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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의 군벌]최강의 군벌, 만주의 패왕 장작림(14) ─ 혁신, 개혁, 혁신, 개혁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6.25|조회수1,250 목록 댓글 7

 장학량의 첫번째 부인 우봉지(于凤至)의 모습. 1889년 생이고, 장작림에 뜻으로 장학량과 결혼했습니다. 봉천여자사범학교에서 공부했고, 서안사변 후 영국에서 급히 국내로 돌아와 다방면에서 구조 활동을 벌였습니다. 1940년에 유방암 질환을 받았지만 계속 살았고, 1964년 3월 친필로 서신을 보내 장학량과 이혼했습니다.



 두번째 부인 조일적(赵一荻)의 모습. 그녀가 장학량과 만난것은 1928년, 16살 때였지만, 실제 결혼은 1964년에야 했습니다. 장학량과 72년을 살았고 하와이에서 죽었습니다. 슬하에 여림이라는 아들이 있습니다.



 자치를 선언하며 중앙 정부와 완전히 척을 진 장작림 관할 아래의 동삼성은 1922년 7월 16일 정식으로 동상섬 보안사령부를 성립시켜 따로 나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장작림이 총사령관, 손열신과 오준승이 부총사령관, 양우정이 총참의가 되었습니다. 장작림은 서예가에게 특별히 부탁해 자신이 지니고 다니는 부채에 "무망오치" 라는 글자를 새겼는데, 오패부로부터 받은 치욕을 잊지 말자는 뜻읍니다. 각오가 이 정도니, 그가 복수를 위해 단단히 준비하리라는것은 분명했습니다.


 이때, 향후 봉군이 나아갈 방안과 관련하여 두 개의 파가 나뉩니다. 하나는 구파, 하나는 신파입니다.



 구파는 대부분 장작림이 마적 시절, 혹은 아직 사단장도 못될때부터 따라온 동지들입니다. 사실상 부하라기보다는 형님 동생 하는 사이로 게중에는 장작림이 오히려 형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준승, 장경혜, 장작상, 탕옥린, 손열신 등 오랫동안 종횡무진 하며 온갖 고난을 같이 겪어왔던 인물들입니다. 이들의 충성심이야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이들 대부분은 군사 과학을 이해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신파는 대부분 장작림이 어느정도 기반이 잡힌 무렵으로 모인 존재들입니다. 나이도 구파에 비해선 어린 편입니다. 그리고 양우정, 장학량, 곽송령, 강등선, 한린춘 등으로 이들 중에는 심지어 곽송령 처럼 무슨 음모를 꾸미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군사적인 부분에 대한 능력인 확실히 구파보단 뛰어났습니다. 이를테면 양우정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8기 졸업생이고, 곽송령은 북경 육군대학에 수석으로 입학했고 북경 강무학당의 초빙 교관 출신입니다. 장학량은 또 그런 곽송령의 제자구요. 


 이들의 능력을 알 수 있는 부분은 장학량과 곽송령의 3, 8여단입니다. 군사 교육에 전력투구했고 다른 군벌들과 달리 기강이 엄정한 이 신파의 3, 8여단은 가히 봉군 최정예부대였습니다. 1922년 제1차 직봉대전이 발발할 당시, 봉군 구파와 3,8여단이 동시에 작전 수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결과는 구파의 군대는 그야말로 궤멸당했는데, 반대로 3여단과 8여단은 비록 전투에서는 패배했어도 결코 무너지지 않아 부대를 보존 할 수 있었습니다. 전투가 조금만 불리해도 줄행랑을 치는 병사들이 넘쳐나는데, 패배에도 무너지지 않는 군대가 얼마나 강한 부대인지는 자명한 일입니다.


