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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역사(외전) : 잉글랜드의 스코틀랜드 침략 야욕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8.03|조회수486 목록 댓글 0



 스코틀랜드 문제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 종종 만나게 되는 민감한 주제란, 충돌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있을때 발생한다. 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병합 계획을 서술함에 있어서도 이러한 문제는 발생하게 되는데, 그것은 '사자왕' 윌리엄이 '사자심왕' 리처드 1세에게 돈을 주어 봉신의 지위에서 해방 된 후, 상당한 시간 동안 잉글랜드 - 스코틀랜드는 분쟁의 요소가 없었고, 에드워드의 치세 이후 잉글랜드 - 스코틀랜드의 분쟁이 격화되었기 때문이다. 즉, 에드워드 1세 치세 기간의 문제란 잉글랜드 - 스코틀랜드 문제의 시작이며, 출발점이며, 전부 다는 아닐지라도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세계를 지배한 19세기로부터 스코틀랜드 독립에 관한 목소리는 커지기 시작했고, 이는 20세기 양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본격화 되기 시작했다. 특히 1970년대에 시작된 석유 파동과 함께 북해(North Sea) 원전의 본격적인 개발은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중앙정부의 경제적 지원으로부터 벗어나 자립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게 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알렉스 섀먼드(Alex Salmond)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국민당(SNP)은 2013년 시점에서 의회를 장악하고 분리 독립에 관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1)


 따라서 이 문제는 결코 종결적인 이야기가 아닌, 이어지는 연대기의 시작이다. 이것이 바로 끝이 난 사건에 대해 객관성 있는 태도를 가질 수 없게 하는 문제를 만들며, 하나의 가이드라인이 제시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로 다른 시각을 살펴봐야 할 필요성을 만들어주고 있다. 그 양쪽의 개념 중 어느곳을 따라가느냐에 따라 사건은 독립 전쟁이 될 수도, 모반이 될 수도 있으며, 어떠한 경우에는 공정성을 지키려는 시도마저 비난을 받을 수 있다.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역사를 보는것은 그만큼 치열한 현상의 문제인 동시에, 그만큼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통사적 성격의 이 글에서 알렉산더 3세의 사망 이후 로버트 1세의 승리 무렵까지 스코틀랜드 문제에 대해 길게 언급하게 되는것은 그러한 이유 탓이다. 간단하고 간략하지 않은 이야기를 굳이 간략하게 만드는것은 이해에 있어 하등 도움이 될 것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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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3세의 사망과 에드워드의 개입


 바라보는 방향이 어느쪽이던 간에, 에드워드 1세의 치세는 스코틀랜드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에드워드의 스코틀랜드 정책은 알렉산더 3세(Alexander III of Scotland)의 어처구니 없는 죽음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선왕인 알렉산더 2세(Alexander II of Scotland)의 사망 이후 8살의 나이에 즉위했던 스코틀랜드의 군주는, 치세기간 무탈한 평화의 통치를 하였으나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스코틀랜드 분쟁의 모든 원인이 되었다.


 1286년 3월 18일, 알렉산더 3세는 에딘버러 성(Edinburgh Castle)에서 자신의 봉신들을 소집한 회의를 열었다. 회의가 끝나자, 왕과 신하들은 프랑스의 가스코뉴로부터 들여온 포도주를 마시며 즐거운 저녁 연회를 즐겼다. 포도주에 취기가 오른 왕은 에딘버러 성에서 약 20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킹혼(Kinghorn)으로 가서, 자신의 두 번째 부인인 요란데(Yolande of Dreux)에게 달려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날이 저물어 밖은 어둡고, 더구나 날씨는 사나워 비바람이 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의 봉신들은 날이 밝으면 출발하라는 현명한 조언을 해주었으나, 취기가 오른 군주는 이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세 명의 향사만을 대동하고 달메니(Dalmeny) 나루터로 길을 떠났다.


