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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영국의 역사 : 정복왕의 아들들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7.24|조회수554 목록 댓글 3


 

초기 중세시대
노르만의 잉글랜드 정복 여파


 1086년의 크리스마스 날, 요크 대주교는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에서 노르망디 공 윌리엄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아주 깜짝 놀랄 만한 순간이었다. 영어와 불어로 내지르는 추대의 함성은 그 수도원 밖에서 경비하고 있던 노르만의 수비대를 놀라게 하였고, 교회내에서 일이 잘못 되어가고 있다고 믿었던 그 수비대는 이웃에 있던 건물들에 불을 질렀다. 반세기 뒤에 한 노르만의 수도사는 그 날의 혼란스러웠던 일을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불이 급속하게 번지면서 교회 안에 있던 사람들은 대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그들 중의 일부는 밖으로 뛰쳐나왔고, 일부는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갔으며, 일부는 약탈의 기회를 잡게 되었다. 단지 수도사와 주교 그리고 몇몇 성직자만이 제단 앞에 남아 있었다. 그들도 무서워 떨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남아있는 성직자들만큼이나) 격렬하게 떨고 있던 왕에 대한 축성을 간신히 끝마칠 수 있었다." *1)


 헤이스팅스에서의 승리, 그리고 런던과 윈체스터의 항복에도 불구하고 윌리엄의 지위는 여전히 불안정 했기에, 그가 갑작스러운 혼란에 겁을 먹은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정복이 완성되었다는 확신을 가지기에는 5년이라는 세월이 더 필요했다. 1067년부터 1070년에 이르기까지 켄트에서, 서남쪽에서, 웨일즈 변경주에서, 펜렌드(Fenland)에서 그리고 북부지방에서, 매년 노르만의 지배에 대한 반란이 있었다. 


 윌리엄은 자신이 에드워드의 후계자로 군림할 것이며 그의 법을 지킬 것이라 약속했다. 정복왕은 자신에게 적대한 자들이라도 그에게 복종하고 봉사할 것을 서약하면 너그럽게 대할 것이라 말했지만, 영국인들의 불만은 그리 쉽게 누그러들지 않았다. 1068년에는 남서부에서, 1069년에는 북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에 관한 윌리엄의 모토는 '무자비'와 '철저함' 이었다. 그는 북쪽으로 진격하면서 주변 일대를 모조리 초토화했고, 그의 군대는 반항자들을 지체없이 몰살했다. 몰살의 의미를 묻는다면, 가축들은 도륙되었고, 식량은 불 질러졌으며 농기구는 파괴되었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노략질의 수준은 요크와 더럼(Durham) 사이에 사람의 거주지가 단 한 곳도 남아있지 않았다는 역사가들의 지적이 나올 정도로라는 점에서 짐작 해볼 수 있다. *2) 광대한 농촌 지역이 황무지로 변했고, 수많은 마을과 도시는 정복왕이 토해내는 분노의 제물이 되었다. 영국인들은 숲 속이나 외진 곳에 매복해 있다가 기회가 오면 증오의 대상인 노르만인들을 죽이곤 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노르만들은 하나의 법을 만들었다. 그것은 살해된 자의 시체가 영국인의 것으로 입증되지 않을 경우 노르만의 시체로 간주되며, 그 경우 시체가 발견된 곳에 인접한 마을 주민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한다고 규정한 것이었다. 시체가 영국인인 경우에는 아무런 벌금도 부과되지 않았다. 1071년 윌리엄은 마침내 색슨인들의 마지막 반란을 진압했다. 반란은 이스트 앵글리아의 늪지대에서 일어났는데, 반란의 지도자 헤러워드(Hereward the wake)의 처절한 일리 섬 방어전은 후세 영국인들로 하여금 그를 아서 왕이나 알프레드 대왕에 비견되는 앵글로 - 색슨의 영웅으로 여기게 했다.


 이러한 살육이 이루어지는 동안 노르만인들은 작전단위로 함께 생활하면서 먹고 잠자는 점령군대의 군인과 같은 생활을 해야 했다. 그들은 성을 축조하였고, 이 성은 소수의 사람들이 복속된 주민을 지배하기 위한 강력한 요새가 되었다. 로마인들의 시대부터 군사기지로 사용된 올드 새럼(Old Sarum)의 항공 사진을 보면 노르만 정복 제1 세대가 직면한 어려움을 느낄 수 있다. 노르만 대성당이 성 가까이에 있는데, 이 성은 유사 이전 시대의 요새지 전체를 필요로 하지는 않은 극소수의 사람들을 방어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다.