 또, 산해관에서의 전투도 있었습니다. 직군이 산해관까지 봉군을 추격하여 결정적인 찬스를 잡을때, 3여단과 8여단은 직군에게 완강한 저항을 했습니다. 비록 단장이 전사하고 전체 부대원의 피해도 많았으나 적의 공세를 저지하는데 성공했고, 조곤과 오패부를 놀라게 했습니다. 이것이 조곤과 오패부가 전쟁을 망설이고 정전협상으로 나가는데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당시 봉군의 장군이었던 하주국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 이 두 사건은 장작림의 특별한 주목을 갖게 했을 뿐만 아니라, 장작림으로 하여금 신파가 더 믿을 만 하다고 여기게 만들었다. 그리고 구파로 하여금 비교가 되게 하여 부득불 군사상 양보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게 하였다. 그래서 이후로 정군 작업의 권한은 신파의 수중으로 넘어가 점점 구파를 몰아내게 되었고, 구파 군인 역시 변하게 하였다.


 장작림의 마음이 신파로 향하면서 젊고 새로운 기운이 봉군을 덮쳤고, 많은 비리가 있는 마적 출신과 군 출신의 보좌역들은 제거당하거나, 아니면 살아남기 위해 혁신을 하게 되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휘둘리지 않고 중심을 잡은 장작림의 지도력 역시 상당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우선 장작림은 전쟁 중 싸움에서 물러나거나 작전 수행 중 약탈을 벌인 사람들을 모두 총살형에 처해 기강을 세웠습니다. 지휘력이 부족하거나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철직 처분을 내렸습니다. 또한 새로운 신파의 인물들을 등용하여 기강을 세움과 동시에, 구파의 원로들은 실권은 없지만 생활은 풍족한 명예직을 주어 불만을 최소한으로 했습니다. 


 장작림이 이번 싸움에서 느낀것이 있었는데, 병사의 숫자가 아무리 많아 봐야 정예군의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장작림의 부대는 12만이 되었지만 게중에 진정으로 전투가 가능했던것은 3,8여단을 비롯한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군대는 정병이 필요하지 숫자가 많은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정신에 따라 대규모 숙군 작업이 벌어졌습니다. 


 늙고 병들고 부상을 입은 사병들은 모두 노잣돈을 쥐어주고 고향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노약자인데 전공이 있는 사람들은 보급 부대나 후방 병참 기지로 보내 경험을 살리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대규모로 작업을 벌이자 봉천군은 6만 9천여명으로 상당한 감소폭을 보였지만 전투력은 이전보다 훨씬 나아졌습니다. 


 또한 북경, 천진, 상해, 남경, 무한 등지에서 신식 군인들을 널리 모집했습니다. 항공, 항해, 포병술, 군수, 군의, 공병등에 재주가 있는 사람들은 파격적인 대우로 예의를 해주었고, 문서를 다루는 행정 능력도 얕보지 않아 일본 육군사관학교, 북양 무비학교, 보정 군관학교, 북경 육군대학의 엘리트 졸업생들을 적극 초빙했습니다. 게중에서도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북양 무비학교 졸업생들은 특별대우를 받았습니다.


 또한 부대에서 군관을 선발하면서 과학적인 방법을 적용하기 위해 종례의 추천제를 폐지했습니다. 각 사단, 각 여단의 참모장과 부연대장은 군관학교 출신들로 충원시켰습니다. 대체적으로 북양 군벌들은 처음부터 군인이었던 출신을 좋아하고 군관학교 출신들은 책상물림 정도로 여겼으나, 봉군에서만큼은 반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동삼성 육군 강무당


  또한 동북 강무당을 건립했습니다. 그 전에도 조이손, 서세창등이 만든것이 있긴 했지만 방식이 구식이라 별 효과는 없었습니다. 장작림은 1919년 3월 동삼성 육군 강무당을 설립했는데, 1차 직봉전쟁 후부터 강무당의 훈련에 적극적이었습니다. 마침 이때는 강무당 4기가 교육중이었는데, 대개혁에 따라 교육의 질과 학생의 수준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곽송령이 건의했습니다.


