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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영국의 역사(외전) : "결코 그는 내 충성의 예를 받을 수 없다."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8.11|조회수849 목록 댓글 0





윌리엄 웰레스의 최후 



 저항하는 스코틀랜드인들을 무너뜨린 칼날의 군주는 다음 목표들을 향해 전진하였다. 스털링 브릿지 전투 이후 스코틀랜드인들의 수중에 있던 스털링 성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지였다. 잉글랜드 왕은 2주간의 포위 끝에 스털링 성을 수복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래 머물기에는 식량의 보급이 문제가 되었다. 왕은 병참보다는 군대를 따르는 상인들에게 주로 의존하였는데, 이것도 충분하지 않아 약탈을 자행해야만 군대를 남서 방향으로 이동 시킬 수 있었다. 그는 9월에는 잉글랜드 영토인 칼라일에 도착했다. 왕은 전투를 계속하길 원했으나, 국내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계획을 포기 할 수 밖에 없었다.


 백작들 역시 휘하 군인들의 피로를 내세워 더 이상 군역을 납부할 수 없음을 주장하였다. 에드워드 1세는 그에 대항한 스코틀랜드 귀족들로부터 몰수한 영지를, 그를 추종하는 자들에게 배분하였다. 그러나 끈질긴 스코틀랜드 인들은 이후 칼라일을 다시 잉글랜드로부터 빼앗아 왔다. 에드워드 1세는 1299년 11월의 겨울 원정으로 이 골치아픈 저항자들을 파멸시킬 생각이었으나, 정작 12월 중순 소집 명령을 내린 16,000명의 보병 중 집합지에 도착한 자들은 2,500명 뿐이었다. 여러가지로 상황이 좋지만은 않았기에 잉글랜드의 군주는 전쟁을 포기하고 고국으로 완전히 귀환하였다.


 이 무렵, 에드워드 1세는 자신의 손아귀에 있던 과거의 존 1세 ─ 존 벨리올을 교황청의 중재로 인해 교황에게 인도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교황은 에드워드 1세와 켄터베리 대주교에게 잉글랜드의 스코틀랜드 침입을 비난하면서, 스코틀랜드는 교황권에 종속되고 그들 사이에 일어난 분쟁의 최종적 판결은 교황에게 있다는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들려오자 스코틀랜드인들은 그의 복위를 위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로버트 브루스가 함께하지 않았다는것은 확실하다. 스코틀랜드의 왕위를 노리는 그에게 있어 존 벨리올은 경쟁자에 불과했다. 이는 존 1세의 복위를 바라던 윌리엄 웰레스와 로버트 브루스의 입장 차이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1299년, 윌리엄 윌레스는 스코틀랜드를 떠나 프랑스에 파견되었다. 필리프 4세에게 스코틀랜드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얻어내고, 에드워드 1세에게 압력을 가해주길 기대한 행동이었다. 그는 1년 무렵 파리에 머물렀던것으로 보이는데, 필리프 4세가 교황청에게 "우리들의 사랑하는 기사 윌리엄 웰레스를 도와주도록 요청한 추천장" *1) 을 보냈기 때문이다. 


 윌리엄 웰레스의 이후 활동에 대한 기록은 없기 때문에 그가 언제, 어떻게 스코틀랜드로 귀환했는지, 또 그의 외교적 노력이 어떤 결과를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에드워드 1세는 존 벨리올이 문제를 일으킬 경우를 대비해 대성당과 수도원들은 "스코틀랜드에 대한 잉글랜드의 상왕권 소유의 증거" 를 찾으라고 명령하였다. 이렇게 정치적인 움직임을 취하는 동시에, 그는 군사적인 행동에도 나서기 시작했다. 골치 아픈 소리를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모두 죽어 나자빠진다면, 굳이 성가신 정치적 입장을 고려할 필요도 없어질 것이었다.


 1303년 5월 20일, 프랑스의 필리프 4세와 평화조약을 체결하는데 성공한 에드워드 1세는 이제 또다시 스코틀랜드를 노리고 있었다. 미래의 로버트 1세는 잉글랜드 왕에게 충실히 봉사하기로 했다. 앞서 말했다시피, 존 벨리올은 로버트 브루스 가문에 있어서도 라이벌이었기에 굳이 그를 위한 투쟁에 로버트 브루스가 발을 담굴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그는 2,000여명이나 되는 병력을 동원하여 상당한 성의를 보였다. 다만 자신은 원정 기간 동안에 서쪽 경게 지방에 남아 있었다.