 약 1백만 내지 2백만의 적대적인 주민들과 생활하는 노르만인들의 수는 1만 명이 채 못되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모든 영국인들이 실제로 노르만인들을 반대하였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노르만이 협조한 많은 잉글랜드인들이 있었으며 이 사람들을 통해 노르만인들은 앵글로 - 색슨의 많은 제도들을 성공적으로 물려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영국인들이 그들 자신의 영토에서 억압받는 민족이 된 것에 분개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증거는 많이 있다. 이 불안정한 시기는 그 이후의 역사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는 영국인들이 새로운 왕가 뿐 아니라 새로운 계급 제도, 새로운 문화와 언어를 곧바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Domesday



 노르만의 정복은 피정복민들에게 많은 재앙을 안겨주었다. 재앙을 가져다 주는 것이 정복왕의 본래 목적은 아니었을 것이다. 정복 초기에 많은 영국인들은 그에게 복종을 하였고, 그리하여 자신의 토지를 보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1086년까지는 분명 어떤 변화가 있었다. 


 헤이스팅스에서 정복왕이 승리를 거둔 데는 궁병과 함께 말 탄 전사, 즉 기사들의 공이 컸다. 안장과 재갈과 등자는 말 위에서 기사들의 움직임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이런 기사를 부양하는 데는 많은 비용이 드는 법이다. 한 명의 기사에게는 수많은 수행원이 필요하며, 기사를 훈련시키기 위해서도 비용과 오랜 시간이 들었다. 프랑스의 왕들은 토지를 급여해줌으로서 이 문제를 해결했는데, 정복왕은 이러한 프랑스의 봉건제를 잉글랜드에 들여왔다.


 말할 필요도 없이 봉건제를 지향하는 듯한 제도들은 앵글로 - 색슨 잉글랜드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또한 노르만 정복이 있건 없건 그들이 그 나름대로 봉건제를 발전시켰을 것은 당연한 역사적 귀결이다. 그러나 주인집의 잡무를 돌보는 그때의 가신들은 전투에 종사하는 기사가 아니었고, 여러 가지 봉사의 대가로 주어진 토지는 군사적 봉사를 조건으로 급여된 봉(fief)이 아니었다. 정복왕은 그를 추종한 노르망디와 브르타뉴, 플랑드르 등지의 유력자들에게 잉글랜드의 대영지를 봉으로 나누어주었다.


 둠즈데이 북(Domesday Book)은 정복으로 인해 많은 변화가 일어난 토지에 대한 기록이다. 이 책은 윌리엄이 자신과 대영주들의 부를 확실하게 파악하기 위해 각 주에 조사관을 파견하여 토지의 소유자와 경작자, 토지의 면적과 가치, 가축과 쟁기의 수 등 장원의 실태를 자세히 조사하도록 하여 작성한 것인데, 조사가 어찌나 철저하였는지 수소 한 마리, 암소 한 마리, 심지어 돼지 한 마리조차 조사에서 누락되지 않았다.


 이 조사의 결과를 살펴보면 1086년, 잉글랜드의 귀족 중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영국인 귀족은 오직 두명 밖에 없었다. 4천 이상의 세인(thegn)들이 그들의 토지를 빼앗겼고, 200명이 안되는 대귀족들이 이를 대신하게 되었다. 새로운 지주의 일부는 브르타뉴인(Bretton), 프랑드르와 로레인 출신들이었지만 대부분은 물론 노르만인이었다. *3) 새로운 지배자들의 권력을 보여주는 가장 뚜렷한 상징은 잉글랜드 전역에 걸쳐 나타난 성이었다. 노르만들이 들어온 한 세대만 해도 근 500개와 성이 세워졌다. *4)


 교회문제에 있어서는 보다 분명하게 윌리엄이 언제부터 반(反) 영국 정책을 시행하였는지 알 수 있다. 1070년 그는 영국인 주교를 해임시켰고, 이 이후로는 영국인들을 주교나 수도원장에 임명하지 않았다. 군사문제에 있어서는 1069~1070년의 겨울 동안에 북쪽 지방이 자주 유린당하였기 때문에, 이 당시에 새로운 규모의 잔인한 정책이 있었다는것을 알 수 있다. 요크셔의 토지는 기존의 2/3 가량으로 가치가 하락되었다. 