 "사회에서 최소한 중학교를 졸업한 사람에게 시험 응시 자격을 주면, 질이 크게 높아질 것입니다."


 곽송령의 말이라면 무조건 좋다라고 하는 장학량이 이를 받아들였고, 과연 효과가 대단했습니다.


 1928년 동북 강무당 감독 시절의 장학량


 이 강무당의 총 책임자는 장학량이었습니다. 직봉전쟁 후 장작림은 아들에 대한 신임을 표시했고, 장학량은 곽송령과 함꼐 3,8여단을 재정비해서 26여단으로 하고 더더욱 강화했습니다. 26여단은 일종의 모범부대로서 다른 부대에 본을 보이는 역할이었습니다. 정확히 실무로 말하자면 장학량은 손을 놓고 있고 곽송령이 하나부터 열끝까지 다하고, 그러면 장학량은 곽송령의 말에 무조건 승낙하는 식이었습니다.



 봉천 병기창
 

 대규모 전쟁을 수행하려면 물자가 필요하고, 그렇다면 병기창을 확대 건설해야 합니다. 직봉대전 발발 적인 1919년부터 장작림은 직접 부지를 물색해서 병기창을 짓었고, 직봉대전 후에 크게 발전 확대되었습니다. 강무당에서 인적 자원을 기르는 일을 장학량이 맡았다면, 병기창에서 물적 자원을 키우는 일은 양우정의 소관이었습니다. 양우정은 포창, 화구창, 주조창, 제산창, 목공소 등을 건립하여 병기창을 크게 키웠고, 모두 8개 공장과 4개 사무소를 두었으며 통계위원회, 병기학교, 병기의원 등 17개 조직을 두었습니다. 그 인원은 1,000여명 까지 불어났고 공원은 2만명이나 되었으며 최고로 많을때는 무려 2만 5천여명에 달할 정도로 거대 조직이었습니다.


 

 동삼성 병기창 독판 시절의 양우정


 이 정도로 거대한 병기창이 가동되려면 막대한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장작림은 병기창에 대해서만큼은 조금도 돈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인재가 부족하자 무려 직접 오스트리아, 러시아, 스웨덴, 독일, 일본인 기술자들을 막대한 돈을 주고 데려왔고 중용했습니다. 그들은 각종 기기의 장착과 부품의 설계, 제조에 참가했으며 기술자들을 교육해 그 노하우를 전파했습니다.


이때 장작림이 얼마나 마음을 크게 먹었는지 알 수 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한번은 화공창의 외국인 책임자와 탄약창의 외국인 책임자를 자기 사무실로 불렀습니다. 그들은 무슨 일로 장이 보자고 했는지 알 수가 없었는데, 혹시 잘못을 해서 꾸짖을까봐 걱정했지만 장작림은 오히려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 그래! 그대들이 일을 잘 한다고 들었네. 앞으로도 열심히 하라고!"


 그러면서 그 자리에서 바로 각각 5만원 씩을 건내주는 것입니다. 이는 엄청난 돈이었습니다. 


 단순히 병기창만 키우는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기술자를 키워 내부적 실력을 키우는것도 중요했는데, 이를 위해 장작림은 병기학교도 설립했고 중등고, 고등부, 전문부 등 3개 부문으로 나누었습니다.고등부를 졸업하면 공장 견습생이 되었고, 전문부를 졸업하면 대학 졸업과 동등하게 대하여 학생들의 의욕을 크게 고취시켰습니다. 이후에는 비싼 돈을 주어야하는 외국인 기술자들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었고, 중국인 기술 인재가 늘어났습니다. 


 이러한 성과로, 본래 1920년 4월 무렵에는 65식, 79식 소총탄이 일일 10만발 정도를 생산했지만, 나중에 가면 연간 1억발까지 생산력을 증가시키게 됩니다. 총알 뿐만 아니라 대포는 연간 150문, 포탄은 20여만 발, 소총은 6만여 자루, 중기관총은 1,000정을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동북 항공 사령 시절의 장학량. 어째서인지 이 사진이 인터넷에 안보여서 직접 찍었는데 화질이 영 그렇네요.


