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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영국의 역사 : 헨리 3세와 시몽 드 몽포르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7.31|조회수708 목록 댓글 0




헨리 3세(1216 ~ 1272)



1216년 9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헨리 3세는 1272년까지 56년의 기나긴 시간 동안 왕위에 앉아 있었는데, 치세의 처음 11년 동안은 미성년기였다. 그러나 유능하고 충실한 두 섭정의 지도와 보호하에 국내의 정치는 오히려 안정되고 질서가 잡히게 되었다. 존의 아홉 살 난 아들의 이름으로 통치하였던 섭정자문회의는 존의 치세에선 찾아볼 수 없었던 육지와 해상의 전쟁에서 승리를 조국에 안겨주었다. 이를 가능케 한 사람은 이름 높은 기사, 윌리엄 마셜(William Marshal)이었는데, 마셜은 프랑스군을 링컨에서 패배시키고(1217년 5월), 도버 성을 지켜냈으며, 샌드위치에서 프랑스 해군을 격파함으로서 새 왕의 앞길에 놓인 당면한 위협을 제거하였다. 


 이로 인하여 루이에 대한 지원은 급격히 줄어들었으며, 1217년 9월, 그는 램버스 조약(Treaty of Lambeth)을 통해 노르망디를 잉글랜드 왕실에 되돌려준다는 약속의 대가로 약간의 보상금을 받고 잉글랜드에서 물러났다. 1232년이 되어서야 친정(親政)을 비로소 시작한 헨리는, 그러나 미성년의 왕이 통치를 시작할 때 주로 보이는 사회의 불안정을 목격하지는 않았다. 헨리가 20살이 되기까지 그를 정치적으로 보호한 사람들, 특히 섭정 휴버트 드 버러(Hubert de Burgh)는 자신의 임무를 아주 잘 수행했다. 그는 사실상 오늘날의 수상과 같은 대사법관의 직무를 담당했다.


 이 시기 대부분의 권력 투쟁은 섭정자문회의 내에서만 발생했다. 그 과정에서 무력간의 투쟁은 극히 드물었고, 있었다 해도 아주 짦았다. 일련의 회유적인 조치의 일환으로 대헌장이 수정되어 두 차례 다시 반포되었는데, 대자문회의의 동의 없는 과세의 금지나 25인 위원회의 구성 등 왕에게 불리한 규정들이 빠지게 되고, 내란기에 봉건 영주들이 신축하거나 점거한 성들을 다시 허물거나 국왕의 수중에 되돌릴 것을 지시한 조항이 들어가기도 했다. 한편 존의 치세에 잉글랜드를 떠난 스티븐 랭턴이 다시 켄터베리로 돌아왔으며, 국내 정치에 대한 교황의 영향력에 제약이 가해졌다.


 이처럼 무질서 상태에 빠져들 뻔했던 헨리 3세의 미성년 재위 기간은 마셜과 드 버러와 같은 섭정들의 활약으로 오히려 평화와 안정이 유지된 시기였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귀족들은 잉글랜드 - 웨일즈의 문제에 골몰하는 동안, 왕의 해외에서의 상속분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럴만도 한것이 그들 누구도 푸와투와 가스코뉴에 토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1224년 그들이 국내의 분쟁에 휘말려 있을때 프랑스의 루이 8세(Louis Ⅷ)는 프와투에 침입하여 라 로셸을 점령하고 가스코뉴를 위협하였으며, 헨리 3세는 그들 선조들이 프랑스에 가지고 있었던 땅 중에서 오직 가스코뉴만을 소유할 수 있었을 뿐이다. 


 한때 잉글랜드는 '앙주 제국' 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고, 제국의 핵심은 대륙에 있었다. 그러나 존의 치세를 거쳐 1259년 파리 조약에 헨리가 서명함으로서, 왕실에 있어 잉글랜드의 비중은 극적으로 높아졌다. 그는 노르망디, 앙주와 프와투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였고 가스코뉴를 위해 루이 9세(Louis IX)에게 신서를 하였던 것이다. 현실적으로 볼때 파리의 조약은 헨리 3세에게 정치적인 성공을 가져다 주었으나, 루이 9세가 제시한 관대한 조건을 마지 못해서, 그리고 다른 어려운 문제에서 빠져 나오려는 희망에서 받아들였다. 헨리의 가장 큰 문제란 국내 정치의 어려움이었다.