 언제 어떻게 무슨 일이 일어났건 간에 1086년까지 앵글로 - 색슨의 귀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그들의 지위는 새로운 엘리트에 의해 분명히 제한되었다. 이 새로운 엘리트는 물론 대륙에 있는 노르망디 공의 구토지도 당연히 보유하고 있었다. 그 결과 이전에는 나뉘어 있던 잉글랜드와 노르망디가 해협을 사이에 둔 하나의 정치적 공동체가 되어, 공통의 지배왕조를 가지고, 하나의 앵글로 - 노르만 귀족집단을 형성하였다. 1204년까지 잉글랜드의 노르망디의 역사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또한 노르망디는 프랑스 왕에게 충성을 이야기한 공작이 지배하는 공국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잉글랜드의 정치는 프랑스 정치의 영향을 직접 혹은 간접으로 받게 되었고 프랑스와의 관계도 더욱 더 깊어지게 되었다. 프랑스화된 노르만인들은 잉글랜드에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화를 가지고 들어왔다. 1066년, 윈체스터에서는 재산 소유자의 30% 이하가 비영국인의 이름을 가진 데 비하여 1207년 그 비율은 80%까지 올라갔으며, 대부분이 윌리엄, 로버트, 리처드와 같은 프랑스 식 이름이었다. 대륙의 영향에 민감하였다는 것은 이 당시에 가장 뛰어났던 잉글랜드의 예술이 이국적인 성격을 지녔다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언어는? 말할 것도 없다. 모든 위대한 문화적 유산의 기본은 언어에서부터 출발한다. 음악, 문학, 건축분야에서 프랑스의 지배는 가히 압도적이었고, 자연히 프랑스어는 한 민족이 사용하는 언어를 넘어 국제적으로 사용되는 언어, 즉 스스로 문명화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쓰는 언어가 되었다. 중세를 통틀어 '교육 받은 영국인' 이라고 한다면 그는 3가지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영어를 구사하고, 프랑스어를 구사하며, 라틴어에 대한 약간의 소양을 갖추고선 말이다. 따라서 잉글랜드는 정치적 의미의 식민지는 물론이며 더 나아가 프랑스의 문화적 식민지가 되었다. 


 1066년, 그리고 노르만 정복. 이 두 단어는 영국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하고 극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이 사건은 너무나도 쉽게 '새로운 시작' 혹은 '하나의 멸망과 하나의 탄생', '의미 있는 전환점' 으로 간주된다. 11세기 말 잉글랜드에서 발생한 거의 모든 사건들은 노르만 정복의 영향 아래 있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물론 어떠한 변화는 정복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으며, 어떠한 중요성들은 전혀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지속성이 유지되었다.


 이 시기의 역사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이 직면하는 주된 문제는 그것이 (대중들이 좋아하는)하나의 극적인 사건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아주 복잡한 사회적 - 문화적 과정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 복잡한 과정이라는 것은 12 - 13세기 동안 수 없이 많은 기록문화가 양산되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이전보다 훨씬 많은 문서가 작성되고 또 보존되었던 것이다. 앵글로 - 색슨 전기간 동안 약 2,000건의 영장(writ)와 특허장만이 남겨진 데 비해, 우리는 13세기의 단 한세기에 대해 수만 건의 문서를 접할 수 있다. 물론 앵글로 - 색슨의 2,000여 문서는 빙산의 일각이며, 대부분의 문서는 보존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13세기도 마찬가지다. 13세기에는 소토지보유자와 농노에 관하여 8백만 건의 문서가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이 양산되었다는것은 무슨 의미인가? 전인구에서 식자층의 비중이 늘어났다는 이야기인가? 잉글랜드 전역에서 각종 학교의 수가 증가하는 흔적은 분명히 보이고 있었다.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다면, 사회는 점점 관료화되어 가고 있었다. 





