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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중화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113) ─ 한 자리에 모여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7.15|조회수412 목록 댓글 2

 혁명의 소식을 들은 조정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순친왕은 경악하여 내각 총리대신 혁광과 협리대신 나동, 서세창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습니다. 그런데 이 세 사람 모두 원세개의 세력이었으니, 원세개는 천리길 떨어진 고향에서 자신을 물 먹였던 베이징의 순친왕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사실을 손바닥 꿰듯이 보고 있었던 셈입니다. 나동과 서세창은 이 난국을 돌파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원세개 뿐이라며 순친왕에게 압력을 가했습니다. 원세개의 또다른 세력 중 하나였던 혁광의 경우, 자신이 나서서 원세개의 재등용을 주장하면 너무 속이 보이기에 당장은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당초 순친왕은 이들의 제안을 무시했으나,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에 반발해 나동은 늙었다는 구실을 내세워 퇴직을 하겠다며 은근한 협박을 했고, 혁광은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으나 조회에도 나서지 않으면서 자신의 의사를 행동으로 보였습니다. 순친왕의 동생인 재순은 해군대신으로 군사권을 가지고는 있었으나, 실제 군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 재순 역시 오직 원세개 밖에 적절한 사람은 없다고 여겼습니다.


 무엇보다, 이는 당시에 중국에 기반을 내린 외국인들의 생각이기도 했습니다. 외국인들은 안정을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믿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인사는 바로 원세개였습니다.


 결국 순친왕은 혁광, 나동, 서세창을 불러 다시 의논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혁광은 자신은 늙어 이런 비상 국면에 대처할 수 없지만, 원세개는 패기가 있고 군대도 그가 직접 훈련을 시켰으니 혁명군 소탕에 성공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베이징에 있는 각국의 공사들도 이 일을 수습할 수 있는 인물은 오직 원세개 뿐이라며 그를 지지하고 나섰지만, 순친왕은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교활한 인물이 황권까지 넘볼 까 두려워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혁명군에 반대하는 천하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원세개의 이름 석자만을 외치고 있었으니, 순친왕으로서도 방법이 없었습니다. 비록 일부 대신들은 "겨우 잡은 호랑이를 풀어주는격" 이라며 이를 극구 만류했지만 순친왕도 후회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게 없었습니다.


 10월 14일, 원세개는 마침내 호광총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또한 즉시 혁명군 토벌, 그리고 그 뒷처리를 맡게 되었으며 호북 군대와 각 지역에서 온 지원군들, 거기다 수륙 각 군의 지휘권까지 모두 원세개에게 일임하다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혁광은 사람을 파견하여 원세개에게 직무를 맡으라고 권유했습니다.


 이 명령에 대해, 당초 원세개의 측근들은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청나라는 이미 극도로 부패했기에 개선하려 해도 별 희망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또한 원세개의 아들 원극정은 순친왕이 부친을 파면한 일을 아직도 증오하고 있었으며, 내심 집안에서 황제를 배출하고 싶은 욕망이 있어 원세개가 청나라를 공격해 뒤엎어버리고 대신 황제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습니다. 혁명군을 진압하고 나면 원세개는 사냥이 끝난 사냥개 신세가 되리라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오랜 시간 기다리고 있었고, 또한 내심의 복안이 있었던 원세개는 이 명령을 거절항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다만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고, 쓸모없어지면 버려지고, 급하면 이용해도 되는 그런 사람이 될 생각 역시 전혀 없었습니다. 원세개는 조정에 상소를 올려 한껏 비아냥거렸습니다.


 "……이런 어렵고 긴급한 시기에 이르러 마땅히 황제의 명을 받들어 신속히 나서야 할 줄로 압니다. 허나, 신의 오랜 병이 아직 다 낫지 않았습니다. 지난 겨울부터는 왼쪽 팔에까지 미쳐 떄로 발작까지 합니다. 지금 나라의 일이 긴박한데 어찌 휴가를 얻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형편을 보아서는 실로 제 한 몸 지탱하기도 어렵겠습니다. 그래서 의사를 청해 치료를 재초갛면서 한편으로는 출정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좀 더 지나 몸을 지탱할 정도가 되면 즉시 나서겠습니다."


 지난날 순친왕은 병을 구실 삼아 원세개를 파면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원세개는 그 병을 이유로 명령을 따르기 어렵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는 순친왕을 조롱하기 위한 행동이기도 했지만, 교활한 원세개는 이렇게 시간을 벌어 군사와 인사(人事)에 관련된 여러 문제를 전부 준비하고 나설 참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원세개가 시간을 번 사이에 단지귀, 예사충, 장석란 등 원세개의 주요 휘하 장령들은 연달아 그를 돕기 위해 나섰습니다. 


