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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영국의 역사 : 리처드 2세와 농민반란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8.31|조회수713 목록 댓글 1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전쟁



 에드워드 3세에게는 몇가지 결점이 없지는 않았지만, 전쟁에서의 승리는 그러한 결점을 모두 뒤덮는 인기를 잉글랜드 왕에게 선물했다. 이는 존이나 헨리 3세, 에드워드 2세가 그토록 원했지만 실패했던 것이었다. 왕의 군사적 영광은 주로 프랑스와의 전쟁이었지만, 선왕의 시대에 굴욕적인 기억을 안겼던 스코틀랜드에 대해서도 그는 성공을 거듭했다.


 1346년,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2세는 잉글랜드로 침입해 왔다. 스코틀랜드 영토 중 일부, 즉 중요한 세 곳의 요새인 남서쪽의 로크마밴 성, 중부 국경지대에 있는 제드버러 성, 동부 해안지대에 있는 버웍 성과 도시가 여전히 잉글랜드인의 수중에 있었다. 또한 데이비드 2세의 군사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 3세는 여전히 에드워드 벨리올을 지지하고 있었으며, 스코틀랜드인들 역시 로버트 1세의 영광을 데이비드 2세가 다시 이루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프랑스와의 공수 동맹으로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를 공격해야할 의무가 있었다. 1346년 6-7월 경 에드워드 3세의 노르망디 공격이 실현되자 프랑스의 필립 6세는 스코틀랜드의 도움을 구하였다.


 그러나 1346년 10월, 스코틀랜드 인들은 네빌스 크로스(Neville's Cross) 전투에서 굴욕적인 참패를 당했을 뿐이다. 데이비드 2세는 잉글랜드 군의 존 쿠프랜드(John de Coupland)에게 두 발의 화살을 맞고 치욕스럽게 포로로 잡히는 등 크게 패배하였다. 이때 스코틀랜드 군의 1/3은 싸우지도 않고 도망쳤다.


 패배의 원인은 스코틀랜드 군의 실수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위치 선정을 잘못하여 경사가 매우 급한 곳에 진을 쳤고, 이는 베넥번 전투에서 로버트 1세가 최적의 위치 선정을 통해 승리를 얻어낸 일과 대비가 된다. 따라서 이 패배는 지휘관의 군사적 식견의 결핍이 원인이었다.


 포로로 잡힌 데이비드 2세는 가혹한 조건을 내세운 잉글랜드와 협상할 수 밖에 없었다. 협상안 중에서 가장 가혹했던 것은 포로석방금으로 100,000마르크를 지불하는 것이었다. 이는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와의 전쟁에 필요한 전비를 마련하는데 큰 도움을 줄만한 액수였다. 또한 전쟁에서 승리한 에드워드 3세는 버웍, 록스버러, 셀커크, 피블즈, 덤프리스의 주지사령을 잉글랜드 소유로 만들었다. 그러나 네빌스 크로스 전투의 피해가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데이비드 2세와 신하들과의 갈등, 그의 포로 석방금의 마련 등으로 전쟁에서 패배한 스코틀랜드는 혼란해 빠졌다. 


 역설적으로 데이비드 2세의 실패와 이로 인한 혼란이 브루스 가문과 플랜테지니트 양측의 평화를 초래하였다. 사실 두 왕국 모두 전투를 할 여유가 없기도 했다. 당시 유럽 전역에 큰 피해를 입히고 있던 흑사병은 1349년 겨울에 드디어 스코틀랜드에도 미쳐 스코틀랜드 전역에 전파가 되고 말았다. 흑사병 만연으로 인하여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간의 전쟁도 소강상태를 이루었다. *1)




리처드 2세(1377 ~ 1399)


 이렇게 국외에서 성공을 거듭하고 이에 따라 내부의 음모가들이 감히 기를 펴지 못하던 시기를 지나, 1377년 에드워드의 사후 그의 손자이자 흑태자의 아들 리처드가 겨우 10여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나이가 어린 왕이 즉위하게 되면서 몇몇 부유한 유력자들은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들은 왕의 삼촌들인 랭커스터 공 곤트의 존, 후에 글로스터 공이 된 요크 공 에드먼드 랭리(Langley), 우드스톡(Woodstock)의 토머스 세 사람이었다. 그 외에 애런들, 워리크, 노팅엄 백들이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었다.


 왕의 소년기 동안 나라의 정치는 영주들의 자문회의에 맡겨졌다. 그 중 가장 유력한 자문관은 왕의 큰 삼촌인 곤트의 존으로서 그는 방대한 랭커스터 공령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리처드의 처음 치세 5년 동안 국가는 프랑스와의 전쟁에 주력했지만, 전세는 불리했고 하원은 성과 없는 전쟁을 위해 자금을 대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게다가 사회적 - 경제적 문제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여 위기의식은 높아져만 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381년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농민반란은 사전에 계획된 것이라기보다는 자연 발생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갑작스러운 폭발이라기보다는 오랫동안 쌓여온 불만의 분출이었다. 농민들은 장원의 각종 의무를 강화하며, 노동자법을 통해서 임금을 억제하려고 한 토지소유자 계층을 미워했다. 그들은 고위 성직자들의 부와 세속화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며, 교회 재산의 몰수와 청빈으로의 복귀를 주장하면서 교회의 계서제와 제물 소유를 비난하고 다닌 롤라드(Lollard)들의 설교에 고무되었다.