 윌리엄 1세(1066 ~ 1087)


노르만 정복기 동안 잉글랜드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 스코틀랜드의 맬컴 3세는 국경을 넘어 침입해왔으나, 정복왕은 스코트족이 단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여 북쪽으로 진군해왔다. 바보가 아니었던 맬컴 3세는 그런 세력에 도전한다는것은 자살 행위라는것을 깨닫고, 정복왕에게 양국 간의 평화적 동맹을 제의하였다. 이 제의는 앞으로 수 세기 동안 두 왕국 사이에 일어난 수많은 분규(紛糾)들 중 그 첫번째 평화 제의가 되었다. 이 동맹은 성사되어 평화의 담보로 맬컴의 장자인 던컨이 런던으로 보내지게 되었다.


 1071년 이후 정복왕의 잉글랜드 지배는 상당히 안정화되었다. 웨일즈인들과 스코트인들은 그를 거의 괴롭히지 못했다. 스칸디나비아 지배자들은 호시탐탐 잉글랜드를 노리고 있었으나 바이킹들의 또다른 잉글랜드 침입은 실현되지 않았다. 1085년 잉글랜드 공격을 고려하던 덴마크의 크누트 2세가 이듬해 사망했던 것이다. 문제가 생긴다면 잉글랜드 보다는 노르망디에서 벌어질 가능성이 컸다. 


 노르망디는 잉글랜드보다는 더 쉽게 이민족의 급작스러운 공격을 받을 위험에 처해 있었다. 따라서 1071년부터 그의 통치 말기까지 윌리엄의 관심은 대륙에서의 전쟁과 외교에 쏠려 있었다. 윌리엄은 생의 마지막 15년 동안 잉글랜드에 머물지 않았고, 대신 켄터베리 대주교였던 랜프랑크가 윌리엄의 직분을 대신했다. 정복왕은 랜프랑크를 철저하게 신임했고, 대주교는 왕의 신임을 저버리지 않아 자신의 역할을 다하였다. *5)


 윌리엄과 이웃하고 있던 귀족들은 그가 갑작스럽게 획득한 세력 때문에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었으며, 그의 세력을 약화시킬 방법이 없는지 골몰하고 있었다. 이러한 반대세력을 이끌고 있던 자는 프랑스의 왕 필리프와 앙주 백 폴크였다. 윌리엄의 큰아들 로버트는 이들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로버트는 1066년부터 노르망디의 상속자로 인정되었으나 부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직분은 주어지지 않았고, 1078년 이래 아버지에 대한 일련의 음모에 가담하게 되었던 것이다.


 프랑스 왕과 노르만 공과의 전쟁은 루앙(Rouen)과 파리 사이의 세느 강 북쪽 뚝에 있는 벡생(Vexin)을 전투지역으로 삼아 이루어졌다. 윌리엄이 1043년 정복하였던 메인(Maine) 백 령도 노르망디와 앙주 사이의 전쟁터가 되었다. 메인 지역은 이후 2세대 동안, 벡생은 1203년까지 불화의 원인이 되는 지역이 되었으므로, 윌리엄의 최후는 다음 세기를 지배할 정치적 패턴이 되는 가정불화와 국경분쟁이 서로 뒤엉켜 여러가지 시사하는 바가 있다.


 망트(Mante) 요새의 수비대는 정복왕을 급습하였고, 윌리엄은 반격을 가했다. 그의 군대는 망트를 약탈했지만 왕 자신은 부상을 당했으며 5주 동안 빈사상태로 누워 있었다. 큰아들 로버트가 프랑스 왕의 궁중에 남아 있었던 데 비하여 둘째 아들 윌리엄 루퍼스(William Rufus)는 아버지의 침대 옆에서 충실하게 부친을 간호하였다. 잠시 정신을 차린 정복왕은 루퍼스를 잉글랜드의 후계자로 삼았다. 또한 반기를 둔 로버트에게는 노르망디와 멘을 주었고, 또 다른 아들인 헨리에게는 영지를 사들일 수 있는 많은 보물을 주었다.


 1087년 9월 9일, 60세의 나이로 사망한 윌리엄 1세는 캉(Caen)에 있는 생 테티엔트(saint-Etienne) 성당으로 옮겨졌는데, 사망할 당시 상당히 뚱뚱했던 그를 시종들이 억지로 석관에 밀어넣으려다 시신이 터져 시체의 악취가 교회 전체를 뒤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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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리엄 2세(1087 ~ 1100) 



 장남이 영지를 세습해야 한다는 전례로 인해 로버트는 반란을 일으키고도 노르망디를 상속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구입하였거나, 결혼 혹은 정복에 의해서 아버지가 직접 획득한 재산은 예외적인 경우였기에 정복왕은 자신이 정복한 잉글랜드를 둘째 루퍼스에게 넘겨줄 수 있었다. 로버트는 이에 반대하였는데, 그가 반란을 일으키지만 않았어도 잉글랜드는 그의 것이 되었을 것이다.


