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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역사 : 헨리 4세의 분투와 랭커스터 왕가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9.02|조회수1,145 목록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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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스터 왕가(House of Lancaster)
헨리 4세(1399 ~ 1413)


1399년 왕위에 오른 헨리 4세는 큰 키`에 인상적인 용모를 지닌 정력적인 왕이었다. 그는 유능하고 불굴의 군인이이었으며 인내심과 결단력을 가지고 있는 정치가였다. 본시 충동적이며 고집스러운 성격을 가지고 있는 그였으나, 젊은 시절과 망명 시절의 고난이 그를 조심스럽고 자제력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무술 시합에도 능한 그는 군사적 영광을 바랬지만, 정신적 긴장이 자신의 육체를 지치게 했는지 평생 건강은 좋지 못했다. 어찌나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보였는지 한때 나병에 걸렸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1)


 헨리 4세는 즉위부터 문제가 있었다. 그는 정당한 계승권에 의해 추대된 왕이 아니라 일종의 쿠데타를 거쳐 즉위한 군주였다. 진정한 상속권자를 찾아 본다면 마치 백인 에드먼드 모티어(Edmun Morrtimer)가 적절해 보였다. 또한 인기 없던 리처드 2세를 가장 싫어한 사람들 조차, 정당한 왕위계승권자이며 하느님과 교회의 축복을 받고 왕위에 오른 리처드를 퇴위시킨 방식에 대해 상당한 의문과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헨리는 의회의 선출을 통해 즉위했지만 이는 유례가 없는 일이었으며, 따라서 왕위계승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적었기에 찬탈자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는 반란의 구실을 만들었고, 헨리는 파국을 피하기 위해 반대자들을 극도로 조심하여 타협적인 자세로 일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모와 반란은 끊이질 않았으니, 그의 치세는 많은 난관으로 얼룩졌고 왕의 지위는 항상 불안한 상태였다. 