 윌리엄 웰레스는 이에 대해 저항을 하고 있었으나, 더 이상 스코틀랜드 전체를 대표하지는 못했다. 그는 개별적인 세력으로서 저항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잉글랜드 군은 또다른 저항자들은 존 코민등을 간단하게 소탕했기에, 이제 남은 그를 잡기 위해서 심열을 기울이고 있었다. 윌리엄 웰레스는 셸커크 숲을 기점으로 하여 저항세력을 육성하려고 노력하고 있었으며, 시몬 프레이저(Simon Fraser)와 함께 잉글랜드 북부의 컴벌랜드 국경지대를 침입하였다. 이는 성공하진 못했지만, 끈질긴 저항가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1304년 9월까지 그는 잉글랜드 군과 계속해서 충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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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리엄 웰레스에 대한 에드워드 1세의 증오심은, 그를 잡기 위하여 300마르크의 현상금을 걸고, 한때 윌리엄 웰레스의 전우였던 존 코민, 데이비드 그레함, 시몬 프레이저 등에게 성탄절 이후 20일 이내에 과거의 동지를 잡아 오라고 요구했다는 점에서 엿볼 수 있다. 에드워드 1세는 그들에게 추방형 등을 내렸지만, 일을 해결하는 것을 봐서 형량의 축소를 감안해줄 수 있다고 미끼를 던졌다.


 게중 1304년 에드워드 1세에게 항복한 존 맨타이드(John of Menteith)가 잉글랜드 왕의 충실한 졸개 역할을 해내었다. 그는 윌리엄 웰레스와 친밀한 관계였는데, 자신의 누이의 아들을 윌리엄 웰레스의 추종자로 밀착시켰다. 이 작은 스파이는 윌리엄 웰레스의 움직임을 존 맨타이드에게 보고했고, 기회를 엿보던 존 멘타이드는 "로버트 브루스가 스코틀랜드 왕위를 바라고 있으며, 잉글랜드 왕궁을 떠날 구실을 찾고 있다." 고 윌리엄 웰레스에게 알렸다. 멘타이드의 말에 따르면, 로버트 브루스는 7월 1일 밤에 글래스고에서 그를 만나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윌리엄 웰레스는 여러 날 밤을 거쳐 그를 만나기 위해 말을 타고 달려갔다. *2) 그러나 그를 만나기 위해 눈을 번득이고 있던것은 로버트 브루스가 아니라 존 맨타이드였다. 윌리엄 웰레스가 취침을 하러 갔을때, 존 멘타이드는 60여명의 무장 세력과 함께 현장으로 와서 숙소 주변을 포위한 후, 스코틀랜드의 영웅을 체포하였다. 그는 400마일이나 떨어진 런던으로 이송되어 8월 22일 저녁에 도착한 후, 바로 다음날인 8월 23일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재판을 받았다.


 재판과정에 처벌에 대한 기록은 분명하지 않지만, 에드워드 1세가 그를 신사적으로 대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는 법익권(法益權) 박탈자로 간주되었기에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변호할 기회는 주어지지도 않았으며, "예", 혹은 "아니오" 로 답변하는 것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다. 모든 재판 절차는 사실상 생략되었고 남은 것은 그저 잉글랜드 왕의 의중이 반영된 판결 뿐이었다. 재판관인 존 세그레이브(John de Segrave)는 반역, 선동, 살인, 약탈, 방화 및 다른 중죄로 체포된 흉악범 윌리엄 웰레스가 법정에 출두하고, 재판관들이 어떻게 스코틀랜드의 법과 관행에 따라서 에드워드 1세의 평화를 유지하고 정의를 실행하여야 하는가를 낭송하였다. 윌리엄 웰레스의 죄목에 대하여 재판관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윌리엄 웰레스는 에드워드 1세에 대한 충성의 의무를 저버리고, 그에게 대항하여 여러 중죄를 범하고, 다수의 중죄자들을 규합하여 국왕의 수호자들이나 그의 대리인들을 공격하고, 라나르크의 주지사를 살해하였다. 그 후 다수의 무장한 자들을 규합하여 에드워드 1세의 도시들과 성들을 공격하였으며, 그의 동료들이 잉글랜드 왕국의 노섬버랜드, 컴벌랜드, 웨스트모어랜드 등에 침입하여 살인, 선동, 방화를 자행하고 교회를 황폐화시켰다. 이로 인하여 잉글랜드 왕국이 왕권과 왕위의 존엄성이 파괴되고 약화되어 에드워드 1세는 결국 거대한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를 침입하여, 굳건한 평화를 세워야만 했다." *3)


