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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수신(水神) 정성공(5) ─ 북벌(北伐) 中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5.27|조회수878 목록 댓글 10





싸움 한번 못한 상황에서 처절한 실패를 겪은 후, 정성공이 겪은 문제는 병사들의 사기 문제였습니다. 많은 병사들이 의욕을 상실한 상황이었기에 정성공은 부하들에게 이는 일시적인 차질일 뿐이며, 앞으로 한두 달간 해변에 고립되게 된 함대와 병력들을 재정비할것이라고 안심시켰습니다. 근처의 항구에 정성공의 군대는 상륙했고, 주민들은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성대한 연회가 펼쳐졌는데, 아무래도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좋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모양새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눈속임도 통하지 않고, 병사들 사이에선 더 이상 고생하기 싫다는 사람들이 나오면서 정성공은 청나라에 투항하거나 도망치는 병사들을 단속하느라 골머리를 썩혔습니다. 사실 정성공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싸움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고, 안정적인 수입원인 해안가 약탈, 해적질, 동남해와 일본 무역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지난번에 폭풍으로 쓸려서 죽어간건 그렇다고 쳐도, 사람들 눈에는 만주족 병사들의 창에 찔려 죽나 폭풍에 쓸려가나 그게 그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만주족 정권의 첩자들은 여러 공작을 펼쳤고, 정성공 부대 내에서는 투항자가 더 늘어나게 됩니다. 그들 대부분은 이전에 만주족 정권을 섬기다가 정성공에게 항복한 사람들이었고, 이제 다시 편을 갈아타는 것입니다. 의심병이 생긴 정성공은 자신의 휘하 장수들 중에서 만주족 휘하에서 온 인물들은 모두 해임했습니다. 전투 중에, 상대편 쪽으로 달려갈지도 모를 지휘관에게 함대를 맡길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이상한 분위기와 숨이 턱턱 막히는 강박증이 함대에 닥쳐왔습니다. 한 선장은 선원들에게 선박의 노를 모두 붉은 색으로 칠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는 미신적인 요소와 함께 병사들이 가만히 할일 없이 있어 불안감이 더 증폭되지 않도록 할 일을 만들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의심병이 도진 정성공은 이것이 청나라와 싸움이 벌어질 시 모종의 계략이 있는것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증거가 불충분했는데, 정성공은 일단 그 선장을 해임시킵니다.




그동안 잘 이용했던 현지 주민들이나 암시장 상인들의 정보 루트도 이제 믿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몇차례 잘못된 정보로 낭패를 보게 되자 ─ 이게 의도적이든 실수였든 간에 ─ 정성공은 복건 이북에서는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것을 전제로 군사활동을 펼쳐나갔습니다. 적군은 멀리있고 쳐들어오려면 멀었다는 정보가 들어와도 계속 방비를 하고 있어야했기에 불안감은 계속해서 눌려왔습니다.



점점 군율도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병사들이 약탈을 하고 다녔는데, 이는 정성공이 질색을 하는 일이지만 정성공의 부하 장수들이 허락한 것입니다. 사기가 낮아진 병사들을 진작시키는데는 이만한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성공은 1658년 말까지 복건 북부에 다수의 지닞를 구축하는데 성공하였고, 북벌 시에 보급로 루트와 위급시에 바다로 돌아갈 수 있는 비상 탈출로등을 모두 확인하고 준비했습니다.



재정비는 끝났고, 더 이상 머뭇대기에는 병사들의 사기도 걱정되는 상황. 정성공은 1659년 4월 무렵 함대를 양자강 하구로 총집결 시키며 다시 한번 작전 수행에 나섰습니다. 간부들을 불러 모은 정성공은 이 작전이 얼마나 중대시한가를 지휘관들에게 똑똑히 알렸습니다.



"각 제독과 통진(統眞)은 지난 10여년 동안 온갖 고생을 다 겪었으나, 공명을 떨칠 사업은 바로 이번 일에 있다!"





함대는 전진을 개시했습니다. 지난번의 악몽이 남은 양산 일대를 지났지만 바다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잠잠했습니다. 정성공 함대는 장강 남안에 위치한 초산(焦山)에 상륙하여 엄숙하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명나라의 역대 황제에게 지금부터 남경을 공략하겠다는 사실을 알린 것으로, 이른바 전승 기원인데 3일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첫째 날, 정성공과 그의 측근들은 붉은색 옷을 입고 하늘에 제물을 올렸습니다. 둘째 날, 그들은 검정색 옷으로 갈아입고 대지를 향해 같은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마지막 날, 흰색 옷으로 갈아입은 그들은 명태조 홍무제 주원장을 위해 예를 올렸습니다. 전원이 하얀 옷을 입었고, 수백 척에 이르는 정성공 함대 모든 배의 돛에 흰색 깃발이 높이 걸렸으며, 갑판에도 흰색 깃발이 휘날렸습니다. 이 날을 본 목격자는 강이 한여름에 갑자기 눈으로 뒤덮인 듯 했다고 할 정도로 장관이었으며, 의식은 함대의 모든 병사들이 위대한 명태조의 이름을 세 차례 연호하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수천명이 넘는 목소리가 한번에 명 왕조를 찬향하니, 사방이 눈물 바다가 되었습니다. 어찌보면 과거부터 자신이 꿈꾸웠던 광경이 현실로 된 모습을 본 정성공은 의식이 끝난 후에도 감정을 주체 못하고 눈물을 계속 흘렸다고 합니다. 그는 그날의 기분을 시로 남겼습니다