 이러한 여러가지 불평불만이 고여있는 상태에서, 잉글랜드는 텅빈 국고를 보충하기 위해 15세 이상의 전 주민들을 상대로 인두세를 매겨 세정을 실시했다가 국민의 반감만 높아지는 결과를 얻었으며, 그런 가운데 영주 지배 자체에 대한 농민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이제까지는 주로 재산 소유 계층에 부과된 10분의 1세나 15분의 1세로 프랑스와의 전쟁 비용을 염출해 오던 의회였지만, 이 추가된 인두세를 따르자면 부유한 공작이나 가난한 농노 모두 똑같이 1실링을 내야만 되었던 것이다.


 이미 세금 자체가 불공평한 상화에서 징수자들의 혹독한 태도는 농민들의 반감을 폭발시켰다. 그러나 농민 반란은 빈민뿐만 아니라 부유한 장인들과 농노들까지 가담했다. 쉽게 빠질 수 있는 오해지만, 농민들의 처지가 이전보다 더욱 열악하게 되었기에 반란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반란자들은 절망적이며 굶주린 사람들이 아니라, 토지를 가진 농민으로서 지위가 상승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경제적 조건은 꾸준히 개선되고 있었다. 노동력의 부족으로 임금은 물가보다 급속하게 올라가고 있었고, 농노들 중에는 상당한 재산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이렇게 지위가 웬만큼 상승한 농민들은 이제 부담이 크고 억압적인 농노제를 더 이상 용인하려 들지 않았으며, 그래서 농노제의 폐지와 지대의 감면을 요구하고 나섰던 것이다. 또한 정부의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정책에 질린 장인이나 심지어 몇몇 기사들까지 반란에 가담하였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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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란은 켄트, 에식스, 이스트 앵글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381년 5월 에식스의 마을 주민들은 세금 납부를 거부하며 봉기를 일으켰고 이는 곧 주 전체로 번졌다. 반란 진압의 임무를 가지고 파견된 판사마저 농민들에게 붙잡혔으며, 6월이 되어 소요는 켄트에 이르렀다. 반란은 윌터(Walter)이라는 이름의 병사였던 것으로 짐작되지만 나중에는 그의 생업으로 인해 와트 타일러(Wat Tyler)로 불린 사람의 지도 하에 켄트와 에식스의 마을과 도시의 주민들은 무장대를 형성하여 런던을 향해 진격하는데 이르렀고, 다트퍼드(Dartfod)에 집결하고 로체스터를 지나 메이드스턴(Maidstone)에 진줄하면서 더욱 세력이 불어난 군중은 성을 점령하고 관헌 당국에 항거했다.


 이 과정에서 장원과 종교 건물들은 주요한 공격 대상이 되었으며, 농노의 부담이 기록된 장원 문서가 파손되고 미움받은 영주들과 수도원장들이 살해되었다. 켄터베리에서는 군중이 성당으로 진입하여 떠돌이 신부 존 볼을 감옥에서 석방시켰다. 반란자들은 이틀 만에 그리니치(Greenwich)의 블랙히스(Black - heath)에 도달했으며, 에식스에서 온 사람들은 시티(CIty)의 동쪽 성문인 올드게이트 밖의 마일 엔드(Mile End)까지 이르렀다. 존 볼이 그 유명한 설교를 한 것이 이 무렵으로 추정된다.


 "아담이 밭 갈고 이브가 길쌈하던 때에, 누가 귀족이었단 말인가?(When Adam delved and Eve span,Who was then the gentleman?)"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윈저에서 런던탑에 온 14살의 어린 왕 리처드는 6월 13일 목요일에 상서경인 켄터베리 대주교 사이먼 서드베리(Simon Sudbury), 재무간과 여러 자문관들을 대동한 채 반도들과 면담하기 위해 배를 타고 그리니치로 향했다. 그러나 그들은 폭도들을 실제로 보자 겁에 질려 감히 상륙할 엄도도 내지 못하였다. 왕의 배가 되돌아가는 것을 본 타일러는 무리를 이끌고 서쪽으로 나아갔으며, 서더크에서 마셜시 감옥의 문을 열어 램버스에서는 캔터베리 대주교의 집을 약탈한 뒤 런던 브릿지에 다다랐다. 다리에서 그들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런던의 반란자들이 그들에게 합류하였다.


 이후 그들은 템플 법학원에 난입하여 법률 문서들을 불태워고, 외국 상인들의 상점을 공격했다. 그들은 고트의 존에 사보이 궁을 향해 내달렸고, 공작은 몸을 피했지만 그의 가정의와 수위장은 피살되었으며 궁전은 약탈되고 방화되었다. 불길에 덮힌 화약 상자의 폭발로 큰 홀은 무너지고 지하 창고에서 공작의 포도주를 들이키고 있던 폭도 32명은 무너진 천장에 깔려 죽었다.


