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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영국의 역사 : 왕위의 향방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7.27|조회수360 목록 댓글 1






헨리 1세(1100 ~ 1135)


 윌리엄 루퍼스의 뒤를 이은 헨리는 '뛰어난 학자'(Henry Beauclerc)라는 별칭에서 알 수 있듯이 다른 형제들보다 많은 교육을 받았으며, 늘 학식이 높은 사람들 틈에 있었다. 그러나 부친의 사망 이후 영토를 얻지 못한 탓에 항상 기회를 살피고 있었기에, 루퍼스와 로버트는 "만약 둘 중 하나의 혈통이 단절된다면, 서로가 소유한 땅을 병합하더라도 헨리에게는 절대로 주지 말자." 라고 합의하였다. *1) 그러나 루퍼스의 갑작스러운 죽음 탓에 상황은 변하였다.


 루퍼스의 미심쩍은 최후에도 불구하고 헨리가 이를 배후 조종했는지 여부는 오리무중이다. 당대인들이 그러한 비난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루퍼스가 제거된다고 해도 헨리에게는 당면한 과제가 있었다. 바로 돌아온 형, 로버트의 문제였다. 루퍼스가 죽고 헨리가 즉위한 몇 주일 후 로버트는 노르망디로 귀환하였다. 로버트가 단일한 앵글로 - 노르만 왕국의 지배자가 되려고 움직일 것은 불 보듯 뻔하였기에 헨리는 이에 서둘러 대비해야만 했고, 따라서 지지세력을 규합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유명한 자유헌장(Charter of Liberties)에서 영국인들에게 선왕의 치세와 같은 무법시대가 끝났음을 선포하고, 신민들의 권리를 존중할 것을 약속했다. 






 이렇게 내부를 달래는 동시에, 외부에 대한 문제 해결도 그 필요성 때문에 이루어졌다. 선왕인 루퍼스가 맬컴 3세를 살해한 일로 인해, 잉글랜드와 소원해져있던 스코틀랜드에 헨리는 손을 내밀었고, 맬컴 3세의 딸인 마틸다(Matilda of Scotland)와 혼인했으며 이후에는 자신의 딸인 시빌(Sibyl)을 스코틀랜드의 알렉산더 1세(alexander i of scotland)와 혼인시켜 양측의 관계를 돈독하게 했다. 또한 헨리는 안셀무스를 다시 켄터베리로 불러들였다. 


 이러한 준비 이후, 마침내 1101년 7월 로버트가 자신의 적법한 계승권을 얻기 위하여 포츠머스(Portsmouth)에 상륙했을때, 벨렘의 로버트(Robert of Belleme)와 그 동생들의 지휘 아래 있는 잉글랜드의 많은 대귀족들은 로버트의 편에 서서 모여들었다. 그러나 묄란의 로버트(Robert of Meulan)를 우두머리로 하는 루퍼스의 궁중 총신들은 헨리에게 충성을 다하였고, 잉글랜드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그 팽팽함 때문에 결국 양측은 서로 물러서서 협상을 해야만 했다. 헨리는 계속해서 잉글랜드의 지배자로 군림 하는 대신, 그의 형에게 연간 2,000파운드의 연금을 지불하기로 결정했다. 로버트는 십자군 원정 후 재정적인 부담을 안고 있었기에 이에 만족하였다.


 그리하여 헨리는 자신의 최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노련한 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다시는 비슷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그 첫번째 조치는 자신에게 반항한 벨렘 가의 중요한 요새지들을 점령하고 벨렘의 로버트를 추방하여 몰락시킨 행동이었다. 2년 후 그는 모르텡의 윌리엄(William of Mortain)의 토지를 몰수하였다. 그 무렵 로버트는 특유의 방종함 때문에 노르망디를 몰락시키고 있었고, 노르망디의 성직자들이 잉글랜드로 망명하여 헨리를 충동질 함으로서 그는 공격에 필요한 명분까지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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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활하고 꼼꼼한 헨리는 우선 노르망디의 봉건 영주들을 뇌물로 매수했고, 이웃의 군주들과 협정을 맺는 등 치밀한 사전 준비를 하였다. 모든것이 갖추어졌다고 여겨지자 그는 마침내 움직였고 1106년, 노르망디 남서부에서 치뤄진 탱슈브레 전투(Battle of Tinchebray)에서 원하던 승리를 이루어냈다. 헨리는 정복왕 이후 분열의 갈등이 이어지던 잉글로 - 노르만의 적법한 군주로 떠올랐고, 패배자가 된 로버트는 동생에게 사로잡혀 28년의 남은 일생을 포로로 지냈다.


