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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114) ─ 야망의 시대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8.04|조회수664 목록 댓글 3



 북의 원세개. 남의 쑨원. 이제 중국은, 그리고 청나라의 운명은 이 두명의 개성에게 달려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도권을 가진 인물은 실제적인 힘을 가진 원세개 입니다. 그에게는 두 갈래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청조로부터 선양을 받아 스스로 왕조가 되는 것.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공화국의 대총통이 되는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첫번째의 계획은 시대착오적이며, 대단히 어려웠습니다. 애신각라씨의 청조에 있는 많은 종실들은 원세개가 황제가 되는 순간 반대할 것이며, 선양을 받는다 해도 천하의 태반은 반란군의 손에 있었습니다. 


 쑨원의 입장에서 보면, 그에게는 원세개를 지지하는 길 외에 달리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습니다. 그의 힘이 원세개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쑨원은 그 현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원세개를 지지했으며, 자신은 더 나은 사람이 없기에 임시적으로 이 직분을 맡고 있을 뿐, 원세개는 속히 나라를 위한 결정을 내리라고 촉구했습니다. 


 이후 벌어지는 지리한 협상과 눈치보기, 몇 가지 사건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양측의 전보 교섭은 최종적으로는 대략 다음과 같이 결론이 났습니다.


 1. 청나라 황제는 퇴위하고, 원세개는 베이징에 있는 각국 공사에게 그 사실을 통지한다.
 2. 원세개는 공화주의에 절대 찬성임을 표명한다.
 3. 쑨원은 외교단에게 청나라 황제 퇴위의 포고를 통지한 후 사임 한다.
 4. 참의원에 의해 원세개를 임시 총통으로 선출한다.
 5. 원세개는 임시 총통으로 선출된 후, 반드시 참의원이 정한 헌법을 준수한다.



 이 전문은 기록으로 남아 있는데, 원세개는 거기서 군주제냐, 공화제냐 하는 문제는 국민의 공정한 결정을 따라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원세개의 본심이 슬쩍 엿보이는 듯한 부분인데, 쑨원은 원세개를 추켜 세우면서도 공화제나 군주제냐는 이미 정해진 것이니 재고의 여지가 없다로 잘라서 거절했습니다. 


 어찌되었건, 이러한 조건에 이르자 원세개는 이제 어느정도 마음이 놓였습니다. 남은 문제는 황제를 퇴위시키고, 청 왕조를 영원히 소멸시키는 정도입니다. 황제를 퇴위시켜야 원세개는 총통 자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는 단기서에게 장령들을 연합하여 공화정을 찬성하게 하고, 군주제를 반대한다고 상소하여 퇴위를 반대하는 황족들에게 엄중 경고 하라는 밀령을 내렸습니다. 


 이미 청나라의 황족들은 나라를 지탱할 힘 따윈 없었습니다. 과거 만주를 넘나들며 기마를 이끌어, 가로막는 적을 분쇄하던 조상들의 후손은 하염없는 회의를 계속하며 넋두리와 흐느낌만 내두르고 있을 뿐입니다. 




양필


 하지만 마지막 저항을 부르짖는 이들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바로 종사당(宗社黨)으로서, 그 우두머리 양필(良弼)은 원세개 내각을 무너뜨려 종실 내각을 만들고, 마지막 투쟁을 벌이자고 기염을 토했습니다. 이는 현실성이 있다기 보다는 최후의 단발마에 가까운 움직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혁명당의 팽가진(彭家珍)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폭탄 테러로 사망했고, 우두머리를 잃은 종사당은 그 동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황족들은 저마다 양필의 최후를 전해 듣고 간담이 서늘해져 다시는 황제의 퇴위를 반대하겠다고 나서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황제이 퇴위를 반대하는것은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기 위함인데, 목숨을 잃으면 특권도 다 소용 없어질테니 말입니다.


