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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영국의 역사(외전) : 던바 전투와 윌리엄 웰레스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8.04|조회수583 목록 댓글 0

Wars of Scottish Independence were a series of military campaigns fought between the Kingdom of Scotland and the Kingdom of England in the late 13th and early 14th centuries



던바 전투(Battle of Dunbar)



 에드워드 1세의 요구는 일견 간략했다. 존 1세는 잉글랜드 법정에 출두하여, 스코틀랜드 내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 관련인으로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간단해보이는 요구에는 스코틀랜드 국왕의 자율권을 침해하고,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에 우위를 주장하는 뜻이 분명히 담겨 있었다. 여러 차례의 소환 요청에도 불구하고 존 1세가 이에 불응하자, 에드워드는 존1세를 왕국으로부터 추방한다는 판결과 함께 그가 소유하고 있는 토지를 비롯한 모든 재산을 몰수하겠다고 선언하였다. *1) 그러나 강경조치에도 불구하고 존 1세와 그 추종자들은 굴복하지 않았고, 잉글랜드의 국왕은 힘으로 그들을 눌러야만 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에드워드는 교황의 지원을 등에 엎고 *2) 마침내 진격을 개시했다. 존 1세로서는 믿을 만한 구석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1295년 10월 23일, 프랑스의 필리프 4세(Philippe IV)와 상호 방위동맹 조약인 코르베이(Corbeil) 조약을 체결하였다. 군사적으로 이것이 얼마나 도움이 될 지는 미지수였지만, 적어도 손을 놓고 있는 상황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기실 믿을만한 부분은 존1세의 대응보다는 에드워드의 상황에 의거했다. 아키텐의 백작인 에드워드 1세에는 프랑스의 필립 4세에게 충성의 맹세를 할 의무가 있었다. 마침 잉글랜드 선원들이 프랑스 선박을 공격한 사건이 일어나 프랑스의 왕은 에드워드 1세가 파리 의회에 직접 출석, 상왕의 판결에 복종하도록 명령하였다. 에드워드가 이에 불복하자 필립 4세는 1294년 5월 19일 가스코뉴에 있는 에드워드 1세의 영지를 몰수하겠다고 선언했으며, 이는 양측의 분쟁을 초래했다. *3) 


 그러나 스코틀랜드에 대한 에드워드의 의지는 그들의 상상 이상으로 강력했으며, 실제 잉글랜드의 힘 역시 그들은 과소평가했다. 에드워드는 그의 가신으로 스코틀랜드를 인정할 때의 상징이던 '스코트의 망치(The Hammer of Scots)' 라는 방패를 없애버렸으며 *4) 스코틀랜드의 부유한 버윅(Berwick)으로 공격해왔다. 이에 맞서 스코틀랜드 군대는 1296년 3월 11일 셸커크(Selkirk) 근교에 소집되었다.


  이들은 강건한 남성들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잉글랜드 군대는 스코틀랜드보다 5배나 더 많은 인구와 경제력을 바탕으로 선발된 봉건적 군대였으며, 특히 잘 무장된 기사들의 비율이 스코틀랜드 군에 비하여 훨씬 높았다. 양측 모두 봉건적 군역 납부 의무는 일 년에 40일이 기본이었지만, 잉글랜드 왕은 봉건적 군역 납부 기간이 40일을 초과하였을때, 추가 군역 납부자들에게 일당을 지급할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하였다. 1296년 1월 23일 에드워드는 무려 천여명의 중기병과 6만 명의 보병을 뉴캐슬(Newcastle)에 집결시키도록 명령했다. 이것은 아마 과장일 확률이 높지만, 그가 대략 3만에 육박하는 대규모 군단을 준비했을 확률은 충분하다.


 무엇보다 잉글랜드 왕국의 전사들은 최근에도 웨일즈의 거친 저항을 분쇄하며 전투를 치룬 경험이 있었으나, 스코틀랜드의 병사들은 최근 큰 전쟁을 치룬 경험이 없었다. 양 측의 전투력은 상당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다.


