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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수신(水神) 정성공(13) ─ 기쁨도 잠시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6.07|조회수721 목록 댓글 1

 
 
 
 
네덜란드인들의 시각을 반영한다면, 이제 대만은 문명권을 떠나 야만인들의 세상이 되었지만, 대만에 거주하던 중국인들은 현 상황을 매우 좋아라 하며 정성공을 영웅으로 여겼습니다. 중국인도 아닌 원주민들은 애시당초 큰 감정이 없었고, 그저 정복자가 다른 사람으로 바뀐데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대만만 전역에 정성공의 이름이 널리 퍼지면서 그의 용맹에 대한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마치 프레스터 존 왕의 이야기 마냥, 원주민들 사이에서는 바다를 건너 도착한 성군에 대한 각종 전설이 퍼지게 되었습니다. 소문에 따르면 그 자는 바다의 여신이 수호하는 영웅으로, 바다를 지배하는 힘을 가졌고, 그 힘은 불멸의 존재가 준 마법의 옥팔찌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그 남자가 대만에 온것은 명나라를 구하기 위한 3가지 보물을 구하기 위해서 였고, 첫째인 옥팔찌는 남자를 바다의 제왕으로 만들 것이며 두번 째 검은 기는 고산족으로 하여금 남자에게 충성을 바치게 할 것이며, 세번째로 밑바닥이 없는 신비의 곡식 항아리(出米岩)은 병사들을 영원히 먹여 살리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소문이 어찌 되었건 간에, 정성공은 옥팔찌나 검은 기는 얻었을지 몰라도 출미암은 얻지 못한것이 확실했습니다. 전투가 끝난 후에도 병사들의 굶주림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고, 정성공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은 섬 전역으로 퍼져 각자 먹을 것을 구하려 분주했습니다. 전투가 끝난 후에도 금문도에서 버티고 있는 정태는 여전히 아무런 지원도, 보급도 전해주질 않고 있었습니다.
 
 
 정성공은 군사를 이끌고 자신이 정복한 이 커다란 섬을 시찰했습니다. 이에 따라 각종 전설이 만들어져, 정성공이 바위를 찌르자 우물이 되었다고 전해지는 우물의 전설이 생기는가 하면, 정성공이 칼을 휘두르자 칼이 용으로 변했다던지, 마법의 도구를 얻었다던지 하는 이야기들로, 굳이 여기서 그 전설들을 모두 열거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이 당시 정성공은 대만 남서쪽 지역까지 멀리 진출을 하진 않았습니다.
 
 
 그 당시 정성공에게 가장 골치가 아픈 일은 하문과 금문에서 버티고 있는 정씨 일족의 태도였습니다. 그곳에서 잘 지내던 정씨 일족들은 사실 정성공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으며, 온갖 전염병이 창궐하는 섬으로 자신들을 끌고 가려고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품고 있는 사명에 너무나 오랜시간 집착한 나머지, 정성공의 정신이 좀 이상해지지 않았나 하는 의견들이었습니다.
 
 
 정성공은 대만에 계속 머무를 생각이었지만, 이것이 청을 다시 공격하려는 그의 의지를 꺾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남경에서의 참담한 실패 후 오랜 시간동안 불안감과 초조감, 발작적인 난폭함에 시달리던 정성공은 간만에 안전을 되찾았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나 하나 다시 해결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많은 식량을 자급자족 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였고, 본토로 선단을 부지런히 보내 피난민들을 실어 날라 인구를 증가시켰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농민들은 새로운 정착지를 주겠다는 의견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역시 가장 큰 문제는 본토의 정씨 가문입니다.
 
 
 그들의 비협조도 이해할만은 했습니다. 대만을 만주족 공격에 적합한 근거지로 만드는 작업은 족히 한세대는 걸릴 일입니다. 정씨 가문의 사람들은 자신들과 가족들이 평화롭게 지내는 고향을 떠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곳으로 가는데 회의적이었고, 사실 병사들도 고된 승리를 거두자마자 이 머나먼 섬에서 농부로 변해 힘든 농꾼일을 하게 된것에 대하여 당황스러워 했습니다. 하지만 정성공은 미래를 보길 원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정성공에게 ─ 슬픈 소식이 되지는 않을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그의 고지식한 도덕관념을 자극할만한 ─ 뜻밖의, 그러나 예상은 했던 소식이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정지룡의 최후에 대한 일입니다.
 
 
 
강희제
 
 
 정지룡은 그때까지 줄곧 투옥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만주족 정권은 최종적으로 정지룡이 자신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것을 확신했습니다. 그의 이용가치는 이제 사라졌고, 그렇다면 정지룡에게 남은것은 만주족 정권을 적대하는 장수의 아버지라는 사실 뿐입니다.
 
 
 마카오에서부터 그를 알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지난날 남중국해의 당당한 제왕이 이렇게 된 사실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느끼면서, 정지룡을 찾아오는 유일한 친구들이 되어 조금씩 그를 도와주었습니다. 하지만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고, 정지룡은 투옥 생활을 하면서 여러가지 느낀 점이 있는지 이렇게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만약 제가 다시 옛날과 같은 거부가 된다고 하더라도, 저는 그것을 반갑게 여기진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지룡에게 그런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1661년 11월, 강희제를 대리하던 네 명의 섭정들은 정지룡을 처형할 시기가 왔다고 선언했습니다. 즉 강희제 본인의 의사라기보다 이는 4명의 섭정들의 의사에 더 가깝습니다. 정성공에게 소식이 전해지길 바라며 조목조목 포고문이 작성되었고, 정지룡은 끌려나왔습니다. 형벌은 가장 처참한 형벌인 능지형이었습니다.
 