 황족들 중에 겁을 먹은 일부는 아예 청도, 대련, 천진 등지로 숨어 버리는 추태를 보이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제 남은 융유황후는 깜짝 놀라 조병균, 호유덕, 양사이를 황궁으로 불러들였습니다. 황후는 눈물을 흘리면서 제발 자신들 모자의 목숨만 구해달라고 애원하며, 원세개가 다른 마음을 먹지 않도록 그에게 작위를 내렸습니다. 이는 융유황후의 술수였는데, 곧 총통이 될 원세개가 만일 작위를 받는다면 그는 청나라 황실에 충성을 다해야 하니 황실을 압박하기 어려워지리라 생각한 것입니다. 원세개는 몹시 불쾌해 하며 명을 거두라는 상소를 수차례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기실 이런 마당에서도 청나라 황실은 자신들의 권력을 내놓기 아쉬워 군주 공화정을 제시해, 군주가 국정을 간섭하지 않고 그저 황제의 작위만이라도 보전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원세개는 전선에 나와 있는 관병들에게 공화정을 찬성하도록 지령을 내렸으며, 황실에 대한 압박은 더욱 강력해졌습니다. 결국 황후와 황제는 퇴위와 공화정을 반포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2월 3일, 황후는 원세개가 전권을 가지고 황제 퇴위 조건을 남방과 협상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융유황후는 아직도 정확한 퇴위 시기를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원세개는 단기서 등을 시켜 군대의 며의로 전보를 보내 황궁을 위협하였는데, 전보문은 그야말로 황실을 몸서리치게 만드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2월 11일, 융우황후는 조건에 승낙하고 조서를 내려 퇴위를 결정했으며, 원세개는 이 퇴위 조서를 전보로 남방에 보내고, 다시 한통의 전보를 보내 공화제를 찬양하는 동시에 중화민국을 위해 힘써 노력할 것과, '군주제가 다시는 중국에서 실시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정치적 태도를 밝혔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누르하치의 시대로부터 내려온 청나라 황실의 계보도, 그들의 역사도, 한때 만주와 중국을 아우르던 그 영화도, 번영도, 이제는 모두 바람처럼 사라지고 없어졌습니다. 260년의 청나라, 마지막 조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1912년 2월 12일, 융유태후는 선통제의 이름으로 세 가지 칙령을 내렸습니다. 첫 번째는 황제의 퇴위 조서였고, 둘째는 황족의 우대 조건을 공포한 것이었고, 마지막은 신하들에게 권유한 것이었습니다.


 타오르는 불꽃도, 장렬한 저항도, 최후의 단발마도 없었습니다. 260년간 중국을 지배하던 청나라의 시대는 불을 붙는 늑대처럼 달려들어, 거대한 용과 같이 포효한 뒤, 훌러나가는 샘물처럼 아스라히 끝을 맺었습니다. 그 날, 원세개는 변발을 자르고 통쾌하게 웃었습니다.




 송교인 


 중화민국으로 이름이 바뀌고, 중국은 공화제가 되어서 의회민주주의의 시대가 도래한 듯 보였지만, 그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독재에 대한 그의 야욕은 점차 노골화되었습니다. 원세개는 자신의 어용정당인 공화당을 만들어 독재 노선을 걸어가기 시작했고, 이것을 저지하기 위해 동맹회는 개편을 단행, 나립해 있던 소수 단체를 끌어들여 새로운 정당을 탄생시켰습니다. 이것이 바로 중국과 대만의 근현대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국민당의 시작입니다. 원세개는 원세개 나름대로 앞서 결성한 공화당 외에 여러 단체를 끌어들여 새롭게 만든 정당이 진보당이었습니다.  


