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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영국의 역사 : 에드워드 3세와 백년전쟁의 서막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8.22|조회수649 목록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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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3세(1327 ∼ 1377)



 어린 군주가 즉위한 잉글랜드는 그의 치세 3년 동안은 어머니 이사벨과 그녀의 정부(情夫) 모티머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1) 모티머가 행한 모든 일은 그의 탐욕과 연관되었다. 그는 마치(March) 백이라는 새로운 작위를 차지하고, 살해된 에드워드 2세의 아우 켄트 백을 음모로 몰아 역시 살해했다. 이 행동은 그의 지지자들을 떨어지게 만들고 말았다. 이 행동은 그의 지지자들을 떨어져나가게 했다. 선왕의 시절에 죽은 랭커스터 백 토머스의 동생인 헨리는 모티머의 적대자가 되었고, 모티머의 독단적 통치와 어머니의 행실에 혐오감을 느끼게 된 에드워드 3세는 새로 랭커스터 백이 된 헨리를 비롯한 젊은 귀족들과 동맹, 왕권을 강화했고 어느날 갑자기 모티머가 머물고 있는 노팅엄 성을 어머니가 모르게 공격하였다.


 모티머는 성 안에서 호위병에 둘러싸여 있었으나, 야음을 틈탄 병사들은 비밀 통로를 타고 잠입하여 그를 체포하는데 성공했다. 의회는 그의 유죄를 선고하여 교수형에 처하였고, 이사벨은 노퍼크의 라이징(Rising) 성에 유폐되었다. 그녀는 이후 28년간의 여생을 성 안에서 보내야만 했다.


 이렇게 해서 나이 18세의 에드워드는 친정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잉글랜드는 20여년 만에 다시 유능한 군주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버지와는 달리 에드워드는 어려서부터 기사적 생활 방식에 깊이 젖어있었고, 성인이 되면서 승마를 좋아하고 창시합, 마상시합, 사냥 등 전투의 위험을 즐겼다. 그의 용기와 성실함과 관대함은 모든 젊은 귀족층 기사들이 추종할 모범으로 여겨졌다. 그는 사람들의 충언을 구하고 받아들였으며, 이는 그의 인기를 폭발적으로 만들어주었다. 에드워드 3세는 성급하고 통찰력이 부족하다는 약점도 있었지만, 사치와 겉치레를 좋아하고, 전쟁과 기사도의 화려함과 장엄함을 사랑한 낭만적인 기사 군주라면 14세기 유럽에서는 높은 평판을 받기 좋은 편이었다.


 이 기사 군주의 첫번째 전투는 에드워드 1세 이후로 분란이 끊이지 않는 스코틀랜드에서 시작되었다. 그가 즉위할 무렵에 로버트 1세는 잉글랜드의 북부를 유린했고, 재정이 바닥난 잉글랜드는 마땅한 대처를 할 수도 없었다. 1329년 골치아픈 로버트 1세는 사망했고, 그의 다섯 살 짜리 아들 데이비드 2세가 후사를 이었다. 한편 로버트 1세가 잉글랜드의 군단을 격파했던 베넉번 전투에서 잉글랜드에 협력하여 토지소유권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복수를 갈망하고 있었고, 마침 과거 스코틀랜드의 존 1세로 즉위했던 존 벨리올의 아들 에드워드 벨리올이 스코틀랜드 왕위에 대한 상속권을 주장하고 나서면서 지지 할 수 있는 발판을 얻었다. 에드워드 벨리올과 몰락 집단은 서로의 이익의 추구에서 공통점을 찾아 협력하였고, 그들의 뒤에는 스코틀랜드의 국론을 분열시키려 했던 에드워드 3세가 있었다.


 1332년 에드워드 벨리올의 집단은 3,000명 가량의 용병 집단을 동원하여 데이비드 2세에게 도전하였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로버트 1세를 도운 유력 지휘관들이 사망하여 군대를 이끌 핵심적인 인물이 부족하였다. 이에 8월 11일 벌어진 전투에서 데이비드 2세의 군단은 더 많은 병력에도 불구하고 패배하였고, 에드워드 벨리올은 스코틀랜드의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는 이미 잉글랜드의 왕에게 비밀리에 신서를 했기에, 에드워드 3세는 그의 즉위를 묵인해주었다. *2)


 그러나 데이비드 2세의 집단은 이내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결국 밀리다 못핸 에드워드 벨리올은 조금 더 직접적인 지원을 에드워드 3세에게 요청하였다. 왕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베넉번에서의 굴욕을 갚기 위하여 몸소 군사를 이끌고 나섰다. 1333년 베리크 근처 핼러든 힐(Halidon Hill)이 전투에서 잉글랜드의 군주는 스코틀랜드 군사들을 완벽하게 격파하였고, 스코틀랜드 진영에서는 왕국의 보호자, 5명의 백작들, 다수의 바론들, 기사들, 수천 명이 보병들이 사망하였다. 다시 왕으로 즉위한 에드워드 벨리올은 포스 강 남쪽 8개 주지사령에 대한 지배권을 잉글랜드에 양도하였다. 