 당시 헨리가 해결해야 했던 문제 중 하나는 안셀무스였다. 교회에 대한 국왕의 전통적인 권한은 당시 강하게 위협을 받고 있었는데, 개혁가들은 성직자들의 도덕적 - 정신적 생활의 정화를 원했을 뿐만 아니라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교회가 세속적인 지배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러한 세속적인 지배의 가장 혐오스러운 상징은 새로운 주교나 수도원장이 그들을 임명하는 세속군주로부터, 그 직을 상징하는 반지와 홀을 받는 의식인 '속인 성직임명'(Lay investiture)이었다. 


 헨리는 주교직과 수도원장직이 커다란 부의 원천이기도 하다고 여겨 세 차례에 걸쳐 성직임명권에 관한 권리를 요구했다. 하지만 교황은 그때마다 이를 거부했고, 안셀무스 역시 헨리로부터 교구를 받은 성직자들을 주교직에 임명하기를 거부했으며, 자신 역시 헨리에 대한 충성서약을 거부했다. 안셀무스는 1103년 4월부터 1106년 8월까지 두 번에 거쳐 망명을 떠나 헨리의 요구를 듣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이 논쟁은 탱슈브레 전투 직전 웨스트민스터 협약으로 간신히 해결되었는데, 이 조약으로 헨리는 속인 성직임명권을 포기해야만 했으나 대신 주교와 수도원장들은 축성하기 전 국왕에게 경의를 표해야 했다. 게다가 주교를 실제로 임명하는 데 있어서 여전히 왕의 의지는 계속해서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헨리는 교회를 지배하는 '형식' 은 포기하였으나, '실제' 를 유지할 수는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 문제가 있다면 그 대상은 헨리보다는 뒷날에 즉위하게 될 군주들이었다. 이 '성직서임투쟁'(Investiture contest)에 따른 격렬한 선전 전쟁 이후 개혁파들은 왕을 '속인' 여겨 그 이상의 인물이 아니며, 성직자들은 정신적인 것을 다루고 왕은 단지 물질적인 것만들 다루기 때문에, 속인으로서의 왕은 성직자보다 열등하다고 주장하였다. 교회는 도유식을 받은 왕이 신의 신성한 대리자라는 낡은 사상을 더 이상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헨리의 조치는 '왕위의 세속적인 성격' 을 인정하는 것이 되었다.


 일단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에서 헨리의 지위가 확고해지자 왕이 신민에게 약속한 자유의 이름은 한낱 헛된 선전에 불과했음이 명명백백해졌다. 그는 자유헌장에서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았다. 헨리는 관례적으로 인정된 것보다 더 많은 봉건적 수입과 부조금을 거둬들였으며, 다시 재정적 억압정책을 펴기 시작하였다. 또한 엄격한 삼림법을 실시하여 숲에서의 사사로운 사냥, 특히 사슴 사냥에 대해서는 무거운 벌금을 부과했다. 농민들은 숲에서 집을 수리할 목재와 땔감을 구하거나 딸기와 벌꿀 등 식료품을 얻거나 돼지를 먹이는 것과 같은 관례적인 권리를 잃게 되었다.


 권리를 지키려는 헨리의 노력은 그를 현란한 외교가로 만들었다. 로버트의 아들인 윌리엄 클리토(William Clito)는 자신이야 말로 노르망디 공의 합법한 상속자이며, 최소한 헨리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폈고 앙주 백작 폴크, 노르망디의 봉건 영주들, 그리고 프랑스의 루이 6세(Louis VI)가 이러한 주장에 힘을 실어주면서 노르망디 동부를 압박했기에 헨리는 이를 망상병자의 헛소리로 치부할 수 없었다. 


 이들에 대항하기 위해 헨리는 8명이나 되는 서출의 딸들을 모조리 이용했다. 그의 딸들은 북쪽으로는 스코틀랜드, 남쪽으로는 퍼쉬 백 로트루에 이르기까지 주변의 제후들과 결혼하게 되었고, '스코틀랜드의 마틸다' 의 딸 마틸다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Heinrich V)와 혼인하였다. 이러한 행위의 최종적인 결과는 헨리가 노르망디를 지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또한 단지 현상유지를 위한 투쟁이기도 했다. 불안정한 상황의 헨리에게 그것은 진정 중요한 문제였고,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으며, 1118년 ~ 1119년 사이에 그는 거의 패배할 뻔했다.