 의회에서 국민당의 세력은 진보당을 압도했습니다. 중의원에서는 국민당이 269명, 진보당이 154명이었고, 참의원에서는 국민당이 123명, 진보당은 69명에 불과했습니다. 이 국민당 안에서 가장 조직력이 뛰어나고 정치적 수완이 출중한 지도자는 단연 송교인이었습니다. 그는 제 1당이 내각을 조직하는 정당 내각제를 실시하기 위해 정력적으로 움직였으며, 원세개가 가장 주시하는 인물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한번은 원세개가 송교인을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무려 50만원이라는 엄청난 액수의 수표와 비싼 양복 한 벌을 선사했다가 거절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송교인의 의지는 워낙 강해 돈으로 매수가 될 인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가 남방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국민당이 국회에서 과반수의 의석을 얻게 되고, 총통과 총리의 선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원세개로서는 좋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원세개는 총통 대리 조병균에게 밀령을 내려 송교인의 암살을 지시했습니다. 조병균 역시 송교인에게 자신의 총리 자리를 빼앗길까 두려워하고 있던 참에, 송교인의 연설 중에 자신을 비난한 내용을 보았던지라 즉시 임무에 착수했습니다. 원세개는 송교인에게 전보를 보내 베이징에 와서 정사를 상의하자고 논했고, 1913년 3월 20일 송교인은 상하이에서 특별 열차 편으로 베이징을 향해 떠났습니다. 떠나기 전, 암살 시도가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고 주위 사람들은 경계하라는 말을 했지만 송교인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10시 40분, 마침 기차가 상하이 역에 도착하자 송교인은 배웅을 나온 황흥과 함께 대합실을 나서 개찰구로 향했고, 총구가 불을 뿜은 것이 바로 그때였습니다. 총격을 입은 송교인은 급히 철도병원으로 옮겨져 마취를 하고 총알을 빼냈지만, 상태는 대단히 심각했습니다. 이튼날 새벽, 간신히 눈을 뜬 송교인은 이제 다시 한번 눈을 감으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 직감하고, 황흥을 불러 원세개에게 보내는 마지막 전보를 작성하게 했습니다.


 "지금 나라의 기반이 튼튼하지 못하고, 국민들의 생활이 나아지지 않았는데, 갑자기 떠나자니 유감이 많습니다. 총통께서 성심을 다하고, 공정한 도리를 펼쳐 민권을 보장하기 바랍니다. 국회로 하여금 확고부동한 헌법을 만들게 한다면, 저는 죽어도 사는 것과 같습니다."


 전보를 받은 원세개는 "하루빨리 건강이 회복되길 바란다." 는 요지의 답전을 보냈습니다. 22일 아침 4시 48분, 송교인은 결국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나이 고작 32세였습니다. 


 국민당이 격분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송교인을 쏜 암살범들은 즉시 사로잡혔으나, 국민당은 그 배후에 더 큰 무언가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일단 암살자들과 조병균의 연관성은 금세 증명이 되었기에, 조병균은 자신이 사직하여 혐의를 벗겠다고 말했습니다. 원세개는 혐의란 피할수록 커지는 법이니 사직은 하지 말고 잠시 휴가를 내어 쉬라고 권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연관성을 모두 부정한 채,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법에 의한 해결을 기다리자고만 이야기 했습니다. 


 송교인의 암살 소식을 들은 쑨원은 즉시 상하이에 가서 황흥 등과 함께 대책을 논의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비분강개해서 속히 원세개의 죄상을 밝히고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자고 주장했지만, 호한민과 담연개등은 병력이 모자라고 내부에 문제가 있어 출병을 하긴 어렵다는 의사를 전했습니다. 황흥은 우선 기다리면서, 조병균을 처리하는 문제에 대해서 논의했습니다.