 10월 18일, 순친왕은 체면 불구하고 원세개에게 매달려야 했습니다. 우창의 혁명군 봉기는 긴급 사태이므로, 병을 무릎쓰고라도 어서 부임하라고 재촉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원세개는 각종 병력의 이동과 인사 조치에 대해 몇가지 요청을 올렸는데, 다급해진 조정은 이를 모두 승낙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원세개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 사이에 여원홍을 내세운 혁명군은 점점 기세를 타고 있었고, 다른 성들도 이에 호응하기 시작했습니다. 10월 22일에는 호남성이 독립했고 다음 날에는 섬서성이 독립했으며, 강서에 있던 신군도 일어났습니다. 원세개 대신 파견된 지휘관들은 아무런 저항조차 해보지 못했습니다. 조용히 부채바람이나 쐬면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원세개는, 자신의 최측근인 풍국장이 제1군을 통솔하고 또다른 최측근 단기서가 2군을 통솔하여 하남 신양 일대에 집결하도록 상소를 올렸습니다.


 이미 자존심이 완전히 구겨진 순친왕은 그 모든 조건에 승낙하는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10월 27일, 그는 풍국장, 단기서에게 각각 제1군, 제2군을 통솔하게 했고 원세개를 흠차대신으로 임명했으며, 해군과 육군 지휘 통솔권을 모두 넘겨주는 동시에 군자부와 육군부는 이들에 대해 일체의 간섭을 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러는 시간에도 각지에서 병력들이 혁명군과 맞서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있었으며, 청나라 조정을 규탄하는 상소도 끊임없이 올라왔습니다. 10월 30일 무렵, 순친왕은 헌정 실시를 선포하고 속히 헌법 초안을 작성하며, 황족의 권리를 제한하고 정치범을 대사면하겠다는 성지를 발표했습니다. 


 모든 요구조건이 이루어지자 그때서야 원세개는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아들 원극문에게 집안일을 맡긴 원세개는 즉시 단지귀, 예사충, 장석란 등을 데리고 남하하면서 그날로 북양군에게 한구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한껏 기세등등한 혁명군에게 '현실' 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원세개가 나서자 전쟁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 되었습니다. 11월 1일, 북양군은 맹공격을 가하여 한구를 점령했습니다. 원세개는 출정하자마자 승리했고, 순친왕은 원세개를 내각 총리대신으로 임명하여 베이징에서 내각을 완전히 새로 조직하게 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원세개의 측근들은 그에게 황제가 되라고 권고를 했지만, 아직 현실감각을 잊지 않은 원세개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조정에는 아직 오랜 신하들이 많고 칭제 이후 북양군의 장령들도 꼭 자신을 지지한다고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내각 총리대신 시절의 원세개



황제의 꿈을 미룬 원세개였지만, 이미 민심은 청 황실의 패망을 원했습니다. 원세개는 이것까지 돌이키고 싶은 마음은 없었고 사실 돌이킬 방법도 없었습니다. 원세개는 이 무렵부터 적을 역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혁명군이 존재하는한 청나라 조정은 절대로 원세개의 권한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원세개는 혁명군에게 매운 맛을 보여주어 고분고분하게 길들이는 한편, 혁명의 불길을 단번에 꺼버리지도 않게 하기 위해 조심조심 했습니다.


 한구 점령 이후 원세개는 부하를 시켜 여원홍에게 조정은 이미 개혁을 약속했으니 평화적으로 해결하자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이 제안은 거절 당했는데, 원세개는 재차 다시 한번 제안하는 한편 풍국장에게는 언제든지 공격할 수 있는 준비를 하게 했습니다. 한 손에는 칼을, 한 손에는 꽃을 들고 나서는 셈입니다.


 그러나 여러차례의 협상에서 혁명군은 입헌군주제를 내세운 원세개의 제안을 계속 거절했습니다. 혁명당이 고분고분한 맛이 없자 원세개는 노기가 끓어올랐고, 한번 매세운 맛을 보여준 후에야 협상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원세개의 지시에 따라 풍국장은 한양(汉阳)에 대한 공세에 나섰습니다.



풍국장


풍국장은 단기서, 왕사진과 함께 북양 3걸이라고 불린 인물로 왕사진은 용, 단기서는 호랑이에 비유되었는데 풍국장은 개에 비유되었습니다. 이는 그가 개처럼 똑똑하고 두뇌회전이 빠르면서도, 개처럼 고집스럽고 완고했기 때문입니다. 


 우창봉기가 처음 일어날 당시 이를 진압할 의무를 가지고 있었던 인창(蔭昌)은 무능하기 짝이 없는 전형적인 만주족 팔기자제로 기차에서 내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고, 면화를 따러 가는 농민들을 보고도 깜짝 놀라 허겁지겁 기차를 출발시켜 도망치려 했을 정도의 인물입니다. 하지만 인창 대신 현장에 파견된 풍국장은 도착하자마자 한커우를 수복하는 등 전혀 다른 면모를 보였습니다. 원세개와 혁명군과의 평화협상이 무산될 무렵, 그는 원세개의 명령에 따라 한양을 공격했습니다.


