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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영국의 역사 : '무딘 칼(Soft Sword)' 존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7.29|조회수422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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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1199 ~ 1216)



 사자심왕은 적자가 없었고, 그가 죽었을 때 거대한 왕국의 각 지역은 그들 나름대로의 후계자들 선출하였다. 즉 잉글랜드와 노르만의 대귀족들은 존을 선택하였고, 앙주와 메인, 그리고 툴루즈는 당시 12살 된 브르타뉴의 아서를 선호하였으며, 아키텐은 엘레오노르가 맡고 있었다. 그녀는 12살 된 소년보다는 리처드의 막내 아우를 후계자로 지지하고 있었다. 


 존은 재빨리 루앙에 나아가 노르망디 공의 지위를 차지하고, 이어 런던으로 건너가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했다. 1200년 5월까지 존은 아서를 내몰고 앵글로 - 노르만의 새로운 군주로 군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프랑스의 존엄왕에게 허락을 받고 나서야 이루어진 일이었다. 존엄왕은 1200년 1월 르 굴레 조약(Treaty of Le Goulet)을 통해 두둑한 보상을 존에게서 얻어낸 후에야 브르타뉴의 아서를 돕는 일을 그만두었고, 프랑스 내 영지에서 리처드가 보유했던 지역에 대한 존의 상속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협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존의 아내는 글로스터의 이자벨(Isabel, Countess of Gloucester)이었지만 그녀는 아이를 만들지 못했고, 존은 그녀와 이혼하고 난 후 1200년 앙굴렘의 이자벨(Isabella of Angouleme)과 재혼하였으며, 그녀의 이름으로 라 마르쉬(La Marche) 백령에 대한 상속권을 주장하였다. 이 결혼은 전략적으로 그에게 이득을 가져다 주었으며, 만일 위그 드 루지냥(Hugh de Lusignan)에게 적절한 보상을 해주었다면 모든 일이 잘 되었을 것이다. 이자벨은 본래 위그의 약혼녀였고, 루지냥 집안 역시 라 마르쉬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었다. 위그는 사건을 그들 공동의 영주인 프랑스의 존엄왕에게 제소했고, 존엄왕은 존을 자신의 법정에 소환했다. 존은 출두를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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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목상 존은 프랑스 왕으로부터 봉토를 받았기에, 존엄왕 필리프는 프랑스 내에서 존이 상속한 모든 영지를 몰수한다는 선언을 내릴 권리가 있었다. 이리하여 플랜태저넷 왕가와 카페 왕조의 군주는 또다시 분쟁의 소용돌이에 얽히게 되었다. 과거 1152년 헨리 2세는 유사한 선언을 실행에 옮기려는 루이 7세에 대항하여 성공을 거두었으나, 1203 ~ 1204년 존은 그의 아버지가 성공하였던 그 곳에서 실패를 맛보았다. 존의 대응 자체는 기민했다. 그는 르망을 떠난 이틀 동안에 80마일의 거리를 내달려 프와투의 미라보(Mirabeau)에서 아서를 비롯한 약 200여명의 영주들을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문제는 그 후에 벌어졌다.


 존은 사람들을 다루는 요령이 없었다. 그는 포로 중 20여명을 굶어 죽게 했을 뿐만 아니라, 아서를 지하 굴에 처넣은 뒤 취중에 그를 살해하고 시체를 센(Seine) 강에 버렸다는 ─ 상당히 그럴듯한 ─ 소문이 퍼져나가며 르와르 강 일대와 브르타뉴 지방의 지지자들을 실망시켰다. 의심과 공포가 만연한 상황에서 존은 효과적인 방어조직을 구축할 수 없었다. 1203년 12월 그가 항복하고 잉글랜드로 철수하자, 존엄왕은 노르망디, 앙주, 메인, 투레인을 공격하였으며 로세를 제외한 프와투의 전 지역을 유린하였다. 1204년까지 프랑스 왕은 노르망디와 앙주, 브르타뉴를 차지하였으며 아키텐의 일부를 제외한 존의 모든 프랑스 영토를 손아귀에 집어 넣었다. '무토지자' 라는 존의 별명은 이제 '무딘 칼(Soft Sword)' 이라는 굴욕적인 호칭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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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들의 묘사에 따르면 존은 실로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5피트 남짓한 작은 키의 이 군주는 큰 눈과 긴 곱슬머리, 맵시 있는 콧수염을 지녔지만 아버지 못지 않게 여색을 탐했으며 천박하고 게으르며 욕심 사납고 이기적인, 게다가 광포하며 고집이 센데다 의심 많고 잔인하고 사악하고 부도덕하다는 그야말로 표현 할 수 있는 모든 악덕을 모두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게다가 그는 신앙심이 빈약하여, 성년이 된 이후에는 영성체를 마다하기 일쑤였으며, 주교의 설교 도중에 식사를 하고 싶다고 소리치는가 하면 주머니 속의 동전을 찰랑거리는 등 무례한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