 그러나 4월 26일, 암살범의 집에서 원세개와 연관성이 있는 증거물이 나왔습니다. 진상이 드러나자 원세개의 악랄함에 국민당은 분노했고, 원세개는 원세개대로 이미 강을 건넌 참이라 여기며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일본의 다섯 개국의 차관단과 2천 500만 파운드의 차관에 조인했습니다. 의회의 승인 따위는 받지 못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이제 국민당 내부에서는 원세개를 맹렬히 규탄하면서, 그를 타도하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송교인의 암살 문제도 그렇고, 의회의 동의를 얻지 못한 차관 계획이 신문으로 발표가 되자 이러한 움직임은 더욱 커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원세개는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군사를 배치시키면서, 양사이 등을 시켜 되려 국민당에게 이러한 말을 전했습니다.


 "지금 보니 쑨원과 황흥은 난동을 피우는 것을 본업으로 삼고 있다. 이쪽에서도 난동이고 저쪽에서도 난동이다. 나는 4억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중임을 맡은 사람으로, 이런 난동을 내버려둘 수 없다. 나는 정치, 군사 경험 면에서 또 외교적 신용 면에서 누구 못지 않다고 자신한다. 만약 그대들이 능력이 나를 대신할 수 없다면, 그것은 나 역시 바라는 바이다. 그러나 만약 그대들이 감히 다른 정부를 조직한다면, 나는 군사로 그대들을 토벌할 것이다."


 이후 원세개는 강서 도독 이열균을 해임하고, 광동 도독 호한민을 티베트로 쫓아냈습니다. 안휘 도독 백문울은 사천으로 전임되었습니다. 국민당 계인 이 세 도독은 군사력을 갖고 있었으므로, 이들을 제거한다는 것은 원세개가 천하를 장악하겠다는 이야기나 진배 없었습니다. 원세개의 대적자들은 더 이상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2차 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장강에서 파양호로 들어가는 입구에 해당하는 강서성 호구에서 이열균이 먼저 독립을 선언했고, 난징에서는 황흥이 원세개 토벌을 위한 군대를 조직했습니다. 전임을 명령 받았던 백문울은 안휘에서 독립을 선언했고, 광동, 복건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제법 규모가 큰 반란처럼 들리지만, 탄압과 좌천 인사로 막다른 곳에 몰린 국민당계 사람들이 준비나 연락도 없이 거병한 것이어서 2차 혁명은 그 세력이 매우 미약했습니다. 그들 모두는 오히려 교활한 원세개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만 있었을 뿐입니다. 원세개는 2주일도 지나자 않아 호구를 함락했으며, 이열균은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광동에서는 진형명이 독립을 선언했지만, 원세개군이 진격하자 이 역시 실패했습니다. 쑨원은 복건에서 대만으로 망명했습니다. 


 반대자들이 사라진 후 원세개의 입지를 방해 할 수 있는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의회를 협박해서 대총통 선거법을 통과시키고, 바로 자신을 선출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원세개는 자신의 칭호에서 '임시' 라는 거추장스러운 말을 떼어 버렸습니다. 



File



 대총통에 선출된 원세개



 유일무이한 중화민국의 대총통이 된 원세개는 국민당에게 해산 명령을 내렸고, 국민당 의원의 자격을 박탈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중화민국의 의회는 사멸하고 말았고, 책임내각 대신 대총통의 어용 행정기관인 정치당이 만들어졌습니다. 이후 벌어지게 된 1차 세계대전은 열강으로 하여금 중국에 대한 간섭은 커녕 중국을 끌어들일 필요성을 만들었기에, 원세개의 입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강화되고만 있었습니다.









 신해혁명의 불꽃이 번지고, 원세개가 자신의 입 속에 세상을 전부 집어 삼키고 있을 무렵에서 얼마 전 무렵, 젊은 청년 주더는 운남의 군관학교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미 그는 신식학교의 선생이 되는 일로 농촌 가족들의 격렬한 비난을 받았는데, 이제는 당시 인간 쓰레기의 집합소로 여겨지는 군대로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하자 그는 가족들과의 관계가 완전히 파탄이 난 후였습니다. 이렇게 되고 나니, 주더에게는 달리 뒷걸음질을 칠 구멍도 없었습니다. 그는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들어간 운남의 군관하교는 일본의 육군사관학교를 그대로 모방한 것으로, 교육과정과 규율이 매우 엄격했습니다. 또한 여름방학이 없고, 일요일만 쉬었으며, 매일 학과 6시간에 훈련 2시간씩 8시간이 교육과정이었습니다. 어려운 군사학 외에도 지리, 수학, 역사, 국제문제 등의 학과가 있었습니다.  


