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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의 군벌]최강의 군벌, 만주의 패왕 장작림(22) ─ 장작림 vs 손전방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7.05|조회수696 목록 댓글 2




 손전방


 상해까지 물밑듯이 들어온 봉천파였지만, 무례한데다 제국주의적 경향으로 날뛰는 봉천 군벌은 상해 사람들로부터 원성을 샀습니다. 1925년 5월 30일 상해의 각급 학교 학생들이 무려 2,000여명이 모여 도로에서 전단을 뿌리면서 시위를 벌였는데, 마침 중국인 노동자 고정홍이라는 사람이 일본 자본가에게 총으로 맞아 죽는 천인공노할 일이 벌어지자 학생들이 지원하러 나온 일입니다.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봉군의 뒤에 일본이 있다는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조계 당국은 영국 무장 경찰을 대대적으로 출동시켜 100여명의 학생들을 체포했습니다. 상해의 시민들은 학생들이 체포되자 격분, 자그마치 1만 여명의 군중들이 일어나서 거리로 몰려 나왔습니다. 그들은 한 마음 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타도 제국주의!"


 1만명의 군중들은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했는데, 영국 경찰은 그 시위대에 실탄 사격을 하는 만행을 벌였습니다. 열명이 넘는 군중들이 그 자리에서 죽었고 수십 명의 부상자가 나왔으며 5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체포되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오주사건, 5.30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중국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공산당은 그 뒤에서 시위의 기름에 불꽃을 먹여서 활활 태웠습니다. 31일, 상해의 노동자 20만명 은 중화전국총공회(中華全國總工會)을 조직, 6월 1일부터 총파업에 돌아갔습니다. 학생들은 동맹 휴학을 벌였고 상인들도 공상학연합회(工商學聯合會)을 조직하여 폐업에 들어가면서 시위는 상해 전지역으로 확산됩니다.


 여기에 대한 "타도 제국주의" 세력의 반응은 초강경대응이었습니다. 6월 초 일본 ·미국 ·이탈리아 등은 육전대(陸戰隊)를, 영국은 육군을 파견해서 이 운동에 탄압을 가하는 한편 중소자본가들에 대한 분열정책을 행하였습니다. 이러한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서 6월 13일 봉군은 외인 간섭을 핑계 삼아 상해 시내에 군부대를 파견했고 계엄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두개의 봉군 여단을 파견하여 제국주의의 졸개 노릇을 충실하게 수행하며 시위를 탄압하자 상해에서 봉군과 장작림에 대한 신망은 땅바닥 구렁텅이로 추락하고 맙니다.




 한편, 상해에서 바로 코앞이자 절강의 독판인 손전방은 봉군이 강소성을 점령한 다음에 절강으로 내려올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단 절강까지만 내려오면 흑룡강성에서부터 남중국해까지 봉군은 큰 세력을 이루게 되는 셈입니다. 그리고 코앞에 있는 양우정이 장작림의 최측근이기도 하니, 양우정을 좋게 달래서 파국을 막기 위해 동맹 제안을 합니다. 그런데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양우정의 답변이 가관이었습니다.


 "그의 절강과 나의 강소가 뭐가 어쩌고 어째?"


 양우정이 이런 식으로 나오자 손전방은 이거 진짜 위험하겠다 싶어, 이판사판 일을 벌이기로 했습니다.


 봉군은 강남에 온 뒤로 군기가 아주 엉망이었습니다. 사방에서 사기와 공갈을 벌이고 군대가 마약을 밀매하고 부녀자들을 강간하는등 하는 짓이 북방 오랑캐가 중원 땅을 점령한 수준이었습니다. 당연히 사방에서 원성과 민원이 폭주했고, 곧 남경과 상해에서 봉천파를 반대하는 시위가 사방에서 폭발했습니다. 그렇다면 부대들을 엄히 단속하고 민원을 해결하는것이 양우정이 할 일인데, 그는 여전히 자기 군사들을 마음대로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내버려 두면서 원성도 돌보지 않아, 순전히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라는 식으로 행동했습니다.


 결국, 봉천파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전국으로 퍼져나가게 되는 최악의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봉천파의 압력을 받고 있는, 아직 장강 유역에 남아있던 직계 군벌들은 서로 모여서 이 난리를 이용해볼 궁리를 했습니다. 손전방은 강소, 안휘에 아직 남아있는 직계 군벌들과 긴밀히 연대를 취하고 '반봉'의 선봉에 나섰습니다.