 전례를 이야기하긴 했지만 왕위상속에 대한 관습은 아직 분명하게 고정되지 못했다. 그 관습은 정치적 현실을 고려해서, 예를 들면 경쟁하는 후보자들의 성격에 따라 바뀔 수 있고 또 바뀌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랜프랑크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은 루퍼스가 그의 형 보다는 더 나은 지배자가 될 것이라고 판단 했거나 혹은 형 보다는 더 다루기 쉽다고 여겨 그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결코 안정적인 왕권으로 이어지진 못했을 것이다. 왕위를 계승한 지 몇달도 되지 않아 반란이 일어났는데, 주모자인 바이외의 오도(odo of bayeux)는 이렇게 주장하였다.


 "(노르망디와 잉글랜드가)서로 멀리 떨어져 있고, (로버트와 루퍼스라는)상호 적대적인 두 군주에 대해 어떻게 우리가 적절한 봉사를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우리가 로버트 공을 잘 모신다면, 우리는 그의 동생에게 불경죄를 짓는 것이 될 것이며, 루퍼스는 잉글랜드에 있는 우리들의 세수입과 영지(honour)를 몰수할 것이다. 그 반대로, 만약 우리가 루퍼스에게 복종한다면, 로버트 공은 노르망디에 있는 우리들의 세습 재산을 몰수할 것이다." *6)


 이는 기득권자들에게 호소력을 가졌고, 윌리엄 루퍼스를 불안하게 했다. 말하자면 정치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노르망디와 잉글랜드를 합병 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앵글로 - 노르만 왕국에 단 한명의 지배자가 있어야만 한다면, 로버트의 계승권 주장을 무시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로버트는 노르망디에 머물며 잉글랜드에 남아 있는 그의 지지자들에게 힘이 되어 주지 못했다. 따라서 반란은 재빠르게 진압이 되긴 했지만 잉글랜드 왕이면서도 노르망디 공이 되지 못하였던 왕의 지위가 얼마나 위험천만했던가는 잘 보여지고 있다.


 반란 진압 과정에서 루퍼스는 잉글랜드의 노르만 귀족들에게 세금감면과 정치 참여에 대한 유리한 조건들을 이야기 하여 그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반란이 진압된 후 왕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에, 1095년 노섬벌랜드 백작 로버트 드 모브레이가 주도한 귀족반란을 다시 초래했다. 반란을 예측하고 있었던 루퍼스는 강경하게 이를 진압하여 다시는 그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게 했으며, 유일하게 자신을 제제할 수 있었던 랜프랑크도 사망하자 잉글랜드 교회의 권위에도 개입하였다. 


 이러한 잉글랜드 내 문제와 더불어 루퍼스는 노르망디에 손을 뻗쳤다. 1089년부터 7년간 이어진 노르망디와의 전쟁은 루퍼스에게 있어선 성공적이었지만 결정적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바로 그 즈음, 교황 우르반 2세(Urbanus Ⅱ)의 설교가 성공함에 따라 잉글랜드 - 노르망디의 긴장 관계는 예기치 않게 해결되었다. 성지 예루살렘을 회복하기 위한 원정에 수많은 사람들이 참가하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로버트는 이를 국내의 어려운 정치적 입장에서 탈피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다. 로버트는 루퍼스에게서 10,000마르크의 군자금을 받고 노르망디를 저당 잡힌 후, 성지를 향해 출발하였다.


