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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의 군벌]최강의 군벌, 만주의 패왕 장작림(30) ─ 격변하는 형세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7.17|조회수417 목록 댓글 0



 북벌군이 구시대 군벌 부대에 대하여 가지는 우위는 몇가지 부분이 있습니다. 우선, 군벌들의 부대는 대부분 숫자에 비해 질이 형편 없었습니다. 1,2차 직봉대전이 벌어질때, 장작림은 수만 군대를 동원했지만 진실로 군사작전이 가능한 부대는 곽송령, 장학량의 최정예 부대 정도였습니다. 반면에, 북벌군의 주요 장교들은 장제스가 황포군관학교에서 기른 인물들로, 다른것은 둘째치고 군벌 부대는 돈이 주요 목적이지만 북벌군은 혁명 사상으로 무장된, 단순히 겉치레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이 나라 내 조국을 내 손으로 구해내겠다는 신념을 가진부대입니다. 정신무장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두번째로, 군벌들은 북벌군이 기세를 올리려는 와중에도 힘을 모아 막아내기보단, 오히려 서로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는 식으로 방관하거나 힘을 합치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북벌군은 그 많은 군벌과 한꺼번에 겨루는 위협에서 벗어나 각개격파하는 전략이 가능했습니다.


전성기 시절에 비해 훨씬 작은 세력이 된 오패부는 북벌군의 공세를 전면으로 받아 매우 힘든 처지에 놓였습니다. 손전방은 구경만 하고 있고, 장작림은 오히려 뒤치기를 하고 있는 판국이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손전방은, 그래도 겁이 나긴 하는지라 산동에 있는 봉군의 장종창에게 연락을 취해 의형제를 맺는등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려고 했습니다. 장작림은 장작림대로, 오패부의 뒤를 치긴 했는데 막상 그러고보니, 오패부가 망하면 손전방이 북벌군과 연합해서 자기를 공격할까봐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손전방에게 사람을 보내 봉천 군벌과 손전방이 서로 힘을 합쳐야 북벌군을 이길 수 있다고 설득했습니다.


 손전방은 긍정적으로 대답했습니다.


 "서로 끌어 주길 원하며, 상황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장작림도 답신을 보냈습니다.


 "오패부 장군이 패하여 무한은 이미 함락되었습니다. 동남의 반쪽이 전부 나와 형께 의지하고 있어 현재의 정세가 아주 중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형과는 서로 작은 감정과 틈이 있었지만 우리 빨리 동쪽으로 가서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손전방은 머뭇머뭇거리긴 했어도 결과적으로는 북벌군과 싸우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때도 많이 늦고 기세에서 밀리고 있었습니다. 오패부는 오패부대로 온 힘을 다해 북벌군을 막아보려고 장령들을 독려했지만, 대부분의 장령들은 이미 기운이 쭉 빠져 무슨 말을 해도 제대로 듣지도 않았습니다. 오패부가 다섯길로 반격하자는 명령을 내려도 시큰둥했는데, 그러는 사이에 10월 10일 광동의 북벌군은 기어코 41일간 지키고 있던 무창성을 함락시켜 오패부의 군대 전부를 섬멸시켜버렸습니다. 이제 북벌군이 전력을 손전방에게 집중시킬 것은 뻔한 이치입니다.


 동시에 그동안 밀려났던 풍옥상의 국민군이 풍옥상의 귀환과 광동군의 북벌에 맞춰 이에 호응하면서 섬서성을 공격해왔습니다. 11월 무렵 손전방의 주력부대는 북벌군에 섬멸되기 시작했고, 강서에서 참패해서 남경으로 부대를 후퇴시켰습니다. 손전방은 어떻게든 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해 북양 군벌 각파들의 대단결을 촉구하면서, 단기서와 오패부 등의 대리인을 남경에 모셔 삼각연합을 해서 국민혁명군을 막자고 주장했습니다.


 "무한과 강서 지구에서 패한 것은, 물론 우리의 병력이 부족하긴 했지만 북양 장령들이 상호 협조를 안 한것이 실패의 주요 원인입니다. 모두 힘을 합치고 마음을 함께하여 적과 싸우기를 희망합니다."


