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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의 군벌]최강의 군벌, 만주의 패왕 장작림(2) ─ 신들린 처세술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6.11|조회수734 목록 댓글 1


봉천성 순방영 통령 시절의 장작림


 팔각대의 대단에서 시간을 보내던 장작림. 장은 무장 조직에 대한 경영과 세력 확대에 주력했고, 그곳의 상인들과도 친하게 지내며 신임을 얻고 명성을 날렸습니다. 하지만 1902년 쯤이 되자, 동북 지역은 점점 혼란을 벗어나 치안 문제에서는 비교적 안전해졌습니다. 그렇다면 대단이 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장의 조직도 해산 위기에 몰렸습니다.


 장을 팔각대 마을에 받아들인 상회 회장 장자운은 이 무장 조직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습니다. 만약 그대로 해산한다면, 혹시 이들이 나쁜 마음을 품고 지방에 해를 끼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리고 장작림과 우정을 쌓은 일도 있고 해서, 왠만하면 이 조직을 그대로 유지해서 나라에 도움이 되게 하려고 했습니다. 장자운을 비롯한 상인들은 신민부(新民府) 지부인 증온(增蘊)을 찾아가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장작림을 칭찬했습니다.


 증온 지부는 장작림을 만났습니다. 장은 이때 본능적으로 이것이 대단한 기회임을 깨달았습니다. 어차피 민간 조직으로 남아봐야 한계가 있는데, 정부 편입이 된다면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장은 증온에게 제자 신분으로 머리를 숙여 절을 했고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증온은 이야기를 나누어보다가, 장이 인상도 좋고 태도도 온화하고 점잖은 편이라 아주 좋은 인상을 받아 그의 조직을 받을 생각을 했습니다.


 운도 따라주었습니다. 성경(심양) 장군 증기(增琪)는 이때 '사사로운 단을 공적인 단으로 바꾸어' 마적 등 도적들을 선량한 백성으로 만들자는 방침을 조정에 건의했습니다. 그런 형편이라 장작림은 바로 비준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제 밑에는 1개 대대 병력이 있지요!"


 장은 증온에게 이렇게 거짓말을 했던 처지라, 비준을 얻자마자 팔각대로 달려와 있는대로 말을 사고 단원을 늘리고, 근처의 마적 집단에게 연락하여 자기네 패거리에 오라고 권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485명이 모였고, 기병 3소대와 보병 2소대를 책임진 장작림은 조직 두목에서 정식 관군이 되었습니다. 이때 장의 밑에는 장경혜,  탕옥린(湯玉麟), 장작상(張作相) 등 훗날에도 이름이 자주 언급될 인물들이 보입니다.


 
  

 호걸 생활을 하다가 신민부라는 국가 기관에 들어온 장작림은 생소한 생활환경에서도, 그의 가장 큰 장기인 처세술을 발휘하며 금세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는 지부 증온이 이 기관의 핵심이라는것을 알고 그에게 알게 모르게 뇌물을 찔러주는 한편, 항상 예의를 차리면서도 무엇을 시피면 군말없이 수행했고 복종했습니다. 또한 상인들을 잘 다루는 편이었고 실무에 밝았으며 부하 관리에도 재능을 보였습니다. 이에 지부는 그를 믿음직한 참모로 여겼습니다.

또한 신민부 순경국장 왕봉정(王奉廷)을 교묘하게 따돌려, 신민부의 군사 실권을 장악하는 수완을 발휘합니다. 이렇게 조직 생활에 완벽하게 적응하던 그에게 러일전쟁이라는 또 다른 찬스가 찾아왔습니다.


 청 정부는 요하 서쪽을 중립 지구로, 동쪽을 전쟁 지구로 선포했지만 전쟁이 벌어진 마당에 그런것은 아무런 관계가 없었습니다. 러시아 군대나 일본 군대나 포악하기는 서로 쌍벽을 이루었고, 치안이 불안해지자 잠잠하던 마적때도 다시 벌떼같이 일어나 또다시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장은 치안 유지에 대한 노력보다는, 과연 무엇이 자신에게 유리할까 고민해보았습니다. 그가 보기에 러시아군이 꽤 유리해보였기에, 그는 러시아군에 접촉해서 무기를 타내고 돈까지 얻어내고는 러시아군을 위해 공권력을 함부로 사용해 자기 휘하의 부대를 동원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인 일본쪽에 판세가 기울었습니다. 


