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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의 군벌]최강의 군벌, 만주의 패왕 장작림(31) ─ 마지막 싸움을 위해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7.20|조회수492 목록 댓글 0



 1926년 대 말, 북벌군이 무적의 기세로 진군하며 호남, 호북, 강서, 복건등을 점령하고 국민정부의 통치 지역을 크게 확대해 나가자, 왕정위 등의 국민당 중앙은 1926년 12월 7일 무한으로 천도했습니다. 그런데 장제스의 공산당 학살이 일어나며 상황이 이상하게 되었습니다. 국민당 중앙 정부와, 무한에 있던 공산당원들이 장제스의 대량 학살을 비난하였고, 반혁명 죄라고 욕하면서 그를 해임해버린 것입니다.


 "장중정(정말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중정이 본명입니다.)은 민중을 학살했고, 당에 막대한 피해를 가져와 그 죄가 명백하다. 당 중앙 집행위원회는 이미 그의 당적을 박탈하기로 결정하였고, 그의 본직과 각 직책을 해임한다. 전체 장병들과 혁명 민중 단체는 장중정을 잡아 중앙에 넘겨, 그의 반혁명 죄를 징치하여야 한다."


 그러면서 국민당 중앙은 장제스의 대타로 국민군 총사령관 직무를 풍옥상에게 주려고 하고, 당생지(唐生智)라는 인물을 부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훗날 당생지는 중일전쟁 당시 남경에서 다른 사람들의 반대에도 수비를 하자고 해서 수비하다 실패했고, 남경은 끔찍한 대학살에 직면했습니다.


 당생지의 모습


 일단 막나가는 장제스도 토벌은 해야 했지만, 무한 국민당 정부 - 이하 무한정부는 계속 북벌하겠다는 원칙을 내세우며 풍옥상 부대를 집결토록 하고 소련과 통신망을 구축하려했습니다. 장제스는 나중에 상대하겠다는것인데, 이는 장제스가 여유를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준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저쪽에서 총구를 북으로 돌린 사이, 장제스는 오히려 자신이 무한의 '비합법적인' 중앙 당부를 최소한다고 하면서, 남경을 국도로 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무한정부와 대비되는 남경정부가 생긴것입니다. 중국 땅에 서로 자신들이 진정한 쑨원의 후계자라고 주장하는 국민정부가 두개나 생겼는데, 쑨원이 이 모습을 보면 어찌 생각할지 모르는 일입니다.


 어찌되었건 무한 정부는 계속 북벌을 감행했고, 당생지와 풍옥상, 그리고 끌어들인 염석산등의 진공에 이미 모든 기반을 다 잃은 오패부는 도망, 패주 또 도망 밖에 방법이 없었습니다. 심지에 일반 농민들에게 습격당하는 고초까지 겪은 후에야 간신히 위험지역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과거의 패자가 이렇게 초라하게 몰락한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장작림은 오패부를 생각해주는척 하며 오패부의 대표에게 말했습니다.


 "오 장군은 어떻게 이 지경이 되었답니까? 남양으로 간 겁니까? 숭산으로 피했습니까? 어찌하여 나한테 기별도 안하고……당신에겐 편지 한통이라도 있었습니까? 나는 그를 믿습니다. 비록 오랫동안 그는 날 믿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봉군은 오패부 군대에 비하면야 조금더 유리한 입장에 처해있었지만, 북벌군의 기세는 봉군이라도 막아내기가 어려웠습니다. 앞서 말한대로 염석산은 형세를 살피하다가 이미 약삭빠르게 자신은 삼민주의를 추종한다고 하면서 무한 국민정부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리 되자 봉군에 대한 압력은 한층 더 강해져 버렸습니다.


 게다가, 장제스도 움직였습니다. 장제스 역시 북벌을 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그 방향은 강소성이었고, 서주는 순식간에 함락이 되었습니다. 마치 산이 무너지듯 손전방과 그를 도우러 온 장종창은 전혀 장제스의 상대가 되지 못하며 밀려나버렸고, 장작림은 어떻게든 세력을 보존하기 위해 봉천군과 산동군에게 완전 후퇴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때 무한정부와 남경정부가 대치하면서 간신히 장은 한숨 돌릴 기회를 얻었습니다.