 1232년 드 버러를 해임하고 실제적인 통치를 시작한 헨리의 치세는 대헌장 이전 왕의 권위를 되찾으려는 국왕의 의지와, 그의 통치행위를 자신들의 조언 아래 두려는 영주들의 견제 사이의 싸움으로 점철되었다. 불화의 원인이 된 것은 종종 헨리가 선택한 측근과 조언자들이었는데, 이들은 왕의 총애를 아주 많이 받는 자들이었다. 잉글랜드의 정책이 '잉글랜드에만' 치중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많은 총신들이 영국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사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다.  


King Henry III and his Parliament


 헨리가 총애한 조언자들이란 어머니인 앙굴렘의 이자벨과 왕비인 프로방스(Provence)의 엘러너, 그리고 외척과 처족(妻族)인 프와투 혹은 사부아(Savoie) 출신 외국인들이었다. 헨리는 아내인 엘러너와 아주 행복하게 결혼생활을 해왔으며, 그의 부인인 인척들에게 관대한 대우를 해주었던 가정적인 군주였다. 그리고 왕의 이복 동생인 루지냥 가(家) *1) 가 프랑스에서의 생활이 곤궁해지자, 헨리는 이들을 잉글랜드로 받아들였는데 이들은 모두 평판이 나쁘고 끊임없이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또한 헨리는 회계청과 국고보다는 왕실을 통해서 통치했고, 상서경(Lord Chancellor)이 관장하는 공적인 국새(Great Seal)을 놓아두고 따로 왕의 개인용 옥새(Privy Seal)을 새로 만들어냄으로써 영주들의 불안을 자아냈다. 게다가 헨리는 프랑스에서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1230년과 1242년의 원정은 야심에 넘쳤으나 영광스럽게 끝나지 못했다. 이 결과로 앞서 말한 파리 조약에 서명함으로서, 헨리의 원정은 플랜태지니트 왕조가 대륙에서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이 끝나버렸다는 사실만 새삼스레 확인시켜줄 뿐이었다. 영주들은 이런 전쟁을 바라지 않았으며, 불만을 잠재울 수 있었던 승리가 영영 날아가버림에 따라 왕과 영주들 사이는 더욱 악화되었다.


 따라서 1243년 드 버러가 사망할 무렵 헨리와 잉글랜드 영주들 사이의 관계는 오히려 존의 시대보다도 더 틈이 벌어져 있었다. 왕은 주변머리 없고 주책 없는 위인이 되었으며 이성과 여론의 소리에는 귀를 막아버렸다. 게다가 의심이 많았던 그는 고집 또한 센데다 변덕스러웠으며,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무능하다는 평판을 얻어 신민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지 못했다. 또한 왕은 예술을 사랑했다. 하지만 이는 궁전과 성을 축조하는 데 재물이 소모된다는 의미 밖에는 되지 못하였다.


 불경스러운 태도로 인해 교회의 격분을 샀던 존과는 다르게 헨리는 하루에 세번이나 미사에 참여할 정도로 신앙심이 두터운 군주였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의 대대적인 개축을 비롯한 여러 종교 시설의 건축에 목돈을 들이며 남다른 관심을 쏟았다. 헨리의 이 같은 신앙심은 그의 정치적 행위에 영향을 미쳤다. 





 교황 이노센트 4세의 당면한 과제는 강력한 황제 프리드리히 2세(Frederick II)에 대항하여 전 유럽에서 교황의 우월권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헨리는 잉글랜드와 유럽에서 이 야심만만한 교황의 수족 노릇을 자처했다. 그리하여 교황은 이탈리아인들을 비롯한 많은 외국인들을 잉글랜드 내의 여러 성직에 임명했으며, 잉글랜드의 성직자들은 교황의 외교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재정적 부담을 떠안아야 했다. 당연한 이치로, 이는 이전까지 교황의 충실한 양이였던 영국인들이 로마에 대한 반대자로 돌아서는 한 요인이 되었다.


 게다가 교황은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항하여 헨리의 작은 아들 에드먼드를 시칠리아(Sicily)의 왕으로 삼고, 그의 아우 리처드를 로마 황제의 후보로 밀자는 제안을 해오자 헨리는 이를 수락하고 ─ 시칠리아는 프리드리히 2세의 서자 만프레드(Manfred)가 보유하고 있었다 ─ 터무니없는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막대한 전쟁 비용을 잉글랜드의 성직자들에게서 거두어들이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런 약속을 이행할 만한 방도가 헨리에게는 없었다. 시칠리아 왕위를 얻기 위한 전쟁 비용과 황제 선출에 소요될 회유 비용을 지출하는것은 '잉글랜드' 에게는 아무런 이익도 되지 않는 것이었으며, 성직자와 영주들은 한 편이 되어 그들의 분노를 왕에게 토해내었다.