 광란의 약탈은 다음날에도 멈추지 않았다. 폭도들은 런던탑을 공격했으며, 도대교를 끌어내리고 침입하여 왕대비의처소로 쳐들어가다. 왕대비는 간신히 몸을 피하였으나 반란자들은 세인트 존 예배당에서 기도를 하고 있던 재무경과 켄터베리 대주교를 찾아내어 그들을 끌어내 목을 베었으며, 머리를 창 끝에 꽂아 들고 시내를 돌아다녔다. 리처드 2세는 런던 교이 마일엔드에서 측근이 일러준 각본대로 반란군들과 만났고, 그 자리에서 농토를 값싸게 공급할 것과 자유로운 거래, 농노제 및 강제노동 철폐를 약속했다. 하지만 타일러의 무리들이 해산을 거부하였기에, 양측은 다음날 다시 만나게 되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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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요일에 왕은 런던 시장 윌리엄 월워스와 함께 스미스필드에서 다시 반도들을 만났다. 그들은 잉글랜드 내에서 국왕 이외에 어떤 영주도 존재 할 수 없다는것, 한 사람 이외에 주교는 없애고 교회 재산을 교구 주민들에게 분배할 것, 농노제를 완전히 폐지할 것,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등할 것을 요구했다. 거의 대부분 무리한 조건들이었으나 만사가 급했던 왕은 반도들의 요구를 대부분 받아들였다. 그러나 타일러의 불손한 태도에 격분한 런던 시장은 그를 칼등으로 내리쳐 말에서 떨어뜨렸고, 왕의 종자들은 떨어진 타일러를 찔러서 죽였다.


 이를 본 반도들이 무기를 휘두르면서 달려들려고 하자 리처드 2세는 그들을 향해 말을 달려나가면서 "여러분, 그대들의 왕을 죽이려 하는가? 내가 바로 여러분의 대장이다. 나를 따르라." 고 소리쳤다. 아직 국왕에 대한 존경심을 버리지 않았던 농민들은 순순히 이에 따랐으며, 왕이 그들에게 보장한 약속을 지키리라 믿고 해산했다. 하지만 국왕과 귀족들은 약속을 지킬 생각이 애시당초 없었다.


 가장 결정적이었던 런던의 반란자들은 이렇게 무너지고 말았지만, 반란은 이제 지방으로 번져나갔다. 런던 주변의 여러 마을에서 약탈과 방화가 자행되었고, 햄프셔의 윈체스터와 요크셔의 베벌리, 스카버러에서도 폭동이 일어났다. 하트퍼드셔에서는 세인트 울번즈 수도원의 작인들이 숲에서의 사냥, 냇가에서의 고기잡이, 자기 집에서의 제분, 자신들끼리의 토지 매매 등의 권리를 요구하면서 수도원을 포기하고 끝내 수도원장으로부터 해방의 문서를 엇어냈다. 최악의 반란은 이스트 앵글리아에서 일어났는데, 여시너는 파괴만이 아니라 살상과 보복이 잇따랐다. 서퍼크의 베리 슨트 에드먼드 수도원에서는 작인들이 수도원에 쳐들어가 약탈과 상해를 자행했다. 노퍼크에서는 일단의 반란자들이 노리치를 약탈하고 야머스로 진군하여 장원 기록을 모조리 파괴했다.


 그러나 6월 25일 경 노위치 주교 헨리 르 디스펜서가 이스트 앵글리아에서 존 리치의 반란군을 격파함에 따라 농민반란은 마침내 진압되었다. 탄압은 가혹했고, 수많은 반란자들은 처형되었다.


 이 반란으로 인해 농민들이 얻은 것은 당장의 약탈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일 엔드에서 국왕이 약속한 특허장을 요구하기 위해 찾아온 에식스의 한 농민 대표에게, 리처드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너희는 농노이며, 앞으로도 여전히 농노일 것이다." *4)


 폭동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다시 그들의 마을로, 그리고 이전과 다름없는 삶으로 되돌아갔다. 농민들에게는 정치적 힘이 없었고, 젠트리층이나 귀족층은 무론이고 상인층에서도 동맹자를 찾지 못하여 그들의 반란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당시의 사회경제 체제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작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농산물 가격과 지대의 하락, 임금의 상승, 부역노동의 감소, 무경작 토지 등에 직면한 영주들은 농노들의 부담을 엄격하게 강요할 수 없었으며, 그 결과 농노제는 서서히 쇠퇴해 갔고 1485년 경에 이르면 사실상 소멸되었다.


 



*1) 홍성표,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 운동의 역사적 기원 pp. 278~280   

*2) 나종일, 영국의 역사 pp. 195 ~ 196

*3) 김현수, 이야기 영국사 pp. 179

*4) 나종일, 영국의 역사 pp.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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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2Pac | 작성시간 13.09.02 이게 바로 와트 타일러의 난이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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