 나루터의 뱃사공은 비바람이 치는 날씨에 강을 건너는 행동이 얼마나 위험천만한지 설명했으나, 국왕은 "나와 함게 죽는것이 두려운가?" 라고 강권하여 억지로 배에 올라타고, 뱃사공은 어렵사리 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 현장에서 국왕을 맞이한 염전 관리인은 폭풍우 치는 밤에 길을 떠나는 일은 위험한다고 말하며, 자신의 집에 머물다 날이 밝으면 떠날 것을 권했으나 왕은 이를 거절하고 단지 두명의 안내자만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그들 일행이 2마일 정도 더 나아갔을때, 어둠 때문에 모두가 길을 잃고 말았다. 말의 본능에 의존하여 걸어가던 일행은 잠시 후 뿔뿔히 흩어졌고, 길을 잃은 국왕은 부인에게 가야만 한다는 일념 때문에 악천후 속에서 길을 헤메다 결국 말에서 떨어져 벼랑으로 굴러 목이 부러진 채 죽었다. 그의 시체는 다음 날 발견되었다. *2) 왕의 죽음은 그 자체로도 불운이었지만, 더 큰 문제는 그를 계승할 합법적인 남성 상속자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1057년 말콤 캔모어(Malcolm Canmore)의 통치로부터 알렉산더 3세까지 이어진 단일 왕조는 가스코뉴 산 포도주로 인해 종결되었다. 


 스코틀랜드의 역사를 뒤바꾼 이 운명의 밤에 대하여, 연대기 작가인 앤드루 윈토운은 이렇게 표현하였다.


 "우리의 황금 시기는, 역사를 진행하기 위하여 변화하였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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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산더 3세는 사망한 부인으로부터 2남 1녀를 출생하게 했으나, 그들은 아버지의 죽음 이전 사망한 상태였다. 두 번째 부인인 요렌테도 당시에는 자식이 없었고, 그녀의 임신이 상상 임신으로 판명나게 되면서 왕조를 계승할 직접적인 후손은 아무도 없었다. 가장 가까운 상속권자는 왕의 외손녀이자 노르웨이에 있던 '노르웨이 처녀 마가렛(Margaret, Maid of Norway)' 이었다. 그녀는 노르웨이의 에릭 2세와 알렉산더의 딸 마가렛 사이에서 태어난 소녀로, 외할아버지가 비극적인 최후를 당했을 당시 고작 3살이었다. 요렌테의 임신이 상상 임신이라는것이 밝혀지기 전까지 마가렛의 지위는 불안정 했으므로, 그 시기동안 스코틀랜드의 야심가들은 자신들의 손 안에 있는 카드를 세워보기 시작했고 게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로버트 브루스(Robert Bruce the competitor)와 갤러웨이의 존 벨리올(John Balliol of Galloway)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가렛을 후계자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스코틀랜드의 대표들은 사절단을 구성하여 여러 어려운 정치적 문제를 에드워드 1세가 해결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그들이 자신을 스코틀랜드의 상왕으로 인정한다는 조건 하에서만' 그들에게 조언을 하여 줄 수 있다는 요구를 했다. 스코틀랜드의 군주들은 잉글랜드의 군주에게 신서를 하였으나, 그것은 그들이 잉글랜드에 보유하고 있는 봉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잉글랜드 영토 내의 봉토의 주인으로서 신서를 하였으나, 에드워드가 요구하는것은 스코틀랜드의 군주가 스코틀랜드 왕국 내 소유한 모든 토지의 소유자라는 명목으로서도 봉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알렉산더 3세의 사망 이후에 뒤따르는 여러 진통과 곹오 속에서도 스코틀랜드인들은 에드워드 1세의 상왕권 요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1289년 여름, 프랑스의 영지에서 귀환한 에드워드 1세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준비에 나서면서 그의 야심을 비쳐보였다. 에드워드는 노르웨이의 군주와 스코틀랜드 왕국의 보호자들에게 노르웨이 처녀 마가렛의 미래를 상의할 대표단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에 노르웨이는 물론 스코틀랜드도 대표를 선발했고, 에드워드 자신도 활동할 대표를 선임하였다. 이에 따라 솔즈베리에서 모인 대표단은 몇가지 문제를 상의했다. 노르웨이 처녀 마가렛은 1290년 11월 1일 이전에 노르웨이는 마가렛을 스코틀랜드나 잉글랜드로 보내며, 그녀는 증조부인 에드워드의 보호 아래 이동하고, 스코틀랜드인이나 노르웨이인들이 향후 마가렛을 둘러싼 문제에 대해 합의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최종적인 발언은 잉글랜드 국왕인 에드워드가 내기로 되어 있었다.