 그러나 헨리는 모든 것을 잘 정리했다. 1120년 무렵에는 불만에 찬 봉건 영주들도 모두 장악되었고, 윌리엄 왕세자는 앙주 가의 여자와 결혼했다. 프랑스의 루이 6세도 전투에서 패배한 후 최종적인 강화 조약을 맺었다. 노르망디의 방어에 몰두하는 것은 잉글랜드에서도 역시 심각한 문제였다. 『앵글로 - 색슨 연대기』의 1118년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왕 헨리는 프랑스 왕, 앙주 백, 플랑드르 백과의 전쟁 때문에 이 해의 전부를 노르망디에서 보냈다…… 잉글랜드는 이것 때문에 일 년 내내 숨돌릴 틈도 없이 각종의 막대한 세금을 납부하였다.' *2)


 왕이 오랫동안 잉글랜드에서 부재하고, 절박하게 돈이 필요하였던 상황이 통치기구의 정교한 발전에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기실 헨리는 자신의 치세 절반기간을 대륙에서 보냈기 때문에, 그의 부재를 뒷받침 해줄 정부 조직을 발전시키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이를 위해 헨리는 대사법관(Justiciar)이라는 새로운 관직을 만들어냈다. 대사법관은 행정의 우두머리로서 왕이 노르망디에 체재하는 동안 왕을 대신하여 왕령을 발부하고, 나라를 통치하는 대신이었다. 


 최초의 대사법관은 솔즈베리의 주교인 로저(Roger) 였다. 한때 노르망디의 무명 신부였던 그는 헨리가 사냥 채비를 서두르고 있던 어느 날, 아침에 미사를 짦게 끝냄으로써 그의 눈에 들게 되었다고 한다. 로저는 이후 헨리의 집사, 상서, 마침내 대사법관이 되어 정부의 기능을 확자앟고 절차를 개선했다. 헨리는 로저처럼 지체가 낮은 사람들을 잘 등용시켜 전문적 관료로 사용했다.


 헨리 1세의 통치 시기에 중요한 행정적 조치 중 하나는 바로 순회 재판 제도의 정착이었다. 헨리 이전에도 왕이 특별한 관심을 둔 사건의 재판을 주재하기 위해 지방의 법정에 특별 위원이나 판사를 파견하는 일은 종종 있었는데, 이제 순회판사들이 정상적인 정부 기구와 재판 기구의 일부가 되었으며, 이들이 주재하는 지방 법정은 곧 국왕 법정이 되었다.






 그러나 헨리가 조심스럽게 쌓아 올리던 탑은 1120년 11월, 화이트 쉽(white ship) 사건으로 산산조각 날 위기에 처해졌다. 사건은 헨리의 아들인 윌리엄 왕세자가 배를 타고 노르망디에서 잉글랜드로 이동하던 도중 발생했다. 그가 타고 있던 배인 화이트 쉽의 선장 토마스 피츠스티븐(Thomas FitzStephen)과 일부 선원이 항해 도중 술에 취해 있던 사이, 암초에 배가 부딫혀 침몰하고 말았던 것이다. 윌리엄 왕세자를 포함한 배에 타고 있던 승객들과 선원들은 300여 명 가량이 그대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왕국의 후사를 위한 헨리의 모든 계획은 월리엄 왕세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기에, 이는 대단히 치명적인 공백이었다. 헨리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왕세자가 사망한 지 석달도 되지 않아 새로운 부인과 결혼하였으나, 그렇게도 바라던 후사는 결국 태어나지 않았다. 헨리의 서출은 20여명이 넘었지만 게중 하나의 적자, 즉 그의 딸 마틸다만이 헨리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1125년 마틸다의 남편인 하인리히 5세가 사망하자, 헨리는 그녀를 자신의 궁중으로 불러들였고 대귀족들로 하여금 그녀를 앵글로 - 노르만 왕국의 상속자로 받아들일 것을 맹세하도록 했다.


 문제가 된 것은 또다시 윌리엄 클리토였다. 1127년 클리토는 플랑드르 백으로 인정되었는데, 만일 그가 플랑드르의 부를 이용해 노르망디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실현시키는데 이용한다면 헨리의 계획은 모두 물거품이 될 판국이었다. 헨리는 서둘러 앙주 백 폴크 5세에게 접근하여, 자신의 딸 마틸다와 폴크의 아들, 제프리 플랜태지니트(Geoffrey plantagenet)를 혼인시켰다. 1128년 6월 이 결혼이 이루어질 당시 제프리는 14세의 젊은이였다. 