노랗게 물든 나뭇잎을 사이에 오래된 염원이 새겨져 있고
궁궐을 휘감든 가을바람은 차갑구나
참나무 껍질은 갈수록 두꺼워지고
무심한 새들은 돌아오는구나

잊혀진 묘비들이 땅 위에서 나뒹굴고
사당의 계단에는 이끼들이 잔뜩 끼어 있구나
찾는 이 하나 없는 이곳에
세상사 근심만이 돌아오는구나



8월에 이를 무렵 정성공 함대는 다음 진격을 개시했습니다. 양자강 쪽에서 버티는 청군의 지휘관은 나명승(羅明昇)이라는 인물이었는데,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넒은 양자강의 강 유역 요지 곳곳에 군대를 배치했고, 남경에 가까운 상류에는 곤강룡(滾江龍)이라는 방어 시설을 설치했습니다. 15 킬로미터에 걸쳐 강 중간 중간에 솟아 있는 섬들 사이를 뗏목으로 연결한 댐이었습니다. 마치 강물 위에 세워진 만리장성과 같은 곤강룡의 곳곳에 요새가 들어서고 강 하류를 향해 대포가 배치되었습니다. 삼나무 목재로 만든 요새 기단들만 해도 각각 소총과 탄약으로 무장한 500여명의 병력을 지탱 할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크기였다고 합니다.



정성공 함대의 가장 큰 전함도 왜소하게 보이게 하는 이 떠 있는 요새들은, 밑바닥에 흙과 바위를 실어 안정을 유지했고, 강에 닻을 내리고 거대한 쇠사슬로 서로를 연결시켰습니다.



정성공의 부대에 합류하여 선봉에 선 장황언은 곤강룡과 대적하기 위해선 여러 방면에서 정밀한 공격을 가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정성공을 진강(鎭江)을 노리기로 했습니다. 다만 진강은 상당히 강력한 요새 였습니다. 진강을 무력화 시켜야만 다른 요새들을 함대가 공격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정성공은 양동 작전을 기획합니다. 진강을 노리는 동시에 과주(瓜州)를 노리기로 한 것입니다. 이 두 요충지만 손에 넣는다면, 북경으로 곧장 이어진 대운하의 한쪽 끝을 확보하게 되어 북쪽에서 남경으로 보내는 모든 물자를 중간에서 차단이 가능하게 됩니다.



공격의 주력인 함대 병력은 장황언의 부하들이 주축인 남군과, 정성군의 부하들이 주축인 북군으로 나누어졌습니다. 공격이 시작되었고, 함대는 적의 포병들을 고립시켜 재보급을 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 포격을 가했습니다. 강 한가운데의 바지선들은 대포를 쏘면서 응사를 했지만, 정성공 함대에 큰 타격을 주는것은 어려웠습니다. 곧 만주족 대포의 탄약이 바닥이 난것입니다.



함대는 진강을 통과해 곤강룡에 이르렀습니다. 선봉 선단이 바지선들을 공격하여 적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동안, 용감한 잠수부들은 댐 아래로 헤엄쳐 들어가 요새 기단을 연결하는 쇠사슬을 끊어 내었습니다.


그 동안 양자강 남안에서 장황언 부대는 중무장한 진강 요새를 우회하여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정성공의 깃발을 높이 들고 현지의 호륙을 기대하며 내륙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에 32개 지역에서는 정성공에 충성을 맹세합니다.


적장 나명승은 강물 위의 한 기단으로 휘하 병사 500여명가 함께 내몰렸습니다. 탄약이 다 떨어지자 그들은 화살을 쏘면서 최후의 최후까지 저항했고, 정성공의 수군이 물밑듯이 기단으로 몰려들자 그들은 모두 장렬하게 전사하고 맙니다.



다시 과주에서 정성공의 휘하 장수 마신과 주전빈이 선봉으로 나서 싸웠습니다. 주전빈은 강기슭에서 내달려 가파른 등성이를 넘고 사다리를 타고 직접 성벽으로 올라, 부상을 당하면서도 계속해서 부하들을 지휘했습니다. 곧 저 멀리 함대에서 싸움을 지켜보던 사람들에게도 과주성 위에 정씨 가문의 깃발이 올라가는 장면이 목격되었습니다. 주전빈은 5발이나 되는 화살을 맞았지만, 위풍 당당하게 서있었습니다.



