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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의 군벌]최강의 군벌, 만주의 패왕 장작림(6) ─ 전쟁의 시작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6.16|조회수655 목록 댓글 1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와세다 대학 전신인 대학교를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일본의 상황을 보자면,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이 있었을때는 중국에 대해 강경하게 나섰습니다. 그 유명한 21개조 조약을 생각해 냈던 것도 이 사람 있을때였습니다. 결과는 일이 제대로 되지도 못하고 전중국에서 제국주의 일본에 대한 반감만 극도로 치솟아 버렸습니다. 이 사람 뒤로 들어선게 데라우치 마사다케 내각입니다.


 새로운 내각총리대신인 데라우치는 중국 침략의 수를 바꾸었습니다. 원세개도 죽고, 북경정부의 모습을 보니 단기서가 막강한데 이 사람을 잘 구슬리면 되겠다는 것입니다. 단기서가 중국 무력통일 방식을 논하자 그를 지지하며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으로 단기서에게 도움을 주기로 했습니다.


파일:Tuan Chi-jui.jpg

 


서장에서도 언급을 하긴 했습니다만은……단기서 이 아저씨는 그 당시 군벌들 사이에서는 진짜 거물입니다. 원세개는 일부러 후계자, 2인자 법 인물을 만들진 않았습니다만은, 보통 북양 군벌의 3걸을 이야기 하면 단기서, 풍국장, 왕사전 등이 있었고, 게 중에도 굳이 2인자를 칭한다면 단기서가 가장 어울렸습니다. 아니, 그 전에, 단기서를 눈여겨보고 쓴 사람이 무려 이홍장입니다. 그야말로 북양군벌의 정통 중에 정통이죠. 북양군벌 세력이라고 하긴 뭐하고 그냥 끈을 좀 잡았다고 할법한 장작림하고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또한 단기서는 탐욕스럽고 사악했던 다른 군벌과는 달리,개인적으로는 매우 좋은 성품을 가졌으며, 술,담배,호색,도박, 치부, 점술을 멀리하여 "육불총리(六不总理)"라는 이름을 남겼습니다. 3.18사태에 즉시 현장으로 달려가 사망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오랫동안 일어서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불심이 깊어 집에 불당을 차려놓고 매일 참배했으며, 항상 채식을 하였고, 스스로 "정도거사(正道居士)"라고 칭하였습니다.


 그런데 매국노죠. 


 이 시대 인물들 보면 이 정도의 갭은 대수로울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단기서는 명성이나 경험, 경력은 가히 최강이지만 당장의 힘, 재력 면에서는 뒤쳐지는 감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일본 입장에서는 밀어주고 지원해주어서 영향력을 보이기는 아주 적절한 대상이었죠. 이런 상황에서 단기서는 중국이 제 1차 세계대전에 적극적으로 참가해야 한다고 하면서, 북경정부는 1917년 8월 14일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선전 포고를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참전을 구실로 일본의 차관을 얻어와 참전군 부대를 만들었습니다. 곧 3개 사단 4개 혼성 여단 규모가 만들어졌지만, 물론 참전 따윈 안했습니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단기서의 사병 역할을 하는 무장 군벌 세력이었을 뿐입니다.


 한번 일본의 돈 맛을 본 단기서는 매혹되어, 더욱더 이것을 끌어들이기 위해 1917년과 1918년 일본과 차관을 계속 교섭했습니다. 차관의 명목을 번다하게 하여 진짜 목적을 은폐했는데, 기실 이 차관들은 중국의 토지, 광산, 산림, 철도 등 모두 저당 잡히고 쓰던 것이었습니다. 금액이 무려 1억 4천 500만원 (일본 화폐)에 이를 정도니, 가히 어마어마했습니다.


 이대로 가면 중국 전 영토가 일본 전 영토에 넘어가는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단기서는 일본의 지지에 감격해 1919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는 대표에게, 독일이 점령하였던 산동 문제를 제기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독일이 쟁취했던 중국의 주권은 이제 합법적으로 일본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됩니다. 비단 산동 문제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21개조 요구의 취소, 외국 군대와 경찰의 철수, 세관 자주권 획득 등 여러 요구는 회의에 상정조차 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중국 인민들은 분노했습니다.


