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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의 군벌]최강의 군벌, 만주의 패왕 장작림(11) ─ 제 1차 직봉대전 : 쑨원의 밀약(下) 환계와의 연합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6.22|조회수468 목록 댓글 3


 봉군의 장군 중 한명인 강등선(姜登选). 광동어에 익숙하고 여기저기 발이 넒어 장작림과 쑨원의 연결에서 활약했습니다.


 왕정위와 장작림, 장학량, 양우정 등은 여러가지 방안을 논의했습니다. 왕정위는 두개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첫째로 군사적 방안입니다. 남방 혁명정부는 직계 조곤과 오패부를 토벌하기 위해 남방에서 북벌을 위한 출병을 하며, 장강 이남의 직계군을 견재한다는 것입니다. 봉군은 동북에서 관내로 진격하고 바로 북경으로 진격합니다. 이렇게 남북에서 협공하여 조곤과 오패부를 공격하는데, 장작림은 이 방안에 완전 동의를 표시했습니다. 그러나 일은 서로 나누어 진행하고 각자의 뜻에 따라 행동하며 종속 관계는 맺지 않았습니다.


 두번째는 정치적 방안. 조곤과 오패부를 쳐부수고 난 뒤의 일로, 그 후에 국민회의를 소집하고 국가의 통일과 건설 문제를 해결하여야 한다는 것이 혁명 정부의 의견이었습니다. 하지만 장작림은 여기까지는 생각해본적이 없었음으로, 애매모호하게 말하고 이후에 나중에 다시 논의하자고 미루었습니다.


 대만에서 나온 쑨원 관련 저작물 중 국부전집國父全集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기를 쑨원이 장작림, 장학량에게 보낸 전문이 무려 11통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쑨원 자신이 친필로 정성들여서 쓴 것들입니다. 대본영 공영 용지로 쑨원의 해서체로 엄격하고 한 줄의 흐트러짐도 없이 문장이 격조하고 단아합니다. 


 집필 중인 쑨원


 다음은 1923년 11월 25일, 제 2차 직봉대전이 일어나기전 쑨원이 장작림에게 보낸 서한입니다.


 우정雨亭 총사령관 귀하

 작년부터 진형명이 오패부의 사주를 받고 후방에서 반란을 일으켜 나의 북벌 계획은 중도에서 좌절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봉군 역시 적을 소탕하지 못하여 국적을 참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됩니다. 실패 이후 저는 단지 몸만 상해로 빠져 나왔지만 아직도 여전히 적수공권으로 오패부와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난 1년간 여러 번에 걸쳐 자금 지원을 해 주어 남은 여력을 추스릴 수 있었습니다. 또 복건성으로 철군을 할 수 있었으며, 정의를 위해 일어선 운남성군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국가의 적(오패부)이 서남에서 세력을 떨치지만 사천성 민중이 오(패부)를 쫒고 있으며 계속해서 진압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광저우는 근거지가 되므로 공의 큰 힘에 의해 광저우 회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광저우를 회복하고 잔당을 없애려고 하는 마당에 사기가 일시적으로 침체되어 있고 재정이 곤란하여 날마다 동분서주하고 있지만 속히 잔당 소탕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도들은 아직도 동강의 험한 곳에 의지하고 있어 지금 골칫덩어리입니다. 오패부와 제섭원이 많은 물자를 동원하여 건너와 공격하여 10일 내에 석룡을 지키지 못하면 광저우가 또한 위기가 될 뻔했지만 이달 18일, 19일 양일간 우리는 배수의 진을 치고 병사들이 잘 싸워 주어 적의 주력 부대를 완전히 격파하였습니다.

 광저우는 위기에서 벗어났고 안정을 취하게 되어 이떄부터 광동 내부는 평정을 기약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북벌 계획도 역시 시행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고로 엽예호를 파견하오니 잘 지도 바랍니다. 아울러 상세한 군정을 알려드릴 것이니 의견 교환의 기회를 베풀어 주시길 바립니다.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쑨원 민국 12년 11월 25일



 서신을 통해 알 수 있는것은 첫째 쑨원이 장작림의 원조가 필요했다는것이고, 둘째 장작림이 쑨원을 도와줄 힘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장작림은 쑨원에게 자금과 무기 등을 원조했고 1차로 50만 원을 지원하고 이후 또 몇십만 원을 지원했습니다. 셋째 이들의 관계가 상당히 밀접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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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복을 입지 않았을때의 단기서. 상당히 모습이 그럴듯 합니다.