 사실 장작림은 손전방이 무슨 이상한 짓을 저지른다는 보고를 진작부터 받았습니다. 하지만 본인이 부정했습니다.


 "망할 놈! 나는 35년 동안 누굴 치지 않았으나니절대로 누가 날 치진 못할 것이다!"


 그런 식으로 있는 호기를 다 부렸는데, 기실 손전방은 이미 풍옥상에 사람을 보낸 뒤였습니다. 장작림의 횡포를 못마땅하게 지켜마 보던 풍옥상에게, 손전방은 의형제를 맺고 싶다는 의사표현을 했습니다. 또한 하남의 독판 악유준(岳維峻)에게도 사람을 보냈습니다. 이 사람은 신익희 선생을 지원하던 호경익이 죽은 뒤 그 후임으로 갔는데, 악유준은 신익희 선생에게 아편을 팔아서 자금을 만드라는 말을 했고, 이 말에 분개한 선생은 악유준의 얼굴에 술잔을 부어버렸습니다. 하여간에 이때 악은 손이 봉군을 공격하면 자신의 국민당 제2군으로 산동성에서 호응하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파일

 독립 운동에 힘쓴 해공(海公) 신익희 선생.


 손전방은 절강에서 손이 봉군의 머리를 치고, 하남에서 허리를 치고, 서북에서 꼬리를 친다는 제법 장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또한 장강 유역의 직계 군벌들과 교류해서 손을 잡고 그들의 지지를 얻어내었습니다. 10월 7일, 손전방은 안휘와 강서, 복건, 절강 등 5개 성의 대표를 항주에서 모이게 해 봉군 토벌 계획을 상의했습니다. 5개 성의 대표는 손전방을 5성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추대했습니다. 회의의 주 안건은 "단기서를 끌어안고 봉군에 반대한다." 는 것입니다. 


 10월 10일. 손전방은 가을철에 실시하는 군사 훈련을 명목으로 전군 발동 명령을 내리고 출격을 지시했습니다. 출격한 곳은 태호(太湖)였는데, 청나라 말기부터 이 태호 앞에서 하는 군사 훈련이 있었는데 이를 태호추조라고 합니다. 추조라는 말이 가을에 실시하는 훈련이라는 소리입니다.



 장각 삼각주 남부에 위치한 거대한 담수호 태호. 제주도 보다 넒은 2,250제곱미터입니다.



 일단 태호추조 명목으로 전군 발동 명령을 내린 손전방은 병사를 나눠서 상해와 남경을 공격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절강, 복건, 안휘, 강서, 강소 연합군 총사령관 명의로 소속 부대를 5로 대군으로 편성했고, 각기 5개 사단으로 조직해 자신을 비롯한 통일 본부의 말을 듣고 통일된 행동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시간에 각자의 목표를 향해 다섯개 방면으로 총격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양우정은 손전방의 거병 소식을 듣고 기절초풍했습니다. 그가 내린 판단은 아주 군벌다운 것이었는데, 1개 여단으로 5개 사단을 막아내기 힘드니 실력이나 잘 보존하자는 식으로 즉시 군대를 상해에서 철수시켜 궤멸을 막았습니다. 그래서 16일 손전방은 아무런 손실도 없이 간단히 상해를 접수합니다. 손전방은 곧바로 장작림을 성토하는 전문을 발표했습니다.


 "지난 수개월 동안, 봉군은 살인과 약탈로 우리 인민을 고달프게 하였다. 추하고 더러운 행동을 한 것은 우리 모두가 아주 잘 알고 있는 바이다. 그들은 많은 피를 뿌리게 해 중국이 해외에 비웃음을 사게 하고 있다. 때가 오늘에 이르어 나 손전방은 참을 수 있어도 병사들은 참을 수가 없고, 병사들이 참을 수 있어도 인민들은 참을 수 없다. 오로지 장작림 한 사람만 토벌하면 된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목표는 장작림 한명이만 된다고 하여 대상을 좁히고 분명화 시켰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경을 공략하는것 역시 손쉬운 일이라, 19일 손군은 진강에 도착해서 남경을 위협했습니다. 일찍이 명태조 홍무제 주원장, 남명 정권을 공격하는 청나라의 남벌군 모두 진강을 장악한뒤 남경을 공략한 바 있습니다. 손전방의 대병력이 남경 근처에 이르자 양우정은 허둥대면서 즉시 강소군 장령회의를 열었습니다. 양우정은 평소답지 않게 오만한 태도를 버리고 간절하게 부탁했으나, 정작 그동안 실컷 괄시를 당한 진조원등의 사단장들은 속으로 다른 마음만 품으면서 손전방과 몰래 연락을 벌였습니다.


