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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영국의 역사 : 정복왕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7.24|조회수677 목록 댓글 0
Edward the Confessor



 앵글로 - 색슨 왕국의 마지막



 1035년, 북해의 지배자 크누트는 마침내 쓰러졌다. 왕위를 계승할 만한 후보는 여러 사람이 있었다. 웨식스 왕가의 계보를 살펴 보자면 애설레드의 두 아들인 에드워드와 알프레드가 노르만의 궁정 안에 있었고, 또 한사람은 '철기병의 에드워드' 가 남긴 아들로서 헝가리에 쫓겨나 있었다. 크누트의 핏줄로 말하자면, 그는 두 아내에게 두 아들을 얻었다. 이는 '토끼왕발 헤럴드'(Harold the harefoot)과, 에설레드의 미망인 에마(Emma)에게서 얻은 하르사크누트(Harthacnut)였다. 


 크누트 개인은 하르사크누트가 북해의 모든 제국을 계승하길 원했다. 그러나 하르사크누트가 덴마크에서 어정거리는 사이 잉글랜드의 위턴회의(Witenagemot)는 에마와 웨식스 백 고드윈(godwin earl of wessex)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헤럴드를 섭정으로 지명했으며, 1037년 그를 왕으로 삼았다. 1040년 헤럴드가 죽은 후에야 하르사크누트는 잉글랜드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으나, 2년 후 그가 죽자 잉글랜드 땅에서 덴마크 왕조의 혈통은 끊기게 되었다. 이제 거의 모든 사람들은 과거의 웨식스 왕조가 복귀하기를 바라였다. 알프레드는 그 사이에 죽고 말았음으로, *1) 소망을 이루어줄 사람은 애설레드의 아들 에드워드 밖에 없었다. 그는 영국의 궁정에서 1년을 지낸 후 1042년 왕으로 추대되었다. 


 바로 이 고해왕 에드워드(Edward the Confessor)는 잉글랜드 왕실 최고의 성자로 존경받았다. 그를 가리키는 또다른 표현에는 '성스러운' 이라는 칭호가 달려있다(Saint Edward the Confessor). 그러나 성자로서의 전설을 지우고 그를 바라보자면 느긋하게 표현한다 해도 범용한 군주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크누트 대왕의 시절 통합된 대영지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막대한 영토상의 권력을 주었기에, 지위가 불안정한 왕은 자기보다 권력이 강한 신하의 위협 ─ 이를테면 고드윈 백 ─ 에 직면해야 했다. 


 에드워드의 치세기간 가장 유명한 사건이라면 웨스트민스턴(Westminster)에 있던 옛 사원을 잉글랜드 왕실에 어울리는 규모로 재건축한 일이다. 사실 전임 애설레드의 치세에 수도원 개혁은 정치적 분열과 재원의 고갈로 중단되었으나, 에드워드의 신앙심은 이런 난관속에서도 오히려 당시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야심한 건축계획을 수립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훌륭한 성당을 짓기 위해 에드워드는 노르만의 건축가들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하여 웨식스 왕조의 마지막 위대한 기념물이 노르만 문화의 산물로 완성되는 의미심장한 결과가 되었다.





 노르만의 잉글랜드 정복
정복왕 윌리엄


 고드윈의 딸과 결혼했던 에드워드는 후계자 없이 사망하였다. 기실 그의 생전부터 후계자와 관련된 분쟁의 씨앗은 뿌려진 상태였는데, 노르웨이의 왕 마그누스(Magnus)와 그를 승계한 아들 헤럴드 하드라다(Harold Hardrada)는 잉글랜드를 포함한 크누트 제국의 계승자로 자처했고 이는 에드워드의 마음에 그리 흡족한 결과는 아니었다. 에드워드에게 더 걸리는 고드윈이었다. 그들간의 대립은 1051년 절정에 달했는데, 에드워드는 고드윈에게 웨식스 영주로서 도버(Dover)를 치라고 명령하였지만 고드윈은 이에 불복하고 왕에 대한 반기를 들었다. 이에 에드워드는 노섬브리아와 머시아의 영주들을 완전무장하여 소집하였다.