 한편, 장작림은 단기서의 안휘파(환계)와 손을 잡으려 했습니다. 군벌 시대에는 친구도 적도 없어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고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됩니다. 장작림이 데리고 있는 병사는 원세개 36진 중 27진이었는데, 북양 군벌의 정통파는 아니었지만 어찌되었건 북양 군벌에 소속되어 있긴 했습니다. 그래서 북양 군벌의 핵심인 단기서와는 이전부터 안면은 있었습니다. 그리고 둘은 아주 큰 공통점이 있는데, 친일파라는 것입니다.


 직환전쟁에서 직계에 환계가 대패할때, 강경 조치를 주장하는 직예파에 봉천파는 온건적인 처리를 주장했습니다. 장작림이 보호막을 쳐준 덕분에 안휘계가 쓰러졌지만 단기서는 그와는 상관없이 북경에서 멀쩡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1차 직봉대전이 터지기 전 단기서는 북경에서 천진으로 이동했고, 장작림은 그에게 많은 돈을 주었습니다. 둘은 어떻게 하면 오패부를 고꾸라 넘어뜨려 버릴까 항상 논의했습니다.



노영상(卢永祥). 군복이 잘 받는지 나름 꽤 멋있는 외모입니다.


 단기서의 환계에 속해있던 군벌 중에 절강 독군 노영상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직계 군벌에 포위된 상태라 적극적으로 쑨원, 장작림과의 합작을 원했고 공동으로 직계 군벌을 상대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1924년 9월 1일 자신의 아들 노소가(卢小嘉)를 봉천에 보내 장작림에게 기계 장비와 비행기를 빌려 줄것을 청했습니다. 장작림은 이를 다 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쑨원의 아들 손과(孫科) 역시 이 회담에 참가했고,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도 나서서 서로를 상대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명의 만남을 '삼공자회의' 라고 불렀는데 이렇게 서로 오고가며 동맹은 강화되었습니다. 


 장작림의 사진은 많이 남아있어 우리는 그의 외모를 잘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진으로 보는것과 실제로 본 인상은 많이 다르기 마련입니다. 손과는 장작림을 만난 인상을 기록했습니다.



 ……장작림의 키는 크지 않았다. 사람이 청수해 보였는데 조금도 마적 출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당시 그는 매일 차를 보내 나늘 데리고 그의 집무실로 가서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아침 식사는 언제나 좁쌀이나 수수죽을 끓인 간단한 것이었다. 먹고 나면 그의 비서장이 수북이 쌓인 공문서를 들고 왔다. 장작림은 비서장의 보고를 듣고 나서 바로 구두 지시를 내렸다. 비서가 한쪽에서 기록을 하였다. 매일 100건이 넘는 공문을 처리하는데 한 시간도 못되어 완벽하게 처리했다. 확실히 장작림은 총명했다. 그는 그가 머물러 있는 곳에 있는 후원의 아치형 문 위에 '신행愼行'─ 신중이 행동하자라는 두 글자를 새겨 놓았다.



 광동, 안휘, 봉천 3파는 서로 다른 생각을 했지만, 이들이 직계 군벌에 대항하는것은 일치합니다. 그래서 삼각동맹을 결성했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진형명등의 반란이 일어나며 사실상 봉천파 혼자 직계와 붙는 형국이 됩니다.





 삼각 연맹이 가동되던 당시에는, 직예파 수령 조곤과 그의 동생 조예등은 사태가 커지는것에 두려움을 느껴 오패부에게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봉천에 계속해서 사람을 보내 장작림을 달랬습니다. 하지만 오패부에 도발을 있는대로 당한 장작림이 이 좋은 기회를 놓칠리가 만무했습니다. 단기서가 다른 꿍꿍이를 위해 북경에서 몸을 피하고, 쑨원이 북벌 출병을 발표하자 자신감이 생긴 장작림은 방어 임무 교대를 한다는 구실로 봉군을 대규모로 산해관 안쪽으로 입관시켰습니다. 