헨리는 자신의 어머니인 브랑쉬(Blanche of Lancaster)가 헨리 3세의 막내 아들인 '곱사등이 에드먼드' 의 증손녀라는 점을 들어 자신의 왕위계승에 정당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왕은 치세의 처음 9년 동안 다섯 차례의 반란에 직면해야만 했다. 최초의 사건은 리처드 2세가 아직 살아있던 1399년 말에 일어났다. 리처드의 이부형제(異父兄弟)인 헌팅던 백 존 홀란드, 조카인 켄트 백 토머스 홀란드, 그리고 러틀런드 백과 솔즈베리 백 등 리처드를 지지한 몇몇이 헨리와 그의 아들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고, 이들은 1400년 윈저 성을 포위하는데 이르렀으나 런던의 지지를 등에 엎은 헨리는 군대를 보내 음모자들을 체포했다. 반란자들은 재판에 회부되어 처형되었으며, 곧 이어 리처드도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왕에 대한 반란은 리처드 2세에 대한 동정심이 유난히 컸던 웨일즈에서도 일어났다. 랭커스터 왕조 초기의 웨일즈는 불온한 움직임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웨일즈의 3분의 2 지역은 약 40개 정도의 변경 영주령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이 지역은 사실상 자치를 누리고 있었으며, 주로 해안 지대의 이른바 웨일즈 공령만이 잉글랜드 왕과 왕세자의 직접 지배 아래 놓여 이었다. 잉글랜드인 정주자들은 웨일즈로부터 막대한 이익을 끌어내고 있었으며, 웨일즈의 소작인들은 잉글랜드인 지주들의 착취에 분노하고 있었다. 웨일즈는 겉으론 평화를 누리고 있는 듯 했지만 실제로는 농축된 고름이 고여 있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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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란은 1400년 웨일즈의 귀족 가문 출신 오와인 글린두어(Owain Glyndŵr)의 지휘 아래 있었다. 글란두어는 원래 웨일즈의 부족적 지도자는 아니었다. 웨일즈를 정복한 에드워드 1세의 시대 이후 웨일즈의 토지 소유 제도는 점차 잉글랜드의 제도와 비슷해졌으며, 이에 따라 웨일즈에서는 잉글랜드 왕으로부터 토지를 부여받고 그 대신 잉글랜드 왕의 정책을 위해 그들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새로운 귀족층이 탄생했다. 글린두어도 그 같은 귀족의 한 사람으로서 런던의 법학원에서 공부했으며, 리처드 2세의 궁정에서는 꽤 중요한 지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한 글란두어가 웨일즈의 반란의 주도자로 등장한것은 헨리 4세의 변경 영주이자 자문관이었던 리신(Rurhim)의 그레이(Grey)와의 사적인 분쟁이 전쟁으로 확대되면서 부터였다. 일단 한번 불이 붙자 옥스퍼드 대학생을 포함한 많은 웨일즈인 학자와 노동자들은 잉글랜드에서 웨일즈로 몰려들어 싸움은 민족적인 반항으로 발전했으며, 글린두어는 웨일즈 공을 자청하고, 웨일즈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 해 가을, 헨리 4세는 몸소 북웨일즈에 나아가 앵글시까지 진출하였으나 웨일즈의 민족적 반항은 더욱 거세져만 가고 있었다. 글린두어는 이러한 기세를 이용해 많은 병력을 끌어 모았으며, 그의 게릴라 부대들은 여러 성채와 잉글랜드화한 도시들을 공략하여 놀라울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들은 산악 지형을 이용해 적을 괴롭히고 탈진시킨 다음, 바위와 동굴 사이로 마술처럼 사라지곤 했다. 잉글랜드인들은 방어력을 집중하지 못했으며, 변경 영주들은 서로 협동하지 못했고 왕세자와도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반란은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결정적인 전투 없이 잉글랜드 왕의 원정은 아무런 성과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1401년 잉글랜드는 이러한 웨일즈의 반란에 대처하기 위한 일련의 법령들을 반포했다. 이 법령들은 웨일즈인들이 잉글랜드나 웨일즈 내에 세워진 잉글랜드인의 도시에서 무기를 지니고 다니거나, 잉글랜드인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또한 잉글랜드인들이 웨일즈의 법에 따라 혹은 웨일즈인들의 소추에 의해서 유죄로 선고 받을 수 없다고 구별했다. 에드워드 1세 이후로 '영국' 의 테두리 안에 묶어 놓았던 잉글랜드와 웨일즈를 두 종족으로 구별하고 웨일즈인들을 열악한 지위에 머물게 하려는 이러한 법령들은 되려 웨일즈인들의 반감과 불신만을 격화시켜 그들의 민족운동은 마침내 웨일즈 전역에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잉글랜드 내의 불만분자들까지 이에 동조하게 된 1402년에는 사태가 더욱 위험스러운 지경에 이르렀다. 이 해에 글린두어는 에드먼드 모티머의 삼촌 써 에드먼트 모티머를 포로로 붙잡았다. 모티머는 헨리가 몸값을 내주고 구출해줄 것이라 기대하였으나, 왕이 이를 거절하자 격분하여 글린두어와 손을 잡고 반란에 가담하였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태에 종지부를 찍는 듯 보였던 것은 스코틀랜드인들 마저 북방에서 공격 해 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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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0년 스코틀랜드 데이비드 2세의 조카 윌터 스튜어트는 로버트 2세(Robert II of Scotland)로 즉위하여 스튜어트 왕조(House of Stuart)에 시대를 열었다. 로버트 2세는 그의 재위 기간 거의 전부를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와 리처드 2세에 대한 싸움으로 보냈는데, 그 뒤를 이은 로버트 3세(Robert III of Scotland) 역시 이러한 기조를 이어가자 헨리는 1400년 군대를 이끌고 북진했다. 그러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철수해야만 했고, 그 뒤 1402년 올버니 공이 이끄는 이끄는 스코틀랜드 군이 잉글랜드로 침입해 왔으나 호밀던 힐 전투(Battle of Humbleton Hill)에서 노섬벌랜드 백 헨리 퍼시(Henry Percy, 1st Earl of Northumberland)와 그의 아들 '성급한 퍼시(Henry 'Hotspur' Percy)' 는 이를 격파하고 더글라스 백을 포함한 많은 스코틀랜드 귀족들을 포로로 잡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퍼시 가문은 1399년의 반란에서 헨리의 가장 열성적인 지지자 였으며, 헨리는 마땅히 그들의 봉사에 대한 보상을 지불해야 할 처지였다. 하지만 헨리는 그들에게 돈을 지불하지 않았고, 또 호밀턴 힐 전투에서 붙잡은 포로들의 몸값조차 퍼시가가 차지하는것을 불허하자 불만이 폭발한 퍼시 부자까지도 왕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1403년까지 퍼시가는 글린두어, 모티머가, 그리고 더글라스 백과 동맹하여 헨리를 타도하고 그들끼리 잉글랜드를 나누어 갖기로 하는 계획에 합류하였다. 이처럼 북부의 유려한 가문인 퍼시가까지 반란에 가담하자 위기는 한층 심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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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헨리는 최악의 위기에서 빠른 대처를 보여주며 난국을 타개해나갔다. 그는 웨일즈군과 합류하기 위해 슈루즈베리로 진출한 '성급한 헨리' 를 슈루즈베리 전투(Battle of Shrewsbury)에서 격파함으로서 그의 치세 최대의 위기를 돌파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싸움에서 '성급한 헨리' 는 사망했고 그의 아버지 노섬벌랜드 백은 항복하여 벌금을 물고 사면되었다. 하지만 사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는데, 글린두어는 퍼시가의 패배 이후에도 프랑스 등의 원조를 받아 웨일즈의 큰 성들 몇 개를 점거하고 웨일즈 의회를 소집하는데 이르렀다.