 하지만 거의 모든 잉글랜드의 귀족들은 에드워드와 고드윈, 양측의 세력에 속한 교집합이기에 싸우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러한 입장때문에 파국을 부를 교전은 피할 수 있었다. 다만 고드윈에 대한 지지는 사라졌기에 그와 그의 가족은 추방되었다. 2*) 한때 노르망디에 몸을 피했던 에드워드는 노르만 출신의 인사들을 더 눈치 볼 것 없이 궁정에 끌어들였으나 1052년, 고드윈이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자 어쩔 수 없이 그의 요구에 따르게 되었다. 노르만 대주교는 고향으로 쫓겨났고 국왕의 몇몇 동료들도 추방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명실공히 최고 권력자가 된 고드윈은 그러나 얄궃게도 1053년 죽고 말았다. 그 뒤를 이어 웨식스 백작령을 계승한 사람은 그의 아들 헤럴드 고드윈선(harold godwinson)이었고, 노섬브리아 백 자리는 헤럴드의 아우 토스티그(Tosrig)에게 넘어갔다. 이 무렵 웨일즈에서 가장 강력하던 그위네드의 그리피드(Gruffudd)가 잉글랜드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는데, 헤럴드와 토스티그의 연합군은 그리피드를 쫒아내어 몰락시키는 공을 세웠다. 이러한 성공을 배경으로 헤럴드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왕위 계승 후보가 되었다. 


 그러나 후보는 아직 한 사람이 더 있었다. 바로 노르망디 공 윌리엄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혈통상 에드워드의 어머니 에마는 윌리엄의 고모 할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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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세기 부터 바이킹의 끊임없는 침략을 받아왔던 프랑스의 서쪽 해안은 거의 무법천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 카롤링거 왕조는 대제의 죽음과 함께 분열되었기에 바이킹의 약탈은 내륙 싶숙한 곳까지 뻗치고 있었다. 마침내 단순왕 샤를(Charles the Simple)은 911년 생클레르쉬렙트 조약(Treaty of Saint-Clair-sur-Epte)을 체결하여 바이킹의 최고 우두머리였던 롤로(Rollo)에게 노르망디 지방인 루앙 주변 영토와 센 강 어귀를 양도하고 말았다.


 노르망디에 정착한 롤로는 대륙문화의 뿌리가 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고 봉토를 매개로 샤를 왕의 봉건 제후가 되었다. 이후 롤로의 뒤를 이은 노르망디 공(公)들은 주변 영토를 넓혀가기 위해 전쟁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점점 더 강력한 세력을 떨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노르망디 공들은 형식상 프랑스 국왕에 대해 봉건 제후의 입장에 있었지만, 자신의 영토에서는 프랑스 국왕과 무관하게 지배권을 행사했다.


 윌리엄은 노르망디 공 로베르 1세(Robert I, Duke of Normandy)와 무두장이 딸인 첩 에를르바 사이에서 사이에서 태어났다. 경건한 신상을 가진 로베르 공은 에루살렘 순례를 떠났다가 돌아오는 길에 병으로 죽었다. 그런데 그는 순례를 떠나기 전, 신하들에게 만일의 경우 윌리엄이 적통이라는 사실을 단단히 주지시켰고, 로베르가 분명하게 못을 박아 놓았던 덕분에 윌리엄은 별다른 무리 없이 노르만 귀족들과 프랑스 왕 앙리 1세로부터 노르망디 공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윌리엄은 어린 나이로 공작의 자리에 올랐기에 그를 제거하려는 세력의 위협 속에 놓여 있었다. 특히 그에게 도전하는 세력들은 늘 그가 서자 출신이라는 점을 약점으로 잡았다. 이후 15세가 된 윌리엄은 기사작위를 받고 직접 노르망디 공국을 다스리게 되었고, 5년 후에는 프랑스 왕 앙리의 도움을 받아 캉 남동부에서 자신의 반대 세력을 격파, 명실공히 자신의 통치시대가 열렸음을 만천하게 과시했다.


 윌리엄이 어린 시절 살아남은 것은 프랑스 왕의 도움이었으나, 그 뒤의 성공은 그의 강력한 성품에 힘입은 것이었다. 윌리엄은 6척 가까운 키에 넒은 어깨, 적갈색 머리를 가진 건장한 사내였으며 목소리는 거칠었으나 말솜씨는 뛰어났다. 그는 굳센 의지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있어 끈질겼고,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결단을 내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고집이 세고 잔인한 사람이었으며, 반란자나 침공한 적에 대해 무자비했다. 알랑송 성을 공략했을 때 윌리엄은 32명 포로의 손발을 모두 절단했다. 하지만 그는 잔학성에 공정성과 아량을 아우를 줄 아는 사람으로, 자기에게 순종한 반항자에게는 토지를 돌려주었다.