 특히 필리프 2세의 지원 아래 정당한 왕위계승권을 주장한 아서를 사해한 혐의 말고도, 그는 총애한 신하가 어쩌다 그의 비위를 건드리자 그 아내와 아들을 윈저성의 지하 굴에 가두어 굶어 죽게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존의 개인적인 면모에 대한 이런 극악한 평가는 교회에 대한 존의 무례한 태도에 격분한 교회 측 연대기 작가들의 손에 지나치게 과장되고 왜곡된 점이 없지 않다. 굳이 말하자면 그는 무능하다기보다는 유능한 쪽에 가까웠다. 존은 총명한 이해력과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엇으며 책 읽기를 좋아했고 꽤나 유식했다.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웨일즈,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등에 대한 지배권 확장은 그의 군사적 능력이 형편없는 수준은 아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특히 존은 해군력을 강화하고 정비하는데 상당한 공을 들였다.


 행정 면에서의 존은 매우 부지런한 군주였고, 끊임없이 국내를 돌아다니며 각지의 실태를 파악하는 한편, 왕 자신의 궁정에서 몸소 소송사건을 심문하곤 했다. 그래서 당대의 영국인들 사이에서 존은 괜찮은 '재판관' 이라는 평판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성급하고 변덕스러운 데다가, 욕심 많고 고집이 세며 냉혹한 위인이라는 사실 자체는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는 성직자들을 거칠고 경솔하게 다루었으며, 봉건 귀족들에게 갖가지 봉건적 부담을 옭아냈다. 법률가나 상인, 기사나 도시민들 또한 그의 착취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말하자면 존은 사람을 다룰 줄 몰랐다. 스스로 무능하지만 위대한 군주가 있는 반면에, 개인적으로는 유능하지만 실패한 군주도 있는 법이라면 존은 후자에 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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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에서 존의 치세 초기는 비교적 안정되고 평화로운 편이었다. 그것은 존의 능력이라기보다는 주로 대사법관이자 켄터베리 대주교였던 휴버트 윌터(Hubert Walter)의 유능한 관리 덕택이었다. 1205년 그의 죽음은 잉글랜드에 커다란 손실을 안겨왔는데, 그의 뒤를 이을 켄터베리 대주교의 선임 문제는 이후 7년간 존이 교황과 대립을 빚은 주된 분쟁거리가 되었다. 


 존은 자신에게 고분고분했던 노리치 주교 존 드 그레이(John de Grey)를 적임자로 생각했지만 켄터베리의 수도사들은 은밀히 그들의 부원장인 레지널드(Reginald)를 선출하여 교황의 승인을 받으려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존은 수도사들에게 압력을 가하여 노리치 주교를 선출케 했으나, 때마침 속권에 대한 교권의 우위를 주장하고 나선 교황 이노센트 4세(Innocent IV)는 1206년 양측의 후보를 모두 물리치고 수도사들로 하여금 더욱 명망이 높은 신학자인 잉글랜드 출신의 스티븐 랭턴(Stephen Langton)을 선출케 했다. 존은 이를 거부하고 랭턴의 이글랜드 입국을 막았으며, 이에 대해 교황은 1208년 잉글랜드 내에서의 성무 금지를 명령하고 급기야 존을 파문에 처했다. 


