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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112) ─ 늙은 낚시꾼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7.09|조회수401 목록 댓글 1




 구멍이 뚫려 바다에 가라앉고 있는 청조라는 이름의 범선이 여기 있습니다. 조타수의 역할을 해야할 만주족들은 미친듯이 흔들리는 키를 보며 그저 당황하고만 있을 뿐 손 조차 써보지 못하고 있을 뿐 입니다. 그러자 배에 타고 있던 승객들은 스스로 팔을 걷어붙히는데, 이 따위 배는 믿음직스럽지 못하니 당장 갈아타자고 주장하는 혁명파가 있는가 하면 이제와서 완전히 배를 바꿔 타면 혼란만 커질 뿐이니, 일단 이 배를 몰고 나가면서 갈아타는 문제는 천천히 생각해보자는 입헌파가 있습니다.


 표류하는 함선에서 두 사람이 목소리를 높이며 싸움만 계속 해봐야 모두 침몰하고 말 뿐입니다. 우창 봉기는 혁명파의 주도로 이루어졌지만, 이후 전개에서는 입헌파 인사들의 참여도 적지 않았습니다. 입헌파는 다른 말로는 개량파라고 불리우며, 이들은 혁명을 조정을 전복시키는데 반대하고 개량을 통해 입헌을 실시하자고 주장한 이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물론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강유위, 양계초가 바로 이 부류가 아닙니까. 이들은 청나라 조정에서는 반역자에 불과 합니다. 이들이 온건한 입헌을 주장해봐야, 조정의 입장에서는 혁명파의 간적들과 다를 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입헌파는 꼭 강유위, 양계초의 부류만 있는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신사층이 있습니다.


 무너져가는 청조의 운명이 결국은 전면적인 공화제 혹은 입헌군주정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가 남았다면, 대체적인 신사층은 게중에서는 입헌제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야 권력을 나누어가질 수 있을테니 말입니다. 이들은 세번에 걸쳐 대규모 청원운동을 하면서 목이 터져라 입헌을 외쳤는데, 의외로 조정의 실력자들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실상을 말하자면 되려 조정에서는 가진 권력을 내놓기는 커녕 오히려 뺏어가고 있는 판국이었습니다. 지방이 가지고 있던 철도와 광산 소유권을 조정이 빼앗으려고 시도하자 신사층은 크게 당혹스러워 했는데, 그들의 입김이 완전히 배제된 황족내각이 구성되고 나서부터는 거의 절망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습니다. 



탕화룡(湯化龍)


자의국(諮議局) 국장이었던 탕화룡은 이러한 일로 조정에 대한 반감이 극심했던 인물 중에 한명입니다. 우창봉기가 일어나기 이전, 그는 직접 베이징으로 가서 철도소유권을 지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헛고생만 하고 아무런 결실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때문에 울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봉기가 발생했던 것입니다.


 우창의 사병들은 혁명을 일으켰지만 통솔하고 지위할 우두머리는 없었습니다. 당시 호광총독 루이청은 함선을 타고 강변에 정박해 있었고, 우창 성 밖에도 관군이 결집하고 있었습니다. 혁명파를 주도하던 인물들은 대부분 직전에 죽거나 도망쳐버려 군대를 지휘할 수 있는 인물은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궁여지책으로 나온 해결책이 제21 혼성협통 여원홍을 지휘관으로 추대하는 일이었습니다. 


 여원홍은 당시 48세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천진 수사학당 출신으로 약간이나마 신식 군사훈련을 받은 인물이었고, 청일전쟁 참전 경험도 있었습니다. 다만 혁명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해도 못하던 인물로, 혁명파 인사들하고는 관련된 이야기를 해도 대화가 잘 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성격을 떠나서 '이해하지 못하는' 모르는 화제로 대화를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바로 이때, 탕화룡이 팔을 걷어올렸습니다.


봉기가 발생했던 다음 날인 9월 24일, 혁명군 병사들은 자의국을 샅샅히 뒤지고 집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벌벌 떨고 있었을적, 탕화룽은 결연한 표정으로 스스로 걸어 나와 자신이 직접 신정부 내각에 참여하겠으며, 군사를 제외한 모든 사안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는 본래 진사 출신의 전형적인 신사층이었지만, 철도와 광산 소유권 문제에서 청나라 조정이 보여준 태도에 너무나 격분하는 바람에 이후로는 되려 혁명군보다 더 적극적으로 혁명에 나섰습니다.