 그러나 이후 헨리는 1135년까지 제프리, 마틸다와 공개적이면서도 격렬한 싸움을 벌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국왕인 헨리에게 충성한 귀족들은, 안 그래도 노르망디의 숙적인 앙주 가(家)의 사람에 대해 가지고 있던 반발이 더욱 커지고 말았다. 따라서 헨리는 자신의 사후 딸과 사위가 왕위를 계승하기를 계속해서 바라고 있음에도 불구, 이 과정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의심의 여지 없이 헨리는 아주 유능하고 성공적이었으며, 그 시대 최고의 정치가 중 한명이었으나 그런 헨리도 자신의 형제들을 파멸시켰던 왕위계승 문제의 어려움을 해결 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헌팅턴의 헨리(Henry of Huntingdon)는 왕을 '영원한 근심 속에서 고통받는 인물' 로 묘사하였다.


 '…그가 얻은 승리 하나 하나는 그가 획득한 것을 잃지 않도록 항상 걱정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는 가장 운이 좋은 왕처럼 보이지만, 실은 가장 비참한 군주였다.' *3) 







스티븐(1135 ~ 1154)


 헨리 1세가 사망했을 때, *4) 상속을 요구 할 수 있었던 계승자들은 앙주 혹은 메인에 있었다. 그러나 블로와의 스티븐(Stephen of Blois)은 그의 불로뉴(Boulogne) 백령에 있었고, 그 위치에서 잉글랜드의 남동부까지는 단 하루 밖에 걸리지 않는 길이었다. 


정복왕의 딸 애덜라와 블루아 백작 에티엔의 셋째 아들이었던 스티븐은 부친이 1차 십자군 원정 중 세상을 떠난 이후 삼촌인 헨리 1세에 의해 양육되었으며,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및 불로뉴 지방의 방대한 영토를 물려받았다. 헨리는 스티븐에게 땅을 물려주면서 마틸다의 왕위 계승을 돕도록 다짐시켰고, 그는 다른 많은 대귀족들과 함께 헨리의 딸이자 자신의 6년 연상 사촌, 마틸다를 왕위계승자로 지지할 것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헨리의 사망과 이후의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듯 하자, 스티븐은 일순간에 서약을 뒤집고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잉글랜드 해협을 건넜다.


 스티븐은 지리적 여건을 바탕으로 기선을 잡을 수 있었다. 처음에 런던인의 지지를 확보한 그는, 동생인 블로와의 헨리(Henry of Blois)가 주교로 있던 윈체스터로 향했다. 스티븐은 헨리의 도움으로 윈체스터에 있던 국고를 장악하였고, 솔즈베리의 로저로부터 그의 왕위에 대한 주장을 인정받았다. 남은 일이라고는 켄터베리 대주교를 설득시켜 도유식(塗油式)을 거행, 그에게 왕관을 씌어주도록 하는 일뿐이었다. 


 애시당초 앙주 가에 대해 대부분의 귀족들은 반감이 강하였고, 죽은 헨리의 충신들조차 헨리의 생전 벌어진 분쟁으로 인해 앙주 가의 일원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었다. 또한 여자의 왕위계승은 전래가 없던 일이었다. 마틸다와 앙주 가에 대해 불만이 있던 많은 사람들은 기꺼이 스티븐을 왕으로 만들어 주었다. 스티븐과 그 지지자들은 과거 마틸다에게 행한 충성서약은 강제로 행해졌기 때문에 무효라고 주장했으며, 죽은 헨리는 임종 시에 자신의 마음을 바꾸었다는 허위사실을 유포함으로서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마침내 1135년 12월 22일, 스티븐이 웨스트민스터에서 도유식을 치루게 되면서 그는 적법한 군주로 인정받게 되었다.