 전혀 새로운 기운이 감돌았습니다. 신해혁명 떄도, 반 원세개 운동 때도 모습은 비슷했지만, 알맹이는 상당히 달랐습니다. 지금까지의 중국 혁명은 대체로 외국의 원조를 기대한 바가 있었고, 원조 획득 경쟁이라고 할만한 모습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습니다. 반 외세, 반 봉건. 그리고 그 주축은 학생들이었습니다.


중국 내에서는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까지 사용한, 5.4 운동의 시작이었습니다.



세계대전이 일어나며 유럽과 미국의 경제적 압력이 약해졌기 때문에, 중국의 민족 경제 상태는 상당히 호전되었습니다. 이것은 부르주아 혁명의 기반이 만들어졌음을 뜻합니다. 혁명을 이끌 지식층도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신해혁명등을 치루면서 이 지식층들은 근대화의 기대를 걸었지만, 이는 군벌 체제에 배신당했습니다.


 마치 나라를 개화한다면서, 정작 그 백성들을 개화 시키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자기네들이 대충 위에만 처리하면 된다고 생각하다 웃기지도 않게 패망한 김옥균 등 갑신정변처럼 말입니다.하지만 한번 물을 먹은 중국내 지식층은 타켓을 봐꾸어, 대중의 힘에 기대를 걸었습니다. 대중의 힘, "국민성의 개조"를 지향했고, 신문을 통해 항의하고, 유학생들은 일본에서 귀국하여 시위를 벌였으며, 민간단체에서 항의가 빗발쳤습니다. 마침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는 모습도 좋은 자극제였습니다.


 전국에는 총파업이 선언되었고, 학생들은 거리로 몰려나가 나라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뛰어들었습니다. 천진, 광주, 상해, 성도 등 주요 도시에서는 일본 상품 불매운동, 파리 강화조약 반대운동이 장기간 지속되었습니다. 1천명 이상이 체포되었지만 열기는 식을 줄을 모르고 오히려 더 불타올랐습니다. 


 정부는 체포, 탄압 등 강경한 태도로 대처했지만, 이 놀라운 상황에 경악하며 관련자들을 해임했고,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던 중국 대표도 매국노라는 낙인이 찍히는것이 두려워서 정부의 훈령도 기다리지 않고 조인을 거부했습니다.


 "신해혁명을 보고, 제 2차 혁명을 보고, 원세개가 스스로 황제라 칭하는것을 보고, 장훈의 복벽을 보았다. 와서 보고, 보고 떠나면서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실망하고, 깊이 낙담하고 있었다."


 루쉰의 말입니다. 당시 중국 지식인 층은 현실에 대해 낙담하고 무력감에 절망하고 있었지만, '중국의 르네상스' 라고도 불리우는 5.4운동으로 인해 지식층은 드디어 다시 한번 자신감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개화되고" "앞서가고" 있는 자신들 "엘리트" 들이 이른바 개혁이라는것을 하면 무지몽매한 대중들이 따라온다고 "착각"하는 수준을 벗어나, 대중들 스스로 일어나 봉건적 잔제를 해치우고, 스스로의 권리를 지킬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5.4운동은 작게 보면 애국주의의 실력행사이고, 넒게 보면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 개성의 해방으로 나아가 개개인, 자신들이 주역이 될 중국 내 현대사의 기원을 알리는 출발점이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전초전은 5.4운동에서 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5.4운동은 중국 공산당의 출밟점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중국은 공산당의 시대이니, 바야흐로 중국의 "근현대사"를 넘어, 현대사의 시작이 여기에 있다고 쳐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서수쟁(徐树铮)


한편, 단기서가 가지고 있던 "중국 참전군" 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시점에서 더 있을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단기서가 이를 해체할리도 만무하고, 다만 이름을 국방군으로 만들었을 뿐입니다. 곧 다시 변방군으로 만들면서,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본인이 아니라 심복이며 문하생인 서수쟁에게 변방군을 맡기기로 했습니다. 이름뿐인 대총통 서세창은, 북양 군벌의 원로이긴 하지만 개인적인 군대가 없어 단기서의 말에 순순히 따라야만 했습니다. 서세창은 1919년 6월 24일 서수쟁을 서북 주변사 겸 서북 변방군 총사령관, 외몽고 독판으로 임명했습니다.