 장작림이 생각하기에, 현대 전쟁에서 육군은 공군의 지원이 없으면 승리가 힘들어 보였습니다. 더욱이 제 1차 세계대전 중 공군이 저공비행을 하여 기총 소사와 폭탄 투하로 적을 섬멸하는것은 장작림에게 큰 인상을 주었습니다. 중국이 공군을 창설한 것은 1912년 전후인데, 영국에서 비행기 1편대를 구입한 것입니다. 이 비행기들은 1917년 장훈의 복벽군과의 전투에서 사용되었습니다.


 1920년에 직환 전쟁이 끝날때, 장작림은 패전한 단기서의 비행 편대를 손에 넣었습니다. 여객수송기 4대, 정찰 훈련기 4대였습니다. 아직까진 어린애 장난 수준에 불과합니다. 장작림은 1921년 동삼성 항공처 설립 명령을 내려 밑그림을 잡고, 1922년 제1차 직봉대전에서 직군의 비행기에 고생하자 동북 공군을 크게 키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에 앞장선것은 장학량입니다. 장학량은 동삼성 항공처 총판에 임명되었는데, 직접 비행기술을 익혔고 소질도 있었으며 무엇보다 본인이 비행을 좋아했습니다. 장학량은 모두에게 인기가 좋았지만 항공대원들도 장학량을 좋아했습니다. 우선 장학량은 기구 개혁을 실시해 총무처, 기계처 등을 두어 해당 업무를 맡게 하는 한편, 항공 학교를 세우고 본인이 교장을 겸직했습니다. 그러면서 수리창, 기계설비, 항굥요원, 지상 근무요원, 기술자 등을 갖추어 규모를 키웠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항공요원입니다. 비행기를 몰려면 전문 기술이 필요했습니다. 1차적으로 자체적으로 키운 요원들을 써보았는데, 전부 불합격이었습니다. 2차적으로 프랑스에 12명을 유학시켰지만 역시 불만스러웠습니다. 장학량은 3차 항공 유학생은 매우 엄격하게 심사해서 선발했습니다. 1,000여명이 넘는 교육생 중 장학량 본인이 직접 소질이 뛰어난 28명을 선발했는데, 대부분 20세 전후였고 17세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프랑스에 보내져서 파리의 모란나 항공학교로 가거나, 프랑스 서남쪽의 까오롱트 항공학교로 가서 아주 우수한 교육과 최신식 비행기를 몰면서 초급 조종사 자격증을 얻었습니다.


 프랑스 공군 35사단에서 실제 전투 훈련에 참가하며 폭격, 폭탄투하, 저격술, 기총소사, 공중전투, 무선통신등에 대한 기량을 키운 학생들은 1927년 귀환합니다. 장학량은 즉시 그들을 준위에서 중위로 진급시켰고, 계급과 급여, 복지 등 각 방면에서 특별대우를 했습니다.


 두번째 문제는 비행기를 들여오는것입니다. 장작림은 1921년 단기서로부터 8대, 1926년 오패부로부터 2대, 1923년 풍옥상으로부터 3대, 1928년 산동에서 10대 등 여기저기서 비행기를 끌어모았습니다. 또한 장학량이 직접 나서 서구의 나라들과 거래하여 비행기를 도입했습니다. 1925년에는 대당 10만원 가격으로 10대를 구매했고 다음해에도 26대를 구매했습니다. 일본에 120만원을 주고 4대를 구매했고 1930년 체코로부터 40여대를 구매했습니다. 또한 1929년 미국에서 1대를 받았고 프랑스로부터 1대를 받았습니다. 동북 공군의 전성기 시절의 비행기 댓수는 250내지 300대로 당시 중국에선 가장 많았습니다.


