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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의 군벌]최강의 군벌, 만주의 패왕 장작림(13) ─ 1차 직봉대전 : 마무리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6.24|조회수582 목록 댓글 0


 1924년 9월 8일 시사주간 <타임>지 표지에 나온 오패부.
 이 당시 오패부에 대한 타임지의 묘사 biggest man china 중국 최강의 사나이



 직봉대전 중, 전세가 밀리는 감이 있자 장작림은 주력을 보전하기 위해 체면 불구하고 서둘러 퇴각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직예군은 추격했고, 이 행렬이 천진 주위에 이르자 제국주의 세력들은 직봉 쌍방 군대에 경고를 보냈습니다. 천진 주위 20여리는 군사 주둔을 할 수 없다는 조약이 있었고, 철도 이동 금지와 병력 이동을 요구한 것입니다. 하지만 마구 후퇴하는 중인 봉군은 그런 조약을 지키기가 어려웠습니다.


 5월 7일, 후퇴하는 봉군이 란주에 도달하자 제국주의 세력이며 동시에 오패부의 뒷배경인 영국의 공사 이스튼은 "영국 교민의 생명, 재산, 탄관 운영상 손실이 나면 안 되므로 만약 문제가 발생하면 모두 장작림에게 책임을 묻겠다." 고 성명을 발표합니다. 그러면서 열차 운행 보호를 위해 영국군을 파견 할수도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그렇게 영국이 장을 압박할때, 오패부는 보무도 당당하게 천진으로 들어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적 장군을 물리친 그 유명한 수재 장군을 보려고 몰려들었고, 한껏 기분이 좋은 오패부는 한참이나 장광성을 늫어놓기도 합니다. 이때, 과거 장작림의 상관이자 동삼성 총독을 지낸 조이손이 오패부에게 적당한 선에서 일을 마무리 짓자고 권하자, 오패부는 노 선배를 힐끗 보면서 비웃는 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러고보니 전에 장작림을 발탁한 것은 선배님이 아닙니까? 마적놈이 나라를 어지럽히니 선배님도 마땅히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오늘 또 그 놈을 대신해 말씀하시는군요."


 늙은 조이손은 할 말을 잃었습니다. 이때 오패부는 기고만장해서 다른 사람들 의견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오패부가 이렇게 한껏 기분을 낼때, 장작림은 퇴각하고 군을 정비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장작림은 장학량에게 군대를 돌리라고 명령했습니다. 당시 장학량은 곽송령의 부대와 함께 맹렬히 전투를 벌이며 적진 깊숙이 들어와 있었는데, 장작림의 명령을 듣자 일단 군대를 곽송령에게 맡기고 자신 먼저 후퇴했습니다. 


 

 곽송령


 제2부대를 이끌고 있던 곽송령은 어려운 지경에 처했습니다. 오직 이 부대만 적진 깊숙이 들어와 있는 처지라, 후방이 끊어질 염려가 있어 후퇴하기도 쉽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군대가 조심스레 영정하(永定河)를 지나고 있는데, 군대가 절반쯤 강을 지났을 무렵 직군 왕회경(王懷慶)의 제 3사단이 좌측에서 추격해 와 사태가 몹시 어려웠습니다. 곽송령은 침착하게 대응하는 한편, 다른 한쪽에서 군대를 지휘하며 위험을 무릎쓰고 강을 건너갔습니다. 밤새도록 전군이 영정하를 건너는것을 반복해서 마침내 위험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란주에서 어렵게 패잔병을 수습하던 장작림과 장학량은 곽송령의 부대가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다는 말을 듣자 안절부절했습니다. 그렇게 걱정할때 곽송령의 부대가 무사히 귀환하자 장장작림은 몹시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곽송령 부대는 정예군이라 다시 만들기가 힘들었습니다. 정예군을 지켰기에 보다 쉽게 재기를 노릴 수 있게 됬습니다.


 마침 동로군 제3부대를 이끌던 이경림도 후퇴를 왔었는데, 장작림은 즉시 명을 내려 곽송령 부대를 제1로군, 이경림 부대를 제2로군으로 만들어 좌우에서 서로를 지원하고 양쪽 부대가 연합하도록 했습니다. 산해관에서 진용을 재정비하고 적을 맞을 준비를 한것입니다. 이 당시 직군은 승리의 기세를 타고 맹렬하게 진격중이라 봉군의 형세는 어려웠습니다. 장작림은 이렇게 되자 신묘한 능력을 보인 곽송령에게 기대를 걸고, 장학량에게 전선을 재정비해서 제3, 제4, 제8 혼성 여단 지휘권을 모두 곽송령에게 주도록 했습니다.