 진조원은 강소 방판의 명의로 자주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날도 여러 군관들을 불러 떠들석하게 술자리를 벌였습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이들을 포위해 총 한방 쏘지 않고 무장 해제시켜 포로로 만들었습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양우정은 이미 대세는 끝난것을 깨닫고, 밀실의 비밀 통로를 이용해 남경을 탈출했습니다. 강북의 포구에 다다른 뒤에는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도망치면서 강등선에게도 철수하라고 통고했습니다.


 당시 동북에 있다가 안휘성으로 와서 임명된 여단장 유익비(劉翼飛)도 갑자기 손전방 대군의 기습을 받아 완전히 깨졌고, 그는 승려로 변장해서 달아났습니다. 유익비는 여러곳을 전전하다가 간신히 봉천으로 와서 장작림을 뵈었습니다. 뜻밖에 장작림은 크게 웃으면서 유익비를 반겼습니다.


 "이 자식! 살아있었구나! 잘했다! 듣자 하니 스님으로 변장했다며? 자식! 너만 강남에서 손전방 놈과 8시간 동안 싸웠고 다른 놈들은 지 애비애미가 담력을 적게 만들었는지 총 한 방 쏘지 않고 전부 투항했다더라!"


 그러면서 양우정과 강등선을 욕하다가, 이내 다시 그들을 감싸는 말을 했습니다.


 손전방 군대는 서주까지 파죽지세로 진군했고, 봉군을 강소성에서 완전히 밀어내고 나서 추격을 멈추었습니다. 쌍방은 산동과 강소 경계에서 전투를 멈추었는데 강소, 안휘 두 성은 다시 직계 군벌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이 전쟁을 절봉전쟁이라기도 합니다. 손전방은 절강, 복건, 강소, 강서, 안휘 5개 성 연합의 군 총사령관 명의로 장강 하류 지역을 차지해서 북방의 장작림과 대치되는 구도를 이루는데 성공했습니다. 


 손군과 봉군의 세력 구도


 
 1925년 10월 21일 손전방은 남경으로 개선장군이 되어서 돌아왔습니다. 당시 양우정과 강등선의 북쪽 후퇴에 관해서, 중국의 역사학자 진위푸(金毓黻)는 다음과 같이 평론했습니다.



 "……이때 봉군은 승승장구하여 남으로 깊숙이 내려가 연주 서주와 단절되고 강회를 넘어 고립되었다. 병가에서 기피하는 일을 했다. 손전방은 부대를 장악하고 절강의 서쪽 지역을 노려보며 수시로 봉군의 후방을 밞았다. 양우정이 군사에 대하여 모르는 바는 아니나 모든것을 고려하지 않은 채 갑자기 남쪽으로 부임하였다.


 양우정은 봉군의 승승장구에 편승하여 강남에 와서 채찍만 휘두르며 안주했다. 강남의 사대부들은 평소 동북인들을 무시해왔다. 양우정도 이것을 알고 도도하게 굴었던 것이다. 봉군과 강소성은 또 세력이 다르고, 서로 의심하여 손전방이 이 틈을 탄 것이다. 부임한 지 불과 2개월이 안 되어 위태위태한 현상이 노출되었다. 처음에 상해에서 철수했으나 게속해서 남경 역시 지킬 수가 없었다. 마침내 북으로 돌아갔다. 손전방은 병사 하나 손실 없이 강서와 안휘 두 성을 차지했다 이것은 양우정이 급하고 가볍게 처신했기 때문이다."



 
 손전방의 역습으로 장작림은 강남의 세력을 잃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중심 세력은 아직 건재했는데, 이번에는 단순히 아까운 강남을 잃은 수준이 아니라 자신의 기반이 모조리 송두리채 흔들리는 대사건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곽송령이 움직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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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Roiche | 작성시간 12.07.06 오메 마지막 문장을 보니 순간적으로 철렁했음. ㄷㄷㄷ
  • 작성자데미르 카라한 | 작성시간 12.07.07 뜬금없지만 저때 각 자치구는 거의 실질적인 독립국 아녔나요? 위구르는 동튀르키스탄 공화국에 티벳은 잉국의 입김... 내몽골은 대몽골을 외쳤으나 초이발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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