 윌리엄의 이성적인 성격은 정치든 전쟁이든 그것이 유리한 위치에 서면 어떤 상황이든 가리지 않고 냉정하게 끝까지 이를 살려나가게 했으며, 불리하다고 생각되면 즉각 물러나는 통치의 묘로 나타났다. 즉 그는 무분별한 젊은 혈기를 자제할 줄 알았으며, 위험을 무릎써야 할 때는 항상 치밀한 계산을 근거로 했다. 


 이러한 윌리엄이 잉글랜드의 왕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가 열네살 무렵, 노르망디에 망명했다 잉글랜드로 돌아가던 서른여섯 살의 에드워를 알게 되었던 것이 첫 번째 이유였다. 1051년 윌리엄은 잉글랜드로 건너가 에드워드와 주종 관계를 맺는 충성맹세를 하였다. 이리하여 에드워드 공이 생각하는 진정한 후계자는 윌리엄이라는 말이 나왔고, 그 실체를 지금에 와서 확실하게 아는건 거의 불가능하다. 확실한 사실이 있다면 윌리엄은 잉글랜드에 대해 자신의 지분을 주장할 생각이 넘치도록 있었다는 점이었다.






 윌리엄이 주장하는 또다른 근거는 다름 아닌 경쟁자인 헤럴드 고드윈선이었다. 1064년(혹은 1065년) 헤럴드는 노르망디 공 윌리엄을 방문하였고, 에드워드의 사절이었던 헤럴드는 예전의 약속 ─ 에드워드가 월리엄을 후계자로 삼겠다는 ─ 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서약을 했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사실인지, 혹은 노르만이 꾸며낸 이야기인지, 그것도 아니면 헤럴드를 포로로 잡고 협박하여 얻어낸 약속인지는 모를 일이다. 어찌되었건 윌리엄은 에드워드의 사후 헤럴드의 서약 위반을 문제 삼고 군사 개입에 나서기 시작했다.


 윌리엄에게는 다행스럽게도 프랑스 내의 상황이 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켄터베리 대주교와 사이가 멀어지고 남부 이탈리아에서 노르만의 도움에 의지하던 로마 교황은 윌리엄의 침략 행위를 신성한 성전으로 미화하여 지지하였고, 새로 즉위한 프랑스 왕은 윌리엄에게 호의적이었다. 용의주도한 그는 노르망디 공국 뿐 아니라 전 유럽에서 기사들을 모집하고, 800척의 함선을 모았다. 1066년 8월 출병을 위한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졌다.


 그 무렵 헤럴드는 적법한 왕위계승자로서 행동하고 있었으나, 이는 윌리엄 외에 또다른 침략자를 불러들였다. 노르웨이의 헤럴드 하드라다는 과거 잉글랜드의 왕 하르샤크누트가 자신의 아버지인 마그누스에게 왕관을 물려주겠다고 약속 했다고 하며 잉글랜드 왕위를 요구했던 것이다. 이제 잉글랜드의 운명은 두명의 헤럴드와 한명의 윌리엄에게 달려 있었다.  






 행운의 여신은 그 자애로운 미소를 윌리엄을 향해 지어 보였다. 9월 내내 그는 북풍으로 인해 노르망디 해안에서 꼼짝도 못하였으나, 이 바람을 탄 헤럴드 하드라다는 오크니 제도에서 험버 강 쪽으로 이동했다. 헤럴드 하드라다와 손을 합친것은 다름 아닌 헤럴드 고드윈선의 동생인 토스티그였다. 본래 윌리엄을 막기 위해 와이트 섬에 부대를 배치했던 헤럴드 고드윈션은 어쩔 수 없이 전 병력을 움직여 북쪽으로 이동했다. 이후 벌어진 싸움에서 헤럴드 고드윈션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티스위그와 헤럴드 하드라다는 모두 전사하고 말았으며, 노르웨이인들은 300척의 배 가운데 20여척만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승리는 헤럴드 고드윈션의 힘을 약화시킬 뿐이었다.


 3일 후, 마침내 윌리엄의 부대는 잉글랜드에 도달하였다. 기회를 잃고 싶지 않았던 윌리엄이 악조건을 무릎쓰고 찰나의 순간을 노려 출항을 했던 것이다. 헤럴드는 바로 큰 전투를 끝낸 참이라 선뜻 군대를 움직이기 어려웠으나, 어쩔 수 없이 지친 병사들을 독려하여 400킬로미터나 떨어진 거리를 주파하였다. 그의 많은 궁사와 보병의 주력 부대는 뒤에 남겨져있었다.