 문제는, 그 상호 협정을 안했다, 는 말은 손전방 본인에게 적용되는 말입니다. 오패부가 다 죽어가면서 구원 요청을 할때 무시해버린 사람이 손전방이니 말입니다. 게다가 단기서의 대리인으로 온 근운붕은 만약 북양 각파가 힘을 합치고 싶으면 꼭 단기서를 대표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오패부가 단기서를 욕한 적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오패부의 대표인 웅병기라는 사람이 이에 화가 나서 자리에서 일어나 근운붕을 비난했고, 회의장 분위기는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당황한 손전방은 이렇게 말렸습니다.


 "밥이나 먹고 이야기 합시다."


 오패부 ─ 단기서 ─ 손전방 삼각 협정은 이렇게 시작도 못하고 깨졌습니다. 이제 손전방이 기댈 사람은 중국 천지에 장작림 밖에 없었습니다. 손전방은 자신의 대리인인 양문개를 산동의 장종창에게 보냈고, 장종창은 씩 웃으면서 양문개에게 말했습니다.


 "우린 녹림대학의 마적과(당연히 이런 대학이나 과가 있을리는 없고, 농담으로 하는 소리입니다) 출신인데, 당신들은 사관학교나 육군대학 출신 아니오? 아무 말 말고 우리 같이 남군(북벌군)을 치러 갑시다. 손장군에게 말 전하십시오. 우리 꼭 함께하자고 말입니다."


 양문개는 장종창을 만나고 곧바로 장작림을 찾아갔습니다. 장작림은 손전방의 병력에 대해 묻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서로 지나간 과거의 잘잘못은 따지지 말도록 하지. 아울러 손전방 부대와 우리 부대가 합심 협력하여 국민혁명군을 물리치자고."


 하지만 대리인만 보내는건 마음에 놓이질 않아, 1927년 1월 손전방은 자신이 직접 나섰습니다. 참모처장을 비롯한 수행원 두명만을 거느리고는, 변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전용 열차를 타서 남경에서 천진에 도착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장작림은 장종창과 장학량을 보내 손전방을 불러들였습니다. 


 손전방은 장작림을 보고는 공손히 90도로 허리를 굽혀서 인사를 했고, 송구스럽다는듯이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상장군!"


 장작림은 이때 풍옥상과 손을 잡고 자기를 물먹였던 5성 연합군 손전방을 처음 보았습니다. 손전방이 저리 몸을 낮추고 공손하게 굴자 꽤 감동도 하고 기분이 좋아져서 자신도 예의를 갖추고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오시느라 고생이 참 많으셨습니다. 우리 과거의 일은 서로 논하지 맙시다."


 손전방은 비위를 맞추면서 말했습니다.


 "밀가루 먹는 북방인과 쌀 먹는 우리들 남방인이 영원히 함께할 수는 없었지요."


 이 이야기가 무슨 소리냐면, 강남쪽은 벼농사를 기반으로 하는 문화권인데 비해 중국의 북쪽은 분식粉食 문화권 입니다. 폐쇠적인 지역 사회에서 딱히 이동할 이유도 못 느끼고 계속 몇십 몇백대를 내려서 살다보니, 태평천국의 난때 정부에서 섬서성의 군대를 남쪽으로 파견했는데 쌀농사 지대에 들어가서, 곡창은 풍부한데 밥을 못 먹고 야위어서 말라 죽어가는 일이 있었습니다. 만두만 먹어서 쌀은 못 먹겠다는 겁니다. 요즘도 시안쪽 근처로 가면 국수나 빵을 먹으면서, 쌀밥은 며칠동안 안 먹기도 합니다.


 "병력이 어느정도나 됩니까?"


 "현재 직속 부대가 5만명이고, 5개 성의 연합군을 총동원하면 20만 명 정도가 됩니다."


 장작림의 물음에 손전방은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장작림은 다시 대답했습니다.


 "우리 동삼성의 병력은 약 80만 명 정도 됩니다. 직예, 산동 연합군을 합치면 얼추 100만 가량이지요. 우리가 합심 협력한다면 하얼빈에 남아 있는 1개단 병력까지도 끝까지 함께 할것 입니다."


 "총과 탄약을 좀 지원해 주십시오."


 "원하는 만큼 무한정으로 지원해 드리죠. 장학량 녀석과 의논해서 처리하십시오. 우리들은 모두가 당당한 대장부들입니다. 어찌 다른 사람의 위험함을 틈타 지지 기반을 빼앗을 수가 있겠소!"


 장작림은 자기가 오패부의 위급함을 이용한건 언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안국군(安國軍) 총사령관이 되고, 당신과 장종창이는 부사령관을 맡으십시오. 음력 설날이 다가오니 당신은 천진에서 설을 보낼 필요가 없습니다. 곧 남경으로 돌아가 부대를 재정비하여 반격 준비에 나섭시다."