 '차이' 를 만드는 요소에는 개인의 능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에드워드 1세는 군사적으로 유능한 지휘관이었으며, 전장에서 그의 능력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버윅 시에 침입한 에드워드는 무리하게 무력을 앞세워 공격하기보다는 교묘한 계략을 짜내 성을 탈취할 음모를 꾸몄다. 그는 군대가 마치 철수하는 것처럼 텐트를 철거하는 등 분주하게 움직였으나, 3월 29일 동이 튼 즉시 버윅 성의 성문에 접근하여 여러 방면에서 지속적인 공세를 가해 마침내 도시를 함락시켰다. 에드워드는 연령과 성별을 가리지 않고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5) 


 스코틀랜드 군대는 개방된 지역의 회전에서 잉글랜드 왕의 군대에 대적할 만한 전력을 갖추지 못했다. 대신 그들은 습격 부대를 노섬벌랜드(Northumberland)에 파견하였으며, 이들은 스코틀랜드로 귀환하던 도중 던바 성(Dunbar Castle)을 장악하였다. 던바 백작은 존 1세가 아닌 에드워드의 지지자였으며, 당시 에드워드의 군대와 같이 있었기 때문에 스코틀랜드 군에게 성문을 열어준 부인의 행동을 저지할 수 없었다. *6)



File



 잉글랜드 군은 그 즉시 서리 백작 존 드 웨렌(John de Warenne, 6th Earl of Surrey)을 파견하여 성의 재탈환을 시도하였다. 양국의 군대는 3일간 휴전을 하며 대화로 문제 해결을 하려는 노력을 했었지만, 항복 조건을 찾을 생각이 없었던 존 1세의 의지로 인해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투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던것으로 보이나, 중요한것은 전투의 전개보다 그 결과였다. 던바 성은 잉글랜드 군에게 함락되었고, 많은 귀족들이 부상을 당했으며, 여러 기사들과 배런들의 사로 잡혀 에드워드 1세에게 인계되었다. 


 이 전투의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던바 성이 함락된 후 뒤이어 에딘버러 성도 포위되어 5일만에 함락되었다. 에드워드 1세가 성벽 밖에 도착하기도 전, 스코틀랜드 군이 수비를 포기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 스털링 성(Stirling Castle)에도 잉글랜드의 깃발이 올라갔으며,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 북단에 있는 엘긴(Elgin)까지 행군하였다.  던바 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존 1세는 부하들과 함께 더 멀리 떨어진 포파(Forfar) 요새로 도망쳤으나 추격이 여기까지 이르자 결국 추종자들과 함께 1296년 7월 2일 항복하였다. 그리고 스트라카스로(Stracathro) 교회 마당에서 굴욕적인 퇴위를 강요당한 뒤, 잉글랜드로 압송되었다. 에드워드는 존 1세의 겉옷에 붙어 있던 국왕의 표지를 떼어냈다. *7)


 던바 전투에서 스코틀랜드 군이 패배한 이유는 잉글랜드 군에 비해 스코틀랜드 군이 상대적으로 병사들의 수가 적고, 무기의 성능이 떨어졌던 탓이 있다. *8)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정치적인 요소였다. 존 1세의 반대편에 섰던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에드워드 1세의 편에 가담하여 스코틀랜드 왕국의 지도력은 분열되었으며, 이를 수습해야할 존 1세는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인해 지도력을 결핍했다. 이로 인하여 1295년까지 그의 백성들은 믿음을 상실했으며, 사실 그가 에드워드 1세에게 항복했을때 그를 위해 투쟁한 백성들의 지원도 없었다.


 과거의 경쟁자가 나가떨어지는 모습을 본 노회한 로버트 브루스는 에드워드 1세를 만나 자신을 새로운 스코틀랜드의 군주로 만들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자신이 오래 전 에드워드 1세에게 약속한 바를 충실하게 실행하겠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바라던 목표를 드디어 손에 넣은 야심찬 군주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대를 위해 잉글랜드 왕국이 승리를 거두는 일 외에, 우리가 할 다른 무슨 일이 있겠는가?" *9)


 이에 대하여 로버트 브루스가 어떤 답변을 내놓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후 로버트 브루스가 잉글랜드 내에 있는 자신의 영지를 떠나 스코틀랜드에서 생활하였다는 사실이 그의 답변을 대신해줄 것이다. 이제 브루스 가문은 자신들이 나아갈 방향을 확고하게 정하게 된 것이다.