 
 이 교활하고, 용감하며, 영리했고 재치가 넘쳤던 해적왕은 이제 나무에 묶여, 잔혹스런 집행자의 앞에 내몰려 사지가 칼로 베어졌고, 몸은 1,000번에 걸쳐 도려내어졌습니다. 육신이 예리한 회칼이 베어질 때마다 곧 환부는 붉게 달구어진 인두로 지져져 출혈이 그쳤지만, 정지룡의 고통은 더욱 심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그 당시 정지룡을 절망스럽게 했을 것은, 그는 자신이 형벌을 당하기 전에 자신의 두 아들이 이러한 형벌을 당하는것을 두 눈을 뜨고 지켜보아야만 했습니다. 정성공에게 제발 목숨을 구해달라고 빌던 그 이복 형제들이 이제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소식을 들은 정성공의 기분이 어땠을지는 모릅니다. 그는 아버지를 죽이고 나라를 구하자는 구호를 내걸기도 했으나, 또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를 영웅처럼 여기며 살았습니다. 확실한건 공식적인 애도 기간이 선포되었다는 것입니다.
 
 
 정지룡의 죽음은 시대가 가는 흐름이기도 했습니다. 1662년 봄. 정성공은 39살의 나이로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축복스러운 일이라기보다는 뜻밖의 일에 가까웠습니다. 정성공의 아들, 정경은 정씨 가문과 제휴하던 한 가문의 손녀와 정혼했지만 별다른 아이가 없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쥐어잡히고 살던 21살의 정경은 자기 또래의 여자에게는 별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그의 손길은 중년 여인들에게 향해 있었습니다. 마침내 진상이 드러났습니다.
 
 
 정성공이 제란디아 요새 공략이 신경을 쏟을 사이, 본토의 자잘한 소식들은 전해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정태가 보급을 전혀 안해준것은, 물론 괘씸하고 화가 나는 일이었으나 그가 정씨 집안에 양자로 들어왔다는 점, 오직 실력으로 정지룡에게 인정받았으며 경력으로 따져도 정성공도 함부로 하기 힘든 인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깜짝 놀라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정경의 일은 전혀 달랐습니다. 정경은 어머니의 지시에 따라, 아이의 출생이 본처가 아니라 '후실' 이라는것만 전달했습니다.
 
 
 그때 정경의 처조부는 돌아가는 모양새에 화가 나서 모든 전모를 알렸습니다. 이 손자를 낳은 산모는 정식으로 재가 받은 후실이 아니라 진씨녀라는 유모였고, 진씨녀는 정성공의 어린 자식들 중 한명의 양육을 위해 들어온 여인으로, 종법에 따르면 정성공의 후실로 인정이 되니, 이것은 정경에게 있어서는 계모가 되는 일입니다.
 
 
 
 정성공은 폭발했습니다. 그의 가치관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근친상간이 벌어졌는데, 아내는 문제를 해결하긴 커녕 아들을 도와 은폐시키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정성공은 아이, 진씨녀, 정경, 그리고 자신의 부인 모두에게 극형을 선고하고 처벌을 위임했습니다. 명을 받는 전령이 도착하자 온갖 난리가 벌어졌지만, 정태는 정성공을 우습게 여기고 그의 말을 거들떠도 보지 않았습니다.
 
 
 재앙은 연달아서 닥쳐 오는 법입니다. 정성공은 본토 연안에 보낸 부하 장수가 만주족에 투항할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당연히 그 자를 처형하기 위하여 가장 용맹한 주전빈을 보냈는데, 주전빈에게 명령을 내려 도중에 하문에 들러 상황을 확인하라는 지침을 내렸습니다. 주전빈이 처벌이 내려졌는지 확인하러 나타나자, 정태는 주전빈까지 잡아다 가두었습니다.
 
 
 간신히 어느정도 진정이 된 정성공의 심리 상태는 다시 극심하게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나중에야 알게될 일이지만, 그는 대만의 풍토병에 걸린듯한 모습도 보입니다. 부하들의 저런 태도는 그에게 심각한 불안 요소였고, 바다에서야 물론 정성공의 세력은 여전히 막강하며 두려울게 없었지만 지상에서의 전쟁 수행 능력은 이제 미지수였습니다. 지난 날의 싸움들이 그것을 증명했고, 이제 정성공은 거기에 대해서는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정성공은 실력을 키워야겠다는 움직임으로 다른곳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1662년 4월 21일, 에스파냐 령 필리핀의 총독 사비냐노 만리케 데 라라(Don Sabiniano Manrique de Lara)에게 한 통의 서한이 전달됩니다. 정성공의 서한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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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아놔 | 작성시간 12.06.08 정성공이 필리핀침공을 했었던가요?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내용전개가 그렇게되는거같군요. 항상 잘보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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