 그러나 에드워드 3세는 에드워드 벨리올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다. 또한 에드워드 벨리올은 자신의 내부 세력을 결집시키는데도 실패했고, 그 사이 데비이드 2세의 진영은 점점 강력해지고 있었고, 점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에드워드 벨리올의 세력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잠시 프랑스로 몸을 피했던 데비이드 2세도 1341년에 귀환하여 자신의 우위를 확실하게 확립시켰다. *3) 


 에드워드 3세는 이러한 저항의 배후에는 프랑스 왕의 간교한 음모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스코틀랜드를 차지하더라도 프랑스 왕이 아키텐의 봉토를 몰수하려 들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스코틀랜드의 저항을 완전히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먼저 프랑스와의 일전이 불가피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는 "꺾기 어려운 (스코틀랜드의) 엉컹퀴를 따느니, 이름 높은 (프랑스의) 백합을 꺾는 편이 유익하고 손쉬우며, 더 자랑스러운 일." 이라고 말하였다. *4)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문제에 집중하면서 스코틀랜드의 상황은 데이비드 2세에게 호전된 방향으로 흘렀다.


 


 프랑스 원정은 잉글랜드 내부의 시끄럽고 위험한 불순분자들에게 새로운 모험을 제공할 수 있는, 일종의 십자군 전쟁과 같은 역할을 기대할 수도 있었고, 스코틀랜드에서 프랑스 왕의 불순한 책략을 차단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잉글랜드 상인들의 주요한 고객으로서, 잉글랜드의 양모 무역에 밀접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던 플랑드르의 여러 도시들에 프랑스의 세력이 미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이유는 가스코뉴에 대한 지배권을 두고 양국이 대립한 까닭이었다.


 프랑스의 필리프 6세(Philippe VI de Valois)는 아키텐에서 에드워드가 가지고 있는 영주권을 자신의 종주권 아래 두고자 했다. 이에 대항하는 에드워드 3세는 아예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며 나섰다. 카페 왕조 최후의 군주인 샤를 4세(Charles IV)가 사망하였을때, 카페의 혈통은 에드워드 2세의 왕비이자 필리프 4세의 딸이며, 에드워드 3세의 어머니인 이사벨이 유일하였다. 따라서 에드워드 3세에게는 모계 혈통으로 카페 왕조의 피가  흐르고 있었기에, 왕위를 주장할 법적인 근거는 충분히 있었던 셈이다.


 이에 대해 프랑스의 제후들이나 사제들은 프랑크 왕국(Frankenreich)의 시대부터 프랑스는 오직 남계(男系)만이 왕위에 오를 수 있다는 살릭 법(Salic law)을 내세워 이에 반박하였다.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었기에 에드워드 3세는 이 주장을 내세우며 프랑스를 압박하고, 주장을 철회하는 대가로 유럽 최대의 포도주 생산지인 기옌(Guyenne) *5) 의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였다. 필리프은 이를 거절했고, 만일 에드워드 3세가 잉글랜드의 완전한 주권자가 되려고 한다면, 아키텐을 그의 막내아들에게 주고 그 아들이 프랑스 왕의 봉신 노릇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양측이 주장을 굽히지 않고 플랑드르에서의 문제가 커져가자 결국 1337년,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의 왕위를 요구하며 전쟁을 일으켰다. 이 당시는 필리프 6세가 즉위한 지 이미 10여년 무렵이 되었기에 에드워드의 주장은 주장 자체에 목적이 있다기보다는, 명분적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었다. 이로써 장구한 백년전쟁이 발발했다. 프랑스 왕위에 대한 잉글랜드의 요구는 명목상 심지어 조지 3세(George III) 시대에도 유지되었으며, 나폴레옹 전쟁(Napoleonic Wars) 무렵 체결된 1802년의 아미앵 조약(Treaty of Amiens)에서 포기되었다. *6)






에드워드의 대프랑스 전쟁은 거창하게 전개되었다. 그는 많은 돈을 뿌려 독일 황제 루드비히 4세(Ludwig IV)를 비롯한 저지방(네덜란드) 및 라인 강 유역의 지배자들과 동맹을 맺었고, 플랑드르 도시들에서 모직물업자들의 지지를 확보하였다. 플랑드르는 전쟁이 일어나면 잉글랜드를 적극 지원하겠다고 나섰으며, 양모를 공급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잉글랜드 령이었던 가스코뉴에서는 중부 프랑스로 향하는 접근로를 열어주려 하였다. 의욕이 충만해진 에드워드 3세는 1338년 플랑드르로 건너갔으나, 1340년까지 소규모 전투만 두 차례 벌였을 뿐 제대로 된 싸움을 치루지 못하였다.



