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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당태종 이세민(1) ─ 거병과 눈부신 무공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4.06|조회수1,072 목록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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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하위키라든지 여기저기서 인용 수준이 아니라 통쨰로 내용이 똑같은 글이 있다면, 제가 작성한 글이라고 보시면 될듯 합니다. 좀 같은글을 여기저기 올리는 편이거든요.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은 중국 역사상 매우 유명한 군주이며, 국내에도 고구려 침공으로 아주 잘 알려져 있는 황제입니다.  이세민은 당나라가 이룩되는데 매우 큰 공을 세웠고 그 전성기를 열었기 때문에 당나라를 이야기 하면서 절대로 빼놓을 수가 없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세민이라는 이름은 제세안민(濟世安民), 즉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어린 시절

이세민의 아버지는 당국공(唐國公) 이연(李淵)으로, 훗날의 당고조(唐高祖)가 되는 인물입니다. 이연의 집안은 상당한 가문이었는데 당국공은 세습되어 내려온 지위였고, 수나라의 수양제(隋煬帝) 양광(楊廣)과는 이종 사촌 사이였습니다.

이연의 아내, 이세민의 어머니도 상당한 사람이었습니다. 두씨의 아버지 두의(竇毅)는 멸망한 북주(北周)에서 신무공(神武公)에 봉해졌던 사람이고 황실과 결혼 관계를 맺어 인척이기도 했습니다. 주나라의 무제(武帝)에게 어린 나이로 조언을 하기도 했고 궁궐을 드나들며 자라면서 주변의 사정을 잘 알던 사람이었습니다. 수문제(隋文帝) 양견(楊堅)이 북주의 정권을 찬탈했을때는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남자로 태어나서 외삼촌의 나라를 구해야 했을텐데!"

이런 여장부와 이연이 결혼하게 된것도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있는데, 어느날 두의는 딸이 혼기가 차자 독특한 방법으로 사내를 찾으려고 하였습니다. 그 영감은 대문 앞에 두 마리의 공작 그림을 걸어놓고는, 백보 앞에서 화살을 쏘아 보라고 하였는데 게중에 공작의 눈을 맞추는 사람이 이싿면 딸을 주겠다는 것이었지요.

사람들이 다 물만 먹고 있을때 이연이 나섰습니다. 활을 쏜 그는 백발백중하였고, 결국 현명한 미인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둘은 매우 사이가 좋았습니다. 여기에서 나온 아이들은 4남 1녀였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아들 이건성(李建成)
둘째 아들 이세민
셋쩨 아들 이현패(李玄覇)
넷째 아들 이원길(李元吉)

딸 평양소공주(平陽昭公主)


셋째인 현패는 빨리죽고 말았습니다. 나머지는 다 전부 이야깃거리가 있죠. 심지어 평양소공주까지도. 여하튼 섬서(陝西)의 무공(武功) 지역, 599년 1월 23일. 수나라의 번영을 이끌었던 수문제의 개황(開皇)의 치가 19년에 접어들고 있을때 이세민은 태어났습니다. 용이 그 주변을 맴돌았다, 아이가 태어난지 얼마 안된 후에 점쟁이가 이세민의 얼굴을 보고 "귀인이다" 라고 했다는 등, 거의 당연스레 따라오는 이야기가 덧붙여지지만 특이한것은 보통 이런 이야기는 개국 군주의 일대기에서 나오는 법인데, 당태종의 이야기에 이런 소리들이 덧붙혀졌다는 것입니다. 즉 그만큼 이세민이 당나라 개국에 많은 공을 세웠다고 볼 수 있지요.


어린 시절 이세민이 어떤 것을 하였고 무엇을 했을지는 모르지만, 훗날 당태종이 된 이세민은 위징(魏徵)에게 "내가 공부를 안하고 싸우는 기술만 익혀서 황제 노릇하기가 힘들다." 라는 말을 했고, 도박하고 돌면서 무리 지어 다니기를 좋아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상당히 책과 칼 쪽에서 칼을 많이 다루었던 듯 합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태도는 도움이 되었습니다. 거리를 다니면서 익혀둔 얼굴들은 거병에 도움이 되었고, 칼을 잡으며 익힌 무예와 기술들은 전장을 휩쓰는데 영향을 미쳤습니다.