 장은 삽시간에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처형 당할뻔 하기까지 하지만, 여기서 또 다시 기지를 발휘해 이번에는 일본쪽에 붙어 그쪽의 지원을 받고 싸우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편을 갈아타는 능력은 장작림의 최대의 기술입니다. 이런 식으로 시간이 흘러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게 되자, 이쪽 저쪽으로부터 조금씩 지원을 받은 장의 부대는 3개 부대가 더 늘어났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출세까지 해서 신임 성경 장군 조이손(趙爾巽)은 장에게 3개 부대를 5개 부대로 편성토록 했습니다.



 장작림과 조이손.


 밑에 부하들도 어느정도 되겠다, 장은 지방 마적들을 다시 열심히 소탕하고 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이름을 날리던 마적 전옥본(田玉本)은 세력이 1,000명을 훌쩍 넘는 대마적이었는데, 장작림의 부대에 피격되어서 사망했습니다. 마적 소탕을 하면서 공을 세우고, 마적 무리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동시에 백성들로부터 인심도 살 수 있으니 이 마적 사냥이란것은 실로 남는 장사였던 것입니다.


 다만 두립삼(杜立三)이라는 대마적은 장작림 조차도 손을 대기 껄끄러운 상대였습니다. 요중현(遼中縣)에 세력을 두고 있는 두립삼은 자칭 마상황제로 불리면서 관군조차 그를 피해다닐 정도였고, 백성들은 두립삼을 보면 "두 대인" 이라고 하면서 고개를 숙였습니다. 조이손은 공을 세우기 위해 몇번 부하들을 보내 두립삼을 잡도록 했으나 번번히 당하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1907년이 되자 이 지역에 한 남자가 나타납니다. 서세창(徐世昌) 이었습니다.
 
파일

서세창


이 사람은 훗날 중화민국 총통까지 하는 인물로, 전형적인 원세개 라인입니다. 그는 헤이룽장 성, 지린 성, 랴오닝 성 3개 성을 관할하는 총독에 임명되었고, 두립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똑똑하다고 소문난 지현 은홍수(殷鴻壽)을 신민부에 보냈습니다. 신민부에 도착한 은홍수는 장작림의 협조 아래 두립삼을 잡을 계책을 꾸몄습니다.


 두립삼은 말을 타는 재주가 남달랐고, 말 위에서 쌍권총을 쏘는데 솜씨가 백발 백중이었습니다. 본거지의 성곽은 견고했고 따르는 무리들은 흉악한데다 검문 초소도 많아 함부로 공격하단 큰 피해를 입을 것입니다. 장은 계책을 내어, 사람을 시켜 두립삼에게 축하 서신을 보냈습니다. 두립삼이 봉천성의 높은 자리를 맡게 되었으니, 어서 신민부로 와서 서세창 총독에게 감사를 드리라는것입니다.


 두립삼은 이 편지를 보고 생각한 끝에 경솔하게 움직이지 않기로 했습니다. 모친과 형제들이 신민부에 가면 크게 당한다고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계책이 실패했지만 장은 또 다른 계책을 내었습니다. 두반림(杜泮林)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두반림은 두립삼의 양아버지로 지역 유지였고 두립삼이 어르신으로 모시며 존경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일전부터 두반림과 왕래가 있던 장은 직접 두반림을 모시고 오고, 은홍수는 두반림을 성대하게 대접해서 지금 하는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두반림은 장의 말에 따라 두립삼에게 편지를 쓰게 됩니다. 유협의 일이야 평생 할 일이 아니니 이 조상의 이름을 빛낼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립삼은 머뭇거리다가 존경하는 어르신의 말이라 13명의 부하만 이끌고 출발했습니다. 1907년 6월 6일이었습니다.



 움직이기 편한 차림으로 온 두립삼은 은홍수를 만나, 벽을 등지고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언제든지 쌍권총을 꺼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별다른 문제는 없었고, 곧 이야기가 끝나 은홍수는 소리를 쳤습니다.


 "손님 가신다!"


 두립삼은 방문 앞에서 몸을 굽히고 인사를 했습니다. 바로 그 짦은 순간, 장작림의 부하 탕옥상 등이 비호 같이 달려들어 두립삼을 고꾸라 뜨린 것입니다. 자랑인 쌍권총은 금세 빼앗겼고 그는 결박을 당했습니다.


 "시간 끌어 좋을것 없소! 어서 처리해버립시다."


