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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수신(水神) 정성공(4) ─ 북벌(北伐) 上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5.25|조회수2,021 목록 댓글 5





"천년이 지나도, 세상은 이 일을 이야기하리라."
─ 장황언(張煌言) 1620∼64



정지룡은 완전히 끝장이 나버렸고, 정성공은 여전히 청조에 대항하고 있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정성공은 남명 영력제로부터 연평군왕(延平郡王)에 책봉하여 드디어 왕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것은, 대만의 VOC였습니다.


정성공이 지루한 대치와 소규모 교전, 몇번의 치명적인 패배에서 재기를 반복하는 10년 동안, 대만의 네덜란드인들은 대중국 교역을 순전히 정성공에게 의지했고, 어떤 경우에는 정씨 가문의 기를 달고 중국인 상인들을 고용하여 일본에서 제한된 교역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조건등이 유럽인들에게 유리한것은 아니었지만, 손가락만 빨고 있는 일보다야 나은 일이었습니다.


대만에서 네덜란드는 대만 북부의 에스파냐 세력을 쫒아내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가 되는것은 내륙의 중국인들이었습니다. 네덜란드인들의 가혹한 통치에 중국인들이 반발하며, 1652년 곽회일 등이 들고 일어섰지만 4천명 무렵의 봉기군은 머스킷 티어 앞에 무력하게 쓰러져서 네덜란드인들의 피해는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간혹 민족적 성향을 고취시키는 사람들은 정성공이 동족들이 당한 고통에 분통을 터뜨려 대만 공격에 집중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정성공은 전혀 관련이 없었고 만약 가능성이 있다손 치면 곽회일이 정지룡의 옛 동료였다는 몇몇 이야기 뿐인데, 정성공은 아버지와 그다지 화목한 사이는 못되는 편입니다.



하지만 정성공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VOC는 정성공이 대만을 침략하지 않을까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네덜란드 인들은 정성공이 중국 본토에서 내밀리면 결국 도착할 곳은 대만 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1650년대 내내 대만 공격에 대한 각종 소문이 퍼져 네덜란드 인들은 필사적으로 소규모 요새를 대만에 만들고 감시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정성공은 동남아의 해안에 이르기까지 광대하게 무역로를 가동하며 후추등을 사들이고 있었고, 이는 VOC가 취급하는 물품과 비슷했기에 대립이 일어날수 밖에 없었던것입니다.




VOC가 이런 격동의 시기에 선택한 인물은 프레데리크 코예트(Frederik Coyett)라는 30대 중반의 스웨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10년간 대만에서 일을 했고 현지 사정에 능통했으며, 사태를 냉정하게 볼 수 있었고 정성공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던 인물입니다. 대만 총독이 된 그는, 훗날 정성공과 팽팽한 대결을 벌이게 됩니다.


하지만 코예트의 신중함은 내부의 방해를 받았는데, 전임 대만 총독이었던 니콜라스 페트부르크(Nicolas Verburg)는 코예트와 말싸움을 벌인 바 있던 사이였고, 바타비아 본사에 도착한 페트부르크는 정성공의 위협 따위는 없으며, 사태가 문제 없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는 2년 전부터 정성공의 위험성을 본사에 경고한바가 있습니다. 즉 코예트와의 사이 때문에 그를 골탕먹이기 위해 거짓말을 했던 것입니다. 방어 시설의 추가와 전략에 대한 코예트의 보고가 본사로 도착했지만, 페트부르크는 이사회에게 코예트가 쓸모없는 걱정으로 물자를 소비하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적어도 이 시점에 이르기까지는 정성공이 대만에 발톱을 들이밀진 않았습니다. 그가 무슨 일을 벌이려 준비하고는 있었지만, 대만 정도의 스케일이 아니라 청나라와 중국 전체를 대상으로 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정씨 가문의 모든 선박을 불러모으면서, 지난 10년간 준비한 계획을 성사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중국 드라마 영웅 정성공 중에서. 남자는 당연히 정성공의 역할이고, 서양인 여자 배우는 코예트의 여동생이라는 설정으로 등장해서 정성공과 플래그를 세워놓고, 정지봉에게 겁탈 당할뻔 하거나(-_-) 이런 배역을 맡는다고 합니다. 마지막 대만 총독 코예트가 정성공 최후의 숙적이라고 할만한 존재다 보니 이런 식의 설정을 쓰는 경우가 종종 있어, 1965년의 대만 드라마에서도 코예트의 혼혈아 딸이라는 가상 인물을 만들어서 정성공과 플래그를 세워놓기도 했다고 합니다.