 장작림이 냉정하게 보니 봉군의 세력이 기세를  타는 북벌군을 당해낼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양우정의 건의에 따라 '국민군과 화친하고 반공한다.' '염석산과 연대하여 풍옥상을 토벌한다.' 는 식의 구호를 내걸고 선전했습니다. 하지만 마적부터 시작해 이 자리까지 오른 장작림이 애송이같은 장제스에게 머리를 숙이는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고, 장제스는 장제스대로 매우 커다란 야망에 불타 장작림 같은 구시대 군벌과 장단을 맞추며 놀아줄 생각이 없었습니다.


 1927년 6월 8일, 장제스는 자신의 요구 조건을 봉군에 내밀었습니다. 장작림은 산민주의를 신봉하고, 명칭을 국민혁명군으로 개칭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야 장작림을 동북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동북의 자치를 맡기겠다는 제안이었습니다.


 이는 명백하게 장작림이 장제스의 부하가 되라는 말이었습니다. 장제스가 가소로운 장작림은 코웃음을 치면서 무시했습니다. 또한 양대정부의 대립으로 북벌이 잠깐 멈춘 틈을 타서 회의를 열고 향후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습니다. 오준승, 장작상 등 원로파는 투항하고 국민당 깃발을 다는 것에 반대했고, 장학량, 한린춘 등은 남북이 화의를 해서 현재의 기반을 지키자고 건의했습니다.


 문제가 되는건 손전방이었습니다. 만약 장작림이 북으로 올라가서 거기서 웅크리고 있으면, 손전방은 모든 거점을 다시 회복하지 못하는 낙동강 오리알이 되기에 극렬하게 반대했습니다. 산동에서 착취를 일삼고 수많은 여자들을 희롱하며 왕처럼 살던 장종창도 산동을 잃기 싫어 주전론을 펼쳤습니다. 그러면서 감정에 복받쳐서 말했습니다.


 "오늘의 적은 북양계가 아닙니다. 싸우지 않는것은 불가하며 싸우지 않으면 반드시 망합니다. 관에 들어가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통쾌히 한번 크게 싸워 봐야 합니다. 직위를 높이게 되면 혹 정세가 나빠져 관외로 후퇴하더라도 대원수의 칭호가 있으면 마치 광동에서 쑨원이 한것처럼 호소력이 있을 것입니다."


 즉 장작림 더러 대원수가 되라는 것입니다. 손전방 역시 벌떡 일어나 말했습니다.


 "상장군을 대원수로 추대하는 길이 군사 문제를 완성하는 길입니다."


 이에 모든 봉군 장령들이 찬동하였고, 장작림도 아주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이제 쑨원의 선례에 따라 사람들은 장작림을 대원수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중화민국 육해공 대원수가 된 장작림


 그런데 이 자리에서 장종창이 망령된 소리를 지껄이기도 합니다.


 "기왕에 모든 사람들이 원하고 있으니, 노 장군께서는 아예 황제의 자리에 오르시는게 어떻겠습니까?"


 장작림은 이 헛소리에는 아예 대답도 하지 않고 손전방에게 '병력을 얼마나 동원 할 수 있겠느냐' 고 묻고, 즉석에서 50만원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못해 대원수가 되는듯이 행동하며 손전방등의 추대 명의로 안국군 정부 육해군 대원수라는 거창한 직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전문을 발표했는데, 굳이 뻔한 내용을 여기에 언급할 필요는 없을테고 마치 장작림이 대원수를 맡지 않으면 중국이 망하게 된다는 투였습니다.


 장작림이 대원수에 취임하는 날, 각 신문사는 3일간 홍색 신문을 출간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홍색 잉크가 워낙 귀해 하루만 그렇게 하고말았습니다. 북경 전역에 군인들이 어슬렁거리며 감시하는지라 사람들을 매우 곤란하게 했습니다.