 장작림은 그날 밤에 바로 두립삼을 총살시켜버렸습니다. 그 순간, 장작림의 부하 장경혜는 부대를 이끌고 두립삼의 본거지를 습격했습니다. 두목을 잃은 마적단은 오합지졸이라 생다가 되지 않았고, 결국 조직은 풍지박산이 나고 맙니다. 총독 서세창은 매우 기뻐서 장에게 5,000량의 은을 내림과 동시에 봉천성 순방영 전로 통령으로 발령했습니다. 이제 장작림은 5개 대대의 마보군을 지휘하게 된 것입니다. 동북 지역에서 장은 강력한 무장 조직이 되었습니다.



 마적 소탕에서 보인 능력으로 1908년 장작림은 요서 북부의 몽고 마적을 상대하게 되었습니다. 이 몽고 마적들의 뒤에는 제정 러시아가 있었던 것입니다. 건조한 초원이 끝없이 펼쳐졌고 여름에는 꿀벌만한 모기가 득실거리는 곳이라 이 일은 매우 어려웠지만, 장작림은 또다시 특유의 적응력을 보이며 성과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지형에 능숙하고 주민들의 사정에 능한 몽고 마적은 어려운 상대였습니다. 1909년 고전하는 장에게 서세창은 병력을 더 지원해주었고, 이제 장은 3,500명을 거느린 동북 만주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되었습니다. 서세창의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서 장은 졸병보다 더 고생하며 솔선수범을 했고, 온갖 고생끝에 유명한 몽고 대마적들을 죽이거나 러시아 지역으로 쫒아내었습니다. 



 이렇게 순조로운 관리 인생을 보내던 장에게 기회가 연달아서 찾아옵니다. 1911년, 신해혁명이었습니다.




 혁명은 역사의 필연성이라는 기름을 먹고 무서운 기세로 타올랐습니다. 머나먼 봉천성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혁명 단원 장용(張榕) 등은 신군부의 남천위(藍天尉) 등과 연락을 하며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남천위의 신군 제2여단은 봉천성 북대영에 주둔하였고, 성 내에 있는 유일한 주둔군이었음으로 성공 가능성은 매우 높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경험이 부족해서 대사를 그르치게 됩니다.



 1911년 5월, 조이손은 동삼성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해외 시찰을 하다가 혁명 소식을 듣고 경악하여 재빨리 귀국해서 대책을 짜내느라 고심했습니다. 논의를 하던 중 순방영 통령 오준승(吳俊陞)을 불러들이자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들은 구군이라 혁명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어 안심할만 했고, 또 오준승 등은 조이손의 옛 부하였습니다. 조이손은 즉시 오준승을 성내로 불러들여 수비를 견고하게 하려고 노렸습니다.



 이 정보는 다름 아닌 장작림이 가장 먼저 파악하게 됩니다. 그는 이미 벌써 조이손의 옆에 자기 사람을 심어 놓았고, 봉천성의 강무학당(講武學堂)에 장경혜, 탕옥린, 장작상 자신의 측근들을 보내 교육을 시키면서 동정을 살피라고 명령을 내린 뒤였습니다. 장작림은 이 소식을 듣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7개 부대를 모두 모아 말을 타고 봉천을 향해 쉬지도 않고 달렸습니다. 오는 도중 오준승이 그를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무슨 일이오? 아무튼 반갑소이다."


 "그냥 그런 일이 있소."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장작림은 오준승이 사정을 파악하기 전에 봉천성에 입성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는 즉시 총독 조이손을 만나 예의를 갖추고 말했습니다.


 "시국이 위급해서 혹시 총독께서 위험에 처하지는 않았나, 하고 급하게 부대를 인솔해서 왔습니다. 총독께서 명령도 안내리셨는데 함부로 군사를 움직인것에 대해서는 달게 벌을 받겠습니다. 저희 부대를 거두어 주신다면 이 장작림이는 한 목숨 바쳐 총독 각하를 보호하고 죽을때까지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실상 급히 군사가 필요하고, 또 때마침 장작림이 왔기 때문에 조이손은 기뻤습니다. 거기다 장작림이 저런 식으로 나오자 감격케 하여 흔쾌히 허락하였고 부대 이탈에 대한 어떤 처벌도 내리지 않음은 물론, 오히려 상을 주었습니다.


 장작림은 수도 방위를 맡는 명령 이외에 중로 순방영 통령을 겸임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장은 이제 15개의 부대를 통솔하게 되었으며, 봉천 성내에 있는 군부대에서 최고의 실력자로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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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2Pac | 작성시간 12.06.12 가는 곳마다 윗사람에게 신용을 얻고 중용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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