 손전방은 통크게 양보해 산동군의 장종창이 자기의 본거지인 남경에서 전방 지휘를 할 수 있게 했습니다. 장종창이 마음만 먹으면 남경을 장악해버릴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장종창은 아주 감격해서 말했습니다.


 "당신은 나 장종창을 의리도 모르는 소인배로 여기다니! 나의 군대는 전방으로 달려갈 것이며 결코 남경을 경유하진 않겠소."


 다른 봉군의 장령들도 손전방을 칭찬했습니다.


 "아름답고 상쾌한 일입니다, 진정한 친구여!"


 이렇게까지 손전방이 나오자 장작림도 진짜로 합작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손전방은 그 후에 죽을때까지 장작림을 계속 의지했습니다. 장작림은 손전방을 위한 연회를 아주 크게 열었고, 손전방, 장종창, 장학량이 의형제를 맺었습니다. 그후 손전방은 남경으로 돌아가 안국군 부사령관이 되어 군사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안국군 총사령관 시절의 장작림


 
 봉군은 이제 다시 한번 대규모 남하를 준비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오패부가 하야를 선포했다는 거짓 전보를 날조하고는 내각을 완전 장악하고, 북양파의 유일한 우두머리가 되는 의식을 끝마치고는 내각보다도 위에 있는 중국 최고의 권력 기관을 주위에 만들어버렸습니다. 내부적인 일은 이렇게 되었고, 다음은 군사적인 부분입니다. 장작림은 양우정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양우정은 과거에 남쪽에 내려갔다가 아주 크게 곤경을 당한 일이 있어, 이번에는 매우 신중하게 행동했습니다. 그는 두 개의 길로 나가는 일은 사방에서 적의 공격을 받게 되니 위험하며, 오패부와 염석산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경계를 해야 한다고 하면서, 돌다리도 두들겨 보자고 말을 했습니다. 장작림은 천진에 주둔하면서 오패부를 지원하고 풍옥상을 막으며, 오준승과 장작상 두 원로는 후방을 든든히 지키고 다른 군대가 공격해들어오면 봉천 군벌의 모든 부대가 목을 끄집어내는 거북이처럼 한꺼번에 나와서 작전을 시작하자는 계획이었습니다.


 대략적인 군사 작전도 설정하고 나자, 장작림은 또다른 욕심이 생겼습니다. 안국군 총사령관 정도의 직함이 아니라, 아예 대원수(大元帥) 되고 싶었던 겁니다. 대원수가 되서 총통 기분을 내보고 싶었는데, 양우정은 이에 반대했습니다. 군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대원수 운운은 허풍에 지나지 않는 시기상조라는 겁니다. 그래서 일단 대원수가 되는것은 뒤로 미루었고, 작전대로의 군사 행동을 실시했습니다. 


 장작림이 '지원'을 해주기 위해서 하남으로 봉군을 보내자, 오히려 쪼그라든 오패부는 더 버티기 힘들었습니다. 도우러 왔다는 봉군이 상전 행세를 하고, 오패부의 부하들도 대거 봉군에 투항해버렸습니다. 제섭원 등 오패부의 측근들도 장작림에게 항복해버렸습니다. 오패부와 장작림은 사실상 이렇게 되어버렸고, 산서에서 웅크리고 있는 염석산은 "국경을 지키고 국민을 보호한다." 는 말을 하며 계속 웅크리고만 있었습니다. 




 


 북양 군벌이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건, 북벌군은 계속해서 진격했습니다. 손전방은 이제 지지기반이 거의 날아갔고, 상해와 항주 지역까지 북벌군이 밀고 들어왔습니다. 항주는 곧 함락되었는데, 상해에서는 미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등 제국주의군이 연합해서 3만 가량의 병력을 보유하고 이상하게 움직이고 있어 진격해들어오진 못했습니다. 


 그런 사이에 상해 내에서 사건이 터졌습니다. 3월 20일, 무장 봉기가 터지면서 손전방을 지원하러 온 장종창의 부대가 쫒겨나고 말았습니다. 이 봉기가 벌어지고 국민혁명군은 손 쉽게 상해로 들어오는게 가능해졌습니다. 이 봉기를 지도한 사람이 다름아닌 저우언라이(周恩来) 입니다.  