 이에 대한 앙갚음으로 존은 반대파 주교와 성직자들의 재산을 빼앗았다. 존도 세속사회 전반도 파문 사태를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존은 오히려 교회의 재산을 뻬앗으면서 그의 당면한 재정적 어려움을 완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1212년, 귀족의 반란과 더불어 교황이 존의 폐위를 선고하고, 존엄왕에게 그 집행을 위임하자 존은 파문당한 왕이 반란과 침입에 속수무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단 결전을 앞두고 편은 한명이라도 더 많아야 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랭턴을 대주교로 받아들이고, 잉글랜드와 아일랜드를 교황에게 헌납한 뒤 교황의 봉토로서 다시 돌려받았다. 






 이제 모든것은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려는 존의 노력에 대한 결과에 달려 있었다. 만일 그가 오매불망한 숙원인 빼앗긴 프랑스 영토를 되찾는데 성공한다면 그는 성공한 군주로 남을 것이고, 이를 성공시키지 못한다면 실패한 군주로 남게 될 것이었다. 존은 노르망디를 상실한 후 방어를 위해 해군력을 강화하였으나, 막대한 금액이 소요된 군사력의 정비는 결코 방어를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는 1206년 가스코뉴(Gascogne)에 대한 원정을 시도했으며, 1209년에는 독일 황제와 동맹을 맺었고, 1213년에는 브라방(Brabant) 및 플랑드르의 제후들과 연합했다. 잉글랜드에서 거두어진 막대한 금액이 이들 제후들의 수중에 흘러들어 왔고, 존엄왕에 대한 공격 계획이 용의주도하게 짜여졌다. 계획대로 전개된다면 존 자신은 남서부로부터 쳐들어가고, 독일의 오토 4세(Emperor Otto IV)와 연합군은 북서부로부터 공격해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은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프와투 지방의 영주들은 프랑스 왕과 싸우려는 존을 좀처럼 따라나서려 하지 않았으며, 결국 존은 라 로셸(La Rochelle)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존엄왕 필리프는 자신의 병력 전부를 독일 황제와 대결하는데 집중시킬 수 있었다.






만일 말에서 떨어진 필리프가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면, 존을 괴롭히던 문제는 모조리 해결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부비뉴 전투(Battle of Bouvines)에서 존엄왕은 연합군을 괴멸시키는데 성공했고, 이는 영토를 회복하려는 존의 소망을 영원한 불가능으로 만들어버렸다.


 국외의 승리는 국내의 문제를 모두 해결시킬 수 있을 방안이 될 수도 있었으나, 일단 그것이 실패하자 내부의 문제는 치명적으로 보였다. 존이 노르망디를 상실한 순간부터 그는 어쩔 수 없이 스티븐의 통치 이후 가장 오랫동안 잉글랜드에 머물게 된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항상 그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반란을 기도하고 있다고 항상 의심하는 군주에 대해서 사람들은 별다른 기쁨이나 이득을 얻을 수 없었다. 


 그 유명한 대헌장(Magna Carta)을 유도한 사건들은 존이 존엄왕에 대한 공격을 계획하던 1213년 여름, 세인트 폴 성당에서 이루어진 영주들의 모임에서 시작되었다. 이 모임에서 스티븐 랭턴은 헨리 1세의 대관식 헌장을 낭독했는데, 그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자유헌장이었다. 일 년 뒤 북부 출신을 주축으로 한 영주들은 존이 요구한 면역세의 납부를 거부했으며, 1215년 초에는 무장을 갖추고 스탬퍼드에 집결한 뒤 런던으로 향했다. 5월, 일부 시민들이 성문을 열어 주면서 반란군은 런던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본래 이 반란은 대영주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일으킨 봉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사태가 커지며 이내 중소 귀족과 교회의 도시들이 합세했으며, 여의치 않음을 깨달은 존은 영주들이 진을 치고 있는 스테인즈(Staines)와 윈저 중간에 있는 템즈 강변의 러미니드 목장에서 영주들과 만나는 데 동의하였고, 바로 이 곳에서 대헌장에 서명했다.  