 1405년에는 또다른 문제가 터져나왔다. 잉글랜드 북부가 다시 한번 반란에 휩싸인 것이다. 노섬벌랜드 백, 요크 대주교 리처드 스크루프(Richard le Scrope), 토머스 모우브 등이 헨리에게 포로로 잡혀있던 에드먼드 모티머를 왕위에 올르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웨스트모얼랜드 백 랠프 네빌(Ralph Neville, 1st Earl of Westmorland)의 신속한 공격으로 진압되었다. 포로로 잡힌 스크루프는 결국 처형되었으며, 노섬벌랜드 백은이후 스코틀랜드로 도주하여 1408년에 다시 봉기를 일으켰으나 브래엄 무어 전투(Battle of Bramham Moor)에서 패배하여 피살되었다.


 외국의 문제도 있었다. 웨일즈의 반란이 지속되고 있는 동안 프랑스인들이 잉글랜드 남부 해안을 침법하고 글린두어를 돕기 위해 웨일즈에 출병하였다. 1403년 이들은 플리머스를 불지르고, 이듬 해에는 와이트 섬에 상륙하는가 하면, 1405년에는 펨브루크셔의 해버퍼드웨스트에 상륙하여 글린두어와 손을 잡고 카마든 성을 점거했다. 그들은 또한 칼레를 공격하고 영국인 해적들의 활동을 조장하여 플랑드르 및 한자 도시드로가의 해협무역을 교란했다.


 그러나 글린두어 역시 인력과 자금 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는 웨일즈의 골짜기에서 떨쳐 나오기가 어려웠으며, 1405년 우스터로 진격하는 데 실패한 뒤에는 세력이 약화되어가고 있었다. 또한 1406년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1세(James I of Scotland)가 잉글랜드인에 사로잡히자 스코틀랜드와의 동맹 관계도 무너졌고, 1407년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일시 휴전을 맺으면서 프랑스의 도움마저도 얻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왕세자 헨리의 압박은 거세졌고 애버리스트위스 성과 할레크 성이 함락됨으로써 웨일즈에서의 잉글랜드 지배력은 확고해졌다. 그럼에도 글린두어는 끝내 항복하지 않았다. 그는 웨일즈 중부 산악 지대 어딘가에서,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없게 증발하였다. 이에 따라 그에 관한 전설이 자라났으며, 웨일즈 민족주의의 영웅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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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리는 자신의 치세 3분의 2를 잉글랜드 북부와 웨일즈의 반란, 스코틀랜드와 프랑스의 침범에 맞서 투쟁해야만 했다. 그의 연 수입은 9만 파운드 가량으로 리처드 2세의 연 수입 11만 6,000파운드 보다 적었지만, 칼레를 유지하는 비용과 반란을 진압하는 비용 등 막대한 금액을 감당해야만 했기에, 과세에 대한 동의권을 가진 하원의 처분에 의존해야만 했다. 따라서 그의 재위 기간은 영국의 중세시대에서 의회가 가장 막강한 권위를 가진 시기가 되었다.