 이 솔즈베리 조약(Treaty of Salisbury)은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로 마가렛을 보내겠다는 노르웨이, 스코틀랜드, 잉글랜드의 협약이었으나, 이 내용에는 중대한 부분이 있다. 솔즈베리 조약으로 스코틀랜드인들은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에 간섭할 수 있는 권리를 어느정도 인정했던 것이다. 이는 에드워드의 야심이 한발짝 더 진전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에드워드의 야망은 노르웨이 처녀 마가렛과 자신의 아들인 에드워드를 결혼시키는 것이었다. 이후 버갬 조약(Treaty of Birgham)에서 이 문제가 논의되었는데, 솔즈베리 조약의 비준을 위해 모인 스코틀랜드의 대귀족들과 고위성직자들은 회의에서 결혼을 통한 양 왕국의 연합이 가능은 하지만, 그것이 스코틀랜드를 위협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따라서 버갬 조약의 내용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확연하게 구분시키는것이 중점이 되었다. 즉, 스코틀랜드인에게 세금을 징수할 권한은 오직 스코틀랜드 왕국의 필요성 뿐이며, 스코틀랜드 교회는 잉글랜드 교회의 간섭에 종속되지 않고, 스코틀랜드의 위법 사항은 스코틀랜드 법정에서 재판하여야 한다는 것들이었다. 


 조약의 전체적인 내용은 스코틀랜드 왕국이 잉글랜드와 분리 독립되었음을 강조한 것이었다. 만일 두 왕국이 동일한 통치자에 의해서 다스려지더라도, 이는 통치권의 연합일 뿐 서로는 종속된 개념이 아니라 동일한 주체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잉글랜드의 국왕이나 스코틀랜드의 국왕이 두 왕국을 지배하더라도, 그는 스코틀랜드에서는 스코틀랜드의 군주로, 잉글랜드에서는 잉글랜드의 군주로 군림해야 한다. 잉글랜드의 군주로서 스코틀랜드를 다스리거나, 그 반대의 경우가 아닌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에드워드 1세의 구상이었다. 그의 목적이 성사되면 버갬 조약은 휴지 조각이 되며, 스코틀랜드 왕국은 사라지고 그저 잉글랜드의 영역에 포함된 스코틀랜드 만이 미래에 남을 뿐이다. 버갬 조약은 이에 대한 안전보장책이었지만, 이 결혼이 가져다줄 이익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그는 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사실 에드워드는 버갬 조약이 논의되던 당시에도 맨 섬(Isle of Man)의 통치권을 장악하려고 군대를 파견하였으며, 자신의 최측근인 안토니 백을 스코틀랜드 왕국의 섭정자로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넣고 있었다.   