 던바 전투 이후 불과 2개월만에 스코틀랜드 전체를 무너뜨린 에드워드는 이제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즉, 잉글랜드의 군주인 자신이 직접 통치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든 것이다. 체포된 귀족들은 에드워드 1세를 상왕으로 수용하던지, 아니면 투옥되는지를 선택해야 했다. 만일 투옥된 인물이 자신의 입장을 '변절' 하면 그는 즉시 석방되었다. 에드워드의 충실한 측근인 서리 백작 존 워렌은 치안관(Keeper)에 임명되었으며, 휴 크레싱햄(hugh de cressingham)은 재무관에 임명되었다. 스코틀랜드인 사이에 일어난 분쟁은 이제 잉글랜드의 재판관이 심리하게 되었다. 


 비록 지방 관리들은 스코틀랜드인으로 보임되었으나, 중앙의 주요한 관리들은 잉글랜드인들로 구성되었다. 새로운 행정의 중심지는 에딘버러보다 잉글랜드인에게 편리한 버웍에 수립되었다. 이제 스코틀랜드는 실질적인 잉글랜드의 속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스코틀랜드의 국왕은 존재하지 않고, 스코틀랜드 왕국 역시 존재하지 않기에,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의 상왕이 아닌 진정한 스코틀랜드의 국왕이 되었으며, 이는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비록 왕국의 보호자들이 존재하고, 이들에 의해 '왕권' 의 개념이 실현되었다고 하더라도, 스코틀랜드를 대표할 국왕이 없었던 상황에서는 그저 잉글랜드에 속한 하나의 공동체에 불과했다. 에드워드 1세로서는 존 벨리올을 폐위시킨 후 새로운 스코트인의 국왕을 찾을 의도 따윈 전혀 없었을 것이다. 이제 스코틀랜드인은 그들만의 새로운 왕을 세우기 위해선 잉글랜드에 대한 독립 투쟁이 필요하였다. 이런 점에서 에드워드 1세에 대한 스코틀랜드의 투쟁은 독립 운동의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누가 이 투쟁을 이끌어 갈 것이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들의 왕은 런던탑에 유폐되었고, 그들의 귀족들은 포로로 잡혀 잉글랜드로 압송 구금되었다. 그러나 국가의 위기가 있을 때마다 공식처럼 영웅이 나타나는 것은, 영웅을 원하는 시대가 만드는 보편적 흐름이다. 스코틀랜드 내에서도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들이 있었다. 스코트인들이 찾아낸 영웅은 에어주(Ayrshire) 지주의 아들, 윌리엄 월레스였다. 






 윌리엄 월레스



 스코틀랜드에 대한 잉글랜드의 통치는 일시적으로 성공하였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점령체제와 그 세력에 대한 적대 행위가 스코틀랜드 곳곳에서 일어났으며, 이는 잉글랜드 내부의 문제에서 기인했다. 1297년 에드워드 1세는 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귀족들의 조세 저항으로 위기에 직면하였다. 국왕의 군사적 원정 계획에 성직자, 귀족, 상인들은 저항하였고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 원정은 물론 잉글랜드의 국내통치도 원만하지 못했기 때문에 해외원정에 필요한 전비를 마련할 수 없었다. 대안이 된 스코틀랜드는 직접세 징수를 통하여 에드워드의 금고 역할을 하였다. 


 또 한가지 원인은 플랑드르 원정이었다. 에드워드는 프랑스와의 전쟁에 필요한 병력 확보를 위해 스코틀랜드의 중간층 모두를 강제 징집하려고 하였고, 체포한 자들을 석방시켜 주는 대가로 군역 납부를 요구하였다. 이러한 요인들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에드워드 1세에 대한 스코틀랜드의 저항을 부추겼다. 1297년 5월 무렵에는 잉글랜드인 관리들의 지배에 대한 스코틀랜드의 저항이 본격화되었다. 스코틀랜드의 여러 지역에서 잉글랜드인 관리들에 대한 저항이 있었지만, 가장 주목을 끈것은 남서쪽이었다. 바로 이곳에서 윌리엄 윌레스의 지도로 인한 일련의 계획적인 공격이 일어났다. 