 1404년 하원은 부가적 세금을 관리할 재무관을 지명한다는 조건부로 헨리에게 부가적인 과세를 인정했으며, 또한 의회 안에 왕에 대한 조언을 할 자무회의를 둘 것을 요구했다. 헨리는 마음 내키지 않으면서도 이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1046년 헨리는 하원의 회계감사 요구도 받아들였다. 이렇게 의회의 입김이 강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잉글랜드 왕이 순순히 의회에 예속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헨리는 왕권에 대한 이 같은 제약을 없애려고 노력했으며, 기회가 오면 실제로 이를 시행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헨리가 잘 보여야 하는것은 의회 뿐만이 아닌 교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주교 애런들은 헨리  4세의 왕위계승을 즉시 인정하였으며, 그의 주재로 거행된 대관식은 헨리의 권위를 높여주는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헨리는 교회에 대해서 순종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이단에 대처하는 주교들을 지원했다. 이에 주교들은 1401년 완고한 이단들을 화형시킬 수 있는 법을 선포함으로써 롤라드에 대한 처형이 가능하게 되었다.


 1408년 이르면 왕은 최대의 위협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 뒤 5년간 헨리의 통치는 비교적 안정되었고, 그의 권위는 잉글랜드와 웨일즈, 스코틀랜드의 일부 지역에 미쳤다. 그는 타협을 통해 왕권의 근간을 유지한 채 의회와 교회의 지지를 얻어내었다. 또한 덴마크 - 노르웨이 왕과의 외교적 유대를 강화함으로써 한자 도시들에 맞서 잉글랜드 상인들의 지위를 높이는 데 힘썼다.


 1413년 헨리가 눈을 감을 당시, 랭커스터 왕조는 그의 피나는 노력에 힘입어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비교적 탄탄한 토대를 세우는데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런 노고의 세월 동안 왕 자신은 엄청난 분투를 해야만 했기에, 그는 지치고 쇠약해져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노력한 왕국의 계승자가 될 아들 헨리 왕세자는 방탕하고 놀기 좋아했으며, 야심만 커지고 있는것처럼 보였다. 왕세자는 자문회의를 장악하려고 애를 썻으며, 대외정책에서도 아버지의 대프랑스 평화정책에 반발하여 전쟁을 재개하기를 바라였다. 왕세자가 왕의 퇴위를 노린다는 소문마저 돌자 1412년 왕은 애런들 대주교의 도움을 받아 왕세자와 그 이복동생 토머스 보우퍼트를 자문회의에서 몰아내었다.


 끝없는 전쟁, 왕권을 다지기 위한 여행으로 괴롭혀진 육체와 쇠진해진 정신을 가진 헨리는 1413년 3월 왕정에 관한 여러 심각한 문제들을 미해결로 남겨 놓은 채 지친 눈을 감았다. 헨리 4세가 성취한 것은 그가 온갖 난관을 이겨내고 끝내 왕으로 살아남았다는 점이고, 그래서 왕관을 유능한 아들에게 넘겨줌으로써 랭커스터 가문을 하나의 왕조로 세웠다는 점이었다. 그는 자신이 바라던 '대담하고 거창한 싸움' 을 수행할 기회를 가지지 못하였으나, 국내외의 끈질긴 도전을 무력화할 만큼의 군사적 능력은 가지고 있었다. 


 헨리는 그의 추진력과 끈기, 그리고 말할 것도 없는 관대함과 타협을 이루어내는 능력으로 어떤 영국왕도 마주친 적이 없었던 압도적인 적들의 연합세력을 극복해낼 수 있었다. 끈기와 단호함, 그리고 기꺼이 말 위에서 살아가려는 왕의 굳센 마음은 잉글랜드와 웨일즈를 가로질러 그리고 애든버러 너머로까지 그의 적들을 뒤쫓아 몰애냄으로써, 그 모든 위험을 극복해 내었던 것이다. 그는 타협을 통해서 왕권의 '가장 중요한 부분' 들을 양보하지 않으면서도 의회의 지지를 얻었으며, 그의 왕조는 동맹관계를 통해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브르타뉴, 그리고 부르고뉴령 플랑드르에서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2)


 프랑스가 그의 약점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히 행운이었다. 프랑스의 샤를 6세(Charles VI)는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으며, 그의 왕국 역시 잉글랜드 못지않게 심한 분열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1) 당대 사람들은 문둔병으로 여겼으나 선천성 매독(Congenital syphilis)으로 보인다. ─ 김현수, 이야기 영국사 pp. 183

*2) 옥스퍼드 영국사 pp.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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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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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튜어니즘. | 작성시간 13.09.02 이제는 백년전쟁이 다시 시작하는군요.
  • 작성자배달민족 | 작성시간 13.09.03 이제는 성크리스피천 전설이 나오는 가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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