 또한 그는 스코틀랜드에 부친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1092년 루퍼스는 맬컴 3세를 글로레스터(Gloucester)에 있는 그의 조정으로 불러 들인 후 그에게 신하로서의 충성을 다할 것을 요구하였다. 맬컴 3세는 이를 모욕으로 여기고 거절하였는데, 결과적으로 맬컴은 귀환 하던 중 '맬컴의 십자가'(malcolm's cross)로 불리는 장소에서 1093년 잉글랜드 복병들에게 살해당했다. 맬컴 3세의 부인이었던 마거릿 왕비는 이 소식을 듣고 충격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루퍼스는 맬컴의 아들인 던컨을 지원하여 그가 스코틀랜드의 왕위를 가질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전쟁지도자로서 그의 모든 성공에도 불구하고 루퍼스의 명성은 항상 높지 않았다. 당시 역사를 기록하던 수도사들은 정복왕의 경건함과 진지한 판단에 젖어있다가, 새로 등장한 이 군주의 사치, 향락과 눈을 어지럽히는 패션의 파격 등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얼굴이 붉어 '루퍼스' 라는 별명을 얻었던 그는 키가 작고, 뚱뚱하고 목덜미가 두터웠으며, 타고난 난봉꾼이자 냉혹함을 겸비했다. 자신에게 반항하는 자는 아버지 이상으로 혹독하게 처벌했는데, 한 귀족은 루퍼스에게 반항하다 두 눈이 뽑히고 거세되었으며, 그의 집사는 솔즈베리 시내 모든 교회 문 앞에서 매질 당한 후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는 성직자들의 경건한 행동을 조롱하고 외국 사신들을 모욕하고, 자신의 동성애 행위를 스스럼 없이 드러내곤 했다. 어느날 그는 켄터베리의 대주교 안셀무스(Anselm of Canterbury)에게 "다음 설교에서는 나를 어떤 죄로 몰아세울 것인가?" 하고 물었을 때 대주교는 "소돔의 죄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이에 왕은 대주교의 얼굴을 맞대놓고 깔깔대며 웃었다.





 루퍼스가 얼굴을 맞대고 웃어제겼던 그 안셀무스는 “믿기 위하여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 라고 외쳤으며, 이러한 스콜라 철학의 시조로서 중세를 통틀어 최고의 신학자 중 한명으로 인정받았고 당대에 이미 성자와 같은 반열에 올랐던 인물이었다. 이탈리아 북서부에 위치한 피에몬테 지방에서 태어난 그는 훌륭한 고전교육을 받았으며, 당대의 뛰어난 라틴어 학자로 평가받았다. 그는 초기 고전교육의 영향으로 단어를 정확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글은 명료하기로 유명했다.


 루퍼스가 그를 켄터베리 대주교에 임명하기 전, *7) 안셀무스는 잉글랜드를 세 차례 방문하였다. 그러나 그는 대주교 임명을 내키지 않았다. 결국 잉글랜드 교회를 개혁하려는 의도에서 대주교 자리를 수락한 그는 1093년 12월 4일 정식으로 켄터베리 대주교에 임명되었다. 루퍼스는 안셀무스에게 상당한 액수의 세금을 요구해쓴데, 안셀무스는 이를 성직 임명에 대한 대가성 있는 것을 보고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이후에 벌어진 논쟁은 루퍼스의 명예를 실추시켰다. 왕은 안셀무스가 로마에 가서 교황 우르바누스 2세(Urbanus II)로부터 교황청이 대주교 승인을 상징하는 팔리움(pallium)을 수여받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버텼는데, 이는 영국 왕이 우르바누스 2세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연결이 되었다. 안셀무스는 본질적으로 성직에 관련된 문제에 왕이 개입할 권한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 4세 사이에 불거졌던 그 유명한 서임권 논쟁의 재현이었다. 즉 주교와 같은 성직 지위를 임명할 1차적 권리가 세속의 지배자인지, 교황에게 있는지 하는 논쟁이었다. 논쟁은 2년 동안 게속되었다. 1095년 3월 11일, 교황의 사절은 로마로부터 팔리움을 가지고 왔다. 그러자 안셀무스는 성직의 권위가 왕으로부터 주어진 것으로 보일 수 있다며 팔리움을 거부했다. 


 끝없이 평행성을 달리던 두 사람의 관계는 마침내 루퍼스의 괴롭힘을 견디다 못한 안셀무스가 도버 해협을 건너면서 끝이 났다. 안셀무스의 생에를 저술했던 켄터베리의 수도사 에드머(Eadmer)는 루퍼스에 대해 "바람과 바다도 그에게 복종하는 것 같아 보인다. 전쟁에서, 그리고 영토 획득에 있어서 그는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전 세계가 미소짓는다고 당신은 생각했을 것이다." 라고 기술했다. 