 그러나 약속 이행이 지연되자 교황은 잉글랜드에 대한 성무 금지와 파문으로 위협을 하며 압박해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256년 이래 3년 동안 냉해(冷害)와 큰 비로 흉년이 들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국왕은 자문회의를 멀리하였고, 그 대신 내실과 외국인들에게 점점 더 의존하면서 영주들의 불만 또한 가중되었다. 이와 같이 헨리가 성년이 된 이후 약 30년 동안 그의 실정으로 국민들의 불만이 커져갔는데, 마침내 이것은 또 하나의 내란으로 터져 나왔다. 


 교황의 협박에 다급해진 헨리는 귀족들에게 자문지원을 요청하였다. *2) 기회를 포착한 귀족들은 헨리가 대헌장에 준한 개혁안을 받아들인다면 재정 지원에 협조하겠다고 동의했다. 1258년 여러 영주들은 시몽 드 몽포르(Simon de Montfort)의 지도하에 따라 24명으로 구성된 *3) 대자문회의의 설치를 요구하였으며, 이에 따라 설치된 자문회의의 위원들이 무장을 갖추고 옥스퍼드에 모여 이른바 옥스퍼드 조항(Provisions of Oxford)의 승인을 왕에게 강요하였다. 






 이들을 이끌던 시몽은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 출신의 인물이었다. 1231년 레스터 백령의 상속자가 된 시몽은 의지가 굳고 유능한 군 지휘관이었으며, 또한 헨리의 매부이기도 했다. 헨리와 시몽 사이에는 불화와 화해가 거듭되었다. 여러 가지의 문제로 인해 왕의 격렬한 적대자가 되었던 시몽은 프랑스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개혁을 요구하는 잉글랜드 영주들의 지도자로서 헨리에게 커다란 압력을 가하였다.


 시몽의 주도로 헨리에게 강요된 옥스퍼드 조항은 네 가지 주요한 사항을 담고 있었다. 첬재, 주로 영주들로 구성된 15인 회의를 두되, 왕은 국정의 제반사에 관해서 이들의 권고를 따라야 하고 또 대사법관, 상서경, 재무관(Treasurer)을 이들의 지명에 따라 임명해야 한다. 둘째, 종전부터 내려오던 관직들이 회복되고 모든 세입은 왕의 내실이나 그 부속 기구인 의상실이 아니라 국고인 회계청에 납부되어야 한다. 셋째, 셰리프나 다른 국왕 관리들에 대한 불평을 심리하기 위해 주 법정에 4명의 선출된 기사가 참여해야 한다. 넷째, 의회(Parlia-ment)라 불리게 된 대자문회의를 일 년에 세 차례 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옥스퍼드 조항을 마련한 것은 어디까지나 소수의 유력자들이었으며, 그들의 투쟁은 여전히 존 시대에 빚어진 '헌장을 둘러싼 싸움' 의 계속이었지만 한 가지 중대한 차이가 있었다. 존의 시대에서는 국왕을 한편으로 하고, 이에 맞서 국민의 지지를 받은 영주들이 다른 한편이었던 데 비하여 헨리 3세 치하에서는 하층 기사들이 국왕과 영주들 사이의 대립에 끼어들었던 것이다. 영주들은 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셰리프에 대한 심문권과 같은 권익을 제공했으나, 그들은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하층 기사들은 영주들이 국왕으로부터 보장받은 것과 같은 특권을 자신들 영주들로부터 보장받기 위하여 대영주들의 영지에서도 마찬가지 개혁을 실행하도록 요구했다. 따라서 개혁을 외치는 범위는 위에서 아래로 더욱 내려오게 되었다. 


 이는 당시의 불만이 독단적인 태도를 보이는 국왕에 대한 영주들의 반발을 뛰어 넘어, '영국 사회' 내의 불만에 의해서 조성되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즉, 불만은 하급 기사들, 그리고 흉작으로 고통받고 있었던 중동부 잉글랜드 지방의 강건한 자유민 사이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또한 성직자들 사이에도 왕과 교황의 결탁에 대한 불만이 공공연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헨리는 교황의 봉신으로서의 지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교황은 독일 황제와의 투쟁에 소요되는 막대한 비용과 이탈리아인 부재 성직자들을 위한 성직록을 잉글랜드 교회에 떠맡겼다. 이것은 잉글랜드의 하위 성적자들 사이에 반감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들의 불만은 외국인에 대한 적의와 국왕에 대한 불신을 증대시켰다.