King John signing the Magna Carta



 대헌장은 본질적으로 봉건 계층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봉건적 문서였다. 그것은 상속세르 제한하고 후견권의 남용을 금지하고 면역세와 보주금을 부과하는 데 자문회의의 동의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봉건 영주들의 권익을 보장하는 조항들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가지 중요한 요소들이 있었는데 첫째, 그 속에는 교회의 제 권리와 도시들의 특권적 자유를 보장하는 조항들이 들어있었다. 둘째, 그것은 헨리 2세 시대의 여러 법적 개혁을 인정하고 확인했다. 즉, 국왕은 정당한 재판권을 어느 누구에게 매도하거나 거부하거나 지연시켜서는 안 되며, 보통법 법정을 고정된 장소에서 열어야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유민은 그와 동일한 신분의 사람들에 의한 합법적인 판결이나 나라의 법에 의하지 않고는 체포되거나 투옥되거나 재산을 몰수당하거나 추방할 수 없다고 규정했다.


 당대에는 이것이 말장난과 같은 개념이었다. 이러한 규정들은 오직 자유민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었기에, 농노가 영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시절에는 큰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농노제가 서서히 사라져감에 따라 이러한 조항들은 보다 더 중대한 의미가 되었다. 따라서 대헌장의 중요성은 당대보다는 후대에 있었다. 후대인들에게 대헌장은 국왕이 법의 지배하에 있다는 원칙을 천명한 점에서 의미를 지녔다. 존의 변덕스럽고 자의적인 통치행위가 영국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왕을 법의 지배하에 놓이게 했던 것이다. 이제 국왕은 법을 어길 수가 없었다. 그들은 국왕으로 하여금 법을 어기지 못하도록 하는 기구, 즉 영주들로 구성되는 25인 위원회의 설치 조항까지도 대헌장에 부과했다.


 그러나 대헌장을 마땅찮게 생각하는 존에게 구실을 준 것은 오히려 영주들이었다. 권력을 잡은 영주들은 방자하고 교만해져 평화를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들 중에는 자기 성의 방비를 강화하고 분쟁을 일으키고 국왕의 영지를 침범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대헌장의 조항들을 실행하려는 국왕 관리들읠 방해하고 해치는 자도 있었으며, 무술 시합을 구실로 계속 무장을 유지하기도 했다. 그들은 전쟁을 바라였고, 심지어 새로운 왕의 선출을 거론하기까지 했다. 


 존은 과거 자신의 적이었던 이노센트 3세에게 도움을 구했다. 교황은 국왕을 괴롭히고 왕국을 어지럽히는 자들을 파문에 처하라고 명령을 내렸으며, 스티븐 랭턴이 머뭇거리자 그를 해임하였다. 8월 20일 교황은 대헌장의 무효를 선언하고 12월에는 거역하는 영주들 30여명을 파문에 처했다.


 그러자 반란자들 역시 외부에서 조력자를 구했다. 그들은 존엄왕의 아들 루이에게 잉글랜드 왕위를 제안하면서 진공을 권유했고, 루이는 겨울 동안에 두 차례에 걸쳐 소규모 군대를 파견했지만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존은 잉글랜드 서남부 지방의 반란을 모조리 진압하고 세력을 잡은 뒤, 대륙에서 불러들인 용병의 힘을 빌려 북부와 동부 일대의 반란을 물리치고 런던을 제외한 잉글랜드 전역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이듬해 5월, 루이의 군대가 상륙함으로써 전세는 일변하였다. 여러 성들이 굴복하고 많은 이탈자가 나타났으며, 존의 이복동생인 솔즈베리 백을 포함한 대영주들이 루이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서쪽으로 물러난 존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은 후 이스트 앵글리아 지역으로 쳐들어갔으나, 병에 걸려 링컨셔로 되돌아가는 도중 밀려드는 유사(流沙)에 마차가 휩쓸려 많은 재화와 장비를 모조리 잃어 버렸다. 기진맥진한 존은 간신히 뉴워크에 도착했으나, 10월 18일 마침내 실패로 얼룩져 있는 인생을 마무리 지었다.


 행정적인, 그리고 법적인 세세한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존은 일부 근대의 역사가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 이러한 문제는 거의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존에 대한 기록 탓에, 그를 선왕들보다도 더 바빴던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가 있다. 1199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상서청의 기록 때문에 역사가들은 왕실정부의 일상사에 대한 연구를 존의 시대부터 시작할 수 있고, 그 결과 가끔 존이 아주 유능하다는 인상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강력한 신민을 다스리는 데 중요한 문제들에서 그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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