 오패부는 이에 대응하여 군대를 움직여 응전 태세에 들어갔습니다. 오패부도 장작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상황이 어쩌건 한번 붙어볼 요량이었는데, 조곤과 조예만 이 사이에서 전전긍긍했습니다. 하지만 조곤이 워낙 이리저리 뛰며 움직여댄 통에, 장작림은 한벌 빼면서 요구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오패부는 오직 양호 순열사만 맡고 다른 지역의 부순열사를 겸하지 않으며, 직예군은 남쪽으로 철수하고, 양사이는 복직시킨다. 오패부가 들어줄리 없는 조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장작림은 그렇다면 '국가 원수에 반항하고 군인이 정치에 간여한다' 는 명분으로 토벌할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조곤은 이것이 최후 통첩이라는것을 알았지만 시간을 질질 끌며 대답을 미루었습니다. 오패부 역시, 직계를 지지하는 서방 국가들의 지원을 최대한 이끌어 내기 위해 동분서주했습니다. 이에 따라 영국 공사와 미국 공사들이 봉군의 움직임에 항의하는등, 견제가 들어가기 시작했지만 장작림은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장작림 역시 뒤에 일본이라는 뒷배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흐름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4월 3일 오패부는 자신의 49세 생일을 기념으로 전국 11개성의 직계 군벌 500여명을 모두 낙양으로 소집했습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는 봉군 토벌 작전을 논의했습니다. 사실상의 봉계에 대한 직계의 출정 선서식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회의 참석자들은 모두 봉천군과 싸우기를 원했고 오패부는 다시 한번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회의가 끝난 후 오패부는 여러 사단들을 전투 지역으로 배치하며 싸울 준비에 나섰습니다.


 장작림 역시 전투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4월 10일부터 봉군의 인마는 끝도 없이 관내로 밀고 들어왔습니다. 봉군은 3개 사단, 10여개 혼성 여단과 3개 기병 부대를 거느렸으며 그 숫자는 12만에 달했다고 합니다. 장작림은 싸우기에 앞서 적을 동요시키기 위해 연막을 쳐봤습니다.


 "직예와 봉천은 원래 한 가족이었다. 북양 군벌이 갈라지지만 않았으면 말이다."


 이런 말도 있고 하니 조곤 등은 양보를 해서라도 타협을 이끌어내기 위해, 직예군 장병들에게 봉군에 저항하지 말것 을 요구하고 병영과 공병창등을 봉계에 넘겨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혼자 몸 건사했다는 비판은 안 당할만한것이 스스로도 현재의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습니다. 하지만 오패부는 자신에 대한 프라이드가 높아 장작림이 마적 출신인것을 깔보고 정면으로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직계는 큰 싸움을 앞에 두고 의견이 분할되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러는 상황에서 장작림은 전보전을 펼치며 자신의 입관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 통일의 기약이 없으면 나라가 편안할 날이 없다. 눈앞에 놓인 장애를 제거하지 않으면 통일은 영원히 기약할 수 없다. 군대를 이끌고 와서 입관 주둔하여 무력통일을 기약하고자 한다. 백성에게 해를 끼치고 나라를 병들게 하는 자가 있다. 사사로이 당을 짓고 정치와 기강을 문란케 하고 국고를 도둑질하여 평화와 통일의 장애물이 되고 있다. 즉시 몰아내야 한다. 민중과 함께 내쳐야 한다. 통일의 진행에 있어서 공개회의를 하여 제도를 확정짓는것은 어떠한가. 전국의 지도자와 덕망 있는 분들이 공동으로 정치를 하도록 해야 한다. 작림은 함부로 하찮은 일에 끼어들지 않겠다.


 자신의 입관 이유를 변명하면서 오패부를 비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양보를 했던 조곤조차도, 이제 더 이상 장작림의 이런 태도를 참지 못했고 타협의 여지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전쟁을 해야 할텐데, 오패부에 대한 태도를 명확하게 표시해야 합니다. 조곤은 비서에게 자신의 구술을 받아적게 했습니다.


 "당신(오패부)이 바로 나이고……내가 바로 당신이다. 우리는 실로 친척보다도 가까웠다. 당신이 어찌할 것이냐, 함은 곧 내가 어찌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비서는 문장을 고쳐서 보내려고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조곤은 손을 내저었습니다.


 "아니, 그 내용 그대로 전보를 치게."


 오패부는 이제 조곤의 지지를 받게 되었고, 장작림과 결판을 내는데 아무런 장애도 없어졌습니다. 드디어 전초전이 끝나고 전쟁의 막이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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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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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차로아침을 | 작성시간 12.06.23 정지룡 아들이었으면 부자가 참 장단이 맞고 잘 어울렸을듯ㅋㅋㅋ그리고 밑바닥에서 올라오면서 자리를 차지한거라 실제 능력도 정성공보다는 훨씬 위기때문에 청나라하고 더 잘 싸웠을거고
  • 답댓글 작성자Roiche | 작성시간 12.06.23 그럴리가요. 아마 이사람이면 청나라에 낼름 붙었을겁니다 ㅋ
  • 작성자카이사르씨 | 작성시간 12.06.23 아 기다릴 것을 생각하면 현기증 돋네 ㄹㅈ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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