할때 처음에는 욕을 퍼붓다가, 이내 "사내 자식이 임시 왕이 뭐야, 그냥 제나라 왕 해라!" 고 하던 부분은 상당히 인상적인 부분. 애시당초 한신의 인사 자체도 그저 소하의 추천만 듣고 아무런 공적도 없었던 인물을 단숨에 대장군에 봉했던 파격 중의 파격이었다.

또한 비판을 들을 줄 알았다는 태도에서 보이듯이 유방은 자기에게 직언을 핑계로 한 폭언을 퍼붓는 신하들에 대해서도 배짱 있는 모습을 보였다. 수차례 신하들에게 무례하다는 언급을 듣고, 심지어 주창(周昌)에게는 "폐하께서는 걸주(桀紂)와 같은 폭군이십니다." 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였지만 유방은 그저 웃고 말았다.[77] 또한 자신을 배신하기도 해서 극도로 싫어하던 옹치를 대접하는게 이득이 된다고 판단하자 지체없이 그렇게 했다. 항우가 자신을 비판했던 사람을 삶아서 죽인것에 비교하면……

또한 자신에 대한 암살 음모를 꾸몄던 관고(貫高)가 기개있는 모습을 보이자 관고와 장오(張敖)를 용서했던 사례도 있다. 토사구팽에 있어서도 유방이 이들을 견제할 목적을 가졌다고 해도, 대부분의 경우 먼저 책 잡힐 만한 행동을 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한신만 해도 유방을 수차례 기만했고, 노관은 공이 부족한 인물을 친구라고 왕으로 봉해주니 뒤통수를 쳤다. 장도나 경포의 경우 자신들이 알아서 반란을 일으킨 편이고 억울하다고 할 인물은 팽월 정도다. 또한 이들을 숙청하는데 있어서도 규모를 최소화 했기에 엄청난 살겁은 최대한 피한 편이었다.

간단하게 생각해보자면, 왕조에 위협적인 위험 인물들 몇을 제거한 유방은 비열하고 잔혹하다고 욕을 먹고, 힘도 없는 수십만의 양민들을 학살하고 생매장한 항우는 남자답고 화통 하다고 경외 받는게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만 좋은 아빠, 좋은 남편은 확실히 못 되는 편이었다. 여색을 밝히는 편이라 여후에게는 좋은 남편은 못 되었으며, 자식들을 팽성대전에서 던져버린 사례도 있고, 백등산 포위전 이후 묵돌의 압박이 심해지자 딸인 노원공주를 묵돌에게 줘 버릴 생각도 하고 있었다.[78] 말하자면 더 큰 목적을 위해서 작은 원한을 잃고 옹치를 대접해준 사례처럼, 더 큰 목적을 위해서는 가족도 던져버릴 수 있는 사람. 지도자로서는 나쁘다고만 하긴 그렇겠지만 부모로서는 무책임한 편이다. 

4.4 총평 

항우가 최고의 야전 지휘관이 군주라는 과분한 지위에 있어 패망했다고 한다면, 유방은 오직 군주가 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이라고 할 수 있다. 유방의 전술적 능력은 평범했고 정치적 식견도 일반적인 가신의 재주로는 부족한 편이었으나, 여러 사람을 휘어잡아야 할 난세의 군주로서는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여러 사람들의 말을 들을 줄 알고, 사고가 유연하며, 옳은 말을 따를 줄 알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파악했으며, 결정적으로 이러한 능력을 써먹을 수 있는 배포를 가지고 있었다. 군주감으로서는 이만한 인물도 드물 것이다.

유방은 실수를 안하는 초인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반성할 줄은 아는 사람이었다. 이런 면에서 그는 항우와는 극단적으로 대조된 인물이었다.

최초의 평민출신 군주로서 이전의 관습과는 상관없이 즉위한 유방은 이후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여 하나로 만든것은 진나라였지만 이는 곧 멸망하고 말았다. 하지만 유방은 한나라를 탄생시키고 개국 초기의 정권을 단단하게 닦아 진나라처럼 모래성으로 무너지는 일을 막았으며, 이후 한나라는 전한 - 후한 400년의 역사를 이어나가며 이전까지 분열의 역사였던 중국을 '하나의 중국' 으로 만들었다. 언어도, 문자도, 단위도 다 제각각이었던 '다른 나라' 들은 외관, 혈면, 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나라의 치세를 거치면서 하나가 되었다.

또한 이 한나라에서 시행된 유교 국교화, 군현제도 정비, 율령(律令)의 정비 등이 시행되었고 이것이 향후 2,000여년간 중국은 물론이고 동아시아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것을 생각하면 유방은 그 출발점을 닦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중화(中華)를 시작하게 했던 인물. 가히 첫번째 중화인 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는 유방 개인의 차원이 아닌 거대한 역사적 흐름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겠지만, 유방의 적수였던 항우가 봉건제에 대한 선호부터 해서 전국시대 사람 그 자체였던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대조적인 편이다. 

5 기타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호칭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乃公居馬上而得之,安事《詩》、《書》!" ─ 역생 육가 열전

"竖儒,几败而公事!" ─ 유후세가

여기서 보이는 내공(乃公)과 이공(而公)은 비슷한 표현인데, 이는 본래 '자신' 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다. 여기서 사용되는 乃나 而는 "너" 아니면 "자네" 정도의 의미가 되는데, 뒤에 公이 붙이니 그렇다면 "자네 아버지" "네 어르신" 정도의 의미가 된다.

그런데 유방은 여기서 이 표현을 자신에게 사용 했다. 이건 자기를 일컫어 "네 아버지" "(너희 아버지에 해당하는) 이 어르신" 같은 묘한 어감이 된다. 마찬가지로 상대 역시 "아들" "조무래기" 같은 상황이 된다. 이런 점을 생각하고 어감을 살려 문장을 번역하면 이런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어르신께서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으셨다. 그런데 시, 서 따위가 대관절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같잖은 유생 놈 때문에 이 어르신이 대사를 그르칠 뻔 했구나!"

물론 황제 등은 3인칭으로 자신을 호칭하기도 했지만, 이건 황제의 어투라기보다는 건달이 쫄따구에게 하는 느낌이 강하다. 그런 '쫄따구 풋내기' 등을 일컫는 수자(豎子)[79]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와 대조해서 보면 그런 느낌이 더욱 강하다.

"吾惟豎子固不足遣,而公自行耳。" ─ 유후세가 ─


이 부분은 경포의 반란때 여후의 아들인 혜제가 나설 지경이 되자, 여후가 울면서 만류하여 유방이 대답하는 부분이다. 기서 유방은 자기 아들을 수자(豎子)로 표현하고, 자신을 이공(而公)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대략 이런 늬앙스가 될 수 있다.

"나도 그런 조무래기가 나서기에 적절치 않다는건 알고 있었다. 이 어르신께서 직접 가시겠다." 

혹은,

"그 조무래기가 시원치 않으니, 당신 남편이 나서야겠구만."

이런 느낌으로, 여하간 평민 출신 황제만이 할 수 있는 어법라고 해야 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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