 앵글로 - 노르만의 정치적 구조는 스티븐을 강력한 위치에 놓이게 만들었다. 잉글랜드 군주의 의사를 노르만 대귀족들은 거스르기 힘들었는데, 만일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면, 그들이 잉글랜드에서 가지고 있는 토지는 몰수당할 위험이 있었다. 따라서 특히 몰수당할 토지를 많이 가지고 있는 대귀족일수록 스티븐을 지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마틸다와 제프리는 앵글로 - 노르만의 가장 강력한 대귀족들이 자신들을 반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스티븐의 통치 개시 후 첫 일년 반은 아주 평화롭게 지나갔으며, 사실 노르만의 군단이 잉글랜드에 상륙한 이후 가장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스티븐은 유능한 군 지휘관이자 용감한 기사였으며, 순진하고 매력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는 혼란기의 군주에게 필요한 책략과 노련함, 결단력과 확고함이 부족했고, 우유부단한 성격이었다. 그가 용병으로 사용하던 플랑드르인들이 잉글랜드의 귀족들을 못살게 굴면서, 그를 지지하던 귀족들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확실하게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글로스터의 로버트(Robert of Gloucester)가 1138년의 여름, 자신의 이복 누이동생 마틸다 편에 가담하였을 때였다. 처음 스티븐은 몇차례 승리를 거두었지만, 자신의 동생인 블로와의 헨리를 화나게 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스티븐은 그를 켄터베리의 대주교로 임명하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전왕의 시대부터 활약했던 로저를 비롯한, 아주 영향력 있는 세 사람의 주교를 체포하자 블로와의 헨리는 교회의 자유가 침해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1139년, 스티븐은 손만 뻗으면 마틸다를 사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지만 이를 "기사도에 어긋나는 비열한 행위" 로 여기고는 그녀가 브리스틀에 있었던 글로스터의 로버트에게 합류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이로인해 잉글랜드에는 두 개의 궁정이 생기게 되었고, 내란이 발생하게 되었다. 로버트와 마틸다는 서부 잉글랜드의 대다수를 차지했고 1141년 스티븐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자 이에 합류하여 그를 공격했다. 2월, 스티븐은 불리한 상황에서 무모하게 전투를 치루었고, 피신할 수도 있었지만 피신하지 않고 계속해서 용감하게 싸웠다. 그 결과 그는 포로가 되어 브리스틀의 감옥에 갇혔다.


 이리하여 스티븐의 정부는 무너지고 말았다. 교황의 사절로 활동하고 있던 블로와의 헨리는 공공연하게 마틸다의 편을 들었기에, 그해 여름 마틸다는 의기양양하게 런던에 입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모든것이 끝나기 전부터 너무 거만하게 행동했다. 마틸다는 교황이 제시한 평화안을 일축하였고, 무모하고 고압적인 행동으로 런던의 시민들을 분개시켰다. 또한, 일부 귀족들에게는 화려한 대관행사를 위한 거금을 요구하기도 했다. 런던 시민들은 무기를 들고 그녀를 옥스퍼드로 쫗아내었으며 결국 마틸다는 잉글랜드의 여왕이 되지 못했다.


 몇달 뒤, 글로스터의 로버트가 왕의 군대에게 사로잡혔다. 그녀는 마틸다 진영의 핵심 인물이었기에, 마틸다는 스티븐을 포로로 잡고 있다는 압도적인 위치를 포기하고 두 명의 사내를 상호교환 할 수 밖에 없었다. 1141년 9월, 마틸다는 윈체스터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했으며 이듬해 12월에 이를 즈음에는 옥스퍼드 성 마저 지킬 수 없었다. 그녀는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꾸준히 저항을 했으나 세력은 점차 약해져갔다.


 노르망디에서는 앙주의 제프리가 지속적으로 노르망디에 압력을 가해 이익을 챙기고 있었지만, 그는 잉글랜드의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이후 싸움은 소강상태로 전개되었다. 당시의 전쟁기술은 성곽을 포위하는데 한정되어 있었고, 이런 상태에서 급격히 승부를 내려면 양측의 전력차이가 압도적이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1147년 10월, 글로스터의 로버트가 사망했다. 이에 낙심한 마틸다는 1148년 초에 잉글랜드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녀는 잉글랜드의 첫 여왕이 될 완벽한 기회를 잡았으나 자신의 오만함으로 놓쳐버린 것이다. 그 사이에 앙주의 제프리는 1150년 노르망디를 손아귀에 집어 넣었으나, 이를 아들 헨리에게 넘겨준 채 마흔살도 되지 못해서 사망하였고 헨리는 사방에서 수많은 적들과 싸워야할 처지에 놓였다. 즉 아퀴테느에서, 노르망디에서, 앙주에서는 반란군과, 그리고 잉글랜드에서는 스티븐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노르만의 연대기 작가는 헨리가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헨리가 대담하게도 잉글랜드로 건너가 스티븐과 대결하기로 한 것은 동시대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헨리에게는 거의 희망이 없었지만, 지쳐있는건 스티븐도 마찬가지였다. 마틸다가 물러난 이후 스티븐은 명목상으로 잉글랜드 왕국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지만 오랜 전쟁에 지친 탓에 혼란을 극복하고 귀족들을 중재할 힘도, 무엇보다 그럴 의지도 남아있지 않았다. 스티븐의 소박한 바램은 어떻게든 왕위를 지켜 자신의 아들인 외스타슈(Eustace)에게 넘겨주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1153년 8월, 스티븐의 마지막 희망도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외슈타슈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당했던 것이다.