 

 이 시대 군벌 중에서도 최악의 인물인 장종창(张宗昌). 러시아 백군 출신들을 휘하에 두기도 했는데, 키는 크지만 마음 쓰는것은 악랄했습니다. 1922년 11월 장작림을 직접 찾아가 그 휘하에 들게 됩니다. 아주 무식했는데 성격이나 말하는게 시원한 맛은 있었다지만 그것도 윗사람들 대하거나 체면 차릴 자리에서나 그런 편이고……


 1차 직봉 전쟁 동안 직계군의 해군은 100여발 이상의 포를 쏘아 봉군을 위협하면서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특히 봉군이 퇴각할때 피해가 극심했는데, 심지어 장작림이 탄 차도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장작림은 해군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서 동북 해군 건립을 결심했습니다.


 심홍렬(沈鴻烈)이라는 인물이 바로 동북 해군의 선구자였습니다. 그는 동맹회 회원이었는데, 무창 봉기가 일어났을때는 반군을 진압했습니다. 일본 유학파였는데 당시 중국내 해군은 모두 민계, 즉 복건성계 였고 복건계가 아닌 유학파 출신인 그는 함대에서 근무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참모 등의 행정요원으로만 길이 뚫려있어 출로가 보이질 않았는데, 장작림이 해군력을 키우려고 하자 흑룡강성 방위사령부 참모로 와서 장작림에게 해군력 강화에 대한 기획안을 내놓고, 큰 칭찬을 받게 됩니다.


  심홍렬


 장작림으로부터 신임을 받자 일가를 모두 끌어 동북에 자리를 잡은 그는 풍부핸 해군 경력과 지식을 보여주어 장작림의 신임을 더 돈독하게 했습니다. 중령급 참모이던 그는 장작림의 편애로 순식간에 소장급으로 진급했는데, 이전의 해군 군관 중에는 이런 일이 전혀 없었습니다.


 심홍렬은 지위를 이용해 대대적으로 인재를 초빙했습니다. 또한 자신과 같은 처지이던 동문들도 대거 동북으로 불러들였고, 심홍렬이 저리 대접받는것을 본 비 복건계 인재들은 너나할것 없이 동북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다른 일에서 그랬듯이, 우선 학교를 설립해 항해, 총포, 어뢰, 기관, 기상, 해양, 해전술, 포전술, 수학, 물리, 화학 등을 폭넒게 학생들에게 가르쳤고, 학생들을 모집하고 또 선발해서 그 규모가 점점 커지게 됩니다. 중국 내의 해군에 동북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원래부터 정착되어 있던 복건계 해군과 함께 남북 대치 국면이 형성되었습니다.


 사람은 그렇다치고, 이제는 함대가 필요했습니다. 동북에는 자기의 군함이 없었고, 외국에서 구매해오는것도 어려웠습니다. 별 수 없이 2,500톤 급 상선 1척을 구입하여 진해(鎭海)호 라는 이름을 붙이고 개조를 하고, 다시 일본에서 2,500톤급 고물 상선 1척을 구매해 깨끗하게 수리해서는 위해(威海) 호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나중에 길이 뚫려 러시아로부터 1,000톤급 쇄빙선을 구입해서 정해(定海) 호라는 이름을 붙이고, 300톤급 일본의 구식 어뢰정을 사들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규모를 차근차근 키우면서, 심홍렬은 중장으로 승진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진정한 군함은 1척도 없어 동북 해군의 실력은 미약했습니다.


