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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의 군벌]최강의 군벌, 만주의 패왕 장작림(33) ─ 난 다 필요 없다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7.23|조회수1,551 목록 댓글 4

 일본은 어째서 장작림을 죽이려 했는가?



 오늘날 일본 제국주의가 장작림을 암살했다는것은 명명백백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모든 일엔 원인과 결과가 있는데, 어째서 일제는 그렇게 일을 몰아 부친것일까 하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장작림은 일본이 전략적으로 심어둔 지방 군벌이었고, 마침내 중화민국 대원수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일반적이라면 일제의 계략은 성공한 셈입니다. 문제는 장작림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일본과 맺은 밀약도 자신의 사정이 달라지자 금세 모른척을 해버렸다는 것입니다.


 당장 1925년 12월, 곽송령의 반란 당시 장작림은 인생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국내외의 모든 언론이 장의 패배가 확실하다고 여겼을때, 이 기회를 틈탄 일본은 장작림에게 중국의 주권을 내놓은 매국 조약을 권유하여 장이 서명하자 장작림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장작림은 기사회생하였고, 대반전을 이끌어 냈습니다. 


 하지만 장작림은 정작 모든 사정이 끝나자, 이 조약 보통 심각한 조약이 아니라는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온갖 이유와 트집으로 핑계를 하며 일을 미루고 미루고 또 미루었고, 결코 집행하려는 의지는 추호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장작림을 이용하려 했는데, 장작림의 사정은 어떠한가. 하면, 장작림 역시 마찬가지로 일본을 이용해 버리려던 심산이였을 뿐입니다.


 당시 조선을 집어삼킨 일제는 남만주 등을 사실상의 직할지로 하면서 관동군의 대군을 주둔시키고 있었고, 노골적으로 중국 침략 야욕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동북의 왕 노릇을 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지지는 필수 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동북의 왕이 된 장작림은 정치, 군사, 경제 여러 방면에서 일본의 간섭이나 견제를 모른척해버렸습니다. 무엇보다, 장작림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사나이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종 못할 매국노도 아니었습니다. 장작림은 중국인으로서의 최소한의 양심과 조국에 대한 애국심이 있었고, '진심으로' 자신의 국가와 민족을 팔려던 의도도 없었습니다. 그런짓을 하면 천고에 엄청난 악명을 남길텐데, 장작림은 그런 욕을 얻어먹긴 싫어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철도 문제입니다.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에 자신들의 명의로 철도를 건설하고, 이를 관리하면서 철도 주변을 사실상의 식민지로 만드는것은 오래된 수단입니다. 장작림은 이 문제에 대해서 추호도 양보할 의사가 없었습니다. 1921년 12월 5일, 미국 콜롬비아 대학의 폴 먼로(paul monroe) 교수가 봉천에 와서 장작림과 대담을 나눈적이 있습니다. 장작림은 당시 동삼성 순열사였습니다.



 먼로 교수.



 먼로 근래 구미의 인사들이 중국의 일부 교통사업에 대하여, 국제 공동 관리를 적극 제창하고 있는데, 장군님의 의견은 어떤지요?

장작림 이 땅에서 살고, 이 땅에서 나는 곡식을 먹고 있는 중국인이라면, 그런 방법은 단 한 사람도 찬성하지 않을 것입니다. 선생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을 중국인들이 찬성하리라고 봅니까?

 먼로 소위 국제 관리란 외국인들이 중국에서 철로를 건설하고 서로 관리를 하여 한 사람이 전권을 휘두르는것을 막자는 것이지요. 중국은 중동철로와 남만철로 등이 피해가 있었지요.

 장작림 만약에 그런 방법이라면야 나도 적극적으로 찬성합니다만은, 외국인들이 듣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선생은 전국 철도와 관련된 일들에 대하여 내국인들이나 외국인들이 자기들 권리를 방치하리라고 봅니까?

 먼로 제가 알고 있는 것은 이렇습니다. 외국인들이 건설한 철로를 국제 공동 관리를 하고, 한 개의 나라가 독단하는 것을 피해야 하며, 중국 국유화 철로와 함께 간섭하지 않은 것입니다.

 장작림 만약 그렇다면 나는 적극 찬성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남만 철로를 국제 관리로 한다면 중동철로 역시 희생을 치르더라도 국제 관리를 하게 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중동철로 한개만 국제 관리로 한다면 나 장작림이는 절대 반대합니다. 어느 국가가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나 장작림은 절대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중동철로는 중국인의 철로로만 알고 있습니다. 응당 중국인이 관리해야 합니다. 나는 방법도 가지고 있습니다. 어쨌든 나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을 것입니다.