 천하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1911년 11월 6일, 청 정부는 혁명군을 회유하기 위해 순친왕을 암살하려다가 투옥되었던 왕정위(汪精衛)를 풀어주었습니다. 왕정위는 원세개를 만나고서는 "청나라는 꼭 공화정을 실시해야 하며, 이를 성사시킬 사람은 원세개 뿐" 이라며 그를 추켜세웠고 원세개는 이에 자신의 아들과 왕정위가 의형제를 맺게 했습니다.


 그 사이 강소, 절강, 안휘, 광서, 광동, 복건은 차례로 청나라 조정으로부터 독립하여 난징을 제외한 중국의 남반부는 모두 청나라의 통치권을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한양에서는 11월 27일 무렵 풍국장이 이끄는 북양군이 혁명군을 격파하고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혁명군의 사령관이었던 황흥은 상하이로 물러났습니다. 


 이 시점에서 북양군은 한양을 점령하여 유리한 국면을 차지했습니다. 북양군의 가공할 군사력이 강을 건너 공격하면 혁명군은 이를 막아낼 수단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원세개는 끝을 보고 싶은 생각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치적인 이점을 얻기 위해 평화회담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속사정을 잘 모르던 완고하고 고지식한 풍국장과 그 장령들은, 승리가 눈 앞에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정전 명령이 상부로부터 내려오자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풍국장은 간신히 노기를 가라앉혔지만, 그의 부하들은 공을 세울 기회를 날렸다며 풍국장에게 욕을 퍼부었습니다. 또한 원세개도 혹시 풍국장이 문제를 일으키진 않을까 염려되어 고지식한 풍국장 대신 훨씬 교활한 단기서를 현장으로 파견하고 풍국장을 불러 들였습니다. 단기서는 특유의 교활함으로 조정에는 청나라 황실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처럼 꾸미고, 혁명군에게는 공화제를 지지한다는 의사 표시를 하면서 일을 매끄럽게 처리했습니다. 



단기서



 현장에서 북양군과 혁명군이 협상 테이블에서 계속 만남을 가질 무렵, 원세개의 아들 원극정은 이미 마음으로는 황태자가 되어 터무니 없는 욕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집을 담보로 돈을 빌려 폭탄을 사들이고는, 황제인 부의를 몰아내려는 계획을 꾸민 것입니다. 서세창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원세개는 그 즉시 철도국에 연락해 특별열차를 타고 가서 원극정을 고향으로 내려보냈습니다.


 12월 2일, 강서 절강의 연합군이 마침내 난징을 함락했습니다. 동시에 협상도 진전이 보였습니다. 혁명군은 원세개를 이길 수 없다는 현실을 인식했고, 만약 원세개가 공화정으로 돌아선다면 그를 대총통으로 추대하겠다는 결의를 통과시켰습니다. 이쯤되자 청나라 조정에서도 원세개를 의심했지만, 그들은 이미 빈껍데기에 불과해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순칭완은 섭정왕 자리를 사직했습니다. 청나라 황실은 외로운 고아와 과부만 남은 형국이 된 것입니다.


 이제 문제는 공화정과 입헌제에 대한 결정 정도였고, 혁명군은 일관되게 공화정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원세개는 이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11월 11일 남방에서는 쑨원을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총통으로 추대했고, 원세개의 생각에 이는 자신이 총통이 되기 힘들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평화협상은 또다시 결렬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리고─ 12월 25일, 마침내 한 남자가 상하이에 도착했습니다. '거액을 가지고 왔다' 는 사람들의 소문과는 달리, 그는 돈이라고는 거의 가지지 않은 빈털터리였고, 스스로 말하기를 자신이 가져온 것은 단 하나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혁명의 정신이요."


청조에 대해 가장 노련하고 무엇보다도 가장 대중화되어있던 적대자, 쑨원의 귀환이었습니다. 비록 지금의 전개가 계획적인 판단 아래에서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우연에 우연을 거쳐 일어난 일이라고 할지라도, 사람들은 이 중국의 가장 유명한 '적업적 혁명가' 에게 영웅적인 환대를 보내었습니다.


 12월 중순 이래 남징에서는 각 성의 대표들이 성 정부의 주도권을 놓고 옥신각신하고 있었습니다. 한 무리는 황흥을 지지했고, 또다른 무리는 여원홍을 지지했습니다. 쑨원의 등장은 그 모든 논쟁을 종식시켰습니다. 12월 29일, 17개 성 가운데 16개 성에서 선출되어 온 대표자들은 투표를 통해 쑨원을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으로 선출했습니다. 


 이제 모든 등장인물은 중국이라는 체스판 위에 올라왔습니다. 이 게임의 체크메이트를 부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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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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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프리드리히대공 | 작성시간 13.07.15 드디어 신해혁명!!!
  • 작성자2Pac | 작성시간 13.07.16 원세개가 적극적으로 진압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아마 진압 후 팽당하고 청은 다른 혁명으로 멸망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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