 장작림이 대원수가 되며 기념으로 나온 물건들



 그런데 이 엉터리 정부에 대해 서방 국가들은 별다른 호감을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장작림이 각국 대사들에게 다과회를 제안하자, 대사들은 미리 서로 모여 말을 맞추고는 공식적인 행사가 아니라 그저 놀라가는 듯한 태도로 와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장작림이 크게 난처해한건 뻔한 일입니다. 저들의 그런 태도는, 외국 사절단들이 이 정부를 승인하지 않겠다는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이제 장작림은 누구를 허수아비로 둔 실권자가 아니라, 아예 그냥 '장작림 정부' 가 되었습니다. 장작림 개인의 몽상적인 측면이나 남쪽과 교섭할때 높은 위치를 하고 있자는 식으로는 되었지만, 문제는 군비를 조달하고 해당 지역의 백성들을 먹여 살리는데 엄청난 돈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군비를 조달하려면 백성들을 착취하는게 제일입니다. 특히 장종창이 산동 지역 등에서 백성들을 악랄하게 착취해내면서 비난이 거셌습니다.


 문제는 장종창이 그렇게 짜낸 돈을 자기 마음대로 쓴다는것입니다. 1927년 무렵 장종창이 1년에 쓰는 돈이 무려 5,000만원이 넘었습니다. 군인들의 봉급을 주지 못하고 있었는데 돈은 그렇게 나간 것입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산동 사람들은 저 멀리 달아났고, 군인들은 총칼을 들고 강도로 변하거나 거꾸로 남방에 투항했습니다. 봉군은 이제 붕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장작림은 어떻게든 재정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지만, '소비를 줄이고 지출을 아끼자'는 급한 불만 끄는 조치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장작림 정부 하에서 직원들은 급여를 8할만 받았고, 나중에는 8할도 제대로 받지 못해 원성이 자자했습니다. 그리고 민심까지 흔들렸습니다.


 여러가지 문제가 벌어지면서, 장작림은 인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직접 나서게 됩니다. 간부와 각 부서의 총장급들을 모두 소집한 이 자리에서 장작림은 대원수 다운 품격대신 마구 욕설을 내뱉으며 화를 내었습니다.


 "나 장작림이도 한 사람의 사람일뿐, 특별한 인간은 아니다. 나는 항상 여러분과 대화를 하고 싶지만 앞에서나 알랑거리고 내가 밖에 나가면 아무도 보이질 않아. 그러나 여러분이 누가 좋고 나쁘지는 이 귀로 다 듣고 있다. 앞으로의 형세가 좋아지고 천하가 안정되면 내가 여러분 때문에 답답할 것이다. 현재 여러분은 일을 잘 해야 한다. 모두 나 장작림이가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들 말하는 데, 내가 어디에 돈이 있겠나? 내가 27사단장 시절 20만 량의 은자를 저축해 놓고 있었긴 하지. 하지만 내가 통치를 잘 하려고 몇 푼 모은것일뿐 외국 은행에 장작림이 돈이 있는 줄 아는가?"


 "아니면 어디 외국 조계에 장가가 사 놓은 집이 있는 줄 있나? 제기랄, 난 중국인에게나 좋게좋게 했지, 외국인에게는 잘 해 준것도 없어! 현재 나가 군사 문제로 쉴 새 없이 바빠 정치 문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나머지 일도 모두 이미 여러분에게 맡겼으니 여러분은 일이 있으면 나를 찾지 말아야 한다."


 "당신들 각 부처는 수입이 있는데 교통부, 재정부 등은 자기들만 챙기고 있지 돈이 있으면야 여러 사람들에게 나누어 골고루 써야지. 빌어먹을! 어떤 귀신이 시끄럽게 하는지 모르겠구먼. 내 성질은 몇년간 다 죽었어. 현재 어떤 인간은 혁명을 한다고 시끄럽게 설치고(이대소), 코 큰 소련 놈들은 무슨 공산(共産)인가, 공처(共妻)인가 염병할것을 한다고 지랄을 떠는 데 당신들 모두 생각해 보아라! 공산이라니, 각자 개인들 마누라도 공동으로 하겠다는 건가? 지난 30일 동안 여러분은 모두 잠에 곯아 떨어졌을 때 이 나 장작림이는 잠도 못 이루고 향 사르고 무릎 꿇고 앉아 사조당 뜰에서 이렇게 기도를 올렸다."