 이 곳에서 원세개는 묘한 사람을 하나 만났습니다. 군관학교의 교관인 상당수의 젊은 장교들은 일본에서 공부한 사람들이었는데, 운남성 총독은 이들 중에 공화파가 있을지 모른다고 의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의심 많은 총독이 크게 신뢰하는 한 젊은 장교는 주더보다 네 살 위인 27살에 불과했지만, 벌써부터 강렬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습니다.


 주더는 그 교관이 '허약해 보이는 체격에, 피부가 하얀 전형적인 지식인 모습' 을 하고 있었다고 회고 했습니다. 야윈 얼굴에, 두눈 사이가 많이 떨어지고 턱이 약간 여성적이지면, 입은 모질고 완강한 인상을 풍겼습니다. 이 교관은 말이 없고 냉랭하며, 자기 자신이나 학생들에게 대단히 엄격했습니다. 그의 사무실에는 중국어와 일본어로 씌어진 책들이 가득했는데, 주더는 간간히 여기서 책을 빌어 읽었습니다. 게중에는 '몽테스키외' 의 '법의 정신' 이 있었으며, 양계초와 강유위가 쓴 근대 이탈리아와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 일본의 메이지 덴노에 대해 쓰여진 책들도 있었습니다.


 젊은 교관은 신문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신문들은 호남은 물론, 홍콩이나 동경에서 발행한 것들도 있었으며, 심지어 공화파의 비밀간행도 이었는데 이런 신문과 간행물은 갖가지 형태의 군주제 옹호세력을 맹렬하게 공격하면서 당시만 해도 숨 넘어가기전의 형세로 버티고 있던 청조의 무력타도를 촉구했습니다. 하지만 주더는 교관이 혁명파라거나 하는 생각은 하진 않았는데, 다른 젊은 장교들이 강의 도중 불쑥 혁명 사상을 주입시키거나 고취시키던 것과는 달리, 그 교관은 이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젊은 교관은 낮 동안 자신과 후보생들을 노예처럼 휘몰아치더니, 일과가 끝나면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데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한구석에 틀어박힌 채 조용하고 차분하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기묘한 교관에 대해, 주더는 막연히 묘한 감정을 가지기는 했으나, 그 당시로서는 그가 미래에 무엇을 하고 있을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교관은 이름은 채악(蔡鍔). 이 야위고 허약해 보이는 남자는, 훗날 자신이 조직과 행정면에서 타고난 재능을 지닌 당대의 가장 정력적이고 뛰어난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자, 가장 교활하고 악의적인 관리들까지도 압도할 수 있는 지도자임을 증명했습니다. 흡사 오로지 원세개 개인의 야망을 위해 움직이는 듯했던 시대는, 그에 대한 안배 역시 마련해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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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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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열혈청년 | 작성시간 13.08.05 저때에 중국이 자유민주주의로 나갔다면 지금쯤 엄청난 대국이 되었을텐데 말이죠....우리에게 잘된건지 잘못된건지 그런건 알수 없군요.
  • 작성자2Pac | 작성시간 13.08.06 세계사 교과서에선 청조의 마지막 황제를 퇴위시킨 후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에 올랐다 라고 아주 짧게 나왔는데 청나라의 마지막은 뭔가 조용하고 장렬한 느낌이 없네요.
  • 작성자배달민족 | 작성시간 13.08.06 저 원세개가 싸놓은게 군벌들 아닌가요???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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