 이 기소문에서 윌리엄 웰레스는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노렸다기보단 에드워드 1세의 상왕권에 저항한 반역자로 간주되었다. 이후 주심 피터 멜로리(Peter Malory)는 판결문을 낭독하였다.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땅에서 모반, 선동, 방화, 강도, 살인 기타 중죄를 범한 윌리엄 웰레스를 교수형에 처한다. 그리고 법익권이 박탈되었기에 그는 참수되어야만 한다. 한편 그는 잉글랜드 왕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인민들에게 선동, 방화, 살인, 강도 등의 중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그의 시체를 사지 절단할 것이며, 그의 머리는 런던 브릿지에 효수하고, 사지는 뉴캐슬 온 타인, 버웍, 스털링, 퍼스에 효시하여 인민들에게 교훈으로 삼도록 한다." *4)


 에드워드 1세로서는 상왕권을 거부하고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인물이 또 다시 출현하지 못하도록 경고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윌리엄 웰레스는 담담하게 모든 죄목을 인정했으나, 오직 한 가지 죄목만은 부정하였다. 바로 모반죄였다. 그에게 있어 합법적인 군주는 폐위된 존 1세, 존 벨리올 뿐이었으며 에드워드 1세는 자신의 주군이 아니었다. 던바 전투 이후 스코틀랜드의 주교, 백작, 바론, 성직자, 도시민들은 에드워드 1세에게 충성의 맹세를 올렸지만, 그 명단에 윌리엄 웰레스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는다. *5) 결국 윌리엄 웰레스는 배반자가 아닌 단순한 전쟁 포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왕에게는 반역자가 아니다. 그는 나의 왕이 아니다. 나는 그와 아무런 동맹 관계도 없다. 그는 결코 나에게서 신하의 예를 받을 수도 없고, 나의 생명이 이런 박해받는 육신 속에 두고 있는 한, 결코 그는 내 충성의 예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6)


 몇몇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심오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이 글은 애버딘의 유니언 테라스에 옮겨져 있다. 윌리엄 웰레스는 런던의 거리려 내몰려 교수형이 집행될 스미스필드까지 질질 끌려갔다. 교수형에 처해진 그는 아직 숨이 멎기전 내려져 창자가 끄집어내졌으며, 이후 머리를 비롯한 사지가 잘려나갔다. 어떤 이들은 그가 행한 행위보다 더 잔혹한 최후가 아닌가 하고 평가하였다. *7)


 잔혹한 형벌이 본보기를 위한 관점이라면, 에드워드 1세의 행동은 그다지 효과적이진 못했다. 행동의 지도자를 죽이는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손발을 자를 수 있는 가장 편리한 수단이나, 그 과정이 너무나 극적이라면 이는 오히려 순교자를 만들어줄 뿐이다. 스미스필드의 소식은 여러곳으로 전해졌고,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뒤흔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실상 행동의 지도자는 모두 뽑혀나간 것이 아니었다. 스코틀랜드에는 아직 로버트 브루스가 있었다. 

  




 *1) 홍성표,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 운동의 역사적 기원, pp. 127 

 *2) 그가 체포된 지역은 글래스고 대성당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이었는데, 윌리엄 웰레스가 글래스고 주교인 로버트 위샤트(Robert Wishart)와 접촉을 시도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로버트 위샤트는 스코틀랜드 독립 투쟁의 든든한 후원자였기 때문이다. ─ Ibid pp. 130

 *3) Ibid pp. 132

 *4) 오른팔은 뉴캐슬 온타인, 왼 팔은 버윅, 오른 쪽 다른 퍼스, 왼쪽 다리는 스털링에 걸렸다. 연대기 작가에 따라 스털링이 아니라 애버딘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 Ibid pp.132

 *5) A. A. M. Duncan, ed., Scotland from the Earliest Times TO 1603, p. 154; Barrow, Robert Bruce, p. 102  

 *6) 김현수, 왕실 스코틀랜드 : 영국사 pp. 38

 *7) Ibid pp.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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