정성공이 대승을 거둔 것입니다.



진강과 과주가 모두 정성공의 수중에 떨어졌습니다. 남은것은 남경으로 걸어가기만 하면 될 일입니다. 정성공은 적장으로 주의자라는 인물을 생포했는데, 주의자는 정성공의 앞에서 목숨만 살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유생으로 알려진 정성공의 효심에 호소했습니다.


"저는 고향으로 돌아가 연로한 부모님을 돌볼 수 있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너 같은 반역도의 피로 어찌 내 칼을 더럽 힐 수 있겠느냐?"


정성공은 그렇게 말하며 그에게 금 500냥을 주고 풀어주었는데, 아마도 다른 병사들의 투항을 기대한것으로 보이지만 부모님 드립을 쳤던 주의자는 그 즉시 남경으로 달아나서 사태를 보고합니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정성공은 이 시점에서 성공적으로 양자강의 요충지를 장악하여 대운하를 차단한 상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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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드라마 강산풍우정에 나오는 효장문황우. 홍타이지의 아내이자, 도르곤의 아내이며, 순치제의 어머니이자, 강희제의 할머니이자 스승입니다.



보고를 들은 청나라 조정은 엄청난 충격으로 발칵 뒤집어 졌습니다. 21세의 순치제는 미친듯이 실성하며 소리를 쳤고, 자신이 직접 원군을 이끌고 남경으로 가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순치제와 정성공의 대결이라면 상당한 구경거리가 되었겠지만, 효장문황후는 황제가 경솔한 언행을 한다면서 그를 진정시켰습니다. 순치제의 분노는 쉽게 가라 앉지 않아 그는 마구 칼부림을 하면서 황상을 내리쳐 산산조각 내었고, 아담 샬이 간신히 젊은 황제의 노기를 가라앉히는데 성공합니다.


청조 입장에서 보면 이는 보통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소문은 일반 백성들 사이로 금세 퍼질테고, 그들의 동요가 전국에서 벌어지면 사태가 산불처럼 커질 가능성도 충분했습니다. 불분명한 이야기들이 나돌았고, 정성공의 30만 대군이 북경으로 운하를 타고 진격할 것이라는 식의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반면에 정성공의 부대는 의기양양했습니다. 드디어 사람들은 이 싸움이 무엇인가 기대해볼만 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지난번 양산에서의 폭풍우 같은 것도 하늘이 기개있는 사나이들을 시험해보기 위한 시련 정도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양자강 상류와 내륙에서는 장황헌 부대가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현지 백성들도 움직일 기세였습니다.



과주성이 함락되었음으로 양자강 북안이 확보되었습니다. 반대쪽 남안에는 진강이 있었고, 이곳도 정성공이 장악을 했습니다. 훗날의 이야기를 하자면 아편전쟁 당시 청나라는 진강이 무너지자 꼬리를 내린바 있습니다. 진강의 싸움에서는 청나라의 장수 관효충(管效忠)이 지키고 있었는데, 그들은 정성공의 철인부대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철인 부대는 일반 병사들에게는 신병이라고까지 불렸습니다. 철갑주 등을 차고 일본식으로 얼굴까지 온몸을 가른 그들은 부대 최전선에 배치되어 철벽과도 같이 적을 막아세웠고, 긴 창으로 무장해 기병들이 탄 말을 쓰러뜨렸습니다.


입고 있는 갑주도 어마어마한 무게고, 무기도 상당한 무게, 거기다 당씨가 한 여름이었음을 감안하면 철인 부대의 구성원들이 얼마나 골라 모은 괴력의 사나이들인지 알법했습니다. 만주족 기병대는 철인부대에 달려들었지만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녹아내렸습니다. 그 뒤를 이어 정성공 부대의 기병대가 달려들어, 진강은 곧 대학살장으로 바뀌고 맙니다. 만주족 병사들은 서로 먼저 도망가려고 밀어내었고 이 과정에서 사상자가 무수하게 발생했습니다.



정성공의 의도는 명확했습니다. 계속된 승리에 고취된 그는 양자강 상류로 진격하기를 원했는데, 그가 가장 신뢰하는 장수 감휘는 신중할것을 부탁했습니다.


"아군은 이미 대운하 남쪽에 요충지를 장악하여 만주족의 북쪽 중원로를 차단하게되었습니다. 남경으로 곧바로 진격하는 대신, 남경을 우회하여 내륙과 상류의 다른 도성들을 장악하고 남서쪽으로 진출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아군은 적의 증원로뿐만 아니라 남경을 버티게 해주는 식량 보급로도 차단하게 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과도한 인명 손실 없이 남경을 포위하여 항복을 받아낼 수 있습니다."