File:BattleofSluys.jpeg



 이 시기 동안 에드워드 3세가 제대로 거둔 승리는 오직 1340년 6월의 슬로이스 전투(Battle of Sluys) 뿐이었다. 당시 슬로이스 항구로 나가는 즈윈(Zwin) 강 어구에 정박하고 있던 프랑스의 대함대는 잉글랜드 상선과 해군의 움직임을 제약하고 있었는데, 에드워드는 항해술에 익숙한 소함대를 지휘하여 이를 섬멸하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그 사이에 사용된 막대한 전비로 잉글랜드의 재정은 바닥이 나버렸고, 전쟁은 제대로 시작되기도 전에 휴전이 선언되었으며, 에드워드 3세는 분노와 실망만을 안고 잉글랜드로 귀환하였다.


 첫 번째 원정은 에드워드에게 새로운 전쟁 방식을 요구하였다. 즉, 프랑스 내부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으로서 이는 동맹군의 원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는것보다 적극적이었고, 약탈을 통해 보급품을 얻을 수도 있었다. 1341년 브르타뉴 공령의 상속을 둘러싼 문제에서 다시 양국의 분쟁이 발새하자 1342년 에드워드는 브르타뉴로 침입하기 시작했다. 그는 오래 지나지 않아 그 대부분을 석권하였고, 브르타뉴는 영국이 프랑스로 깊숙히 침공하기 위한 기지가 되었다.





 1345년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의 맏아들 '흑태자 에드워드(Edward, the Black Prince)' 와 함께 노르망디에 상류갛였고, 이듬해 9천여명에서 만여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노르망디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횡단하여 나갔다. 그는 캉(Caen) 시를 유린하고 프와시(Poissy)에서 센(Seine) 강을 건너 파리로 향했으나, 프랑스군에 저지당하자 다시 진로를 북쪽으로 돌려 퐁티외와 솜 강 지역으로 나아갔다. 필리프 6세는 잉글랜드군의 몇 배나 되는 대군으로 이를 따라잡기 위해 추격하였으나 실패했고, 8월 26일 아미앵 북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크레시 언덕 위에 포진한 잉글랜드군을 만나게 되었다.


 
File:Battle of Crecy, 26 August 1346.png



 해질 무렵 프랑스군 쪽에서는 나팔과 북을 두드리면서 선제 공격을 시작하였다. 프랑스의 석궁병들은 앞장서서 화살을 날렸으나, 날아거는 거리가 짦은 석궁 화살들은 언덕에 포진한 잉글랜드 군에게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하였다. 이 모습을 보고 분개한 프랑스의 중무장 기사들은 석궁병들을 앞질러 적진을 향해 공격을 시작하였다. 이때 잉글랜드 군은 먼 거리까지 날아가는 장궁 부대를 동원해 그들을 향해서 집중적으로 화살을 쏟아부었다. 프랑스 군은 맥없이 당하고 말았다.


 격렬한 공격으로 인한 먼지가 걷힐 무렵, 프랑스 기병들은 잉글랜드 군을 향해 다시 한번 집념의 돌진을 시도했으나, 이미 이를 예측하고 있던 잉글랜드 군은 깊은 홈을 파고 기다리고 있었다. 전투용 도끼, 창, 칼 등과 중무장 갑옷을 입은 프랑스 기병들은 이 구덩이에 빠지면서 자신들의 무게에 짓눌려 처참하게 죽어갔다. 이러한 상황이 이어지면서 잉글랜드 군은 프랑스 군을 학살에 가까운 상황으로 몰아 넣었다. 새벽녘이 될 즈음, 잉글랜드 군은 프랑스 왕과 일단의 기사들이 이미 도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7)


 장궁은 기술적으로는 석궁에 뒤떨어진 무기지만 잉글랜드 군은 기술과 훈련, 자신들의 능력으로 이를 극복하였다. 잉글랜드의 거의 모든 마을에는 활터가 있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힘든 훈련을 받았고, 그들의 노력이 담긴 일개 평민들의 화살은 무적과도 같았던 기사들을 땅바닥에 떨어뜨렸으며, 500년에 걸친 기병과 봉건 기사들의 시대를 끝장나게 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8)
 




*1) 왕의 명목상의 후견인은 랭커스터 백작 헨리였지만, 실권은 모티머에게 있었다. ─ 김현수, 이야기 영국사 pp.163

*2) 홍성표,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운동의 역사적 기원 pp. 274 ~ 275

*3) Ibid pp. 276

*4) 나종일, 영국의 역사 pp. 173

*5) 김현수, 이야기 영국사 pp. 167

*6) 나종일, 영국의 역사 pp. 175

*5) 김현수, 이야기 영국사 pp. 170

*8) 나종일, 영국의 역사 pp. 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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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튜어니즘. | 작성시간 13.08.23 백년전쟁에 대해서 언제나 관심이 많았는데,고맙습니다. 앞으로 연재 기대하겠습니다.
  • 작성자푸른 장미 | 작성시간 13.08.23 글자 크기를 좀 키워주시면 어떨까요? 글자가 너무 작으면 읽기에 좀 힘들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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