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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의 군벌]최강의 군벌, 만주의 패왕 장작림(18)─제2차 직봉대전 : 역습의 풍옥상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7.01|조회수435 목록 댓글 2



 풍옥상은 그동안 숨을 죽이며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고, 장작림 - 쑨원과 연대를 취하며 틈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한번 크게 떨칠 시간이 왔습니다. 풍옥상은 외부적으로는 광동정부, 봉천파와 손을 잡았지만 사려가 깊게도 내부에서도 조력자를 끌어모았습니다.



 호경익(胡景翼)과 손악(孙岳). 호경익의 밑에서 임시정부의 신익희 선생이 제2군 중장으로 활약했고, 선생의 활동을 호경익이 지원해주기도 합니다.


 손악은 하북 1878년 생이며, 보정 무비학당을 졸업했습니다. 1911년 제19사단장이 되었고 1912년에 육군 중장이 되었습니다. 1913년  원세개 토벌전에 참가했고 1017년에 직예 군관교육단 단장이 되었으며, 1920년에 육군 제15혼성 여단장이 되었습니다. 손악과 풍옥상은 사적인 만남이 빈번한데다 혁명에 대한 뜻도 맞아떨어져서 친했습니다. 손악 역시 동맹회 회원이었던 것입니다. 손악 역시 오패부에 대해 반감이 큰 처지라 둘은 금세 뜻을 모았습니다. 1924년 9월, 풍옥상과 손악은 묘지 근처에 있는 오두막에 숨어서 국가 대사를 논의하면서 오패부를 욕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둘의 합작이 체결되었습니다. 


 호경익은 섬서성 사람이고 섬서성 제1사단장입니다. 이 사람도 동맹회 회원입니다. 호경익도 풍옥상과 친했기에 손악 - 풍옥상 - 호경익의 삼각 동맹이 이루어졌습니다.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풍옥상은 조곤에게 건의했습니다.


 "13사단이 전방으로 출동한 일 때문에 북경 방위가 비지 않았습니까? 제일 좋은것은 손악의 15혼성 여단으로 하여금 수도 방위 임무를 맡기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듯 하군."


 조곤은 풍의 제안에 따라 손악을 북경으로 이동케 하여 북경 경비 부사령관에 임명했습니다. 손악은 풍옥상에게 은근히 말했습니다.


 "특별히 저를 북경으로 오게 한 것은, 성문을 열어 두라는 것이 아닙니까?"


 풍옥상은 1924년 9월 17일 총사령관에 임명되어서, 자기 휘하 여단을 순차적으로 열하로 출발시켰습니다. 각 부대 출동은 행군 속도가 하루에 20~30여리 정도였고, 동작도 느슨하면서 중간에 쉬기도 많이 쉬는등 어지간히 늦장을 부렸습니다. 본래 3일 걸릴 거리를 일주일이나 걸려서 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는 길마다 갑자기 국도를 보수하고 정비를 독려하고는, 북경을 향한 행군 연습을 시켰습니다.


 마침 호경익도 지원군인 제2로 사령관이 되었는데, 오패부가 출동 명령을 내려도 풍옥상처럼 부대 출동을 지연시키면서 풍옥상의 동태르 주시했습니다. 풍옥상은 넌지시 단기서에게도 합작 제의를 해서 동의를 받아내었는데, 오패부는 풍옥상을 믿진 않았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판을 크게 키우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의심은 있어서, 부총사령 왕승빈을 풍옥상에게 보내 감시하게 합니다. 그런데 풍옥상은 왕승빈에게 자기 계획을 털어놓고 협조를 구했습니다. 왕승빈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이 비밀을 오패부에게 보고하진 않겠네. 다만 중립을 지킬것이야."


 이렇게 왕승빈까지 사실상의 자기편으로 만들어버린 풍옥상은 열하 근처로 오자 마침 그곳을 공격하던 봉군의 지휘관 이경림에게 연락해서 비밀 정전 협상을 한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경림이 장작림에게 보고하자 장은 풍군을 공겨하지 말 것을 지시했고, 곧 봉군의 대부분 주력은 산해관 방면으로 이동합니다. 산해관 방면에서 봉군의 공세가 강화되자 사태가 위급함을 느낀 오패부는 싸움을 독려하기 위해 전선으로 떠났는데, 풍옥상의 시나리오 대로 아주 잘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10월 19일, 오패부는 란평에서 장지강, 녹중린, 이명중, 유욱분, 유기, 등옥산 같은 사람들을 소집해서 회의를 열고, 북경 회군 계획을 공개하고 선포했습니다. 모든 지휘관들이 이에 동의를 보냈고, 풍은 곧바로 지시를 내렸습니다.