 서북 주변사는 장작림의 동삼성 순열사보다 직권이 컸습니다. 군사상, 민정상, 재정상 독립권을 가지고 있으며, 군사 훈련이나 무기류를 먼저 구매하고 나중에 보고하는 독립권이 있었습니다. 또한 신강, 감숙, 섬서 등 각 성의 문무 관리들의 그의 통제를 받았습니다. 서수쟁이 갑자기 서북왕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서수쟁은 오만불손하고 거들먹거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뒤에 일어날 일을 계산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는데, 봉계 수령인 장작림, 직계 수령인 사성(四省) 경략사 조곤(曹锟) 등을 철저히 무시했습니다. 서수쟁이 신경쓰는 사람은 오직 단기서뿐이었고, 단기서를 제외하고는 자신이 천하제일이라고 였던 것입니다.


 당연히 장작림의 봉계나 조곤의 직계,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양대군벌의 불만이 쌓여갑니다. 바야흐로 환계와 직계, 봉계의 삼파전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조곤


오패부(吴佩孚)


 직예(하북성) 군벌이라고 실력이 없던것이 아닙니다. 직계는 본래 그 수령 풍국장이라는 대원로가 있었으나, 사망 후 조곤이 대신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그 조곤에게는 영리한 수하, 오패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마적 출신 등도 넘쳐나던 군벌들 중에서는 정말로 특색이 있었는데 수재(秀才) 출신이었습니다. 중국의 과거가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한다면 보통 사람이 아니죠. 문장력도 탁월했고 시세 흐름을 잘 파악했습니다.


 조곤의 직위가 올라감에 따라 오패부의 직위도 올라갔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오패부가 사실상 직계 군벌의 수장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1918년 8월부터 지속적으로 단기서의 친일 매국 행위를 낱낱히 폭로하고 단기서의 무력통일 정책은 망국의 정책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사람들은 단기서를 비난했고 오패부를 반대로 칭찬해서 갈수록 상태가 더 좋아졌습니다.


 직계와 환계의 대립은 갈수록 노골화되어졌고, 단기서와 오패부는 여러곳에서 충돌을 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장작림도 이 싸움에 끼여듭니다.


 장은 분위기를 보다 직계 쪽에 붙고는, 고대부터 자주 사용되어온 주제인 "청군측" 즉 군주의 주변을 청소한다는 구호를 내걸고 서수쟁에게 반대한다는 의사를 확실하게 드러내었다. 서수쟁도 이 소식을 듣고 놀라 북경으로 돌아와 환계군을 재정비하고 전투 준비에 들어섰고, 대총통 서세창은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긴급 전보를 쳐 장작림을 오게 하고 직환계의 싸움을 중재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일단 장은 직계 편입니다. 하지만 일단 여기서는 중재를 맡으라고 하니, 중재를 하는 "척"을 해야 했습니다. 6월 19일 장작림은 싱글거리는 얼굴로 만면에 회색을 띠고는 북경 동역에 나타났습니다. 북경의 고관들이 그를 맡기 위하여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제일 급한건 서수쟁이었습니다. 장이 직계 쪽에 붙으면 골치 아파지는 것입니다. 그는 안복(安福 : 환계 정객들의 모임. 단기서가 국무총리가 되자 그 세력이 주축이 된 국회를 안복 국회라고 함)계 인사들과 함께 장을 성대하게 대접하고 관저를 마련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장은 서수쟁이나 안복계에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체면을 세워 주지도 않았고, 봉천회관에 묵지도 않았으며 북경 봉군 사령부에 숙소를 정했습니다. 


 숙소를 정한 뒤, 장은 먼저 대총통 서세창을 보았고, 그 다음에는 전 내각총리 근운봉을 보았고 그 후에 단기서를 보았습니다. 장은 단기서에게 말했습니다.


 "쌍방이 공평하게, 상호 양보하여 평화를 유지해야 하지요."


 서세창이 말했습니다.


 "자네가 가서 조곤의 의견도 들어보게."


 다음날, 그러니까 20일. 서수쟁은 장을 꼬득이기 위하여 찾아갔지만, 장은 온갖 핑계를 대고 만나주지를 않았습니다. 서수쟁은 본통이 터졌지만 어쩔 수가 없었죠. 22일이 되자 서세창의 말을 따르기 위해 장은 조곤을 만나러 왔습니다. 조곤은 성대하게 연회를 대접했는데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하다보니 통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히 직계 대표회의가 열렸고, 오패부등이 발언을 하면서 5개의 정국 조정안이 채택되었습니다.