 이 괴팍하고 강력한 군주의 절대적 권위와 평화는 점점 끝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성지로 떠났던 로버트가 성전(聖戰)에 참여했다는 명성을 등에 엎고 귀환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버트가 그의 상속분, 즉 노르망디 영지를 다시 요구했을때 무슨 일이 발생할지, 그리고 노르만 귀족들이 누구의 편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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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0년 8월 2일, 루퍼스는 전날 '피를 흘리는 꿈' 을 꾸었지만 개의치 않고 소홀한 경호에도 불구, 뉴 포리스트(New Forest)의 사냥터로 나아갔다. 그의 곁에는 동생 헨리와 탁월한 사냥 솜씨를 보였던 퐁티외 남작 월터 티럴이 동행하고 있었다. 그들이 얼마간 사냥감를 찾던 중 숲에 사슴이 나타났다. 사슴은 왕과 티럴의 사이에 일직선에 있었고, 루퍼스는 움직이지 않고 조심스레 남작에게 사슴을 쏘라고 몸짓을 했다. 


 그러나 남작이 쏜 화살은 사슴을 지나서 왕의 가슴에 박혀버렸다. 루퍼스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가슴에 박힌 화살의 날개 부분을 꺾으면서 말에서 쓰러졌다. 이떄 엎어지듯 떨어지는 바람에 꺾인 채 남아 있던 화살 부분이 땅에 부딪히는 충격에 의해 가슴 깊숙이 박혔다. 왕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인근에 사는 한 농노는 루퍼스의 시체를 수레에 실러 윈체스터로 운반하여 대성당에 매장했는데, 얼마 후 성당의 첨탑이 무너지자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식의 장례를 받을 자격이 없는 죄 많은 왕 때문에 일어난 재난이라고 수근거렸다.


 이것이 고의적인 암살인지 실수였는지 확증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다. 그러나 그 순간 왕의 동생인 헨리가 뉴 포리스트에 있었으며, 헨리가 티렐의 가족에 대하여 훗날 특별한 호의를 베푼 점으로 보아 추측은 가능하다. 루퍼스와 사냥을 즐기던 헨리는 그 순간 미친듯이 말머리르 돌려 윈체스터로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날 윈체스터에 있는 왕의 금고를 확보한 헨리는 다음 날 소수의 영주들로 하여금 자신을 국왕으로 선출케 했으며, 이틀 뒤인 8월 5일 웨스트민스터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이리하여 아버지 못지않게 욕심 많고 냉정하고 혹독했지만, 계산적이며 신중한 헨리 1세가 즉위가 즉위하였다.



*1) 옥스퍼드 영국사, pp.132

*2) 영국의 역사, 나종일 pp.91

*3) 토지를 몰수하여 재분배 하는 가장 손위운 방법은 무수히 일어나던 반란을 진압한 뒤, 합법적으로 토지를 몰수하는 것이었다. ─ 이야기 영국사, 김현수 pp.99

*4) 초기의 성은 대게 흙을 쌓아 올려 만든 작은 언덕 위에 높은 목조 탑을 세우고 주변을 방책으로 둘러싸 도랑을 파서 물을 채웠으나, 시대가 지남에 따라 성은 군사적 요새로서만이 아니라 영주의 주거로도 사용되면서 돌로 축조되기 시작하여 규모가 커지고 구조가 견고해졌다. ─ 영국의 역사, 나종일 pp.95

*5) 윌리엄도 나름대로 방어책을 세워 두었다. 잉글랜드 내의 토착 귀족들을 자신과 함께 노르망디에 머물게 하여 반란의 불씨를 원천적으로 없앴던 것이다. ─ 이야기 영국사, 김현수 pp.100 

*6) 옥스퍼드 영국사, pp.142

*7) 루퍼스가 안셀무스 임명 이전 켄터베리 대주교 자리를 공석으로 남겨둔 이유는, 그가 일부러 주교직이나 수도원장직을 공석으로 놓아두고 수입을 가로채는 일을 즐겼기 때문이다. ─ 영국의 역사, 나종일 p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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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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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가스가겐고로 | 작성시간 13.07.25 아 재미지다~~!!
  • 작성자BACCANO | 작성시간 13.07.25 헨리 영악한게 맘에 드네요ㅎㅎ
  • 작성자코크레인 | 작성시간 13.07.26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흥미진진하네요 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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