과거의 전례를 따져보자면, 명태조 주원장은 지금의 남경인 집경을 공략하기전에 채석(采石), 우저(牛渚) 등을 먼저 공략한 전례가 있습니다.


초전의 연승을 누리고는 있지만, 후방에 강력한 방어부대와 동맹 세력없이 너무 내륙 깊숙이 온것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성공은 남경을 공략하는것이 중요하다고 여겼습니다.


지금 백성들은 정성공 부대의 등장으로 술렁거리고 있습니다. 기세를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무언가 보여줄 필요가 있었고, 한족들이 많은 남경을 함락시킨다면 효과는 제대로일 것이라 여긴 것입니다. 또한 만주족 병사들이 적고 한족이 많은 남경의 특성상, 내부 도움도 기대해볼만 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남경에 입성해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병사는 나이만 먹을 따름이지. 시류에 따라 우리에게 가세한 병력은 머뭇거리면 실망하고 우리를 저버릴 것이외다."


화살을 5발 맞으면서도 과주성을 함락시킨 주전빈이 이 계획에 대찬성했습니다.


"우리는 지금과 같은 자신감을 십분 이용해야 합니다! 속전속결이야말로 최선의 방책이며, 더 머뭇거릴 시간도 없습니다.!"



이제 계획에 따라 85,000명이 넘는 대부대가 남경 코앞까지 다가오게 됩니다. 남경은 풍전등화에 놓였고, 정성공은 일생일대의 기회이자 전성기를 맞이한 무렵이었습니다. 그런데, 남경에 정성공이 살려준 주의좌가 있었습니다. 그는 남경 도독 낭정좌(郞廷佐)에게, 정성공의 최대 약점은 자만심이라고 말했습니다.



낭정좌는 이 말을 듣고 정성공에게 항복할 의사가 있다는 말로 아첨을 하면서, 단지 두려운것은 세상의 이목이니 한달 가량의 말미를 주라고 말했습니다. 형식적으로라도 저항하는 시늉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만주족 정권에서 일한 바에 따르면, 30일 정도를 버틴다면 만주족 정권도 북경에 있는 그들의 가족들을 해치지 않을것이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여기서 정성공은, 그의 참모들과 동맹들을 경악시키고, 그리고 후대에 본인도 후회할만한 일생일대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됩니다.



30일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남경의 항복을 기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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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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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알타이 | 작성시간 12.05.28 잘보고 있습니다.
    좋은글 고맙습니다.
  • 작성자★海東天子☆ | 작성시간 12.05.28 이때와 비슷한 시기에 [나선정벌]이 일어나죠...^^; 정성공이 남방에서 조낸 설치는 바람에 청군주력이 남으로 내려가고, 만주지역의 만주족들 중 상당수가 관내로 이주하는 바람에 만주는 공백상태... 이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러시아 코삭 찌꺼기들...ㅋ 때문에 청군은 이를 막는데 상당히 고생을 했고, 결국 조선에 손을 벌리게 됩니다. 사실 청군 주력의 일부만 남아있었어도 청군의 압승으로 끝날 일이었죠...ㄲㄲ
  • 답댓글 작성자배달민족 | 작성시간 12.05.28 문제는 우리나라에서 너무 과장을 해서 문제기는 하죠. 예전에 어린이용 역사애니에서 나선정벌을 예로 들면서 우리나라가 북벌을 할수있었다고 방영한적도(이완 이야기랑 같이)......... 뭐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는데 일조를 했다는 데는 공감을 합니다만은......육사에서 만든 논문에서는 코삭(까자크라 표현)인들을 꽤나 강하게 묘사를 해놨었더라구요......... 조선군이랑 같이 안싸웠을때는 지고 같이 싸웠을때는 이긴걸 보면 조선 조총수들의 전략적 효과가 있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만, 너무 과장하는 건 좀 그렇더라구요(그럼 임진왜란때 조총기술 전해준 일본에게 감사해야하나.............)
  • 답댓글 작성자gksmf | 작성시간 12.05.29 잉?? 나선정벌은 강희제때 일아닌가요??그렇다면 강희제때까지 남쪽으로 주력군 내려보냈다는 소리인가요??
  • 답댓글 작성자★海東天子☆ | 작성시간 12.05.29 나선정벌이 있었던 시기가 1654년과 1658년인데, 청의 입관이 1644년입니다. 중원에 들어간지 꼴랑 10년 정도 된 상황... 강희제 재위시기도 나름이지, 사실 1654년은 강희제가 즉위한 바로 그 해이자 순치 11년이었죠. 또한 이 시기에는 [복명세력]들이 상당히 설쳤고, 그중의 하나가 바로 정성공입니다. 이후로는 삼번란이 기다리고 있고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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