 이 5개의 조정안 중에 중요한것은 첫째, 안복회를 해산한다. 다섯째. 변방군을 폐지하고 육군부 직할로 한다. 는 것이었습니다. 다른건 둘쨰치고, 다섯번째는 환계가 들어주기 곤란한 일이었습니다. 저 군대는 단기서와 서수쟁의 생명줄입니다. 하지만 국내 여론이 워낙 단기서의 매국 행위로 인하여 나빠 그것 때문에 버팅기고 있기도 곤란했습니다.


 회의를 마친 장이 이 요구 조건을 가지고 북경으로 가서, 23일 단기서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둘은 술잔을 부딫히면서 눈치를 보았고, 단기서는 이렇게 택도 없는 소리를 하면서 말을 빙빙 돌리기도 합니다.


 "난 아무런 정치 야심이 없네. 부총통을 맞을 생각도 없고."


 "부총통을 하셔야지요."


 빙빙 돌아가던 대화는 점점 핵심으로 가까워졌습니다. 단기서는 다른건 몰라도 서수쟁의 병권을 회수하는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추호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이러는 상황에서, 7월 1일 "직예군이 서북 변방군에 고하는 글"이 발표되었습니다.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 이번 직예군 철수는 원래 국가와 인민들에게 해를 끼치는 안복계 및 매국적 행위를 하는 서수쟁을 숙청하기 위함이었다. 진보적 지도자, 우군 동지들에게 악감적 같은 것은 추호도 없다.


 이게 영리한 것이 무엇이냐면, 여기서 분명하게 공격하는 대상은 오직 서수쟁입니다. 그렇다면 진보적 지도자라는것은 무엇이냐, 단기서입니다. 공격을 서수쟁에게만 포커스를 맞추니, 단기서와 서수쟁을 같이 공격했을때보다야 단기서도 좀 더 물러설 수 있는 모양새가 생긴 것입니다. 결국 서수쟁은 유명무실한 한직으로 쫒겨났습니다. 이것이 중화민국 시절 지방 군벌을 요리하는 대표적인 방법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직계만 좋은 일이되었고, 단은 바보가 되었다고 느껴서 속으로 분노했습니다. 그는 변방 독판의 명의로 변방군을 불러 모으고 동원해서 최후의 발악을 노렸습니다. 한편, 서수쟁은 다른것보다 장작림에 대해서 분노가 극심했습니다.


 7월 5일, 서수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이 장작림과 한시간 가량 덕담을 주고 받았고, 7월 7일 날에 단기서와 함께 같이 논의좀 하지 않겠느냐, 라고 제의했습니다. 장은 영문도 모르고 참석을 해서 회의를 한참 하고 있었는데, 서수쟁은 회의 중에 전화를 걸어 단기서를 불러내고 말했습니다.


 "지금 바로 그 놈을 체포해버립시다."


 단기서가 개인적으로 매너가 있는 사람이라는건 이야기 했습니다. 매국노지만요. 껄끄러운 방법때문에 단기서의 표정이 미묘해졌고, 장은 그 즉시 예민한 감각으로 자리에서 쓱 일어섰습니다.


 "화장실 좀 다녀 오지요!"


 장은 몰래 화장실에 가는 대신 하수도로 뛰어들었고, 미친듯이 도망쳐서 기차역에 도착했습니다. 시간은 밤 11시가 넘었고, 장은 평복을 하고 화물 열차에 타서 천진까지 그대로 흘러왔습니다. 워낙 급박한 상황이라, 봉천에 도착한 장은 저도 모르게 감개무량해서 외쳤습니다.


 "다시 돌아왔구나!"


 물론 서수쟁이 실망한건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놓치다니! 대사를 그르쳤구나!"


 당연한 소리지만, 장은 이로 인하여 환계에 더욱 강한 악감정을 가지게 되었고, 직환전쟁에서 직계의 편을 들게 됩니다. 
 

동삼성 순열사 경호 여단장 시절의 장학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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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보한재 | 작성시간 12.06.18 단기서는 다 좋은데 치명적인 결함이 있군요.
    "매국노"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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