 이리하여 마침내 양군은 헤이스팅스(Hastings)에서 대치하였다. 헤럴드는 뒤에 두고 온 주력 부대가 완전히 도착하기 전에 바로 전투를 벌였는데, 윌리엄은 약 5,000여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헤럴드는 약 7,000여명의 병력으로 헤이스팅스 서북쪽에 있는 한 언덕을 점거하고 있었다. 


 헤럴드의 군대는 지치기는 했지만 적을 내려다보는 유리한 형국이었다. 헤럴드는 10열 ~ 12열의 심층방어진을 치는 '방패 - 벽'이란 전투대형으로 적을 지치게 한 후, 정예부대인 '웨식스 용' 이라고 불리우는 '하우스칼' 용병부대를 앞세워 마지막을 정리하는 것이 주요 패턴이었다. 양군은 10월 14일 윌리엄의 공격을 시작으로 드디어 격돌하였다.


 노르만의 부대는 먼저 보병과 궁병이 나서 잉글랜드 군을 공격했으나 잉글랜드 보병의 방패 원진을 뚫어 낼 수 없었다. 또한 화살은 높은 곳을 선점한 헤럴드의 군에게 아주 큰 효과를 주지 못했다. 윌리엄은 이어 기병들을 전진시켰으나 이들 또한 하릴 없이 후퇴하고 말았다. 오후 내내 공격을 퍼부었지만 전세는 바뀌지 않았고, 헤럴드가 잉글랜드의 유일무이한 군주가 되는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해가 질 무렵 윌리엄은 새로운 작전을 생각해내었다. 그의 군대는 잉글랜드군을 공격하다가 거짓 후퇴하는것을 수차례 반복하면서 헤럴드 부대의 견고한 방패 - 벽을 언덕 아래쪽으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이후 아직 힘이 남아 있던 노르만의 궁수들은 적의 바로 앞까지 대담하게 진격하여 화살을 공중으로 쏘아 비처럼 쏟아지게 하였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화살의 비를 피하느라 그토록 견고하던 적의 수비가 약해진 틈을 타, 노르만의 기병들은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재빠르게 돌진하였다. 작은 균열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방패 - 벽은 결국 완전히 산산조각이 되고 말았다.


 궁병의 도움을 받은 기병들은 도끼와 창을 휘두르는 보병 집단을 격파하였다. 이 전투의 와중, 헤럴드는 눈에 화살을 맞고 쓰러진 후 노르망디 기사들에게 피살되었다. 그 중 한 기사는 헤럴드의 다리를 잘라내었다. 


 이제 잉글랜드 땅에서 윌리엄에 맞설만한 강력한 세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잉글랜드 인들은 그리 고분고분하게 새로운 지배자를 받아들이려고 하질 않았다. 노섬브리아의 백이나 머시아 백 같은 유력자들은 윌리엄에게 굴복하기를 거부했고, 철기병 에드워드의 손자인 에드가 애설링(Edgar Ætheling)을 후계자로 내세우고 항전을 계속할 태세였으며, 켄터베리와 요크의 대주교들도 그들의 선언을 지지했다. 에드워드의 왕비는 웨스트 색슨의 수도 윈체스터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런던 역시 노르만 침입자들에게 적대적이었다.





 윌리엄은 여기서 다시 이성적인 판단을 내렸다. 수천명의 병력으로 런던을 공격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런던을 우회하기로 작정했다. 도버와 켄터베리를 거쳐 템즈 강의 남쪽을 따라 서쪽으로 나아가면서, 그의 노르만 군대는 눈 앞에 걸리적 거리는 것을 모조리 파괴하고 유린했다. 그는 런던 남쪽의 서더크를 불사르고 다시 서쪽으로 진군하여 햄프셔, 버크셔를 거쳐 템즈 강을 건넌 뒤 동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렇게 하여 런던이 고립되자 그의 적들은 차례로 굴복하기 시작하고, 런던의 유력자들이 그 뒤를 따랐다. 애설링의 세력은 무너졌다. 위대한 알프레드의 가문은 데인인, 노르만인, 그리고 다시 데인인들이 침입했을 때도 살아남았으나, 결국 외국의 왕조로 영원히 교체되었다.  




*1) 잉글랜드를 방문하였을때, 고드윈의 부추김을 받아 가해진 상해로 말이암아 죽고 말았다. 옥스퍼드 영국사 pp.121

2*) 고드윈의 딸이자 에드워드의 부인이었던 이디스 왕비도 쫓겨났다. ─ 김현수 이야기 영국사 p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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