정성공은 북벌 계획을 준비중이었습니다. 그다지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사실 숨길수도 없었을 테지만 정성공은 대놓고 복건 총독에게 자신의 구상을 자랑스레 적어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청나라 내륙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봉기와 자연 재해를 언급하며, 이런 '기이한 현상들'은 하늘이 침략자 만주족 정권에 노했다는 증거라고 말하면서 반격의 때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자신만만하게 나올 법도 한것이, 1656년 5월 9일, 정성공은 만주족 장수 지두를 상대로 해 그를 대파했습니다. 지두는 함대를 이끌고 출항했으나, 갑자기 바람까지 정성공을 도와주어 패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로서는 바다의 여신이 자기를 도와준다고 믿을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 무렵 정지봉이 죽는 일이 생깁니다.



시간은 점점 다가왔습니다. 10년동안의 교역과 군사활동은 오직 이 순간을 위한 기다림이었습니다. 그의 계획은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복건 해안을 거슬러 올라가서, 인근 지역을 통과하여 양자강 하구에 다다르는 것이었습니다. 해안가에서 벌이는 소규모 전투를 벗어나, 단번에 중화제국의 심장부를 뒤흔들만할 가공할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이 무렵 예전의 노왕 주이해도 정성공을 의자하기 위해 도착했었는데, 정성공은 그를 보호하는 조건으로 감국 칭호를 쓰지 말라고 요구했습니다. 노왕 정권 중에서는 주순수(朱舜水)라는 학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도 일본에 종종 건너가 원조를 청했습니다. 주순수는 일본에서 훨씬 잘 알려져있고 그곳의 철학 사상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 인물로, 1982년 주순수 사후 300년이 되자 일본과 중국 모두에서 기념행사가 열린 바 있습니다.



1658년 5월, 마침내 북벌군은 출정했습니다.


그 규모는 무려 17만 5천여명. 선봉은 정성공이 가장 신뢰하는 장수인 감휘(甘輝)가 맞아 10,000명의 병사와 20척의 대형선, 30여척의 보급선을 거느렸으며, 우익은 마신(馬信)이 지휘하여 30척의 함선, 30척의 보급선, 20,000명의 병사를 지휘했습니다. 좌익 또한 똑같은 20,000명의 규모로, 만례(萬禮)가 지휘했습니다.

이것만으로 5만 명의 규모가 되는데, 정성공 본인이 또한 120여척이 넘는 전함과 40,000명이 넘는 대부대를 이끌고 후미에 위치했습니다. 그리고 8천에서 1만명의 가량의 철인(鐵人) 부대가 있었는데, 이들은 철면을 쓰고 철갑옷, 철치마를 입고 철사슬로 고정하여, 얼굴은 단지 눈, 귀, 입, 코를 드러낼 뿐이라고 하였는데 아무래도 일본쪽 갑옷을 도입한것으로 보입니다. 거기다 정성공의 어린 시절 부터 그를 호위한 흑인 부대도 이에 포함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성공의 지난 10년이 만든 결실이었습니다. 군율은 엄중하여 살인, 간음, 민가르 파괴한 자, 밭 가는 소를 죽인 병사들은 모두 처형되었고 상관도 연좌되었습니다. 한편, 이러한 시기에 황오라는 인물이 정성공을 배신하여 만주족에 투항하는 일이 생깁니다. 신경이 쓰일 일이었지만, 정성공은 별다른 문제없이 진격하며, 장황언의 병력을 합류시켰습니다. 장황언 부대는 지난 10년간 복건 북쪽에서 만주족을 상대로 싸우던 저항 세력이었습니다. 둘은 힘을 합치게 됩니다.