 과연 곽송령은 뛰어난 능력을 보이며 온갖 계책을 발휘해 봉군을 지휘했고, 직군 장군 팽수신과 결사적인 전투를 벌여 마침내 직군의 진격을 잠시 저지시켰습니다. 이쯤되자 장작림은 강화협상이 필요함을 느끼고 장학량을 불러 말했습니다.


 "봉천 기독교 청년회에 있는 미국인 목사가 네 친구라고 들었다. 가서 협조를 좀 구해보거라."


 그래서 장학량은 자기 친구인 두 명의 미국인, 프레드와 양크를 찾아가 봉천에 주둔하고 있는 영국, 미국 영사를 만나 직군과의 정전협상을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영국 공사는 퉁명스럽게 거절합니다.


 "중국 내전에 우리가 간섭할 이유가 없소."


 영국은 이렇게 노골적으로 장작림을 방해했습니다. 하지만 프레드와 양크는 친구를 돌와주기 위해 개인 자격 신분으로 산해관 전선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직군의 팽수신을 찾아가 중재를 부탁했습니다. 쌍방은 6월 9일 직군 사령부가 있는 진황도(秦皇島)에서 만나 서로 교섭을 하고 6월 11일 다시 강화에 따른 구체적인 협의를 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논의가 벌어지는 중에도 산해관에서는 양군이 치열하게 교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6월 16일 오후 12시. 진황도 역에서 장학량은 미국인 목사, 영국 국적의 탄광 광무 국장 배석 하에 직군 대표 왕승빈과 회견하고 휴전을 결정했습니다. 다음 날 17일 진황도의 영국 함선 컬리호에서 다시 2차 강화회의를 했습니다. 봉군에서는 손열신, 장학량이 대표로 참석했고 직군에서는 왕슨빈, 팽수신이 대표로 참석했습니다. 영국 함선 위에서 양군 대표들은 강화조약에서 서명을 했습니다.


 1차 직봉대전은 이렇게 마무리 되었고, 봉군은 동원군 12만 명중에 사상자 총 3만 여 명, 포로가 4만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또한 군비 손실도 막대하여 3,000만원에 이르렀습니다. 당연히 장작림은 의기소침해졌고 마음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한편, 한달 전 무렵 오패부는 북경정부에 장작림의 엄벌을 요구했고, 5월 10일 서세창은 부득이 하게 동삼성 순열사를 비롯한 장작림이 겸직하고 있던 각종 직책을 모두 면직시켰습니다. 또 조사 후 처벌받는것을 기다리도록 하면서 몽고 경략사도 폐지했습니다. 이것은 장작림의 모든 군사대권을 박탈하려는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직계의 의견에 따라 흑룡강성 독군 오준승을 봉천 독군으로, 풍덕린을 흑룡강성 독군으로 임명했습니다. 장작림의 부하들을 높게 해줘서 장작림을 하야시키려는 움직임이었던 것입니다.


 

 오준승(吴俊升)


 요해소기(遼海小記)라는 책이 있습니다. 동북 국민혁명군 사단장을 지낸 전공래(錢公來 : 1886 ~ 1969년)라는 사람의 저서입니다. 그 책에서는 북경정부의 명령에 떨어졌을때, 오준승의 막료들에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서세창의 임명 소식을 들은 오준승의 막료들은 매우 흥분되었다. 오준승의 공관에 막료들과 그 떨거지들이 번번히 오고 가며 그의 승진을 기뻐했다.


 오준승의 막료들이 이리 우쭐해있고 김칫국을 마셨는데, 정작 오준승은 그 겉모습과는 달리 섬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는 이 소식을 기뻐하지 않았고 자신의 형편을 헤아렸습니다. 장작림의 실력은 여전히 건재했기에 함부로 까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비서장을 불러 자기가 말한것을 받아적게 했습니다.


 "서세창 대총통님. 저는 못나고 재주 없는 사람입니다. 오직 우정 상장군을 모시고 흑룡강성 지역에 머물러 왔는데, 혹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지 않을까 두려운 느낌만 듭니다. 기타 무슨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봉천 독군의 자리를 맡는것을 거절하겠다는 의사표시였습니다. 그러나 비서장은 전문의 뜻을 잘 파악하지 못했고, 문장이 마음에 안들어 고치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오준승의 참모장인 응선일(應善一)을 찾아가 상의했습니다. 오준승의 의도를 잘 파악하지 못한 응선일은 건성으로 한 번 전문을 보더니 깊이 생각하지 자기 마음대로 "오직 정부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라는 말을 적어넣었습니다. 당연한 소리지만 이는 오준승의 당초 의사와 완전히 틀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시보> 신문을 읽던 오준승은 자신이 적으라고 한 글이 신문에 나온것을 보았고, 그 내용을 보다 기겁했습니다. 그는 바로 비서장을 불러 욕을 퍼부었습니다.