 또한 런던과 주요한 5항, 그리고 동부 해안 일대의 도시들에서는 도시의 지배자들에 대한 반감이 직인, 장인, 영세 상인들 사이에 퍼져있었다. 이들 여러 집단이 영주들의 불만에 공감하고 있었다. 시몽 드 몽포르의 깃발을 따르는 세력은 더욱 개혁적인 영주들, 좀 더 정치적 의식을 가진 기사들, 교황과 왕의 결탁에 반대하는 성직자들, 옥스퍼드 대학의 학생들, 그리고 그 밖의 민주적인 성향을 가진 민중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 시몽의 추종자들은 분명히 법이 국왕 위에 있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으며, 개혁을 신의 뜻으로 생각하는 종교적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국왕에게 옥스퍼드 조항을 강요한 영주들은 개혁의 시대가 오래 지속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그것은 2년도 못 되어 끝나고 말았다. 그것은 왕이 개혁의 프로그램을 외면했고, 이를 지적할 반대 세력이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개혁의 주체였던 시몽 드 몽포르의 독선이 큰 영향을 미쳤다. 시몽은 생각이 뚜렷하고 꼼꼼하며, 공정하고 이상주의적인 정치가였지만 이러한 사람들에게 종종 보이는 거대한 자기확신 탓에 고압적이며 독단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우둔한 왕을 윈저 성에 유폐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4)


 헨리는 왕비와 교황의 지원을 얻어 옥스퍼드 조항이 협박에 의해 강요된 것이었음을 선포하고, 영주들이 지명한 대사법관과 상서경을 면직시키고 시몽을 국외로 추방했다. 그러나 영주들은 이에 반대하지 않았다. 영주들 사이에서도 시몽에 대한 반발이 있었으며, 이때문에 시몽에 반대하는 유력한 집단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만일 헨리가 이 기회를 잘 이용한다면 국내에서의 질서를 회복하고 불평불만을 달래 영주들을 끌어안을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헨리는 잉글랜드의 왕권을 다지는 대신 프랑스에 진출함으로서 절호의 기회를 발로 차버리고 말았다. 대륙의 영토 수복에 대한 헨리의 모든 정책은 모조리 실패나 다름없었기에, 당연히 그 선택의 결과는 좋지 못한 악수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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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63년 젊은 영주들은 시몽을 다시 잉글랜드로 불러들였고, 전쟁이 눈 앞에 임박한듯 보였다. 그러나 양측 모두 아직 준비가 되어있지 못했기에 프랑스 왕 루이 9세의 중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나 루이는 헨리가 르와르 강 이북의 프랑스와 프와투 내의 모든 영지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잉글랜드 왕의 편을 들었고, 시몽은 이 결정에 반대하여 군대를 모아 루이스(Lewes)에서 왕에게 맞섰다.


 왕자 에드워드(Edward)는 훈련받지 못한 런던 시민들의 군대를 격파했으나, 이들을 너무 멀리까지 추격한 탓에 시몽의 반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싸움은 결국 시몽의 승리로 끝났고, 왕과 왕자 에드워드는 인질로 잡혀 감금당했다. 이제 시몽의 야심은 성공을 눈 앞에 둔 것으로 보였다. 그는 그의 동료들과 함께 9인 회의를 창설했다.


  그러나 시몽은 지나치게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1264년과 1265년 대자문회의를 소집하였다. 이때 시몽은 영주들과 주교들뿐만 아니라, 주의 기사들을 소집하였으며, 1265년의 경우에는 도시의 대표들까지 소집하였다. *5) 그는 중간 계층과 성직자들, 즉 기사들, 시민들, 주교들, 그리고 학자들 사이에서 지지세력을 구했던 것이다.


 시몽의 조치들은 시기상조인 것들이었다. 더 큰 문제는 이를 풀어가는 시몽의 방식이었다. 그의 성공, 불 같은 성품과 독단적인 방식, 그가 휘두른 권력과 추종자들의 국왕에 대한 지나친 공격 등은 시몽에 대한 많은 적대자를 만들어냈다. 그는 영주들의 지지를 잃게 되었다. 영주들은 왕의 뜻에 어긋난 통치를 불충이라 생각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영지 내에서 저질러지고 있던 비행에 대한 조사를 내심 두려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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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하여 왕자 에드워드가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Gilbert de Clare)의 도움으로 감시자들을 따돌리고 도망쳐 나오자 왕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모여들어 막강한 왕군을 형성할 수 있었다.  에드워드의 군대와 시몽의 군대는 1265년 8월 이브셤(Evesham)에서 대적했다. 적의 당당한 위세를 본 시몽은 패배를 직감하고 "우리의 영혼을 하느님께 맡기도록 하자. 우리의 육신이 그의 수중에 있으니" 라고 외쳤다.