 중국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저우언라이


 항주와 상해도 무너졌고, 3월 24일 장제스의 부대는 남경으로 공격해 왔습니다. 그러자 근처에 정박해 있던 영국과 미국의 함대가 갑자기 포격을 가해 2,000여명이 죽는 사태가 벌어졌지만, 장제스 휘하의 이종인(李宗仁) 부대가 안휘성을 점령하면서 기세를 타고 곧 손전방 병사들은 죄다 항복을 하면서 장강 유역은 완전히 북벌군의 천하가 되었습니다. 혁명은 이제 시간문제로 여겨졌습니다.


 장제스 근처에 있던 인물 중엔 가장 유능하다고도 하는 이종인



 그런데 1927년 4월 12일, 장제스가 갑자기 숨겨놓았던 이를 드러내며 중국 천지를 진동시켰습니다. (중국 공산당 쪽 입장에서)4.12 반혁명 정변이라고 부르는 사건이 터졌던 것입니다. 다시 4월 15일에서 이 '반혁명'이 일어났고, 수많은 공산당원들은 갑자기 장제스의 총과 칼에 죽어서 나자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입장이 다른 서로들 사이에서 다른 이유를 댈 수 도 있겠지만, 여하간에 공산당이 갑자기 얻어맞은것은 분명한데 이런 사태는 나방에서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북방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노골적으로 반공을 내세우던 장작림이 갑자기 공산당원들을 잡아서 죽이고 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북경에는 다름 아닌 이대소가 있었습니다. 중국 공산당의 창립 멤버로 1세대 중의 1세대인데, 주로 야간에 활동하면서 글을 써서 형세를 논하고 있었습니다. 이대소는 외국 대사관 구역에 있는 소련 군영으로 일단 달아났는데 프랑스 대사관이 장작림에게 고자질을 했고, 곧 봉군이 소련 대사관과 병영을 수색해서 소련 공작원 16명, 이대소를 비롯한 혁명 인사 35명을 체포했습니다. 당연히 소련 정부는 곧 항의서를 중국 대리 대사인 정연희(鄭延禧)라는 사람에게 보냈습니다. 


 정연희가 생각하기에 중국이라는 자신의 조국은 다른 국가로부터 계속 업신여김을 받는 약한 나라인데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이 일은 정부의 소행이 아니라 마적들의 짓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장작림은 마적이라는 말에는 극렬하게 반응하는 사람이라 욕만 퍼부어댔고, 결국 소련 대리 대사는 외교관들을 데리고 4월 19일 귀환해버리고 맙니다.


 이대소가 사로잡히자 여론이 크게 진동하면서 구출 계획 등도 세워졌으나, 이대소가 "동지들을 위험에 끌어들여 혁명 역량을 소모시키고 싶지 않다." 고 발언하면서 멈추어졌습니다. 장작림은 양우정을 보내 이대소에게 전향을 권했으나 당연히 거절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게 진짜일까, 아니면 참조하는 책이 중국에서 나온 책이라 덧붙인 이야기일까 의심스럽기도 하는데)장제스는 이때 장작림에게 비밀 연락을 보냈다고 합니다. 내용인즉 체포한 공산당원을 즉시 처형해서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말입니다. 또한 장종창은 이대소를 극히 혐오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빨갱이는 언제나 화근 덩어리다. 그 수괴를 제거하지 않으면 북경은 계속 위험에 빠지게 된다."


 장작림은 이 '빨갱이 수괴'를 죽여 없애려고 '소련 음모 문건 자료' 라는 그럴듯한 조직적 폭동 음모를 뒤집어 씌우고 4월 28일 이대소와 혁명당원 20여명을 교수형에 처했습니다.


 이대소는 최후에 이르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공산주의는 세계에서, 그리고 중국에서, 기필고 영광스런 승리를 쟁취해 나갈것이다. 나는 그렇게 굳게 믿는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공산주의 만세! 공산주의 만세! 공산주의 만세!"


 1927.05.06일의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이대소의 사망 소식을 전하면서 이대소를 일컫어 현대 중국의 제일류 사상가 중 한명이며, 남방의 진독수(陳獨秀)와 더불어 남진북리(南陳北李)라 불리어지던 인물이라고 소개하며 그의 일생에 대해 논했습니다. 


 상황은 빠르게 격변하고 있었습니다. 




 초기 중국 공산당에 공은 세웠지만 지금 중국 공산당 입장에선 좀 애매한 인물인 진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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