 "이 개자식아! 누가 네 마음대로 덧붙이라고 했냐! 뭐, 오직 정부의 명령을 쫒아? 이렇게 되면 나와 상장군 사이를 네 놈이 망치게 되잖아, 이놈아!"


 그러면서 멱살을 잡고 발길질을 한참을 해댄끝에 쫒아내어 버렸습니다. 비서장도 억울 했는데, 그 당시 오준승 주위의 사람들이 대부분 오준승이 봉천 독군에 임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인물이 참모장 응선일이었습니다. 응선일은 사실 과거 직계의 수령 풍국장과 가까웠고, 직계와 사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오준승이 봉천 독군 지위에 오르면 자신도 지위가 높게 될테고, 조곤과 오패부에게도 좋게 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몰래 직계와 내통했습니다.


 한편, 성경시보에 난 기사는 장작림과 그 심복들 역시 보았습니다. 그리고 조사를 해보니 응선일이 직계와 연결되어 있는것도 알아내었고, 격분해서 그를 살해하기로 했습니다. 즉시 일이 행해져 응선일은 길을 걷다 괴한에게 세발의 총격을 받고 현장에서 즉사합니다. 살해를 저지른 괴한은 고금산(高金山)이라는 인물로, 장작림을 따라 다닌지 오래되었고 충성심이 높았습니다.


 

 왕영강(王永江)


 봉천 성장 왕영강은 장작림의 측근으로 당연히 모든 계획을 알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는 혹시 괜히 시끄럽게 일이 확대될까봐, 다 알면서도 짐짓 오준승에게 전화를 걸어 따졌습니다.


 "응 참모장은 누가 살해했습니까? 성경시보에 나온 기사는 또 뭐고? 범인은 내가 꼭 잡도록 하겠소!"


 오준승도 재치를 부려 답변했습니다.


 "신문에 난 기사의 끝 문장은 응선일이 덧칠한 것입니다. 내가 이미 비서장을 두들겨 패서 그 놈이 도망을 간 상태지요. 응선일이야, 못된 인간이라 벌 받은 겁니다."


 오준승은 응선일을 누가 죽였건, 자기의 마음은 평상시와 다른게 없고 좋은게 좋다고 알력 다툼 따위는 벌이지 않겠다고 하면서 슬그머니 말했습니다.


 "응선일 이 건달 같은 놈이 기생집이나 들락거리는 짓거리를 해왔으니, 내가 보기엔 본바닥 건달 놈들한테 맞아 죽은것 같습니다. 난 이런 쓸데없는 일엔 관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사건 이렇게 흐지브지 넘어가버리고 맙니다.


 오준승은 거칠지만 세밀한 면이 있었고, 이 일이 보통이 아님을 알고 집안 사람들에게 엄명을 내려 외출을 삼가고 손님을 사절해 일이 시끄럽게 커지는것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응선일 피살에 대해 여러 헛소문이 난무하자, 직접 장작림을 만나 오해를 풀고 의심을 거두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장작림은 산해관에 머물고 있었는데, 오준승은 봉천성의 치안을 왕영강에게 맡기고 자신은 자동차를 타고 측근 한두명만 거느리고 산해관을 향해 떠났습니다. 


 자동차가 도착했을 무렵, 장작림은 마침 부대의 문 앞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준승의 자동차가 오는것을 보자, 두 번 쳐다보지도 않고 방으로 들어가버립니다. 본래 관례대로라면 마땅히 정중히 맞이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오준승은 그 모습을 보고 헐레벌떡 방 안으로 들어와 장작림을 뵈었습니다. 장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어찌 이제야 오시는지! 난 당신을 기다렸소. 발령 났으니 어서 임무 교대를 해야지? 국가 명령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지요. 빨리 봉천으로 돌아가야 민심이 안정될 것이오. 우린 오랜 친구였소. 당신히 하는 일은 다른 사람이 하는 것보다 항상 뛰어났지. 나와 임무 교대가 끝나면 나는 이제 어디서 무얼 해야 할지 말해 보시오. 내가 어디서 살아야 할지 말이오."