 이후 벌어진 이브셤 전투(battle of Evesham)는 전투라기보다는 차라리 살육이었다(murder of Evesham, for battle it was none). 시몽의 마지막 말은 "하느님 감사합니다."("Thank God") 였다고 한다. *6) 전사한 시몽의 육신은 이리저리 잘려 잘려 그를 지지한 도시들에 보내졌으며, 공중에서 전시되었다. 잘려나간 목은 위그모어(Wigmore)의 로저 모티머(Roger Mortimer, 1st Baron Mortimer)의 처에게 보내졌으며, 그의 몸은 이브셤의 수도사들에 의해 매장되었다. 시몽 드 몽포르는 고위 관료들 사이에서는 반역자로 지탄받았지만 일반 민중들에게는 성자로 추앙 받았다. 그에 관한 전설과 기적담이 민중 사이에 퍼졌으며, 그에 관한 노래들이 여기저기에서 오래도록 불리워졌다. 자유를 위해 이브셤의 싸움터에서 죽은 시몽은 민중의 마음속에 사랑받는 순교자가 된 것이다.


 찢겨진 몽포르의 시체와 옥스퍼드 조항의 폐지는 일견 허망해보이나, 그것은 전혀 무의미한 만용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국사는 대자문회의에서 논의되어야 하고, 국왕과 영주들 사이에 협조와 견제가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생각이 잉글랜드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적어도, 왕자 에드워드 자신의 마음속에서는 뿌리내리게 되었다. 


 이브셤의 전투는 옥스퍼드 조항의 완전한 폐기를 의미했고 헨리 3세를 복위시켰다. 그러나 이제 나이 26세의 왕자 에드워드는 어깨에 부상을 입은 아버지를 대신해 국정을 맡았다. 아들 에드워드의 조언을 받은 헨리의 재위 마지막 7년은 좀 더 현명한 통치가 행해진 시기였다. 


 헨리는 개인적으로는 인정이 많고 교양이 있는 인물이었지만, 통치자로서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그의 인정은 자신의 주위 사람들에게 한정되었으며, 보다 많은 신민들을 포용하지 못했다. 외교나 군사문제에서는 소심함을 드러내기 일쑤였고, 때로는 비현실적인 면까지 보였으며, 의심 많고 고집불통이었다. 그는 예술적인 문화를 좋아했지만 스스로의 사치를 넘어선 무언가를 이루지는 못했다. 그는 앞서 즉위한 두명의 헨리에 비해 능력이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가지고 있는 그릇의 크기도 그 두명에 비해 형편없었다.


 헨리가 기력이 바닥 나 왕자 에드워드가 사실상의 통치를 하던 시기에, 그가 직접 나서서 적극적으로 시행한 유일한 일은 자신의 턱 밑에서 반란을 시도한 런던 시민들에 대한 극단적인 보복정책이었다. 이런 헨리의 보복정책이 시행되자 또다시 반란군들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다급해진 왕실은 에드워드의 삼촌인 콘월 백작 리처드를 비롯한 온건파들이 나서서 헨리를 설득했다. 헨리는 1266년 좀 더 유화적인 케닐워스 성명(Dictum of Kenilworth)을 정책으로 채택했으며, 이에 반란군도 화답차원에서 항복했다.



 

*1) 이들은 헨리의 어머니가 두 번째 결혼을 하여 태어난 그의 어머니의 자식들이었다. ─ 옥스퍼드 영국사 pp.164

*2) 심지어 헨리는 교황이 지고 있는 빚도 갚아줄 것을 약속하였다. 교황은 만프레드와 싸우는 데 이미 135,000마르크를 사용하고 있었다. ─ Ibid pp.164

*3) 이들의 반은 국왕이 지명하고, 나머지 반은 영주들 자신이 지명하는 형태를 그들은 원하였다. ─ 나종일, 영국의 역사 pp.130

 *4) 1258년 여름날, 헨리는 템즈 강을 내려오는 도중 폭풍을 만나 공교롭게도 시몽 드 몽포르가 거처하고 있는 더럼 하우스(Durham House)에 피하게 되었다. 시몽이 이제 폭풍우가 그쳤으니 안심하라고 말하자, 헨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난 뇌성벽력을 몹시 두려워 하지만, 이 세상 모든 뇌성벽력보다 분명코 그대를 더 무서워하네." ─ Ibid pp.132

*5) 이 모임이 흔히 최초의 의회로 일컫어져 왔으나 당시는 최고 입법기관으로서의 의회의 성격을 지니고 있지는 않았다. ─ Ibid pp. 132

*6) Sharma, Simon. A History of Britain. p.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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