 '하늘이시여, 나 장작림은 중국을 평정하고자 합니다. 천하를 통일하고, 백성들을 구하고자 하오니 하늘이시여, 이 장작림에게 조그만 손길이라도 내멀어 주십시오. 하루 빨리 나쁜 악당들(염석산, 풍옥상, 장제스)를 없애고 속히 중국을 통일해 백성들을 편하게 살도록 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나의 모습이 북경에서 멍하니 무얼 하겠습니까!'


 하고 말이다. 여러분은 모두 기억해 주기 바란다. 나는 나의 이런 모습을 원하지 않는다. 장작림은 결코 사람의 도리에 어긋나는 짓은 하지 않으며 국가에 해가 되고 백성에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6월 25일, 장작림은 모든 분쟁을 멈추겠다는 전문을 발표했습니다.


 "본 대원수는 쑨원 선생과 여러 해 동안 친구였다. 민국 11년, 13년에 군 병력을 무한에서 합류하자고 약속한 바 있다. 쑨원 동지와는 같은 식구이며 한결같은 친구로 여겼다. 공산주의자들이 있는데, 본 대원수는 옛 친구의 명예와 국민의 인권과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처음의 뜻을 관철시키고, 이들의 죄를 묻고자 한다."


 여기서 장작림은 자기는 국민당과 한 집안이며, 옛 친구고 동지이면서 적은 공산주의자라고 은근히 몰았습니다. 그런 식으로 장제스나 염석산을 끌어들이려 했습니다.


 

 풍옥상, 장제스, 염석산



 그런데 6월 21일 무렵, 장제스는 한발 빠르게 먼저 풍옥상과 합작을 했습니다. 이 비밀 협의에서 무슨 내용이 오고 갔는지, 풍옥상은 갑자기 태도를 바꾸면서 공산당에 대해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소련 고문단도 돌려보내라고 무한 정부에 촉구했습니다. 무한정부의 왕정위가 믿고 있던 것이 풍옥상인데, 그 풍옥상이 장제스에게 저렇게 포섭이 되면서 궁지에 몰리게 된 것은 무한 정부의 왕정위 였습니다.


 결국 왕정위는 1927년 7월 15일, 이른바 분공(分共) 회의가 열리고, 여기서 무한 국민당 정부 역시 중국 공산당에 반대하고, 반공을 하겠다는 입장이 정식으로 선포되었습니다. 동시에 대중 운동을 탄압하고 수많은 공산당원이 학살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왕정위의 무한 정부나, 장제스의 남경 정부나 서로 노선은 같아지고 '국민당' 이라는 이름을 가진 단체는 똑같은 철저한 반공 집단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노선이 같다고 해서 장제스와 왕정위가 완전히 손을 잡은것은 아니고, 계속 눈치를 보며 대립은 하는 사이였습니다.


 왕정위는 권력과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여러 술책을 부렸습니다. 우선 소위 철군(鐵軍)이라고 불리던, 국민군 내에서 가장 계급의식이 강하고 훈련과 교육이 잘 되어있는 부대를 움직였습니다. 이 부대의 사령관은 장발규(張發奎)라는 사람이었는데 왕정위 추종자였습니다. 별개의 이야기로 철군 내에는 공산주의자들이 꽤 있었습니다. 홍군 지휘관 주덕의 말에 의하면 30% 정도는 공산주의자였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 부대를 왕정위는 강서성 북부로 이동시켰고, 당생지의 군대도 양자강을 따라 남경 방향으로 이동시켰습니다. 왕정위가 이런 식으로 나오자 장제스도 그쪽에 집중하기 위해서, 장작림을 끌어들이려 했습니다. 장제스는 7월 29일 심복인 하성준(何成濬)을 북경에 보내 양우정 등과 담판하여 장작림과 휴전을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휴전 제의는 장작림이 머뭇거려서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장작림의 생각에, 왕정위가 처리되면 어차피 장제스가 자신을 노릴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고, 이는 어느정도 맞는 이야기였습니다. 결국 이 두명의 장은 회담의 방식을 포기하고, 각자가 최후의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1928년, 중국의 상공에 장작림의 마지막 싸움이 시작되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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