진양기병

진양(晉陽)의 위치는, 아마 삼국지 시리즈를 하셨다면 아실 것입니다(물론 삼국지 시리즈의 도시 지도를 실제 지도라고 믿으면 안되겠지만, 어쨌든 대략적으로). 태원이라고도 불리고, 나중에 오대 십국 시절에는 이극용(李克用) 일파가 근거지를 잡기도 하지요.

616년, 태원유수로 임명된 이연은 이 지역에 세력을 잡았습니다. 우선 농민 봉기를 진압했고, 그 다음은 돌궐(突厥)이 문제였습니다.

돌궐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북위(北魏)가 세력이 막강할당시, 북방의 패권을 쥔 유목민족은 유연(柔然)이었습니다. 돌궐은 그 밑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우두머리인 부민(Bumin)은 그 댓가로 유연의 공주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유연에서는 거절했죠.

이에 부민은 앙심을 품고 중원의 왕조와 협력하면서 유연을 무너뜨리고 그 세력을 흡수했습니다. 부민이 죽고 돌궐은 그의 동생과 아들에 의해 동서돌궐로 나뉘었는데, 이 모든 영토는 카스피 해, 바이칼 호, 내몽골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영토였습니다.

동, 서돌궐이 다투게 된데다가 서돌궐은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페르시아의 바흐람 추빈(Bahram Chubin)이라는 장군에게 대패하는등 세력이 약해졌지만 아무튼 이 시점에서는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는 제국 중에 하나라고 할 수도 있었습니다.


여하간에, 돌궐이 공격해왔습니다. 이연은 져버렸고, 포악한 수양제의 보복이 두려웠습니다. 이연은 '처벌을 받으니 차라리 먼저 손을 쓰는' 생각으로 하동(河東)에 있는 장남 이건성을 서둘리 불러들이는 등 준비를 했습니다.


이 진양에서의 일에 대해서 '이세민이 주도했다'와 '이연이 주도했다' 라는 두 가지 입장이 있는데 굳이 여기서 세세하게 따질 필요는 없을테고, 어찌되었건 결정을 내리는건 이연이었습니다. 그리고 명령에 따라 착착 일을 진행시켜야 할 임무를 가진것은 이세민이었구요.


이 거병 과정에서 공을 세운것은 네명이었습니다.

이연, 당연한 소리죠.
이세민
배적(培積). 이연의 가장 친한 친구입니다.
유문정(劉文靜). 진양령(晋陽令)이었습니다. 


당시 진양에는 왕위(王威)와 고군아(高君雅)아라는 수나라의 충신들이 있었는데, 이연의 이런 움직임을 몹시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눈에 장손순덕(長孫順德)과 유홍기(劉弘基)가 눈에 뛰였는데, 이 두 사람은 훗날의 능연각 24 공신들입니다. 그런데 이때 이 사람들은 고구려 원정을 떠났다가 도망친 사람들이었지요.


당시 중국에서 수양제의 무리한 고구려 원정은 백성들의 눈에 시망 그 자체로 보였기에 어떻게든 전쟁터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난리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중에 유홍기는 아예 일부러 농민의 소를 죽여서 죄를 짓고, 농민이 자신을 신고하지 않자 스스로 상관에게 가서 "나 좀 잡아가세요" 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후엔 이연을 만나 보호를 요청한 것이죠.


이런 범죄자들이 이연의 보호 아래 어슬렁거리자 왕위와 고군아가 의심을 하게 된 것도 당연했습니다. 둘은 어서 손을 쓰기로 했는데 평소 술 마시고 놀며 인심에 후하던 이연에게 마을 촌장이 달려와 이 계획을 알려주었습니다. 결국 일을 먼저 시작한것은 이연이 되었고, 유홍기와 장손순덕에게 명해 왕위와 고군아를 가두고 죽여버렸습니다.

"이 자들이 돌궐과 손을 잡고 모반을 꾸몄다!"

당연히 사람들이 놀라고 펄쩍 뛰는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운이 좋았는데 마침 돌궐이 근처까지 오게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연의 명분은 강해졌지요. 그런데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진짜로 돌궐이 공격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굳이 지금이 아니더라도, 만약 이연이 다른 군웅들과 싸우는 틈에 돌궐군이 후방을 공격한다면 어떻게 될지는 너무나도 뻔했습니다. 이연은 극단적인 방법을 취했는데, 동돌궐의 시필가한(始畢可汗)에게 신하를 자처하고 나선 것이었습니다. 이에 시필가한은 만족스러워했고, 어느정도 후방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거병의 불꽃이 타올랐습니다. 들고 일어나면서도 말로는 "수나라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서라는 충의의 문구를 선전하면서 말입니다. 이러할때 먼저 나서서 황제라고 자처하는것은 전혀 좋은 판단이 아니었는데, 각지에 군웅들이 할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군웅할거



"제왕 중의 제왕 이세민" 이라는 책의 모습입니다. 수양제는 강도에 사실상 감금되어 있었고, 나머지 군웅들이 할거 하고 있었지요.