 풍옥상의 심복 녹중린의 모습

 ─ 녹중린(鹿钟麟)은 부대를 인솔하여 밀운에서 급히 북경으로 회근하고, 손량성 여단, 장유새 여단과 함께 한다. 북원에 도착하면 장홍후 여단과 합류하여 북경에 입성토록 해서 경계 업무를 맡는다.

─ 이명중 여단은 고북구에서 장신점으로 달려가 경한선, 경봉선 교통을 끊어 버린다.

─ 호경익 부대는 남으로 돌아가 란주와 군량성 일대를 점령하고 직군의 연결 고리를 끊고 오패부가 서쪽으로 귀환하는것을 막는다.

─ 손악은 조곤의 경호 부대를 감시하고 오패부의 남아 있는 부대를 감시한다.


 명령에 따라 여단장 녹중린 등은 북원에서 여단장 회의를 열고 22일 저녁 8시에 출발하여 북경으로 달려갔습니다. 12시 쯤 되자 북경 문 앞에 도착했고, 기다리던 손악은 성문을 열어 녹중린 부대는 싸움 한번 안하고 북경을 접수한뒤 기차역, 신문사, 전화국등 모든 교통 통신 기관을 통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10월 23일 풍군은 북경 성내 각 성문과 동서남북 교통 요지에 골고루 배치되었는데, 모두 "민폐금지" "애민" "결사보국"같은 흰색 완장을 두르고 있었습니다. 아직 남은 오패부의 군대는 모두 무장해제를 당했고, 평화를 발표하는 전문이 전국적으로 보내졌습니다.


 10월 24일 풍옥상은 조곤에게 3개의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첫째, 정전 협정을 내릴것. 둘째, 오패부의 모든 직위를 박탈할 것. 셋째, 오패부를 자동 퇴위시킬 것. 앞에는 봉군, 뒤에는 풍군으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조곤은 울며 겨자먹기로 그 모든 조건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패부는 저멀리 청해성 독판으로 발령을 냈습니다.


 10월 25일 풍옥상은 국민군을 조직하고, 스스로 국민군 총사령관 겸 제1군장을 하고 호경익, 손악을 부사령 겸 제2,제3 군장을 맡도로 했습니다. 그리고 쑨원의 요청하면서 합작에 동의한 단기서를 불러서 입경하도록 했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조곤의 정부가 사라지고, 황부(黃孚)라는 인물이 섭정 내각을 조직하고 임시 대총통 직권을 행사했습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입니다.


 풍옥상의 시대



 한참 전선에서 싸움을 독려하던 오패부는 그야말로 청천벽력같은 풍군의 회군 소식을 들었습니다. 오패부는 겉으로는 짐짓 태연한 척 했지만 이미 소식을 들은 직군은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졌고, 오패부는 풍옥상 토벌 발표를 하고 스스로 조곤의 밀령을 만들어서 흉적을 처단한다고 선포했습니다. 조곤의 정지 명령이 내렸지만 이건 가짜라고 무시하면서 1만 명의 부대를 이끌고 북경으로 진격했는데, 사기가 떨어지고 숫자도 적은 이 부대는 풍옥상의 군에 삽시간에 괴멸당하고 맙니다. 11월 3일, 오패부는 대세가 기울어짐을 알고 통한의 눈물을 흘리면서  당고(塘沽)에서 운수선을 타고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 버렸습니다. 그토록 힘들게 천하를 얻었는데 이렇게 제대로 싸움 한번 못해보고 빼앗긴 것입니다.


 제2차 직봉대전은 봉군+풍군 연합군이 승리했고, 1924년 9월 13일부터 11월 3일 오패부의 도주까지 50여일간을 겨루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갈등의 시작이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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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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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고기 | 작성시간 12.07.01 오 감사함니다
  • 작성자제대군인 | 작성시간 12.07.01 너무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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