 하지만 에드워드의 계획은 예상치 못한 암초에 걸리고 말았다. 1290년 9월 26일 마가렛이 사망함으로써, 결혼 동맹의 성사는 불가능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4) 그 즉시 80세의 로버트 브루스가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 대적자인 존 벨리올 역시 자신이 스코틀랜드의 상속권자라고 선언하였다. 스코틀랜드의 양대 세력이 대치하고 있는 상태에서 다른 왕위계승권 주장자들도 그들의 가계 혈통을 내세우며 만일의 경우에 대비함으로써, 스코틀랜드는 폭탄이 터지기 전 도화선에 불이 붙은 상태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코틀랜드의 평화를 원하는 귀족과 성직자들은 에드워드 1세의 개입을 촉구하였다. 또한 존 벨리올의 군사적인 행동에 놀란 앵구스, 애솔, 레녹스, 마르, 맨타이드, 로스, 스트라스인 백작 등 7명의 백작은 에드워드 1세에게 사태의 해결을 중재하도록 도움을 구하였다. 에드워드 1세로서는 계획이 중단된 상태에서 예기치 않은 기회를 다시 잡게 되었다. 결국 순진무구한 양의 무리들이 탐욕스러운 늑대를 불러들인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양들의 환상과는 달리 늑대는 그가 웨일즈를 종속시킨 것처럼, 스코틀랜드도 지배하려는 욕망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에드워드는 자신의 대법관을 통하여 스코틀랜드 왕위를 둘러싼 분쟁을 해결하겠다고 고지했는데, 그의 행동은 분쟁 해결을 위한 심판관이 아니라 스코틀랜드 왕국의 봉건적 주군으로서 문제 해결에 주력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스코틀랜드에 대한 합법적인 상왕권을 내가 가지고 있지 않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느냐?" 고 왕위계승권 주장자들에게 질문하였다. *5) 즉 에드워드는 상왕권을 주장하면서 스코틀랜드의 지배권을 직접 요구한 것이었다. 이러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그의 주도 하에, 13명의 왕위계승권 주장자들의 상속권 주장의 적법성을 따지기 위한 소송 절차가 시작되었다. 이른바 대소송(Great Cause)이 시작된 것이다.


 12명의 경쟁자 ─ 실제로는 로버트 브루스와 존 벨리올이라는 강력한 양자의 택일인 대소송 기간은 에드워드가 자신의 의도를 치밀한 계략으로 실행에 옮기던 순간이었다. 에드워드 1세의 유능한 재판관 중 한 사람이었던 로저 브라바존(Roger Brabazon)은 노햄(Norham) 회의의 연설 중 에드워드 1세의 상왕권을 스코틀랜드인들이 인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1291년 6월 13일에 이르면, 어느새 대소송 문제로 회의에 참석한 여러 참가자들은 에드워드 1세를 봉건적 주군으로 인정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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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1세의 즉위와 항쟁의 시작


 대소송의 결과 1292년 11월 17일, 존 벨리올은 스코틀랜드의 존 1세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모든 스코틀랜드 인들의 복종을 얻어내지 못했으며, 게중에는 당연하게도 로버트 브루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존 벨리올이 왕으로 결정된 후, 로버트 브루스는 에드워드 1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이 최후의 심판처럼 내린 오늘의 결정을 기억하라." *6) 라고 말이다. 실제로 로버트 브루스는 존 1세에게 충성의 맹세를 하지 않았고, 자신의 아들인 로버트 브루스 6세에게 모든 영지를 양도하였다. 이후 로버트 브루스 가문의 항쟁은 잉글랜드의 국왕인 에드워드 1세는 물론 스코틀랜드의 국왕인 존 1세도 적대자로 포함된 것이나 다름 없었는데, 바로 이것이 로버트 브루스 가문과 윌리엄 윌레스(William Wallace)의 항쟁을 같은 자리에서 거론하면서도 차이점을 논하는 주요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왕이 되지 못한 로버트 브루스와는 별개로, 왕으로 '선택' 된 존 1세 역시 온갖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었다. 에드워드 1세는 존 1세를 자유로운 왕 노릇을 시키기 위해 선택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존 1세의 즉위 동시에 스코틀랜드의 문제에 더욱 깊숙히 개입하였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를 명확히 구별시킨 버갬 조약은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스코틀랜드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의 법정이 아닌 자신의 법정에서 판결을 내렸던 것이다. 이제 스코틀랜드의 왕은 잉글랜드 법정에 제소된 스코틀랜드 사건에 답변하기 위해서, 몸소 잉글랜드 법정에 출두해야만 했다.