 먼로 장군님의 애항애국 정신에 아주 감명을 받았습니다.




 일제 역시 중국의 북부에 대한 식민적 지배, 더 나아가 일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중국 지배에 대한 야욕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철도가 중요함을 일찍부터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906년부터 동북에 남만주 철도 주식회사를 세웠고, 동북에서 자신들 이름으로 철도를 관리했는데, 철도 관리 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해운, 광산, 삼림, 철강, 농업, 축산 등 모든 일에 손을 뻗었고, 또한 동시에 이를 대중국 정보 기관처럼 이용했습니다. 






 이 남만주 철도 주식회사, 즉 만철은 동북 남부의 거의 모든 철로를 자원했습니다. 동북 최남단의 여순과 대련을 찔러 동북 자원의 집중지인 요남과 정치 중심지인 봉천을 뚫고, 동북의 전략적 요충지인 장춘에 이르렀으며, 북쪽인 동북의 송화강 유역을 지나 북부 중요 도시인 하얼빈에까지 닿았습니다. 일본의 게걸스러운 이 거대한 세력 범위는 장작림의 통치 지역과 직결되어 있어, 그에게는 막대한 부담을 주었습니다.


 이를테면 장작림이 병사를 이동시킨다면 일본 남만철로를 이용해야 했는데, 이 운영은 일본인들의 엄격한 규정에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첫째, 봉군은 봉천 주재 일본 총영사아 관동군 사령부의 비준을 받아야만 승차가 가능했습니다. 둘째, 봉군의 군용 물자 역시 반드시 관동군 사령부의 허가를 받아야 가능했습니다. 이런 규정들때문에 일본은 번번이 봉군의 승차를 거절했고, 장작림은 원할하게 군대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일본에 굽신거려야 했으며, 그렇다면 자연히 일본에게 끌려다닐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장작림은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획기적인 발상을 해내었습니다. 

 
 외국자본이 들어가지 않은, 봉천 군벌 자신들의 힘으로 철로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동북에서의 철로는 이미 청나라 시절 이홍장이 적극 주장하여 건의를 한게 있었는데, 이런저런 문제 때문에 65km 건설 이후 공사가 중지 되었습니다. 장작림은 양우정, 오준승, 장작상 등과 함께 동상성 교통 위원회를 1924년 5월 발족시켰습니다. 봉천에서 흑룡강성의 제제합이 지역에 이르는 서간선(西幹線), 봉천에서 길림성 길림시까지 이어지는 동간선(東幹線) 두 개의 구역이 핵심 사안이었습니다.


 공사의 총 기간은 예상대로라면 7년. 그리고 오직 중국인의 손으로 이루어내면서, 향후에 있을지 모르는 일본의 간섭을 최소로 만들기 위해 공사 과정에서 일본인이나 일본과 관련된 것은 철저하게 가려서 뺐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일제는 당연히 매우 신경질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봉천 주재 일본 총영사 등은 이 공사 계획이 이치에 맞지 않다고 비난했는데, 양우정은 마찬가지로 불만스러운 태도로 대꾸했습니다.


 "중국측에는 이 계획이 없고, 만일 이 계획이 있다 하더라도 양해 바라며, 임려햘 필요는 없다."


 일본 총영사 요시다 시게루는 장작림을 직접 만나 일에 대해서 질문했지만, 장작림 역시 "그런 계획은 없다. 계획이 있다손 쳐도 돈이 없지 않은가." 하고 우물우물 발뺌했습니다. 장작림의 작전은 고의로 지연 작전을 벌이면서, 시간을 버는 동안에 공사를 다 마무리 해버리자는 식이었습니다. 일본 정부에서는 공식적으로 "제국 정부는 이 일에 대해 절대로 좌시할 수 없다." 는 항의 서한을 보냈지만, 장작림은 또다시 비슷하게 답을 했습니다.


 "이 철로는 현재 아무런 건설 공사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앞으로 봉천성 개발을 위하여 관부에서나, 인민들의 건설 제안이 있으면 내정에 관련된 일이므로 그때가 되면 당연히 형세를 참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귀국 정부가 봉천성 지방 사업에 일찍부터 개발의 뜻이 있다면, 총영사께서는 즐겁게 도와 주시기 바랍니다. 간섭의 필요는 없습니다."