이연은 우선 장안으로 이동을 했습니다. 수양제가 남쪽에 있기에 관중은 무주공산이었죠. 이연은 넷쨰 아들 이원길을 태원에 남겨놓고, 장남 이건성, 차남 이세민을 앞세워 관중으로 진군했습니다. 관중에는 역시 별다른 세력이 없었고, 3만의 군대는 눈깜짝할 사이에 무려 20만의 대군으로 불어났습니다.가는곳마다 인심을 사면서 수도 장안을 간단하게 함락, 너무도 쉽게 관중을 손아귀에 넣고 막강한 힘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이연은 그리고 당왕(唐王)을 자처하며 황제라는 소리는 입도 뻥끗 하지 않으면서 가만히 있었는데, 갑자기 엄청난 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천수 일대를 장악한 군웅, 설거(薛擧)의 공격이었습니다.


설거는 특이하였습니다. 수나라의 신하로 돌궐등을 막다가, 전국이 난리가 나자 재빨리 자신을 패왕으로 일컫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남들이 감히 황제 칭호를 쓰지도 못할때 "진나라의 제왕" 이라고 자처하며 호기로운 모습을 보였지요.


설거는 우선 자신의 아들 설인고(薛仁皐)를 파견했습니다. 그런데 당나라는 이세민을 보내어 이를 무찔렀지요. 그러자 기마병을 이끌고 직접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이세민이 학질에 걸려서, 지휘를 은개산(殷開山)이 맞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도 나중의 능연각 24공신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설거는 전투의 스페셜리스트였습니다. 기마병을 다루는데 능했고, 은개산은 죽기 일보직전까지 가버렸다 살아남았습니다. 이세민도 간신히 도망쳤고 놀란 당나라가 보낸 지원군 역시 격파해버렸던 것입니다.

설거의 기세는 엄청났고, 아예 당나라 장안으로 밀고 들어오려던 판국이었기에 당나라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본래 이연의 근거지는 태원이지만, 거병하면서 장안에 지금 세력을 잡아놓은 상태였지요.

그런데 엄청난 행운이 따라왔습니다. 6십팔년, 설거가 어이없이 급사해버리고 만것입니다. 후계자는 설인고가 되었지만, 이 정도는 아버지에 비해 그다지 대수로운 상대도 아니었습니다. 12월 설인고는 다시 공격을 시작했지만 이세민은 우선 버티면서 교전을 벌이질 않았고, 적의 보급선을 괴롭혀 주다가 한방에 밀고 나가서 승리하여 설인고를 항복시켰습니다. 이러한 식의 싸움은 그 후로도 이세민이 즐겨하게 됩니다.



산서 일대의 군웅은 유무주(劉武周)로, 돌궐의 후원을 받고 있었습니다. 당초에 유무주는 별로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질 않았는데, 송금강(宋金剛)이라는 장수가 자기 부하를 이끌고 항복한 이후에는 송금강의 말을 듣고 상당히 귀가 솔깃해졌습니다. 거기다 송금강에게는 위지경덕(尉遲敬德)이라고 하는 싸움 잘하는 장수까지 있었지요.


유무주와 송금강은 산서성의 완전 병합을 노리고 마구 남하했습니다. 최종적인 목표는 진양을 손에 넣는것이었죠. 그런데 이때 당나라 내부에서 문제가 있었습니다.



진양기병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유문정입니다. 그런데 이연은 친구인 배적을 편애했고, 둘이 다툴 때마다 배적의 손을 들어주었지요. 결국 유문정은 술을 먹고 불평하다 반역죄로 잡혀오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이세민은 유문정의 편을 들어주는 말을 했고, 이연은 그 사실에 크게 분노합니다. 유문정은 결국 죽었고 이때부터 조정 ─ 그리고 이연 ─ 과 이세민의 분열이 시작되는 것이었습니다.


불만이 일어나는 가장 큰 문제는 배적이 공이 적다, 는 것. 따라서 이연은 배적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배적을 사령관으로 삼아 유무주를 상대하게 했지요.