 바로 그날 혁명군에게 압수수색을 당했던 탕화룡은 천연덕스럽게 혁명군의 중심인물 중 한명으로 떠올라, 그날 벌어진 회의에서 혁명군은 각 성에 전보를 보내 봉기 사실을 알려 판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게다가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던 여원홍을 끈질기게 설득하여 도독 직을 수락하게 한 사람도 바로 탕화룡이었습니다. 그 외에 혁명군은 계속해서 여원홍의 명의로 공고문을 발표하고 청나라 관군 병사들도 이를 보고 항복을 할때 '여원홍' 에게 항복을 하게 되어 이미 말려들어간 형국이 되자, 반평생 야심찬 모습을 보여준적도 없던 이 중년의 군인은 엉겁결에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영화 '신해혁명' 에서 여원홍 배역의 모습



 일단 전면에 나선 여원홍은 바로 자신의 실력을 입증해 보였습니다. 군을 지휘하자마자 우창 밖의 군대를 격파하고 강변에 주둔해 있던 루이청을 쫒아낸 것입니다. 청나라 조정에서는 혁명군을 진압하기 위해 해군대신 싸전빙이 이끄는 함대가 곧 우창에 도착했지만, 공교롭게도 그는 여원홍이 북양해군에 있었을 시절의 스승이었습니다. 여원홍은 친필 서신을 쓰고 후한 선물을 챙겨 싸전빙이 타고 있는 군함으로 보냈고, 싸전빙은 이를 보고 일단 중립을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우연은 계속해서 일어나 싸전빙의 참모가 바로 탕화룡의 동생이었기에, 동생을 이용한 탕화룡의 공작이 계속되면서 이후 혁명군의 편에 서서 청나라 관군과 교전하게 되었습니다. 


 탕화룡을 비롯한 입헌파가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혁명은 또다른 방향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동안 사태를 관망하던 신사층 - 입헌파들의 가세로 사태는 더욱 규모가 커졌으며, 혁명파와는 달리 지방의 실력자들로 현지에서 뿌리 깊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데다 구식 순방영 군대와도 친분을 유지하던 입헌파들은 이들이 혁명에 동참하라고 설득했고, 이에 총 한번 쏘지 않고도 사태는 급진전 하여 많은 관군이 혁명파에 협조하게 되었습니다.
 




 천하에 동란이 벌어지는 동안 원세개는 고향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시를 십여 수 정도 지으면서 자연에 묻혀 세상사를 잊겠다는 의사를 표시했고, 인간 세상을 갈관하고 속세를 떠나 결심을 보여주듯 머리에는 삿갓을 쓰고 몸에는 도롱이를 걸친 후 낚시를 하는 사진을 찍고는 수백 장을 인화에 친구들에게 보냈습니다.


 원세개는 스스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정치가도 아니고, 군인도 아니다. 한때는 조정에 몸담았지만 이제는 늙은 노인네일 뿐이다. 원대한 포부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이런 모습은 물론 세상을 속이려는 기만책이었습니다. 청나라 조정은 여전히 원세개를 주시하고 있었기에, 일부러 한가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가슴 속에 꿈틀거리는 야심을 숨긴 셈입니다. 원세개는 여전히 북양군이 자신의 수중에 있다고 믿고 있었고, 이는 사실이었습니다. 물론 청나라 조정은 군권을 황실로 집중시키려 했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북양군의 장병들은 오히려 원세개를 그리워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문에 원세개의 생일이나 명절이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원세개를 축하했습니다. 이에 대해 원세개는 처음에는 처신을 조심하면서 그들이 오지 못하게 했지만, 훗날 복벽 운동을 일으킨 장훈 등은 억지로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이후 1910년의 생일에 이르자 부하들의 축하 행렬은 더 이상 숨길 수도 없을 정도로 공공연해졌습니다. 단기서, 왕사진, 풍국장, 육건장, 장훈, 강계제, 단지귀, 조곤, 뇌진춘, 장사옥 등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은 원세개에게 몰려들었으며, 이후 원세개와 북양군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조정에도 원세개의 세력은 남아 있었습니다. 서세창은 1909년에는 동북 3성의 총독에서 우전부상서로 자리를 옮겼고 다음 해에는 군기처에 들어갔으며, 1911년애는 협리대신이 되었지만 원세개와 내통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고향에서 낚시대를 잡고 있던 원세개는 베이징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모두 들으면서 조용히 생각에 잠겼습니다.