 말은 이렇게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공사는 맹렬하게 진행 중이었고, 일본도 뻔히 그 사실은 알고 있는데 몇번을 항의해도 "공사는 하고 있지 않다." 라고 배짱을 부리니 방법이 없습니다. 몇번이나 장작림이나 양우정에게 제국 정부가 항의를 하고 으름장을 놓고 공갈협박도 해봐도 '너는 너고 나는 나다'는 식으로 나올 뿐이니 무슨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1927년 장작림은 추가로 길해철로(吉海鐵路)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같은 시기에 장작림은 영국과 미국에 2,000만원 상당의 차관을 빌려왔습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항만을 건설했는데, 이렇게 되면 일본이 관리하고 있던 대련항은 아무 쓸모가 없어집니다. 장작림은 새로운 이 호로도항을, 자기들 봉군만이 드나드는 항구로 만들고 자신들이 만든 간선철로와 연결하여 해상 교통 운송망을 형성하려고 시도하는데 이릅니다.


 일이 이렇게까지 이르자 일본 정부는 정말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고, 1927년 6월 27일 동경의 외무성 관저에서 일본 수상 겸 외상인 다나카 주이치 주재로 동방회의를 열었습니다.


 Koumoto Daisaku.JPG

고모토 다이사쿠


 이 회의에는 정무차관 모리가쿠, 일본 주중국 공사 요시자와 겐기치, 주 봉천 총영사 요시다 시게루, 관동군 사령관 무토우 노부요시, 관동청 장관 고다마 히데오, 만철 사장 야마모도 조타로, 참모 차장 미나미 지로우, 조선 총독부 총감 야마가타 이사부로 등 일본의 고위층 관료들이 참가하였고, 훗날 장작림에게 일을 저지르는 고모토 다이사쿠(河本大作)도 있었습니다.


 회의는 6월 29일부터 7월 4일까지 무려 다섯 차례나 계속해서 이어졌습니다. 중국 동북에 관한 일이 가장 큰 안건이었고, 가장 큰 문제가 장작림이었습니다. 관동군 사령관 무토우가 이렇게 발언했습니다.


 "만몽의 문제는 무력 해결 이외 보통의 외교적 수단으로는 방법이 없습니다."


 토론 후에 일제는 장작림에게 더욱 압력을 가하기로 하였고, 말을 듣지 않으면 무력으로 몰아낼 결의까지 했습니다. 회의가 끝난 후 일본 주중국 공사 요시자와가 소위 '만몽각서'라는 것을 들고 장작림에게 제출했습니다. 알아서 행동하라는것인데 장작림은 마찬가지로 자신은 모르는 일이니 양우정에게 가서 물어보라고 했고, 양우정에게 가니 양우정은 이 일은 자기가 할 일이 아니고 동북 지방 정부 당국과 해결해야 된다는 식으로 빙빙 돌아가기만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이 '만몽 각서' 에 대한 소문이 민간에 퍼져 동북의 수많은 단체들이 반일을 내세우며 일본을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측에서 보기에 일부러 소문을 내고 이런 소란을 부추기는것이 다름 아닌 장작림이었습니다. 빙빙 돌리던 끝에 나중에는 인민대중의 힘까지 빌려서 일본의 요구를 묵살해버리는 것입니다.


 일본은 전전긍긍했고, 당시 다나카 수상은 난국을 돌파하려고 자신의 친구 야마모토 조타로를 현장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장작림 주변에 있는 일본 고문관 들을 이용했는데, 실상 이 사람들은 장작림의 사정을 정탐하고 일본에 보고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야마모도는 이런 인물들을 이용해서 넌지시 장작림에게 일본의 계획을 설명하고 서명하도록 요구했습니다. 그 계획이란 일본이 조선과 중국 동북을 함께 연결하는 것이 주요 골자였는데 장작림은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것은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으로 얻은 철로가 아니지 않은가?"


 그러면서 접수할 의사를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은 장작림이 가장 두려워 하는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만일 이 계획이 동참하지 않는다면, 일본군은 봉군의 적인 장제스를 도울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장작림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었습니다.