그런데……당연하게도 상대가 될 리가 없습니다. 배적은 탈탈 털렸고 심지어 농민 반란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도 패배를 겪었습니다. 결국 이연의 넷째 아들 이원길이 철수를 주장해서 당나라 군대는 태원을 벌이고 달아나고 유무주와 송금강이 산서일대를 완전 장악하는 최악의 결과가 나와버렸습니다. 그런데 사족이지만 배적은 처벌 안 받고 잘 먹고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산서를 손에 넣은 유무주와 송금강은 미친듯이 하동으로 몰려왔습니다. 이연은 하동을 포기하겠다고 말했고, 이때 이세민이 나선 것입니다.


"3만의 군대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619년 11월, 그야말로 당나라로서는 최악의 상황에서 이세민은 송금강을 막기 위해 출동합니다. 이때도 이세민은 설인고를 물리쳤을때의 전술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其徐如林 不動如山 ─  숲과 같이 고요하게 머무르며 움직이지 않기를 산과 같이 하다가
故其疾如風 侵掠如火 ─ 군사를 움직일 때는 질풍처럼 날쌔게 하고 불이 번지듯이 맹렬하게 공격한다


이게 이세민이 계속 사용하는 전술입니다. 직접적인 교전을 피한채 송금강의 보급로만 지독하게 공격했는데, 사실 파죽지세로 진격하긴 했지만 그때문에 길어진 보급로때문에 송금강의 상황은 좋지가 못했습니다. 그렇게 6개월을 버티자 결국 송금강은 후퇴하고 맙니다. 이 기회에 이세민은 곧바로 역공을 취해 파도와 같이 몰고 나갔고, 결국 송금강과 유무주는 돌궐로 도망칩니다. 하지만 이제 그 둘은 이용가치가 없었죠. 돌궐에서는 이 둘을 살해합니다. 거기다 이세민에게는 기쁜 일이 있었는데, 위지경덕이라는 창의 명수를 부하로 얻게 된것이었죠. 이세민의 부하 중에 위지경덕을 못 믿겠으니 죽이라고 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이세민은 위지경덕을 거두어서 썼습니다.


본래 하동을 지키는 임무에서 역으로 산서를 되찾고 유무주까지 박살내었습니다. 엄청난 무공에 당나라는 축제 분위기가 되었고, 곧바로 이연은 이세민을 익주의 행대상서령(行臺尙書令)으로 임명하게 됩니다. 기세를 탄 이세민은 620년 7월, 하남으로 남하하였습니다. 하남에는 왕세충이 있었지요.


이 무렵 이밀은 왕세충에게 박살이 난 상황이었습니다. 낙양은 그 당시 가장 중요한 도시였고, 낙양의 주인이 왕세충이었지요.학식과 병법에 능했고 말재주도 있었던 왕세충은 그러나 가장 큰 단점이 인내력의 부족이었습니다. 호기롭게 황제가 된 왕세충은 모든 문제를 다 자기에게 말하라고 했지만, 며칠 열심히 일하고 나서는 귀찮아져서 놀기만을 했습니다. 다른 일들도 다 마찬가지였죠.

이밀을 물리치고 세력을 키운 왕세충이었지만 당장은 워낙 이밀과의 싸움이 피해가 커서 아주 좋지는 않았습니다. 이세민은 바로 그런 순간을 노린것이었죠.




이세민과 왕세충의 접전은 치열했습니다. 거기다 왕세충에게도 기회가 있었지요. 왕세충에게는 단웅신(單雄信)이라는 천하 호걸의 있었는데 어느날의 싸움에서 이세민은 완전히 포위하고 사로잡기 직전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위지경덕이 나섰습니다. 고함을 지르면서 단응신을 찌르는 바람에 이세민을 놓치고 만 것이죠.


기회는 또 있었습니다. 이세민이 무리에서 벗어나게 되자 단웅신은 맹렬하게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지요. 이제 창이 이세민을 꿰뚫어 버릴 듯 했지만, 그때 이세적(李世勣)이 나와서 단응신을 막았습니다.


"여보게. 이 분은 나의 주인이시네. 어찌 해하려 한다는 말인가?"


단응신과 이세적은 일찍이 의형제를 맺은 적이 있었고, 결국 마음이 흔들린 단웅신은 직분을 다하지 못하고 돌아가고 맙니다. 왕세충이 패하였을때 이세적은 자신의 관직을 없애버리는 대신에 단웅신을 살려주라고 했지만, 허락되지 않자 감옥에 있는 단웅신을 보고 울면서 그의 아들을 양자로 키웠다고 합니다.