 그런데 발해 해군이 있었습니다. 동북 해군 창설 후 눈 앞에 있는 적은 발해 해군이었는데, 3척의 순양함에 2척의 포함, 1척의 어뢰정이 있어 상당히 강력한 함대였고, 동북 해군은 상대도 되지 않았습니다. 이건 2차 직봉대전 후의 일이지만, 이때 직계가 패배하자 발해 함대는 곤라에 빠졌습니다. 군인들의 급여를 주지 못했는데 3개월이 넘게 밀린 것입니다. 당연히 기강은 엉망이 되고 선체 바닥에는 조개껍질이 한 자나 싸여 배의 속도로 느려졌고, 사기도 떨어지고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발해 함대의 해기호 군함이 여순항에 도크하여 수리를 하는데, 동북 해군의 진해호도 수리를 하러 왔습니다. 엉망인 해기호의 분위기에 비하여 동북 해군은 생기가 돌았는데, 이를 본 해기호 군함의 사병들이 모두 동북 해군에 귀순을 해버린 것입니다. 장작림은 즉시 밀린 급여를 마련해서 주었습니다. 해기호 군함의 사병들은 산동사람들이라 복건계로부터 괄시를 당한것도 원인이었습니다.


 이 해기호가 당시 중국 최대의 순양함이었습니다. 저 멀리 런던까지 가 영국 황제 즉위식에도 참석한 바가 있습니다. 또한 화교들의 요청에 미국도 다녀왔으며, 항해 속도나 장비나 무기들은 세계를 기준으로 봐도 최상위권이라 동북 해군은 느닷없은 횡재를 한 것입니다.


 아직 웅크리고 있는 나머지 발해 함대에 대하여 심홍렬은 장종창을 해군 총사령관으로 추대하고, 자기가 스스로 부사령관이 되는 계책을 발휘해서 끌어들이려고 했습니다. 장종창은 호위병을 거느리고 발해 함대의 조화후에 승선하고는 순식간에 함포와 화약고를 점령했으며, 조화호 선원들을 모여놓고 갑자기 일장연설을 했습니다. 그 행동이 워낙 신속한데다, 장종창의 연설이 워낙 직설적이라 시원한 맛이 있었습니다.


 "나는 총사령관이다. 너희들은 내 말에 복종하겠는가?"


 조화호 선원들은 얼이 빠져 영문도 모르고 대답했습니다.


 "복종합니다."


 "복종한다면 너희들은 곧 해안에 집결하여 바로 있을 개편안에 대하여 들을 것을 명령한다."


 이렇게 눈 깜짝하는 사이에 어처구니 없이 발해 함대가 모조리 동북 해군에 편입된 것입니다. 


 1927년 6월 장작림은 동북 해군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스스로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심홍렬을 해군 상장 부총사령관 겸 총사령관대행에 임명했습니다. 동북 해군 전성 시기의 대소 함정은 모두 21척이었고, 총 톤수는 3.22만 톤이었습니다. 함대 해병은 약 3,300명이었는데, 당시 중국 전체 해군이 4.2만 톤에 5,400여명이었느니 절대 다수가 동북 해군이었던 셈입니다. 장작림이 심홍렬을 믿고 전권을 준 성과였습니다.




 이렇게 장작림은 패배후에 기민하게 움직여 개혁을 해 내었습니다. 복수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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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카이사르씨 | 작성시간 12.06.26 당시 동북삼성의 경제 수준은 중국 다른 지역들에 비해 어느 정도 였는지요?
  • 답댓글 작성자신불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6.26 공산당 시절이야 저곳이 공업 중심이지만 저 당시는 일제가 들어서기 전이라 아직 그 정도는 아니고 장작림이 많이 키우면서 기반을 다지는 시기입니다 저 당시 가장 부유 한곳은 상해 등으로 장제스가 북벌 할때도 상하 자본가 들의 원조가 컸습니다
  • 작성자2Pac | 작성시간 12.06.27 경제적 기반이 생각보다 대단했나보네요. 중국이 헤메던 시기, 그것도 동북 3성 정도에서 모은 자금이 저렇게나.. 혹 일본계가 많이 돕진 않았는지요 ^^
  • 답댓글 작성자신불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6.27 자세한 정화무 모르나 일제의 지원이 있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겠죠
  • 작성자고기 | 작성시간 12.06.27 아니 근데... 비행기가 대당 10만원이라는데 5만원씩 그냥 던져줬다고요? 헐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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