 오준승은 황송해하며 말했습니다.


 "상장군, 우리 더 이상 이런 문제는 말하지 맙시다. 내가 있는 흑룡강성은 경작지가 얼마이며, 또 황무지가 얼마나 있는지 아십니까? 몇 세대의 생을 보내기에 충분합니다. 돈은 일본 정금은행(正金銀行), 조선은행(朝鮮銀行), 동삼성 관허 금융기관에 많이 보관되어 있지만, 나의 재산은 상장군에 비해서는 적습니다. 북경정부가 시끄럽게 수작을 부리면야 우리가 곤란하기는 하겠지만, 북경정부는 현재 광동성 북벌군을 상대하고 있어 좋은 상황이 아닙니다. 오늘은 이 사람이 해임되고 내일은 저 사람이 해임된다면 성공을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요?"


 "저에게 흑룡강성의 비적들을 토벌하고, 말을 방목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고, 황무지를 개간하고 파종할 기회를 주십시오. 저를 봉천에 옮겨 놓으면 외국과의 교섭이라든지 각 성을 대표한 것이라든지, 문치를 무치와 똑같이 한다는 것들은 제가 대응하기 벅차 하루도 배겨 내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이번에 온 것은, 그러니까 모두가 편안하자는 것입니다. 상장군이 대련에 가시면 저 역시 대련에 가고, 어디든지 따라갈 것입니다."


 장작림은 여기까지 듣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의심이 풀려 만면에 웃음을 짓고 상냥하게 물었습니다.


 "형님, 형님이 보기에 내가 어찌하면 좋을 것 같습니까?"


 장작림 입에서 형님이라는 소리까지 나오는것을 보자 오준승은 오해가 다 풀린것을 알고 기분 좋게 말했습니다.


 "대총통이나 조씨 형제들, 오생원(오패부) 등 어린아이들 말은 듣지 마세요. 우리는 우리니까요. 나보고 다시 말하라고 하면 봉천에 가서 다시 말하겠습니다. 어떤 명령이든지 내려만 주십시오."


 장작림은 크게 마음을 놓게 되었고, 오준승은 사태를 잘 파악해서 최악의 상황이 일어나는것은 막았습니다. 그리고 덤으로 자신의 충심을 장작림에게 확실하게 표시했습니다. 이로 인해 알 수 있는것은, 직봉전쟁에서 패배한 후에도 장작림의 동북왕 지위는 여전히 흔들리지 않고 굳건했다는 것입니다.


 앞서 영국이 여러차례 오패부를 직, 간접적으로 도와주는것을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장작림의 뒷배는 일본은 어찌했는가? 봉군이 패하자 당시 일본 외무상 우치다는 동삼성에 대하여 엄격히 중립을 지킨다고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거짓이었고, 사실 일본은 소위 장작림 후원회까지 만들어 전쟁 당시 봉군을 지원했습니다. 장작림이 패망하여 미국, 영국 세력이 만주에까지 미치는것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장작림의 변함없는 모습과 일본의 이런 노력이 힘을 합쳐, 동삼성 의회는 북경 정부의 말을 무시하고 자치를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자치라는것은 곧 장작림이 계속 집권한다는 말입니다. 



 1차 직봉 전쟁에서 봉군이 패배한 원인은, 봉군은 직군에 비해 군사 소질면에서 열등한것이 원인이었습니다. 관리가 느슨하고 훈련이 부족하고 군기가 엉망이었습니다. 숫자는 많았으나 진정한 부대는 곽송령 여단, 장학량 여단, 이경림 여단 뿐이었고 나머지는 볼것도 없었습니다. 또한 봉군이 일본 세력을 뒤에 엎고 있는데 당시 중국 내에서 일본의 이미지가 안 좋았기에, 오패부가 이 점을 집요하게 전보전으로 건드린것도 인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원인이었습니다.


 또 영미는 오패부에 여러 지원을 해주었지만, 일본은 워싱턴회의가 막 끝난 시점이라 회의에서 영미로부터 고립되어 감히 대놓고 봉군을 지지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겹쳐 봉군이 패배하게 된 것입니다.



 참고로, 군벌의 팽창과 몰락을 간단하게 알고 싶다면, 이 점을 주목하면 됩니다.


 군벌이 만일 통일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그가 힘이 아주 강대해졌을 때입니다. 그러나 군벌이 높은 목소리로 자치를 노래한다면, 그것은 그 자가 힘을 잃었을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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