 이 시점에 이르면 스코틀랜드의 권력자들은 누구라도 에드워드의 목적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들에게 남은 수단은 두 가지였다. 굴욕을 맛보고, 권리를 빼앗기는가. 아니면 결연한 태도로 일어날 것인가. 존 1세는 에드워드의 1세의 상왕권을 거부하는 형태를 취하였다. 1295년 2월 스코틀랜드의 군주는 에드워드 1세에 대한 신서와 충성의 맹세를 파기한다고 선언하였고, 스코틀랜드의 대귀족들도 존 1세의 행동을 지지하였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담은 편지를 에드워드 1세에게 보냈다.


 "우리와 우리 왕국의 주민들이 폭력, 상해, 부당한 대우로 고통을 받고 있다. 사실 지나치게 우리들과 우리들 왕국의 자유가 침해되고 있다. 에컨대 남이 시키는 대로 우리 왕국 밖에서 우리를 소환하고, 부당하게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의 성, 토지, 소유물을 점령하고, 우리 측의 과실이 없는 데도 부당하게 우리 왕국 내의 백성들을 체포하고, 육상이나 해상을 통하여 우리의 재물을 약탈하여 당신의 왕국으로 가져가고, 우리 와국의 상인들과 주민들을 살해하고, 우리 왕국의 신하들을 강제로 체포하여 당신 왕국의 감옥에 투옥하였다."


 "우리는 종종 이러한 문제의 개선을 논하기 위해 우리의 사절을 당신에게 파견하였으나, 그러한 행위가 고쳐지기는 커녕 불법행위만 더해졌다. 당신은 우리 왕국의 국경지대에 군 부대를 배치하여 우리 왕국 주민들의 특권을 빼앗고, 육로와 해로를 통하여 국경을 넘어 살인과 방화를 자행하였다. 우리는 이런 행위에 대해서 더 이상 인내할 수 없다. 우리는 당신에게 바친 충성과 신서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충성과 신서를 철회함을 이 편지로 알린다. 그리고 우리들의 충성스런 신하들, 우리 왕국의 주민들 가운데 당신의 왕국 내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리고 당신 가문의 일원이고 시종이라는 이유로 당신에게 충성과 신서를 행한 자들도 모두 그것을 철회하는 바이다." *7) 


 편지를 받은 잉글랜드의 군주는, 프랑스 어로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네가 바보스런 중죄(重罪)를 지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너를 보낸 그 왕이, 우리들에게 오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에게 가야하기 때문이다." *8)


 실로 그 말대로였다. 스코틀랜드의 군주가 잉글랜드로 오는것을 거부하자, 잉글랜드의 군주는 자신이 직접 스코틀랜드로 가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물론, 왕의 옆에는 스코틀랜드가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숫자의 대군이 함께 진군하고 있을 것이었다. 



 

*1) 홍성표,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 운동의 역사적 기원, pp. 17~18

*2) Herbert Maxwell, ed., The Chronicle of lanercost, 2vols.

*3) 김현수, 왕실 스코틀랜드 : 영국사 pp.26

*4) 7살이었던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는 음모론이 돌았고, 몇년 후 독일의 리벡에서 한 젊은 부인이 자신이 노르웨이의 마가렛이라고 주장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녀는 재판 후 화형에 처해졌다. ─ 김현수, 왕실 스코틀랜드 : 영국사 pp.31

*5) H. T. Riley, de., chronica willelmi Rishanger (Rolls Ser., 1865), p. 241.

*6) Scotichronicon, vi, p, 31

*7) 홍성표,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 운동의 역사적 기원, pp. 88

*8) Scotichronicon, vi, p,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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