 세월은 실로 유수와 같았습니다. 그는 기다림과 기대, 조바심을 모두 억누르며 2년을 기다렸습니다. 그 2년동안 장강 남북의 각 성에서는 농민들이 곡물세 거부와 미곡 쟁취 운동을 벌였으며, 쑨원의 혁명당은 광저우에서 두 차례 무장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입헌파 인사들은 수차례 전국적이고 대중적인 국회청원운동을 벌였고 이후 황제 내각을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습니다. 호북, 호남, 광동과 사천에서도 철도를 지키자는 운동이 힘차게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원세개는 낚시대를 드리밀며, 자신은 병마에 시달려 곧 죽을 사람이며 오랫동안 앓아 의기소침하고 정신이 쇠약해졌으니 세상 일을 생각해서 무엇이겠느냐며 자연에 묻여 약이나 달이고 꽃이나 가꾸면서 마을 사람들과 여생을 보내면 그만이라고 하였습니다. 혹시라도 신문에 원세개의 이름이 나와 다른 사람들이 이를 물어보면, 원세개는 소문이란 사실과 다른 법이니 믿을 만하지 못하다고 둘러댔습니다.


 중국은 혼란에 빠져 있는데, 청나라 정부는 무능하여 변변한 대응조차 못하고 있었습니다. 원세개는 이를 내심 기뻐하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는 일부러 천하에 동란이 일어나게 손을 쓰기도 했는데, 국회에 청원한 동북 3성의 대표들을 일부러 고향으로 내려가게 혁광을 뒤에서 조종해 일을 벌인 것입니다. 이 성지가 내려지자 원세개의 예상대로 입헌파들이 들고 일어났는데, 그 중 일부는 혁명당으로 돌아서기 시작했습니다.


 낚시대를 잡고 천하를 조종하고 있는 원세개였지만, 그는 안달이 난 수하들을 차분하게 진정시켰습니다. 1910년 8월 원세개의 측근이었던 양도(楊度)는 뜻대로 잘 되지 않는다는 편지를 보냈는데, 원세개는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동생은 베이징에서 움츠리고 속마음을 내비치지 말아야 하며 참아야 하네. 시국을 보아 다시 회복하는 일은 능력에 달렸네. 힘을 키우고 시기를 기다리면서 남들에게는 주저앉은 듯이 보여주는 것이 좋을 것이야."


 하지만 이렇게 잔잔한 호수같은 형세로 자신을 죽이고 있던 원세개도 슬슬 몸이 달아오를 지경이 되었습니다. 1911년 10월 11일, 원세개의 생일이 되자 베이징과 천진에 있던 친척과 친구들은 원세개를 만나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우창 봉기의 소식이 원세개에게 전해졌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원세개는 그 즉시 술상을 거두고 창극을 멈추었습니다. 갑작스런 변고에 놀라워한 사람들은 혁명당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원세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원세개가 알고 있는 호광총독 루이청은 무능하고, 순친왕 재풍은 애송이라 경험이 없으며, 혁광은 어리석고 탐욕스러워 봉기를 진압하기에 적합한 인물들이 아닌 것입니다. 혁명의 소식을 들은 조정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순친왕은 경악하여 내각 총리대신 혁광과 협리대신 나동, 서세창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습니다. 


 그런데 이 세 사람 모두 원세개의 세력이었으니, 원세개는 천리길 떨어진 고향에서 자신을 물 먹였던 베이징의 순친왕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사실을 손바닥 꿰듯이 보고 있었던 셈입니다. 어울리지도 않는 인내의 시간은 이제 끝났습니다. 2년의 세월동안 낚시대를 잡고 있던 원세개는, 이제 천하라는 용을 낚아오를 채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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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2Pac | 작성시간 13.07.10 오 원세개가 효웅은 효웅이네요. 기다리고 위장하다 때가 되니 낚아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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