여하간 사투와 사투끝에 마침내 이세민은 왕세충을 낙양에 가두는데 성공했습니다. 승리는 눈 앞에 있었고, 이때 갑자기 안 좋은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두건덕이 쳐들어온다는 것이었죠.



하북의 두건덕은 농민 봉기군 출신입니다. 이전까지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던 그는 이세민이 왕세충을 몰아넣는 모습을 보자 위기를 느꼈습니다. 왕세충이 패배한다면 당나라를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대군을 이끌고 왕세충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왔습니다.


이에 이세민의 진영은 엄청난 패닉 상태에 빠졌습니다. 왕세충과의 혈전도 쉽지가 않아 군사들이 많이 상했는데, 이 와중에 두건덕을 이기는것은 어림없는 상황이었지요. 퇴각을 할 수도 있었지만 이세민은 단호한 방법을 취했습니다.


이세민은 동생 이원길에게 낙양의 포위를 맡겨 두고, 가뜩이나 완전치 않은 병력을 절반으로 나누어 재빨리 달려갔습니다. 호로관으로 잘 알려져 있는 무뢰관에 먼저 입성하기 위해서였죠. 이런 요충지의 관문을 빼앗겨 정면 대결로 간다면 이세민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이길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단 무뢰관에 들어간 이세민은 두건덕이 싸움을 걸어도 또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자 두건덕의 병력은 한달동안 꼼짝도 못했고, 이때 두건덕의 책사 능경(凌敬)은 다른 전략을 제안했습니다.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닙니다. 이세민이는 무뢰관을 계속 지키라고 하지요! 차라리 하북으로 북상해서 당나라의 산서를 바로 칩시다. 그리하면 낙양을 포위하고 있는 군대도 돌아갈테니, 왕세충은 그러면 자연히 구원되겠지요"

이른바 전국시대 손빈의 "위나라를 쳐서 조나라를 구한다"는 계책이었는데, 두건덕은 이를 무시합니다. 그러자 두건덕의 부인이 나섰습니다.

"대왕께서 당을 공격하고, 다시 돌궐이 관중을 공격하면 틀림없이 포위가 풀어질터인데, 어찌 여기서 군비를 소모하고만 있다는 말입니까?"

"아녀자가 끼어들 곳이 아니오!"


한편 적진에서 동요가 일어나고 있을때 이세민은 다시 폭풍처럼 몰아칠 준비를 끝내놓았습니다. 정오가 되어 두건덕군의 전의가 많이 떨어졌을때, 이세민은 기병을 동원해서 마구 적군을 휘몰았습니다. 두건덕도 기병으로 적의 기병을 막으려고 했지만 갑작스런 공격이라 재빨리 대처를 못했고, 이때 이세민은 직접 나서서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적의 사방을 헤집어 버렸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건덕의 주력은 궤멸되었고, 두건덕은 생포되었습니다. 낙양까지 끌려온 두건덕을 본 왕세충은 일이 다 끝장났다고 생각해서 항복하고 맙니다. 그 후 왕세충은 이연에 의해서 목숨만은 구해지지만, 결국 자기가 처형했던 사람의 아들에 의해서 암살당합니다.


유무주를 쳐서 당나라의 위기를 구하고, 왕세충과 두건덕을 동시에 때려잡은 이세민의 무공은 어마어마했습니다. 620년 10월, 당나라 토정은 이세민에게 천책상장(天策上將)이라는 칭호를 내렸습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막강한 공을 세운 이세민으로 인해서, 다시 갈등이 벌어지고 맙니다. 현무문 이야기는 나중에 해보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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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리스트
  • 작성자블라디미르 대공 | 작성시간 12.04.06 오오오~~
  • 작성자havoc(夏服ㅋ) | 작성시간 12.04.06 패기쩌는 이세민이 존재하고, 고구려도 가장 패기 쩔던 시절이었는데... 왜 서로 사이좋게 못지냈는지...쩝...
  • 작성자예루살렘의고프리 | 작성시간 12.04.06 천책상장이라 불렸던 사람이니...
  • 작성자으흐흐 | 작성시간 12.04.07 형제죽이고 애비협박한 천하에 쌍노무새끼....
  • 작성자기러기 | 작성시간 12.06.28 역시 당나라의 실질적인 건국자답게 놀라운 무용을 보여주네요...ㄷ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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