 1937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된 장제스, 쑹메이령 부부



 다른 문제는 배짱을 부릴 수 있다쳐도, 이 문제만큼은 장작림도 어쩔수가 없었습니다. 아무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장작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결국 회담을 열었고, 일본이 제안한 문서에 서명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서명이었습니다. 장작림은 일본이 제시한 서한에 친필로 열(閱) 자 라고만 작성했습니다. 이것은 보았다는 소리지, 비준 동의를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일본측은 사정도 모르고 좋아서 돌아갔는데, 이는 장작림의 교활한 수단에 제대로 당해버린 것입니다.


 일본은 본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은 길회선(길림에서 조선 북부 회령), 연해선(길림에서 해림), 길오선(길림에서 오상), 장대선(장춘에서 대뢰), 조색선(조남에서 색륜) 등 철로를 사방으로 건설하려고 했으나 장작림이 온갖 말도 안되는 핑계와 막무가내로 조약을 이행하지 않자 분노가 극에 달했습니다. 심지어 장제스의 북벌군에 장작림이 상대도 안되고 당하고 있을때, 500만원의 차관을 주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장작림은 이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습니다.


 마침내 일본의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장작림은 겉으로는 일본의 앞잡이로 활동했지만, 실제로 일제에 도움을 준 것은 전무한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몇번을 약속해도 무시했고, 조약을 수십번을 맺어도 유야무야 하기만 했습니다. 서명도 하지 않으면서 이미 약속한것도 무르기만 했습니다. 


 장작림에 대한 장제스의 승리가 거의 확실해진 5월 17일 무렵, 일본에서는 장종창이 수십 명의 일본 교민들을 살해했다면서 책임을 지라고 요구하고 제안하는 문서에 서명할것을 말했습니다. 최악의 상황에 이런 핍박을 받자 장작림은 담배를 뻐끔거리면서 피고 있다가, 갑자기 대노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담뱃대를 땅바닥에 내던져버리고는 분노한 얼굴로 소리쳤습니다.


 "이번 일은 보고도 없었고 조사도 없었다. 나보고 책임을 지라니, 빌어먹을! 어쩌란 말이냐! 난 몰라! 자자손손 얼굴 못 들고 다닐 일은 할 수도 없어!"


 그리고는 일본측 사람을 내버려둔채 집견실을 나가버렸습니다. 6월 2일 무렵, 장작림이 북경 철수 전문을 통지하자 일본의 중국 주재 요시자와 공사가 장작림을 급히 방문했습니다. 요시자와는 매국 밀약에 장작림이 서명만 하면 장제스를 격파하는데 도움을 주겠다고 권유했습니다. 그리고 양자강을 사이로 둘이 세력을 나누면 될것이며, 대신에 여러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장작림은 장제스를 물리쳐 주겠다는 그 제안까지 무시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국내의 문제일 뿐인데 귀국이 어째서? 내가 비록 남군(북벌군)에게 무장 해제를 당해도 귀국의 도움을 빌려 나의 이 정부를 요구시키고 싶은 생각 따윈 없습니다!"


 그리고 집견실에서 나가더니 맞은편에 있는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마치 다 들으라는듯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혼잣말을 했습니다.


 "일본인은 친구가 될 수 없다! 남의 집이 위급할 때 목을 조르니 말이다! 나 장작림은 이런 방법은 정말 싫다! 나는 동북인이야. 동북은 내 고향이고, 조상의 묘소가 있고, 부모의 묘소가 다 있다. 내가 동북을 팔아먹을것 같아? 흥, 나 장작림이가, 매국노 욕을 다 먹으란 말인가! 난 두려울 것도 없다! 빌어먹을, 다 필요 없다!"


 그러면서 반시간 동안 일언반구도 없더니 한참 후에 장작림의 부하가 와서 요시자와 준 문서들을 건네주며 말했습니다.


 "대원수께서 오늘은 매우 바빠서 만날 수가 없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문서에는 죄다 열(閱) 자만 써있을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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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김종현2 | 작성시간 12.07.24 아무 배경지식 없이 장작림에 대해서는 매국노 친일파 이생각만 하고있었는데
    정말 어마어마한 사람이었군요 ㅎㄷㄷ
  • 작성자▶◀ 치우승천 | 작성시간 12.07.24 뿌리까지 매국노는 아니었네요.
  • 작성자2Pac | 작성시간 12.07.24 오히려 위급할 때 저렇게 거절하다니 대단하군요....
  • 답댓글 작성자카이사르씨 | 작성시간 12.07.24 석경당이나 53계 같은 친구보다는 낫네요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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