 스티븐의 둘째 아들 윌리엄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전혀 할 수 없었다. 그는 상황을 인정하고 협상으로 일을 해결하기로 했다. 양측의 귀족들은 모두 질질 끄는 전쟁에 대해 염증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으므로, 협상의 여지가 생기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1153년 12월에 체결된 조약으로 스티븐은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잉글랜드의 국왕으로 군림할 수 있게 되었으며, 헨리는 그의 후계자가 되었다. 스티븐의 아들인 윌리엄은 스티븐이 국왕이 아닌 귀족의 자격으로 가지고 있던 영지를 상속하게 되었다. 


 본질적으로 이 조약은 1141년 마틸다에게 제시되었던 조약의 재판이었다. 오직 마틸다의 관용스럽지 못한 성격 탓에 잉글랜드는 12년이라는 짦지 않은 세월동안 더 내란을 겪어야만 했다. 스티븐과 마틸다가 서로 왕위를 요구하며 적대하고, 대영주들이 제각기 어느 한쪽을 편들어 맞서 싸운 이 기간은 혼란과 무질서, 폭력과 협잡이 무성했던 시기로 지적되어 왔다. 피터버러(Peterborough)의 한 수도사는 그 시기를 '하느님과 천사들이 잠자고 있던 긴 19년의 겨울' 이라고 기술했다.


 "영주들은 그들의 성을 축조하는 일에 가련한 백성들을 혹사시켰으며, 그 일이 끝난 후에는 악마와 악당들로 성을 채웠다. 그들은 재산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금은을 빼앗기 위해 그들을 감옥에 가두고 이루 말 할 수 없을만큼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고문했다." *5)


 물론 내전이 주로 서부 지역에서 일어났고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기구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기에 이러한 표현에는 어느정도 과장된 점이 있기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소란스럽고 그다지 유익할 것 없는 혼돈의 계절이었음은 분명하다.  


 스티븐은 이제 아무런 도전도 받지 않고 자신의 왕국을 지배할 수 있었으나, 그는 지쳐 있었다. 또 오랫동안 살지도 못했다. 1154년 10월 25일 그는 사망했고, 자신의 아내와 큰아들이 묻혀 있던 페이버셤(Faversham)의 수도원 묘 옆에 묻혔는데, 이 수도원은 그들이 세운 것이었다. 그는 유능한 군대 지휘자이며 용감한 기사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장점인 군사적 능력을 너무 과신해다. 또한 그가 왕위계승문제라는 난국에 직면한것은 사실이나, 그 점은 그의 선대 왕들도 마찬가지였다. 앵글로 - 노르만의 역사에서 왕위계승분쟁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이를 극복하지 못한것은 그의 책임이다.


 블로와의 스티븐은 노르만의 어떤 왕보다도 매력적인 성격을 가진 왕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능숙함이 없었다. 게다가 다른 노르만 군주들이 노르망디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사실과는 달리, 그는 자신의 통치기간 중 1137년 단 한번을 제외하고는 노르망디에 방문하지 않았다. 앵글로 - 노르만 귀족들의 '해협 양쪽에 걸친 구조' 라는 관점에서 볼때 이는 분명히 잘못이었다. 이렇게 보면, 스티븐은 너무나 '영국적' 인 군주로 행동하여 실패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 김현수, 이야기 영국사 pp.109 

*2) 옥스퍼드 영국사 pp.148

*3) Ibid pp.148

*4) 장어를 과식한 탓이라고 한다. ─ 영국의 역사, 나종일 pp.105

*5) Ibid p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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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2Pac | 작성시간 13.07.29 장어를 과식해서 사망했다? 특이한 사인이네요.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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