그러나 이때, 재앙이 찾아오게 됩니다. 양자강 하구로 가는 도중, 8월 무렵 양산(羊山)에 도착한 정성공 일행은 바다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며 이곳에 닻을 내렸습니다. 양산이란 이름에 걸맞게 사람들은 신의 은혜를 구하며 양을 풀어두었고, 양들은 섬에서 신성시 되면서 숫자가 상당했습니다. 그리고 마치 오디세우스의 이야기에서 키르케의 동물들에 손을 대었던 것처럼, 굶주린 선원들은 양들을 탐욕스럽게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매우 순진한 동물인 양을 잡는데는 별다른 노력이나 도구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곧 섬은 사방에서 양을 굽는 냄새와 소리로 가득찼고, 몇몇 선원들은 이러한 만행을 보고 정성공을 찾아와서 따졌습니다.

"양산은 신성한 섬이지 보급품 기지가 아닙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옛 전설을 들먹이기도 했습니다.

"이 바다에서는 용이 살고 있습니다. 꾸벅꾸벅 졸고는 있지만, 공물을 바치지 않고 양산에 정박하는것은 무례한 행위입니다. 그 용은 평화와 고요함을 좋아합니다."

물론 정성공은 이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재앙이 찾아오게 됩니다.




이튿날 포구를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바다의 여신 마조의 보호를 받는 정성공의 함대는 여신보다도 강대한 힘에 좌지우지되어, 전에 경험한 적 없던, 상상 할 수 있는 최악의 폭풍우를 만나게 됩니다. 마치 해룡의 분노와도 같은 파도는 갑판을 매섭게 때려 부수었고, 퍼붓는 폭우로 배를 조종 할 수 조차 없었습니다. 항해사들은 제멋대로 도리질 치는 배의 키를 붙잡고 안간힘을 썻지만, 앞이 분간되지 않아 방향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밀집되어 있던 선박들이 몇 차례 서로 충돌하는가 하면, 몇 척은 암초 근처로 쓸려가 좌초하기도 했습니다.


광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성공은 사령선 뱃머리로 나가 하늘에 소리쳤습니다.


"미천한 몸이지만, 이 몸은 명 왕조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소이다! 만약 하늘이 이 뜻을 받아주지 않겠다면, 차라리 나와 모든 함선을 격침시켜 버리시오!"


정성공의 외침 때문은 아니겠지만 곧 폭풍우는 그쳤습니다. 그러나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습니다.


함대는 10여척을 잃었고, 싸움 한번 못해보고 무려 8,000명의 사망자를 내었습니다. 정성공의 친척과 인척만 231명이 죽었고, 난파선에선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곧 해안가에서 만주족에 사로잡혀 그들의 노리개가 된 숫자만 900명이 넘었습니다. 보급선은 침몰했고, 정성공의 직계 가족들도 쓸려갔으며, 정성공의 후실도 폭풍우에 사라졌고, 무엇보다 정성공의 아들들 마저도 세 명이나 종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곧 발견이 되었습니다. 바다에서 시신이 발견된 것입니다. 정성공은 아이들을 해변에 묻었습니다.



상상 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상황 속에서, 정성공은 한 번 크게 웃어버리고 맙니다. 그 모습을 보던 부관은 정성공의 웃음이 마치 벼랑 끝에 서 있던 사람과 같았다고 전했습니다. 



청군을 구경하지도 못한 시점에서 입은 피해는 너무나도 막대했습니다. 하지만 정성공은 의지를 꺾을 생각은 아직은, 전혀 없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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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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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제대군인 | 작성시간 12.05.25 여기서 끊기다니! 예고편도 없이!!!!
  • 작성자배달민족 | 작성시간 12.05.25 위의 사진에서 나오는 정성공 배역으로 나오는 사람 포청천에서 전조로 나왔던 사람인가요??
  • 답댓글 작성자신불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5.26 맞습니다.
  • 작성자gksmf | 작성시간 12.05.26 하늘의 뜻인가 10년 노력이 폭풍 한방에 훅갔네요 ㅋㅋ
  • 작성자온라인 | 작성시간 12.05.26 안타까워요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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