 윌리엄 웰레스는 하나의 신화가 되었기에, 그에 대한 이야기는 실제의 역사와 여러 민담, 전설, 현대의 매스 미디어(Mass Media)가 뒤섞여 대단히 복잡한 모습이 되었다. 그러나 윌리엄 윌레스의 초기 생에에 대하여 알려진 사실은 매우 적다. 스코틀랜드인들의 말에 의하면, 잉글랜드에 대한 그의 집요한 미움은 그의 아내가 라나르크 성의 잉글랜드 병사들에게 살해당했을때부터 시작되었으며, *10) 그의 아내를 추행한 *11) 라나르크 성의 성주이자 에어주의 장관인 해즐리(Haselrigg)를 찔러 죽임으로서 역사의 전면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무법자는 빠른 시간 내에 자신의 대담함을 유감없이 증명해내었다. 해즐리를 살해한 웰레스는 브루스 가문의 동맹자인 윌리엄 더글라스 경과 합류하여 잉글랜드의 대법관인 윌리엄 옴스비(William Omsby)을 목표로 삼았고, 그가 법정을 열었던 스콘(Scone)을 기습 공격하였다. 비록 대법관은 도피하였으나, 웰레스 일행은 가치 있는 물건과 쓸모 있는 말들을 포회하였다. 이후 그들은 셀커크 숲으로 들어가 은신하였으며, 대규모 추종자들을 끌어들여 군대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1297년에 이르면 윌리엄 웰레스의 명성은 드디어 잉글랜드 군주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이 야심천만한 사내의 공격에 의해 여기저기서 손실을 입은 사람들이 항의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드워드 1세는 국내정치의 곤란함 뿐만 아니라, 프랑스와의 문제에 신경을 쓰는 통에 스코틀랜드의 일개 도적 집단에 신경을 쏟을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대신 그는 재무관 휴 크레싱햄을 스코틀랜드에 파견하였다. 7월, 크레싱햄은 에드워드 1세에게 윌리엄 웰레스가 무시할 수 없는 큰 무리를 갖추고 있는것 같다고 보고하였다.


 이 시점에 이르면 윌리엄 웰레스의 세력은 거칠 것 없이 움직이고 있던 상황이었다. 8월 경 그는 군대를 이끌고 던디(Dundee) 성을 포위 공격하였으며, 또 다른 주요한 저항가 앤드류 머레이(Andrew Moray)는 북쪽의 애버딘(Aberdeen) 성, 어커트(Urquhart) 성, 인버네스(Inverness) 성을 함락시켰다. 이후 그들은 서로 힘을 합쳐 포스 강(River Forth) 북쪽 지방의 대부분을 그들의 통제 하에 넣었고, 스코틀랜드 군대를 이끌었다.


 프랑스 원정을 계획하던 에드워드 1세는 휴 크레싱햄의 경고를 믿지 않았다. 그는 1297년 8월 22일, 자신이 생각하는 더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하여 플랑드르를 향해 출발하였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의 사태를 크레실햄이 잘못 파악한 것은 아니었다. 윌리엄 웰레스와 앤드류 머레이의 세력을 물리치기 위하여 휴 크레싱햄은 중기병과 잉글랜드 북부에서 징집한 군사들, 그리고 웨일즈의 뛰어난 궁병들로 구성된 강력한 군사력을 북쪽 방향으로 진격하여, 스털링(Stirling)에 있는 퍼스 강으로 진격시켰다. 

 



*1) Scotichronicon, vi, p, 31

*2) 교황은 양 왕국의 국왕 사이에 신서와 충성의 맹세가 지켜져야 한다는 교서를 존 1세에게 보내 에드워드 1세를 지원하였다. ─ 홍성표,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 운동의 역사적 기원, pp. 89  

 *3) Ibid pp.92

 *4) 김현수, 왕실 스코틀랜드 : 영국사 pp,36

 *5) 홍성표,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 운동의 역사적 기원, pp. 94

 *6) 성문을 열어준 사람이 던바 백작의 동생이라는 주장도 있다.

 *7) 이후 존 벨리올은 톰 토바드(Tomm Tabard), 왕의 상징이 떨어져나간 빈 코트로서 알려졌다. 

 *8) 잉글랜드 군은 웨일즈인들이 사용한 장궁으로 스코트인들을 격파하였다. ─ 나종일, 영국의 역사 pp.144

 *9) 홍성표,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 운동의 역사적 기원, pp. 98

 *10) 김현수, 왕실 스코틀랜드 : 영국사 pp,37

 *11) 홍성표,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 운동의 역사적 기원, pp.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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